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엔사의 DMZ출입통제 문제점과 해결방안-통일뉴스2019.12.20

설훈의원실주최토론회에서의 발표문을 일부수정하여 통일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0807

유엔사의 DMZ출입통제 문제점과 해결방안

<기고> 사진가 이시우

승인 2019.12.19 20:45:32

사진가 이시우 (www.leesiwoo.net)

목차

1. 정전협정상 유엔사 군사통제의 성격
1) 남북관리구역 창설시 드러난 유엔사의 논리
2) 대성동에 대한 유엔사규정에서 드러난 유엔사의 논리
3) 유엔사 군사통제지역의 성격구분

2. 38선이북 유엔사 군사통제권의 법적 무효성
1)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의 법적무효성
2) 1950년 10월 12일 언커크임시위원회 내부결정

3. 비무장지대출입문제에 대한 단계적 해결방안
1) 1단계 현상유지
2) 2단계 현상확장
3) 3단계 현상변경

1. 정전협정상 유엔사 군사통제의 성격

유엔사가 비무장지대의 출입을 불허하면서 사용하는 Jurisdiction을 한국은 관할이란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정전협정에는 ‘Jurisdiction’이나 ‘관할’이란 단어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군사통제’(military control)라는 단어만이 있다.

유엔사 특별고문을 지낸 이문항 씨는 “정전협정 14,15,16항은 상대방의 영토, 영해, 영공을 존중하고 침입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휴전협상 중에 유엔사 측이 Korea를 북이 주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호칭할 것을 거부하고, 북측이 Korea를 대한민국으로 호칭하는 것을 거부해서 장기간 논의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남한과 북한을 상대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지역’으로 표현하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1)라고 했다. 즉 정전협정에서는 주권과 군사통제, 영토와 군사통제지역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정전협정 13항 ㄴ목은 서해5도에 대해 “일방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1950년 6월 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島嶼”라고 하여 점령과 군사통제를 연관지여 서술하고 있다. 또한 뒤에서 보겠지만 미국은 실제 공식문서를 통해 한국일부에 대해 ‘군사점령지역’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군사영어사전에서도 ‘군사통제’란 ‘점령’을 뜻한다.2)

점령의 개념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미군정과 비교해 보자. 미군정의 법률전문가 어니스트 프랑켈(Ernst Frankel)은 1948년 초 미군정이 주권정부, 자치정부, 군사점령자(군정)의 3중 정부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자인했다.3) 즉 미군정은 점령보다 정복에 가까웠던 것이다. 점령은 주권이 인정되지만 정복은 주권이 부정된다.

프랑켈의 정의에서 주권정부와 자치정부 역할을 뺀 것이 본래 국제법상의 점령군이다. 따라서 미군점령기를 기준으로 하면 현 상황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실감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권정부가 있는 상황에서도 점령은 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점령을 법적으로 인정하더라도 구체적 현실과 상황에 따라 그 강도나 방식은 다양한 차이가 있다.

유엔사 군사통제의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배타성이다. 주권의 본질도 배타성에 있기에 결국 배타성의 적용 범위나 강도에 따라 주권과의 관계가 규정된다.4) 정전협정후속합의서 중 ‘사민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합의’ 3항에 의하면 유엔사령관의 허가권은 사령관 개인이 원하는 대로이다.5)

비무장지대에 대한 사전승인제도는 미군정기 38선에 대한 통과제도보다도 더 배타적이다.6) 즉 쌍방사령관은 비무장지대라는 영역에 대해 출입자체를 배제하는 배타적 관할권을 통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7) 북의 경우는 총사령관과 주권정부가 일치하여 배타적 군사통제가 이루지는 것은 계엄상태 뿐이다.

그렇지만 남의 경우는 유엔사령관이 한국주권정부와는 별개로, 미국정부의 지휘를 받으므로 한국정부에 대해 배타적 군사통제를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점령상태이다. 군사통제나 점령에 대한 법적근거 못지않게 그것이 실현된 역사적 근거를 확인해야 그 실체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역사적으로 유엔사가 군사통제권에 대해 스스로 드러낸 논리를 통해 그 성격을 파악해보자.

1) 남북관리구역 창설시 드러난 유엔사의 논리

2000년 6.15선언에서 합의한 남북철도연결사업을 실현하기 위해 양측이 노력한 결과 2000년 11월 17일 유엔사와 인민군은 비무장지대 내 경의선지구 ‘남북관리구역’(the Area under the Administration of the South and North)에 대해 합의했다.8) 그러나 2002년 지뢰제거작업을 상호검증하기 위한 남북조사단의 군사분계선통과를 앞두고 유엔사는 갑자기 한국군에게 유엔사의 승인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하였다. 유엔사의 주장은 관리권(Administration)은 한국군에게 이양되었지만 관할권(Jurisdiction)은 여전히 유엔사가 행사한다는 이유였다.

