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후계체계 이시우 2009/04/05 310
김정일 시대 북한의 권력체계와 후계 문제
정성장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
1. 문제의 제기
2008년 8월 중순경에 발생한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건강이상은 우리 사회에 북한체제의 변화 전망과 후계구도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북한 체제의 변화 전망과 관련해서는, 우선 김정일 이후 북한에서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과 그렇지 않다는 시각, 그리고 김정일 이후 북한체제를 당이 주도할 것이라는 시각과 국방위원회나 군부가 주도할 것이라는 시각 등으로 나누어진다. 후계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연초까지만 해도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이나 장성택(김정일의 매제)의 지명 가능성을 높게 보는 시각과 김정철(김정일의 차남)이나 김정운(김정일의 3남)의 지명 가능성을 높게 보는 시각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내 지난 1월 국내의 한 통신사가 김정운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고 보도한 후 현재는 김정운의 후계자 지명 가능성을 높게 보는 시각과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먼저 김정일의 건강이상으로 북한에서 급변사태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전문가들은 대체로 “김정일의 신상에 발생하는 유고(有故)는 결국 북한의 ‘붕괴’라는 ‘급변사태’로 이어질 뿐 아니라 지금 북한에서는 그 같은 상황이 언제라도 전개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이동복 2008, 28)고 주장한다. 그리고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중국의 북한 개입 가능성을 높게 본다(김훈배 2008, 90-91; 홍관희 2008, 24-25). 이 같은 시각은 지난 3월 17일 국내외 인사 500여명이 참여하여 출범한 통일문제 연구단체 ‘한민족통일준비위원회’가 천명한 발기인 선언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원회는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은 북한의 붕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놓았으나 정작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대처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면서 “민간차원의 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정부의 통일정책을 뒷받침하고 통일 이후의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09/03/17).
반면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더라도 북한에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전문가들은 대체로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더라도 김정일의 측근들이 체제의 유지에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내란 또는 무정부 상태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입장의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는 2008년 9월 12일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등과 만난 자리에서 심지어 “북한에는 김정일을 대신할 사람이 100명도 넘는다”라고 까지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중국의 개입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 황 전 비서는 중국이 북한에 군대를 보내는 방식으로 개입할 생각은 없지만 북한에 혼란이 생기고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도 개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연합뉴스 2008/09/15). 이처럼 김정일 이후 북한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을 낮게 보는 전문가들은 김정일 이후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정책을 펴도록 해야지 자유민주화까지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제언한다.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권력체계와 관련하여 황장엽 전 비서는 김정일 이후 북한체제를 군부가 아닌 당이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는데 비해(연합뉴스 2008/09/16), 일부 보수적인 지식인들은 “‘post-김정일’의 후계구도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군부 단독 또는 당과 군부가 공동으로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관측한다(홍관희 2008, 23; 이동복 2008, 37-38 참조). 이밖에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유고가 발생할 경우 당보다는 국방위원회가 중심이 된 집단지도체제가 수립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도 있다. 이 같은 입장을 가진 전문가는 현재의 국방위원회를 “주석제하의 중앙인민위원회와 당 정치국 비서국을 결합한 당정군복합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집단지도체제의 중심은 국방위원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고유환 2008, 27).
이와 같이 포스트 김정일 체제 전망과 관련하여 상이한, 때로는 상반된 주장들이 제기됨으로써 대북정책 추진 방향에 대해 우리 사회는 혼선을 빚고 있다. 만약 김정일의 유고(有故)가 발생하여 그것이 ‘급변사태’로 이어진다면 이는 우리 사회에 매우 중대한 도전이 될 것이므로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그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혹시 김정일의 유고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급변사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도부의 교체에 그치고 말 개연성이 크다면 급변사태에 대한 논의와 준비를 자제하고 북한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전제로 대북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북한체제가 어떠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어떠한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포스트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도 현실성 있는 전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고의 제2절에서 북한의 권력체계와 파워 엘리트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제3절에서는 후계자 문제와 3대 세습에 대한 북한의 입장과 논리를 고찰하고, 제4절에서는 김정일의 세 아들 중 최근 후계자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김정운의 성장 과정과 자질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어서 제5절에서는 후계문제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 엘리트들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제6절에서는 향후 권력 승계 및 북한 체제의 변화 전망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2. 김정일 시대 북한의 권력체계와 파워 엘리트
북한은 변함없이 당이 국가기구와 군대를 지도하는 당․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당과 국가기구의 위상을 대등하게 취급하거나 국방위원회를 당보다 더 중요한 ‘명실상부한 최고권력기관’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일반화되어 있다. 그리고 북한이 현재 중요하게 간주하는 5대 권력기관이 무엇이며, 그들 간에 어떠한 서열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고 있다.
1998년 헌법 개정 이전의 북한은 당 중앙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의 순서로 주요 권력기관들을 언급하였다(연합뉴스 1996/01/03; 조선중앙통신 1998/01/01). 그러다가 1998년 헌법 개정 이후에는 당 중앙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의 순서로 권력기관을 언급하고 있다(연합뉴스 2000/09/09, 2000/10/10, 2008/09/09; 조선중앙통신 2004/04/15, 2008/09/09). 5대 권력기관 중 국방위원회는 제일 먼저 호명되는 것이 아니라, 1998년 헌법 개정 이전과 이후 변함없이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 군사간부 임명에 있어서도 일명 ‘왕별’ 계급장을 붙이는 원수ㆍ차수급 인사는 국방위원회 단독 명의가 아니라 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 공동 명의의 ‘결정’으로 단행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이름이 국방위원회의 이름보다 앞선다. 이처럼 북한에서 국방위원회는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명확한 근거 없이 ‘명실상부한 최고권력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례로 통일부에서 2009년에 발간한 북한 권력기구도는 ‘권력체계’ 그림에서 조선로동당을 국방위원회보다 상위에 위치시키고 국방위원회가 당의 영도를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부에서 2008년까지 발간한 북한 권력기구도는 ‘권력체계’ 그림에서 조선로동당과 국방위원회를 대등한 위치에 놓았다. 그리고 2008년과 2009년 북한 권력기구도 모두 북한에서 ‘혁명의 최고참모부’로 불리는 당 중앙위원회를 국방위원회보다도 낮은 위치에 그려 넣은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1998년 헌법 제11조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하게 되어 있으므로, ‘권력체계’ 그림에서 가장 윗부분에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를 포함하는 당이 위치하고 그 아래에 국가기구인 국방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이 위치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1980년에 개정된 조선로동당 규약의 제23조는 당중앙위원회가 “당의 로선과 정책을 수립하고 그 수행을 조직 지도하며,” “행정 및 경제사업을 지도 조정”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북한에서 주요 노선과 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당중앙위원회이며 국가기구는 집행 기능만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게다가 통일부가 발간한 2008년과 2009년 북한 권력기구도는 ‘권력체계’ 그림에서 5대 권력기관 중 하나인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표현되어 있지 않는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당 중앙위원회의 산하기구가 아니라 별도의 권력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통일부 발간 2009 북한권력기구도의 ‘조선노동당’ 그림(<그림 2>)에서는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를 별도의 구별되는 기관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통일부에서 2008년까지 발간된 북한권력기구도의 ‘조선로동당’ 그림과 연합뉴스 발행 『북한연감 2008』의 ‘조선노동당 기구도’(연합뉴스 2008, 170)에는 모두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당 중앙위원회의 산하기구로 그려져 있어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실제 위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반면 북한연구소에서 발간한 『북한총람(1993~2002)』의 ‘노동당 기구도’(북한연구소 2003, 209)에서는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를 별개의 기구로 적절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1> 통일부 발간 2009 북한 권력기구도 중 ‘권력체계’
출처: 통일부 홈페이지(http://www.unikorea.go.kr/index.jsp)(검색일: 2009/03/15)
<그림 2> 통일부 발간 2009 북한 권력기구도 중 ‘조선노동당’
출처: 통일부 홈페이지(http://www.unikorea.go.kr/index.jsp)(검색일: 2009/03/15)
북한은 겸직을 통해 당 중앙위원회가 국가기구를 통제, 장악하고 있는데, 그 같은 점도 통일부의 북한 권력기구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인 최태복은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맡아 당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내각 총리 등 다른 국가기구의 선거와 관련하여 당 중앙위원회의 입장이 반영되도록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정치국 위원인 김영남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는 등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위원과 후보위원들이 최고인민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요직을 맡아 당 중앙위원회의 입장이 국가기구에서 관철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가 북한의 5대 주요 권력기관에 포함되지 못하는 데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보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더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북한의 입장도 통일부 발간 북한 권력기구도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북한총람(1993~2002)』의 ‘국가기구 체계표’(북한연구소 2003, 260)와 『북한연감 2008』의 ‘행정기관 기구도’(연합뉴스 2008, 175)에는 흥미롭게도 내각이 국방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헌법을 포함하여 북한의 어느 문건도 국방위원회에 내각을 지도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있으며, 조선로동당이 내각의 당위원회를 통해 내각을 집체적으로 지도하고 있으므로 이 같은 그림들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통일부 발간 2009 북한 권력기구도 중 ‘정당․단체’(<그림 3>)는 4대 근로단체(청년동맹, 직업총동맹, 농업근로자동맹, 여성동맹)를 일반적인 사회단체 속에 포함시키고 있고, 정당․대남 단체보다 하위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영도체계’에 대한 북한 문헌에서 천도교청우당이나 사회민주당과 같은 ‘우당’이나 다른 사회단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도 4대 근로단체에 대해서는 긴 지면을 할애해 설명할 정도로 4대 근로단체는 당과 대중을 연결시키는 ‘인전대’로서 국가기구 다음 가는 위상과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김민․한봉서 1985, 193-224).
이밖에도 통일부 발간 북한 권력기구도 중 ‘조선노동당’ 그림과 『북한연감 2008』의 ‘조선노동당 기구도’ 그리고 『북한총람(1993~2002)』의 ‘노동당 기구도’ 모두에서 당 중앙위원회가 실제 조직의 위상과 규모에 비해 왜소하게(경우에 따라서는 당 중앙군사위원회보다 작게) 그려져 있는 불균형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고려하여 필자가 시험적으로 그린 북한의 권력체계도(<그림 4>)와 조선로동당 조직도(<그림 5>)는 다음과 같다.
<그림 3> 통일부 발간 2009 북한 권력기구도 중 ‘정당․단체’
출처: 통일부 홈페이지(http://www.unikorea.go.kr/index.jsp)(검색일: 2009/03/15)
<그림 4> 김정일 시대 북한의 권력체계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
<그림 5> 조선로동당 조직도
당대회
당대표자회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위원: 리을설, 리하일
조명록, 박기서
김영춘, 김명국
리용철, 김익현
김두남, 김일철
당
중
앙
검
사
위
원
회
비서국
총비서: 김정일
비서: 한성룡(경제)
김기남(선전선동)
최태복(교육)
김중린(근로단체)
전병호(군수)
김국태(간부)
정치국
상무위원: 김정일
위원: 김영주, 김영남
전병호, 한성룡
후보위원: 김철만
최태복, 양형섭
홍성남, 최영림
홍석형
검
열
위
원
회
전문부서
과학교육부 부장: 리광호
근로단체부
재정경리부 부장: 리봉수
38호실
39호실 실장: 김동운
계획재정부
부장: 박남기
당역사연구소
소장: 김기남
문서정리실
실장: 채희정
신소실
총무부
조직지도부 부장: 김정일
제1부부장: 리제강, 리용철, 김경옥
부부장: 황병서, 강동윤 외
행정부 부장: 장성택
선전선동부 (부장: 최익규) 제1부부장: 리재일
간부부 부장: 김국태
국제부
군사부 부장: 리하일
민방위부 (부장: 김성규)
통일전선사업부
부장: 김양건
대외연락부 부장: 강관주
35호실
작전부 부장: 오극렬
군수공업부
부장: 전병호
직할시 ․ 도 당위원회
나선시 김현주
평안남도 리태남
평안북도 김평해
자강도 박도춘
양강도 김경호
황해남도 김낙희
황해북도 최룡해
함경남도 홍성남
함경북도 홍석형
강원도 리철봉
평양시
→ : 선출
⇒ : 지도
⇒
김정일 시대 북한 파워 엘리트들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5대 권력기관과 소속 핵심 파워 엘리트들 전원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파워 엘리트 분석이 본고의 주된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3대 권력기관, 즉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와 소속 핵심 엘리트들에 대해서만 고찰하기로 하겠다.
