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시 사령관 비밀회담록 이시우 2008/03/26 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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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 주한 미군사령관 비밀회담록과 朴正熙 대통령 앞 特上 보고서 全文 – 카터에 抗命하고 朴正熙를 도와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좌절시키다!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추진하자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옷을 벗을 각오를 하고 撤軍 저지 工作에 나선다. 그는 하우스먼·李東馥 예비회담을 거쳐 金載圭 정보부장과 비밀리에 만나 중대한 제안을 한다.
『본인의 임무는 미국 정부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韓美 양국 정부에 함께 봉사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측에 철군 보완 조치를 강경하게 요구하라. 미국측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규모를』 金부장의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對美 접촉을 지시, 15억 달러 규모의 철군 先行 조치에 합의했다. 美 의회는 그만한 돈을 부담하는 데 반대했고, 북한 군사력의 再평가 결과가 공개되면서 철군계획은 취소된다
존 W. 베시 2世 (John W. Vessey, Jr)
1922년 美미네소타주州 미니애폴리스 출생. 1939년 미네소타州 방위군으로 입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北아프리카 및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하였으며, 1944년 안지오(Anzio) 전투에서 육군 소위로 現地 任官되었다. 많은 참전 경험과 부대 지휘능력 등을 인정받아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포병학교·육군지휘참모大 등을 履修했으며, 메릴랜드大에서 理學士, 조지 워싱턴大에서 理學 碩士 학위를 받았다. 제3 기갑사단 포병사령관⌒사단 참모장·駐태국 美군사고문단 부단장·제4보병사단장·육군작전副長 등을 역임한 후, 1976년 駐韓美軍 사령관·UN軍 사령관·美 8軍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한국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한 駐韓美軍 사령관으로서 1978년 미국 의회에서 카터 대통령의 駐韓美軍 철수계획에 반대하는 증언을 하였다. 이후 육군참모차장·합참의장을 역임한 후 1985년 퇴역하였다.
李東馥 前 남북고위급회담 대표·現 명지大 초빙교수
카터 撤軍 공약의 발단과 전개
카터가 누구냐?
1977년 1월 미국에서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1976년 11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조지아州 지사로 민주당의 지명을 받은 지미 카터 후보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리처드 닉슨의 사임에 따라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가 공화당의 지명을 받은 제럴드 포드 후보를 물리치고 제39代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1969년부터 8년 간 계속된 공화당 집권이 끝나고 민주당 정권이 등장했다. 카터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 정권의 등장으로 가뜩이나 긴장되어 있던 韓美관계는 새로운 역풍을 맞이하게 되었다.
1969년 한국에서 있었던 3選 개헌을 고비로 긴장되기 시작한 韓美관계는 1972년의 유신개헌과 이에 따른 유신체제 출범으로 악화일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번 빗나가기 시작한 韓美관계에는 악재가 잇달았다. 우선 「박동선 사건」이 터져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파동이 일어났고 문선명 교주가 이끄는 통일교의 미국 내 활동이 시빗거리로 등장했다. 유신에 대한 반대를 억압하기 위한 朴正熙 정권의 긴급조치 발동은 이른바 「명동사건」을 발생시켜 심각한 인권시비를 촉발했고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이른바 「청와대 도청설」이 퉁겨져 나왔다. 카터 대통령의 등장으로 韓美관계에는 새로운 쟁점이 첨가되었다. 주한미군 철군 시비가 그것이다.
카터는 아직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기 훨씬 전인 1975년부터 『당선되면 주한 美 지상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후보시절 카터의 주한 美 지상군 철수 주장은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그때만 해도 사실상 無名이었던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고사하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리라고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무렵 카터에게는 하나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카터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주한 美 지상군 철수론 주장은 그 자체가 매우 非상식적이었다. 당시의 한반도 안보상황은 아직 주한 美 지상군 철수를 정당화시킬 만큼 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후보시절 카터의 주한 美 지상군 철수론은 『후보로서 세간의 주목을 끌기 위한 과잉공약』이거나 『아마도 한국의 인권상황 개선과 韓美 현안 해결을 강요하기 위한 지렛대일 것』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카터는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주한 美 지상군 철수 추진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취임 전인 1월9일 미국 군부 수뇌들을 만나 주한 美 지상군 철군 문제를 협의했고, 1월26일 「대통령 검토각서」(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 13호로 各軍에 철군 문제 검토를 지시했으며, 아직 군부의 검토 결과 보고가 있기 전인 3월9일 기자회견에서 철군 추진을 공표했다.
3월17일 합참은 「1982년 9월까지 3만2000여 명의 주한 美 지상군 병력 중 우선 7000명 정도를 철수시키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으나 카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5월5일 『4∼5년 안에 全주한 美 지상군을 철수한다』고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 지시각서」(Presidential Decision) 12호에 담아 5월6일에는 합참에, 그리고 5월10일에는 육·해·공군에 이의 이행을 지시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여 주었다.
『갈 테면 가라』
카터의 철군 계획은 한국에 잔류하고 있는 유일한 美 보병사단인 제2사단 병력 가운데서 1단계로 1개 여단, 6000명의 병력을 1978년 말까지 철수시키고 이어서 2단계로 나머지 1개 여단과 지원부대의 9000여 병력을 1980년 6월까지 철수시키며, 3단계로 주한 미군 사령부를 해체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터는 한국 정부와는 아무런 상의는 물론 통보도 없이,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7년 4월부터 일방적으로 한국 내에 배비되어 있던 전술 핵탄두와 미사일 부대를 철수하거나 후방지역으로 再배치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한국 인권상황에 대한 시비와 그밖의 현안들로 인하여 카터에게 잔뜩 틀어져 있던 朴正熙 대통령은 설상가상으로 주한 美 지상군 철수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이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시작했다. 朴대통령의 강경한 대응은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첫째로, 『갈테면 가라.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자주국방 노선의 채택과 이를 위한 방위산업의 육성이었다.
주한 美 지상군 철수 문제를 싸고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한국의 朴正熙 정권 사이에 지루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이 줄다리기는 미국의 군부가 거의 擧軍的으로 공공연하게 카터의 철군 계획에 반발, 저항하기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카터의 철군 계획에 대한 행정부의 반대는 주무장관들 전원을 포함하여 사실상 汎정부적인 것으로, 보는 이에 따라서는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의 입장은 「대통령의 지시에는 일단 순종하면서 이의 철회를 모색한다」는 것이었고 사이런스 밴스 국무장관의 입장도 「대통령의 지시에 대한 반대 의견은 일단 묻어두고 대통령의 생각을 바꾸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었으며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 보좌관은 「모든 회의에서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동시에 카터의 생각을 바꾸려 하는 행정부의 다른 동료들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군부의 반대 움직임은 더 노골적이었다. 군부의 반대는 1977년 5월19일자 워싱턴 포스트紙에 보도된 주한 美8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의 회견담으로 그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다. 이 회견에서 싱글러브 소장은 『만약 (카터의) 철군 계획대로 4∼년 동안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2개월 간의 정보수집 결과 북한 戰力(전력)은 계속 증강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3년 전의 낡은 정보 속에 묻혀 있다』고 비난했다. 카터는 분노했다. 그는 싱글러브 소장을 워싱턴으로 소환하여 질책하고 다른 자리로 보직을 이동시켰다. 이를 계기로 美 군부의 저항은 확산되는 대신 공개적인 방법은 회피하고 지하로 잠적하기 시작했다.
카터의 철군 정책을 둘러싸고 그 자신의 행정부 안에서, 그리고 특히 군부 안에서 벌어진 抗命에 준하는 저항의 와중에서 문제의 철군 공약을 불발탄으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유엔군 사령관, 美 제8군 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존 베시 대장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고인지 카터의 철군 정책을 싸고 미국의 對한반도 정책이 크게 동요했던 문제의 3년 기간 중 베시 장군의 역할은 충실하게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때 베시 장군이 한 역할 가운데 그 동안 베일에 가려진 채 공개되지 않았던 부분을 공개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주한미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훑어보려는 데 있다.
