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륜의 폭력을 되새기다…4·3 70주년 기획 사진전 ‘소리없는 기억’-경향신문
[보다, 읽다]반인륜의 폭력을 되새기다…4·3 70주년 기획 사진전 ‘소리없는 기억’
제주 |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수정2017-12-25 16:37:48입력시간 보기
22일 제주4·3평화기념관·공원에 갔다. 전날 제주도립미술관 ‘과학예술 2017 카본프리(Carbon-Free)’ 전을 취재했다. 이튿날 하루 연차를 내고 찾아간 곳이 4·3평화기념관·공원이다. 마침 ‘4·3 70주년 기획전’이 진행중이었다. ‘소리없는 기억’이 주제다. 재단은 4·3의 기억을 재현하고, 반인륜의 폭력을 되새기며, 역사적 진실에 대한 공감대를 위해 전시를 마련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12명을 초청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침묵을 표현한 89점을 냈다. 다음은 작가 발문과 전시 기록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이시우의 ‘큰곶검흘굴’. “유라시아 대륙에서 몰려온 불안전한 전선이 한라산을 넘지 못하던 날. 소리 없이 내려와 세상의 역사를 뒤덮어버린 눈꽃들의 사태. 그날, 동굴에서 감지된 대설주의보- 큰곶검흘굴”(이시우) 제주4·3평화재단 제공
먼저 눈에 띈 건 이시우의 ‘큰곶검흘굴’이다. 이시우는 사진 작업과 평화운동을 함께 한다. 2013년 <유엔사령부>를 냈다. 당시 그와 인터뷰 했다.([저자와의 대화]‘유엔사령부’ 평화운동 사진작가 이시우씨)
큰곶검흘굴은 제주시 구좌읍에 있다. 4·3당시 제주남로당 구좌면당의 아지트였다. 남로당 희생자도 희생자도 많았다. 이시우는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전에 정통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란은 정통정부를 전제로 한다. 즉 정통정부수립이전엔 반란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4·3은 남로당이 주도했다할지라도 반란이 될 수 없다. 당시 남로당은 정부수립의 정통성을 둘러싼 경쟁세력일 뿐 반란세력일 순 없는 것이다. 그들 역시 제헌주체인 주권인민으로서, 헌법전문에 명시된 ‘대한국민’ 이다. 정부수립 후 포용했어야할 경쟁세력을 배제함으로써 4·3은 반란사건임을 강요당했다. 천신만고 끝에 제정된 4·3특별법. 그러나 2001년 헌재는 4·3희생자 중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에 위배되는 자들을 제외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헌법은 4·3당시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는 소급입법의 오류이다.”
김기삼 ‘침묵1’은 4·3 발발 43년 만인 1991년 12월 발견한 다랑쉬굴이다. 4·3당시 주민들 은신처였다. 유해와 생활도구가 나왔다. 1948년 12월 18일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 11명이 군경합동토벌에 희생당했다. 제주4·3연구소팀은 굴 입굴에 불을 질러 연기로 질식사 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행정당국은 봉분이라도 만들어 달라는 유족 바람을 무시하고 다음해 5월 유해를 화장해 김녕 앞바다에 뿌렸다. 다랑쉬굴 입구도 커다란 바위와 시멘트로 틀어막았다. 김기삼은 사진 출품을 두고 “억울한 희생에 대해 해원의 여유도 없이 시대 탓으로 돌리는 데에 대한 엄중한 항의이다. 여기에 더하여 나약한 촬영자로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희생자에 대한 죄스러움이 엉켜있기도 하다”고 했다.
송동효는 어릴 적부터 늘 지나다니며 놀던 곳이 제주경찰서라고 했다. 4·3 시발점이자 경찰토벌의 근거지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망루에서 경계를 서던 경찰 발포로 6명이 희생당했다. 제주도민이 반발하면서 4·3의 도화선이 됐다. 제주경찰서는 수많은 도민이 끌려와 취조당하거나 구금된 곳이다.
송동효 ‘4·3희생자 합동위령제’(오른쪽) ‘발아오름 유골’(1994)
송동효는 발문에 “‘앞장서서 가지 마라’. 어디든 나설 때면 어머니로부터 귀에 박히게 들었던 말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없으셨다. 그렇게 내 마음 안에 고독한 괴물이 자라게 되었다. 섬 곳곳엔 억울한 영령들이 고독하게 누워있었고, 그중 한 시간을 마주했다. 외롭게 어둠 속에서 홀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폭력의 시간들은 또다시 재현되고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썼다.
