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길천의 강정기록화 ‘붉은 구럼비’ 서평- 통일뉴스 22.8.23
고길천 『붉은 구럼비』, 새 예술장르의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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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평 고길천의 붉은구럼비
고길천 작가가 『붉은 구럼비』 화집을 보내왔다. 8월 26일까지 제주시 중앙로 예술공간 이아에서 전시회가 열린다. 『붉은 구럼비』는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의 전 과정을 기록한 역사화이다.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화란 점에서 강요배 작가의 『동백꽂지다』와 같으면서 다르다.
『붉은 구럼비』 책표지. [사진 제공 - 이시우]
내가 보기에 고길천 작가는 거대체계에 맞추어 하나씩을 완성해가는 작가가 아니라, 하나씩을 완성하다보니 어느새 거대해지는 작가다. 그는 양식에 대한 집착이 없다. 조각, 사진, 그래피티, 설치, 회화등 닥치는 대로다.
양식과 표현의 다양성과 반대로 그에게 일관되는 것이 있다. 현장에 발딛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간혹 현실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에서 그가 창조해낸 섬뜩한 감동의 세례와 조우하곤 했다. 2010년작 「60년만의 외출」을 보자.
작품 「60년만의 외출」. [사진 제공 - 이시우]
2009년 제주공항 정뜨르 학살터 4.3발굴현장에서 유일하게 남은 희생자의 옷가지가 발견되었다. 작가는 그리거나 사진 찍는 대신 옷 위에 얇은 종이를 얻고 연필로 베꼈다. 연필탁본을 한 것이다. 프로타쥬(Frottage)라고도 한다. 그리기는 머리를 거쳐 손기술로 재현되어 다시 머리로 이해되지만, 이 작업은 옷에서 손으로 느낌이 직접 전달되어 손에 각인된다. 작가가 느낀 질감이 보는 나에게도 그대로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해되어 기억되는 게 아니라 감각 속에 새겨져 있다가 툭툭 걸린다. 물질과 물질로, 현실과 현실로 직접 만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창안한 기법으로 그는 가장 현실적인 물질성을 획득했다.
고길천의 ‘붉은 구럼비’는 강요배의 ‘동배꽃지다’의 전통을 잇는다. 그러나 두 작업의 형식은 다르다. 강요배의 ‘동백꽃지다’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마치 연극처럼 연출해낸 작품이라면, 고길천의 ‘붉은 구럼비’는 경험 속 사건을 마치 노동처럼 생산해낸 작품이다.
‘붉은 구럼비’의 첫 작품은 「1948년 강정」이다. 그는 제주해군기지반대운동의 출발을 4.3으로 늘려 잡는다. 강정과 4.3의 인연은 범상치 않다. 1947년부터 4.3운동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47년 12월 강정리의 당원 김석천과 48년 1월 강정리 세포 Y모씨가 체포된 뒤 발생한 제주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었다.
당연히 군경의 이목이 강정에 집중되었고 강정리에서만 174명이나 희생되었다. 「1948년 강정」은 시체로 누워있는 주민과 총 들고 서있는 군인을 대비시킨다. 해군기지 반대운동 과정에서 체험한 모든 형태의 폭력이 4.3에 가해진 국가폭력과 본질상 같은 것임을 이 그림은 화두로 제시한다.
작품 「투표함 탈취」. [사진 제공 - 이시우]
「투표함 탈취」는 국가가 폭력의 가해자이고 주민이 그 피해자인 과거의 구도가 아니라 국가에 포섭된 주민이, 즉 주민의 신체를 가진 국가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림 왼쪽하단에 흘긴 눈의 남자초상은 사건 자체의 기록이 아닌 사건의 본질을 재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 배경을 이루는 사건소묘가 저울에 올린 물건이라면 이 인물의 표정은 이 사건 전체의 무게를 다는 저울추이다.
작품 「습격(늑대)」. [사진 제공 - 이시우]
「습격(늑대)」는 늑대들에게 공격받는 농성자들을 표현하고 있다. 「폭력」, 「고착」, 「용역깡패」에서는 폭력의 주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다가 「습격(늑대)」에서는 사람 대신 늑대가 등장한다. 늑대는 악당, 폭력에 대한 통속적 상징이다.
라깡에게 있어 환유는 기표에서 기표로 이어지는 무한정한 미끄러짐의 연쇄이다. 그에 비해 은유는 하나의 기표가 다른 하나의 기표를 대체하는 것인데, 한 번만 대체되는 것이다.
‘용역도 먹고 살려는 노동자이고, 여기 나와 있는 것은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와 있는 것이고, 여기 이장이 우리 삼촌이고, 당신은 내 조카뻘이고, 알고 보면 나도 불쌍한 사람이고’ 등등 이야기는 끝없이 다른 이야기로 연장되며 미끄러진다. 이것이 환유이다.
그러나 용역깡패가 내뱉는 ‘개새끼’, ‘씹새끼’는 다른 이야기로의 연쇄가 불가하다. 단 한 번만 대체될 뿐이다. 이것이 은유이다. 환유에서는 변명이나 설득이 가능하지만 은유에서는 불가하다. 은유는 분출될 뿐이다.
