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선생의 비서였던 90세 김제영선생님의 글 몇편
20세기초반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중심 축이었던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작품 ‘어머니’는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여명기에 대지에 가득 고여 내 귓전에 소용돌이치던 쇼팽의 장송곡도 베를리오즈의 레퀴엄( Requiem)도 아스라히 멀어지면서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Ich wil l den Kreuzstab gerne tragen.]
“사람이 먼저다.” 대한 정치적 각오가 있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추악한 밑바닥까지는 들어나지 않았을 것이다.***********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 헌재에 제출하기위한 나의 증언)
“박대통령 세월호 당일 정상근무…신속하게 현장 지휘”
2016년12월19일 자 경향신문 종합판 머리기사의 제목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은 오늘까지도 유족만이 아니라. 온 국민의 가슴에 앙금으로 가라앉아있다. 이번 대통령 탄핵에 세월호 참사가 포함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청와대를 대통령의 사저 공간으로 착각하고 있음에 국민의 공분을 샀다. 세월호 참사 당일 김장수 국가 안보실장은 대통령이 어데 게신지를 몰라 청와대 집무실과 관저 양쪽에 서면 보고서를 보내야 했다고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을 했다. 늘 대통령의 위치를 체크해야할 비서실장 김기춘은 근무시간인데도 대통령이 어데 게신지 모른다고 답변을 했다가 힐책을 당하자 “관저에 게시면 일일이 대통령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고 꽁무니를 뺐다. 청와대의 공공 기강이 해이되어 있음을 이번 탄핵에서 국민들은 감지했다. 김기춘은 박정희 대통령의 충복이었다. 그의 영애 박근혜 대통령이 오로지 ‘짐(朕)이 법이요 국가 이니라’ 중세적 권위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취해 있음을 김기춘 실장은 즐기는 것 같다. 김기춘 뿐이겠는가. 물론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 하라는 해경에 건 전화도 박 대통령의 그 날의 근무이기는 할 터이다. 세웛호가 304명의 건강한 어린학생들을 가두고 수심 깊은 바다속으로 떠나는 그 시간에 대통령은 전속 미용사를 관저로 불러 노닥거리며 머리 모양을 다듬었다. 세월호가 기울고 있는 오전에는 청와대 의무실 간호장교를 관저로 불러 안약과 가글액을 받았다고 한다. 대통령이 팽목항 사고현장에 얼굴을 내민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팽목항에서 곧바로 관저로 돌아온 대통령은 혼자서 저녁을 드셨다는 게 요리사의 증언이다. 전국의 국민이 사고 당일의 대통령 박근혜의 행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데 국회의 탄핵 소추 의결서에 반발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대통령탄핵 사건답변은 “박대통령 세월호 당일 정상근무…신속하게 현장 지휘” 이다.
정상 근무를 했는데 어째서 국가 위기를 관리해야하는 책임자가 대통령의 위치를 몰라 시간을 낭비했나. 신속하게 현장 지휘를 한게 움직이지 말라 였 나. 왜 그 음모를 막지 못했나. 어째서 국방부로 하여금 한국주둔 미 해군에 SOS를 타전하여 도움을 요청하지 안았나. 해경구조대가 할 일이 있고 대통령이 할 일이 있다. 아직도 국민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이비 대리인을 모아 도도한 국민의 횃불에 맞서겠다는 것인가. 박근혜는 이제라도 늦지않다. 교도소 생활을 체험하겠다고 청해보라. 그리고 가정사를 정리하는 책을 쓰라.
참사 당시 써놓은 글을 찾아냈다.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부분만 음악저널에 내보내고 묻어두었다. 박근혜를 지키겠다는 모든 분들게 일독을 권한다.