베시가 불을 지핀 「撤軍 보완조치」
하우스먼의 등장
1977년 5월17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의 자리를 맡고 있던 필자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하우스먼은 韓美 군사협력 분야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는 1945년 9월 대위 계급의 美 육군 정보장교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한지역에 진주한 美 육군 제24군단의 요원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그뒤 그는 대한민국 국군 建軍史에서 지워질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는 건국 초기 국군 조직에 관여했고, 1949년 주한미군 철수 후에는 美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남한에 잔류했으며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주한미군 소속으로 한국군과 주한미군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53년의 휴전 이후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양군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윤활유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1979년 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한국軍의 인사·조직·운영·작전 등 모든 영역에 하우스먼의 지문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977년에도 그는 여전히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이었다.)
필자와 하우스먼은 다음 날인 5월18일 중구 소공동의 서울 시청 맞은편에 위치한 프라자 호텔의 한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이날 필자가 金부장에게 보고한 서면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임스 하우스먼 주한 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 면담결과
<주한 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짐 하우스먼은 5.18 12:15∼13:30 당부 부장 특별보좌관을 접촉하고 베시 유엔군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다음 사항을 부장에게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음.
1. 5.24 내한하는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을 맞이하여 베시 사령관은 주한 美 지상군 철수문제에 관하여 현지 사령관으로서의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보고할 계획임.
가. 베시 사령관은 1차적으로는 주한 美 지상군을 현재의 상태에서 동결, 어떠한 규모의 감축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할 것임. 베시 사령관의 논거는 6·25 때 주한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반면 휴전 이후에는 전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주한미군이라는 전쟁 억지력이 엄존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임.
베시 사령관의 견해로서는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金日成은 남한에 대한 우세를 맹신하고 있었으나 최근 수년 동안은 특히 경제발전면에서 자신감을 잃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보복응징에 대한 염려만 과소평가하게 되면 남북한 간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한국의 산업시설 파괴를 큰 목적으로 하는 단기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고할 것임.
나. 만약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을 통해 美 행정부의 주한 美 지상군의 감축이 기정 방침으로 확인될 경우 베시 사령관은 차선의 방안으로 다음 사항을 건의할 방침임.
1) 주한 美 지상군의 감축은 상징적인 규모로 국한할 것. 美 육군 제2사단의 3개 여단 중 1개 여단에서 여단 建制는 그대로 둔 채 2개 대대만을 1979년 6월 이후에 철수하고 나머지 부대는 무기한(최소한 5년 간) 한국에 잔류시키도록 결정할 것.
2) 철수하는 2개 대대의 각종 화기와 장비는 한국에 남겨두어 한국軍에게 인계할 것.
3) 현재 2개 대대 약의 규모인 주한 美 공군은 완전규모의 3개 대대를 각기 거느리는 2개 비행단으로 증강시키되 증강되는 항공기는 태평양 공군으로부터가 아니라 본토의 공군으로부터 가져올 것(태평양 공군은 주한 美 공군의 후비로 이미 사실상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태평양 공군으로부터의 증강은 실질적으로는 증강이라고 볼 수 없음).
4) 한국軍 현대화를 위해 다음 조치들을 강구할 것.
▶한국軍에 이양하는 화기 및 장비에 대해서는 저렴한 특별가격을 부여할 것.
▶한국軍에 제공하는 각종 기술정보에 대한 美 의회의 제한을 철폐할 것
▶철수하는 주한미군이 한국軍에 이양하는 화기와 장비는 무상공여로 처리할 것.
▶한국軍에 대해서도 미군의 편제상 T/E와 동수의 헬리콥터를 제공할 것.
▶한국軍이 보유하는 TOW의 수를 세 배로 늘려 500개로 만들 것.
▶한국의 방위산업에 부과하는 5%의 로열티를 철폐할 것.
▶한국軍이 미군으로부터 획득하는 화기·장비 기술이관 과정을 단축하기 위하여 훈련을 제공할 것.
2. 베시 사령관은 앞으로 있을 韓美 협의 때 대통령 각하께서는 물론 고도의 정치적 차원에서 말씀을 하셔야 하겠으나 관계장관 이하의 실무자는 이상 베시 사령관의 기본입장을 감안하여 그보다 더 강경한 주장을 할지언정 더 온건한 주장을 하지는 말아 줄 것을 요망함.
3. 베시 사령관은 하비브와 브라운 내한 이전에 극비리(주한 美 대사관에 대해서도 비밀로) 韓美 양국군 간에 사전 의견조정을 가질 것을 희망함. 그 방식은 1단계로 합참의 손장래 장군이나 유병현 장군과 유엔군사령부의 번스 부사령관, 싱글러브 참모장 또는 콜러 작전참모 간에 협의를 갖고 2단계로 베시 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이 만나기를 희망함(단 이러한 접촉은 베시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美 행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명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극도의 보안을 요망함).
4. 베시 사령관은 지난번 渡美,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절대로 졸속한 결정을 회피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도 『장군과 먼저 협의하지 않고는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단독으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으므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감축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만약 카터 대통령이 이러한 약속을 저버릴 때는 『군복을 벗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우스먼은 말하고 있었음.>
金載圭-베시 비밀 요담
듣고 보니, 하우스먼이 전하는 내용은 실로 중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金載圭 부장에게 베시 사령관의 진의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金부장이 직접 그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金부장은 이같은 필자의 건의를 수용했다. 필자는 金부장의 승인을 얻어 즉각 하우스먼에게 전화를 걸어 최단시간 안에 金부장과 베시 사령관이 만나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우스먼이 베시 사령관과 협의하는 데 소요된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 간 후 하우스먼이 전화를 걸어 왔다. 『좋다』는 것이었다. 사안의 성격상 보안이 가장 문제였다. 서로 상의 한 끝에 金부장이 베시 사령관의 8군 영내 숙소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金載圭 부장과 베시 사령관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다음 날인 5월19일 오후 3시15분부터 4시30분까지였다. 참석자는 金부장과 베시 사령관 두 사람이었고 필자가 혼자서 통역을 위해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 부분은 뒤에 공개하는 朴正熙 대통령에게 올린 서면 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베시 사령관은 그가 金부장을 만나자고 한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는 우선 철군 문제에 관한 카터 대통령의 옹고집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리고, 카터의 철군 공약은 결국은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냐하면 이 공약은 『너무나도 현실과 괴리된 것이고 잘못하면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그릇된 정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철군 공약이 이행될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철군은 보완조치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면서 韓美 양국 간에 즉각 「철군 보완조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韓美 간 「철군 보완조치 협상」의 즉각 개시를 강조하는 이유가 또한 그다운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철군 보완조치」를 마련하는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철군 보완조치」가 비용 면에서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싼 것으로 만들어서 「비용 對 효과」의 차원에서 미국 내, 특히 美 의회 안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찬반 토론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완조치」로 인하여 주한 美 지상군의 철군을 강행하는 것이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비싼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경우 거의 틀림없이 의회가 나서서 철군 강행을 저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둘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군이 강행된다면 신뢰성 있는 「보완조치」를 확보함으로써 주한 美 지상군 철수 후에도 한반도에 효과적인 「전쟁 억지력」의 존재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보완조치」 내용을 결정하여 이것을 카터가 이끄는 미국 행정부에 요구하고 또 이의 관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한국 정부가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베시의 생각은 카터 대통령에게는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베시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대통령에 대한 抗命」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베시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 정부 요로와 대화하는 데 매우 조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 안의 그의 대화 상대는 徐鐘喆 국방장관과 柳炳賢 합참의장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이 무렵 朴正熙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에게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그를 노엽게 만든 것은 카터의 인권 정책과 철군 정책이었다. 朴대통령은 공식 외교경로를 통해 카터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거듭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터가 이 문제에 옹고집일 뿐 아니라 한국 정부에게 「事後통보」 위주의 일방통행 방식으로 일 처리를 강행하자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베시의 충정에 감동한 金부장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우리는 구걸하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고 자주국방을 외치면서 오히려 「주한미군 철수 不반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朴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은밀하게 서두르기 시작했다. 베시에게 이같은 朴대통령의 태도는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카터의 오만에 맞서서 주권국가의 대통령으로 국민이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朴대통령의 대응은 「과연 대통령다운 행동」(Presidential Politics)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고 그를 보좌하는 주무장관이나 참모들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시는 『대통령이 그렇게 할수록 정부 관계자들은 실무적 차원에서 가령 철군이 이루어지더라도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 최소화되도록 미국을 물고 늘어져 최선의 보완조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정부의 주무장관 등 관계 참모들에게 있었다. 베시가 그들을 접촉해 보니 그들은 『대통령보다 한 술 더 떠서 더 격앙되어 있었고 더 강경해서 도저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우스먼은 베시 사령관이 徐鐘喆 국방장관 등 한국군 고위층으로부터 『미군이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아연 실색했다고 전했다.
