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방위비분담요구의본질과폐지의당위성 이시우 2008/09/12 310
제2장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의 본질과
미군주둔비 지원 폐지의 당위성
미국 소유 탄약의 저장관리 문제를 중심으로
박기학
1. 글을 시작하며
우리나라는 반세기 넘게 미군 주둔에 따른 온갖 부담을 져왔으며 방위비 분담금도 그중의 하나다. 주한미군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부담은 그 동안 한미동맹의 이름 아래 당연한 희생으로 여겨왔다.
사실 한미동맹을 담보로 강요된 주한미군에 대한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지원은 비용 면에서도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주권과 국익 훼손, 우리 국민의 자긍심과 생명·재산의 침해, 자주국방의 포기, 한반도 군비경쟁 등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이 글은 미국 소유 재래식 탄약을 한국군이 저장관리하는 문제를 통해서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의 지원이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제시하며 이런 불평등성이 미국의 군사전략에 대한 종속에서 근본적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현재 미국은 탄약이 대부분인 WRSA-K를 한국이 전부 인수하도록 압박하고 있는데 탄약 문제는 한미동맹의 불평등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지만 그 동안 사안의 특수성 때문에 그 실상이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글은 WRSA-K가 불평등하고 대북 적대적인 한미동맹의 산물임을 밝힘과 동시에 WRSA탄 인수의 부당성을 제시한다.
아울러 우리 군이 탄약정책의 대미 종속에서 벗어나 전수방위전략에 토대한 자립적인 탄약정책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2. 미국의 패권적 군사전략과 동맹국의 방위 부담의 상관성
1) 트루먼 독트린
(1) 미국의 원자폭탄 독점의 붕괴와 NSC-68
소련의 원폭개발 성공(1949년)으로 인한 미국의 원폭 독점의 붕괴, 중국인민공화국 수립(1949년)이라는 국제정세를 맞아 미국은 국가안보전략을 재검토하여 한국전쟁 직전인 4월 25일 국가안보회의문서 NSC-68을 내놓았다.
NSC-68은 소련을 미국의 절대적인 적으로 묘사했다. 또 이 문서는 원자전쟁의 초기에 선제기습의 이점은 매우 클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소련에 대해 선제공격 가능성을 거론했다.
NSC-68은 봉쇄의 경제적 수단을 중시하던 종전과 달리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봉쇄는 엄포에 불과하다며 군사적 수단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표방했다. NSC-68은 그 이전에 이미 시작된 미국의 군사력 강화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담았는데 한편으로 ‘전쟁억지’ 기능으로서 질과 양 모든 면에서의 핵무기의 발전을 통한 강력한 핵 보복력의 구비를 강조하고 또 한편으로 전면전쟁 일변도의 구상 속에서 재래식 전력이 소홀히 되어왔고 소련의 제한적인 침략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재래식 전력의 증강을 강조했다.
(2) 미국의 대소 봉쇄전략 속에 편입된 서유럽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은 1949년 집단적 방위기구인 NATO 결성으로 ‘봉쇄정책의 군사화’로 나아갔다. 소련과의 전면적인 군사적 대결을 국가목표로 정한 미국은 나토 결성을 통해서 이 대결정책을 직접 담당하는 집행자로 서유럽을 끌어들였다.
1950년 이전의 서유럽의 방어 전략은 이른바 ‘해방전략(liberation strategy)’이었다. 이 전략은 라인 강(독일과 프랑스 국경 근처)을 방어선으로 정했다. 즉, 동방 쪽(소련)의 공격이 있을 경우 서유럽 동맹군은 네덜란드 북쪽 지역과 라인 강 동쪽의 모든 독일 지역에서 철수하거나 포기하고 뒤에 그 지역을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서유럽 동맹의 군사전략은 이런 ‘해방전략’과 미국의 대소 ‘핵전력 우위’에 의거했기 때문에 서유럽의 재래식 전력도 그 증강속도가 점진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원폭실험과 중국인민공화국 수립이 있게 되자 통합방위와 전진방어전략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전략개념’을 서유럽 동맹국에 강요했다. 나토 이사회는 1950년 1월 6일 ‘전략개념’을 승인했다. 통합방위는 서유럽 국가들이 각각 ‘균형된 국가전력(balanced national force)’ 대신 ‘균형된 집단적 전력(balanced collective force)’을 추구하는 것이다. 해방전략을 대신한 ‘전진방어전략(영어로 forward defense strategy로 표현하는데 이는 1976년 나토가 채택한 적극방어전략과 구분되며 ‘고수방어’ 개념에 가깝다. 적극방어전략도 때로 전진방어전략이라 표현되므로 주의를 요한다)’은 “서유럽 동맹이 공격을 받을 경우 최대한 동맹국 국경 근처에서 침입자(동방)를 저지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나토군의 방위선도 독일의 나토 가입 뒤에는 대략 1960년대 중반부터 동서독 국경에 가까운 쪽으로 이동했다. 나토 이사회는 1950년 말 전진방어전략의 태세를 갖춘다는 명분으로 유럽연합군의 창설을 승인했다.