세월호 참사
세월호는 순식간의 전복도 폭파도 아니었다. 세월 호는 서서히 기울어졌다. 2014년4월16일 오전8시48분에 사고가 발생 오전 10시 31분에 완전히 뒤집혔다. 전남 진도군 병풍도 해상에서 였다. 참변 현장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나는 전복에서 침몰까지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계속 지켜봤다. 당연히 승객들로 아비규환이어야 할 세월호 갑판에는 다른 용무의 요원인지 후리후리 큰 키의 사나이가 누군가와 여유롭게(그렇게 느껴졌다.) 통화를 하고 있을 뿐 정물화(靜物畵)인 듯 고요했다. 승객을 갑판으로 안내하여 대기시켜야할 위급한 상황에서 느긋하게 긴 통화를 하고 있는 그 사나이의 정체가 궁굼해서 견딜 수가 없다. 승객이나 선원이 가라앉는 배에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앞으로 내놓고 종로나 명동의 건달같이 삐딱한 자세로 긴 시간 전화를 한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고당일 선장과 선원이 탈출하기 이전의 영상이다. 그가 누구인지 누구와 통화를 했고 통화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 공연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승무원임에 틀림없는 한 여자가 기계실인지 기관실인지에 쭈그리고 앉아 무슨 부품인가를 손보는 것 같았다. 누구이며 무엇을 손보았는지 그 것도 밝히라. 단원고 2학년 박예슬 양이 헬기소리를 듣고 “이제 살았구나 ”서로 다독이는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은 동영상등을 언급한 시간이 오전9시38분이다. 탈출 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한 시간하고도 넉넉 했 는데 한사람도 구하지 못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생명이 졸아붙는 운명의 시간에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었으면서 300여 어린이의 생명보다 더 중한 무슨 일을 했는지 시간 대 별로 7시간의 작업을 국민에게 보고하라, 그러지 못하면 집단 학살로 심판을 받아야함을 명심하라. 박근혜는 절대 권위의 초자연적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하치않은 일로 탄핵을 받은 고 노무현 대통령과 性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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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민 학생의 아버지 김영오 씨가 단식을 할때 문재인이 동참을 했다. 참 고마웠다. 한명의 희생도없이 전원 구명할 수있었음에도 국가 구조의 잘못과 대통령의 인명 경시 타성으로 초래된 재앙이다. 온 국민이 유족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처지에 새누리당을 비롯 보수 논객들이 문재인을 정치적 꼼수라고 l비하하고 비방하면서 별의별 불량배나 할 짓이 유족들의 행사장 마다 따라붙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살릴 수있는 자식을 죽인 고통에 살아도 사는게 아닌 유족들이 왜 짐승과 싸워야하나 그래서 추도를 겸해서 쓴 글을 1주기를 맞아 꽃향기가 감미롭고 새들이 함께 노니는 낙원에서 단워고 동문동기가 둘러앉아 행복하게 수다를 떠는 풍경을 바라보며 뒤늦게 1년전 글을 이제 싣는다. 끝. 2015. 4. 15. 김제영
하늘이시여 우리의 어린천사들을 보듬어 주소서.
차갑고 검은 바닷물이 몰고 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 내 걱정 말고 어서 너부터 나가.” 제가 입었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입혀주며 의연히 죽음을 택한 정차웅군 (17세). “언니도 어서 나가야 지요.” “너희들 다 구하고 나중에 나갈게 물이 차오른다. 빨리 나가. 선원의 차례는 마지막이야.” 역시 구명조끼를 벗어서 학생에게 입혀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나가게 하고 배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선장과 선원들의 몫까지 수행 승객들을 바다로 뛰어 내리게 하여 살려낸 나이 어린 박지연(22세) 승무원.
본능적인 SOS의 감각으로 배의 침몰을 해당 기관에 신속하게(맨 처음)알려 172명을 살려놓고 저승으로 떠나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다보았을 다원고 2학년 최덕하군.
“통장에 돈이 좀 있으니 큰 아들 학비 내라. 난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 침묵으로 이어진 멀고 어둡고 냉냉한 초행길을 어린 제자들 만 보내기가 불안하여 학생들과 동행한 김민규 교감, 박육규, 이해봉. 남윤철, 최혜정, 이지혜, 김초원 선생님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가슴이 쓰리고 아파 미칠 것만 같다.