이 무렵 카터 대통령은 철군 문제와 인권 문제를 가지고 한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1977년 5월24일 필립 하비브 국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을 서울에 보내기로 했다. 베시 사령관의 생각으로는 하비브와 브라운의 訪韓이야말로 이들 앞에 「철군강행」보다 훨씬 高價의 「보완조치」 보따리를 풀어놓아 이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물실호기의 기회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시 자신이 한국 정부 국방 관계자들을 만나 그의 생각을 귀띔해 줄 절대적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길이 없었다. 베시는 金부장에게 중앙정보부장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직접 보고 라인을 통해 그의 충정을 朴대통령에게 전달하여 朴대통령으로 하여금 徐鐘喆 국방장관, 柳炳賢 합참의장 등에게 즉각 베시 사령관과 협의하여 「철군 보완조치」를 마련하는 등 하비브 차관 및 브라운 의장의 訪韓 때를 기점으로 韓美 간에 「철군 보완조치」 협상을 본격화시킬 채비를 차리도록 지시하게 해 주기를 희망했다.
베시 사령관의 말은 간곡하고도 충정이 어린 내용이었다. 金부장은 눈에 띄게 감동했다. 필동 중앙정보부 분실 6층의 부장실로 돌아온 金부장은 필자에게 베시 사령관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대담 형태로 정리하여 부장이 대통령에게만 올리는 보고 형식인 「특상보고」(일명 빨간 딱지 보고)로 작성해 달라고 주문했다.
필자는 즉각 부장이 주문하는 「특상보고」를 작성했고 金부장은 다음 날인 5월20일 이 보고서를 지참하고 청와대로 올라가 朴대통령 앞에서 이 보고서를 낭독했다. 필자가 작성하여 1977년 5월20일 金載圭 부장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제의 「특상 보고서」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朴正熙 대통령에게 「特上」으로 보고한 1977.5.19자 「베시 유엔군 사령관 면담 내용」
<중앙정보부장은 5.19 15:15∼16:30 용산 8군 영내 숙소로 주한 유엔군 사령관 존 베시 대장을 방문, 5.24 내한하는 하비브 美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의 방한 문제에 관하여 요담을 가졌는 바 다음은 요담 기록임.
요담 기록
베시: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의 금반 방한 목적에 관해서는 아직 본인에게 공식적으로 통고된 바 없으나 본인의 생각으로는 철군 문제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오기보다는 철군 문제에 관한 朴대통령 각하의 견해를 들어서 카터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군 문제에 관하여 본인은 이미 본인의 견해를 카터 대통령과 브라운 국방장관, 브라운 합참의장 등 미국 정부 요로들에게 진언한 바 있고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徐鐘喆 국방부 장관을 통하여 알린 바 있다.
본인이 이같이 하는 이유는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서의 본인의 임무는 비단 미국 정부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韓美 양국 정부에 함께 봉사하는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소신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오늘 아침 徐鐘喆 장관을 방문, 본국 정부에 이미 진언한 철군 문제에 관한 본인의 견해를 설명해 주었다.
철군 문제에 관해서는 한국 정부도 카터 대통령이 사용한 용어를 정확히 음미하고 이번에 내한하는 카터 대통령의 특사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발언은 2개 항목으로 요약된다. 즉, 1) 주한 美 지상군을 철수하겠다는 것과 2) 철수는 향후 4∼5년 간에 걸쳐 한국의 안보를 저해함이 없이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안보상황에 대해서는 朴대통령 각하 이상으로 잘 아는 분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이번에 하비브·브라운 일행이 방한하면 朴대통령께서 한반도의 안보상황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주시리라 생각한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이번에 방한하는 카터 대통령의 특사들에게 한국 정부는 1) 한반도의 안보에 대해서는 韓美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 2) 주한 美 지상군의 철수는 틀림없이 전쟁의 위험을 증대시키리라는 점 3) 양국 정부는 비단 양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위하여 이 지역에서 전쟁을 방지할 책임이 있다는 점 4) 만약 미국이 주한미군을 기어이 철수시키려 한다면 철수의 시기는 한국군의 현대화가 충분히 진전되어 철군으로 인한 전력의 손실을 만회할 정도가 된 뒤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그동안 본인이 브라운 합참의장에게 주한 美 지상군 철수 문제에 관하여 건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본인은 최선의 정책은 주한 美 지상군을 현재의 규모로 동결, 남북한 관계에 어떠한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인의 논거는 명백하다.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은 1950년 전쟁을 일으켰다. 1953년 휴전 이후 한반도에 전쟁이 없어 온 것은 억지력, 즉 미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金日成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이 모든 면에서 한국에 비해 우세하다고 생각해 왔으나 최근 수년 동안은 특히 경제발전 면에서 북한의 열세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북한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고 오판하면 남북한 간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부정적인 방편으로 한국의 산업시설을 노린 단기 기습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본인은 미국 정부가 철군을 부동의 정책으로 이미 확정해 놓은 뒤라면 가급적이면 1979년 6월 이후, 빨라도 1978년 9월 이후에 우선 美 제2 보병사단에서 2개 대대만 철수시키고 나머지 부대는 무기한 잔류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잔류 美 지상전투부대의 철수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는 그 철수 일정을 밝히지 말고 金日成의 반응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었다. 地上전투부대 이외의 병참이나 유도탄 부대 등은 한국軍 현대화의 진도에 따라 그 임무를 한국軍에 인계하고 서서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地上전투부대의 철수는 맨 뒤로 돌려져야 하며, 특히 정보부대와 통신부대는 아마 영구히 한국에 남아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의견이다.
이같이 일부 美 地上전투부대가 철수할 경우에도 철수가 단행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본인은 브라운 의장에게 건의해 두고 있다. 그것은,
1) 한국군 보유 전차를 대폭 증강할 것
2) 한국군의 對전차 미사일(TOW)을 현재의 세 배, 즉 500개로 증가시킬 것
3) 한국군의 각종 포, 특히 155mm 포와 8인치 포를 대폭 증강할 것
4) 철수하는 2개 보병대대의 全화기와 장비는 그 자리를 메우는 한국軍에게 인계할 것
5) 주한미군이 지금 보유하는 全방공장비를 한국군에 이양할 것
6) 주한미군이 지금 보유하고 있는 全 헬리콥터를 한국군에 이양할 것
7) DMZ에 배치된 모든 레이더 장비를 한국군에 이양하고 그 수를 늘릴 것
8) 주한 美 공군은 현재의 2개 대대 약의 전투기 대수를 완전규격의 3개 대대 규모로 각기 편성된 2개 비행단으로 증강하되 이들 비행기의 추가 도입은 태평양 공군이 아니라 美 본토 공군에서 가져올 것 (태평양 공군은 이미 주한 美 공군의 후비로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태평양 공군으로부터의 증강은 증강이 아님)
9) 한국 정부의 육·해·공군 증강 계획이 계획대로 차질 없이 추진되도록 지원할 것
10) 한국 내에 충분한 예비 탄약과 기타 전쟁 예비물자를 확보, 축적해 놓을 것
한국군의 전력 향상을 위하여 본인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건의하고 있다.
