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소리-미군이 막더라도 평화의 배는 띄울겁니다.2005/06/15 718
“미군이 막더라도 평화의 배는 띄울 겁니다”
[인터뷰] ‘한강 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나선 사진작가 이시우
이동권 기자
http://www.voiceofpeople.org/
강화도 밤안개가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시우 사진작가의 미소 또한 그렇다. 먼 여행과 함께 만난 사람은 마음속에 커다란 그리움의 구멍을 남긴다.
△이시우 작가는 ‘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기’는 “남과 북의 대치라는 역사에서 화해와 역사를 열어갈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며 분단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던 금기를 털어내는 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중의소리
마늘장, 간장, 김치. 이시우 작가는 늦은 시간 배가 고프겠다며 밥상을 내놓았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음식이었다. 기자는 배가 고픈 나머지 허겁지겁 두 공기를 비웠다. 그가 “반찬이 없어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면서 한 공기를 더 얹어온 탓이다. 그는 또 식사 후 밥그릇에 따뜻한 물을 붓고 음식 찌꺼기를 씻어내는 듯 빙빙 돌려가며 물을 마신다. 꼭 그 모습이 스님이나 수도자처럼 보여 불교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질기고 기름진 음식들은 오랫동안 씹어 맛있고 포만감을 느끼게 하나 속은 불편한 법이다. 그의 애정이 어린 밥상을 받고 나니, 그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됐다. 소박하고 온유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그의 성품에 먼저 머리가 숙여진다.
하나에만 집중하는 순백의 평화주의자
△사진작가 이시우 ⓒ민중의소리
이시우 작가의 집은 책으로 도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책장에는 전쟁과 평화에 관한 책들로 가득하다. 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 보려면 그 사람이 읽었던 책을 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순백의 평화주의자’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강화도에서 일본 오끼나와까지 걷기도 했으며, 한국과 일본의 미군 주둔지에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그의 사진 작품 ‘비무장지대’, ‘대인지뢰’, ‘끊긴 철길’ 등이나 일상을 채우는 일들을 보면 인류의 평화를 바라는 한 인간의 바람이 모두 거기에 머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저는 성품이 느릿느릿합니다. 판단이 빠르지 못하지요. 회의를 해도 듣는 편이며 이리저리 공부를 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시간도 많죠. 그러나 결심이 서면 꼭 합니다. 하나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는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몰두라는 단어가 기묘하게 들릴지 모르나, 더할 나위 없이 마음씨가 곱고 정숙하면서도 한가지 일에 빠지면 놀라운 집중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다. 문학, 미술, 음악 등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고집이 센 편인데, 그는 그러면서도 무척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지만, 일하는 면에서는 지나치게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예운동을 할 때는 풍물을 하면 맺힌 게 풀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풀리지 않습니다. 요즘은 산만하거나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면 붓글씨를 씁니다. 잘은 못 쓰지만요. 붓글씨를 쓰면 흩어졌던 마음이 모이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수양하는 마음 같아요.”
한강하구는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민간선박이 항해할 수 있는 곳
이시우 작가는 기자에게 “한강 하구를 아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모른다고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철책 사이에 있는 한강 하구는 비무장지대가 아니다”면서 “한강하구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겠다”고 대형 지도를 챙겨왔다.
그는 강화도 위쪽,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한강 하구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조강이라고 했습니다. 외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는 모든 뱃길이 모여있는 곳이었죠.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정전협정에 따라 강화에서 서울에 이르는 강의 남과 북 양측에 철책선이 세워져 아무도 가지 못하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제적 항구도시였던 서울이 분단의 청책에 가로막혀 강변도시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한강하구는 비무장지대입니다. 통일전망대를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은 임진강과 한강의 중간에 군사분계선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전협정 어디에도 한강하구에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있다는 말은 없습니다. 정전협정 1조 5항을 보면 ‘한강하구 수역은 쌍방 민간선박의 항해에 대해서는 개방한다’라고 있습니다. 비무장 지대라는 말은 중무장 지대라는 말이 아닙니다.”
“군사분계선 남쪽 2km에 이르는 비무장지대의 관리권은 유엔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강하구는 다릅니다. 민간선박의 항행규칙을 정할 수 있는 권한만 있을 뿐입니다.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과 물자가 유엔사령관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한강하구는 민간인들의 자유왕래를 위해서 개방된 해방구입니다.”