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되기 전만 해도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또는 정치위원회)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김정일 후계체계가 수립되면서 북한 권력의 핵심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부터 비서국으로 이동되기 시작하였다. 모든 정책과 인사 등의 결정권이 당 비서국과 전문부서들로 이관되고 정치국과 전원회의 등은 이를 추인하는 거수기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북한의 정치체제는 과거 김일성 시대의 ‘정치국 위주의 정책적 당․국가체제’로부터 김정일 후계체제 시기의 ‘비서국과 전문부서 위주의 권력적 당․국가체제’로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현성일 2007, 281쪽 참조). 따라서 김정일 시대에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가 거의 소집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당적 영도의 권위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1974년 이후 변화된 정치국의 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의 정치국의 위상과 권한에 대해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현재 북한에서 정치국과 비서국은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여러 주장들을 통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표 1>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명단(2009년 3월 현재)
이름(출생연도)
정치국 직책
겸직 (비고)
김정일(1942)
상무위원,
위원
당 총비서,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당중앙군사위원장, 국방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영주(1920)
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일성의 동생)
김영남(1928)
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전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 부장) (김두남 인민무력부 부부장 겸 인민군 대장의 형)
전병호(1926)
위원
당중앙위원회 비서(군수공업 담당),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부장, 국방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겸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
한성룡(1923)
위원
당중앙위원회 비서(경제담당),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철만(1918)
후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제2경제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2005년 당창건 60주년 행사 참석 이후 활동 부재)
최태복(1930)
후보위원
당중앙위원회 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양형섭(1925)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조국전선 공동의장, 조평통 부위원장 (前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김일성의 사촌 매부)
홍성남(1929)
후보위원
함경남도 당 책임비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내각 총리)
최영림(1929)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중앙검찰소장,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홍석형(1929)
후보위원
함경북도 당 책임비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겸 상임위원회 위원
다수의 연구자들은 김일성 사후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가 개최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김창근 2000, 180; 김근식 2006, 265-267), 북한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김정일 시대에도 정치국 회의가 여러 차례 소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2월 『평양방송』 보도에 의하면, 김정일은 1994년 7월 17일 정치국 회의를 소집, 경제회생 방안을 논의했다. 2000년 2월 25일 『평양방송』도 회의의 개최 일시를 언급하지 않은 채 “애도기간에 처음으로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는 어버이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천세만세 영원히 높이 받들어 모시기 위한 문제가 토의”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북한의 국가장의위원회가 김일성 사망일인 7월 8일부터 17일까지를 ‘애도기간’으로 설정하였으므로 이 기간에 정치국 회의가 개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회의가 1999년 2월 평양방송 보도에서 언급한 회의와 같은 것인지 별도의 회의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박형중 외 2004, 133-134쪽 참조). 김정일은 1994년 10월 16일에도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가 같은 날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일군들이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김정일 1998, 437)라고 말한 것을 1998년에 발간된 김정일 선집 13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정일이 1998년 9월 4일 정치국 회의에서 “수령님이 계시지 않는 조건에서 주석제가 필요 없게 되었다”면서 “주석이라는 직함은 오직 수령님과만 결부시켜 부를 수 있도록 사회주의헌법에서 주석과 관련한 조항을 없애는 동시에 주석제도 없애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2001년 9월 8일자 『청년전위』(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기관지)를 통해 보도되었다. 그리고 1999년 2월 4일에도 정치국 회의가 개최되어 김정일이 “인민군대를 강화하지 않고서는 이미 쟁취한 혁명의 전취물도 지켜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도 다그쳐 나갈 수 없고 나라의 통일도 이룩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는 내용이 2001년 6월 21일자 『조선일보』 인터넷판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박형중 외 2004, 134쪽에서 재인용).
일부 전문가들은 1997년부터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명의가 전반적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1998년 9월 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 김영남 대의원은 김정일 당 총비서를 국방위원장에 재추대하는 연설을 통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위임에 따라 조선인민의 영원한 수령이신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생전에 이미 발기하시고 추천하신대로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변함없이 높이 추대할 데 대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제의를 본 최고인민회의에 보고 드린다”고 말함으로써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명의를 분명하게 사용하였다(조선중앙통신, 1998/09/5).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위임’이 있었다는 김영남의 언급은 전날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다는 2001년 9월 8일자 『청년전위』 보도에 의해 뒷받침된다.
일부 연구자들은 1997년 이후 북한 언론에서 ‘정치국 위원’이라는 표현도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2007년 10월 26일 평양에서 개최된 ‘전국당세포비서대회’를 소개하면서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인 김영남 동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들인 최태복 동지, 최영림 동지, 홍성남 동지, 홍석형 동지”가 주석단에 자리 잡았다고 보도하였다(통일뉴스, 2007/10/27 참조). 이외에도 북한은 중요 행사시 핵심엘리트들이 정치국 위원 또는 후보위원 자격으로 연설하고 있음을 로동신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09년 3월 현재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들과 후보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김정일을 제외한 전원이 70대 후반 또는 80~90대의 나이로 고령이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하여 다수의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들은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일부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은 혁명 원로를 존대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입장에 따라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혁명1세대인 김영주는 최고인민회의 명예부위원장이라는 상징적인 직책만을 맡고 있어 사실상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평가된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들과 후보위원들의 겸직 현황을 분석해보면, 김영남 정치국 위원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을, 전병호 위원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직을, 양형섭 후보위원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최태복 후보위원이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이 헌법상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내각 총리 등 국가기구의 핵심 지도자들을 선거 또는 소환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국의 최고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를 사실상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있는 기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일 총비서를 비롯하여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 전원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라는 사실은 조선로동당이 국가기구 전반에 대한 영도를 위해 최고인민회의 장악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표 2>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명단(2009년 3월 현재)
이름(출생연도)
담당 분야
겸직 (비고)
한성룡(1923)
경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2003년 9월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회 위원장 해임)
(2004년 8월 이후 동정 전무)
전병호(1926)
군수공업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부장, 국방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겸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
김국태(1924)
간부
당중앙위원회 간부부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중린(1924)
근로단체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기남(1926)
선전
당 역사연구소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최태복(1930)
국제․교육
정치국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구성원들처럼 비서국 비서들의 나이도 평균 80세가 넘는다. 비서국에서는 원로들의 고령화로 인한 사망, 질병 등의 이유로 발생한 공석이 장기간 보충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98년 처형된 서관히의 농업비서직, 2003년 사망한 김용순의 대남비서직, 2004년 은퇴하여 2006년 사망한 계응태의 공안비서직 등이 2008년 1월 현재까지 공석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담당 비서인 한성룡 역시 2004년 이후 동정이 전무한 상황이다(현성일 2007, 379~380; 연합뉴스, 2007/04/26 등 참조).
<표 3>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내 전문부서의 기능과 역할
비서국 전문부서
관장범위
기능
비고
조
직
지
도
부
본부당 담당
(제1부부장)
중앙당(본부당)
당생활 장악
군사 담당
(제1부부장)
조선인민군, 인민무력부
당 조직 운용 장악
전당 담당
(제1부부장)
전당(본부당, 군대 제외)
당생활 장악
행정부
국가보위부,
사회안전성, 검찰소,
재판소, 국가검열성
지휘(지도․통제)
선전선동부
전당
선전, 사상사업
간부부
군대 제외한 전당
간부인사
*군대 간부사업은 인민무력부 간부국
군수공업부
제2경제위원회
군수공업분야 지도
경제정책검열부, 중공업부
경공업, 농업정책검열부,
계획재정부, 과학교육부
내각의 경제기관
정책적 지도
근로단체부
청년동맹, 직업동맹, 농업근로자동맹, 여성동맹
지도․통제
국
방
군사부
인민무력부
후방사업지도
민방위부
노농적위대, 교도대
지도․통제
대
외
국제부
사회주의체제와의 외교
외교활동
대
남
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대남사업
* 통일전선부는 해외동포영접총국과 조국통일연구원을 관장하며, 천도교청우당, 조선사회민주당을 지도함.
35호실
제3국에서 대남사업
당
재
정
경
제
행
정
재정경리부
당 경제
당 재정 경리 운용
39호실
당의 외화벌이
소유한 경제기관 운영
38호실
초대소 관리
소유한 경제기관 운영
총무부
총무
일부 비서직에 공석이 발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비서국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예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김정일 총비서의 공개활동의 절반 이상이 주로 군부대 시찰 등과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기남 비서는 2007년에 김정일의 공개활동에 27회 수행함으로서 현철해 인민군 총정치국 상무부국장(31회)에 이어 리명수 국방위원회 행정국장과 함께 공동2위를 차지했다(중앙SUNDAY, 2007/12/30). 그리고 김 비서는 2008년에 현철해(51회), 리명수(48회)에 이어 수행 3위(23회)를 기록했다(문화일보, 2009/01/06). 김정일 공개활동의 주요 수행인물에는 최태복, 김중린, 김국태 비서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최태복 비서의 담당 업무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과거 담당했던 국제비서나 교육담당 비서를 맡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08년 김정일을 8회나 수행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공식적으로 대남비서에 임명되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상 대남비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는 조선로동당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중앙위원회 비서들과 조직지도부라고 증언했다(현성일 1999, 33; 황장엽 1998, 88). 이같은 현실을 반영하여 2008년 조직지도부의 리제강 본부당 담당 제1부부장은 9회, 리용철 군사 담당 제1부부장은 4회, 김경옥 제1부부장(전당 담당으로 추정됨)은 1회 김정일을 수행하였다.
<표 4> 2008 김정일 수행 인물 분석
이름
(출생연도)
수행횟수
직책 (비고)
현철해(1934)
52
인민군 총정치국 상무부국장, 인민군 대장, 당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현철규의 동생)(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대)
리명수(1937)
46
국방위원회 행정국장, 인민군 대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전 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작전국장)
김기남(1926)
21
당중앙위 비서, 당중앙위원, 당역사연구소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조평통 부위원장
장성택(1946)
14
당중앙위 행정부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정일의 매제, 전 당중앙위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박남기(1934)
11
당중앙위 계획재정부장,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회 위원장 겸 제11기 대의원, 당중앙위 위원. (전 당중앙위 중공업부 부장, 당 비서국 비서, 국가계획위원장)
김정각(1946)
11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 인민군 대장, 당중앙위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전 인민무력부 부부장)
박도춘(?)
11
자강도 당위원회 책임비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명국(1940)
10
당중앙군사위원,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인민군 대장, 당중앙위원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 前 제5군단장, 108기계화군단장)
리제강(1930)
9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리재일(1935)
9
당중앙위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2004년부터) (전 출판지도국 국장)
김격식(1940)
9
인민군 총참모장, 인민군 대장, 당중앙위 위원
김양건(1938)
8
당중앙위 통일전선부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조선외교협회 부회장, 북․일 우호촉진친선협회 회장 (전 당중앙위 국제부장, 국방위원회 참사)
강석주(1939)
8
외무성 제1부상, 당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강석숭 전 당역사연구소장의 동생)
주규창(1933)
7
당중앙위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평해(?)