1) 한국군에 제공하는 화기와 장비에 대해서는 저렴한 특별가격(Concessionary Pricing)을 적용할 것
2) 한국군에 제공하는 각종 기술정보에 대해서는 美 의회의 제한을 철폐할 것
3) 철수하는 미군이 한국군에 이양하는 화기와 장비는 무상공여로 처리할 것(현재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화기와 장비는 60억∼80억 달러 상당임)
4) 한국군이 미군으로부터 획득하는 화기와 장비의 기술 이관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국군을 위한 특별훈련을 제공할 것
5) 한국의 방위산업에 부과하는 5%의 로열티를 철폐할 것
이와 아울러 韓美 양국 간에는 1) 새로운 韓美 합동사령부를 구성, 새로운 지휘체제를 갖추는 문제, 2) 남북한 간에 불가침협정 등 협정관계가 성립될 때까지는 현존 휴전협정을 존속시키는 문제 등에 대한 공동연구에 즉각 착수해야 할 것이다.
본인은 이상의 사항을 본국 정부에 건의한 바 있으므로 朴대통령 각하의 위임 하에 이번 카터 대통령 특사와 협상하게 될 한국측 대표들도 누가 될지 모르겠으나 본인이 본국 정부에 건의한 내용보다 오히려 더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미국 대표들을 설득하는 것이 소망스럽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본인은 朴대통령 각하가 현재 처해 있는 미묘한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 충분한 보완조치가 수반되지 않는 주한미군의 철수는 한국으로 볼 때 분명히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朴대통령 각하의 입장에서는 국민들의 사기나 對外(대외)위신, 그리고 金日成의 존재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이것을 큰 일이라고 말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분명히 朴대통령 각하는 카터 대통령이 깊은 생각 없이 뱉어 놓은 선거공약 발언 때문에 진퇴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본인은 길게 볼 때는 비관하지 않는다. 양국이 현명하게 지혜를 가지고 사태에 대처해 나간다면 앞으로 10년 후면 金日成이 청와대 문을 두드리면서 대통령 각하께 살려달라고 애원해 오게 될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고 있다.
다만 본인이 이번 하비브·브라운 일행의 訪韓에 즈음하여 바라고 싶은 것은 이들과 협상에 임하는 한국 정부 대표들이 솔직하고 정직하게 흉금을 툭 터놓는 자세로 모든 문제를 얘기해 달라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카터 대통령이나 朴대통령이 다같이 국내정치에서 오는 부담과 압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행동의 일부 제약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보좌하는 실무자들이 상호 솔직하고 정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긴요하며 그렇게만 한다면 韓美 양국처럼 특수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국가 간에 해결 안 될 문제가 없다고 본다.
金載圭 아마 우리 정부측 대표는 朴東鎭 외무장관과 徐鐘喆 국방장관이 될 것이다.
베시 徐국방과는 그동안 여러 차례 의견교환을 가졌었다.
金載圭 지금 들려 준 당신의 판단과 견해는 매우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 정치와는 달리 전쟁은 매우 정직한 것이다. 총 한 방을 쏘아서 맞추면 사람이 죽고 대포알 한 방이 터지면 파괴가 생기는 것인 만큼 전쟁은 정직하고 또 정확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사항을 감안해 볼 때 지금의 시점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온 정치인의 소행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韓美 관계의 모든 문제를 놓고 볼 때 가장 고약한 문제는 한국에서의 이른바 인권에 대한 시비인 것 같다. 실은 인권 문제란 매우 간단하면서도 미묘하다. 朴대통령과 카터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 해결이 되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의 미묘성이 있다.
이른바 한국에서의 인권 문제는 카터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에게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 대통령께서 카터 대통령의 요구에 반대한다는 차원에서 얘기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도 아님이 명백하다.
실제로 우리 나라에 있는 소위 인권 문제란 오직 명동사건에 관련되어 刑(형)을 살고 있는 9명에 국한된 문제이다. 또 따지고 보면 이들 9명의 문제도 해결 방안은 간단하다. 문제는 이들 9명과 그들의 가족 및 추종세력들이 범법사실에 대하여 개전의 정을 보여 주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들이 개전의 정을 보여 주고 다시 세상에 나갔을 때 다시는 범법행위를 하지 않겠다고만 확실히 서약하기만 하면 이들에 관한 문제는 그 순간에 해결될 수 있다. 실제로 과거 민청학련 사건에 관계되어 15∼20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던 자들도 그들이 개전의 정을 보였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방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인은 이번에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이 방한할 때 이같은 한국의 실정을 깊이 인식하여 소위 인권 문제와 안보 문제를 엄격히 구별하는 지혜를 가져 주었으면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는 실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문제로 전쟁이냐 평화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자칫 그릇된 방향으로 유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베시 金부장의 견해에 본인은 100% 동감한다. 그 두 개의 문제는 서로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본인은 지난번 귀국해서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그 점을 특히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문제는 미국 내에 투영된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오도된 인식이다. 지난번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 카터 대통령이 본인에게 『한국의 인권 상황이 크게 과장되어 있거나 많이 오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했는 바 카터 대통령도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본인은 지금 부장이 한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金載圭 장군은 하비브 차관이 이곳에 와서 인권 문제를 거론하리라고 보는가?
베시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하비브의 사람됨을 아는 본인으로서는 그가 이곳에 와서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러나 카터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해 줄 필요는 있다. 카터는 분명히 한국을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한국을 돕기 위해서는 美 의회와 여론의 지지가 필요한 데 美 의회와 여론사회에서는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하여 카터에게 모종의 행동을 취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카터로서는 이같은 압력 때문에 비단 한국관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정책에 관해서도 美 의회의 협조를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마도 카터는 이번 방한하는 특사 편에 이같은 정치적 고충을 朴대통령께 말씀드리고 이에 대한 朴대통령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요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인의 판단으로는 카터 대통령이 인권 문제와 안보 문제를 결부시키는 일만은 결코 안 할 것이라고 본다. 지난번 만났을 때 카터 자신이 본인에게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분명히 지금 명동사건 문제가 하나의 문제가 되어 있지만 카터가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 정부를 협박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金載圭 그 문제는 실은 우리 사이에서도 많이 논의되어 왔고 또 카터 대통령의 입장은 우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좀 안된 얘기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국내적으로 朴대통령께서 처해 있는 입장은 미국에서 카터 대통령이 처해 있는 입장과 정반대라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이룩한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은 대통령 각하의 강력하고 현명한 영도력이 국민을 조직하고 이끌어 온 데서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여기에 어떤 이상이 생기면 한국은 귀하도 잘 아는 옛날의 한국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만약 본인이 지금 카터 대통령을 만난다면 이러한 얘기를 들려 주고 싶다. 새를 울려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새더러 울라고 요구했다고 울지 않으면 새를 죽인다. 어떤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코 새를 울리고야 만다. 또 어떤 사람은 새가 스스로 울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 중 세 번째 유형의 정치가가 되었으면 한다.