‘관할’이란 말이 논쟁의 중심으로 솟아올랐다. 유엔사는 도라산전망대 검문소 입구에 하늘색바탕에 선명한 글씨로 여기서부터 유엔사령부의 ‘관할지역’이라고 표시한 안내판을 설치했다. 그 뒤 통일부의 승인을 받고 방북하려던 청년단체들 중 2명에 대해 정치성향을 이유로 유엔사가 현장에서 방북 불허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사적 성격이 아닌 정치적 성격의 조치였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에도 도라산의 유엔사상황실로부터 최종승인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도 유엔사관할권행사 대상에서 예외일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언론은 물론이고 법학자들도 관할과 관리의 차이에 대해 뜬구름 잡는 주장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적 용어는 용어사용의 기원과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처럼 오리무중이 되기 십상이다.

2000년 11월 17일로부터 정확히 46년 전 같은 날인 1954년 11월 17일 이들 용어는 군사분계선이남 38선 이북지역 행정권이양 시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 말들이다. 수복지구라 불리는 이 지역은 한국전쟁 전에는 38선 이북으로 북한에 속했고, 전시에는 유엔군의 점령상태에 있었으며, 전후인 1954년 11월 17일 한국정부로 행정권이 이양된 지역이다. 행정구역상 강원도 고성·양양·인제·양구·화천·철원, 경기도 연천9)을 포함한다.

한국정부는 전쟁기간 동안 이 지역이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1947년 11월과 1950년 10월 7일의 유엔총회결의와 50년 10월 12일 언커크임시위원회 결의에 따라 이 지역은 점령자인 유엔사령관이 통제하게 되었다. 1954년에 이르러 유엔사령부는 원칙적으로 38선 이북 지역에 대한 한국의 법적지배권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그 작은 지역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권만 한국정부에 이양하였으며10)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4년 유엔사의 한국정부로의 행정권이양시 유엔사령관 헐(J. E. Hull)이 이승만에게 보낸 공문을 보자.

“유엔사는 지금 유엔사의 군사점령아래(under military occupation by the UNC) 있는 38선 북쪽지역을 한국의 행정권(administrative control)아래로 이양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11)

미국은 우선 유엔사령관을 통해 비무장지대남측을 포함하여 이곳이 점령지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구상이 반영되어 행정권이양의 기초가 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결의문(1954.8.9)은 이 지역을 유엔통제(United Nations control)하에 있다고 했으나 미국은 하루만에 ‘유엔사의 군사점령’아래 있다고 수정하였다.12)

언커크는 유엔조직이지만 유엔사는 미국조직이다. 따라서 유엔사의 점령이란 미국의 점령이다. ‘군사점령’이란 단어에서 미국의 노골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미국 점령지란 한국주권의 일부가 배제되는 곳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제안을 받아주면서도 유엔사가 복잡한 행정업무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행정권만을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당연히 반발했다. 1954년 9월 1일 한미 간의 마라톤협상에서 변영태 외무장관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행정권과 주권을 명확히 구분하고 주권의 이양을 주장했다.

“한국은 행정권(administrative control)뿐만 아니라 주권(sovereignty)을 가져야 한다. 이곳은 한국 영토이다.”13)

변 외무장관의 언급에서 분명히 읽히듯이 행정권이란 통치권이나 주권보다는 하위의 개념이다. 행정권을 뜻하는 표현으로 미국은 ‘administrative control’을 언커크(UNCURK)는 ‘administration’14)을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행정권을 최종적 지배권(ultimately juridically control)과 구분하여 사용했다. 또한 한국이 주권을 달라고 요청했다는 보고를 하면서 이에 해당하는 단어로 Jurisdiction을 사용했다.15) 유엔사가 46년 뒤인 남북관리구역창설시 Jurisdiction과 Administration을 구별하는 용례 역시 이 행정권이양 논쟁과 일치한다.16)

따라서 ‘Administration’은 관리라는 번역보다는 행정권이란 번역이 역사적 사례와 일치한다.17) Jurisdiction의 정확한 번역은 차치하고 이 단어가 한미 양국간에 주권으로 이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1960년에 다시 불붙은 국회논쟁에서 한국은 여전히 이를 주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인우 의원의 항변에 함종빈 의원이 난처해하면서도 조용히 타이르는 대목을 보자.

“신인우: 우리가 논의하는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도 대한민국에서 작정한 법률입니다. 대한민국 주권행사에 의해서 작정한 법률이에요.
함종빈: 휴전선과 삼팔선 이북 사이는 하나의 국제법상으로 볼 것 같으면 교전지역 같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엄격히 따져가지고 완전한 대한민국의 주권이, 행정이 거기 적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18)

따라서 남북관리구역창설시 유엔사가 표명한 입장을 1954년 수복지구행정권 이양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비무장지대를 군사점령지역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Jurisdiction 보유주장은 한국주권에 대한 제약을 의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엔사가 관할권의 이름으로 행사하고 있는 군사통제권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표현은 공연한 억측이 아닌 셈이다.

