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 실천을 통한 단결정신
고성 – 실천을 통한 단결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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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상대와 관계맺을 때 말하고- 듣기에서 가르치고- 배우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상대는 물론 개인일수도 있고, 지역일수도 있으며 국가일수도 잇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말하고- 듣기는 주체가 다른주체를 인정하는 것이며, 가르치고- 배우기는 서로의 주체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고 -듣기는 어느한쪽이 다른 상대를 주체로 인정하지 않을 때 불평등한 회유나 세뇌가 될 수도 있다. 이때는 주체화가 아니라 타자화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기억에서 같은 나라 안이면서도 타자가 되어버린 지역이 있다. 강원도, 제주도, 경기북부, 충청도, 호남이 바로 그들 지역이다. 그러고 보면 남는 지역은 영남뿐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타자를 상대화하는 지역은 영남이다. 그중에서도 영남의 패권세력이다. 한나라당이 구미와 마산과 인천에서 지역패권주의의 부활을 기치로 집회를 열자 그나마 현 정부의 알량한 개혁마저도 당장 흔들거렸다. 엘지노동자들의 상경투쟁도 오비이락격으로 지역주의 구도와 오버랩되고 있었다. 김영삼대통령도 보수검사들도 배짱을 부렸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이란 말이 곧 권력임을 실감케 하는 몇주간이었다. 영남 패권주의는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간의 대화는 본의아니게 일방적인 것이 된다. 주체에 대한 인정과 평등을 전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외의 지역과 관계맺고자 할 때 말하고 – 듣기의 방법이 아니라 배우고 – 가르치기의 방법으로 임해야 한다. 영남사람은 호남을 대할 때, 호남사람은 충청도를 대할 때, 충청도는 경기북부와 제주도와 강원도를 대할 때 평등한 관계라고 전제하고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말이 어떤 지역에선 들어는 봤을지 모르지만 이해는 가지 않는 개념일 수 있다. ‘애개 그 정도 가지고 뭘’하는 일이 그 지역에선 10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기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열고 대화하기에 앞서 마음을 열고 서로에 대한 공부부터 해야한다.
비무장지대는 북한을 공산주의와 거렁뱅이 지역과 독재등의 개념으로 묶어 타자로 만드는 경계선이다. 그뿐아니라 남한내에서도 타자를 만들어내는 경계선이다. 반공이데올로기로, 지역적 소외로, 민주주의의 부재로 모든 일상을전근대처럼 낮설게 만들어 낸다. 특히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은 강원,경기북부,인천일부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소외되고 대상화된 지역이다. 우리의 생각속에 이들 지역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이들 지역의 정치색, 사투리,음식, 문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외지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자기 지역을 모른다. 아니 다른지역에 의해 자기지역을 모르도록 강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고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원전폐기물 처리장반대시위와 향로봉 생태보존지구화 반대시위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95년 이전 고성에 관한 기사는 관광지역 소개나 민통선에 호랑이, 곰이 나타났다는 등의 기사등 외지인들을 위한 기사였다. 그러다가 고성 지역민들의 지역적 저항이 처음으로 기사에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고성을 배우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고성의 인상
96년 1월12일자 신문기사에는 통상산업부가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계획이 무산되자 다시 장소를 물색한 결과 고성의 명호리밖에는 없다는 결론이 적혀 있었다. 업무를 이관받은 한전관계자는 더 이상의 부지선정은 무의미 하며 고성이 안되면 핵폐기물 처리장은 아무도 책임질수 없다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기사였다. 이에 대해 당시 군의회와 이지역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표와 직결되는 이사안에 대해 즉각대처 했다. 정부종합청사를 방문. 항의를 전달하고, 돌아와서는 지역주민 반대집회에 참석했다.
