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제주 그리고 오키나와-민중의소리 컬럼

[데스크칼럼] 이시우, 제주 그리고 오키나와

이정무 편집국장 발행시간 2014-11-10 11:01:10 최종수정 2014-11-10 11:21:26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 이시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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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 이시우 저ⓒ도서출판 말

1910년대에 태어난 나의 할아버지는 징용을 피하고, 또 돈도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만주에 가셨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고향이라고 잠깐 들렀다가 관원에 잡혀 이번엔 일본 오사카로 징용을 가셨다. 해방이 되고 조선에 돌아와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외국에 나갈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는 환갑이 지나서야 첫 해외 여행을 가셨다. 두 분은 겨우 스무살 차이였다.

할아버지의 젊은 날은 지금보다도 더 ‘세계화’된 시대였다. 경북의 산골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동아시아 일대를 다 겪어야 했던 때다. 할아버지는 호기심 때문에 외국에 나간 것이 아니었다. 사진작가 이시우가 쓴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오키나와와 제주, 일본과 한국을 오간 나의 할아버지들의 흔적을 따라 지나간 시간과 내일을 생각한다.

제주와 오키나와는 한국과 일본에서 보자면 각각 변방이다. 제주의 말이 육지와 사뭇 차이가 나는 만큼 오키나와의 사투리도 일본인들에게 낯설다. ‘우리’이지만 ‘우리가 아닌 듯’한 땅이 제주와 오키나와다. 이시우 작가는 20세기 초중반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제주와 오키나와에서 같은 방식으로 펼쳐졌고, 21세기인 지금에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와 제주의 강정 해군기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체제의 진짜 얼굴은 변방에서야 드러난다는 믿음도 깔려있다.

기행은 그가 사유하는 방식이다. 오키나와의 해병대 기지를 돌아보면서 그는 사탕수수를 본다. 미군기지를 보는 카메라안에 들어온 사탕수수는 설탕산업과 설탕을 매개로 만들어진 16세기와 17세기의 세계체제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고, 한참 뒤에 사탕수수는 미군의 점령을 피해 동굴 속에 숨은 오키나와인의 아기가 천황 체제에서 벗어나오는 상징으로도 읽힌다. 제주에서도 그는 토벌군을 피해 용암동굴로 숨은 주민들을 따라간다. 동굴 깊숙이에서 나오면서 그의 눈에 들어온 단추와 빈 병, 다리미와 탄피는 모두 참혹한 역사의 흔적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난 길 위에서 그는 생각하고, 또 기록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솔직히 피곤한 일이었다. 본문이 600쪽에 각주만 1,070건이 붙었다. 이름은 들어보았을 삼별초와 하멜에서부터 일본 공산당의 초대 당수이자 오키나와 사람이었던 도쿠다 큐이치의 생애, 4.3항쟁의 인물들에 대한 집요한 추적, 그리고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 기지에 왜 UN기가 휘날리고 있는가(미군은 UN이 창설되기도 전에 오키나와를 점령했다)라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에 이르기까지 이시우는 시간과 공간을 마구 오가면서 사유를 전개한다. 그래서 ‘기행’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사회과학 대신 역사와 철학, 그리고 상상력을 이용하라고.

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건 미국의 군사전략을 접근하는 태도다. 그는 오키나와의 카테나 미군기지와 제주의 강정해군기지가 같은 운명의 사슬에 엮여있다고 믿는다. 그 사슬은 미사일방어체계(MD)다. 그는 미국이 추구하고 있는 MD가 UN과 같은 국가간(international) 조직이 아니라 국경과 주권을 넘어선 초국가적(transnational) 체계라고 본다.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와 괌을 포함한 태평양 일대의 미사일 방어체계는 그의 말처럼 미국과 일본, 한국의 ‘협력’만은 아닐 것이다. 북한이든 중국이든 그 어디에서 미사일이 발사되거나 발사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이 체계는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국가는 이미 시작된 체계의 작동을 구경만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다시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에게 만주나 일본은 어떤 곳이었을까? 서울도 몇 번 와보지 못한 시골 청년이 낯선 땅에서 겪어야했던 삶은 그야말로 ‘운명’이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중국이건 일본이건 또는 미국이건 그저 ‘비즈니스’의 대상이라고 믿는다. 책을 덮으면서 그 믿음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