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포트킨2009/10/11
이 원고는 미 발표원고 입니다. 저를 비롯해 여러사람이 공저자인 우사 김규식 통일독립의 길을 가다(통일뉴스출간)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원고분량을 조절하면서 이 부분은 빼기로 하였습니다.
책은 몇달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부분도 추가하여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크로포트킨
이르쿠츠크를 향해가는 동안 우사일행이 경험했던 시베리아 소읍들의 풍경은 유배지로만 알려졌던 어두운 이미지를 교정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우딘스크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소읍은 모두다 상상이외로 높은 그 문화수준으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제정시대의 전제정치는 모든 진보적 정신을 류형, 기타의 박해로 이곳 시베리아로 쫒아 보내었으므로 이 추방당한 망명가 유형수들의 교양과 문화가 어디선가 이곳에 씨를 떨어트려서 색다르게 높은 문화수준과 놀랍게 세련된 교양과 취미가 말하자면 일반적 몽매의 광범한 초원의 이곳저곳에 화려한 꽃과 같이 점철되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그 높은 향기로 뜻하지 않은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흔히 이르쿠츠크를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비유하지만 두 번이나 이르쿠츠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나에겐 이 비유가 적절치 않다고 느껴졌다. 뭔가 감추어졌던 문명을 기대했다가 어설픈 파리의 모조품정도로 이르쿠츠크를 냉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사일행이 느꼈던 높은 문화수준을 일구어낸 유배자들은 1825년 차르 전제정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들이었다. 데카브리스트혁명은 러시아혁명의 기점이었다. 그들은 사형당하거나 이르쿠츠크, 치타로 유배의 삶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영향력은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말을 타고 20여일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이르쿠츠크에서나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혁명가들에겐 감옥이었지만 혁명을 동정하는 이들에게 데카브리스트들의 제2의 고향 이르쿠츠크는 커다란 빚이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세계 5대 자서전에 꼽히는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에는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감정으로부터 그의 혁명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근위학교시절 나는 일요일과 휴일을 큰어머니인 미르스키공작 부인의 집에서 지냈다. 혁명적 사상과 관련이 있을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애교넘치는 미인이었던 사촌누이의 집에서 나는 처음 혁명적인 문헌을 접했다. 그 무렵은 유명한 망명객인 헤르첸이 런던에서 잡지를 창간하여 러시아 민중은 물론 궁정사람들까지 동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헤르첸의 잡지는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사촌누이는 모종의 경로를 통해 그것을 입수했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읽었다. 그녀는 차르의 통치를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해물로 인식하고 반발했다. 나는 잡지의 표지에 인쇄된 초상화를 숭배에 가까운 감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표지에는 1825년 12월 14일의 폭동후에 니콜라이1세에게 처형당한 12월당원들, 베스투제프, 카호프스키, 페스텔, 릴레예프 무라비요프, 아포스톨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훗날 유라시아를 흔든 사상가 크로포트킨은 유배가 아닌 부임으로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황실근위대로 출세가도가 열렸던 자신의 미래를 버리고 변방의 장교를 자청하여 부임해 온 것이다. 유배와 부임은 큰 차이가 있다. 유배된 혁명가인 바쿠닌도, 트로츠키도 이르쿠츠크는 하루빨리 탈출해야할 감옥일 뿐이었다. 그들이 대도시의 권력과 그것을 전복할 조직을 향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다면 크로포트킨은 반대로 대도시의 권력을 뒤로하고 소박한 시베리아소읍의 촌락공동체를 끌어안음으로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르쿠츠크의 토양이 길러낸 세계적 사상가는 단연 크로포트킨이다. 나는 이르쿠츠크가 파리와 비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크로포트킨을 통해 깨달았다. 크로포트킨은 이 먼고장에서의 직접적 관찰을 통하여 “모든 커다란 역사적 사건 안에서, 심지어 전쟁기간에도 무명의 대중들이 수행한 역할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결국 지도자와 익명의 대중이 각각 맡았던 역사적 역할에 관해서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개진했던 견해를 공유하게 된다.