서민들의 욕처럼 회사나 관공서의 매뉴얼과 규정도 은유이다. ‘우리는 매뉴얼 대로만 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매뉴얼에 대한 토론이나 대화가 불가능하다. 매뉴얼과 욕은 단 한 번만 대체된다는 점에서 은유이다. 은유는 한 번 이상 대체할 수 없기에 의미를 고착시킨다. 그래서 은유는 폭력이다. 「습격(늑대)」에서의 늑대는 그런 의미에서 은유이다. 고상한 예술이 아니다. 욕이다. 습격받는 동지들을 대신하여 국가폭력에 날리는 한 마디 쎈 욕이다.
작품 「거짓말」. [사진 제공 - 이시우]
「거짓말」에서 ‘주민동의 없이 군관사 추진은 없다’고 말하는 해군 뒤로 늑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욕이 세련되거나 심오할 필요가 없기에 그의 은유는 통속적이다.
작품 「구상금테러」. [사진 제공 - 이시우]
「구상금테러」는 제목으로 말한다. 구상금 청구가 곧 테러라고. 직접폭력이 집단으로 동지들과 함께 겪는 폭력이라면, 매개를 이용한 폭력은 철저히 개인으로 나누어 파편화시키는 폭력이다. 그림속의 단 두 사람조차 어깨 걸었던 손을 풀고 고립된 개인이 되어 손을 모으고 있다. 폭력행사의 목적이 집단을 해산하고 개인들의 손을 묶어 고착시키는데 있었기에 이는 진정한 폭력이다. 구상금 청구가 테러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국가폭력의 진면목은 눈에 보이는 직접폭력이 지난 뒤 합법성으로 치장한 문서들로 이루어진다.
용역깡패의 폭력은 행위와 주체가 일치한다. 주먹을 쓴 자가 처벌받는다. 경찰기동대의 폭력은 행위와 주체가 구별된다. 명령한 자가 처벌받는다. 구상금 청구서의 폭력은 행위만 있고 주체가 없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다.
법과 원칙과 매뉴얼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공무원들이 양심의 가책에 흔들리지 않고 권력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은 공무원 개인이 책임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시민을 호소하고, 절규하고, 가련하고 연민이 느껴지는 사람이 아니라, 매뉴얼에 나온 집행대상으로만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고길천 작가에겐 사람이 주인이고 국가는 대상이다. 그는 국가를 폭력기구로 인식하는 국민의 존재를 증언한다. 당파적이다. 지젝은 ‘자신이 이데올로기 밖에 서있다는 믿음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1)고 한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사용하는 전유물이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자면 그 보편적인 진실은 철저히 당파적인 입장으로만 분명해질 수 있다. 진실은 정의상 일방적이다.’2)
국가폭력에 대한 민감도는 직관에서 통찰로 발전되어야 한다.
국가폭력은 애국심의 논리로 합리화되고 시민의 저항은 양심의 논리로 옹호된다. 이 구도는 매우 호소력 있어 보이지만 금방 한계에 직면한다.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임이 확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군인이나 경찰은 자신의 행위가 공무원으로서 진정한 양심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양심은 있다. 그래서 애국심 대 양심의 대결은 애초 잘못 설정된 대결이다.
개인의 양심은 가족 차원에선 사랑으로, 사회 차원에선 연대의식으로, 국가 차원에선 애국심으로 전화한다. 국가 차원에서 양심이 논의되기 위해서는 애국심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공권력의 애국심과 시민의 애국심 중 어떤 애국심이 헌법적 가치로서의 진정한 애국심인가를 따져야 한다. 예를 들면 4.3희생자가 피해자‧보호대상자를 넘어 헌법제정주체인 주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4.3의 핵심구호였던 ‘단독정부수립반대 통일정부수립’이 헌법적 가치로서의 애국인가 반역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유럽헌법논쟁과 함께 애국주의논쟁을 주도했다. 유럽헌법조약을 통해 유럽은 연합에서 연방으로의 길로 향하고 있으며 헌법에 기초한 헌정적 애국주의로 유럽인들의 마음을 통합하기 위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애국심은 지배이데올로기 생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시민 스스로의 것이다. 양심만 개인의 것이고 애국심은 국가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우리를 실패로 이끈다. 양심이 추상적이라면 애국심은 국가차원에서 구체화된 양심이다. 우리가 국민으로 사는 한 우리의 양심은 곧 애국심으로 발현된다. 우리는 시민적 애국심을 발굴하고 정립해야 한다.