2) 아이젠하워의 대량보복전략과 재래식 전력의 유지
(1) 미국의 경비절감을 위한 전략의 선회 – 뉴룩(New Look)
1952년 선거전 때 NSC-68에 의거한 트루먼 정권의 군사정책이 갖는 과도한 인적·경제적·재정적인 비용 소모를 강하게 비판했던 아이젠하워는 집권하자 방위전략의 뉴룩(New Look) 기치를 내걸었다.
뉴룩 전략의 한 측면은 긴축정책을 꾀하면서 대소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전략핵과 전술핵에 의존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럼으로써 돈과 인력을 크게 절약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2) 대량보복전략은 공세적 전략
뉴룩의 다른 측면은 대량보복전략이다. 1954년 1월 12일 존 포스터 덜레스(Dulles) 미 국무장관에 의해 정식화된 대량보복전략은 공산주의의 모든 무력침략을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으로 억지할 수 있다는 핵전략으로 전략공군의 대규모 대량보복 기조를 살리고 전술핵무기를 육·해·공군의 제일선에 배치함으로써 국지적인 전쟁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덜레스는 ‘대량보복’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를 ‘해방’시키는 정책과 직접적으로 연계시켰다. ‘대량보복’(‘보복’이라는 단어에서 추론되듯)은 방어정책이 아니다. 이는 전후 유럽의 정치적·영토적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사용되는 적극적 공세전략이었다. 1956년 1월 23일 아이젠하워는 일기에서 “피해를 감소시키는 단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소련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썼다.
(3) 나토의 대량보복전략 채택
대량보복은 전략핵무기의 사용은 물론 재래식 군대의 전술무기 사용을 포함했다. 유럽에서 대량보복은, 중대한 타격을 가하거나 빠른 돌파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공격 정도는 격퇴할 수 있을 만큼 동독 국경에 가깝게 재래식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전진부대가 동방의 공격에 무너지면 나토는 빠르게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데로 나갈 것이다. 만약 거대한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될 경우에는 전략핵무기가 사용될 것이다.
나토 이사회는 1954년 12월 대량보복전략을 채택함과 동시에 재래식전력의 차이를 메우고 나토 방위태세를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유럽최고사령관에게 침입자가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전술핵무기 사용에 근거한 나토의 전략적 계획을 작성할 권한을 주었다.
이후 처음에는 주유럽 미군에, 다음에는 주유럽 동맹국 군대에 제공된 핵무기 운반수단이 증가했다. 동맹국들은 280mm 원자포와 어네스트 존과 레드스톤 미사일과 같은 전술핵무기 운반수단들을 소유하고 통제했으며 탄두는 미국이 관리했다.
(4) 대량보복전략의 한국 적용
아이젠하워 정권은 대량보복전략에 따라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현대화 차원에서 1953년 7월 주한 ‘제7보병사단’을 미육군에서는 9번째로, 이어 1957년에는 주한 제1기갑사단을 원자전에 대비한 팬토믹사단으로 개편했다. “재래의 보병사단이 3개 연대로 편성되는 데 비해 기동력과 화력을 중시하는 펜토믹사단은 대대 병력급의 5개 전투단으로 편성하며 핵무기로 장비된다. 미육군 참모총장 맥스웰 D. 테일러 대장이 당시 미 의회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 팬토믹 사단 편성법은 1953년 한국전 휴전 이후 한국에서 행한 실험을 통해 안출, 발전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팬토믹 사단이 전술핵무기가 배치된 유럽 동맹국이 아닌 한국에서 처음 실험, 고안된 것은 한국이 미 군사교리의 실험장으로서 위치 지워져 있으며 이는 다름 아니라 한국이 다른 어느 동맹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에 철저히 군사적·정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현대화와 함께 한국군 현대화도 추진했다.