2) 대성동에 대한 유엔사규정에서 드러난 유엔사의 논리

1962년 11월 21일 국가최고재건회의에서 ‘경기도 파주군 림진면의 관할구역에 군내면을 편입한다.’는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법률 제1178호)이 제정되었다. 그러자 군내면에 속한 대성동마을이 문제가 되었다.

1963년 7월 1일자 주한미대사관이 미8군에 보낸 전문에는 6월 22일 유엔사령부가 대성동의 행정권을 한국정부에 위임하는 문제에 반대하는 국무성의 지시가 분명히 밝혀져 있다.19) 즉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에 대한 행정권은 유엔사령부의 것이고, 한국정부에 일부라도 위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박정희정권이 원용하고자 했던 38선 이북지역 행정권이양에서 주목해 볼 것이 있다. 한국측은 ‘군사분계선 이남’을 줄곧 주장했으나 미국에 의해 ‘비무장지대 이남’으로 최종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20) 박정희정권으로서는 군사분계선이남 비무장지대남측 지역도 당연히 행정권이양지역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최종적인 행정권이양지역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미 국무성은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에 대한 행정권은 한국에 이양되지 않았음을 전제로 이 지역의 행정권이 유엔사령관의 권한하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 문건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밝혀진 것은 정전협정에 대한 해석은 유엔사령관과 한국정부의 합의에 의해 결정될 수 없고 오직 미국무성의 법률고문실을 포함한 워싱턴 법무당국(legal authorities in Washington, including the Office of the Legal Advisor, Department of State)의 해석에 따라야 함을 명시한 것이다. 유엔사의 관할권이 미국의 관할권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성동에 대한 유엔사규정 525-2(UNC Regulation 525-2)은 민사행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미군이 주둔하는 적대적인 지역에서 토착 민간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외국정부가 행정, 입법 및 사법권을 행사하기 위해 외국정부가 수립하는 행정”21) 여기서 외국정부란 당연히 미국정부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의 유관 정부기관이 대성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인수할 수 있을 때까지 대성동 작전지역에서 민사행정과 구제사업을 제공한다.”

즉 한국정부는 현재 대성동에 대한 모든 책임 즉 입법, 사법, 행정권을 인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실제로 대성동 주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967년부터이다. 마을입주초기 14년간은 참정권이 제한 된 채 살아왔다.22) 사법권과 관련해서는 1953년 7월 30일 제3차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합의된 추후합의서 “Q” 비무장지대 내에서 헌병 즉 군인이 민간경찰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허가한 문서23)가 있다. 사법관할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김훈 중위 사건이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군 관계자들은 유엔군사령관은 JSA지역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뿐 한국군 장병에 대한 인사-행정권은 한국측에 있으며 수사권에 대해선 명문규정이 없기 때문에 미군측의 행위에 대해 주권침해 시비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군측은 또 한국측의 수사 협조요청에도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한국측이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6월 11일 육군 검찰부는 미8군사령관 법무참모에게 소대원조사, 현장검증, 총성실험 등을 위한 JSA출입협조 공문을 발송했으나, 미군측 현장검증과 소대원 조사는 가능하지만 총성실험은 이미 실시했다는 이유로, 유족들은 군 작전지역 특성상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각각 거부했다.”24)

한국군은 유엔사의 주권침해에 대해 격앙되어 있었고 <조선일보>에서도 이같은 군내부의 기류를 여과 없이 보도했다. 2012년 유엔사규정 개정이전엔 JSA와 동일규정이 적용되는 대성동 마을도 유엔사가 범죄자를 마을에서 추방한 뒤에야, DMZ 밖에서 경찰이 체포할 수 있었다.25) 이는 1982년 4월 6일자로 개정되어 2012년까지 지속된 유엔사규정과 민사예규에 의거한 것이었다. 2012년부터 유엔사 규정이 완화되었다.

