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키나와평화기행’ 내용 일부수정
졸저 ‘제주오키나와평화기행’(도서출판 말)p.428(첨부화일)에는 김달삼이 대정읍 하모리 이종우의 집에서 해주인민대표자회의에서 발표할 문건을 작성했다고 적혀있다. 이 부분을 수정한다. 이종우의 집이 아니라 이공우의 집이었다. 사진의 하모 중앙로 67번길 일번지가든 옆 주차장 역시 이종우의 집터가 아닌 이공우의 집터이다. 이종우에 대한 다른 기록은 그대로 유효하다.
필자는 올해 3.31-4.5간 제주에 내려가 취재하던 중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원래 자료에 이공우란 이름을 보았으면서도 이공우는 4.3에서 생소한 이름이었기에 김달삼의 친구였던 이종우의 오기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공우는 실존인물이고 4.3희생자였다. 더구나 이승진(김달삼의 본명)과 마찬가지로 고부이씨 종친이었다. 이 주차장터의 서편에는 이운방선생의 집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이공우의 집이 다시 이공우 집의 동쪽으로 오대진선생의 집이 있었다. 이운방은 4.3당시 제주남로당 대정면책이었고 오대진은 제주도 인민위원장이었다. 이운방, 이신호, 이도일, 이공우, 이승진 모두 고부이씨 벽동공파로 원근은 있으나 종친들이었으므로 이공우의 집에 이승진이 머무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운방선생이 저술한 ‘미군점령기의 제주도인민들의 반제투쟁’에 의하면 김달삼은 48년 6월 하순경 이공우의 집에서 20여일 머물렀고 직접 대면하여 토론도 하였다. 이운방선생 생존시 증언을 들은 김웅철선생에 의하면 이공우의 집에서 해주인민대표자회의에 보고할 문건을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시기상으로 크게 어긋나지 않으므로 이운방선생의 증언에 신빙성이 높다 하겠다. 이공우는 12월 13일 이교동 대합실 앞 밭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참고로 이종우의 집은 대정면 하모리 1045-1이다. 2층집이었으나 지금은 헐리어 주차장이 되었다. 일제때 찍힌 그의 집 사진에 의하면 지금의 신영로길 초입은 그의 집 마당 화단이었다. 집 일부가 길에 포함된 것이다. 모슬포제일교회가 보이는 신영로 초입이다. ‘이제야 말햄수다’(189-190쪽)에 의하면 1944년 3월 광주사범학교로 진학했다.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님로당인민해방군’조직표등에 의하면 이종우는 농업부장으로 되어 있으나 이삼룡의 증언에 의하면 선전부장이었다고 한다. 48년 4월15일 4.3이후의 정세를 평가하고 향후를 전망하기 위한 도당대회가 조천면 선흘리에서 열렸는데 이종우는 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윤창석이 감장했다가 이삼룡의 부친에게 연락해와 이삼룡의 밭에 시신을 수습했다. 이삼룡의 집은 모슬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