미국은 1954년 한미 합의의사록으로 한국군의 병력 규모와 수준을 정했다. 한국군의 병력 규모와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합의의사록 부록 B는 회계연도 1955의 한국군 병력 수준의 상한선을 육군 66만 1,000명을 포함해 72만 명으로 정했다. 한미 합의의사록은 미국의 대량보복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한국군 현대화 계획에 따라 1958년 개정되는데 회계연도 1959의 총 인가병력은 63만 명, 육군은 56만 5,000명으로 축소되었다.
미국의 당초 구상이 한국 육군 현역사단 수를 20개에서 8개로 대폭 감축하는 것이었으나 2개 사단 감축(18개 사단 유지)에 머무른 것은 한국의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군을 대규모 지상군 위주로 편제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대북 공격 가능성을 제어하고 한국군의 대미 종속을 구조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사시 한국군의 대규모 지상군에 의존함으로써 대북한 공격작전을 가능케 하고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한국은 미국의 이런 의도에 따라 대규모 지상군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국방비 지출을 강요당했으며 한국군의 균형적인 방위력 건설도 근본적으로 제한되었다.
3) 케네디·존슨의 유연대응전략과 동맹국의 재래식 전력 증강
(1) 대소 전략핵 우위의 추구
미국은 1957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발사로 소련의 ICBM의 실전화, 미국 본토 공격능력이 확인되자 ‘미사일 갭’의 극복을 당면한 최우선적인 국가목표로 정하고 대소 전략핵 우위를 재확립하는 데 열을 올렸다. 미국은 ICBM만이 아니라 SLBM의 개발·배치를 서둘렀으며 그에 따라 ICBM, SLBM, 전략폭격기로 구성되는 전략핵전력의 3개 중심축(트라이던트)이 형성되었다.
미국의 전략핵 전력의 증강은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말한 ‘제2격주의’의 논리에 의거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를 통한 미국의 전략핵의 거대한 증강은 단순히 ‘2차 공격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미국의 공세적인 핵군비 증강은 1962년의 포괄적인 도시방어계획 수립, 1967년의 전국 범위의 미사일 방어망 건설 결정과 함께 대소련 선제핵공격을 노린 것이었다.
(2) 유연대응전략과 2½전쟁전략
대량보복전략은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를 계기로 ‘유연대응전략(reflexible response strategy)’으로 대체된다.
유연대응전략은 소련의 전략핵의 보유로 ‘상호억제’가 조성된 조건에서 미국이 핵전쟁, 재래식 전쟁, 게릴라전, 심지어 비밀공작 등 모든 수준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 특히 이전에 경시되어온 재래식 전력(대게릴라전 능력 포함)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케네디와 존슨 정권은 3개월간의 서유럽 전진방어 그리고 중국의 전면 공격에 맞서 남한 또는 서남아시아를 방어하는 전쟁, 기타 지역에서의 하나의 소규모 전쟁을 동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2½전쟁전략을 채택했다.
(3) 나토의 유연대응전략 채택
핵 군비경쟁에 몰두하던 미국은 서유럽 동맹국들이 독자적인(national) 핵전력을 갖는 데 대해서 반대했다. 미국의 전략개념은 유럽의 전쟁이 어디까지나 재래전에 의해 마무리되어야 하며 유럽 때문에 미국이 대륙 간 핵전쟁에 조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데 기초한다. 미국은 전술핵무기의 사용이 전면 핵전쟁으로 비화될 심각한 위협을 내포하며 재래식 방위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유럽 동맹국에게 재래식 전력의 증강을 요구했다. 1962년 12월 맥나마라와 러스크는 나토 이사회에서 미국이 유럽의 3배나 되는 국방비를 지출한다면서 나토의 재래식 전력 강화에 더 많이 기여할 것을 동맹국에게 촉구했다. 서독은 1962년 징병기간을 12개월에서 18개월로 늘렸고 그 해 12월까지 3개 사단을 추가하여 모두 11개 사단을 NATO에 파견했다.
4) 닉슨독트린과 한국의 방위비 분담 시작
(1) 닉슨독트린과 현실억지전략
닉슨은 1969년 취임하자 베트남전의 베트남화, 아시아화를 내건 괌 독트린을 발표했으며 1970년 괌 독트린의 적용 대상을 모든 동맹국으로 확장한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 정권은 닉슨독트린을 실현하기 위해 ‘유연대응전략’을 ‘현실억지전략’으로 바꾸었다고 발표했다. “가장 간단히 공식화하면 현실억지는 우리가 닉슨독트린을 실행하기 위해 구상한 전략이다. 이 전략은 핵무기 분야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에게 그들 자신의 방어를 위해 더욱 더 많은 대비(특히 인력 공급)를 하도록 요구한다.”