“대성동 작전지역의 경우, 대한민국 당국은 유엔사 통제 하에서 요구되고 수행되는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 기능을 제외하고는 현재 지방정부의 기본적인 기능 대부분을 제공한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대성동 작전지역에서 민사작전을 허가하고 있지 않으며 유엔사는 현재의 정전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작전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26)

잘 알려져 있듯이 대성동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납세와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다. 한편 주민들은 토지소유권을 가질 수 없고 경작권만 허용된다. 시설물 및 농지를 포함한 대성동의 영농 혹은 재산권을 타인에게 양도하려 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유엔사령관의 사전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27) 한국의 주권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주권의 행사가 배제된 것이다. 유엔사의 대성동민사행정규정에는 이같은 입장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성동은 정전협정 추후합의서에 의거 허가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와 지원 하에 유엔사가 설립하였다.”28)

한국의 영토일부에 유엔사가 창설하고 법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이 대성동인 것이다. 이는 한국정부의 주권을 포기하는 내용이므로 당연히 국회비준을 받은 법적문서가 있어야겠지만 그런 문서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1962년 11월 21일 대성동을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킨 법률과 충돌하고 있다. 유엔사규정은 완화되고 있지만 이는 언제든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주민들은 잘 알고 있다. 유엔사의 대성동민사행정규정의 제목에는 ‘군사작전’이란 단어가 여전히 붙어있다. 민정업무는 점령정책이며 점령정책은 최종적으로 군사작전을 목표로 한다.

이처럼 한국민의 희망과는 달리 유엔사는 군사통제권, 즉 점령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냉철하게 보지 않으면 땜질처방에 그칠 뿐이다. 문재인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혔듯 주권을 수호하고 동맹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대한 냉철한 상황인식이 전제되어야 목표와 준비과제와 이정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엔사 군사통제지역의 성격구분

문제해결에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사안을 잘게 썰어서 구분하고 순서를 정해야 한다. 연천 고랑포리는 38선과 군사분계선이 만나는 지점이다. 따라서 고랑포리를 중심으로 동서의 군사통제규정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고랑포리 서부의 육지와 한강하구 서해5도는 정전협정만이 적용되고 고랑포리 동부는 정전협정과 54년 38이북행정권이양결정문이 적용된다. 이 지역 중 비무장지대는 행정권이양결정문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편 비무장지대 이남 즉 한국지역은 주권이 수립되어 있지만 정전협정상 여전히 유엔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이다. 유엔사의 정전협정업무라는 것은 오직 비무장지대만을 대상으로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유엔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이 비무장지대남측과 한강하구, 서해5도뿐 아니라 한국지역 전체라는 것은 정전협정 13항과 43항, 59항등을 통해 명백히 확인된다.29)

38선이북지역 행정권이양논의 당시 변영태 총리 겸 외무장관의 국회질의에 대한 답변을 보면 38선이남에 대한 유엔사령관의 군사통제권한까지 인정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38선 이북 수복지구에 있어서도 38이남의 전투지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유엔사령관들이 그 군사용무상 거기를 관리하는 특권 권한을 거기에서 향유한다, 이런 양해 밑에서 또 교섭을 다시 진행시키자. 이런 회답이 와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거야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전투지구인 이상에는 이남 이북을 구별할 것이 없이 전투사령관으로써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곧 교섭을 다시 열자고 하였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혹시 얼른 보면 주권에 관계가 없느냐 하시겠지만 사실 전투지역에 있어서는 유엔사령관에게 위임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회담을 열어서 이야기한 뒤에 이양을 하자해서 그저께 다시 그쪽 대표 세 분하고 이쪽 대표 세 분하고 만나서 완전히 이양절차를 다 끝냈습니다.”30)

변영태는 ‘38선이북도 38선이남의 전투지구처럼 유엔사령관들이 군사용무상 특권을 향유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과하고 유엔사의 입장에 동의해준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미국은 1950년 11월 17일을 기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되고, 한미합의의사록이 체결되면서 군사분계선이남 전체에 군사통제권을 확대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부당국자의 무지로 유엔사의 군사통제권을 주권의 범위 안으로 축소시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 온 것이다.

<표1> 유엔사군사통제지역과 통제근거

군사통제지역 구분

군사통제의 근거

연천 고랑포 서부 38선 이북

38이북지역행정권이양결정문+유엔임시위원회결정31)

연천 고랑포 동부 비무장지대

정전협정

연천 고랑포 서부 비무장지대

정전협정

비무장지대 이남 한국 전지역

정전협정

2. 38선이북 유엔사 군사통제권의 법적 무효성

유엔사의 논리대로라면 38선이북지역의 유엔사점령지역에 대한 군사통제권은 행정권이양을 통해서도 소멸되지 않았다. 또한 이를 근거로 비무장지대에서도 주권을 제약하고 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들 근거를 철저히 검토하고 무효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행정권이양은 국회비준이 없었으므로 법적효력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권차원에서만 보면 논리적으로는 단순·명확하다. 논리문제가 아닌 결심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유엔사령관이 38선이북지역에 대한 주권을 제한하고 최종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유엔관련 두 개의 근거에 대해서는 고찰이 필요하다. 하나는 1950년 10월 7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창설에 대한 유엔총회결의이고 두 번째는 이 결의에 의해 다시 창설된 언커크임시위원회의 10월 12일 내부결정이다. 충분한 논의는 차후로 미루고 이 두 결의의 법적 무효성을 옹호하는 논지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1)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의 법적무효성