5
평안북도 당위원회 책임비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겸 법제위원회 위원
리용철(1928)
4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군사 담당), 당중앙군사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인민군 작전국장)
최태복(1930)
4
정치국 후보위원, 당중앙위 비서(교육 담당),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당중앙위 비서국 국제비서 및 국제부장; 당중앙위 교육비서 및 과학교육부장)
김일철(1933)
3
인민무력부장, 당중앙군사위원, 국방위원회 위원,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해군사령관)
차승수(1940)
3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중린(1924)
2
당중앙위 비서(근로단체 담당),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경옥(?)
1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정태근(?)
1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국장, 중장
김영일(1945)
1
외무성 부상(전 외교부 국장, 부부장; 6자 1차회담 북측 수석대표)
북한에서 군대에 대한 지도는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그리고 국방위원회의 세 기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조선로동당 규약 제46조는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계승한 조선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조선인민군이 당의 군대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1998년 개정헌법 100조는 국방위원회에 대해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통일부 발간 북한 권력기구도 중 ‘권력체계’와 연합뉴스가 작성한 ‘<그래픽> 북한 권력 체계도’(연합뉴스 2008/09/10)를 보면 군대에 대한 지도는 국방위원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부적절하게 그려져 있다.
당 규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23조는 당중앙위원회가 “혁명적 무력을 조직”하고 그들의 전투능력을 높인다고 규정함으로써 당중앙위원회가 군대를 조직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당 규약 제47조는 구체적으로 “조선인민군대 내의 각급 단위에 당조직을 구성하며 조선인민군의 전체 당조직을 망라하는 조선인민군 당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인민군 당위원회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직속하며 그 지도 밑에 사업하고 자기 사업에 대하여 당중앙위원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당 규약 제52조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과 중앙기관 내에 조직된 정치국(정치부)은 당 중앙위원회 직속이며 그 지도하에 사업을 수행하고 담당사업에 관해 당 중앙위원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함으로써 군 총정치국에 대한 당중앙위원회의 직접적 통제를 보장하고 있다. 한편 당 규약 제27조는 당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당군사정책 대행방법을 토의 결정하며 인민군을 포함한 전무장력 강화와 군수산업발전에 관한 사업을 조직, 지도하며 우리나라(북한)의 군대를 지휘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군대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 하에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당 규약에 의하면, 당중앙위원회는 주로 군대 조직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고,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군대에 대한 지휘권과 군사정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 중앙위원회가 군대 조직에 대한 정치적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기능에서도 확인된다.
<그림 6> 북한군 당조직, 정치기관, 지휘․행정조직 관계
2)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구성원은 1980년 제6차 조선로동당 대회 때는 19명이었으나 사망 등으로 계속 줄어 2009년 3월 현재 김정일, 리을설, 조명록 등 10명이다. 현재 국방위원회의 위원급 이상의 직을 보유하고 있는 구성원이 8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중앙군사위원회가 국방위원회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핵심엘리트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5> 당중앙군사위원회 구성원 현황(2009년 3월 현재)
이름(출생연도)
직책
겸직 (비고)
김정일(1942)
위원장
당 총비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국방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리을설(1921)
위원
당 중앙위원, 인민군 원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빨치산 출신, 前 호위사령관)
조명록(1928)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김영춘(1936)
위원
인민무력부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인민군 총참모장)
리용철(1928)
위원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군사 담당),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인민군 작전국장)
리하일(1935)
위원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 인민군 차수
박기서(1929)
위원
인민군 차수 (前 평양방어사령관) (김일성의 고모사촌)
김명국(1940)
위원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인민군 대장 (前 108기계화군단장)
김익현(1916)
위원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빨치산 출신) (前 당중앙위원회 민방위부장)
김일철(1933)
위원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국방위원회 위원,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인민무력부장, 해군사령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인적 구성을 보면 무장력에 대한 지휘 통제는 국방위원회보다 더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중앙군사위원회에는 국방위원회에도 소속되어 있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김정일), 총정치국장(조명록), 인민무력부장(김영춘),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김일철)을 제외하고도 군대의 지휘와 관련하여 이들 직책 다음으로 중요한 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김명국)이 당중앙군사위원회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당중앙군사위원회에는 군대에 대한 당생활지도와 군부 인사를 담당하는 조직지도부의 제1부부장(리용철), 군대의 후방사업을 지도하는 당 중앙위원회 군사부장(리하일), 전 호위총국장(리을설), 전 평양방어사령관(박기서), 전 당중앙위원회 민방위부장(김익현) 등 전 현직 당내 군 조직책임자와 군 수뇌부가 망라되어 있다(이대근 2003, 234~235쪽 참조). 이 같은 인적 구성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군대에 대한 지휘를 보장하고 있는 조선로동당 규약의 관련 조항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에 대한 지도와 지휘에 있어서 당중앙군사위원회가 국방위원회에 비해 실질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표 5>과 <표 6>을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의 두 조직에서 김정일, 조명록, 김영춘, 김일철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을 비교해보면, 국방위원회에는 원수 계급의 엘리트가 단 한명도 없는데 비해 당중앙군사위원회에는 한 명(리을설) 있고, 국방위원회에는 차수 계급 엘리트가 1명(리용무) 있는데 비해, 당중앙군사위원회에는 3명(리하일, 박기서, 김익현)이나 있다. 결국 군과 관련하여 당중앙군사위원회가 국방위원회보다 훨씬 권위 있는 기구라고 말할 수 있다. .
3) 국방위원회
1998년 헌법 개정에 의한 국가기구 개편 내용을 보면, 정치와 군사, 경제 등 국정의 모든 분야를 책임지는 국가주석직이 폐지되고, 김정일은 기본적으로 군사 분야만 책임지는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인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직에 추대되었다. 개정 헌법에 의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일체의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제102조)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며(제111조), 내각 총리가 대외적으로 정부를 대표하도록 되어 있어(제120조) 외형상으로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외형적 권력분산은 김정일이 당면한 위기극복을 위해 경제사업은 행정경제일꾼들에게 맡기고 당과 군대를 중심으로 통치하겠다는 선군정치 구상을 국가기구 개편에 반영한 결과였다.
그런데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정일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에 추대하는 연설에서 그 직책이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역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며 사회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 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 영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라고 설명하였다(로동신문 1998/09/06.).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에 대한 헌법상의 규정을 넘어서는 이 같은 해석은 김정일이 국가기구를 영도하는 조선로동당의 총비서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설명이며, 그가 초헌법적 존재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김영남의 연설이나 북한의 어느 문헌에서도 국방위원회에 대해서는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역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1992년 헌법에 의하면 국방위원회가 최고인민회의와 그 휴회 중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중앙인민위원회 다음 순위에 있었는데,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가 최고인민회의 다음 순위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국방위원회가 법적 지위와 구성, 임무와 권한에 있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지방주권기관들, 사법검찰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었다. 북한은 이 같은 변화에 대해 “국가기구체계에서 국방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지위와 권능을 격상시킴으로써 국가정치체제를 새롭게 수립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선군정치체제’는 국가기구체계를 군사체계화한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체계에서 군사를 우선시하고 군사 분야의 지위와 역할을 최대한 높이도록 권능을 규제한 정치체제라고 설명한다(김봉호 2004, 79). 1998년 개정헌법에 의해 국가기구체계에서 국방위원회와 군사 분야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되었지만, 국방위원회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나 내각을 지도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국방위원들 대부분이 군사 분야 관련자들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북한은 선군정치가 “전군, 전당, 전민에 대한 국방위원회의 지휘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국방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전국, 전민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며 조국보위에 필요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제때에 신속히 보장하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전쟁을 일사불란하게 승리적으로 치를 수 있게 하고 있다”(김철우 2000, 99-100)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설명처럼 전시(戰時)에는 정규군대뿐만 아니라 비정규무력인 노농적위대와 붉은청년적위대 그리고 내각 등 모든 국가기구를 동원할 수 있는 국방위원회가 당 중앙군사위원회와 함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시에 국방위원회는 주로 반항공(민방위)훈련, 제대군인 사회 배치 문제 등에 관한 지시와 결정을 주로 내리고 있을 뿐, 군대지휘와 군사문제에 관한 지시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전쟁준비에 필요한 지시가 당 중앙군사위원회 이름으로 시달되고, 인민군에 대한 명령이 주로 당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은 국방, 군사와 관련한 사항이 기본적으로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권한에 속하는 것임을 말해준다(이대근 2003, 208).
이처럼 일반적으로 국방위원회의 위상이 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군사위원회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 기관과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영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방위원회의 독자적인 기능은 무엇보다도 김정일의 정상외교를 의전상 뒷받침하는데서 나타난다.
북한은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형식상의 국가수반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인 국가수반은 김정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해외 인사의 방북시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접견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푸틴 대통령 등 외국 정상과의 회담에는 김정일이 직접 나선다. 이 같은 김정일의 정상외교를 현재 의전상 뒷받침하는 조직이 국방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주석부 외사국장’을 맡았던 의전 베테랑 전희정이 국방위원회 외사국장을 맡아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안내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연합뉴스 2000/06/13, 2007/10/05), 현재 국방위원회는 과거 주석부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김일성 생존시 금수산의사당(주석부)에는 김일성의 책임서기실, 군사무관실, 외사국장실, 서기실 등이 있어 주석의 업무를 보좌하였다(고영환 1997, 74). 1998년 헌법 개정으로 비록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국가수반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김정일은 주석부의 업무를 국방위원회로 이관하였음이 확실시된다.
또한 국방위원회는 김일성 생존시 그의 지도를 국가기구 차원에서 뒷받침하였던 중앙인민위원회의 기능도 부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8년 헌법 개정으로 폐지되기 전 중앙인민위원회는 대내정책위원회, 대외정책위원회, 사법안전위원회, 법제위원회, 경제정책위원회 등 5개 부문별 위원회를 두고, 경제건설에 부분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국방위원회가 아직 중앙인민위원회처럼 부문별 위원회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군인건설자들과 대규모 군중 동원을 필요로 하는 건설사업에 대해 국방위원회 이름으로 지시가 내려지고 있다. 예를 들어 2000년 초에는 대규모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국방위원회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리용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토지정리사업과 같이 주로 군인건설자들이 동원되는 사업에 대한 김정일의 현지지도 또는 행사에 자주 참석해 국방위원회가 특히 대규모 건설사업에 크게 관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연합뉴스 2000/03/13, 2000/05/16, 2000/05/19, 2000/05/31, 2000/06/18 참조). 물론 국방위원회는 하부 행정단위까지 통제할 수 있는 조직체계와 인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국방위원회의 결정 사항이 제대로 집행되기 위해서는 당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내각의 결정과 마찬가지로 국방위원회 결정의 집행을 위해 당기관이 정치사업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표 6> 국방위원회 구성원 현황(2009년 3월 현재)
이름(출생연도)
직책
겸직(비고)
김정일(1942)
위원장
당 총비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당중앙군사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조명록(1928)
제1부위원장
인민군 총정치국장, 당중앙군사위원,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리용무(1923)
부위원장
인민군 차수, 당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인민군 총정치국 국장, 국가검열위 위원장)
김영춘(1936)
부위원장
인민무력부장, 당중앙군사위원,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인민군 총참모장)
오극렬(1931)
부위원장
당중앙위원회 작전부장 (前 인민군 총참모장, 공군사령관, 공군대학 학장)
김일철(1933)
위원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당중앙군사위원,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前 인민무력부장, 해군사령관)
전병호(1926)
위원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당중앙위원회 비서(군수공업 담당),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겸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
백세봉(1946)
위원
제2경제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국방위원회 구성원은 1990년에만 해도 11명이었으나 점차적으로 줄어들어 1997년에는 5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1998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회가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으로 격상되면서 구성원은 다시 10명으로 증가하였다. 2003년 8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1차 회의를 통해 국방위원회에서 80대의 리을설, 백학림이 퇴임함으로써 혁명1세대(빨치산 세대)가 정치 일선에서 사실상 전면 퇴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젊은 최룡수 인민보안상(1936년생)과 얼굴도 나이도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는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백세봉이 국방위원으로 새로 선출되었다. 백세봉 신임 국방위원은 고령의 김철만 위원을 대신해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제2경제위원회를 총괄하는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연합뉴스, 2003/12/14; 세계일보, 2004/05/10). 1998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직에 선출되었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2003년에 위원으로 격하되었는데, 이는 수평관계에 있는 김영춘 총참모장과 격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연합뉴스 2003/09/03). 이후 연형묵이 사망하고, 최룡수가 국방위원직에서 해임되었으며, 2009년 2월 오극렬 당중앙위원회 작전부장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됨으로서 총 구성원은 8명이 되었다.