승객 구조에 전력을 다한 양태홍 세월호 사무장. 달콤한 선박여행에 올랐다가 어린 학생들을 이승으로 올려놓고 영원한 수중관광을 떠난 한쌍의 연인 정현선, 김기웅, 가장 험난한 수중 작업에서 희생된 잠수부들 이 모든 분들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시라 하니라…”마태복음 제 일장 22절의 말씀을 받히겠습니다.
세월호 침몰은 예상된 재앙이다. 처음부터 오늘 까지 수습경위를 지켜보면서 ‘탈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왜 학생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2014년4월16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일반 승객을 태우고
운항하던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접하고 크게 가슴을 쓰러 내렸으나 2시간도 채 안 되서 오보라는 정정 보도가 나왔다. 청천벽력의 비보에 하늘은 노랗게 변했고 세상은 벌집 쑤셔놓은 양상이었고 온 국민은 분노에 주먹을 움켜줬다. 인력으로 대처할 수없는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고현장을 생방송한 TV.화면에는 배 갑판에서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하는 선원?의 여유로운 모습이 보였다. 제복이 아닌 허벅지를 들어낸 반바지 차림의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는 모습은 온종일이다 싶게 방영 돠었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선박과 운명을 함께 해야할 선장과 선원들이 해경 구명정에 올라탄 첫 번째 구조 자들이었다. 배의 이상 징후가 감지되자 이들은 조타실에 모여 탈출을 의논 구명정을 기다렸다. 선실도 지나다니고 제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이들이 “여러분 갑판으로 올라가 대기 하십시오. 구명정이 오고 있습니다.” 승객들에게 이 한마디만 방송을 했다면(그 시각에는 방송이 가능)승객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시사IN348호(2014.5.17.)에서 단원고 2학년? 임현진군의 부모님과의 대화와 저승으로 떠나기 직전 상황을 몇 대목 발췌했다.
[-전략-현진이는 8시52분 친구와 찍은 사진을 다시 보냈다. ..배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출근하는 아빠가 걱정할까봐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아침 8시50분쯤에 현진이와 통화를 했다...배가 기운다고 했다. 놀라서 구명조끼를...입고 지시를 따르라고 했는데 현진이는...이미 구명조끼를 입었다면서 사고 상황을...이야기하다가 전화가 끊겼다...오전9시4분 아내한테 소식을 들은 아빠가 현진에게 전화를 했다...“구명조끼를 챙겨 입어라.”...입었다고 답했다. 아들과 통화하는 사이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이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9시15분 구명조끼를 입은 사진(기울어진 배의 바닥에 등을 붙이고 벽에 발을 대고 선 모습)을 보내왔다...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에 따라 현진이는 친구들과 질서정연하게 추가 지시를 가다리고 있다.] 아들이 보내온 마지막 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후지TV등에 소개되었다. 현진이는 임희민 씨의 장남이고 외아들이다. 임현진군의 시신이 저승으로 떠나든 발인날이 현진군의 열여덟 번 째 생일이었단다.
5월1일 자 한겨레 목포 안관옥 기자는 헬기소리 들렸다고 학생들이 “살았다” 고 안도했건만…제목의 기사에서 사고현장에 맨 먼저 도착한 구조대는 해경의B-511 팬서 헬기였음과 단원고 2학년 박예슬 양이 헬기소리를 듣고 서로 다독이는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은 동영상(9시38분)등을 언급했고 선체가 뒤집혀 침몰한 시각인 오전10시31분 까지 64분의 여유가 있었음을 환기 시키고 있다.
5월 16일 현재 구조 172명 사망 밑 실종자 304명임이 발표 되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어선을 발동 현장에 당도한 한 어부는 구조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갑판이 아비규환이려니 했는데 쥐죽은 듯 고요한 갑판에는 누구 하나 그림자도 없었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노무현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아 일반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위기관리 부서를 청와대에 두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재변은 없었을 것이다. 구조작업에 동원된 도구가 다 미국산이라고 들었다.
