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화학무기폐기장 이시우 2008/05/01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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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역깨기 ] 2002년04월03일 제403호
끔찍한 ‘화학무기의 그늘’이여
인근 육군 폐기시설 재가동 반대하는 충북 영동군 주민들의 이유있는 싸움
화학무기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죽음의 그림자’라고 대부분 사람들은 믿는다. 그런 믿음은 화학무기 폐기시설(국방부는 ‘화학물질 폐기시설’이라고 주장)을 가까이 두고 사는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상촌면 일대 2천여 가구 5천여명의 주민들에게 더 확고할지도 모른다.
미군 사령관 덕분에 알았다?
그러나 삶의 터전에서 불과 1∼2km 남짓 떨어진 거리에 화학무기 폐기시설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화학무기 근절에 찬성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화학무기 폐기시설은 쓰레기 소각장이나 추모공원처럼 단지 생활에 불편을 초래하는 ‘혐오시설’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시설’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5월 시험가동 과정에서 언론보도를 통해 존재가 알려지면서 가동을 멈췄던 충북 영동군 매곡면 육군 OO부대의 화학무기 폐기시설이 재가동을 앞두고 있다. 모두 5100평의 부지에 700여평 규모로 세워진 이 시설물에는 가수분해와 폐액처리실, 폐유건조실, 소각처리장 등 공장시설 4개동이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이 시설의 재가동을 처음 알린 건 대한민국 국방부가 아니었다. 토머스 슈워츠 주한미군 사령관은 지난 3월5일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해 “한국 정부는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을 위한 노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2002년 봄 화학무기 폐기를 다시 시작해 연말까지 전체 보유량의 4∼5%를 폐기하고, 향후 2∼3년 안에 보유량의 45%를 폐기할 예정”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어떤 공식적인 확인도 하지 않고 있다. 미국 국회의원들에게는 ‘공개된 사실’이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여전히 ‘공개된 비밀’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방부는 최근 들어 부쩍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3월21일 민·관·군 합동 현장검증을 통해 시설물 안전도에 대한 홍보에 나선 데 이어, 26일에도 영동군청에서 주민대표 등과 함께 비공개회의를 여는 등 시설 재가동을 위한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993년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97년 이 협약을 비준했다. 이에 따라 보유한 화학무기 전량을 오는 2006년까지 폐기해야 한다. 협약에 정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국방부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폐기시설 가동에 들어가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시설 가동은 넘기 힘든 난관에 봉착해 있다. ‘무해한 시설이며, 안전하다’는 국방부 쪽의 거듭된 설명에도 지역주민들은 ‘시설물을 철거하거나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극도로 반발하고 있다.
국방부 설명 아무도 안 믿는다
“본 시설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군의 주요 핵심시설로서,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 여러분께 사전에 상의해 이해를 구할 수 없었던 점에 대해서는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본 시설은 지난해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폐기물질·처리공정 등 모든 면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지난해 4월 영동군 주민 500여명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뒤, 김동신 국방부 장관이 주민들에게 보낸 공개서한 내용이다. 김 장관은 이 글에서 시설물의 안전도는 “국방부만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한국기계연구원, 환경부, 국제화학무기금지기구 등 다양한 공인기관에서도 안전성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1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국방부 장관의 설명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다. “사전동의도 없이 몰래 시설을 지을 때는 언제고.” 박아무개(65)씨는 “어차피 필요한 시설이라면 어딘가에 설치돼야 한다는 것쯤은 우리도 이해하고 있다”면서도 “폐기하는 물질은 뭐고 소각하는 과정과 소각 뒤 나오는 물질은 또 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고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하는데 우리더러 어떻게 믿으라는 말이냐”고 말했다. 이런 불신 때문에 주민들은 “함께 안전성을 검증하자”는 국방부의 제안마저 “사기극의 들러리가 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있다.