지난 2월 11일 김영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 리영호 대장에 대한 인사 결정을 발표할 때 국방위원회의 이름이 당중앙군사위원회보다 앞선 것을 보고 일부 전문가들은 국방위원회가 조선로동당보다 더 힘있는 기구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전현준 박사는 최근 발표한 한 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겸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은 2월 11일 김영춘(73)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인민무력부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임은 2월 20일 오극렬(78) 당 중앙위 작전부장이 임명되었다. 국방위원회와 관련된 인사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김정일의 호칭에서 국방위원장이 앞섬으로써 국방위원회가 노동당 우위에 있지 않은가라는 관측을 낳게 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1998년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언급한대로 국방위원회가 정치, 경제, 군사 등에 걸친 ‘총체적 지휘통솔’을 한다는 내용이 증명된 것이다. 노동당이 국정방향 기획 등의 고유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방위원회가 인민무력부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당 중앙위 비서국 전문부서 등의 도움을 받아 국정기획 업무를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전현준 2009, 21)라고 주장함으로써 당에 대한 국방위원회의 우위를 증명하는 근거로 해석했다. 그런데 북한이 지난 2월 11일 군 인사에서 김정일의 직책 중 ‘국방위원회 위원장’ 직책을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직책보다 앞세운 것은 인사 대상이었던 두 인물, 즉 김영춘과 리영호에게 부여한 직책과 이들이 군부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영춘은 차수 계급이고 당중앙군사위원이며 국방위원인데 비해, 리영호는 대장 계급이며 당중앙군사위원도 국방위원도 아니기 때문에 김영춘의 위상이 리영호보다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영춘을 리영호보다 먼저 호명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김영춘에게 부여한 직책은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장이고, 리영호에게 부여한 직책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 하에 있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기 때문에 이번 결정에서 예외적으로 국방위원회가 당중앙군사위원회보다 앞서게 되었다.
2009년 3월 현재 국방위원회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면 8명 중, 김정일, 조명록, 김영춘, 김일철의 4명은 당중앙군사위원회와 소속이 중복되어 있어 두 기관의 업무상 통일을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4명 중 전병호는 당중앙위원회에서 군수공업 담당 비서를 맡고 있고, 백세봉은 제2경제위원회의 부서 책임자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국방위원회는 기본적으로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이라는 헌법상의 규정에 부합하는, 군 수뇌부와 군수 책임자의 집합체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박형중 외 2004, 139~140 참조). 전(前)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리용무는 김일성의 외사촌매부인데, 김정일의 후계자 부상 과정에서 적극 밀어준 공로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998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부위원장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현성일 2007, 224 참조).
3. 후계자론과 ‘3대세습’에 대한 북한의 입장
북한의 이론가들은 수령의 혁명위업이 “대를 이어 진행되는 장기적인 사업”으로서 그 수행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세대교체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혁명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시기에 바로 수령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해나가는 령도의 계승 문제, 후계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혁명위업의 운명이 결정되게 된다(김인숙 2003, 146)”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된 반면 북한에서 사회주의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은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후계자 문제가 바람직스럽게 해결되지 못한 데 비해 북한에서는 이 문제가 ‘빛나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라고 북한은 설명한다(김인숙 2003, 148-149). 따라서 북한이 앞으로도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할 경우 김일성 시대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후계자론이 김정일의 후계자 결정 과정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후계자론에서 주목할 것은 수령과 ‘수령의 후계자’ 모두에게 거의 동일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 문헌은 김정일이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에서 수령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노동계급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수행하는 데서 수령의 후계자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후계자를 “인민대중의 뇌수, 통일단결의 중심, 당과 혁명의 최고지도자”로서 수령의 지위를 이어나가는 존재로 간주한다(사회과학출판사 1989, 197). 이처럼 북한에서 수령의 승계는 단순히 특정 직책을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의 ‘절대적 지위’를 승계하는 것이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또한 수령의 영도가 대를 이어 계승되는 것처럼 수령에 대한 충실성도 대를 이어 계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김유민 1986, 100).
북한은 ‘수령의 후계자’가 지녀야 할 표징으로 ①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 ② 뛰어난 예지, ③ 세련된 영도력, ④ 고매한 덕성, ⑤ 빛나는 업적으로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을 들고 있다. 이 중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후계자가 갖추어야 할 인물적 표징 중에서도 ‘중핵’을 이루는 것으로 지적한다.
북한은 이처럼 수령의 후계자가 지녀야 할 표징들을 언급한 후 흥미롭게도 수령의 후계자는 어디까지나 인물을 본위로 하여 선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강조는 언뜻 보기에 후계자 선출이 다수의 후보자를 상대로 객관적 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자간 권력승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 즉 북한은 후계자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훌륭히 갖추고 있는데, 그가 수령과 혈연관계에 있다고 해서 주저하고 그를 후계자로 추대하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령과 혈연관계에 있는 걸출한 인물이 후계자로 추대되는 경우 그것을 덮어놓고 ‘세습제’라고 악평하려 드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비이성적이고 반역사적인 사고”라고 덧붙이고 있다(평양출판사 1990, 44-50). 북한은 이 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의 권력 승계를 정당화하였는데, 이 논리를 여전히 고수한다면 향후 김정일의 아들에 의한 권력승계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인물본위 원칙이 후계자 선출의 대원칙이라고 하면서도, 후계자 선출에서 준수해야 할 몇 가지 요체가 되는 문제들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① 후계자는 전인민적 추대에 기초해서 선출해야 하고, ② 새 세대의 인물을 선출해야 하며, ③ 수령 생존시에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 일반 인민이 수령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후계자를 추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준수해야 할 요체 중 더욱 중요한 것은 후계자로 ‘새 세대의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수령은 자신의 후계자를 아들 세대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봉건적 문화(정성장 1997, 126-130)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어 간부들과 당원들을 “당과 수령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참다운 충신, 지극한 효자”로 준비시켜야 한다고 강조(김정일 1997, 5)하는 북한 체제에서 수령이 후계자를 다음 세대에서 결정해야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아들을 선호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북한은 수령의 후계자로 새 세대의 인물을 선출해야 하는 근거로 만일 수령과 같은 세대에 속하는 인물을 후계자로 내세우면 그의 영도기간이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이어 또 다른 후계자를 추대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변혁운동의 뇌수이며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이 빈번히 바뀌게 되여 영도력 부재의 위기감을 빚어낼 수 있고 변혁운동을 일관성 있게 밀고나가는 데도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평양출판사 1990, 52-55).
북한은 또한 수령의 생존시기, 즉 수령 재임시에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수령이 불의에 퇴임한 다음 후계자를 추대하는 경우에는 “수령의 영도가 일시적이나마 중단되거나 아니면 후계자의 영도체계가 채 공고화되지 못한 틈을 타서 권력쟁탈을 노리는 야심가들이 준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후계자를 수령 생존시에 선정하면 후계자가 수령을 직접 보좌하여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며 수령의 노고와 심려를 덜어드릴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평양출판사 1990, 55).
2005년 1월 27일 북한 중앙방송의 정론 “선군의 길”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김일성이 각기 ‘나라의 본분’ 그리고 ‘조국광복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과업을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한다면 손자 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성취해야 한다고 한 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이 “어버이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이 땅에 기어이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일떠세우고 인민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안겨주겠다”고 말한 것을 소개하였다. 정론은 이어서 “원대한 뜻을 피력하는 시대는 달랐다. 그러나 위대한 문제는 하나같이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안은 것으로 뜨거웠다. 그것이 내 가다 못가면 대를 이어서라도 끝까지 가려는 계속혁명의 사상이었다”고 언급했다.
북한은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조국광복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과업을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다 한다면 손자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이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고야 말 것”(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80-81)이라고 한 김일성의 1943년 발언을 보도하였다. 이 발언을 다르게 표현하면 김일성이 못 이룬 과업을 김정일이 하고, 김정일이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 계속 수행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발언에 이미 ‘3대 세습’이 시사되어 있다. 김일성의 ‘유훈’을 받들겠다고 한 김정일이 후계 문제에서 김일성과 다른 입장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북한은 지난 2월 6일 로동신문에서 ‘만경대 가문’에 대해 언급(연합뉴스 2009/02/06)한데 이어, 2월 26일자 로동신문에서 다시 “김형직 선생님으로부터 어버이 수령님(김일성)과 위대한 장군님(김정일)의 대에 이르는 만경대혁명일가의 숭고한 지향과 포부는 무궁번영할 강성대국”이었다고 주장”(연합뉴스 2009/02/28)함으로써 다시 ‘만경대 가문’에 대해 언급했다. ‘만경대 가문’에 대한 이같은 강조는 결국 북한 지도부가 김정일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4. 김정일의 3남 김정운의 자질과 후계자 지명 가능성 평가
김정일의 후계자로는 그 동안 그와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김정남,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김정철 그리고 3남 김정운이 주로 거론되어 왔다. 김정남은 1971년생으로 2009년 현재 만 38세이고, 김정철은 1980년생으로 만 29세, 3남 김정운은 만 26세이다.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는 김정일 총비서가 아들 대신 다른 인물 가운데 후계자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정남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명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다른 논문에서도 언급한 바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생략하고 여기서는 김정일의 세 아들 중 현재 후계자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3남 김정운과 차남 김정철의 성장배경과 자질 등에 대해 고찰해보자.
<그림 7>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가계도
김옥
(1964년생)
김정숙
(1917.12.24~
1949.9.22)
김일성
(1912.4.15~
1994.7.8)
김성애
(1924년생,
85세)
김정일
(1942.2.16~ , 67세)
66세)
김경희
(1946.5.30~ , 63세)
62세)
장성택
(1946.2.6~ ,
63세)
김경진
(1952년생,
57세)
김평일
(1954년생,
55세)
김영일
(1955년생,
2000 사망)
김설송
(1974년생,
35세)
김영숙
(1947년생,
62세)
성혜림
(1937년생, 2002.5 사망)
고영희
(1953.6.16~
2004.5.26)
김정남
(1971.5.10~, 38세)
김정철
(1980.9.25~,
29세)
김정운
(1983.1.8~, 26세)
김여정
(1987.9.26~,22세)
부부
자녀
김정일로서는 김일성에게 인정받지 못한 성혜림과의 동거를 통해 태어난 ‘장남’ 김정남을 후계자로 내세울 경우 자신의 권위에 큰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김정남이 후계자로 선택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북한의 간부들에게 수령의 ‘충신’과 ‘효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북한의 봉건적 정치문화 속에서 김정일은 후계자로 차남 김정철과 3남 김정운 가운데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김정철은 북한에서 ‘사실상의 장남’ 대우를 받으며 성장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김정일의 권력을 승계할 것으로 유력시 되어왔다. 반면에 다부지지 못한 성격과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후계자로 지명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들도 꾸준하게 제기되어 왔다. 한편 김정운은 세 아들 중 나이가 가장 어려 2000년대 초에만 해도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지 못했다. 그러나 리더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김정운이 북한의 차기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 『김정일의 요리사』가 2003년에 국내에서 출간되면서부터 김정운의 자질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부터 북한 내부에서 김정운을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김정운의 정치적 부상과 관련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지 김정철과 김정운의 성장과정과 성격, 자질을 통해 비교 검토해보자.