어째서 국방부로 하여금 미 연합사에 SOS를 타전하게 하지 않았나. 한미동맹은 합동군사훈련으로 북한을 겁주는 역할만이 미 연합사의 사명인가. 청와대에 있었으면서 어째서 끔적을 안했나. 민족의 미래인
300명 우리의 건강한 어린학생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잠기고 있을 때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미용사를 불러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게 정신에 고장이 나지않고서야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끝 김제영 2014.5.6.
기적을 바라며
전국의 낚시 동호인, 산악인 여러분 해상 조난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니엘 디포(1659?~1731)의 장편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배가 난파하여 표류하다가 무인도에서 생명을 구했습니다. 고립된 섬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개척 자연에 적응하였습니다. 때가 되어서였는지 반란을 일으킨 영국의 선박이 무인도에 기착하였습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선장을 구출 28년 만에 무인도에서 고국 영국으로 귀환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훈련도감 군대에서 공을 세운(총포 제작으로) 박연(朴淵)이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그 분은 네덜란드인 이었습니다. 본명은 벨테브레이(J.J Weltevree)이구요. 1627년(인조5.)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항해 중 풍랑에 표류하다가 제주도에서 구조되어 서울로 이송되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귀화인으로 인조는 박연의 능력을 인정 1648년 그를 무과시험에서 발탁했습니다. 이밖에도 널조각에 간신히 목숨을 걸고 조류에 떠내려가다가 암초에 걸려 지나가던 선박에 구조된 기적의 예(例)도 많습니다.
낚시 동호인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낚시대회를 가끔 개최하시지 않습니까.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해역 도서에서 낚시인들의 집회를 소집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세월 호 실종자 구명보트가 섬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TV.에서 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낚시터를 물색하느라고 섬 기슭 바위나 바닷물이 빠진 암초를 건너 뛰어보신 일이 있으시겠지요. 섬 주변을 둘러보는 것과 직접 바위를 샅샅이 뒤지는 것은 정성부터 다릅니다. 파도에 떠밀린 실종자가 거기 어디 바위 틈새에 끼어 빈사상태로 숨이 붙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진도 해역 부근에는 무인도가 없습니까. 무인도 바다가 산 기슬 고목이나 바위에 걸려 살아있음을 깨닫고 간신히 움직여 동굴이나 숲에 쓰러져 고립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거미줄 같은 간절함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산악회 회원 여러분 세월 호 실종자 0 명이 되 기 까지 등산 행선지를 진도 인근 무인도의 산으로 잡아 주십사 간곡히 호소합니다. 진도 인근 섬마을 여러분께도 각별히 주변을 살펴 주십사 손자 손녀를 거느린 노파로서 무릎 꿇고 애원합니다. 세월 호 침몰 5km 상거한 해상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시신을 수습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실낱같은 명줄을 놓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가슴을 조이게 하는 이들도 필시 구명조끼를 입었을 것 이라는 생각에 체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을 치고 데굴데굴 굴으며 엉엉 울고 싶습니다. 우리국방의 미래였던 건강하고 씩씩하고 미끈한 수병들 46명이 함정에 갇히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 발버둥 쳤을 그 천안함의 긴박했던 상황을 잊었단 말입니까. 조난사고 보고를 접한 즉시 선박 내부의 구조 작업에 총력을 집중 민활하게 움직였다면 왜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이승을 등지고 서둘러 떠났겠습니까.
“앞으로 통화 못하게 될 지도 몰라 엄마 사랑해요.”
낚시 동호인. 산악인, 여러분 섬마을 여러분 배가 기울며 몰려오는 죽음을 밀어내려고 버등거리며 부모하고의 끈을 놓지 않으려던 어린 학생(부모가 걱정 할까바 흔연스럽게)의 성숙함을 보십시오. 가슴이 찢기는 듯합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로빈슨이나 박연의 경우와 상황이 다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유족이나 실종자 가족의 여한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지요. 다만 기대가 허물어졌을 때의 낙담을 고려하여 떠벌리지 않고 조심스럽고 조용히 여러분의 작업이 지속되기를 빕니다. 끝 김제영. 2014.6.10******************************************************************************하늘이시여 f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