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히데토 선생님의 광주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강의 안내 2019.4.12

기무라 히데토 선생님의 광주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강의 안내 2019.4.12

조선학교의 판결을 봐서 느끼는 것

나가사키. 기무라 히데토

1.안녕하세요. 기무라 히데토라고 합니다. 이번 5.18에는 민주화운동을 배우고자 해서 일본에서 사람을 모집하여 올 예정입니다. 그래서 예비답사로 온 것입니다. 근데 박승훈 목사님이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시니까 기쁘기도 하고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기도 합니다. 근데 왜 그런지 모르지만 목사님이 너무 저에게 알맞은 제목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계속 질문한다>니. 벌써 76세 그쪽에 가는 준비도 해야 하는데 나이값도 못하고 철도 없이 여기에 있습니다. 재미 없고 실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좀 걱정도 됩니다만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2.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본에서 연호와 관련해서 지금 시끄럽습니다. 시끄럽다고 한 것은 제가 연호 제도 자체에 좀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겁니다. 한국에서도 광개토대왕 때 <영락>이라는 연호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임금 및 지배자와 관계가 있는 모양입니다. 나 같은 민중에게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명치 시대 이전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경사이든 재액이든 일어나면 연호를 바꿨다고 합니다. 1200년대에서는 74일 밖에 안되는 연호도 있었다고 합니다. 명치 시대가 시작하면서 천황이 바꾸면 새로운 연호 (일세일원) 제도가 시행되었디고 합니다. 일왕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명치가 시작한 후 5년, 징병제와 학교령이 내렸습니다. 징병제, 학교,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드려고 한 겁니다. 그때까지 천황이라는 존재를 몰랐던 민중들이 학교, 징병이라고 해서 자식들을 빼앗기는 무서움을 경험했을 겁니다. 그래서 천황을 신격화하여 천황에 위해 목습을 바쳐야 한다는 교육을 하여 그 결과가 갖고 온 것이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이며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쇼화천황 히로히토는 전 후 인간선언을 했다고 합니다. 1941년에 발표된 전쟁 때 군사들이 지켜야 하는 훈계(전진훈)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에게 내리는 전쟁에서의 훈계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오명을 받지 말라>라는 훈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포로가 되기보다 오히려 아싸리 죽어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원 옥쇄라는 말을 사용한 겁니다. 아시아 사람을 3000만명 죽이고 일본 사람은 300만명 죽던 전쟁이었습니다. 왜 그 책임을 지지 않았을까? 신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왜 책임과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한국 국회 부의장 문희상씨는 <일본을 대표하는 천황이 사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사람이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지 않는가>라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1988년12월 <천황에 전쟁 책임이 있다>고 시 의회에서 답변한 나가사키 모토시마 시장은 여러 가지 괘롭힘을 받았지만 발언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가 1990년1월 우익 사람에게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퇴위하는 천황은 사죄하려고 했는가? 2001년에 <환무(桓武)천황> (737년부터 806년까지 재위)의 생모는 백제 무령(武寧)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라는 역사서에 기재되어 있다>고 기자회견에서 발언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도교 가까이에 있는 고려신사를 참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고구려를 의미합니다.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고구려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세운 신사입니다.

이번 연호 레이와(令和)는 일본 최초의 운문집<만엽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 初春令月、気淑風和 (초봄의 길한 달, 기운 맑아서 바람 평온하니) <만엽집>
# 仲春令月、時和氣淸 (중봄의 길한 달, 때는 평온하고 기운이 맑다)
<문선>

후자는 중국 후한(後漢)시대 장형(張衡)이 지은 <歸田賦(귀전부)>에 나온다고 합니다. 어느 쪽도 令자와 和자가 있고 글 구조도 비슷합니다. 그래도 아베 수상은 처음으로 중국 고전에서 벗어나고 일본 고전에서 연호를 결정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아베 수상다운 속임수입니다.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일종의 역사왜곡이 아닌가요.