1950년 10월 1일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이루어지면서 북한점령과 점령지역의 통치문제가 과제로 나섰다. 1950년 8월 1일 이후 안보리의장국이 된 소련이 참가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자 안보리는 마비상태가 되었다. 이에 미국은 안보리를 대신하여 총회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유엔헌장을 기묘하게 해석하여 총회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 총회에서 10월 7일 결의가 채택되었다. Gross는 이에 대해 내정불간섭을 천명한 헌장 제2조 4항 위반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32) 어쨌든 이 총회결의는 정치적 문서일 뿐 헌장상의 법적 문서는 아니다.

내용을 둘째로 하고 헌장규정의 충돌만을 살펴보면 두 가지 문제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총회결의가 안보리의 1차적 책임을 규정한 제24조 1항을 대신할 수 있는가의 문제, 두 번째는 총회결의가 권고가 아닌 조치, 즉 헌장 7장의 군사적 강제조치를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첫째, 헌장 제24조 1항은 안보리의 국제평화와 안전유지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안보리가 상임이사국 일부의 반대로 일차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미국은 총회가 이에 대하여 관여할 권한 내지 책임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일차적이 배타적임을 의미하지 않으며 헌장 제14조가 총회에 “평화적 조정을 위한 조치를 권고”할 권한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3) 미국의 이같은 입장은 10월 결의를 사후정당화하기 위하여 제출한 11월 3일 ‘평화를 위한 단결’결의안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상임이사국의 거부권행사를 허용한 헌장 제27조 3항이 있기 때문에 거부권행사가 반드시 안보리의 일차적 책임의 실패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보리 스스로가 안보리의 일차적 책임의 실패여부를 판단하기 전까지는 합리화될 수 없는 의견이다.34)

다만 2000년 이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안보리의 의제에 남아있지만 안보리가 최근 결의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권고권한이 있는 것으로 제12조의 해석을 변경한 일은 있다. 당시 유엔법률고문(Legal Counsel of the United Nations)은 총회가 헌장 제12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는”의 의미를 “이 시점에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는”으로 해석하였다는 의견도 제시했다.35)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재판소는 “총회와 안보리가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에 관한 동일사항을 동시에 다루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변화한 총회의 수락된 관행은 헌장 제12조 1항과 양립한다”고 결론 내렸다.36) 성문화된 경성법(유엔헌장)이 아닌 정치적 결의를 통한 추후합의나 추후관행에 의한 연성법(Soft Law)이론이다.

그러나 ICJ가 총회의 “수락된 관행”이라고 적시한 결의는 1960년대 총회결의들로서 그 이전의 결의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언커크 창설 결의는 물론이고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등 한국전쟁 당시 총회결의들이 소위 2차적 책임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다고 봄이 타당하다.

두 번째는 총회 결의의 범위에 군사조치가 포함되는가의 문제이다.

1950년 6월 27일 안보리 권고결의는 북한의 무력공격을 38선까지 격퇴하기 위한 것이었다.37)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위한 군사적 강제조치에 대한 안보리 결의는 없었다. 10월 7일자 유엔 결의안도 특별히 38선 횡단을 승인하지는 않았다.38) 그럼에도 이 결의는 이미 북진한 유엔군사령부의 38선이북 점령을 전제하고 있었다. 점령을 위한 군사작전 없이 북에 새로운 정부를 세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말하는 논쟁보다 말하지 않는 묵인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결의는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미국은 이를 사후 정당화해야할 처지에 놓였고 이에 미국은 한 달 뒤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서 총회의 이차적 책임수행을 위해 집단적 조치(collective measures)에 관한 적절한 권고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에는 평화의 위협 또는 침략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미국의 의도는 10월 7일 총회결의에 묵시적으로 포함된 유엔사의 ‘군사적 강제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헌장 제11조 2항의 ‘조치’는 오직 안보리만이 취할 수 있는 것으로, 유엔헌장 제7장에 따른 안보리의 조치인 ‘강제조치(coercive or enforcement action)’만을 의미한다.39) 헌장 39조에 의하면 조치는 권고할 수 없으며 결정해야 한다.40) 이후로도 총회결의는 평화유지활동결의를 위해서만 원용되었으며, 평화의 위협 또는 침략행위에 대한 무력사용을 위해서는 사용된 바가 없다.40) 따라서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가 묵인하고 있는 유엔사의 38선 이북 점령을 위한 군사작전은 유엔헌장에 의해 법적근거를 가질 수 없다.

