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의 미학관2 – 강화시선 14호 2022 pp.72-84
나의 미학관2
사진가 이시우
바벤하우젠 미포병부대 훈련장에 다연장로켓(MLRS)의 발사관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핵무기의 파괴력을 대신할 무기로 제작되었다는 MLRS. 이젠 관만이 남아 가을빛에 묻혀 있었습니다. -독일 바벤하우젠
자기소개서를 써달라는 청탁이 있었다. 나도 내가 궁금했다. 15년 전 국가보안법재판에서 「나의 미학관」을 법원에 제출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의 미학관」을 다시 써보기로 했다. 변한 게 뭐고 변치 않은 게 뭔지 나도 알고 싶어졌다.
원숭이 똥구멍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잊히지 않는 노래가 있다.
‘원숭이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자.
원숭이똥구멍은 빨갛다. 빨간 것은 사과다. 사과는 맛있다. 맛있는 것은 바나나다. 바나나는 길다. 긴 것은 기차다. 기차는 빠르다. 빠른 것은 비행기다. 비행기는 높다. 높은 것은 백두산이다. 그러므로 원숭이똥구멍은 백두산이다.
원숭이똥구멍과 사과와 바나나는 존재다. 빨갛다와 맛있다와 길다는 속성이다. 이 노래는 ‘존재는 속성이고 속성은 존재다’라는 논리의 연쇄이다. 그 속성은 수많은 존재의 속성 중 우연적으로, 자의적으로 선택된 한 속성이다. 원숭이똥구멍의 여러 구조, 기능, 속성 중 빨강이란 색은 중요한 속성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우연히 선택된 속성이다. 그런 빨강이 주어가 되자 이번엔 사과라는 존재가 우연적, 자의적으로 선택된다. 사과가 빨강을 대표하지 않아도 크게 어긋난 것 같지 않다. 맛있는 것과 바나나의 관계도 억지스럽지 않다. 검정과 하양이란 색으로부터 사과가 선택되기는 어렵고, 쓰고 짠 것으로부터 바나나가 선택되기는 어려우므로 이 선택은 조건의존적이다.
연緣하여 일어난다는 불교의 연기설이라고 해도 좋고,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라고 해도 좋고, 스피노자의 변용(affectus)이라 해도 좋고, 니체의 수동적 종합이라 해도 좋고, 들뢰즈의 배치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의 연쇄는 한 단계만 건너가도 금방 이상해진다. ‘원숭이똥구멍은 맛있다’거나 ‘사과는 길다’고 하면 수긍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유사성, 우연성, 자의성, 외부의존성으로 이어지는 선택의 연쇄는 결국 ‘원숭이똥구멍은 백두산’이란 결말에 이른다. 이는 한바탕 웃음을 주지만 논리적으로는 크게 잘못된 것임이 드러난다. 이 연쇄는 새로운 조건과 연결될 때마다 무한히 진행된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사상이 된 이 노래는 논리가 아니라 놀이다.
쥐사위찾기
귀한 딸을 둔 아버지 쥐는 자기 딸 만큼은 찌질한 쥐와 혼인시키기 싫어서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감을 찾아 나선다. 해에게 찾아가니 “잘 왔다. 내가 제일 강하다. 그런데 구름이 나를 가리면 그 땐 나도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이번에는 구름을 찾아갔다. 구름을 만나니 “잘 왔다. 내가 태양도 단번에 가릴 수 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그 땐 나도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람을 찾아갔다. 바람을 만나니 “잘 왔다. 내가 구름을 단번에 날릴 수 있다. 그런데 돌부처 앞에서는 나도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이번에는 돌부처를 찾아갔다. “잘 왔다. 아무리 강한 바람도 나를 쓰러뜨리진 못한다. 그런데 쥐들이 내가 선 땅 밑에 구멍을 파면 나도 쓰러지고 만다.” 결국 쥐가 제일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쥐아버지는 쥐구멍으로 돌아와 쥐사위를 맞아 딸과 혼인시켰다.
단순반복되는 이 이야기의 시작은 자기부정이다. 자기세계에 갇혀 살던 쥐가 자기 세계 밖을 향해 나아갈 결심을 하면서 시작된다. 강함이라는 하나의 속성만을 추구하며 여러 존재를 만나는 과정은 끝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다. 해가 제일 강할 것이라던 신념을 해를 만나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강해보이던 해에게도 대립되는 속성, 즉 구름이란 외부조건에 의존하는 속성이 있음을 파악한다. 기존을 신념을 버리며 새로운 반성에 따라 구름과 바람과 돌부처를 찾아간다. 구름은 해에게 제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구름과 해, 바람과 구름은 유사관계가 아닌 대립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바람과 해, 돌부처와 해는 아무런 대립관계도 형성하지 않는다. 한 단계만 건너뛰면 무관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오직 하나, 강함을 찾는 쥐 주체만은 어떤 조건의 변화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기부정하며 떠났던 자기에게로 복귀한다. 자기에게로 돌아왔을 때 자기도 모르던 측면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발견한다. 애초 그런 자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볼 줄 알았다면 굳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행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부정의 과정은 결국 자기로 돌아오기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원숭이똥구멍 노래에서는 오직 과정만이 중요하다. 쥐사위찾기 이야기에서는 오직 결과만이 중요하다. 전자가 무한반복 한다면 후자는 자기복귀 한다. 전자를 악무한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진무한이라고 한다.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오딧세이의 서사라고해도 좋고, 규정은 곧 부정이라는 스피노자의 사상이라해도 좋고,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이라고 해도 좋겠다.