3. 3월14일 기타규슈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 지원금 재판이 있었습니다. 저는 멍청하게 서울 친구에게서 재판을 지원하기 위해 온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서울에서도 오시는데 나가사키에서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3월15일은 후쿠오카와 부산 간의 페리를 예약해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취항 15년 기념으로 편도 1500 엔으로 표를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맞아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배운다는 여행을 기획했습니다, 14일이 가는 사람 이름을 집계하는 날이었으니 갈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에게서 사진과 패소 소식이 왔습니다. 너무 안타갑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재판 내용을 검토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패소한 겁니다.
(바다 건너, 우리학교를 소개합니다)라는 비디오가 있으니 좀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시간은 6분입니다.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소송의 쟁점과 판단
오사카 지방재판소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조선학교 무상화 제도의 대상에서 제외
정치적 의견에 기초한 판단으로 문부 과학상의 재량 법위를 일탈하고 있어, 위법, 무효 문부과학상의 재량 법위 내, 학교가 무상화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은 이유로 적법
학교의 운영은 적절한가
이사회가 게최되고 있으며, 재산목록, 재무제표 작성, 법령 위반의 행정 처분도 받지 않았끼 때문에 적절 북한과 조선총련에 의한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으며, 취학자원금을 지급 해도 적절히 수업료로 사용될지 우려됨
조선총련에 의해 학교가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는가
교육에 일정정도 관여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사정에 비춰봤을 때 적정성를 결여했다고 인정할 수 없음. 정부가 지적하는 보도도 합리적인 근거로 증명되지 않음 일부 보도와 과거 민사소송 사건의 판결 등에서 조선총련과의 밀접한 관계가 의심됨. 개선되었다는 보도도 없음

이것은 2017년 오사카 지법에서 조선학교가 승소한 것에 관한 기사입니다. 오른쪽은 히로시마 지법에서 패소한 기사입니다. 오사카 승소 판결은 2018년 오사카 고등 재판소에서 조선학교가 패소했습니다. 논쟁점을 잘 정리한 설명이니까 잘 보세요.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한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것으로 문부과학상의 재량 범위를 일탈하고 있고, 학교 운영에 관해서 북조선과 조총련의 영향력이 있기는 있지만 취학지원금이 수업료로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라는 주장도 각하되었습니다. 조총련에 의해 학교가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조총련과 조선학교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일정 정도의 영향은 있겠지만 적정성을 결여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가 제출한 우익 산케이신문의 자료는 합리적인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무상화, 취학금 지원제도는 국제인권규약을 비준한 일본정부로서 제13조 <고등교육은 모든 방법에 의해, 특히 무상화 교육을 점진적으로 도입하여 능력에 따라서 모든 분들에게 균등하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를 지키기 위해 민주당 하토야마 정권이 들어섰을 때 실현되었습니다.

