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의 향원익청 “중립의 초례청” 꿈꾸는 조강 중립수역
[곽병찬의 향원익청] “중립의 초례청” 꿈꾸는 조강 중립수역
등록 :2017-06-06 19:30수정 :2017-06-06 19:47
조강 하구는 한반도의 탯자리였다. 황해도 연안반도와 김포반도로 이어지는 만곡의 해안선은 자궁을 닮았고,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는 강화도는 태아였으며, 그곳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한강 예성강 임진강은 탯줄이었다.
조강 중립수역은 남북 합의만 이뤄지면 압록강이나 두만강처럼 다리도 놓고, 유람선도 띄울 수 있고, 강 위에서 교역도 할 수 있다. 시인 신동엽이 오래전 꾸던 꿈은 어쩌면 그곳에서 아쉽게나마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차산에 이르러) 광진이 되고 삼전도가 되고 도모포가 되니, 한양 남쪽에서 드디어 한강 나루를 형성한다. 여기서 서쪽으로 나가 서강이 되고, 금천 북쪽에서 양화도가 되고, 양천 북쪽에서 공암진이 되고, 교하 서쪽에서 임진강과 합하여 통진 북쪽에 이르러 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제는 기호로만 남아 있는 지명들 가운데 특히 생소한 건 조강이다. 지도상에도 없고, 교과서에도 없다.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수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존재를 부정당한 강, 무관심과 망각을 강요당한 강이다.
한반도의 대하천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했으니 조강은 ‘할아버지 강’ 조강(祖江)이다. 남북의 대치는 조강을 따라 계속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조강 수역은 군사분계선으로 나뉘지 않았고, 따라서 비무장지대도 없다. 군사분계선은 동쪽의 강원도 고성 북단에서 시작해 조강이 시작되는 경기도 파주 탄현면 만우리에서 끝난다. 조강은 놀랍게도 중립수역으로 설정돼 있다. 정전협정상 그곳에선 남북 어느 쪽 민간선박도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다.
2000년 6월25일 사진작가 이시우 등의 주도로 민예총, 문화연대, 국제평화예술인연대 문화예술인들은 서울 마포에서 평화의 배를 띄웠다. 6·15 남북공동선언 10일 뒤요, 6·25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들은 남북, 좌우도 없는 바로 그 조강 중립지대로 가려는 것이었다. 배는 그러나 김포대교 아래 신곡수중보를 넘지 못하고 좌초했다. 유엔사의 저지를 받을 기회도 없었다.
2005년 7월27일 그들은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강화도에서 조강을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이번엔 유엔사의 협조를 구했다. 비록 중립수역이었지만 유엔사는 이곳을 항행하려는 선박에 대해 등록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강 진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수로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다만 접근까지 막지는 않았다. 이들을 태운 35톤짜리 작은 배는 창후리 선착장을 출발해 강화도 북단 조강 문턱에서 항해를 멈춰야 했다.
그곳에서 본 조강 하구는 한반도의 탯자리였다. 황해도 연안반도와 김포반도로 이어지는 만곡의 해안선은 자궁을 닮았고,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는 강화도는 태아였으며, 그곳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한강, 예성강, 임진강은 탯줄이었다. 그 모태의 신비를 앞에 두고 물러서야 했지만,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조강을 더듬고 살피고 꿈꿨다.
오두산 전망대에서 한강 건너는 김포반도요 임진강 건너는 장단반도다. 두 반도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강은 차원 변화를 일으켜 한강·임진강은 조강으로, 군사분계선은 중립수역으로 바뀐다. 남의 방송탑, 북의 선전마을이 강안에 늘어서 제각각 체제 자랑과 비난을 쏟아내지만 조강은 평화롭게 제 갈 길을 간다.
애기봉을 지나면 조강은 몰라도 그 이름은 제법 귀에 익은 섬, 유도가 지척이다. 1996년 여름 임진강 일대에 큰물이 났다. 소 한 마리가 떠내려오다가 구사일생 유도에 걸렸다. 남쪽 초병들이 소를 발견하고 유엔사 허락을 받아 데려왔다. 남은 북에 송환의 뜻을 전했지만 북은 거절했다. ‘우리에겐 소가 많습네다.’ 소는 제주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짝을 만나 새끼도 낳고 가정을 이뤘다.