당시 고성군 상가 번영회의 청년세력이 중심이 된 시위로 통산부에서 한전으로 이관된 이 계획은 장기 보류되고 말았다. 지역민들의 첫 승리였다.(주1)
그 다음 일어난 일은 김영삼 대통령시절 세계화 추진위원회에서 비무장지대에 대한 종합 계획을 발표하면서 터진 향로봉 생태보존지구화에 대한 반대시위 였다.(주2)
그렇쟎아도 각종 규제에 묶여 있어서 겪는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또 규제조항이 달리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환경부 나정균 사무관은 이에 대해 ‘지역민들이 반대하는 이상 절대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는다는게 저희의 원칙입니다. 다른 지역의 경우 규제와 함께 지역지원 방안이 나가면서 지역민과 협의가 되는 데 고성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에서 중앙정부의 조치에 대해 고성처럼 격렬한 반대가 일어난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주3) 고성이 강원도 영동의 전반적 분위기와 또 다른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를 푸는 작은 실마리가 하나 있다. 98년 2월 속초 원로회의에서는 양양과 고성을 설악권으로 묶어 통합하자는 제안서를 대통력직 인수위에 제출했다.(주4)
고성지역은 속초시 원로회의 건의직후“통합은 국민적 숙원인 남북통일이 성사될 경우 북한 지역에 있는 고성 지역과 합치려는 지역주민들의 여망을 저버린 것 일뿐 아니라 금강권 특유의 전통문화와 지역정서를 파괴하는 행위”라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당시 고성군 전 교육위원이었던 함귀호 선생의 얘기 였다. 그렇다면 고성은 통일이후를 대비한 전략계획을 갖고 있는 것일까? 고성군청에서는 장기적으로 남북교류광장을 만들어 물자교류를 추진한다든지 휴전선까지 4차선을 만든다든지 금강산 관광권을 개발한다든지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민통선 지역 어디나 갖고 있는 계획이다. 문제는 이를 실현 시키기 위해 얼마나 일관되고 구체적인 계획과 체계가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는 역시 회의가 들었다. 올해 고성은 황태축제를 벌이고 있다. 황태 축제는 이러한 전략을 추진하기 위한 일관된 기획은 분명 아니었다. 황태로 경제적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도 다른 폭넓은 개념의 기획이 아쉬웠다.
이것은 아직 주체적 지역사회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증거였다. 실제로 지역을 핵심에 서서 이끌어가는 세력은 번영회의 청장년 세대이다. 어민들은 어로 한계선 때문에 생계활동의 피해를 받고 있지만 조직화 되어 있진 않고 농민회나 전교조 같은 단체도 건설되어 있지 않다. 지역의 핵심동력인 저항적 주체의 형성이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래 고성의 기질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일제치하에서의 치열하게 전개된 3.1만세운동과 1930년대 황창갑의 적색 농조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주5)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별다른 민족운동이 없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은 치열했다. 그러나 충남 예산이 윤봉길은 기억하되 이 지역 출신인 박헌영은 기억 못하듯, 고성도 건봉사의 봉명학교는(주6) 기억하되 황창갑은 기억하지 못한다. 비무장지대가 만들어 놓은 타자화가 여지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성 사람 누구나가 동의하고 현재에도 물적토대를 갖추어 가고 있고 앞으로도 금강산권의 문화적 중심으로 이의를 달지 않고 있는 것이 건봉사이다.
건봉사
건봉사는 문화유적의 가치에서 뿐아니라 정신적 가치에서도 고성을 뛰어넘는 매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봉사는 신라의 발징화상으로부터 고려의 도선국사 조선의 유정 사명대사에서, 일제때는 친일과 민족운동 사이를 오가다가 전쟁에 의해 폐허가 된채로 민통선안에 갇히기 까지 고성과 함께 파란 만장한 역사를 훑어 왔다. 고성정신으로서의 건봉사는 모든 역사를 그저 범벅으로 모아 놓는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지역을 움직이는 핵심동력으로서의 지역정신은 향토주의에 입각한 문화적 정체성의 차원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저항적 지역주체를 형성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살아있는 정신적 힘이다. 따라서 지역정신은 새것을 창조한 진보적 전통 위에서 찾아진다. 건봉사를 중심으로 한 고성의 정신을 얘기할 때 고성사람들은 그 시대정신의 높이에서나 후대에 끼친 영향력에서나 임진조국전쟁의 전세를 뒤 바꿔 놓은 사명대사와 승병들의 애국주의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휴정과 유정의 실천을 통한 단결사상
사명대사 유정은 선승이면서도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전략경세가 였다.유정은 건봉사를 중심으로 수천명의 의승군을 양성하여 금강산 일대의 백성을구해냈고 (주7) 스승인 서산대사와 함께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이 북진을 포기하고 회군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휴정과 유정의 승병활동은 당시 천대받던 불교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을 뿐아니라 이후 민족사상의 흐름에도 큰 영향력을 미친다. (주8) 따라서 그 정신사상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정은 특별히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말과 행적이 남았을뿐이다. 글이 아니라 실천으로 사표가 된 것이다. 유정은 유점사에서 적을 설복시키고 고성으로 들어가려고 문도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여래가 원래 세상에 나온 것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한 이 말이 사명대사 불교사상의 근본이며 불교 최고의 목적으로 생각한 것이다.’내가 부처라면 나는 중생을 구하는 이외 다른 것은 없다. 지금 적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이것을 개유하는 것이 곧 자비교에 어긋나지 않는것이다’라고 하며 고성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유정의 생각은 스승인 휴정으로부터 온것이며 실천으로 뛰어나게 증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스승인 휴정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는가?