베시 아주 좋은 말씀을 해 주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朴대통령의 입장과 진의가 미국에서는 부당하게 오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호사가들은 朴대통령의 강력한 영도력 행사는 불안정한 국내 政情(정정)을 안정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악선전하고 있다. 2주일 전에 朴대통령께서 8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시고 본인의 숙소에 들르셔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신 일이 있다. 그 때 대통령께서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하루 저녁을 지나시는 것으로 보고 본인도 무척 기뻤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건강은 한국뿐 아니라 韓美 양국을 위하여 소중한 것인데 그날 대통령께서 보여 준 편안한 기분은 곧 그분이 무척 건강하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장기적으로는 한국도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본인은 부족한 정치적 식견이기는 하지만 본인의 생각으로는 朴대통령은 이미 국내에서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쌓아 올리셨고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지금 당장 실시한다고 해도 아마 80∼90%의 지지를 얻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시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본인이 보기에 朴대통령께서는 국민의 복지증진과 안보, 그리고 경제건설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정치작태를 낭비적이고 非생산적인 것으로 보아 정치를 멸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반면, 카터 대통령 같은 사람은 좀 시끄럽기는 하더라도 선거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가를 이끄는 것이 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보는 데서 차이점이 생기는 것 같다.
金載圭 당신의 관찰은 매우 정확하다. 분명히 우리도 궁극적으로는 보다 완벽한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앞으로 6개월, 1년, 1년 반 뒤에 가서 보면 우리가 보다 더 민주주의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예로 작년 12월4일 본인이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부임한 이래 정치적 이유로 법에 도전하는 사건이 무수하게 있어 왔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도 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없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관련자들을 불러다가 설득하고, 경고하고, 그리고 각서를 받은 뒤 다시 내보내고 있다.
명동 사건은 이미 3심을 거쳐 판정이 확정되어 있는 기결수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도 刑이 확정된 18 명 중 9명의 노약자 및 부녀자는 刑집행을 정지시켰고 수감중인 9명에 대해서도 건강관리, 식사, 서적 차입, 면회 등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의 특혜적 처우를 베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신들과 일부 무책임한 미국 정치인들은 이들의 상태에 대해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을 유포시키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의 개전을 방해하고 문제의 조기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베시 그렇다. 최근 한국 정부의 국내정책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매우 반갑고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군인이고 오직 안보에만 관심이 있으며 정치나 인권은 관심사가 아니다. 또 일부 여론의 오도 현상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金載圭 요즘은 신문이 횡포 정도가 아니라 독재라 해야 할 정도인 것 같다.
베시 그렇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신문 독재의 제물들이다.
金載圭 평소 한국의 안보와 평화에 대한 장군의 진지하고도 건설적인 관심에 대해 존경해 왔거니와 오늘 말씀해 준 여러 가지 귀중한 의견은 대단히 고맙다. 오늘 장군의 말씀은 대통령 각하께 상세히 보고드리겠다.>
이 보고서는 朴대통령의 마음도 감동시켰다. 朴대통령은 즉각 徐鐘喆 국방장관과 柳炳賢 합참의장에게 베시 사령관과의 협의를 통해 「철군 보완조치」를 마련하여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의 來韓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같은 경위로 하여 한국 정부는 「철군 보완조치」 패키지를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카터 행정부와의 「철군 보완조치」 협상을 본격화하여 결국 「철군 개시 이전 또는 철군과 병행하여 제공될」 총액 15억 달러의 「보완조치」 패키지를 타결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철군 보완조치」 드디어 철군의 발목을 잡아
15억 달러의 철군 보완 조치가 美 의회의 반대 불러
그러나, 카터의 철군 정책은 결국 관철되지 못한다. 끝내 실천에 옮겨진 철군 규모는 674명의 1개 전투부대 규모였다. 카터의 철군 공약이 결국 불발탄이 되고 만 이유는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카터 행정부 안의 저항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밖에도 두 개의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하나는 美 의회의 반대였고 또 하나는 철군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한 하나의 측면 노력으로 카터 행정부가 벌였던 외교 노력의 실패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NSA·CIA·DIA 등 美 행정부의 정보기관들이 총동원되어 벌인 북한 군사력에 대한 再평가 작업의 결과로 드러난 북한군의 증강실태도 철군 공약 번복을 불가피하게 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베시 장군이 예견했던 대로 철군을 강행하려는 카터의 발목을 잡은 것은 韓美간에 합의된 15억 달러 상당의 「철군 보완조치」 패키지였다. 추가 軍援(군원)의 차원에서 예산조치가 필요한 이 패키지는 당연히 美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당시 美 의회는 역설적으로 특히 1972년의 「유신 개헌」 이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朴正熙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탄압과 이로 인한 인권유린 사태 때문에 反韓 감정이 격화되고 있었다. 때마침 불거진 박동선 사건으로 美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소위 프레이저 청문회가 본격화되면서 美 의회의 反韓 감정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정부에 15억 달러의 추가 軍援을 제공한다는 것은 美 의회의 입장에서는 어불성설이었다.
카터 행정부는 이미 朴대통령의 한국 정부에게 15억 달러의 「철군 보완조치」를 약속한 뒤였다. 따라서 이 「철군 보완조치」의 「선행」이나 「병행」이 없이는 철군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美 의회의 입장에서 철군 문제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再發 여부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 동안 한반도에서는 1953년 휴전 성립이래 주한미군이 제공하는 「전쟁 억지력」 때문에 전쟁이 再發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반도 전쟁 再發 억지의 보다 확실한 방법은 주한미군을 「유효한 전쟁억지 장치」의 상태로 유지하면 되는 것이었다. 철군은 그 자체로 한반도 전쟁 再發을 유발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데다가 15억 달러의 「추가 軍援」은 한국의 朴正熙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카터의 「철군 보완조치」에 대한 美 의회의 승인은 무망해졌다.
1978년에 들어서 카터는 다른 방면의 돌파구를 모색했다. 즉, 철군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외교적 보완조치를 타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8년 3월7일 워싱턴의 백악관에서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대통령 간에 頂上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두 대통령은 두 나라가 한반도 문제에 관하여 남북한과 미국이 참가하는 「3者회담」을 주선하기로 합의했다.
공식적으로 이 「3者회담」은 티토 대통령이 거론하여 카터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외용이었고 실제로는 티토 대통령은 「美北 쌍무회담」을 제안했으나 카터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고 「3者회담」을 逆제안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유고 간의 역학관계 때문에 티토는 이같은 카터의 逆제안을 수용하고 이를 티토의 제안 사항으로 분식시켰을 뿐 아니라 이 「3者회담」 방안을 가지고 미국은 서울을, 그리고 티토는 평양을 설득하여 이를 성사시켜 보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3者회담」 제의는 그의 철군 공약을 밀고 나가기 위해 카터 대통령이 짜낸 비책이었다. 「3者회담」이 성사되면 이로써 한반도 평화보장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이유로 이를 철군 강행의 구실로 삼으려 한 것이다.
반면, 티토가 이 「3者회담」의 중재역을 맡고 나선 것은 그 나름의 「오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토는 원래 인도의 자와하랄 네루 수상 및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과 함께 「非동맹운동」를 창설한 「3頭체제」의 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네루와 수카르노의 사망으로 티토는 「非동맹운동」 안에서 유아독존의 권위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령이었고 건강이 악화하고 있었다. 북한의 金日成은 이를 노려 「非동맹운동」 안에서 티토의 후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 때문에 金日成은 티토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하여 친교를 두터이 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외교가에서는 『티토가 金日成을 마치 아들처럼 대한다』라는 이야기마저 들리기도 했었다.