현실억지전략은 2½전쟁전략을 1½전쟁전략으로 축소했다. 이런 축소는 중국과의 데탕트를 반영해 아시아의 큰 전쟁, 즉 중국과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½전쟁에 가장 가까운 사태는 중국의 지원을 받지 않는 북한의 남한 공격이 상정되었다.
(2) 적극방어전략과 한반도 적용
① 적극방어전략의 배경
적극방어(active defense)전략은 방어정면을 축소하고 방어종심을 증가시킴으로써 화력의 밀도를 증가시켜 공격해오는 적을 현 전선에서 격멸함으로써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미국의 적극방어(active defense) 교리는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패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소극적인 군사력 사용에 그 탓을 돌리면서 자신의 깎인 군사적·정치적 위신을 더욱 도발적인 군사전략으로 만회해보려는 패권주의자의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
슐레진저 국방장관을 비롯한 미국 군부는 베트남전 패배의 원인을 첫째, 핵병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무기사용상의 제한, 둘째, 하노이의 심장부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지역적 제한, 셋째, 지상군이 17도선을 넘지 않는다는 정치적 제한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며 선제 핵공격을 중심으로 하는 보다 적극적인 무력개입노선, 즉 적극방어를 주창했다.
또 적극방어전략에는 베트남전 패배로 극도로 위축된 미 육군이 실추된 입지를 만회해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1970년대 전반기를 통해, 미국 군사지출은 연 4.5%의 비율로 눈에 띄게 줄었다. 정부 제출 예산에서 의회가 삭감한 액(연평균)은 1950~1969년에 국방비가 19억 달러, 비국방비가 92억 달러였는 데 반해, 그 다음 6년간(1970~1975)에는 국방비가 60억 달러 삭감되고, 비국방비는 역으로 47억 달러 증가했다.”
그렇지만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보듯이 긴장완화(데탕트)의 새로운 정세를 맞은 한반도에서 갑작스럽게 방어전략을 공격적으로 바꿀 이유가 없었다. 유럽에서도 1972년부터는 동서 양 진영 사이에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와 상호균형감군 협상이 동시에 시작되었고 1975년에 역사적인 헬싱키 최종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이런 정세로 보면 전진방어전략은 베트남전 패배 이후의 미 국방비의 대폭 삭감 추세 그리고 긴장완화의 정세를 역전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려는 미 군부의 초조감을 반영했다.
② 적극방어전략의 한반도 적용인 전진방어전략
한반도는 미국이 적극방어전략을 유럽(1976년 채택)보다 앞서 첫 시험적용한 대상이다. 한반도에서 1974년 시험된 적극방어전략은 흔히 전방방어 또는 전진방어(forward defense)전략으로 불린다. 그것은 전방(군사분계선 근처)에 한미군의 군사력을 집중시켜 거기서 결전을 벌여 적을 완전히 격멸하는 전략이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1968년 이전 한미군의 방어전략은 후퇴방어전략이었다. “1968년 4월 18일 ≪리프트≫지에 의하면 북한의 총공격에 대해 미 제7사단과 제2사단은 임진강 지역에서 24시간, 그리고 서울 북방 회랑지역에서 한국군은 72시간 방위가 가능할 뿐이므로 일단 서울 이남으로 후퇴했다가 반격작전을 해야 한다.”
후퇴방어전략은 1968년 1·21사태 이후 ‘고수방어’로 바뀐다. 1968년 5월 27일 1차 한미국방장관 회의에서 한국방위를 이동방어(후퇴방어)로부터 고수방어개념으로 방위전략을 수정하여 서울은 물론, 모든 부대가 현 위치에서 국토를 사수한다는 적극적인 방위개념으로 전환했다.
‘고수방어’는 다시 ‘전진방어전략’으로 바뀌는데 이 ‘전진방어전략’에 의거해 작성된 것이 1974년 판 작전계획 5027이다. “작전계획 5027- 74의 초점은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로부터 전방에 근거를 둔 공세적 전략(forward-based offensive strategy)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와 함께 대부분의 포와 탱크, 보병이 비무장지대 남쪽으로 5마일에 걸쳐 있는 군사통제구역(MCZ) 쪽으로 전방 배치되어 군사준비태세가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작전계획 5027-74는 개성 진격과 원산상륙작전을 통한 평양점령을 전쟁목표로 했다. 즉, 전진방어전략은 평양점령을 실행하기 위한 군사교리(군사행동의 기본원칙과 지침)의 위상을 갖는다. 전진방어전략은 북한 공격을 현 전선에서 단순히 격퇴하는 데 초점을 둔 고수방어와 달리 평양점령을 위한 군사행동지침이라는 점에서 그 공격성을 볼 수 있다.