작품 「죽음의 그림자」. [사진 제공 - 이시우]
「죽음의 그림자」는 2017년 기항한 미핵추진잠수함을, 「똥차출동」은 그 잠수함에서 쏟아낸 오물을 처리하는 차량을, 「침탈2」은 2018년 기항한 미핵추진항공모함을 그리고 있다. ‘미군이 사용할 일은 없다’던 해군기지건설사업단의 약속이 거짓말이었음을 이들 그림은 폭로한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순간 물 맑고 평화로웠던 작은 마을이 전 세계 전쟁망의 거점으로 포섭되는 현실을 이들 그림은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폭력을 넘어 세계패권의 폭력 앞에 노출되자 전혀 다른 차원의 피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가해자가 되는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강정과 깊이 연대하고 있는 부르스 개그논의 관점에 주목해보자. 그는 말하길 ‘우리가 메인주에서 이지스구축함의 세례식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벌일 때마다 나는 이 죽음의 배들 중 일부가 강정에 입항할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그는 미국내에선 군사주의의 피해자이지만 피해국에겐 부득이하게 가해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국내 양심적평화운동가와 노골적인 제국주의자 사이의 개인적 차이는 너무도 크지만 피해국에게 그들 모두는 미국이고 미국은 가해자일 뿐이란 점에서 양심은 언제나 정치적 문제이다.
식민지피해가 채 청산되지도 않은 한국이 제국주의적 가해국가라는 감각을 갖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피해자로서의 감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강정해군기지의 함정이 호르무즈해협으로 진출해있고 태평양에서 림팩훈련에 참여한다. 부르스 개그넌이 강정에 대해 갖는 부채의식을 이젠 우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해군기지를 평화대학으로 바꾸어 전쟁이 아닌 평화를 전파하자는 강정평화활동가들의 계획은 이러한 자각위에 서있다. 한편 활동가들은 제주 ‘평화의 섬’이라는 의제설정은 주도했으나 제주특별자치도법이 통과된 것과 이것을 연결시키진 못했다. 특별자치도는 독자적 입법권부여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연방을 향한다.
여러 한계와 부작용도 있겠지만 연방수준의 자치가 실현되면 제주특별자치도 스스로 군사주의반대, 평화의 섬 건설을 입법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넝쿨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거목을 타고 올라 거목을 뒤덮고 결국 숲을 지배한다. 상대가 만든 거목을 타고 올라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습격(늑대)」는 그림만 보아서는 진짜 늑대가 덤벼드는 사건 같고, 「구상금테러」도 그림만 보아서는 시무룩한 농성장 묘사 같다. 오인될 수 있고 모호하다. 제목을 보고서야, 그림설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림 밖의 현실에 의존한다. 예술만으로 모든 게 완성되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의존해야하는 열린 세계이다.
의식속의 기억을 화면에 재현시킨다는 것은 현실의 흐름을 절단‧채집‧변형하는 것을 의미한다. 절단되어야 단위화 할 수 있고, 채집되어야 교환가능해지며, 변형되어야 조작된다. 예술적 요소, 예술적 소통, 예술적 기호로 이룩된 세계가 예술계이다.
그러나 미술치료는 자기가 그린 그림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림을 설명하며 상담받고 토론하며 그림을 가지고 놀면서 진행된다. 절단‧채집‧변형이 다시 흐름으로 현실에 연장된다. 치료가 목적일 때 미술의 경계는 중요치 않다. 예술언어를 최고수준으로 다룰 수 있는, 그래서 최고의 조형력을 가진 작가가 예술의 경계를 열어버렸다.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현실과 경계를 두지 않고 현실에 뛰어들어 행동하고 있다. 예술을 수단으로 현실을 바꾸는데 여념이 없을 때도 있다. 전시장에 초대한 사람들도 강정지킴이활동가들이다. 작가는 이번 작업을 그저 소박하게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예술장르의 문을 연 것이다.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인 작업의 감각이 자꾸 작업을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서는 화면 밖의 현실에 접붙이기를 한다.
기록은 아무리 잘해도 자꾸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는 의미들이 정박할 닻이 필요해진다. 이념은 언어로 표현될 때 가장 빛나지만 정념은 언어로 표현될 때 가장 초라해진다.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비를 직접 맞듯이 정념은 직접 맞아야 한다. 겉보기에 사실적인 그의 소묘작품들보다 더 사실적인 것은 추상적으로 보이는 「붉은 구럼비」이다.
그가 기록이라고 말한 소묘의 극적 장치가 상징의 연쇄라면 「붉은 구럼비」는 상상적 동일시이다. 거울 앞에 선 순간 나의 모습 전체가 보이듯이 모든 이야기와 서사는 「붉은 구럼비」라는 거울 앞에서 닻을 내린다. 구럼비는 출발점이고 도착점이다. 그러나 도착점의 구럼비는 이전의 구럼비가 아니다. 그것은 푸른색 좌절과 우울이 아니라 붉은색 실패와 저항이다. 구럼비는 저항하고 절규하는 그의 마음속에 더욱 생생하게 더욱 크게 살아있다.
시대가 예술가를 만들지만 예술가 또한 시대를 만든다. 그런 예술가와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주)
1) 사라카이, 슬라보예 지젝 저, 정현숙 역, 슬라보예 지젝, (경성대학교출판부 2006), p.200
2) 슬라보예 지젝 저, 이서원 역, 혁명이 다가온다, (길 2006), p.50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