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보기드문가족사진집 – ‘구연우구동훈가족사진집1′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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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가족사진집
이시우
사람의 뛰어난 능력은 변화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매번 찾아오는 계절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지만 우리는 어떤 시간을 가을이란 한 단어로 통칭한다.
‘가을 어느날’에서 ‘가을’은 변하지 않음이며, 동일성이자, 일자이고, ‘어느 날’은 변화함이며, 다양성이자, 차이이다. 우리는 이 사진집에서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동훈의 모습을 만난다. 그와 더불어 변치않고 면면히 이어지는 동훈의 동일성을 발견한다.
포유류는 육지에 살거나 바다에 살거나 생존장소로 구분되지 않는다. 태어나서 상당기간 가슴에 안긴 채 살아야 한다면 모두 포유류다.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행위로 구분되는 류인 것이다. 쥐와 고래가 전혀 다른 외형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같은 포유류인 것은 가슴 때문이다. 가슴에서 자라나 가슴으로 키우기에, 가슴의 기억이 유전된다.
무엇인가를 가슴으로 끌어안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안는 그 순간만큼, 안은 것은 오직 하나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안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 만큼 가슴은 나머지 것을 등져야 한다. 가슴의 반대편엔 등이 있기 때문이다. 안는 주체는 흔히 자기이기에 안기란 통상 소유하기이다. 그러나 안기위해 자기마저 포기하면 순수한 안기만이 남는다. 주체는 내가 아니라 안기자체인 것이다. 명사인 나는 실체일 뿐 동사인 ‘안다’만이 주체이다. 나를 포기해야하는 안기란, 즉 주체되기란, 안정되고 영원하길 바라는 실체에겐 공포이다. 실체인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내가 무엇을 안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마저 포기하고 끌어안는다.
이웃인 김정택목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 아이들과 잠들어 있는 집에 원인모를 화재가 나서 엄마는 큰아들을 안고 나오고 시력이 많이 좋지않은 아빠는 작은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심한 화상을 입어 중환자실에서 3주간 치료후 주님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그 당시 작은 아들 동훈이에게 화상의 흔적은 살짝 보였다. 분명 아버지는 자식들이 불에 데이지 않도록 가슴에 안고 화염을 뚫고 나왔을텐데, 그래도 아이들에게 화마의 열이 전달될 정도였다면 아버지는 그 열을 어떻게 견뎠을까’
아버지는 불 속에서 동훈을 끌어안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가장 중요한 것을 안기위해 자신마저 등졌듯이, 어머니 역시 아이들을 끌어안고 자신을 등지며 살아온 징후가 이 사진집에서도 드러난다.
사진은 동사를 존재사로 만드는 매체이다. 존재사란 내가 붙인 이름이다. 움직임을 표시한다는 동사 중에 오직 ‘있다’ ‘be’ ‘sein’ ‘etré’만이 움직임을 표시하지 않는다. 움직임을 표시하지 않는 동사이기에 존재사인 것이다. 사진은 ‘연주하다’를 ‘연주하고 있다’로, ‘울다’를 ‘울고 있다’로, ‘웃다’를 ‘웃고 있다’로 ‘걷다’를 ‘걷고 있다’로 만든다.
동훈이 걷고, 울고, 웃고, 연주하는 것을, 사진은 걷고 있고, 울고 있고, 웃고 있고, 연주하고 있는 것으로 만든다. 수많은 다양함과 변화가 사진에서는 오직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진을 보며 하모니카를 불어보자. 있음을 연주하자. 하나의 있음을 연주할 때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색의 연주가 나올 것이다. 연주하다는 동사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있음을 사진으로 찍어보자. 있음을 색으로, 형태로, 의미로, 찍고, 해석하고, 편집한다. 있음은 존재사이지만 ‘찍다’와 ‘편집하다’는 온전히 동사이다.
오직 하나의 있음은 동사와 만나 다양함으로, 변화함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가을 어느날’로 돌아가 보자. 많은 ‘어느 날’을 하나의 ‘가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의 ‘가을’에서 많은 ‘어느 날’을 찾아낼 수 있는 것 역시 사람이다. 이 땅의 부모들이 다 그렇지만, 이 땅의 어느 부모도 같은 부모는 없다. 가을로 환원되지 않는 어느 날이 있듯이 부모의 이름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나도 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4)
많은 ‘어느 날’은 ‘가을’ 한 단어로 수렴된다. ‘가을’은 수많은 ‘어느 날’로 확산된다. 그리하여 숙명적으로 가을만 있거나 어느 날만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을도 어느 날도 ‘가을 어느 날’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대상화란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다. 동물도 의식을 갖는다. 그러나 사람은 의식을 바라보는 의식을 갖는다. 자기의식이다. 의식이 만든 집착을 깰 수 있는 반성이다. 주체다. 동물도 자기를 실체로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체를 깨는 주체가 되긴 어렵다. 대상화란 자기가 깰 자기를, 자기의식이 깰 의식을, 물건처럼 외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대상화시킬 수 있을 때 주체가 된다. 그것이 남이 아닌 나에 대한 대상화일 때는 더욱 그렇다. 나를 나 아닌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글과 사진의 위대함은 나를 나로부터 거리두기에 있다. 저자의 사진집 작업이 성공했다면 이전의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닐 것이다.
가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혹은 가족사진집의 성공을 위해 저자는 200쪽으로 기획했던 책을 100쪽이나 초과하게 되었다고 했다. 모든 증명은 강박이다. 증명불가능한 것에 대한 증명의 시도는 더더욱 강박이다. 성공을 목적함은 강박이다. 성공불가능한 것을 목적함은 더더욱 강박이다. 증명하려 할수록 반박되고 성공하려 할수록 실패한다.
실패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은 실패가 목적일 때가 있다. 떠나보내기 싫고, 내려놓기 싫고, 분리하기 싫을 때, 그럴 용기가 없을 때 창작자는 실패를 의도한다. 의도된 실패는 주체의 균열‧흔들림을 보여주는 징후요 증상이다. 창작자는 당연히 성공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패를 의도한다.
그러나 성공을 목적할 때만 진정한 실패가 가능해진다. 최선을 다해 간절하게 정성들이는 자만이 참된 실패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실패할 것을 두려워해선 안된다. 실패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사진집의 제목은 가족사진집1이다. 가족사진집2의 참된 실패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