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이정희 「진보를 복기하다」 이렇게 읽었다

[기고 서평] 이시우, 이정희 「진보를 복기하다」 이렇게 읽었다

이시우 작가

최종업데이트 2016-02-17 10:10:23


이시우, 이정희 (자료사진)ⓒ고소미

설 연휴가 끼어있어 주문한 책을 받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책을 펼쳐 다 읽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법에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에 아마도 며칠은 걸릴 것이란 예상은 행복하게 빗나갔다.

법조문에서 감정 따위를 찾으려는 수고는 애초에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달랐다. 감성이 증발, 멸균된 법의 언어에서 사람의 소박한 온기와 간절한 눈물과 원대한 사상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함을 이 책은 보여준다. 상식과 충돌하는 논점들도 거부감 없이 설득되는 탄탄하고 부드러운 논리는 압권이다. 읽기의 즐거움은 저자의 글이 대단한 미문이란 점에도 있다.

‘수출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농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고정된 인식이 마치 말라붙어버린 접착제마냥 단단하다’(p.70)

그러나 이 책은 저자 자신에겐 너무나 아픈 책이었다. 표지에서 눈에 들어오는 첫 문장이 ‘나는 패배했다’이다. 일본의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炳谷行人)은 1999년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법제화 됐을 때 ‘나는 패배했다’고 자인한 뒤 일본을 떠났다.⑴ 누구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 책임을 짊어졌다. ‘무책임의 체계’라는 일본사회에서 그의 책임발언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독백은 대속(代贖)의 당당함이 아니라 끝없는 내적 인고이다.

‘당을 대표했던 사람으로서 저지른 많은 잘못을 머리 숙여 사죄하며, 차마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며, 아픈 비판과 질책, 계속되는 수사와 재판을 받아들이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저, 살아가려 한다’(p.309)

저자의 자기비판은 안쓰러울 정도로 가혹하다. 역사의 비극과 하나가 된, 단 한 뼘도 비켜 설 자리가 없었던 저자의 고뇌와 반성을 따라가다 보면 함께 힘들어지다가도 어느새 치유와 위안을 얻게 된다. 반성 속에서 긍정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그토록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을 드러내 준 것이 고맙다.

책 「진보를 복기하다」 표지ⓒ민중의소리

구체

이 책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법안 중 11개를 소개하고 있다. 노동, 농민을 비롯, 인권, 환경, 평화, 차별등 진보당이 이런데도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필자조차 진보당은 자주파이고 통일 외에 다른 문제는 관심이 적을 것이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편견이었는가를 반성케 한다. 이 법안들에서 확인되는바 그들은 무책임한 선동가(Demagogue)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법안을 이미 탑재한 대안세력이었다. 구체란 달리 말하면 생동이며, 생동은 변화이다. 구체성을 상실할 때 현실을 상실하고, 현실성을 상실하면 변화하는 대신 변절한다. 진보당의 이 법안들에서 변절을 이겨낸 힘이 의지만이 아니라 이성에도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정치 일선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한마디로 변절의 징후를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어쩔 수 없다’(p.70)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막혀 운동가들은 정치인이 되는 순간 신중해진다. 그의 지지자들이 볼 때 그것은 변절이다. 일부 진보정치인들은 ‘헌법안의 진보’라는 형용모순의 수렁에 빠져든다. 비단 진보정치인만 그런가. 누구보다 이 말을 들을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선거 전에는 꼭 지킬 공약만 내놓았다 했으나 당선 뒤에는 갖은 이유로 공약을 서슴없이 파기했다. ‘공약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란 후안무치한 당당함으로 오히려 지지자들의 열광을 유인한다. 그 결과 정치 자체가 불신 당한다. 정치의 실패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마키아벨리의 「로마사강의」 1권 47장의 파쿠비우스 사례에 대해 생각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로마인이 한니발에게 패한 뒤 카푸아도 내란위기에 빠졌는데 인민과 원로원의 반목은 수습할 길이 없었다. 당시 최고직에 있던 파쿠비우스 칼라누스(Pacuvius Calavus)는 위기의 성격을 판단한 다음 자기의 직권으로 인민과 귀족을 화해시키려고 작정했다. 그는 원로원을 소집하여 몰살위기에 처한 상황을 전하고 귀족들을 가두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사태수습을 맡기면 화해의 길을 찾겠다고 제시했다. 다음엔 인민을 소집했다. “만약 여러분이 새 후임자를 결정하고 나면 그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약속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막상 인민들내에서 서로 그는 안 된다고 할 뿐 아무도 뽑지를 못했다. 그러자 그는 호기를 놓치지 않고 “여러분들은 원로원은 필요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임명하는 일에는 찬동하지 않는 것 같으니 차라리 지금의 원로원과 화해를 하는 게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별다른 수가 없었으므로 인민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⑵