강정효가 촬영한 나무들은 사연이 있다. 4·3당시 마을 전체가 불태워진 뒤 폐허로 남거나 농경지로 바뀐 ‘잃어버린 마을’에서 자라는 것들이다. 주민들은 마을 중앙에 심어진 폭낭(팽나무) 주변에 돌 대(臺)를 쌓았다. 공회당이나 휴식 공간 역할을 했다. 강정효는 “오늘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제주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고, 그 너머에는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팽나무와 대나무만이 그날의 아픔을 조용히 대변하고 있다”고 했다.
이상일 ‘망월동’ 연작
이상일은 1984년에서 2000년까지 망월동을 담은 작품 5점을 냈다. 그는 망월동에 매달린 작업을 두고 Y형에게 보내는 편지로 썼다. “‘망월동’이라는 숨죽인 절규는 바로 당신과 내가 겪어낸 암울했던 시대의 가슴 아픈 이야기이며 용서와 화합만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한쪽은 생명을 바쳐 조국의 민주화를 지켜내려는 청년이고, 다른 한쪽은 목숨을 걸고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육체적 죽임과 저의 정신적 죽임을 담보해야만 했던 그 슬픈 이야기를, 그 한을 풀어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박승화 ‘경희대’(왼쪽), ‘성동교’ 김종목 기자
박승화는 1990년 5월 27일 경희대와 1991년 4월 17일 성동교에서 자행된 국가권력의 폭력을 담은 작품을 냈다. 박승화는 90년대 초반을 두고 “1987년 6월, 항쟁은 이겼고 선거는 졌다. 민주화는 더디게 시작되었다. 88올림픽을 지나고 다양한 의제가 쏟아졌다. … 90년은 노동자의 전국조직인 전노협의 출범과 보수삼당이 합당한 민자당이 탄생했고…. 수서비리사건으로 시작된 91년은 공권력에 의한 명지대생 강경대 폭행치사사건으로 촉발된 5월 투쟁이 있었다. 하루걸로 한명씩 분신과 투신으로 죽어갔다. 위선과 폭력을 앞세운 권력에 맞서 민중이 물리력으로 대항하던 시절, 세상은 변하는 것도 안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길 수 있었지만 이기지도 못했고 지면 안되었기에 지지도 않았다. ‘혁명의 시절’은 저물어 갔고 민주화는 더디게 오고 있었다. 우리는 지지 않았고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이상엽 ‘폭격 연평도’ ‘강정기지 앞 제주도’ ‘천안함 백령도’ ‘DMZ철원’(첫행 왼쪽부터) ‘언론 서울’ ‘용산참사 서울’ ‘소수자 서울’ ‘장애인의 죽음 서울’(두번째 행 왼쪽부터) ‘세월호 안산’ ‘송전탑 밀양’ ‘사대강 공주’ ‘새만금 김제’(세번째행 왼쪽부터) 김종목 기자
이상엽은 12점을 ‘변경의 침묵’이란 제목으로 묶어냈다. 그의 발문은 다음과 같다. “변경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지리적 변경은 멀다. 최북단 DMZ에서 최남단 제주도까지 중심에서 보면 스산할 정도로 멀다. 그래서 소외된 변경은 수군거리다, 수탈당하고 권리는 침해받는다. 그리고 저항한다. 중심은 그런 변경을 제압하고 가둔다. 군사기지를 세운 강정이 그렇고 천안함이 의문의 침몰을 한 백령도가 그렇다. 독점바본을 위해 거대 송전탑을 세워도 입조심해야 하고, 강이 파헤쳐져도 그저 침묵한다. 그리고 변경은 멀다. 하지만 인문의 변경은 가깝다. 그것은 우리 머리 속에 존재하는 변경이다. 타인을 차별하고 혐오한다. 차별받는 머리 속 변경은 가난하고 무지하며 생떼를 쓰는 자들의 거처다. 용산의 참사는 도시 테러리스트들의 만행이며 장애인들의 권리요구는 쓸데없는 복지의 낭비다. 변경은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 침묵해라! 너희는 그저 중심에 복종해야 한다. 침묵해라! 그저 중심의 노예일 뿐.”
사진전을 본 뒤 기념관을 둘러봤다. 이어 평화공원으로 갔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벌어진 폭력과 희생의 기록으로 먹먹했다. ‘제주 4·3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단’은 “제주의 산과 들에서, 육지형무소에서, 또 깊은 바다에서 졸지에 희생되었으나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행방불명 희생자는 4천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어느 수감자가 형무소에서 편지 한 구절도 비석에 새겼다. “매형에게 부탁하였으니 소와 말을 잘 관리하여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귀향을 꿈꾸던 이 수감자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제주|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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