1) 차남 김정철과 3남 김정운의 성장과정
김정철과 김정운은 재일조선인 귀국자로서 만수대 예술단의 무용수였던 고영희와 김정일 사이에서 각기 1980년 9월 25일과 1983년 1월 8일에 태어났다. 김정일은 고영희를 1975년경에 만나 1976년경부터 동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과 남한의 일부 연구자들은 고영희가 북한 유도의 창시자인 고태문의 딸이라고 주장해왔으나, 남한 정보당국은 고영희가 1999년 사망한 재일동포 고경택의 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에는 ‘초대소’라고 불리는 호화 별장이 곳곳에 있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그 중 평양 근처에 위치한 강동(별칭 ‘32호’)초대소에는 김정일 전용의 ‘장군 건물,’ 고영희와 그녀의 자녀들을 위한 ‘1호 건물,’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와 남편 장성택(현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부부를 위한 ‘2호 건물’ 그리고 초대소 내부를 총괄하는 ‘본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김정철과 김정운은 바로 이 강동초대소에서 어린 시절 후지모토에게서 당구를 배우고 즐겼다. 후지모토가 김정운을 처음 만난 곳은 신천 초대소였는데, 김정운은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후지모토 겐지는 1992년 김정일이 부인 고영희 및 비서와 함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용 팩스 용지를 하나씩 검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수기에 적고 있다. 이는 김일성이 사망하는 1994년 이전에 이미 김정일이 고영희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김정일이 고영희를 매우 신뢰하였고 고영희가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여행을 가거나 도쿄 디즈니랜드에 간 적도 있다. 고영희와 김정철, 김정운은 유럽여행을 갈 때 김정일 전용기 ‘216호’를 이용해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김정철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스위스의 수도 베른의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Berne)에 다닌 사실은 그가 다녔던 학교의 앨범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김정운의 스위스 유학과 관련해서는 정확한 내용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필자와의 2008년 12월 초 인터뷰에서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이 일본에 입국한 1996년 9월까지 김정운은 평양에 있었으며 다시 입북한 1998년 6월 김정운은 스위스에 나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므로 김정운이 스위스에서 유학했다면 1996년부터 1998년 사이가 된다. 이 시기에 후지모토 겐지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김정운의 유학 기간이 1년인지 2년인지에 대해서까지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후지모토 겐지는 또한 김정운이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1998년에 여동생인 김여정과 같이 귀국했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증언했다.
김정운은 농구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는 친형인 김정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스위스 유학시절 김정철은 특히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로 7년 연속 리바운드 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데니스 로드맨(Dennis Keith Rodman)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로드맨의 등번호가 새겨진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 티셔츠를 입고 농구를 했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운도 김정철처럼 농구를 좋아해 고영희의 여동생(고영숙) 아들과 농구를 할 때 자주 심판을 봐주기도 했다고 수기에 적고 있다. 후지모토는 1996년에 일본에 귀국했다가 1998년 북한에 돌아와서는 과거 김정철과 김정운이 사용하던 체육관이 멋진 농구 코트로 변했으며 각종 기구도 미 NBA에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김정철과 김정운이 여성팀을 상대로 농구시합을 하면서 멋진 슛을 쏘는 것도 목격하였다. 오랜만에 김정철과 김정운을 다시 보게 된 후지모토 겐지는 “2년 사이에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키가 자랐으며 근육도 붙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정철과 김정운은 농구 게임을 하면서 국가대표팀의 전문 심판을 불렀다.
김정철과 김정운이 1998년 여름에 스위스에서 귀국한 후 다시 나가지 않은 데에는 고영희의 동생 고영숙과 그녀의 남편 박건이 1998년 5월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영숙의 망명으로 김정철과 김정운, 김여정의 실체가 드러나 그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김정일과 고영희가 자식들의 스위스 복귀를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2) 고영희 개인숭배와 후계문제
1990년대 말부터 고영희에 대해 북한 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개인숭배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김정철과 김정운의 북한 지도부 내 입지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98년경부터 북한군 특수부대인 민사행정경찰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는 2002년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북한 내부자료에서 고영희는 “존경하는 어머님” 또는 “존경하는 평양의 어머님”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호칭되었으며,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와 꼭 같으신 분,” “인민군 장병들을 충성과 위훈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자애로운 스승” 등으로 치켜세워졌다. 그리고 “모든 일군들은 대를 이어 수령복, 어머님복을 누리는 오늘의 이 영광, 이 행복을 가슴깊이 간직”해야 하며,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선군혁명령도를 총대로 충직하게 받드는 길에서 대를 이어 누려 가는 수령복, 어머님복을 더욱 빛내여 나가야 한다”고 강조되었다. 2002년 8월 발행된 강연자료를 보면 고영희는 군대 안의 정치사상 교양뿐만 아니라 전투훈련에까지 광범위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영희가 북한 내부에서 ‘국모(國母)’로 내세워짐으로써 그와 김정일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김정철 또는 3남 김정운이 김정일과 성혜림 간에 태어난 ‘장남’ 김정남보다 후계자로 지명받기에 더욱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도 2002년 8월 북한 강연자료를 보고 “김정철이를 후계자로 만들려는 거지, 나는 김정남이는 절대 안 된다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후계자는 왕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가 되는 거니까. 성혜림이 오래 전에 떨어져 나갔고, 김정일은 고영희를 가장 사랑하는 게 사실이야”라고 평가했다.
미국에 망명한 고영숙과 그녀의 남편 박건은 고영희가 1990년대 초부터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대남 비서를 자기 측근으로 만들어 김정철, 김정운 형제의 후계자 옹립을 준비해왔다고 미 정보당국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용순 대남 비서는 2000년에만 해도 김국태 비서와 함께 김정일 총비서의 각종 공개 활동을 각각 37회 수행하는 등 김 총비서의 최측근 인사였다. 고영숙은 또한 김용순 비서와 고영희가 특히 2001년 김정남이 일본 밀입국을 기도하다 적발돼 추방된 후 북한에 귀환하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인 후계자 옹립작업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고영숙의 진술이 어디까지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김용순 대남 비서가 음주운전으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2003년 6월 16일이 고영희 생일이라는 점은 김 비서가 고영희 생일파티에 참석하고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김용순 비서가 동년 10월 26일 사망함으로써 고영희는 중요한 측근 한 명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영희의 부상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중반 권력엘리트의 부침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영희는 김일성 사후인 1995년경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에 동행하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2002년 시점에는 확고하게 제2인자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03년 7월 4일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한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탈북자․북한인권 문제 토론회’에 참석하여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고 지적하고, 장성택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고 발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장엽의 이 같은 발언은 김정철 또는 김정운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세우려던 고영희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음이 틀림없다. 그 결과 2003년 7월 이후 장성택의 공식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었으며 2004년에는 직무 정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이 한국 국회에서의 황장엽 발언을 빌미로 장성택을 김정일의 권력을 넘보는 ‘야심가’로 몰아 무력화시킨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고영희는 2004년 5월 프랑스에서 유선암으로 사망하여 6월초에 북한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확인된다. 고영희의 사망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동년 8월 말이었다. 이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고영희 사망으로 인해 기존의 후계구도에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물론 고영희의 사망으로 김정철과 김정운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정일의 마음이 여전히 그들에게 기울어져 있으므로 김정철과 김정운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기존의 후계구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은 것이었다.
김정철은 2001년부터 2006년 4월까지, 김정운은 2002년부터 2007년 4월까지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주체의 영군술’을 비롯해 군사학을 극비리에 공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철과 김정운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고영희가 생전에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이어받아야 한다며 김 총비서에게 강력히 요청해 이뤄졌고, 이에 따라 이들만을 위한 특설반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을 마친 정철․정운 두 아들이 김정일 총비서가 참석한 공개석상에서 ‘주체의 영군술’을 구현한 군사이론을 내놓아 김 총비서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한 것으로 안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철과 김정운은 2007년에 들어와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을 비롯한 각종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이 이 같은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고영희 사망 3년이 경과하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김정일의 건강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3) 김정일 아들들의 건강상태와 후계문제
김정일의 아들들의 건강 상태야말로 기존의 후계구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세 아들 모두 각종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먼저 장남 ‘김정남’은 심장질환 치료차 유럽을 오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차남 김정철은 ‘여성 호르몬 과다분비증’에 걸려 가슴까지 나오고 되었고, 목소리까지 여성화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특히 일본 후지TV는 “헐리우드 액션스타 장 클로드 반담의 육체미를 부러워한 정철씨가 근육증강제를 과다 섭취한 결과, 호르몬 분비 체계에 문제가 생겨 목소리가 여성처럼 변하는 등 ‘여성호르몬 과다 분비증’을 앓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김정철은 농구를 하다가 부상한 다리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마약을 진통제로 쓰는 바람에 현재 중독 현상이 심각하다고 보도도 나왔다. 한 대북소식통에 의하면 “정철은 통증 치료를 위해 마약성 마취제 프로메돌(모르핀 대용으로 쓰이는 진통제)을 투약 받은 적이 있는데, 그 후 이 진통제에 애착을 보이며 친구들로부터 히로뽕 등 마약을 구해 상습 투여하는 바람에 심각한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철의 건강상태에 대한 이 같은 보도가 사실이라면, 후계자 지명과 관련하여 김정일의 마음이 ‘총애’하는 김정운에게 기울 수도 있을 것이다.
3남 김정운은 아직 20대임에도 불구하고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으며, 특히 2008년부터 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지난 8월 김정운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2008년 9월 중순 김정남이 베이징으로 출국한 후 평양에 국제전화를 걸어 “정운이는 괜찮으냐. 좀 나아졌느냐”라고 물었다는 보도는 김정운의 오토바이 사고설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일견 신뢰할만한 어느 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운이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맞지만 사고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4) 김정일의 김정운 선택 가능성
연합뉴스가 보도한 것처럼 김정일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면, 이는 그가 ‘유순한 김정철’보다는 다부지고 통솔력이 있는 김정운이 그의 사망 이후에도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음을 시사한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이 김정철에 대해 “그 애는 안 돼. 여자아이 같아”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주 나쁜 평가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그는 김정일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식은 오히려 김정운이라고 주장해왔다. 김정운은 아버지 김정일 얼굴을 쏙 빼닮았고 체형까지도 흡사하다고 한다. 후지모토의 이같은 증언은 김정철보다 김정운이 후계자로 지명될 가능성이 크다는 일부 주장들의 핵심적인 논거로 제시되어 왔다. 김정철의 과거 베른국제학교 급우들은 김정철에 대한 ‘여자아이 같다’는 표현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지 않고 있으므로 김정철의 성격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김정일이 김정철의 유순한 성격에 만족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정운은 현재 만 26세의 나이로 어리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강한 리더십과 승부욕을 보여 왔다.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김정철이 어렸을 때부터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야망이 없기 때문에 북한을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정철팀과 정운팀이 농구시합을 한 후 정철은 팀원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데 비해 정운은 오랜 시간 반성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팀원들에게 “네가 왜 그쪽으로 패스했느냐? 연습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정운과 장성택의 관계에 대해서도 후지모토 겐지는 장성택이 김정철과 김정운의 교육을 담당했다고 필자에게 증언했다. 그리고 김정일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장성택이 100% 서포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김정일의 현부인인 김옥도 성격이 착한 사람으로서 야망을 갖기보다 김정운을 서포트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연합뉴스의 보도처럼 김정일이 지난 1월 8일께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 김정운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하달했다면, 이는 김정운의 생일(1월 8일) 직전에 후계자 결정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후계자 결정 시기와 관련하여 과거 김정일은 그의 32회 생일 바로 3일 전인 1974년 2월 13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결정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5. 후계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 엘리트들
김정일을 제외하고 그 외에 북한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엘리트들은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들 그리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과 부부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모두가 북한의 후계구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대부분 김정일 이후에도 북한을 이끌어갈 핵심세력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후계 문제와 관련하여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들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에서 본부당 조직을 담당하고 있는 리제강과 군 조직을 담당하고 있는 리용철 제1부부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법 및 검찰, 인민보안성, 국가안전보위부를 관장하는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 못지않은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고려의 대상이다. 담당 분야만 가지고 놓고 보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이 행정부장보다 더 큰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장성택은 김정일의 매제로서 김정일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직책을 넘어서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북한 후계구도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 인사 3명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1) 리제강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제강(1930년생)은 1973년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출발해 부과장, 과장, 부부장을 거친 조직지도부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1982년에 조직지도부 부부장 겸 김정일서기실 서기에 임명되어 20년 가까이 조직지도부 인사담당 부부장 자리를 맡고 있다가 2001년 중앙당에 근무하는 구성원들의 조직생활을 통제하는 ‘본부당’의 문성술(1999년 3월 사망) 책임비서 겸 제1부부장의 후임자로 등용됐다.