마키아벨리는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인민은 자기에게 관련되는 사항을 개괄적으로 파악하려할 때 잘못을 저지르기 쉬우며 반대로 각각 구체적인 예를 따라 생각을 추진하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권에 들어가기 전 개개의 현상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하지 못한 선동가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민주노동당과 진보당이 이미 파쿠비우스 테제를 훌륭하게 이행해 온 정당임을 발견한 것은 이 책에서 얻은 소중한 성과였다. ‘참여예산제’가 한 예이다. 미국의 사회주의자 올린 라이트는 「리얼 유토피아」에서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속의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참여예산제도’⑶를 소개한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오기 10년 전인 2000년 민주노동당은 브라질 노동당과 교류하며 참여예산제를 한국에 소개하고, 4년 뒤 광주 북구와 울산 동구에서 이를 도입 시행했다. 이 물꼬가 강물이 되어 이명박정권하에서 놀랍게도 법률로 의무화되었다. 보수정권조차 강제한 구체성의 힘이다.

주체

저자는 구체적인 법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것을 실행할 주체의 중요성을 법문의 행간에서 읽어낸다.

‘경제정책의 세밀함과 현실성은 당연히 갖춰야하고 진보정당일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여부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핵심은 그 정책을 밀고나갈 경제주체의 힘이다’(p.119) ‘그 경제주체는 다름 아닌 조직된 노동자다’(p.109)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군주에 대해 말했고 그람시는 현대의 군주에 대해 언급한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그람시의 현대적 군주는 맑스-레닌주의적 노동자정당이다. 그것은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다.⑷ 저자의 책에서 한국의 현대적 군주를 찾는다면 그것은 ‘민중자신의 정당’(p.288)이다. 레닌도 볼셰비키 당에 지식인출신 혁명가들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걱정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민중 스스로 완전한 주인인 정당은 요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가능하고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한 ‘민중자신의 정당’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는 ‘지배하고’ ‘지배받을’ 권리로서의 정치였다. 자유시민이 소질과 역할에 따라 지배하고, 언제든 또 다른 이로부터 지배받을 수 있는 것이 정치였다. 그러나 당시의 자유시민이란 매우 한정된 귀족들이었다. 이제 역사는 한바퀴를 돌아 민중이 곧 군주가 되는,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으로 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가 실현되는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따라서 그 주체가 민중 자신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저자는 그 당연한 상식을 잔잔한 감성으로 발견해 낸다.

대란대치(大亂大治)

파쿠비우스 테제는 자유주의 정치학자들에 의해 갈등과 충돌을 법과 제도로 풀어내는 정치의 모범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나는 「진보를 복기하다」를 읽으며 파쿠비우스 테제의 다른 측면을 본다. 파쿠비우스가 정치의 정확한 시점을 판단하는 능력은 높이 칭송받을 만하지만 그 같은 정치력은 시민들의 봉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같은 혼란과 위기가 없었다면 그는 귀족들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력 이전에 정치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그것은 민중의 힘이다. 청나라 옹정제와 마오쩌둥의 언어를 빌리면 대란(大亂)이다. 대란은 틀을 깨는 것이다.

‘진보정치란 헌법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틀 자체를 확장 발전시키는 것이다’(p.302) ‘법으로 그어놓은 선 안에 갇혀 있는 데서 머물면 선을 밀어내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p.55)