촌락공동체의 생활방식을 보면서 형제애를 기반으로 한 반(半)공산주의적 조직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러시아개척민의 이주정책이 거의 실패하는 상황속에서 그들의 이민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원주민들과 생활하면서 문명의 영향력이 없어도 복잡한 사회조직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없는 민중이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전쟁까지를 포함해-을 완성하는 것을 목격한 나는 이들의 역할을 실감하게 되었다.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가 표현한 것처럼 지도자와 민중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주의 집에서 자란 나는 많은 청년들처럼 지휘와 명령과 징벌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어른으로서 대접받으며 하찮은 실수라도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들을 수행해야 했던 나는 명령과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상호이해를 원칙으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점을 깨닫게 되었다. 전자는 군대에서 열병하는 것에는 효과가 컸으나 실생활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 목적은 많은 사람들이 뜻을 한데 모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만이 실현될 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견지해 온 신념을 시베리아에서 모두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아나키스트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수도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머물면서 행정기구의 중개를 통해 민중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삶의 원동력은 언제나 사람들의 공동노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시베리아 체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경험과 지식도 그것을 체현한 새로운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면 아직 관념일 뿐이다. 그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정착한 이후 불과 수십년동안에 형성된 이르쿠츠크의 새로운 형의 사람들과 호흡하게 된다. 그것은 투르게네프 같은 탁월한 작가조차 미처 포착하지 못한 인간형이었다.
젊은 니힐리스트 여성들은 ‘인형의 집’속에 갇힌 인형이 되어 재산 때문에 강요당하기 보다는 저택과 비단옷을 포기하는 편을 택했다. 그녀들은 초라한 검정 모직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독립적인 생활을 위해 고등학교를 다녔다. 여성들은 사랑도 우정도 없는 결혼은 진정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적으로 부부일지라도 사랑이 없다고 판단되면 남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여성들은 독신으로 살거나 자녀들과 함께 가난에 맞섰다. 관습적인 생활 밑에서 영원히 자신을 속이기보다는 외로움과 빈곤을 택했던 것이다. 니힐리스트들은 사소한 일상생활도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관습적인 미사여구 대신 무뚝뚝하고 간단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우리는 매주 한번 씩 클럽에 모여 무도회를 열었다. 남성 니힐리스트들이 여성을 대할 때, 그들은 인형이 아닌 인간적인 동료를 원했고 여성을 ‘연약한 존재’로 여겨 과도한 예의를 차리는 것을 거부했다. 여성도 동성친구를 대하듯 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여성이라도 배우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매일 밤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라도 걸어갔다. 러시아의 2대소설가 투르게네프와 곤차로프는 작품 속에서 이 새로운 인간형을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곤차로프는 ‘단애’에서 한 실존인물을 통해 니힐리스트를 풍자하려했으나 전형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니힐리스트들에게 찬사를 보냈던 투르게네프의 니힐리스트주인공 바자로프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개인의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며 모든 허위를 부정하는 니힐리즘은 거대한 목적을 위해 살지 않고 평등하게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들의 진일보한 사상이었다.
실로 5년 동안 이르쿠츠크와 시베리아는 그에게 인생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참된 가르침을 주었다. 그의 가장 탁월한 저작중의 하나인 ‘상호부조론’ 역시 이르쿠츠크와 시베리아에서의 체험과 영감으로부터 연유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다윈 추종자들은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하여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물학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면서 상호부조를 최고조로 발전시킨 동물종들이야말로 늘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며 가장 번성하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증명하였다. 또한 언제 어디서고 농민들은 전쟁이나 강제징수 때문에 멸망하지는 않았고 꾸준하게 자신들의 경작법을 개량해 왔으며, 촌락공동체는 천년이상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크로포트킨은 ‘빵의 약취’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아나키는 코뮨주의로 통하며, 코뮨주의는 아나키로 통한다. 양자는 다같이 현대사회의 지배적 경향인 평등의 추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은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했고, 혹은 실험해온 공산제의 역사를 검토한 바, 그들이 실패로 끝난 원인이 위로부터의 권력이 눌러 억지로 배당한 평등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그러한 권력지배를 제거함으로서 비로소 공동체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고 논증한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자간에 논의되던 문제인 노동생산물의 분배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대해 그는 노동시간이나 노동의 질의 차이가 아닌 욕망을 분배의 기준으로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이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취한다’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분배의 기준을 욕망에 둘 때 사회질서가 엉망이 되리라는 반론도 있었다. 그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본래부터 결코 필요 이상을 구하지는 않으며, 각자의 필요량은 저절로 정해져 있다. 인간이 자기의 필요 이상을 바라는 것은 그 물자가 부족할 때나, 부족할 우려가 있을 때여서, 물건이 풍부해지면 저절로 코뮨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생산력이 인간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 줄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생산력을 그 단계까지 높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원칙에 근거해서 생산을 재편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할 때, 혁명에 의해 생산수단의 수용과 그 재편성을 단행하고, 생산력의 급속한 상승을 꾀할 경우, 그것이 코뮨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단계에 달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세월이 소요될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도기의 분배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또한 이 기간의 정치양태와도 관련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어찌된 셈인지 이 중대한 과도기에 있어서의 운동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것이 없다. 이점이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유라시아의제로까지 발전하지 못한 한계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10월혁명때까지 볼셰비키의 아나키스트에 관한 정책은 공동투쟁이었지만 혁명에 승리하고 권력을 잡은 다음부터는 조직적인 소탕작전으로 변했다. 특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후에 사회혁명당원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1920년 10월 초 소비에트 권력은 우크라이나에서 표트로 브랑겔 남작이 이끄는 백군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 싸움에 밀리게 된 데서 적군은 아나키스트인 마프노 농민자위군의 협조가 필요해졌고, 마프노와 다시 화해하여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 동맹의 협정에 따라 투옥되거나 추방당한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석방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어디서나 공공연히 활동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 덕으로 기소가 각하되고 몇 사람의 투사가 석방되었다. 그런데 브랑겔이 패퇴하고 위기를 넘기자 소비에트적군은 마프노의 대음모가 적발되었다며 이들을 역습하고 다시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격렬한 탄압을 시작했다.
