2000년 경 사진잡지 기사2009/01/21 314
이시우
대인 지뢰 사진가
가을엔 바람이 살랑 불어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가 하면, 푸른 하늘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가슴 따뜻한 사람과 얘기하고 싶다. 그렇게 따뜻한 눈빛과 마음, 그리고 열정을 지닌 대인지뢰 사진가 이시우씨(34세)를 만났다.
이시우씨는 88년도 신구전문대 사진과에서 사진보다는 통일운동하는 데만 관심을 둔 학생으로 급기야 제적을 당했다. 그 후 노동현장에 뛰어 들어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다녔다. 그러던 중 아는 사람 몇명이 모여 사진 소모임을 만들었고, 정치적 구호만 외치는 것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무엇인가 해 보고 싶어 비무장지대를 다니기 시작했다. 사진작업을 하기보다 답사를 위주로 다니다가 한번은 지뢰피해자들이 사는 마을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사진기를 잡게 한 계기를 만났다.
마을에 도착해 처음 만난 할머니의 네 식구 이야기.
“식구 4명이 모두 지뢰 피해자였어요. 큰아들과 큰손자는 노루를 잡으러 갔다가, 작은 아들과 할머니는 약초 캐러 갔다가 지뢰를 밟았어요. 그래서 두 사람이 목숨을 잃고, 두 사람만 남게 되었죠. 이때 그 할머니를 보면서 강하게 스치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돕는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뢰 피해자에 대한 보상책은 전혀 없고, 오히려 다친 것이 알려지면 지뢰피해 지역을 폐쇄해야 하므로 그들의 농작지와 생계 유지할 공간을 빼앗겨야만 했다. 이런 현실에서 그들을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그들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지뢰를 찍는 작업은 그의 무수한 경험과 직감으로 지뢰를 피해가며 할 수 있지만, 지뢰 피해자가 상처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좀처럼 허락치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2년 동안 사진은 한 장도 안 찍었어요. 대신 먼저 그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죠.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들을 찾았고, 법적 소송을 대신해 드린다든지 하는 일들을 도와드렸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 주시더군요.”
이시우씨는 지난 9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조디 윌리암스를 초청했을 때 한국 대인지뢰 대책회의를 결성했고, 대인지뢰 피해 실태 조사를 위해 길 안내 및 피해자 소개를 맡았었다. 또 ‘금파리 지뢰 마을 이야기’ 슬라이드 쇼를 기획, 연출을 했었다.
“글에는 문체가 있듯이 사진에서도 그 시대의 사체(寫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활의 발전이 사진의 발전으로 가는 완성된 사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지뢰 피해자를 찍는 것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하고 있어요.”
현재는 지뢰 피해자를 찍는 일 외에 비전향 장기수들과 베트남 호치민 주석의 유적을 찾아 사진을 찍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된 이후의 사회는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통일을 이룬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무엇을 배우고, 얻을 것인가. 그리고 통일되는 과정에서 사진이 앞으로 어떤 사체로 되어갈 것인가를 주로 공부합니다.” 또한 2002년 평화 예술인 국제 연대(PAAI)에서 개최할 평화 예술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 일에는 사진기획자가 되고 싶은 그의 계획이 담겨 있다.
총은 적과 아를 구별합니다.
지뢰는 적과 아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총은 전시와 평시를 구별합니다.
지뢰는 전시와 평시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총은 선과 악을 구별합니다.
지뢰는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시우씨의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中에서)
통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 지금, 통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대인지뢰 피해자들을 묵묵히 돕고 있는 이시우씨의 작업은 앞으로 크게 사회적 주목을 받게 될 것같다. ●
대인 지뢰 사진가 이시우씨.
지뢰로 발목을 잃은 조만손씨. (파주 금파리, 1997)
비무장 지대에 묻혀 있는 지뢰(철원 대마리, 1998)
글·양내임 (본지 편집부 기자)
사진·김종수 (본지 사진부 기자)
2000년 11월호
2004.07.28 1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