김정일 총비서가 부장을 겸하고 있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는 북한사회 전반에 대한 당의 영도와 통제에서 김정일의 오른팔 역할을 맡고 있다. 당 간부 및 당 조직을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 당중앙위원․후보위원․준후보위원의 직함을 가진 군대와 국가의 고위간부들, 중앙과 지방의 각급 당간부, 중앙당 직원 등의 선발과 임명 및 해임을 전적으로 주관한다. 이 때문에 리제강이 과거에 맡았던 조직지도부 인사담당 부부장직은 조직지도부 부부장 10여 명 중에서도 동 부서의 제1부부장에 맞먹는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힌다. 이 같은 사실만으로도 김정일의 리제강에 대한 신임도를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조직지도부가 이처럼 북한의 당․군․정 고위 간부들 전반에 대한 통제권과 인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직지도부장직을 맡는 자가 곧 사실상 2인자가 되는 셈이다. 김정일도 1973년에 조직지도부장직을 맡으면서 제2인자로 부상하였기 때문에 그는 김일성의 사망 후 권력누수 현상을 우려하여 조직지도부장직을 자신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이 사실상 ‘제2인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북한이 선군정치를 하면서도 당을 군대보다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명의 제1부부장들 중에서도 당조직을 관장하는 리제강 제1부부장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제강은 본부당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군부대 시찰 등과 관련된 김정일의 현지지도에 거의 수행하지 않으며, 주석단에 자리 잡는 일도 없다. 이로 인해 리제강은 외부세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북한 지도부에서 김정일 총비서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자 최고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리제강이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들과 전문부서 구성원 등 북한을 움직이는 실세들의 조직생활을 통제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2003년 하반기와 2004년 상반기에 고영희는 장성택 당시 조직지도부 행정담당 제1부부장과 그의 측근들을 무력화(無力化)시키기 위해 리제강을 앞세웠다. 당시 리용철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제1부부장도 장성택 측근의 무력화에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당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리제강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연합뉴스 2006/06/16). 그러므로 리제강과 장성택의 관계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김정일은 장성택에게 2004년 직무정지 당하기 전에 맡았던 조직지도부의 행정 부문을 2007년에 다시 맡기면서 이 부문을 조직지도부에서 분리시켜 당중앙위원회 행정부로 독립시키는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제강에게 향후 최악의 시나리오는 그가 직무정지시키는데 앞장섰던 장성택이 제2인자로 지명되거나 김정일 이후 정권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제강 제1부부장은 2006년에 김정일의 공개 활동을 전혀 수행하지 않았으며, 2007년에는 단 한 차례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한 리 제1부부장이 2008년에는 지난 8월 김정일의 와병 전에 한 차례 수행한데 이어 김정일의 공개활동 재개 이후 무려 8회나 수행하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였다(동아일보 2008/11/18; 연합뉴스 2009/01/06 참조).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일이 당 내부 사업에 과거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당 내에서 리제강의 역할 또는 커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 리용철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겸 당중앙군사위원
리용철(1928년생)은 북한 권력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제1부부장으로서 군대에 대한 당생활 지도와 군부 인사를 담당하고 있다. 인민무력부 작전국장 출신으로 1986년 당중앙위원회 조사부장으로 당에 발을 들여놓은 후 1993년에 당중앙위 부부장을 거쳐 1994년에 지금의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자리에 올랐다. 과묵하면서도 세밀한 작전 참모형인 그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직을 14년째 수행하고 있을 만큼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다.
2006년과 2007년에 그는 김정일 수행 횟수에서 6위에 해당할 정도로 김정일의 지방 현지 지도나 각급 군부대 시찰 때마다 밀착해서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리용철은 2007년에는 김정일의 공식활동에 11회 수행했으며, 2008년에는 4회 수행했다(중앙SUNDAY 2007/12/30; 연합뉴스 2009/01/06). 그가 군사 담당 제1부부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2002년 군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에 깊게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2003년 하반기와 2004년 상반기에 그는 리제강과 함께 특히 장성택과 그 측근 세력들의 무력화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연합뉴스 2006/06/16). 그러므로 그 역시 리제강과 마찬가지로 장성택이 제2인자로 지명되거나 포스트 김정일 정권에서 장성택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같은 이유 때문에 리용철은 장성택보다는 고영희에게서 태어난 김정철이나 김정운이 차기 지도자가 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리용철은 당중앙위원회에서뿐만 아니라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위원직도 맡고 있어 북한 지도부에서 김정일 총비서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자 최고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당 조직 다음으로 중요한 군 조직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 차기 지도자가 되려는 인물은 그와 조직지도부 군사 담당 부부장들의 지원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장성택(1946년생)은 1972년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1988년에 당중앙위원회 청소년사업부장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에 임명됐다. 1992년에 당중앙위원이 되었고, 1995년에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행정 담당 제1부부장에 임명되는 등 나이에 비해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98년부터는 김정일의 각급 군부대 시찰 및 지방 현지지도에도 자주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2002년 10월에는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남한을 방문해 ‘실세’로서의 지위를 과시했다.
이처럼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가던 장성택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03년 7월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김정일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고 말한 직후 활동이 중단되고, 2004년에는 직무정지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된다. 2003년 당시 장성택은 그의 큰형 장성우가 평양 방어를 책임진 차수(원수와 대장 사이) 계급의 3군단장이고, 둘째형 장성길도 인민군 중장으로 군단 정치위원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유고시 정권을 장악하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로 외부 세계에서 주목받았었다.
장성택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후 ‘종파(파벌)행위’와 ‘권력남용’ 등으로 당으로부터 집중 검열을 받았다. 북한은 ‘수령’과 ‘수령의 후계자’ 이외의 당 간부 주위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종파행위’로 간주해왔기 때문에 주변에 다수 측근세력을 형성한 장성택이 ‘종파행위’를 해왔다고 지목됐다. 과거에는 그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고 김정일이 그에게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어느 당간부도 장성택의 종파행위에 대해 김정일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가장 증오하는 ‘배신자’ 황장엽이 김정일 유고시 장성택의 권력승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상황에서 당간부들이 장성택의 ‘종파행위’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김정일의 부인 고영희가 유선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그녀의 두 아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지명하기 위해 서두르게 됨에 따라 장성택의 ‘종파행위’는 김 총비서에게도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장성택의 직무정지는 그의 측근들의 해임 또는 좌천으로 연결되었다. 장성택의 측근 중 최춘황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리광근 무역상, 박명철 체육지도위원장 등은 해임되어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재교육을 받거나 농촌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03년 7월에 임명된 최룡수 인민보안상도 만 1년 만에 해임되었으며, 지재룡 당 국제부 부부장도 지방의 한 노동자로 좌천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장성택 파벌이던 군 장성급 7~8명도 지휘관 등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약 80여 명의 장성택 계열 고위 간부들을 대상으로 집중 조사가 진행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장성택의 형 장성우는 2004년 상반기에 평양 방어를 책임진 3군단장직에서 물러나 당 민방위부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유사시 장성우가 장성택의 권력장악을 돕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성택은 2006년 1월 28일 국방위원회가 주최한 설 연회에 김정일 총비서와 함께 참석, 정치무대에 복귀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을 맡게 되었다. 장성택의 복귀에는 그의 부인이자 김 총비서의 여동생인 김경희의 김정일에 대한 설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성택의 새 직책은 이전에 그가 맡았던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직에 비해서는 영향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근로단체와 김정일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수도 건설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이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2006년 장성택은 김정일의 공식행사에 모두 8차례 수행했다. 이는 황병서 조직지도부 부부장의 39회, 리재일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의 28회,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15회, 김기남 비서의 15회 등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지만, 내각 박봉주 총리의 6회,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의 5회보다는 많은 숫자였다. 한편 장성택에게는 개인적으로 불운이 계속 이어졌다. 장성택의 둘째형으로 북한군 중장이던 장성길은 2006년 7월에 사망했고, 그의 외동딸 금송은 8월말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도중 본국 소환장을 받고 고민하다가 음주 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으며, 장성택도 9월에 교통사고를 당했다(연합뉴스, 2006/07/12, 2006/10/08, 2006/12/27).
2007년 10월경 장성택은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승진하면서 2004년 직무정지 당하기 전 조직지도부의 행정 담당 제1부부장으로서 맡았던 업무를 다시 관장하게 되었다. 조직지도부의 한 부문이었다가 장성택의 행정부장 임명과 함께 독립된 부서가 된 당중앙위원회 행정부는 ⑴ 내각, 도인민위원회 등 북한의 모든 행정기관에 대한 ‘행정지도’, ⑵ 국가보위부, 사회안전부, 중앙검찰소, 중앙재판소에 대한 행정지도, ⑶ ‘비서국 합의대상 간부’ 이상의 외교관을 비롯한 해외근무자와 모든 해외출장자, 3대혁명소조 책임자, 국내 타기관내의 파견근무자에 대한 ‘행정사업’ 등 3개의 큰 기능을 3명의 부부장이 분담해 맡고 있다. 여기서 ‘행정사업’이란 해당 국가기관들의 정치사업을 제외한 대내외 행사․일반행정업무 등에 대한 ‘행정지도’와 이에 따른 정기․부정기 총화를 말한다. ‘행정지도’는 해당 기관의 행정에 관한 모든 사항을 지시하거나 보고받고 이를 사안에 따라 행정부장과 공안부서, 김정일 등에게 차등 보고, 이들의 지시사항을 다시 해당 기관에 명령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중앙당 행정부는 이처럼 행정사업을 담당하면서 국가보위부 등 권력기관에 대한 ‘안테나’역도 병행하기 때문에 조직지도부의 분신(分身)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제외한 전문부서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정치사업’을 ‘행정사업’보다 더 중시하고 있고, 권력기관 중에서도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에 대한 행정사업은 기밀관계로 조직지도부가 각각 조직사업과 함께 맡고 있고, 조직지도부 내의 행정사업 역시 조직지도부가 맡고 있기 때문에 행정부의 권한은 조직지도부에 훨씬 못 미친다(김성윤․조민호 1996, 100~103쪽 참조). 따라서 장성택이 행정부장직에 임명됨으로써 직무정지 당하기 전의 권한을 회복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가 다시 명실상부한 ‘제2인자’가 된 것처럼 평가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장성택이 과거에 맡았던 조직지도부의 행정 부문이 조직지도부에서 분리되어 행정부라는 독립된 부서가 된 배경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3년 하반기와 2004년 상반기에 리제강과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은 고영희의 편이 되어 장성택의 직무정지와 그의 측근들의 숙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김정일은 장성택을 복권시키면서도 그가 과거에 맡았던 행정 부문을 조직지도부에서 분리시켜 장성택이 불편한 관계의 리제강, 리용철 제1부부장과 대면할 기회를 줄이는 배려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이 조직지도부에서 행정 부문을 분리한 데에는 김정일이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이 ‘고모부 장성택’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북한 권력의 핵인 조직지도부를 보다 용이하게 장악하게 하기 위한 배려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2007년에만 해도 장성택의 김정일 공개활동 수행횟수가 5회로 공동 16위를 차지했으나, 2008년에는 14회로 4위에 올랐다. 이처럼 특히 2008년 8월 김정일의 건강이상 이후 장성택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징후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부 언론의 주장처럼 그가 김정일의 권력을 위임받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다거나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의 한 언론은 장 부장의 최측근들로 2004년 지방 노동자로 좌천됐던 리영복 전 남포시당 책임비서, 리영수 전 당 행정부 부부장이 2007년에 당중앙위원회 행정부로 복귀했으며, 당중앙위원회 행정부가 전부 철직되었던 ‘장성택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재룡 당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이 복귀해 김정일 총비서가 류윈산(劉雲山)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장(정치국 위원)을 면담하는 자리에 배석했다고 지적했다(연합뉴스 2007/11/21).