조선의 불교는 현재의 고성처럼 억불정책에 의해 심하게 탄압받았고 소외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초기 무학대사와 함께 했던 기화는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통해 논쟁을 붙여옴에 따라 대화를 모색한다. 기화는 불교나 유교나 같은 한뿌리임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교진영의 대화전술은 일방적 패배로 끝난다. 이미 불교의 폐단에 염증을 느낄대로 느끼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대부들에게 기화의 대화는 한낱 변명처럼 들렸다. 말하고 듣기는 서로의 주체가 인정된 상태를 전제하였으나 이미 불교는 주체를 인정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말하고 듣기는 해명이 아닌 변명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불교 억압정책은 불교를 아사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것이 휴정 서산대사이다. 휴정은 기화-보우의 전통대로 불교와 유교가 근원에서는 하나라는 회통사상을 펼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전략에 있어서는 앞서의 선배들과는 달랐다. 이를 테면 휴정의 방법은 말하고- 듣기의 방법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기의 방법이었다. 휴정은 삼가귀감(三家龜鑑)이란 책을 통해 유가와(주9) 도가의 논리자체를 예리하게 분석한 기초위에 유가의 天과 도가의 道가 불교에서 말하는 心의 개념으로 모아지고 통하는 것임을 논증하였다. (주10)
휴정의 실천적 애국주의
휴정은 이를 통해 동시대의 유가들과의 제논쟁을 피하면서도 유교를 불교로 회통하는 수준 높은 방식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휴정이 당대 사상계와 정치계에 영향력을 발휘 할수 있었던 힘은 그의 이론의 박식함이나 논리의 치밀함으로부터만 말미암은 것은 아니었다.그의 힘은 무엇보다 조국과 민족의 급난앞에서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승병을 일으켜 싸운데에 있었다.
이것은 살생계를 규율중의 제일의 규율로 삼는 불가에서는 엄청난 모순처럼 보인다.(주11) 이런 그가 임진전쟁시 도총섭으로서 승군을 진두지휘하여 부처님이 정하신 불상생계를 범하면서까지 왜군들을 살생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억압받는 민중의 한편이었던 스님들이 조국의 위기앞에서 이미 들끓고 있을 때 대선사인 휴정의 입장변화는 이들이 모일 구심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휴정의 인식변화를 불교 계율의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꾸미는 것은 상황을 잘못 본 것이다.
