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하여 – 베네딕트수녀회지 기고
베네딕트수녀회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올해 수녀원에서 두차례 평화강의를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천주교에 대해 아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수녀님들로부터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교육이 끝난 후 여호수아 수녀님께서 교육하면서 느낀 간단한 소감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이 있었는데 소감대신 기도에 대해 제가 갖게된 생각을 정리해 보내 드렸습니다. 제3자의 시각이라 교회의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이시우
수녀님들과 함께 교육하며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의아한 것이 기도로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었다. 수녀님들에겐 너무나 자명해 보였으나 나에겐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도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비종교인에겐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인용하는 농담이 있다. 자기를 옥수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닭이 자기를 쪼아 먹을 것을 것이란 두려움에 시달렸다. 정신과 의사는 그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시켜 그의 두려움을 치료했다. 그런데 그가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닭을 보고 놀라서 뛰어 들어왔다. 의사가 왜 다시 왔느냐고 묻자 ‘내가 옥수수가 아닌 것은 깨달았는데 닭이 나를 옥수수로 생각하고 쪼아댈까 봐 두렵다’는 것이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이 농담에는 무거운 화두가 담겨있다. 자기의 편견은 성찰을 통해 치료할 수 있지만 타자의 편견, 즉 사회나 국가의 편견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기도로는 자기의 편견을 치료할 수는 있겠지만 타자의 편견, 사회와 권력의 편견을 치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도는 정책도, 제도도, 권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에 대한 의사의 답에서 나는 단서를 얻었다.
‘나와 사회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때 이 환자의 고민은 치료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사회 속에 있고 사회가 내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이 환자는 자기를 바꾼 만큼 사회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회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사회를 바꾸는 정책의 전문성도, 제도의 안정성도, 권력의 강제성도 세상을 바꾸려는 인간의 간절함에 의해 유발되고 유지된다는 점에서, 간절한 기도는 나를 바꾸고 나의 변화를 통해 타자를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 공허하듯이 기도를 위한 기도도 공허할 것이란 생각이다. 교육을 통한 기도, 실천을 통한 기도가, 다시 기도를 통한 교육으로, 기도를 통한 실천으로 태어날 때 사회를 바꾸는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라는 그릇에 세상의 아픔이 생생하게 담길수록,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고뇌와 모색이 무르익을수록 기도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다. 간절해야 구체적이 되지만 구체적이어야 간절해지기도 한다. 간절한 자가 더 실천하지만 실천하는 자가 더 간절해지기도 한다.
수녀님들과 함께한 시간들을 회상해보니 나는 나의 의문이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왜 그토록 수녀님들이 자명하게 생각하고 계셨는지도 스스로에게 설득이 된다. 그리하여 나 역시 온 가슴으로 염원한다.
나의 눈가슴으로 인하여 세상에 그늘진 곳이 줄어들기를
나의 코가슴으로 인하여 세상이 더 향기로워 지기를
나의 귀가슴으로 인하여 세상에 묻힌 소리가 살아나기를
나의 입가슴으로 인하여 세상이 좀 더 정의로워 지기를
나의 손가슴으로 인하여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기를
나의 발가슴으로 인하여 세상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