이는 결의문구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근거에 의해 더욱 명징하게 확인된다. 국무성의 한국담당관 에머슨(John K. Emmerson)은 1950년 9월 22일 「한국전 종전계획」(Program for Bringing Korean Hostilities to an End)을 작성하였다.41) 맥아더는 10월 1일 북진을 명령했고, 10월 2일 에머슨은 ‘북한점령(The Occupation of North Korea)’이라는 제목의 지침을 작성했다.

이 기획안은 점령정책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종식되고 유엔한국위원단이 북한에 도착할 때까지, 북한의 주요도시를 유엔군이 점령하고 이곳에서 북한군을 무장해제하고 일반인에 대한 구호, 기초적 행정업무 재개, 필수 정부인사 충원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2단계는 유엔한국위원단이 북한에 도착해서 총선을 준비하는 단계였고, 3단계는 총선을 실시하고 유엔군이 철수하는 단계였다. 미국의 북한점령구상은 10월 2일의 맥아더의 유엔군사령부 작전명령 제2호 및 그 부록(10월7일)과 10월 9일의 미 8군의 행정명령을 통해 나타났다.44)

미 국무부는 유엔군의 북진을 인가하고 새로운 유엔기구를 설치하는 결의안 준비절차에 들어갔다.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총회에 제출할 안을 마련했고 미국무부 관리들은 미국의 우방국들 대표와 비공식적 접촉을 갖고 이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45)

10월 3일 미육군부는 맥아더 유엔사령관에게 ‘북한점령 초안’을 보냈다. 이 점령안에 제시된 ‘북한에서의 민정업무 관련 명령서’는 맥아더를 38선 이북지역의 군정관으로 위임하고 점령업무를 관장하는데 필요한 여러 정책들을 규정했다.

먼저 명령지휘관계상 유엔이 북한점령 문제를 관장하는 최고권위기구이고 미합참이 이를 수행하는 기구로 선발되었으며 맥아더는 합참의 지시를 받고 보고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명령서는 맥아더로 하여금 유엔이 구성할 기구와 충분한 협조와 지원을 해주고 가능한 충고와 건의를 따르되 그 기구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했다.46)

10월 7일 결의에는 UNCURK가 도착할 때까지 임시위원회가 유엔통합군사령부에 대하여 협의하고 조언하도록 했다. 이는 에머슨이 작성한 점령정책 1단계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종식되고 유엔한국위원단이 북한에 도착할 때까지, 유엔군이 점령업무를 수행한다는 지침과 일치한다. UNCURK가 유엔사령부를 지휘하는 게 아니라 유엔사가 UNCURK를 움직여 목적을 실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서의 유엔통치는 유엔기관이 직접 민사행정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웠는데 실은 그것이 유엔군 사령부, 구체적으로 말하면 맥아더사령부의 군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기존의 유엔위원회를 대체해서 구성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는 별 영향력이 없는 자문기관일 뿐이었다.

10월 28일 워싱턴정부가 맥아더에게 보낸 민사행정지침(Civil Administration Directive)은 이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 지시에 의하면 북한을 점령한 것은 분명히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이며 단지 유엔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47)

유엔헌장 2조 7항에 의하면 7장의 군사강제조치 결의가 없이는 국내관할권에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이 점령국이 되면 헌장 위반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7장의 안보리 결의도 없이 점령을 시작한 미국으로서는 유엔의 이름마저 사용하지 못하면 난처한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엔이 파견한 기관들에 맥아더는 협력과 지원을 하고 그들의 의견에서 지침을 얻지만 그것은 그의 임무수행에 지장이 없는 한에서였다. 더구나 맥아더는 그들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실상을 보면 10월 7일 언커크 창설 결의가 헌장 상 합법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견해는 의심스럽다.

10월 7일 언커크 창설 결의에서 북한정부 불인정 부분은 북한의 유엔가입으로, 언커크 창설 부분은 1973년 언커크의 해체로 실효성이 사라졌다. 아직까지 실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부분이 언커크-유엔사 관계 부분이다. 따라서 유엔사 문제뿐 아니라 통일과정의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언커크 창설 결의의 무효화를 위한 유엔 차원의 노력이 요구된다.

2) 1950년 10월 12일 언커크임시위원회 내부결정

10월 7일 총회결의에 의해 UNCURK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각국 정부는 한국임시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한국임시위원회는 1950년 10월 10일과 11월 15일 사이에 레이크석세스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10월 12일 호주대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 결의안을 제출했고 이는 통과되었다.

