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비무장지대로부터의 사색 – 베네딕트수녀회 빛둘레 기고글 2019.9.20
베네딕트수녀회 소식지인 빛둘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지면제약상 전체글을 다 싣지는 못하게 되어 원문을 여기에 싣습니다.
비무장지대로부터의 사색
사진가 이시우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쏘아댔다던 처절한 총성은 이제 이 골짜기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쏘아도 맞출 수 없었던 공포대신 처연한 신록의 해일이 산하를 덮습니다. 그리하여 봄이면 새로이 태어나는 아! 연두빛 조국’
적대
땅위에서 일어나는 적대행위는 대립관계에서 시작됩니다. +1과 –1은 대립됩니다. 그리고 이 경우 대립의 결과는 0입니다. 이는 마치 동쪽으로 한걸음을 간 뒤 다시 서쪽으로 한걸음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음과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로의 복귀입니다. 동쪽 일보와 서쪽 일보의 대립은 상쇄되어 사라지지만 그러나 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길 자체는 아무런 대립도 없습니다. 길 위에 선자들의 대립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동·서 일보의 대립은 길 자체의 무관심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엔 동·서 일보의 대립과 길의 무관심이 대립합니다. 땅은 전쟁에 무심하지만 전쟁의 대립관계에 의해 땅 역시 대립물이 됩니다. 그리고 땅은 영토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정치적 생명을 시작합니다. 전쟁과 무관했던 자연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구조입니다.
경계
경계는 한계입니다. 어떤 것의 성질은 한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나’라는 규정은 곧 나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한계는 나 아닌 것, 나의 타자이기도 합니다. 나를 규정하면서 나를 부정하는 이중성이 한계입니다. 아픔은 생사의 경계입니다. 생명 속에 들어온 죽음, 죽음 속에 들어온 생명이 아픔으로 자기 존재를 나타냅니다. 아픔이 치유되면 생이고 아픔이 심화되면 죽음입니다. 그리하여 생·사의 중심은 아픔입니다. 경계가 중심입니다. 생사의 중심이 아픔이듯이 사회흥망의 중심도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무장지대는 우리의 경계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중심입니다. 경계는 남·북 그 자체이면서 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타자입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를 영토의 경계로 선포하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한민족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남북의 경계는 한반도가 아니라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입니다.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삼지 않으면 북은 남을 수복해야 할 지역으로 볼 것이고, 남도 북을 수복해야할 지역으로 볼 것입니다. 수복이란 말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다는 것이고, 남이든 북이든 한편이 항복하고 투항하지 않는 이상 수복을 실현할 방법은 전쟁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통일을 수복으로 생각하는 한 땅은 가장 적대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기간 경계를 인정하고 살아야할 운명입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비무장지대는 평화지대로 이름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경계로는 여전히 남습니다. 통일협정이 체결되면, 예를들어 연합제는 말할 것도 없고 연방제식으로 통일협정이 체결되더라도 평화지대는 다시 이름을 바꾸겠지만 경계로서는 여전히 남습니다. 따라서 연방제통일을 뛰어넘어 모든 체제와 제도가 통일되는 자주독립국가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가능할지 바람직할지를 별개로 하더라도, 이 경계선은 남북을 규정하면서 남북이 아닌 타자로 존재할 것입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남북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상대를 대할 것인가의 모든 태도를 결정합니다…….
글 베네딕트수녀회원고-비무장지대로부터의 사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