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선원 김상용의 선택2005/11/24
병자호란과 선원 김상용의 선택
병자호란은 조선조 100여년 간의 역사를 규정한 사건이 된다. 그 중심에 김상용이 있다. 패배할 것이 뻔한 호란을 앞에두고 전혀 다른 정세인식을 한 최명길과 김상용의 선택은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선택의 문제에 대해 전략의 문제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케 한다.
지금도 안동김씨 문중에선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을 찾아보면 단연 김상용이란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이력을 간단히 살펴보자
본관 안동. 자 경택(景擇). 호 선원(仙源) ·풍계(楓溪). 시호 문충(文忠).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으며, 상신(相臣)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 ·응교(應敎) 등을 역임하고, 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였으며, 1598년(선조 31)에 승지(承旨)가 되고, 그해 겨울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주(定州) ·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를 거쳐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허락받았다. 김상용 생애의 마지막 장면은 강화남문에서 맞이하게 된다.
강화 피란 시 그에겐 종묘와 사직이 맡겨졌다. 국가의 상징이 그의 보따리에 다 챙겨진 것이다. 그가 국가 최고 원로로서의 지위로 강화에 오기까지 그의 가문은 서인세력의 실세였다. 이이가 학문을 일으켰다면 그의 제자인 김장생은 학파를 일으켰다. 이이가 예상치 못했던 붕당의 시대가 그의 그늘아래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서인은 노론을 거치며 100년간의 역사적 실세로 또한 그 이후에도 조선조 정권의 보수적 실세로 존재한다.
서인,노론 정권의 배후에는 사대부들의 권력욕만이, 붕당의 분열주의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이를 중심으로 탄생한 중국의 주자학과는 다른 조선 성리학의 이념은 이들의 사상적 바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가히 조선색이라 할만한 문화적 전통을 창조한다. 진경문화로 일컬어지는 문화적 성취가 그것이다. 한석봉의 글씨체, 겸제 정선의 풍경화, 서포 김만중의 소설,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 김창흡, 김병연등의 시들은 중국이 아닌 조선을 그리고 노래하고 한문만이 아닌 한글을 예술 표현의 수단으로 채택한다. 서포만필에서 밝힌 ‘문학은 글에서 비롯되는 거싱 아니라 말에서 비롯된다. 말에 가락과 절주가 붙음에 따라 시가되고 부가 되는 것이다’는 문학론은 문학의 주체를 글을 아는 사대부에서 말만 할 줄 알면 되는 민중으로 확장시킨 미학적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사대부로서 최고의 수위에 오른 그가 한문이 아닌 한글로, 유교의 세계가 아닌 불교의 세계로 조선이 아닌 중국과 서역을 무대로 구운몽을 쓴 것은 그러한 문학론의 실질적인 완성을 보여준다.
그가 태중에 있었던 시기에 강화 남문 폭사사건이 일어났다. 김상용을 따라 운집했던 유림중에 김익겸이 그의 부친이었다. 가장을 따라 나온 윤씨부인의 한손에는 서포의 형이 태중에는 김만중이 있었다. 질것이 뻔한 싸움에서 타협을 통한 실리를 포기하고 죽음으로써 항거한 이 장면은 서인세력의 심장에 새겨졌고, 골수에까지 사뭇친 반청의식으로 발전했다. 김상용은 피할 수 없는 패배의 순간을 죽음으로서 항거했고, 그 항거는 생생한 이념의 지표가 되었다. 결국 죽음으로서 살려낸 것이다. 남한산성에선 명분론을 이기고 최명길의 실리론이 선택되었고 그로 인해 전쟁의 피해를 좀더 줄일 수 있었지만 결국 최명길의 선택은 위기의 순간에만 설득력이 있었고 역사적 지표와 권력의 현실적인 성취를 이루는데는 실패한 셈이 되고 말았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김상용과 최명길의 차이에서 배워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