“유엔사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의 통치와 민사행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이 지역의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하고…”48)

UNCURK의 조언을 받아야할 유엔사가 대신 점령통치와 민사행정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도 언커크가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에서, 행정을 고려할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로 임의 연장되었다. 이는 총회 결의를 넘어서는 월권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이는 유엔총회 결의가 아니었으며 UNCURK의 결의도 아니었다. UNCURK 도착 전까지 한 달 정도 과도기 임무를 부여받은 임시위원회의 내부 결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설사 유엔사가 언커크의 점령통치권을 넘겨받았다 해도 명확히 기술된 것처럼 그것은 ‘임시’였다. UNCURK 위원단은 일본에 도착해서 수차례 회의를 개최한 후 11월 26일 서울에 도착하여 활동하다가 12월에 부산으로 이동했다.49) 따라서 UNCURK가 서울에 도착한 11월 26일에 유엔사는 언커크에 모든 통치와 민사행정권을 이양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임시’가 1954년 38선이북지역 행정권이양 때 부활했고, 2000년 남북관리구역합의 때 다시 부활하여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엔사가 점령통치권을 이양받은 언커크는 1973년 유엔총회결의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런데도 유엔사가 점령과 민사행정권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는 것은 유엔헌장과 그 정신에 대한 심각한 위반으로 의심된다.

3. 비무장지대 출입문제에 대한 단계적 해결방안

모 아니면 도,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접근은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은 아니다.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도 개발하고 강제할 힘도 개발해야 한다. 주권차원과 유엔차원에서 중층적 단계와 유기적 경로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단계구분을 중심으로 문제해결 순서의 대략을 고민해 보자.

1) 1단계 현상유지

현상유지 단계는 현재의 법적 근거들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용한다. 정전협정과 그 후속합의서들과 유엔사규정 등을 활용한다. 이들 규정대로만 실행되어도 지금보다 훨씬 개선된 환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준법행동이다.

이미 적용된 부분이 있다. 땅굴 등 일부 안보관광지는 비무장지대 안쪽이지만 수만명의 관광객이 유엔의 허가절차 없이 출입하고 있다. 유엔사의 행정력은 이같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비

무장지대의 비무장화를 위한 시범사업으로 JSA를 택한 것은 장단점이 있었다. 만약 JSA가 성공한다면 거의 유일하게 유엔사병력이 있는 곳이므로 비무장지대 전체로 확산하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JSA가 실패한 것은 바로 동일한 이유이다. 동서남북관리구역 현장통제반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유엔사병력이 있는 곳이고 따라서 점령행정이 가능한 곳이기에 유엔사가 자기원칙을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비무장지대와 한강하구는 유엔사병력이 전무하다. 유엔사 참모장교가 1년에 한 번 정도씩 전방 GP를 순회하며 보고를 청취하는 게 전부이다. 따라서 다음엔 유엔사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시도하고 관행을 만들어 유엔사를 설득하는 순서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전협정과 정전협정부속합의서 중 사민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합의50)를 근거로 제2, 제3의 대성동마을을 만든다. 철원 근북면, 양구 수입면, 인제 서화면 등 전쟁 전 마을이 있던 비무장지대지역에 마을입주, 출입영농 등을 실시한다. 합의에 따라 비무장지대를 민통선화 한다. 즉 민통선 통과제도 정도로 비무장지대 통과제도를 완화시키는 것이다.

한강하구는 한강하구남북관리위원회를 만들어 항행 등을 시작으로 민간인의 강 이용을 실현한다. 현재 정전협정상 민간선박의 항행만이 가능하므로 우선 남북민간 관리위원회부터 만든다. 북과의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남측의 어장제한을 완화하고 선박안전조업수칙을 개정하며, 정전협정 5항이나 정전협정부속합의서 중 한강하구항행수칙을 적용하고 이들의 빈틈도 발견하여 유엔사규정에 존재하지 않는 실천영역을 창의적으로 개발한다. 이와 더불어 정전협정13항ㄱ을 근거로 철조망과 지뢰를 철거한다.

이 단계는 정전협정 준수를 통한 준법적 조치를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이미 합의된 9.19남북군사합의서의 규정을 현실화시키고 제도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2) 2단계 현상확장

정전협정부속합의서 중 사민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합의51)를 근거로 1955년 6월 27일부터 당사자에서 배우자와 자녀들로 대상을 확대한 선례가 있다. 현재 대성동은 농업노동자, 작업인부등도 출입이 빈번해지고 있고 초등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 외부에서도 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대성동에 대한 유엔사규정이 점차 개정되어 입법과 사법권행사의 범위를 차츰 넓혀온 선례가 있다. 비행금지구역에 대한 유엔사규정을 변경하도록 하여 농업방제용 드론의 제한적 사용이 가능해진 선례도 있다.

행정수요는 감소보다는 증가하는 경향으로 발전하는 추세이다. 행정권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주권의 확장을 시도하되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확장의 한계는 설정한다.