물론 지재룡 등 장성택의 일부 측근들이 2007년경부터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은 맞지만(통일부 2009, 472-473쪽 참조), 복권되었어도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거나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측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일부 측근들의 활동 재개를 가지고 장성택의 측근 전부가 ‘원위치’하게 되었다는 식의 평가는 부적절하다. 장성택의 측근 중 가장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최룡수 전 인민보안상 겸 국방위원 그리고 리광근 무역상은 모두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으로서 2009년 3월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선거에서 선출되지 못함으로써 아직 복권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재룡 전 국제부 부부장과 박명철 전 체육지도위원장도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으로서 제12기 대의원에 선출되지 못함으로써 비록 정치무대에 복귀했어도 아직 완전히 복권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장성택의 형인 장성우 차수도 제12기 대의원 명단에서 탈락함으로써 그의 영향력도 축소된 듯하다. 게다가 장성택의 측근 중 최춘황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은 평안남도 당 선전비서로 좌천된 직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장성택의 영향력 있는 측근들 다수가 아직 완전히 복권되지 않고 있고, 일부 측근들은 아예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2004년에 장성택이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 때문에 직무정지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그와 측근들 모두 근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김정일의 건강이상으로 장성택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커지기는 했지만, 직무정지 전에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완전히 다시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6. 권력승계와 북한체제의 변화 전망
1) 김정일의 권력승계 전망
올해 초까지 김정일 이후 권력을 승계할 인물로 주로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과 ‘장남’ 김정남, 차남 김정철 그리 3남 김정운 등이 주로 거론되어왔다. 장성택 행정부장은 지도부 내에서 평판이 좋고,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성 등에 대한 행정적 지도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사시 권력을 장악하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는 인물 중 하나다. 그러나 그가 관장하고 있는 당중앙위원회 행정부는 군대에 대한 지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중요한 한계가 있고, 장성택은 당조직과 군대를 지도해본 경험이 없다. 그러므로 김정일 이후 차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조직과 군대를 담당하는 당 간부들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편 당조직과 군대를 담당하고 있는 리제강과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은 과거에 고영희 편에 서서 2004년 장성택의 직무정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장성택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숙청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장성택보다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나 후보위원 중 한 명 또는 김정철이나 김정운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그 밑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할 수 있다. 김정철이나 김정운은 아직 너무 젊기 때문에 만약 이들 중 한 명이 차기 지도자가 된다면 당분간 당의 원로들에 의존하여 통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최근에 한 국내 통신사가 보도한 것처럼 김정운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면, 1970년대에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은 김정운에게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이라는 핵심 직책을 맡김으로써 김정운이 먼저 당과 군대, 국가기구의 중상층 간부들에 대한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동시에 김정일에 대한 보고가 김정운을 거쳐 올라가도록 하는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제’ 수립에도 착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운의 파워 엘리트에 대한 장악력이 커지면 그가 점진적으로 최상층 엘리트에 대한 인사에도 관여하게 되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적어도 수년이 걸릴 것이다.
김정일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지명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유고가 발생한다면, 지도부 파워 엘리트들 간의 상호 견제로 일단은 김정운이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만약 김정운이 권력기반을 공고히 다지지 못한 상태에서 대내외 도전에 직면하여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고 지도부 내 핵심 엘리트들 다수와 갈등을 보인다면, 스탈린의 핵심 측근이었던 베리야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당중앙위원회 비서에 의해 제거되고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과 같은 시나리오가 북한에서도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유고 후 김정운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장성택이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스탈린 사망 직후까지만 해도 차기 지도자감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흐루시초프가 소련공산당 지도부 엘리트 대다수가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베리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결단력을 보임으로써 차기 지도자로 부상한 것처럼 당 지도부 내에서 의외의 인물이 권력을 승계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에 봉건적인 정치문화가 존재하고 오랜 기간의 우민화 정책으로 북한 주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장기간 김정일이 생존하면서 후계자의 지도체제 수립을 지원한다면, 김정일 사후 3대 세습이 일단 뿌리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북한 비핵화의 진전과 함께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된다면, 북한 주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는 더욱 더 체제의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북한체제가 일단 3대 세습에 성공하더라도 세습체제가 장기적으로까지 안정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는 어렵다.
2) 북한 ‘급변사태’의 발생 가능성 평가
2008년 9월 9일 정권수립 60주년 행사에의 김정일 불참 이후 그의 와병이 확실시되자 남한과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유고가 발생하면 그것이 ‘급변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한․미가 그 같은 사태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같은 급변사태론은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1990년대 중반의 북한붕괴론이 가졌던 오류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조기붕괴론을 주장했던 전문가들은 남한우월주의에 바탕을 둔 ‘희망적 사고’를 가지고 당시 북한주민의 의식에 대한 실증적 분석 없이 북한의 경제적 위기가 순차적으로 정치적 위기 → 정권붕괴 → 체제붕괴 → 국가붕괴로 연결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의 주장은 북한이 붕괴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 입장과 막연한 ‘감(感)’에 주로 의존하였다. 그래서 경제위기가 정치위기로, 정치위기가 정권붕괴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치적․사회적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같은 조건들에 대한 엄밀한 분석 없이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정성장 2000, 193-238).
같은 맥락에서 김정일의 와병 사실이 알져진 이후 우리 사회의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 사망이 북한에서 대혼란으로 그리고 조기 통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성급한 ‘기대’를 피력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주장의 근거로 북한의 경제적 파산 상태가 20년 이상 가까이 지속되어 자력으로는 소생의 길이 막힌 ‘식물국가’가 되었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북한의 경제적 위기가 순차적으로 정치적 위기 → 정권붕괴 → 체제붕괴 → 국가붕괴로 연결될 것이라는, 90년대 중반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희망적 사고’를 가지고 북한의 미래에 대해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판단은 북한 지도부가 경제발전에는 무능하지만 적어도 체제생존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나름대로 노련함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과는 괴리된 것이다.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일 먼저 ‘사상의 강국’을, 그 다음으로 정치강국, 군사강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제강국’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적 과제 중에서 경제문제 해결이 네 번째 순위에 놓일 정도로 북한 지도부는 사상적 통일과 조직적 통제 그리고 군사력 강화에 힘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의 파탄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부에서 정치적 동요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김정일이 사망하면 경제적 파탄 때문에 곧 체제까지 붕괴하리라고 보는 것은 북한체제의 내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1998년 12월 중국거주 탈북자 1,694명을 대상으로 식량난에 대한 책임소재를 물은 질문에 대해, 굶주림을 김정일의 책임이라고 비판한 사람들은 당시 8.0%에 불과했다(김병로 2008, 128). 이 같은 조사결과는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대량 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정치위기로 발생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2000년 1월부터 3월까지 중국에 체류 중인 북한 난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결과에서도 ‘식량난과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농업제도(집단농장, 주체농법 등) 개혁(27.9%), 개혁․개방(15.6%), 남북통일(15.6%), 국가정책 개선(15.2%), 지도부 교체(12.1%)의 순으로 응답이 나와 지도부 교체 욕구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좋은벗들 편 2001, 57). 이렇듯 지금보다 경제사정이 훨씬 열악하였던 1990년대 중후반에조차 북한에서는 주민들에 대한 사상통제가 나름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당이 선전선동기관들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사회적 일탈행위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처리하면서도 정치적 저항 움직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을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 북한의 급변사태 가능성을 제기하는 대부분의 주장들에는 조선로동당 지도부가 당․군․정 핵심 요직의 겸직과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를 통해 북한의 모든 권력기관들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하여 다수의 연구자들은 “수령유일체제, 일인독재체제에서 지도자 개인의 신상과 관련한 급변사태는 곧바로 정권과 체제, 국가 존립에 영향을 줄 만큼 위협적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일이 자연사를 한 후 “선군정치의 실력자 집단에서 군에 의한 비상통치체제의 구축이나 국방위원회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구성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는다(유호열 2007, 21-25).
김정일 사후 북한에 군부 또는 국방위원회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의 기저에는 대체적으로 조선로동당이 “관료화되고 노쇠”했으며, 국방위원회가 ‘최고권력기관’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을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중앙위원회이며, 그 중에서도 비서국과 전문부서라고 할 수 있다(현성일 2007, 281 참조). 중요행사시 주요 권력기관 서열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국방위원회의 위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보다는 높지만,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보다는 낮다. 또한 <표 3>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특히 당중앙위원회 비서국의 전문부서는 사상과 정치(조직), 경제, 군사, 외교 등 국정 전반을 지도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국방위원회는 주로 군사 분야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당중앙위원회 비서국에는 사실상 북한의 명줄을 쥐고 있는 중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제부와 북한경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남한과의 협상을 담당하는 통일전선부가 포함되어 있지만, 국방위원회에는 대중 외교와 대남 협상을 담당할 전문부서나 인력 모두가 결여되어 있다.
비록 중요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김정일이 가지고 있지만, 당 정책안을 작성하는 것은 당중앙위원회 전문부서들이며 정책안들은 담당 비서를 통해 김정일에게 올려 비준 받게 된다. 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총비서와 비서들이 중앙위원회의 사업을 지도하고, 도당위원회에서는 도당 책임비서와 비서들이 도당위원회의 사업을 지도하며, 군당위원회에서는 군당 책임비서와 비서들이 군당사업을 지도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의 모든 권력기관에 당위원회가 조직되어 있고, 원칙적으로는 당위위원회에서 당비서, 행정책임자, 사회단체 책임자, 안전기관 책임자들이 집단적으로 토의하여 당위원회의 결정과 분공에 대해 사업하기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당비서가 최고책임자로 되어 있다. 결국 모든 단위에서 당비서가 수령의 대리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으므로,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는 각급 당비서들의 독재를 통해 실현되는 독재체계라고 할 수 있다(황장엽 1998, 88-89).
당중앙위원회에서도 특히 조직지도부는 당 조직뿐만 아니라 군대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등 북한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기관들에 대한 지도와 통제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전문부서 중 가장 파워 있는 부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 비서들뿐만 아니라 조직지도부 부부장들과 함께 국정에 대해 논의해왔다. 이처럼 북한체제를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파워 엘리트 그룹과 전문부서가 있기 때문에 갑자기 김정일의 유고가 발생하다고 해서 북한에서 ‘컨트롤 타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셋째, 북한의 급변사태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대부분 북한 파워 엘리트들의 동질성과 한국전쟁이 북한 엘리트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1956년 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탈스탈린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당내에서 집단지도체제를 복원시켰다. 그 결과 당내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게 되었으며, 개혁성향의 인사들이 1980년대 중후반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북한에서는 1956년 ‘8월종파사건’과 1967년 갑산파 숙청을 통해 당내 비주류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고,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그들의 2세들이 핵심이 되어 북한 지도부를 이끌어왔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중후반 동유럽과 소련에서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는 동안에도 북한 지도부 내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균열이 발생하지 않았다. 북한 지도부의 이 같은 인적 구성은 앞으로도 장기간 북한의 ‘탈김일성․김정일화’를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일부 전문가들은 동독의 경우처럼 북한도 정권 붕괴가 체제 붕괴로 이어지고 ‘국가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동서독의 경우에는 남북한의 경우처럼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통합 전에 군사통합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반면 남북한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생한 한국전쟁이 만들어놓은 적대적인 감정이 양국의 군부에 생생하고, 더욱이 북한 군부는 전쟁 발발의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북한 군부가 정치적 공백에 이어 군사적 공백까지 허용하고, 남한과 미국 군대가 북한에 진주하는 것을 좌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겠다.