11월 말 트로츠키의 적위군은 합법적인 회의를 열려고 하리코프로 모여든 각지 아나키스트들을, 패퇴하여 은신중인 브랑겔과 함께, 일망타진하였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으며, 마프노농민군의 양친과 처자들까지 인질로 잡아갔다. 크로포트킨이 죽기 바로 3개월 전이었다.
크로포트킨의 영향력은 아시아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크로포트킨의 저술들이 우리 글로 소개되기 시작한 연대를 적확히 고증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략 3.1운동 이후 항일 독립운동 지사들 사이에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던 때와 시기를 같이할 것으로 추측된다. 1920~1922년 무렵 국내에서 발간된 개벽, 공제, 아성, 신생활등 잡지에는 크로포트킨등 무정부주의에 대한 글이 빈번하게 소개되는 등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등이 혼재되면서 그 내부에 분화가 일어나는 시기였다.
한국의 신채호, 이회영, 김산, 중국의 스푸 빠진,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오스기 사카에(大杉榮)등 아시아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들이 모두 크로포트킨주의자였다. 중국의 저우쭈어런(周作人)은 크로포트킨의 ‘시베리아기행’을 번역하여 민보民報24호(1908.10.10)에 게재하였다. 그는 또 천의보天義報에 발표한 ‘러시아혁명과 아나키즘’이란 글에서 크로포트킨의 ‘한혁명가의 자서전’에 나오는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저우쭈어런은 크로포트킨의 이론을 중국에 가장 먼저 전파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1920년대 초의 ‘노동공제회’ 기관지 ‘공제’ 7호에는 ‘개미와 벌의 상호부조’가 소개되었고, 같은 호에 無我生 옮김의 ‘청년에게 소함’이 실려 있다. 1928년 6월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의 ‘탈환’ 창간증보호에도 晦觀 옮김의 ‘청년에게 소함’이 보이는데, 역자 주로 이 글의 원문은 크로포트킨이 프랑스에 체류할 때 불어로 저술한 것으로 이미 세계 20여 개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조선말로도 일본 동경의 “근독사”에서 펴낸 적이 있으나 동지의 입장으로 옮긴 것이 못되어 오역과 누락 심하다’는 것을 지적하여 흥미롭다. 이정규李丁奎 연보(又觀文存) 1926년 항에는 London Freedom Press 간행의 크로포트킨 시리즈 ‘법률과 강권’, ‘무정부주의자의 도덕’등 10여 편의 소책자를 번역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들이 어떤 형식으로 간행까지에 이르렀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은 체게바라가 산악에서의 게릴라 투쟁중에도 읽었던 책이며 오스기 사카에가 꼭 번역하고 싶다고 했을 만큼 크로포트킨을 세계에 알린 책이었다. 이런 이유로 오스기 사카에와 만났던 여운형은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을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나키스트는 동부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의 콜챡에 대한 전투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중심인물중 하나가 카란다라시빌리였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의 고향인 이르쿠츠크해방전투에서의 승리는 아나키스트로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르쿠츠크시민공원묘지로 가는 길은 ‘카란다라시빌리거리’로 명명되어있으며 공원묘지에는 콜챡군에 대항하여 영웅적으로 싸운 빨치산동상과 함께 카란다라시빌리의 비석이 소박하게 세워져 있다. 다른 지역의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카란다라시빌리는 숙청되는 대신 등용되었다. 그리고 자유시참변의 주역으로 우리 역사와 악연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