2010년에 실시된 후 조선학교도 그 제도에 해당되느냐 심의하고 있었을 때 <북조선 납치 사건에 의해 납치당한 가족 모임>이 ‘조선학교에 국고 보조금 지급을 졸속으로 결정하는 것에 반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11월 북조선이 연평도 포격 사건 때 당시의 수상 간나오토는 조선학교 심사를 동결했습니다. 2013년 자민당 정권이 다시 복귀되며 <조선학교에 대해서 납치 문제가 진전이 없고 조총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교육 내용, 인사, 재무 등에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 현재 조선학교를 지원 대상으로 하는 것에 대해 국민의 이해를 얻기 어렵다고 해서 규칙을 개정하여 10개 조선학교에게 <불지정> 을 통지했습니다. 바로 고등교육의 기회 균등을 도모하는 고교 무상화를 북조선, 조총련 관계에서, 달리 말하면 외교적 관점에서 조선학교를 배제한 것입니다.그래서 UN 인권조약 심사위위회에서 일본 정부의 대응은 민족 차별에 해당되니까 개선해야 한다고 권고를 몇번이나 받았습니다. 행정부의 민족 차별 정책에 사법부까지 동조한 결과가 이번 판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북조선의 미사일 발사에 대응하여 J-Alert System (전국 순시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여 전국에서 공습경보가 울리는 상황도 만들어 내었습니다.미사일이 통과한다고 하는 지역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책상 밑에 기어드는 훈련까지 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전시 중의 훈련을 재현한 것입니다.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해서 교사들도 할 수 없이 그 지시에 따르기는 했습니다. 누구도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 상황이 일본 전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적을 가상하여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국내를 지배하려고 하는 아베수상의 작전입니다. 만화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따라서 움직이는 일본 사회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반도 출신자 특히 북조선계 사람들이 사회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입에 올리는 것도 가당찮은 증오의 말을 던졌습니다. 헤이트 스피치(증오 언설)라고 합니다. 일장기를 드는 일단이 한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 신주쿠 오쿠보 등에서 시위를 합니다. 그들의 격심함은 태극기 부대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조선학교를 일본에서 쫓아내라, 조선인을 죽여라>등.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왜 그렇게 되는 겁니까? 일본 사람이 안고 있는 불안감이 그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4. 전 후 미국의 정책으로 일본에서는 민주화를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재벌 해체, 농지 개방, 조합운동 용인, 학교교육의 개선 등의 시책을 행했습니다. 1947년 “국민 생활 개선, 요시다 내각 타도” 등 슬로건으로 총동맹 파업이 제기되었습니다. 점령군 사령부(GHQ)에 의하여 중지되었습니다. 미국의 민주화 정책은 냉전 상태를 대비하여 반공 정책으로 바꿔서 1950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가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빨갱이 추방(red purge)을 행했습니다. 6.25가 일어난 1950년 재일 미군이 한반도에 이동하게 되면서 일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위대 전신인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고 1954년 자위대로 개조했습니다. 일본 평화 헌법 제 9조에서는 <전쟁 방기,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이 기재되어 있습니다만 주권국가로서 고유한 자위권을 방기한 것이 아니다라는 속임수로 발족된 것입니다. 자위대를 반대하는 세력과 찬성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은 그 후 계속해 왔습니다. 일본 사람에겐 타데마에(평화헌법)과 혼네(자위대의 존재)의 이중구조가 있고 그 이중구조가 일본사회에 분열을 초래했습니다.과거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여 평화국가 건설을 목표로 내세우는 세력과 경제 살리기를 제일로 하여 과거사를 생각하지 않은 세력입니다. 후자는 대대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한국,대만을 식민지화 했는데도 말입니다. 1950년 6.25를 계기로 하여 일본 전후 경제는 회복되었습니다. 1955년부터 1975년에 걸쳐서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 시대였습니다. 그 기초는 6.25 특수였습니다. 10% 가까운 경제 성장율을 달성한 시대 였습니다. 1968년 국민 생산은 세계 제2위를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동양의 기적(Japanese Miracle)>이라고 합니다. 한강의 기적이 생각납니다.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망각한 시절이기도 합니다. 일본인의 자부심은 <평화국가 건설>에서 <경제 대국>으로 바뀌어 꿔가는 시기입니다. 당시 일본 사람을 표하는 말으로서 Economic Animal이 사용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갔을 때 일본 거품 경기가 무너지고 불경기로 돌입했습니다. 20년간 계속된 경기 침체이며 <잃버린 20년>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아직 그때의 불경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현재 일본 경기의 실정입니다. 경제 대국 일본을 자신의 자부심으로 여긴 사람들이 의거하는 데를 잃어버리고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자민당의 분열, 그리고 야당 연합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습니다. 종군 위안부 문제도 이런 와중에 제기되었습니다. 1995년 사회당 무라야마 수상의 담화가 나와서 아시아 여성기금이 발족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으로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諸國)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하지만 아시아 여성기금은 국회결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할머니들 모두에게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야당 사회당은 권력욕, 정권 유지에 눈이 뒤집힌 것인가? 일미 안보조약 긍정, 원전 긍정, 자위대 합법 등 노선을 180도 바꾼 셈입니다. 사회당은 그렇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민중과 손을 마주잡지 않은 권력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알게 합니다. 촛불 시위가 만든 문재인 정권과 완전히 다릅니다. 정치가들의 야합으로 이뤄진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런 정치 상황, 견제 상황 밑에 민중들이 꿈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하여 사회당에 대한 무관심이 번지고 이른바 오타구 문화(개인적인 취미의 세계)가 유행한 것입니다. 사회가 자신감을 상실한 와중에서 외치는 소리 <일본을 되찾아라>라는 선거 슬러건을 들고 나타난 사람이 아베 신조였습니다. 누구에게 뻬앗긴 일본인가. 