『당신이 金日成 대변인인가』
1978년 3월 티토의 訪美를 앞두고 북한은 노동당 국제부장 金永南을 2월7일부터 15일까지 유고로 보내 티토에게 金日成 친서를 전달했다. 당연히, 金日成의 주문은 카터에게 「美北 양자회담」을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토는 정작 카터와의 頂上회담에서는 이같은 북한의 요청을 접어두고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3者회담」 주선을 수락했다. 이렇게 한 데는 티토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것은 그 동안 金日成이 그에게 취한 고분고분한 태도로 미루어 金日成이 그의 설득을 수용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티토는 카터에게 그가 유고로 귀국하는 대로 북한에 설득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행정부는 며칠 뒤 카터-티토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3者회담」 추진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AP 통신에 흘려서 이를 全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티토의 계산은 「오산」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카터 행정부는 워싱턴에서는 국무부가 우리 駐美 대사관에, 서울에서는 주한 美 대사관(대사:리처드 스나이더)과 주한 美 CIA 거점이 우리 외무부와 중앙정보부에 카터-티토 회담에서의 한반도 「3者회담」 추진 합의 사실을 알리면서 우리 정부가 이를 수용할 것을 집요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탄은 평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북한은 티토가 미국의 「3者회담」 제의를 수용한 데 대해 강경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3월22일 유고를 방문한 李鍾木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티토 대통령의 유고 정부에 대해 북한이 원하는 것은 『美北 양자회담이지 3者회담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3者회담」 수용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金日成 자신은 4월7일 일본인 좌경 시사평론가 이와이 아키라(岩井章)와의 회견에서 거듭 「美北 양자회담」 개최 주장을 고수하면서 북한은 「3者회담」은 물론 미국이 거론해 온 「4者회담」 「6者회담」 방식도 수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大怒(대노)한 티토는 그가 카터에게 약속했던 對北 특사 파견을 취소했다.
북한은 곧 이어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특사 외교를 벌였다. 북한에서는 3월5일부터 12일까지 노동당 국제부장 金永南이, 3월19일부터 4월2일까지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서기장 許貞淑이 각기 金日成의 특사로 루마니아를 방문, 차우셰스쿠를 예방했다. 그들이 차우셰스쿠를 상대로 특사 외교를 벌인 이유는 4월13일 워싱턴에서 카터와 차우셰스쿠 사이에 頂上회담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월13일 頂上회담에서 차우셰스쿠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에게 그가 金日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호응할 경우 북한은 남북 연방제를 추진할 용의가 있다』면서 『1) 現 한국 정부와의 당국 간 대화는 거부한다 2)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은 現 한국 정부의 교체이다 3) 現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철회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한다』는 金日成의 기본입장을 카터에게 설명했다.
이에 대해 카터는 『당신이 북한의 심부름꾼이냐』고 노발대발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있었던 이날 頂上회담에서 카터는 밖에서도 들릴 정도의 고성으로 차우셰스쿠를 비난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문제는 이로써 외교적 보완조치를 통해 철군 강행의 명분을 조성하려 했던 카터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로써 카터의 주한 美 지상군 철수 공약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북한군 再평가 결과의 충격
다른 한편으로 美 군부는 군부대로 카터의 철군 정책을 난파시키기 위한 그들 나름의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북한 군사력에 대한 전반적 再평가 작업이었다. 이 再평가 작업에는 새로운 분석기법이 동원되었다. 그것은 미국의 첩보위성과 高空 정찰기들이 촬영한 영상자료들을 가지고 북한군의 장비 및 병력에 대한 「콩알 세기」(Bean Counting)를 실시한 것이다. 이를 효시로 해서 韓美 양국 정보기관에 의한 북한 군사력 평가작업에서는 공식 명칭으로 「전투서열 평가」(Battle Order Evaluation)라는 이름의 「콩알 세기」 방식의 평가기법이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이같이 진행된 북한 군사력에 대한 새로운 평가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971년에서 1972년 사이에 이루어진 군사력 증강의 결과로 북한의 군사력은 10년 전에 비해 거의 2배로 증강되어 한국군에 비해 거의 2배의 군사력으로 커져 있었다. 북한군의 탱크와 야포는 수적으로 한국군의 2배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화력과 병력이 휴전선 쪽으로 전진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군의 총 병력은 그동안 평가되었던 48만5000명에서 80%가 증가한 68만명으로 평가되었다.
이 평가 결과에 접한 행정부 수뇌들의 생각은 「이제 철군은 종을 쳤다」는 것이었다. 이 평가 결과는 의회에도 알려졌고 그 결과 카터의 철군 계획에 대한 의회의 반대는 더욱 거세어졌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1979년으로 해가 바뀔 무렵 미국 정부 안에서 주한 美 지상군 철수를 지지하는 사람은 카터 대통령 한 사람뿐」이었다.
해를 넘겨 1979년, 카터 대통령은 이제 그의 철군 공약을 용도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카터는 일본 방문에 이어 1979년 6월30일부터 7월1일까지 2박3일 간 한국을 방문했다. 이 訪韓 기간중 한국의 朴正熙 대통령과 가졌던 頂上회담 결과를 집약한 「공동성명」을 통해 카터 대통령은 「韓美 양국의 공동제안」 형식으로 남북한과 미국이 참가하는 「3 당국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는 북한의 수락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북한의 수락을 예상하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북한의 거부를 예상하고 북한의 거부를 유도하기 위한 제의였다. 카터의 철군 공약의 「퇴출 작전」(Exit Strategy)의 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7월10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문제의 「3者회담」 제안을 거부했다. 그 다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7월20일 카터의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는 『(한반도의) 군사력 균형이 회복되고 긴장완화가 개시되었다는 신뢰할 수 있는 징후가 나타날 때를 기다리기 위해 더 이상의 주한미군 전투병력의 철수는 1981년까지 중단된다』고 공표했다.
1981년은 카터의 임기가 끝나고 다음 대통령의 임기가 개시되는 해였다. 카터는 1980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하여 백악관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의 철군 계획은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朴대통령의 對카터 일장 훈시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철군 공약 드라마의 종장을 장식한 1979년 6월 말~7월 초의 그의 한국 방문 여정은 그렇게 싱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한국 방문 이틀째인 6월31일 오전 청와대에서 있었던 韓美 頂上회담에 이어서 전개된 몇 개의 장면들은 정상적인 정상외교의 차원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날 頂上회담을 끝내고 청와대를 출발한 카터 대통령의 리무진과 수행 및 경호 차량들은 일정상의 다음 행사 장소인 창덕궁 대문 안에 도착하여 멈추었다.
준비된 여정에 따르면 카터 대통령 일행은 그곳에서 下車하여 약 30분 간 산책으로 고궁의 풍광을 즐긴 뒤 오찬 장소인 정동의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관저로 옮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창덕궁 대문 안으로 들어와 정차한 카터 대통령의 전용 리무진은 그곳에 선 채 차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차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車 안에는 운전사와 경호원 말고 다섯 명이 타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브레진스키 국가안보 보좌관 및 글라이스틴 주한 美 대사였다.