2년 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 1천마리를 데리고 북으로 갔다. 누구도 밟지 못했던 휴전선을 가로질러 소들이 넘어간 것이었다. 그때 보내진 것은 1000마리가 아니라 1001마리였다. 유도의 소가 낳은 새끼 한 마리가 일행에 보태졌다. 그로부터 휴전선엔 사람도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유도에서 조강은 두 갈래로 나뉜다. 본류는 강화도 북단과 연안반도 사이로 서진해 강화만을 이루고, 지류는 남쪽으로 꺾여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로 흐르며 염하가 된다. 수운이 성했을 때 남쪽에서 올라온 배는 염하를 통해 한양으로 갔고, 북쪽에서 온 배들은 조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유도와 마주 보고 있는 강화도 쪽 둔덕엔 연미정이 있다. 갈라진 물줄기가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의 인조가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평복 차림으로 피신한 곳이 강화도였고, 100여일 만에 두 손 들고 나오면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던 곳이 연미정이다. 연미정 남쪽엔 강화도의 관문 승천포가 있고, 포구를 지키는 갑곶돈대가 있었다. 인조는 물론 고려의 고종이 몽골의 침략을 받아 피신할 때 일행을 태운 배가 정박한 곳이다.
염하는 그렇게 무능한 왕조의 굴욕과 애꿎은 민중의 피눈물을 안고 흘렀다. 몽골과 금, 청의 침략만이 아니었다. 조선 말 쇄국을 고집하다가 당한 병인,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도 그곳에서 일어났다. 1866년 프랑스 함대는 갑곶진에 상륙해 궁궐을 불태웠고, 외규장각 도서 등을 약탈했으며 1871년 미국 함대는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유린했으며, 일제는 1875년 초지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이듬해 병자수호조약을 강제했다.
본류는 강화도 월곶리와 북쪽의 개풍군 해창리 사이를 흐르다 해창리 돌출 절벽을 만난다. 조강·한강·임진강 하구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1.8㎞)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성공단이 조성되면서 그곳에 남북을 잇는 다리를 놓으려 했다. 개성까지 불과 18㎞였고, 비무장지대와 달리 지뢰도 없으며, 게다가 군사분계선이 아닌지라 유엔사의 간섭을 최소한도로 받는 곳이어서 민족의 혈맥을 잇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그 ‘평화의 다리’는 실현되지 않았고, 도면으로만 남아 있다.
강화도 북단 철산리 평화전망대가 우두커니 북녘을 향하고 있다. 망원경에 눈을 대면 북쪽 원정리 낡은 집단주택 마당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맨눈으로도 헐벗은 산, 퇴락한 가옥, 웅크린 사람 등 온통 무채색뿐인 북한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에서 또 하나의 강이 흘러든다. “예성강 푸른 물에 물새가 울면/ 말하라 강물이여 여기 젊은 이 사람들/ …겨레 위해 쓰러져간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 이제는 김원중의 흘러간 노래로만 전해지는 예성강이다.
예성강을 받아들인 조강 하구는 달걀 모양의 강화만을 이룬다. 고려조 중국은 물론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교지국(베트남) 섬라곡국(타이)의 무역선으로 붐비던 곳이다. 예성강 안쪽의 벽란도는 세계로 열린 개성의 관문이었다. ‘코리아’는 그때 이곳을 드나들던 코 큰 외국인들의 고려 발음이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대외적인 국호가 되었다. 고려의 창업자 왕건은 강화만의 해상권을 쥐고 재력과 무력을 기른 호족이었다. 삼국 통일은 바로 그 강화만의 실력자에 의해 성취됐다.
조강 중립수역은 정전위원회 당사국들의 태만이 준 선물이었다. 강원도 고성 북단에서 경기도 파주 만우리까지 육상경계선(군사분계선)을 획정한 정전위는 조강 수역에 대해서는 옥신각신하기 귀찮았던지 유럽의 다뉴브 강 관리 모델을 그대로 적용했다. 남북 민간선박은 강안 100m 밖에서 자유로이 통행하되, 군정위에 등록한다! 그러나 남쪽 군정위를 관할하는 유엔사는 부속합의서의 등록 조항을 빌미로 민간선박의 통행을 원천 차단했다.
그렇다고 남도 북도 없고, 좌도 우도 없는, 정전협정상 중립수역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곳은 남북 합의만 이뤄지면 압록강이나 두만강처럼 다리도 놓고, 유람선도 띄울 수 있고, 강 위에서 교역도 할 수 있다. 시인 신동엽이 오래전 꾸던 꿈은 어쩌면 그곳에서 아쉽게나마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그리하여)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러움을 빛내며/ 맞절할지니….”(‘껍데기는 가라’) 유도건 조강 67㎞ 수역이건 아사달과 아사녀가 하나가 될 ‘중립의 초례청’이 될 수 있다. ‘껍데기’와 ‘쇠붙이’가 문제일 뿐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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