가슴
등의 반대편에 가슴이 있다. 우리 몸에는 많은 등이 있다. 눈등, 귓등, 콧등, 입증, 손등, 발등이 그것이다. 그 반대편을 가슴이라고 해보자. 눈가슴, 귀가슴, 코가슴, 입가슴, 손가슴, 발가슴이 된다. 가슴은 안는 것이다. 세계를 끌어안음으로서 세계는 몸이 된다. 끌어안지 못한 세계는 몸이 되지 않는다. 자외선이나 적외선은 눈가슴으로 끌어안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각이미지로 우리 몸에 기억‧저장되지 않는다. 기억은 가슴의 품이다. 기억되지 않은 것은 지각되지 않는다. 기억없이는 감정도 없다. 품의 크기만큼 세계를 안을 수 있기에 그 나머지의 세계는 모두 등지는 것이다. 안음은 곧 등짐의 반대편이다. 등진세계는 크고 안은 세계는 작다. 안음으로서 규정되고 등짐으로서 부정된다.
자외선과 적외선은 눈가슴에 안기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 몸의 보존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이다. 등진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을 끝없이 가슴으로 안기위해 가슴의 품을 넓힌다. 눈가슴만으로는 자외선을 안을 수 없지만 자외선탐지기를 이용하면 눈가슴으로도 안을 수 있다. 가슴의 매개물인 한에서 자외선탐지기 역시 가슴이다. 가슴자체가 매개이기에 매개는 가슴이다. 가슴의 기능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가슴은 주체이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결이다. 실체는 주체에 의해 끝없이 재구성된다. 결은 가슴에 의해 재구성된다. 가슴으로 끌어안은 것만이 결이 된다.
결
물결은 물을 눈가슴으로 끌어안아 생긴 상이다. 물을 눈가슴으로 끌어안는다는 것은 감정과 지각과 욕망과 반응행동이 거의 총체적‧동시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눈가슴은 끝없이 변형된다. 물은 눈을 통해 뇌의 감각피질에 보내져 임시로 저장되고 이는 다시 해마로 보내져 이전에 기억된 물정보와 비교되어 공통특성을 추출하여 물이라는 신호정보를 형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가 표상(imago)이다.
물 자체를 복사해오는 게 아니라 갈증으로 욕망하고, 갈증해소후의 상태를 기억해내고 자신만의 물의 표상을 만들어낸다. 표상은 물 자체와는 다른 변형된 물이다. 물은 물의 표상으로만 눈가슴에 안긴다. 안기지 못한, 즉 표상되지 않은 물은 등진다. 그러나 갈증이 아니라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고자할 때, 먹는 물은 보는 물로 또다시 변형된다. 변하지 않고 고착된다면 살아있는 주체가 아니다. 임시로 고착되고 고정화되고 대상화되는 것이 실체로서의 결이다.
결은 가슴에서 탄생한다. 물결은 물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가슴들이 만들어 낸 표상이다. 결은 나의 가슴에 안긴 것의 다른 이름이다. 안는 동사가 선행되어야 안긴 것으로서의 결이 명사로 인식된다. 가슴이 주체라면 결은 실체이다. 실체는 주체에 의해 부정된다.
디지트(digit)를 기본단위로 하여 만들어진 가상세계를 메타버스라고 한다면, 신경(neuron)을 기본단위로 하여 만들어진 가상세계를 뉴로버스라고 할 수 있겠다. 고골안경을 쓰는 순간 메타버스의 세계가 열리듯, 가슴으로 끌어안는 순간 뉴로버스의 세계가 열린다. 이 세계는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세계이다. 꿈이 바로 독립된 채로 작동하는 뉴로버스의 세계이다.
착시를 이용한 매직아트는 우리의 뇌가 세계를 조작해서 바라보는 증거이다. 그러나 달리보면 조작해서라도 세계를 사실대로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세계와 세계상이 차이 날 때 사람은 절대 가만있지 않는다. 자기를 바꾸든 세계를 바꾸든 일치시키려고 의식‧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세계와 세계상이 같을 수 없음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칸트라면, 같아질 수 있다고 도전하는 것이 헤겔이다.
< 글 후반부는 첨부화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 나의 미학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