침묵 속의 카터 대통령은 차에서 내릴 기미가 없었다. 30분의 시간이 경과하자 리무진은 그냥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행사, 즉 오찬 장소인 글라이스틴 대사 관저로 향해 출발한 것이다. 리무진이 정동 대사관저 안마당에 도착했는데도 대통령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카터 대통령이 동행한 사람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오늘 아침 頂上회담에서 朴대통령이 어째서 약속을 깨고 인권 문제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회고에 의하면 車中의 사람들이 번갈아 그들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車中의 중론은 『朴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철군 정책에 대해 반발한 것』이라는 데 일치했다. 그러자, 카터 대통령이 이들에게 『나의 철군 공약에 대한 당신들의 견해를 얘기해 보라』고 요구했고 차중에 있던 밴스, 브라운 장관과 브레진스키 보좌관은 입을 모아 철군 시기의 부적절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은 『내 행정부의 안보 담당 핵심 각료들이 나의 중요한 정책 공약인 철군 정책에 그같이 반대하니 나는 참으로 불행한 대통령』이라고 한탄하면서 차에서 내려 대사관저로 들어가더라는 것이 글라이스틴 대사의 회고였었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카터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미국 행정부는 朴正熙 대통령의 카터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감정 때문에 頂上회담의 분위기가 경화될 가능성을 몹시 걱정했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백악관 간에는 외교 경로를 통하여 사전에 하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韓美 頂上회담에서 인권 문제는 서로 거론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6월30일 오전 청와대 韓美 頂上회담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카터 대통령을 상대로 하여 안보상황을 중심으로 한국이 처해 있는 특이한 인권 상황에 관하여 「강의」 스타일로 장황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의 半시간에 걸쳐 계속된 朴대통령의 이같은 「장광설」은 물론 그가 카터 대통령에게 가지고 있던 불쾌감을 표현할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권」 문제에 크게 집착하는 그의 정책 때문에 카터 대통령의 별명이 「인권 대통령」이었다. 그러한 그가 더구나 끊임없는 「인권탄압」 시비의 대상인 朴대통령으로부터 인권 문제에 관한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와대에서 나와 창덕궁을 거쳐 정동 대사관저에 도착한 車中에서 카터가 그의 참모들에게 던진 질문은 바로 그같은 불쾌감을 바닥에 깐 것이었다.
베시에 훈장 수여
그러나, 이때는 카터 스스로도 철군 공약은 마음속으로 이미 버린 상태였다. 이제는 철군 공약 포기 수순과 그 사후 수습을 걱정하는 단계에 와 있었다. 그같은 사후 수습의 일환으로 카터는 예정에 없던, 예고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을 하기도 했다. 6월30일 저녁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카터 대통령 일행을 위하여 국빈 만찬을 베풀었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은 이 만찬 석상을 빌어서 베시 駐韓 미군사령관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상대국 대통령이 베푸는 공식 만찬 석상을 自國 인사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장소로 사용한다는 것은 외교관례에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이때의 한국 방문을 통하여 비단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행정부, 그리고 군부에서 그의 철군 정책에 얼마나 극력 반대했는가를 실감한 나머지 철군 반대 세력에 대한 무마의 한 방편으로 그러한 무리한 방법으로 베시 장군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파격적 행동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베시에 대한 카터의 마음은 결코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1979년 駐韓 미군 사령관으로서의 임기가 끝난 베시 장군은 서열상으로나 군내의 인망으로나 미국 합참의장 0 순위였었다. 그러나, 카터는 베시를 美 육군참모차장으로 임명하는 찬밥 인사를 단행했다. 베시는 결국 합참의장에 임명되지만 그것은 1980년 카터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81년에 취임한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그 다음 해인 1982년에 한 일이었다.
에필로그-駐韓미군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공산화 막은 미군 진주
주한미군이 한국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은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에 따라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하여 한반도에 진주하는 美 육군 제24 군단(군단장: 존 R. 하지 중장)의 선발대가 인천항을 통하여 이 땅에 상륙한 1945년 9월8일이다. 제24 군단에 소속된 7만2000여 명의 미군 병력이 남한에 진주하여 38선 이남 지역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본인들을 일본으로 송환하는 한편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軍政을 실시하였다.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나 그의 시각을 추종하는 국내의 수정주의 학자들은 주한미군의 한반도 진주가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6·25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앞세워 미군의 남한 진주 정당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지 않았었다면 오늘날 한반도는 그 전역이 공산화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오늘날 북한에 전개되어 있는 부정적 양상이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 한 가지만 가지고 보더라도 그같은 수정주의자들의 시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한미군의 존재는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를 기해 자행된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없었다면 이미 역사책의 몇 페이지 속에 파묻히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駐韓미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그 다음 해인 1949년 6월 이전에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을 제외한 주한미군 全병력이 철군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이 철수했던 주한미군은 그 1년 후 다시 한반도로 돌아와야 했다. 6·25 불법 기습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자체 방어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북한군의 격퇴를 위한 유엔군의 일부로 미군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유엔군은 미국을 비롯한 참전 16개국 군대와 한국군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작전지휘권은 유엔군 사령관에 의하여 통합되어 행사되었다.
1953년 7월27일로 휴전협정이 발효된 시점에서 주한미군의 총 병력은 32만여 명에 달했다. 휴전 발효 이후 주한미군은 감축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휴전 이후의 주한미군 감축은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로, 휴전 다음 해인 1954년 주한미군은 2사단과 7사단의 7만여 병력만을 남기고 나머지 병력이 철수했다. 2차로는 1969년 닉슨 대통령의 「괌 독트린」에 따라 1970년대 초 7사단 병력이 철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3차 철군이 1977년 카터의 주한 美 지상군 철수 정책에 따라 극히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철수 규모는 1개 전투부대 674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육·해·공군을 통틀어 3만7000여 명의 병력이 증강된 2개 여단 규모의 제2사단을 중심으로 한국에 남아 있다.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지금도 여전히 제도적으로는 북한군 및 「중국 지원군」과 유엔군 사이에 「非戰非和」의 불안정한 「휴전」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아마도 좁은 공간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밀집된 대규모 병력과 화력이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 있는 일촉즉발의 안보 취약지대로 남겨져 있다.
1953년의 쌍방 軍사령관 간에 체결된 「휴전협정」은 항구적인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져야 하나 북한이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남북한 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면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만을 고집하고 있어서 그 전망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절대적 전제조건으로 계속 고집하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전쟁위기가 가시지 않고 있는 한반도에서 1953년의 휴전 발효 이후 48년이 경과하는 동안 전쟁은 再發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같은 불안정한 평화의 지속은 관계 당사자 간의 합의를 통한 제도적 장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북한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같은 평화상태가 지속되어 온 것은 전적으로 韓美 상호방위 조약에 근거하고 있는 韓美 안보협력 체제가 제공하는 「전쟁 억지력」의 덕분이었다.
이같은 「전쟁 억지력」의 핵심은 주한미군의 자동 참전을 보장하는 「인계철선」(Tripwire) 방식의 전방 배비와 함께 一朝(일조) 유사시 미국 본토로부터의 대규모 증원군 투입과 북한군의 격퇴뿐 아니라 북한지역으로의 진격을 내용으로 하는 「韓美 연합작전 계획 5027」(약칭:「作計 5027」)로 이루어져 있다.
총 40여만 명의 美 증원군
「作計 5027」은 한반도에서 전쟁상황이 발발하게 될 경우 미국 본토로부터의 대규모 증원 병력과 화력의 한반도로의 60일 이내 자동 전개를 보장하고 있다. 그 규모는 지상군 2개 군단, 5개 항공모함 전투단, 2개 해병 기동군, 32개 공군 대대 등 총 병력 40여만 명이며 여기에는 1600여 대의 전술 항공기와 200여 척의 함정이 포함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더하여 핵우산의 제공이 추가되게 되어 있다.
이같은 미군의 대규모 증원 병력의 한반도 전개는 작전지휘 반경의 엄청난 확대를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평시에는 한국군이 보유하는 韓美 연합군의 작전지휘권을 戰時에는 韓美 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넘기도록 되어 있다.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또 상징하는, 이 같은 막강한 「전쟁 억지력」 때문에 북한군은 그동안 섣불리 전쟁도발을 엄두도 내지 못해 왔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 때문에 북한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반도 문제 논의의 절대적 전제조건으로 일관되게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해 왔다.
그 동안 평화공세의 차원에서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전술적으로 위장하거나 분식시키는 경우는 종종 있어 왔다. 이 요구를 주먹 쥔 손아귀 속에 감추어 둔 채 표면에 내놓지 않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경우에도 그 것은 잠깐일 뿐 북한은 금방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또다시 꺼내 들게 마련이었다.