3) 국방위원회 또는 군부 중심의 집단지도체제 출범 가능성 평가
국내의 다수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국방위원회가 현재 북한의 ‘최고권력기관’이기 때문에 김정일 유고시 국방위원회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출범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선군정치로 인해 군부가 당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 사후 군부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먼저 향후 국방위원회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출범할 가능성이 있는지부터 검토해보기로 하자.
국방위원회가 북한의 ‘최고권력기관’이라는 다수 전문가들의 추정과는 다르게 국방위원회 회의는 김정일이 직접 주재하기보다는 주로 제1부위원장이나 부위원장, 또는 위원 중의 한 명이 위임을 받아 현안에 관계되는 각 분야의 책임간부(내각의 상이나 부상 등)와 담당자들을 불러 김정일의 지시나 ‘국방위원회 명령’을 전달하거나 지시 관철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시정대책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국방위원회 회의는 정책협의가 아니라 정책집행을 위한 실무회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1998년 헌법 개정으로 국방위원회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격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위상에 비해 실체가 불분명하다보니 권위가 서지 않았다. 그래서 김정일은 2001년경 국방위원회 안에 모든 실무적 문제를 종합․처리하는 ‘상무국’을 설치하고 중앙당 청사 내에 사무실과 회의실 등 업무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2003년에는 인민군 총정치국에 상무부국장 직제를 신설하고 ‘국방위원회 상무국’의 모든 업무를 장악․지도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국방위원회 상무국은 독립된 국가기관이라기보다는 인민군 총정치국에 적을 둔 실무일꾼들이 당과 내각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파견된 인원들과 함께 상무조(task-force) 형식의 실무팀을 구성하고, 국방위원회의 전반적인 업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 언급한 국방위원회 회의의 조직, 사회자 선발, 참석기관 및 참석자 선별과 회의일정 통보, 회의결과 보고, 해당기관으로의 ‘국방위원장 명령’ 하달, 집행상황 장악 등 실무적 문제들이 상무국의 주요 업무이다(현성일 2007, 407-408). 이처럼 국방위원회가 나름대로의 상설조직을 갖추고는 있지만 최고위급 수준에서 정책협의기구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김정일조차 국방위원회 책임일군들이 아니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의 담화 형식으로 주요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방위원회를 ‘최고권력기관’으로 부르는 것은 실상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국방위원회 위원 구성면에서 볼 때 김정일을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 중 군사 이외의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국방위원회가 “수령의 사상과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사업을 직접 작전하고 조직하는 혁명의 참모부”(김민․한봉서 1985, 118)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로 인해 군부의 영향력이 당의 영향력을 압도하게 되어 김정일 이후 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군정치는 군대를 인민대중보다 앞세우는 정치이지 당보다 앞세우는 정치가 아니며, 북한은 “인민군대를 당의 군대, 수령의 군대로 더욱 튼튼히 준비시켜야” (김정일 2005, 8)한다고 변함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정일 시대 군부의 영향력 증대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를 통해 당이 국가기구와 근로단체들을 영도하고 있는 것처럼, 군대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군대에 대한 당의 영도를 보장하는 핵심적인 기구는 군 총정치국으로 북한군의 ‘최고지도기관’인 인민군 당위원회의 집행기구이다. 그런데 인민군 당위원회는 비상설 협의기구로서 회의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는 집행기구인 총정치국이 그 사업을 총괄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군 총정치국이 인민군 전체에서 최고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이대근 2003, 144-146).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 내정을 전후하여 인민군 총정치국에 대한 당의 지도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군 인사권을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총정치국과 연대급 이상 부대에 통보과를 신설하여 군부의 모든 동향을 조직지도부 통보과를 거쳐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현성일 2007, 126-127). 이처럼 군대 내 당조직인 군 총정치국이 군대를 지도하고 있고,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가 군 고위간부들에 대한 인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군 총정치국이 해체되지 않는 한 군부가 권력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4) 당 중심의 지도체제 지속 가능성 평가
현재 북한에서 조선로동당은 모든 부문에서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를 통해 당적 영도를 실현하고 있고 당의 핵심 엘리트들이 국가기구와 군대의 요직을 겸직함으로써 국가기구와 군대에 대한 영도를 보다 확고히 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이 민주화되어 국가기구와 군대 등에 대한 당의 영도적 역할이 부정되지 않는 한 당 이외의 다른 세력이나 권력기관이 중심이 되는 지도체제의 출범 가능성은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포스트 김정일 체제에서 당이 중심이 되더라도 지금과 같은 수령 중심의 당․국가체제가 존속될 것인지 현재의 중국과 같은 당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출범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옹호하는 주체사상과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를 정당화한 ‘수령의 후계자론’은 모두 집단지도체제를 배격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소련의 영향 하에 당과 정권을 수립하면서 스탈린체제를 모방하여 북한체제를 수립하였고, 1950년대 중반에는 탈스탈린화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집단지도체제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이념적, 역사적 유산은 북한에서 김정일 이후에도 집단지도체제의 출범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반면 수령 중심의 당․국가체제의 지속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도 있다. 김정일의 경우에는 만 31세에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어 제2인자로 되었고, 만 32세에 수령의 후계자로 결정되면서 김일성에게로 올라가는 보고가 자신을 거치도록 하는 함으로써 정책결정과정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20년 동안 ‘후계자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고히 뿌리내렸기 때문에 김일성의 사망 이후 동요 없이 권력을 승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여전히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직을 겸임하고 있어 어느 누구도 당․군․정을 종합적으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정일이 가까운 미래에 사망하게 된다면 당 내 어느 파워 엘리트도 현재의 김정일처럼 당․군․정 전반에 대해 확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다른 엘리트들과 협의하여 정책을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상황 때문에 김정일의 아들이 아닌 당내 파워 엘리트가 차기 지도자가 된다면 북한도 탈스탈린화된 다른 사회주의체제에서처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이 권력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정치국의 위원들과 후보위원들의 겸직 실태를 보면, 이들이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내각 총리 등 국가기구를 선거하는 최고인민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요직을 다 맡고 있다. 이처럼 정치국이 당의 국가기구 장악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북한에서 정치국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집단지도체제의 방향으로 간다면, 현재 당중앙위원회 비서국과 전문부서의 실세들이 정치국의 위원 또는 후보위원으로 새롭게 충원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김정일의 아들이 차기 지도자가 된다면,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나이든 원로들과의 집단적 협의 대신 현재와 같이 비서국과 전문부서를 중심으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매우 권위주의적인 당 운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7. 맺음말
조선로동당의 국가기구와 군대, 근로단체 등에 대한 영향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이 모든 중요한 권력기관에 ‘최고지도기관’인 당위원회를 구성해놓고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를 통해 이들 기관들을 통제하고 있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당위원회가 존속되는 한 행정경제기관이나 군대가 당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북한은 당의 최고 엘리트들이 주요 권력기관의 요직을 겸직함으로써 이들 기관에 대한 당의 영도를 보장하고 있다는 점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최태복 당 정치국 후보위원은 국방위원회와 내각 등 국가기구를 선거하는 최고인민회의의 의장직을 맡음으로써 당의 국가기구에 대한 지배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남을 비롯하여 주요 정치국 위원들과 후보위원들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주요 요직을 장악함으로써 이 조직이 당의 의도에 따라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고 입법활동을 하도록 보장하고 있다.
권력승계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은 그동안 ‘후계자론’을 통해 김일성 권력의 김정일에로의 이양을 정당화해왔고, 다시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조국광복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과업을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다 한다면 손자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이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고야 말 것”(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80-81)이라고 한 김일성의 1943년 발언을 보도하였다. 북한의 후계자론과 언론 보도 그리고 봉건적 정치문화를 고려할 때 북한에서 권력의 3대세습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김정일의 세 아들 중 김정남은 김정일이 성혜림과 자신과의 관계를 밝힐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김정철과 김정운이 태어난 후 김정일의 마음이 김정남을 떠났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명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최근 김정일이 김정운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장성택 행정부장의 건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도된 후 많은 언론들은 “정남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장성택이 정남을 버리고 정운을 택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장성택은 김정남뿐만 아니라 김정철과 김정운의 후견인 역할도 해왔기 때문에 이 같은 평가는 부적절한 것이다. 물론 장성택과 김정남의 관계는 매우 가까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이 당 간부들에게 자신의 아들이라고 내세우지 못하는 김정남을 장성택이 후계자로 밀수는 없는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의 후계문제와 관련하여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들로는 리제강과 리용철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을 들 수 있다. 리제강과 리용철은 2004년 장성택의 직무정지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장성택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되는 경우 숙청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장성택이 김정운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세운다면 그들도 김정운의 후계체계 수립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선택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장성택도 스스로 차기 지도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김정일의 아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내세운다면 앞으로도 장기간 ‘2인자’ 또는 ‘3인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한 국내 통신사가 보도한 것처럼 김정운이 올해 초에 후계자로 결정되었다면, 1970년대에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은 곧 김정운에게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이라는 핵심 직책을 맡김으로써 김정운이 먼저 당과 군대, 국가기구의 중상층 간부들에 대한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동시에 김정일에 대한 보고가 김정운을 거쳐 올라가도록 하는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제’ 수립에도 착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운의 파워 엘리트에 대한 장악력이 커지면 그가 점진적으로 최상층 엘리트에 대한 인사에도 관여하게 되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적어도 수년이 걸릴 것이다.
김정일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지명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유고가 발생한다면, 지도부 파워 엘리트들 간의 상호 견제로 일단은 김정운이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만약 김정운이 권력기반을 공고히 다지지 못한 상태에서 대내외 도전에 직면하여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고 지도부 내 핵심 엘리트들 다수와 갈등을 보인다면, 스탈린의 핵심 측근이었던 베리야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당중앙위원회 비서에 의해 제거되고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과 같은 시나리오가 북한에서도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북한에 봉건적인 정치문화가 존재하고 오랜 기간의 우민화 정책으로 북한 주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장기간 김정일이 생존하면서 후계자의 지도체제 수립을 지원한다면, 김정일 사후 3대 세습이 일단 뿌리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북한 비핵화의 진전과 함께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된다면, 북한 주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는 더욱 더 체제의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북한체제가 일단 3대 세습에 성공하더라도 세습체제가 장기적으로까지 안정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는 어렵다.
일부 전문가들은 동독의 경우처럼 북한도 가까운 미래에 정권 붕괴가 발생하고 곧 체제 붕괴, ‘국가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동서독의 경우에는 남북한의 경우처럼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통합 전에 군사통합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반면 남북한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생한 한국전쟁이 만들어놓은 적대적인 감정이 양국의 군부에 자리 잡고 있어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남한이 원하는 ‘급변사태’가 북한에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는 군대와 국가기구, 근로단체들을 지도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방대한 조직체계와 인력을 가지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국방위원회를 비롯하여 북한의 어느 조직도 당중앙위원회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포스트 김정일 체제에서도 당이 권력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김정일의 아들이 아닌 당내 파워 엘리트가 차기 지도자가 된다면 북한도 탈스탈린화된 다른 사회주의체제에서처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이 권력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정치국의 위원들과 후보위원들의 겸직 실태를 보면, 이들이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내각 총리 등 국가기구를 선거하는 최고인민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요직을 다 맡고 있다. 향후 북한에서 정치국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집단지도체제의 방향으로 간다면, 현재 당중앙위원회 비서국과 전문부서의 실세들이 정치국의 위원 또는 후보위원으로 새롭게 충원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김정일의 아들이 차기 지도자가 된다면,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나이든 원로들과의 집단적 협의 대신 현재와 같이 비서국과 전문부서를 중심으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매우 권위주의적인 당 운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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