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미래, 독립운동가 리더십에서 찾자. 도외지역 답사 ‘통일국가 건립’ 의제 던진 첫 사건 … 정명해야-제주투데이2022.10.20
“4·3의 미래, 독립운동가 리더십에서 찾자”
도외지역 답사 ’4·3평화통일아카데미’ : 강화중앙교회이시우 “‘통일국가 건립’ 의제 던진 첫 사건 … 정명해야”
기자명박지희 기자bathi@ijejutoday.com 다른 기사 보기
• 입력 2022.10.20 17:38
인천 강화군에 위치한 강화중앙교회. (사진=박지희 기자)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빨간 벽돌로 이뤄진 서양식 건물이 웅장함을 드러냈다. 1900년 창립된 강화중앙교회는 민족운동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앞장선 이들이 모인 곳이다.1907년 강화진위대가 강제 해산되자 의병이 일어났고, 이와 연루된 교인들은목숨을 잃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동휘와죽산조봉암도 이곳 출신이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하고 제주통일평화교육센터가 주관한도외지역 답사 ’4.3평화통일 아카데미’가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진행했다.
『민통선 평화기행』,『제주오키나와 평화기행』저자 이시우 사진작가는 답사 첫째날인 14일 인천 강화군강화중앙교회에서 ’4.3과 제국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그는 이동휘와 조봉암의 리더십과 의제설정 능력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모범 선례를 통해 제주4·3에 대한 의제를 전략적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가 열린 당시 사진이 강화중앙교회에 전시돼 있다. 이승만(가운데)의 곁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가 서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이동휘 선생이독립운동을 펼친 과정에서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한반도의 문제를 한반도라는 틀 안에서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계적 차원의 의제를 조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야만 독립할 수 있다는 의식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뒀죠. 100년이 넘은 역사이지만 이러한 리더십은 조선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에 미국이 있었던 당시 우리나라는 선교를 펼쳐나갔다. 미국에게 독립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하지만 1907년을 기점으로 희망이 꺾였다. 미국이 헤이그평화회의를 통해 ‘우리나라를 지지해주면 조선과 필리핀을 넘겨주겠다’고 일본과 협상을 하며 한일합병조약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반미운동이 시작된다.
특히 이동휘는 운동가 중에서도 유능한 지도자로 꼽힌다. 기독교 장로였던 그는 만주에서 연설을 벌이며 독립운동정신 고취를 주도했다. 여성을 독립운동의 주체로 만든 것은 가장 큰 역할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만주에서도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의 마수가 확대되자 1915년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가 머물던 때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도 모스크바 지역에서 일어난 시기다. 등지에서 활동하다 붙잡힌 그는 옥살이를 하던 중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만나게 된다. 이는 이동휘가 항일독립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볼셰비키 정권의 원조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설했다. 바로 한인사회당이다.
그러다 1919년을 기점으로 3.1 운동이 전개되면서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조직됐다. 이동휘는 여기서 국무총리직을 제안받았지만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신이 정당의 당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수락했다. 일본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 모아져야만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고 판단해서다. 비록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했지만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반일민족독립운동을 우위에 놓고 있었다.
죽산 조봉암의 사진이 강화중앙교회에 전시돼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조봉암 선생은 ‘핵’이라는 의제를 1950년대에 던질 수 있던 만큼 세계를 보는 안목이 빛났던 인물이에요. 이동휘와 조봉암은 노선의 차이는 있었지만 개인과 집단을 고취시키는 능력이 월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899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죽산 조봉암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여러 직업 전선에 뛰어든 인물이다. 강화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유인물을 돌리는 방식으로 참여했다가 붙잡혀 1년간 투옥했다.빈털터리 상태로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던 중우리나라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 아나키즘에 심취했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관념적 유희에 그쳐 실망하게 된다. 그는 보다 강력한 조직력이 있어야만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다고 판단, 사회주의로 전향한다. 그러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볼셰비즘의 영향으로 북성회를 조직, 항일운동을 하다가 1922년 귀국해강화도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박헌영과 사회주의운동 단체인 조선공산당을 1926년 꾸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창당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로 비밀리에 파견되는 등 결정적 역할을 한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를 겸직하기도 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일으켰다. 이 과정은 주목할만 하다. 이미 일본과 러시아, 중국 등의 농지개혁 문제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던 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전국을 순회하며 현지 주민들의 입장을 빠짐없이 듣고 주민간 토론의 장을 열었다. 이는 1년 내내 신문이 도배되는 등 농지개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다.
또 주목할 점은 1957년 진보당 창당 과정이다. 이 작가는 “조봉암의 탁견은 진보당 강령에 핵 문제를 포함시킨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며 “창당 당시 후배들이 강령을 만들어 찾아오자 ‘한 가지만 추가하자’며 강령 1호에 핵 문제를 넣었다”고 설명했다.
’4.3평화통일 아카데미’가 지난 14일 열린 가운데, 『민통선 평화기행』,『제주오키나와 평화기행』저자 이시우 사진작가는 답사 첫째날인 14일 인천 강화군강화중앙교회에서 ’4.3과 제국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이처럼 의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도 마찬가지죠. 4.3은 특법법 제정 등 표면적 문제해결에 대해선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 목표인 통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목표와 멀어지고 있어요.”
이 작가는 그러면서 4.3항쟁의 정식 명칭을 4.3 ‘통일운동’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예전에는 4.3을 반란이나 사건으로 부르다가 현재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4.3항쟁이라는 이름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면서 “‘항쟁’이라는 단어는 반란과 폭동의 다른 모양새의 이름일 뿐이지 성격은 같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정통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폭동·내란으로 규정되고, 주체를 달리 하면 항쟁으로 정의된다. 혁명도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기에 같은 맥락”이라면서 “하지만 1948년 4월 3일에는 정통정부가 없었다. 그 시점에는 항쟁과 내란, 폭동 등 그 어떤 것도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냈다.
또”헌법재판소는 2001년 9월 4·3 당시 진압에 직·간접 관련 있는 인사들이 제기한 4·3특별법 위헌 청구 소송을 각하하면서 희생자 가운데남로당 간부, 무장봉기 주도자 등을 희생자의 범주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단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결”이라면서 “결정문을 보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한다’고 명시돼 있는데, 당시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기 전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 작가는 “4.3이 일어난 이유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곧 통일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라면서 “달리 말하면 4.3은 ‘통일국가’라는 의제를 처음으로 던졌던 첫번째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동휘와 조봉암 선생 리더십은 전혀 새로운 길이 아니다. 이러한 유전자가 이미 우리에게 내재돼 있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하고 제주통일평화교육센터가 주관한도외지역 답사 ’4.3평화통일 아카데미’가지난 14일 진행된 가운데, 이시우 사진작가가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4.3평화통일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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