홀링워스가 1974년에 한미1군단장을 맡아 수립한 전략(작전계획 5027 -74)에 대해서 레온 시갈은 “미국의 해병 제3사단과 남한의 해병 제1사단이 같이 원산에 상륙하여 동쪽에서 평양으로 공격한다. ……미국의 제2보병사단의 2개 여단을 북쪽으로 진격하게 하여 개성을 점령하도록 배속한다. 북한군의 집결을 저지하기 위해 공격의 주축이나 공급선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폭격하도록 B-52기를 준비하기도 했다. 홀링워스가 수립한 전략은 일부 수정되어 지금도 연합군의 지침이 되고 있다”(≪통일뉴스≫, 2007.5.31.)고 증언했다.
슐레진저는 1975년 북한의 목표를 전술핵무기로 공격하는 것(1975년 6월 25일 기자회견)을 분명히 했고 ‘북한의 심장부에 핵무기를 퍼붓는’ 9일 전쟁계획을 입안했다. ‘9일 작전’은 197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한미 제1군단을 방문했을 때 홀링워스가 직접 보고해 재가를 받았으며 1975년 8월 제7차 SCM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에게 홀링워스가 보고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부터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되는데 1978년 훈련 때는 ‘전진방어전략과 그에 의거한 9일 전쟁계획’을 시험적용하기 위해 참가병력이 10만 명을 넘었으며 B-52 전략핵폭격기 편대, 랜스미사일 대대 등 핵공격력을 갖춘 부대들이 대거 동원되어 핵공격 훈련이 실시되었다.
레온 시갈은 “이(작전계획 5027-74)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탱크와 장갑차를 DMZ 근처에 더 많이 재배치하는 것”이었다면서 “동맹국들은 북한이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서울을 방어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다. 그러나 군사적 현실은 이러한 평가와 정반대다”라고 말했다. 이는 적극적 방어전략이 남북 상호 간의 첨예한 군사력 전진배치의 1차 원인임을 지적한 것이다.
(3) 한국군 현대화 계획
현실억지전략이 채택되고 2½전쟁전략이 아시아에서 중국과의 대규모 전쟁을 배제한 1½전쟁전략으로 바뀌면서 한국에서 주한 미 7사단이 철수했다. 그와 함께 ‘자조’라는 이름으로 한국군 현대화 계획(당초 계획은 1971~1975년인데 뒤에 2년 더 연장됨)과 율곡사업이 추진되었다.
한국군 현대화계획은 미군 철수의 공백을 메우는 것을 넘어 전쟁목적이 평양점령으로 바뀌고 군사교리가 적극방어(전진방어)와 단기 속전 전략으로 바뀐 데 따른 전력증강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9일 작전’이 보여주듯이 단기결전(초전승리)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물량을 집중적으로 소모하는 전쟁전략이다. 더구나 이 전략은 단지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기존 경계선을 회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개성과 평양을 단기간에 점령하는 작전이므로 북한 전력의 최소 3~4배의 공격력을 필요로 한다.
1971~1977년 사이에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9.88억 달러, FMS차관 5.28억 달러 합해서 15.16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 역시 도발적인 미국의 대북 군사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동맹국의 군사력 증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국방비도 전진방어전략 채택에 따라 급증하게 되는데 미국 군사원조를 제외한 국방비는 1973년 1,836억 원에서 1974년 2,968억 원으로 1975년에는 4,424억 원으로 불과 2년 사이에 두 배 넘게 올랐다. 1976년에는 7,037억 원, 1977년에는 9,496억 원으로 더욱 급격히 상승하여 1973년부터 1977년까지 4년 사이에 매년 평균적으로 국방비는 1973년 한 해의 국방비를 넘는 액수인 1,919억 원씩이나 늘어났다.
또 1980년 SCM에서는 ‘한국 내 F-5E 및 F-5F 제트 전투기의 공동생산’, ‘효과적인 근접 항공지원을 위한 미 공군 A-10기의 한국 배치계획과 조기 경보역량의 보강 및 한국 해군의 대잠수함전 훈련을 위한 협력 증대’에 합의했다.