당시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 사명당은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류되었다가 간신히 옥고를 면하고 나올수 있었으며 그의 출신지인 평안도를 비롯한 북방 변경지역은 홍경래의 난으로부터 임꺽정의 난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변혁의 소용돌이속에 있었고 그 자신 과거시험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는 북방지역출신으로 결국은 출가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교조적 사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주12) 그가 민중과 조국의 현실앞에서 관념적 선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주13)
그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살생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중생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이러한 사상의 단편을 엿볼수 있다.(주14)
휴정과 유정 사상의 성과와 한계
휴정과 유정의 공으로 하여 불교계는 조선시대에 가장 대우 받는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율곡이이 등도 이미 불교를 이해하고 있으므로 해서 중국의 성리학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위에서 조선성리학을 창조했듯이 이후에 조선성리학에 반기를 드는 동인계열의 양명학,실학자들은 휴정이후의 불교사상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사상의 틀을 만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휴정의 삼교 회통사상은 불교에 대한 유가의 벽을 넘어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 했던 것이다. 이는 이후 동학등 민중사상에서도 이어져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는 틀을 구성하게 되는 계기아도 연결되게 된다. 그러나 영정조를 거치며 유교적 질서가 체계를 잡아가는 시점에서 불교는 다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 시점에서 승병세력들은 두갈래로 분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한갈래는 땡초라는 말의 유래가 된 당초 또는 당취등의 조직으로 묶이며 변혁세력이 되고,(주15) 또 한갈래는 선을 중심으로한 불교사상을 좀더 발전시켜 임제종과 조동종등으로 발전한다. 이가운데서도 건봉사는 왕실의 원당사찰로 특별한 혜택을 받으며 조선조 최대의 가람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일제를 거치면서 다른 불교일반 세력이 그러했듯이 일제의 불교정책에 동화흡수되는 나약함을 면할길이 없었다. 이것은 휴정과 유정의 사상이 비록 민중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실천으로 불교의 교조적 틀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봉건적인 존왕주의와 봉건체제로 내화되는 인식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 과도 무관치 않다. 정리하면 휴정과 유정의 실천을 통한 단합주의에서 새로운 것은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주체조차 끌어올릴수 있었던 주체성이라면 낡은 것은 그 주체의 발견과 실천을 왕과 국가라는 틀속으로 다시 묶어버린 관성이다.
맺는말
건봉사의 폐허엔 조선후기 것으로 보이는 솟대모양의 입석이 있다. 이는 건봉사가 끊임없이 중생속에서 배우고자 했던 휴정, 유정 이래 새것의 전통이다. 한편 사명대사가 700승군들이 목을 축이게 했던 계곡물 위로는 민통선 철조망이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다. 현재 고성의 모든 소외와 무대접의 원인인 분단모순에 대해 자신의 자리만을 지키고 중창불사를 해나가고 있는 모습이 낡은 관성과 타협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고성의 지역정신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가르치고 배울 것을 요구받는다.
주1) 당시 담당자인 산자부 원자력개발과에서는 그 뒤에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가에 대해 답을 회피하며 무척 곤혹스러워 했다. 처음의 비장한 결의도 어디가고 이젠 더 이상 귀챦아지기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주2) 당시 고건위원장을 중심으로한 위원회는 비무장지대문제에서 개발이냐 보존이냐하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만한 대안이 마련됐다고 발표햇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연구용역을 준결과 생태보존형 개발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낸 대안은 핵심보존지구를 설정하고, 그 주변에 생태관광등을 실시할수 있는 보전활용지대, 목축과 일반인들의 생업활동이 가능한 완충지대를 두고 생태형 개발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환경부는 향로봉과 양구 대암산등 몇 개 지역을 생태보존화 지역으로 설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성군민들은 이에 대해서도 격렬히 반대했다.
주3) 고성을 보기 전에 강원도 영동지방을 보면, 영동지방의 조용한 저항에는 근거가 있다. 동해안 어업은 절망적 이다. 어족자원 고갈에 따른 어획고 부진, 출어경비 급등, 어망규제등에다 설상가상으로 연안국의 2백해리 선포에 따른 어장상실과 수산물 수입개방계획이 겹친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어선 매물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거래가격은 절반수준으로 급락했으나 거래는 한산한 편이다. 이에 북평공단등도 가동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어 회복세로 돌아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열악성은 정치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총선등의 여론조사 무응답률이 40~50%씩 나온다. 그 밑바닥에는 지역할거 정치에서 단한번도 대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해보지 못한데서 기인한 ‘무대접 정서’ 가 짙게 깔려있다. 이러한 정서는 조용한 저항여론을 형성하여 14대때 45%의 압도적 득표를 했던 신한국당 정재철의원을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강원도를 대표 할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응집된 힘으로 표출되지는 못하고 있다. 정당 간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죽하면 정당 바람이 없다는 의미에서 ‘비닐하우스 선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참고로 강원, 속초, 고성, 인제, 양양은 95년 7월 선거구 조정을 통해 ‘전국 최대의 선거구’로 떠올랐다.면적이 제주도의 2배다.