칼 슈미트(Carl Schmitt)정치론의 반전이다. 슈미트는 주권자의 권력이란 법 밖에서 법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했다.⑸ 이는 법치주의자인 한스 켈젠(Hans Kelsen)의 ‘권력은 법 안에서만 행해져야 한다’는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파시즘적 도전이었다.⑹ 헌법재판소의 진보당해산과 의원직 박탈은 슈미트이론의 정확한 적용사례라고 나는 확신한다. 슈미트에게 주권자는 한명이다. 그러나 실질적 주권자가 국민이라면 어떻게 될까? 국민이 법 밖에서 법을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권이 된다. ‘대란없이 대치없다’는 정치원리는 그리하여 정치인인 저자가 다시 민중에게 정치를 돌려주는 고백처럼 들린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나 아기장수전설이 전해진다. 나라를 구할 장수의 운명을 안고 아이가 태어나자 그 소문을 듣고 관군들이 아이를 죽이러 서울을 출발한다. 부모는 역적집안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자신들이 낳은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아기장수는 소박한 민중인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자기를 죽이도록 하지만 마지막 소원을 남긴다. 자기를 죽인 자리에 콩 한말과 팥 한말을 같이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부모는 그 소원조차 외면할 순 없었다. 마침내 관군들이 도착하여 아기장수의 무덤까지 파헤치려 하자 묻혀 있던 팥 한말은 말이 되어, 콩 한말은 군사들이 되어 무덤 속에서 튀어나와 관군들을 물리친다.
나는 생각한다. 이 책에 소개한 11개의 정책이 아기장수전설의 바로 그 콩 한말, 팥 한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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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⑴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 대담」, <경향신문>, 2000.10.5.
⑵ Nicolo Machiavelli,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황문수 역, 「세계사상전집」15 (서울:학원출판공사, 1983), pp.306~308
⑶ Eric Olin Wright, Envisioning Real Utopia, (2010)/권화현 역, 「리얼 유토피아」, (파주:들녘, 2012), pp.222~237
⑷ 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1972~1986,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Ⅱ,1997)/오덕근 김정한 역, 「마키아벨리의 가면」, (서울:이후, 2001), p.36
⑸ Carl Schmitt, 김항 역, 「정치신학: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서울:그린비, 2010), p.18
⑹ 한스 켈젠(Hans Kelsen)은 1881년 생으로 슈미트보다 7살 위다. 오스트리아에서 순수법학파를 창설했다. 1차대전 후 오스트리아헌법제정에 관여하면서 최초로 헌법재판소제도를 만들었다. 소련의 국제법학자인 툰킨(Tunkin)조차 그를 유엔헌장의 가장 탁월한 해설자로 인정한다.

이시우 작가는?

이시우 작가는 보통의 사진작가와 작업 방식이 다르다. 그는 사진 촬영하기 전에 먼저 당대의 지식수준을 독파할 정도의 공부를 한다. 비무장지대, 지뢰, 한강하구, 미군, 제주 4.3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해온 이시우 작가는 그 결과물로 <민통선 평화기행>, <한강하구>, <유엔군사령부>와 같은 저서를 펴냈다. 이 책들은 어지간한 박사논문에 뒤지지 않을 독창적이고 전문적인 연구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주제로 사진 촬영 준비할 때는 <자본론> 통신강의를 2년간 들으며 이론공부를 했다.

분단과 반공이 지배하는 우리 현실을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해 유라시아체계를 화두 삼아 공부하는 이 작가는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 미군뿐만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 독일의 미군부대와 러시아, 베트남, 유고의 역사와 지도자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파고든다. 2007년, 미군을 주제로 한 사진 때문에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된 이시우 작가는 1심에서 무죄로 석방된다. 이후 작가는 국가보안법의 뿌리를 찾아 제주4.3을 주제로 사진작업에 몰입했는데,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이 시기의 연구 작업과 기행의 기록물이다. 비무장지대 지뢰밭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찍은 <지뢰꽃>(1997) 사진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기도 한 이 시우 작가는 말한다. “창작을 함에 있어 감옥에 가거나 죽을 각오를 하고, 마지막 창작의 순간에는, 그 모든 각오와 노력을 홀연히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초연해야 한다.”

저서

<사진시집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1999)
<민통선 평화기행>(2003)
<정전협정의 틈, 유라시아로의 창 한강하구>(2008)
(2013)

사진전
<한국의 대인지뢰 피해자들>(1999,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초대사진전)
<눈 위에 핀 꽃>(2010, 대전시립미술관 분단미술전)
<한강하구>(2010, 공간 415)
<主體寫象>(2012, 아트스페이스풀)

수상
박종철인권상(2007) 사월혁명상(2008) 늦봄통일상(2010)

출처 – 도서출판 말

http://www.vop.co.kr/A000009932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