북한이 끈덕지게 美北 간 쌍무적 「평화협정」 체결을 고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美北 간 쌍무적 「평화협정」 체결은 美北 간 전쟁상태의 종결, 즉 교전상태의 해소를 의미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북한을 「가상敵」으로 하는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은 소멸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주한미군은 나가든가 아니면 임무와 지위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북한의 계산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국과 미국의 역대 정부는 일관된 입장으로 대처해 왔다. 미국의 역대 정부들도 역대 한국 정부들의 입장을 수용하여 두 가지의 기본입장을 견지해 왔고 이같은 입장을 북한측에 분명하게 강조해 왔다. 첫째로는 북한의 소위 美北 「평화협정」 체결 주장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한반도의 경우 「평화협정」은 6·25 전쟁의 침략자와 피침략자 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主당사자는 침략을 당한 남한과 침략을 가한 북한이며 따라서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간에 논의·해결될 문제이지 美北 간에 논의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주한미군은 韓美 상호방위조약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韓美 양국 간에 논의·해결될 문제이지 美北 간에 논의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미국은, 다만 韓美 양국이 주한미군의 필요성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한반도에 전쟁 再發의 위험이 있느냐의 여부이므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이 무력도발 의도가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아울러 분명히 해 왔었다.
金大中-金正日 대화에서 무엇이 오갔나?
그런데, 이같은 한반도의 안보상황에 작년 6월에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큰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테두리 밖에서 金大中 대통령이 주장한 두 가지 사항에 대한 「金正日과의 합의설」에 기인하는 상황의 전개이다. 金대통령이 평양에서 서울로 귀환한 후 주장한 두 가지의 金正日과의 「합의사항」은 첫째로 『남북이 서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과 둘째로 『주한미군은 계속 유지할 뿐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金대통령의 언급 내용은 표현이 애매하여 과연 이 두 가지 사항에 관하여 그와 金正日 사이에 『합의가 있었다』는 것인지, 『서로 양해한 정도였다』는 것인지, 『金대통령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 金正日이 이견을 달지 않았다』는 정도의 것인지가 불분명할 뿐 아니라 이들 문제에 관하여 金正日 자신이 실제로 말한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들 문제에 관한 金대통령의 발언이 金대통령 혼자서의 「일방설」일 뿐이고 그의 대화 상대방이었던 金正日은 그같은 金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맞다」 「틀리다」 간에 어느 쪽으로도 일체 언급함이 없이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문제 중 한 가지에 관하여 金正日이 입을 연 유일한 기회가 있었다. 그 것은 작년 6월30일 원산에서 在美 친북 언론인인 文明子씨와 가진 단독회견 석상에서의 발언이었다. 金正日은 이때 주한미군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 것으로 文明子씨가 보도했다.
『우리는 그동안 주한미군 철수를 일관되게 요구해 왔지만 문제는 미군이 나가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분명하다. 미국은 주한미군 문제를 우리나라 통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金正日은 「통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그 자신은 역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북한의 공식 선전매체들은 지금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미제가 우리나라의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속한 주한미군 철수』라는 것이다.
주한미군 문제를 金正日과 논의한 것은 韓美 兩國의 기본 입장 뒤엎은 일
金正日과의 대화에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金대통령의 발언은 당연히 미국에게는 충격적이었다. 남북한의 頂上 간에 그와 같은 합의가 사실 이루어졌다면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은 그것으로 소멸되기 때문이다. 金대통령 자신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식했음이 틀림없다.
金대통령은 곧 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즉 金正日과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뿐 아니라 통일 이후까지 주둔시키기로 합의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게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왜냐 하면, 이같은 金대통령의 발언은 『주한미군 문제는 북한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 韓美 간에 논의될 문제』라는, 미국이 고수했을 뿐 아니라 韓美 양국이 공동으로 견지해 온 기본입장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합의가 사실이라면 주한미군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은 「남북한이 논의하여 결정하고 미국은 그와 같은 결정에 따르는」 수동적인 것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다.
주한미군 문제에 관하여 미국에게 主가 아닌 從의 입장을 강요하는 이같은 사태의 흐름에 미국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같은 반발은 작년 10월에 있었던 趙明綠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워싱턴 방문과 이를 통해 美北 간에 합의·발표된 10월13일자 「美北 공동성명」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공동성명」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으로 이어졌고 이어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거의 성사될 뻔하기도 했다.
문제의 「美北 공동성명」의 핵심 주제는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생산·판매를 규제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동성명」에는 기존의 남북한 및 미국 간에 형성되는 3각 관계의 본질적인 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두 개의 대목이 언급되어 있었다.
첫째로, 『쌍방은 그 어느 정부도 타방에 대하여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양국간 「적대관계의 해소」를 선언한 대목이었다.
둘째로는,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평화보장 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는 데 4者 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가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 했다』는 대목이었다.
여기서 美北 간 「적대관계의 해소」 선언은 이것으로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북한은 미국에게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든가 아니면 「북한을 「가상적」으로 삼고 있는」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과 지위를 수정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논거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그만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비록 「영어본」에서는 「Permanent Peace Arrangement」(항구적 평화협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조선어본」에서는 「평화보장 체계」라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고유명사」에 해당하는 특정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었다.
1994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평화보장 체계」라는 용어에 북한측이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한국을 배제한 가운데 美北 양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이것으로 휴전협정을 대체하고 판문점에 설치될 美北 양국의 군사대표부 간에 장성급 회담을 공식화하며 이로써 군사정전위원회의 기능을 대체하게 하며 동시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 따돌리고 북한과 직접 거래할지도
이같은 「평화보장 체계」는 그 용어 자체의 수용을 韓美 양국이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이 「평화보장 체계」 합의 주장을 받아들일 때까지의 과도적 조치로 「평화보장 조치」에 합의하자』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여기서 북한이 말하는 「평화보장 조치」란 「일단 당분간 휴전협정은 건드림이 없이 군사정전위원회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대신 미군과 북한군이 판문점에 군사대표부를 설치하고 두 대표부 간에 장성급 회담을 정례화하자」는 것이었다.
韓美 양국은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평화보장 조치」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금 판문점에서 간헐적으로 진행되는 군사접촉은 남측에서는 「군사정전위원회」 모자를 쓴 유엔군 대표들이 참석하는 반면, 북측에서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모자를 쓴 북한군 대표들이 참석하는 일종의 「변칙대좌」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북한측의 「평화보장 조치」 주장이 부분적으로, 변칙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작년 10월의 「美北 공동성명」의 「조선어본」에 「평화보장 체계」라는 용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것은 장차 북한측이 『미국이 이 용어를 「공동성명」에 표기하는 데 동의했다는 것은 이 용어가 갖는 의미도 받아들인 것』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한국을 배제한 가운데 美北 간에 휴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주장의 논거로 사용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미국이 이같은 내용의 「美北 공동성명」을 수용했다는 것은 앞으로 한국정부가 유화적인 對北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안보 문제,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한미군 등 전통적으로 韓美관계에 속한 것으로 인정해 온 사안들을 가지고 북한과 직접 협의함으로써 미국을 소외시키거나 아니면 미국의 입장을 수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 발생할 때는 미국도 이 사안들을 가지고 한국을 제쳐놓고 북한과 직접 거래할 수 있다는 경고의 성격을 담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금년 초 미국에서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 행정부가 등장하여 미국의 對北정책을 전면적으로 다시 조율하는 과정에 있고 이로 인하여 한국의 金大中 정권과의 사이에 對北정책을 둘러싼 불협화음의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다.
이같은 불협화음은 경우에 따라서는 韓美관계로 하여금 또 한 차례의 주한미군 철수 파동을 겪도록 강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우리는 주한미군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안보 및 한반도의 평화와 갖는 함수관계의 의미를 온고지신의 차원에서 한 번 깊이 있게 再음미해 볼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