지난 2000년 5월 발족한 주민대책위원회 박종현(39) 공동위원장은 더욱 강경했다. “이제는 안전하다는 설명도 들을 필요가 없다. 쓰레기를 태워도 다이옥신이 나온다고 난린데, 저건 사람 죽이는 물질 아니냐. 시설을 철거하고 당장 영동땅을 떠나라.” 박 위원장은 “국방부가 주민 반대를 무릅쓰고 시설 가동을 강행한다면 주민들이 어떤 극단적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영동 주민들은 지난해 8월 폐기시설 철거를 주장하며 경부선 황간역 부근에서 열차를 40여분간 정지시키며 시위를 벌인 ‘전과’가 있다. 이 시위로 주민대표 2명이 구속되고, 3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국방부에 대한 극도의 불신 속에 마을에는 심상찮은 소문이 파다하다. 1980년대 후반 부대가 들어설 당시 탄약저장시설로 알려졌던 시설이 사실은 화학무기 저장시설이었다는 것이다. 주민 남아무개(50)씨는 “왜 굳이 이곳에 폐기시설을 지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외국에서도 화학무기를 저장시설에서 직접 폐기까지 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하와이 남서쪽 1300여km 지점의 존스턴섬에서 화학무기 40여만점을 보관해오던 미군도 80년대 들어 같은 장소에 폐기장을 지어 지난 2001년 초까지 폐기작업을 벌였다.
국방부가 화학무기와 관련한 모든 내용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폐기시설에서 처리하는 화학무기에 미군이 들여온 것도 포함돼 있다”는 추측도 난무하고 있다. 주민 김아무개(46)씨는 “지난해 초여름부턴가 외국제 화학무기도 태운다는 얘기가 떠돌기 시작했다”며 “국방부에서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 외에 다른 설명이 없다 보니 소문을 그대로 믿는 사람도 많다”고 전한다.
“중앙언론에는 한줄도 나지 않더라”
냉전 시절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책을 곱씹어보면 이 역시 근거없는 헛소문으로 치부하기만은 어렵다. 핵무기와 생물·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은 동맹국이 무기제조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하는 대신 자국의 무기를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한반도에서도 지켰다면, 지금 영동 주민들은 미군의 화학무기를 처리하기 위해 삶의 터전을 위협받고 있는 셈이 된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대 국제학부 이삼성 교수의 주장이 눈에 띈다. 이 교수는 지난 94년 펴낸 <한반도 핵문제와 미국외교>(한길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미국은 한국에 다량의 화학무기를 비축하고 있다. 1980년대 초에도 미국 의회는 스티븐 솔라스 미 하원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의 발의로 ‘유사시 사용할 목적으로’ 한국에 미국 화학무기 비축량을 늘리기 위한 예산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화학무기와 관련한 사항은 남북관계 등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입장”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우리 땅에 배치한 화학무기를 철수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답변뿐이다.
“영동군 매곡면은 15만 인구가 밀집한 경북 김천시와 한해 관광객 300만명이 찾는 전북 무주군이 인접해 있습니다. 더구나 폐기시설 주변을 흐르는 2급 지방하천은 대청댐으로 흘러 들어가 대전시민의 식수원이 되고 있지요.” 장종석(40) 전 영동군의회 의원은 “소각 과정에서 불연소되거나 예상치 못한 물질이 생성될 가능성도 있을 텐데 어떻게 100%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느냐”며 “지금 이상이 없더라도 장기간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2년여에 걸친 힘겨운 반대투쟁에도 우리 사회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영동 주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한 40대 주민은 “아무리 싸워도 중앙언론에는 한줄도 나지 않더라”며 취재진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차라리 집 앞에서 화학무기가 폐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죽어야 옳았다. 적어도 불안 속에서 남은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영동군민들의 눈에 화학무기 폐기의 걸림돌은 안보논리 뒤에 꽁꽁 숨어 있는 국방부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를 국방부는 무슨 수로 달랠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