7월 27일, ‘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 열린다
△사진작가 이시우 ⓒ민중의소리
한강하구에 뱃길이 열리고 다리가 놓으면 인천공항에서 개성까지 1시간 거리다. 생각만 해도 감동이 복받쳐 오른다. 남북의 배가 한강하구를 오르내리며 손 흔들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1990년 11월 24일, 분단 이후 최초로 한강하구에 배가 지나갔습니다.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 건설하던 자유로 공사를 위한 작업선이었죠. 유엔사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씨가 유엔군사령관을 설득해서 이뤄진 일입니다. 이 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강하구는 군사분계선이나 비무장지대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7월 27일 열릴 예정인 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를 소개했다.
“한강하구는 전쟁 전에 소금이나 식량을 실은 강화 시선배가 선단을 이루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로 들어갔던 길입니다. 저는 이 한강 하구를 바라보면서 뭔가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무장지대가 아닌 이 하구에 뱃길을 열어보자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북방한계선 때문에 어민들도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
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는 그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이다. 많은 사람에게 분단현실과 평화의 의미를 알릴 수 있는 정말 기막힌 생각이라고 말하자 그는 쑥스러운 듯 웃다가 말을 잇는다.
“이 일은 UN사령부와 충돌하거나 법적 하자가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경의선과 동해선이 정전협정을 어기면서 평화운동의 변화를 이끌었던 일이라면, 이 일은 정전협정의 합의를 지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쉽고도 안전한 일입니다. 이는 남과 북의 대치라는 역사에서 화해와 역사를 열어갈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며 분단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던 금기를 털어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한강하구의 뱃길을 여는 최종결정권은 한국정부가 아니라 UN사령부입니다. 하지만 UN사령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다면 막지는 못하겠지요?”
그는 UN사령부가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처럼 말꼬리를 올렸다.
“이런 이유로 UN사령관을 만날 예정입니다. 만나서 설득하고 안되면 강행할 생각입니다. 미군이 막는다면 우리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강행이라는 말이 기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분명 사단이 날 것 같다는 생각말이다. 기자는 미군이 막게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시우 작가는 아직은 말할 수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홍보비디오를 만들었는데, 보여주고 싶다”면서 노트북을 꺼내왔다.
UN사 해체로 주한미군 몰아내는 전술, 필요하다
△사진작가 이시우 ⓒ민중의소리
이시우 작가는 ‘한강하구에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와 함께 UN사령부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국민들은 UN사령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면서 “주한미군 몰아내자는 운동을 하면 고개를 갸우뚱해도 UN사령부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하면 수긍한다”고 조목조목 설명했다.
한국에는 UN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가 있으며 UN사령부는 미국이다.
“첫째, UN사는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습니다.”
“둘째, UN사는 북을 점령했을 때, 북의 통치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1950년 유엔총회결의에서 UN사가 북의 독립과 통일을 책임지는 주체로 되어 있습니다. UN사의 5029작전은 북이 붕괴했을때 통치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셋째, UN사는 일본에 7개 후방기지를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주일미군 전체가 동원되지요. 주일미군은 일장기와 성조기가 올라가지만 UN사가 있는 부대는 일장기와 성조기 UN기가 함께 올라갑니다.”
“넷째, 전시에는 주일미군 뿐만 아니라 자위대도 동원됩니다. 1950년 9월 15일 요시다시네루 수상과 에치슨 국무장관이 UN군 지원에 관한 교환공문에 사인을 했습니다. 일본정부는 한국의 UN사 활동을 위해 시설과 역무를 지원한다고요. 여기서 역무는 전쟁지원을 포함한 것입니다.”