3) 3단계 현상변경

현상변경은 법적 근거들을 소멸시키는 과정이 핵심이다. 국회에서는 38이북행정권이양문서에 대한 무효를 선언하고 유엔사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외교부에서는 1950년 10월 7일 언커크 창설에 대한 유엔총회 결의와 10월 12일 임시위원회 결정에서 유엔사령부의 점령통치권, 민사행정권 위임 부분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유엔외교를 펼친다. 국방부는 각 단계마다 유엔사규정(UNC Regulation), 유엔사교전수칙(UNC Rule of Engagement)를 상황에 맞게 수정·완화하는 교섭을 진행한다.

이들 누적된 분단법제들의 무효화나 제·개정을 근거로 비무장지대에서의 행정권과 최종적 지배권의 이양작업을 완료해 간다. 이로써 유엔사가 정전협정 전문에 명시한 순수한 군사적성격의 최소한의 기구로만 남는다. 유엔사정전관련 업무와 연합위기관리권 등을 전작권 환수 목록에 포함시켜 정전관리에서 유엔사 의존성을 대폭 축소시킨다.

이들 단계적 방법과 비약적 방법을 유기적으로 배치하며 정전협정 내에서 평화협정으로 나아갈 내재적 근거를 마련해 간다. 정전협정 하에서라도 비무장지대 평화공원 등을 실현할 기반을 조성한다.

유엔사, 평화협정, 통일 등의 문제는 국제차원과 한반도차원과 국내차원의 복합구조로부터 발생했고 전개되어왔다. 따라서 그 해결도 이들 차원 각각의 영역에 주목하면서 통합하는 사고가 요구된다. 유엔사 문제 역시 주권차원의 문제와 유엔차원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 비무장지대 출입문제만을 위한, 전작권 환수만을 위한, 일본의 개입저지만을 위한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단해 보이는 비무장지대출입문제만 해도 주권차원의 조치와 유엔차원의 조치가 병행·조율되어야 한다. 국제정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어도 우리의 준비가 부족하면 그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때이다.

<미주>

1) 이문항, 『JSA-판문점』 (소화, 2001), p.94.

2) Military Control: The control of a country by military forces of a foreign power – occupation (http://www.wordwebonline.com/en/MILITARYCONTROL) 이를 번역하면, 군사통제: 외세의 군대에 의한 한나라의 통제-점령.

3) Ernst Frankel, “Structure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정용욱 편,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2권, (다락방, 1994).

4) 해양에서의 통항제도와 관련하여 비교한다면, 허가승인제도는 사전통고제도(Prior-notice of passage)보다 훨씬 강력하고 배타적이며, 사전통고제는 통과통항제도(Transit Passage)나 무해통항(Innocent Passage)제도보다 배타성이 강하다. 즉 허가가 신고보다 훨씬 배타성이 강하다. 김달중 외, 『한국과 해로안보』, (법문사), p.344, 552참조.

5) 3. 일방의 군사통제지역에 들어가며 다시 돌아오는 데 대한 허가는 정전협정 제8항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부여하며 각방 사령관이 개별적으로 또 그들이 각기 원하는 대로 이를 처리한다.

“AGREEMENT ON ENTRY INTO AND DEPARTURE FROM THE DEMILITARIZED ZONE BY CIVILIANS” INDEX TO AGREEMENTS SUBSEQUENT TO THE SIGNING OF THE ARMISTICE AGREEMENT TAB “F”(Revised 23 March 2017)

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 측 의제의 원안 중에는 38선을 따라 설치된 모든 군사요새를 철거하고 관측초소만을 설치하며 통제허용제도(System of Controlled Permits)에 따라 다음과 같은 사람이나 물건이 미·소군사책임분계선을 통과하도록 허용한다고 했다.

a. 다음과 같은 사람
1. 영주를 위해 귀향하는 사람
2.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
3. 공무를 수행중인 사람
4.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
5. 특별히 합의된 사람
b. 생산재와 소비재
c. 모든 종류의 운송수단

(Report of POLAD H. Merell Benninghof, Feb 15, 1946, sub : United States-Soviet Joint Conferenc, Transmission of copies of certain documents in connection therewith-To Secretary of State : 740.00119 Control(Korea)/2-1546; C.L.호그, 『한국분단보고서 상』(풀빛, 1992), pp.392-394.) 이 안이 합의되진 않았지만 당시 38선 통과제도가 통제허용제도를 표방하면서도 실제 내용에선 거의 모든 민간인에 대한 자유왕래를 보장해주고 있는 점에서 정전협정의 사전허가제도보다 훨씬 덜 배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도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의해서도 배타성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7) Democracy는 Demos(지역민)와 cracy(정치)의 합성어인데 지역에의 거주와 통과가 자유로운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상정된 것이다. 따라서 한 지역에의 거주, 통과가 배타적권력에 의해 거부된다면 정치를 통해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되는 것이다. 황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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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엔사의 DMZ출입통제 문제점과 해결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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