그들은 과거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는 사관은 <자학 사관(스스로 자기를 학대하는 사관>이라고 해서 비판을 하여 그것을 대신한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조직하여, 종군 위안부는 없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 산업화한 나라(명치 일본 산업화 세계유산)을 선전하여 센카쿠 열도과 독도의 영토 점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도교도 지사 이시하나 신다로가 미국 워싱턴에서 센카쿠 열도를 사들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영토 분젱은 국내가 혼란할 때 적을 만들고 긴장감을 조성하여 국내를 통합하기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평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국방, 영토분쟁은 국내 통치를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오기 전에 기타규슈에 있는 조선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라면 법리적으로 통용하지 않는 이유로 조선학교 무상화를 각하한 판결입니다. 교육 문제를 외교상의 이유로 각하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학교 판결문을 입수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날의 저녁 고쿠라에서 변호사, 조선학교 교사, 지원자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도 참석했습니다. 일본에서 4월7일과 21일 지방 선거가 있습니다. 그 선거에 재특회 (재일 조선인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에서도 입후보자가 있습니다. 선거운동을 이용해서 조선 학교를 비판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서 그 대책 회의였습니다. 재특회는 조선학교 지원자들이 하는 카운터 반격도 미리 대비하여 그것을 켐페인에 이용한다고 합니다. 항의하는 모습을 촬영하여 SNS에 투고 하는 의도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학교 지원자들이 선거 방해를 했다, 일본의 법률을 지키지 않은 조선학교라는 흐름으로 배외주의 켐페인을 하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조선학교 아이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까라는 대책회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재특회가 조선인이나 조선학교의 이름을 들고 비난 공격하지 않는 한 그들의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2016년 일본에서도 벌칙은 없지만 헤이트 스피치 방지 법안은 생겼습니다. 언론의 자유와 인권 양자의 균형을 맞추기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2016년 교도 조선학교에 대한 재특회의 방해를 인종 차별로 학교 200미터 이내에서 가두 시위 금지, 1억2000만원의 벌금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SNS에서는 그런 차별 용어가 남무하고 있습니다. 대책으로서 사전에 경찰, 범무국에 주의하기를 요청하고 재특회 후보의 선거운동, 특히 조선학교에 가까운 기차역 주변에서 하는 선거 운동에는 지원위원회에서 감시원과 기록 담당원을 파견하기를 결정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나가사키에서는 재특회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재일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기타규슈에서는 일상적으로 차별 언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2년동안 우익 단체에 소속한 적이 있는 아매미야 가린이란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프리터(알바만 하면서 생활을 함)였다.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불경기 때 알바를 하는 데 ‘시급이 비싼 일본 사람보다 시급이 싼 한국 사람으로 바꾸고 싶다’ 라는 말을 일방적으로 들었다. 그것은 일본 젊은 노동자가 처음으로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은 순간이었다. 그때 제가 그들과 자기를 차별화하기에 위해서 발견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국제 경쟁의 밑바닥에서 최저 임금 경쟁을 해야 하는 나는 거기밖에, 일본인이라는 개념밖에 매달릴 데가 없었다. 당시 홀로 상경하고 있던 나는 어디에도 소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 지역 사회, 학교, 회사라는 중간 단체 부재는 단번에 <국가>로 향하게 되었다.”
불경기 가운데 소속할 데도 없는 사회 하층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접근하는 데가 우익 단체이며, 국가 나셔널리슴이였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평화세력은 나셔널리슴을 너무나 등한시해서 온 것이 아닐까? 저는 어렸을 때 오히려 무정부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 국기도 국가도 싫습니다. 히스테리적으로가 아니라 자기가 소속할 수 있는 사회를 상정할 때 사회가 분열되어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한국에서 수년 전부터 들은 <화해>라는 말이 절실하게 생각납니다. 화해라는 주제를 갖고 있는 집단은 소수인데도 다수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스톤워크 코리아라는 평화 행진을 한국에서 했을 때 이시우라는 사진작가의 석방 요청서를 써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때 서울 구치소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류되어 있던 작가의 석방 요청서였습니다. 저는 그 사진작가를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그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국가보안법을 껴안고 살아간다>라는 표현을 읽었습니다. 놀랐습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체포 당하면서 국가보안법을 껴안고 살아간다니. 사회 전체를 포용하려고 하는 평화사진작가를 발견했습니다. 지뢰 피해, 철거를 열심히 호소하는 작가이기에 하루 빨리 석방해 달라는 탄원서를 썼습니다. 나중에 그의 <민통선 기행> 이란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38선에 서서 평화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고찰하는 책이었습니다. 경쟁 사회인 자본주의 속에서 실은 고통스러운 투쟁이라고 느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그런 발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헤이트 스피치로 달려가는 젊은이들을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매년 3월 말, 벚꽃이 필 때, 일본 고교생 20명 가량과 부산과 합천을 방문합니다. <만명 고교생 평화 서명운동>이라고 합니다. 일본 전국에서 모이는 고교생과 후쿠오카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 안애서 일한관계 역사를 배웁니다. 학생들이 한국에서도 피폭자가 있는 것, 그리고 강제연행에 대해서 배웁니다. 부산에서 <일제 강제 동원 역사관>을 방문합니다. 지난 몇년 동안 학예원 선생님이 안내해 주십니다. 입구에 있는 징용자가 출발하는 가족 사진 앞에서 선생님은 설명하면서 이런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집니다. <징용 당한 사람은 한국인만이라고 생각합니까?> 학생들은 과거사를 배워서 왔기 때문에 한국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강제 동원의 실태를 자세히 알고 싶어서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징용 당한 사람은 한국인만이라고 생각합니까?> 선생님은 <일본 사람도 징용 당했습니다. 누가 원해서 살인 현장인 전쟁터로 갑니까? 일상 생활을 빼앗기고 탄광, 군수공장에 갑니까? 징용은 강제 동원이기도 하면서 인권 유린이기도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학생들의 딱딱한 표정이 사라지며 마음을 열고 사고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죄책감으로 닫힌 마음은 인권문제로 파악할 때 좀 자유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강제동원, 성차별, 마이노리티 차별 등을 인권문제라고 파악할 때 더 넓게 생각하여 주변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 사람 앞에서 실례되는 말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있다면 지적하여 비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