1980년 10월 31일 한미 공군 간 A-10기 전개에 관한 공동운영계획이 서명된 데 이어 1981년 1월 15일 한미 공군 간의 A-10 항공기 전개에 관한 양해각서가 체결되었으며 1982~1983년에 주한미군의 A-10기 26대가 한국에 배치되었다. A-10기는 무게 4,309kg의 포를 지니고 2시간 동안 반경 464km 거리에서 적 탱크를 타격하는 작전을 할 수 있는 항공기다. A-10기는 전진방어전략을 위해 도입이 되었지만 공격용 헬기와 함께 종심작전과 근접항공지원을 위한 주요 무기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 A-10기의 배치에 필요한 시설 및 부지를 우리 국방예산(CDIP사업)으로 제공했다.
한국은 미국의 세계군사패권전략의 실행을 돕고 미 군부의 입지 만회를 위해 국방비를 기하급수적으로 올리고 빚까지 내야 했으며 남북 간의 군비경쟁과 첨예한 군사적 대결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4) 닉슨독트린과 방위비 분담의 시작
① 경비절감 수단으로서의 SALS-K
미국은 닉슨독트린의 선언과 함께 무상군원을 대폭 줄이는 동시에 공동방위를 명목으로 주한미군 유지 경비의 분담 압력을 가중시키기 시작했다.
1974년 9월 24일 열린 제7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의 공동성명은 “클레멘츠 (국방)차관은 대한민국이 방위분담의 점차 많은 부분을 부담하고자 하는 능력과 용의를 갖고 있는 데 대해 찬양의 뜻을 표했다”고 밝혔다. 이어 1974년 11월 23일의 박정희와 포드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서는 “포드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감당할 능력과 의사를 가진 방위분담의 폭이 증대되고 있음에 유의하고……”라고 말함으로써 SCM 합의를 확인했다. 그리고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서가 발표된 이틀 뒤인 11월 25일 한국 내 재래식 탄약 보급에 관한 합의각서(SALS-K 합의각서)가 서명되었다.
“이 때(SALS-K합의각서 체결)부터 우리의 국방예산에서 주한미군 유지를 위한 비용부담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1974년까지만 해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위해 필요한 경비는 대부분 자신이 부담했고 한국의 지원은 한미소파상의 의무지원 사항인 시설·토지의 제공과 같은 간접적 형태를 띠었다. 또 미국이 들여오는 신무기체계에 대해서 한국이 시설과 부지를 제공하는 연합방위증강사업(CDIP)이 1974년에 시작된다.
② 전진방어전략과 WRSA-K
SALS-K 합의각서 체결은 전진방어전략과 작전계획 5027-74의 실행에 필요한 탄약을 확보하기 위한 것과 연관돼 있다.
평양점령과 단기속결전략 그리고 이를 위한 군사행동 지침인 전진방어전략은 중포병과 박격포, 공군의 근접지원을 필요로 하며 초전에 다량의 탄약 소모가 불가피하다. SALS-K 합의각서가 20개 사단 규모의 45일분 어치의 탄약 비축분을 사전에 저장토록 규정한 것도 단기속결전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미 상원 보고서는 “전진방어전략은 전쟁의 초기에 강력한 화력을 필요로 하므로 충분한 탄약의 비축은 필수적이다”고 지적했다.
1978년 7월 11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브라운 장관은 ……한국이 필요한 전쟁준비물자를 보강하겠다고 확약하고, 노 장관은 한국이 전쟁비축물자의 충분한 사전비축을 확실히 하도록 자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공동성명 7항)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전진방어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조치로서 1980년 SCM에서는 “전시 군수지원 계획에 따라 전쟁 예비물자의 보급과 비축을 지원하기 위한 공동노력의 필요”에 합의했다. 피터 헤이즈는 1970년대 초에 한미군이 전진방어전략을 채택했는데 이 전략의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포병탄약의 저장량이 두 배로 늘었고 신형탄약이 도입되었다”고 썼다.
<표 2-1>을 보면 전진방어전략 채택 뒤인 1977년부터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탄약이 한국에 반입되었음을 보여준다.
회계연도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계
금액(백만 달러)
125
270
90
95
85
130
125
920
주: 대외방위물자비축사업(SDA)은 미국의 대외원조법(FAA)에 근거하며 미국이 전쟁에 대비해 동맹국과 우방국에 전쟁예비물자를 미리 비축해두는 사업이다. 미국은 SDA로 한국에 WRSA를 비축해왔다.
자료: 홍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