기자가 주한미군과 UN사는 어쩌면 동일한 주체를 향한 싸움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다”고 답하면서 “대중적인 평화운동의 전술적인 점도 있음”을 강조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성공회대 박성준 교수
이시우 작가가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스승이 누구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그 스승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싶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제가 집에서 오끼나와까지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성준 교수님이 영덕에서 하루를 같이 걸어주셨지요. 육십이 넘은 나이에 무리가 있었는데도 표시를 안냈습니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몰아치자, 제 마음이 불편해서 택시를 권했습니다만, 그분은 괜찮다며 끝까지 따라오셨지요. 영덕에 도착해서는 온몸이 떨려오고 녹초가 되셨는데도, 하루일지를 쓰기 위해 PC방에 간 저를 따라오셔서 일을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이렇게 후배에게 정성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대단한 분입니다. 보통 나이가 들거나 선배가 되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듣기보다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며,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데, 그분은 끝까지 얘기를 경청하고, 신중히 판단하고, 그러면서도 꿈꾸는 소년처럼 작은 것 하나에도 관심을 갖고 일을 추진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존경의 표현으로 뭔가 도와드릴 것이 없느냐고 묻자, 국제평화단체 비폭력 평화군(Non-Violent Peace Force) 한국지부에 남은 여생을 투자하시겠다고 하셔서 지금은 거기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1999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세계평화단체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때는 코소보 전쟁이 한창이었는데…이렇게 탁상공론만 하지 말고 실천할 수 있는 단체가 되자고 결의했습니다. 인간방패로 전쟁을 몸으로 막자는 것이었죠. 2003년에는 전쟁을 막기 위한 화두로 한반도에 인간방패가 되자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인간방패(Human Shields)는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공습지역이나 전장의 한가운에 나가 포탄을 막아내는 방패역할을 뜻한다.
“조직이나 대중사업을 할 때 인간관계가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관계를 쫓다 보면 서로를 다치게 되는 것이 관계라고 느꼈습니다. 인간관계를 소중하고 진지하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긴장하고 존중해야만 합니다. 서로 편하다고 생각하면 관성의 늪에 빠지게 되고 관계를 망가뜨리고 깨지게 합니다. 가족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편하다고 마구 대하면 서로 상처만 주고 맙니다. 서로 필요한 관계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자유와 연대가 중요합니다. 자유의 반대를 구속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유의 반대는 관성입니다. 외부의 구속으로는 내부의 반발을 막지 못하니까요. 자기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이며 이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구속입니다. 이 관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찰하고 반성하며 되돌아 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노련하고 존경받는 사람도 한순간에 넘어갑니다. 엄연한 말로 ‘일치성’은 없습니다. 일치를 향한 지향이 중요한 것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단결해나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사진작가 이시우 ⓒ민중의소리
사진은 마음을 담고 마음을 보는 사색의 도구
그는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쓴다고 했다. 기자가 어떤 글을 쓰냐고 묻자 그는 미군에 관한 글이라고 했다.
“평화감시운동, 주한미군과 관련된 동향 같은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지속적인 관심과 인내심으로 현장을 누비면서 1차 자료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가난이란 게 익숙해져서 불편하지 않은데, 중요한 일을 해야 할때 아쉬움이 있습니다. 단계, 단계마다 고민도 많았으나, 처가 많이 도와주고 제가 고집도 많이 부렸지요.”
“저는 아무리 늦어도 꼭 집에 들어옵니다. 회의가 있는 날에는 막차를 타고 초지대교에서 내려 걸으면 새벽 2시 ~ 3시경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눈을 뜨는 게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활의 리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큰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진 작업은 어떻게 변했는지 물었다.
“디지털 카메라를 살 여유도 없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요. 그러나 사진의 생명은 셔터와 렌즈입니다. 저장되는 방법이 변한 것뿐입니다.”
“일의 90%는 공부, 10%는 사진입니다. 아는 만큼 찍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보입니다. 그때부터 마음의 준비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모저모 뜯어보고 살펴보는 것이 많습니다. 필름보다 책값이 더 듭니다. 그래야만 마음속에 상이 잡히고, 확인하고, 사설이 뒤집히고… 그러면서 감흥이 오고 정서적 교감이 옵니다. 절대로 다작은 못합니다.”
이시우의 작품세계
그에게 있어 사진은 사색의 도구라고 한다. 사진을 통해 마음을 담고, 자신을 마음을 본다는 것이다.
“9.11부터 미군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군데로 빠짐없이 미군기지를 다 돌아다녀 봤지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의구심이 들었고, 그래서 확인하는 그런 순입니다. 내 사진작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치열하게, 보이지 않게, 일하는 분들 많이 있는데,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는 예술의 전당에서 비무장지대의 사색, 민통선 작업을 7~8년 정도 했던 시점에 전시회를 열고 사진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