주4) 속초의 전,현직 국회의원, 단체장들로 이루어진 속초원로회의에서 이런 의견을 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94, 95년 처음 실시된 ‘속초시·양양군 통합 주민의견조사’ 결과 속초에서는 유효표의 95.7%인 1만9천6백25가구가 통합에 찬성했으나 양양에서는 유효표의 15.9%에 해당하는 1천3백16가구만이 찬성했다.당시 양양군의회와 번영회등 20여개 사회단체가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 강력 반대하자 속초시와 인접한 양양군 강현면등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다수 지역 주민들이 이에 동조한 결과였다.95년 3월 실시된 2차조사 역시 속초시에서는 유효표의 94.1(1만9천7백34가구)가 찬성했고 양양에서는 불과 20.6%(1천5백75가구)만이 찬성했다. 속초시 원로회의 건의 직후인 지난 7일 양양군의회는 대통령직 인수위에 발송한 성명서에서 “과거 실시된 속초.양양 통합 찬.반투표’ 결과 대다수의 양양군민들이 반대해 통합이 무산됐는데 원로회의가 ‘일부 특권층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신이상적 집단의 넋두리”라며 강력히 비난했다.
주5) 동아일보 1935년 12월 29일자에서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강원도 고성군을 중심으로하여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적화의 지하공작을 꾀하던 황창갑(29)등 3명은 지난 22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大町검사의 손에서 취조를 받은바 지난 27일로 치안유지법위반 죄명으로 피고 3명 모두가 기소되어 동 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이제 그들의 활동내용을 보면 피고 3명은 모두 보통교육이나 또는 중학을 졸업하고 생활의 곤란으로 자연 좌익사상에 감염되어 소화 7년 (1932년)부터 동지를 규합하여 종종 의식주입에 활동하던중 소화9년 (1934) 고성군 간성면 상리에서 동지 수명이 회합하여 고성 적색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의식주입과 좌익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점차로 운동을 진전하다가 미연에 검거된 것으로 피고 성명은 다음과 같다. 黃昌甲(29) 朴龍南(28) 孫三基(31)’. 일제의 치안 유지법 위반사건으로 입건된 이사건은 당시 赤農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적색농조는 말하자면 비밀지하조직이다. 일제는 법적 강제령으로 소작료를 징수하고 수확하지도 않은 벼를 논에 세워둔채 차압하였다.물론 형식상 조정령이나 농지령등의 합법적 투쟁수단이 열려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먼거리의 여비와 재판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소작농의 처지가 못되었다.그러니 폭력적 쟁의의 길만 남게 되었다. 일제는 폭력적 쟁의를 철저히 탄압했고 따라서 소작쟁의는 점차 공산주의 지하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해방후 황창갑은 고성군 인민재판소장을 역임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6) 일제 탄압기에 이렇다할 민족운동이 없었던데 비해 건봉사의 봉명학교에서 한용운이 민족교육을 실시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봉명학교는 1906년 설립되어 단 1년만에 폐교 되었을 뿐아니라 [한국근대불교사연구(민족사,김광식저)]에 따르면 당시 건봉사는 일제의 불교정책에 동화되어 있던 시기로 1912년 8월 명치천황이 죽자 천황의 명복을 비는 기도 행사를 열었던 점등을 미루어 객관적인 연구와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주7) 겸재정선의 산수화 옹천은 고성과 통천 사이에 있는 엎어놓은 옹기모양의 고개로 승병들이 왜군을 물리친 장소로 유명하다. 당시 승병들의 활약상을 들은 겸재는 감동하여 독특한 화법으로 옹천의 바위덩어리와 넘실대는 파도를 그렸다.
주8) 허균은 유정을 일러 말하길 ‘사명대사의 평생이 임란의 시끄러울때를 당하였으므로 전쟁중에 고생하면서 나라를 지키고 강한 적을 막기에 치우쳐서 법보를 선양하고 미도를 진쇄할 여가가 없었으므로 이점이 부족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결점으로 여길 사람이 있겠지만 그들이 어찌 악마를 베어 어지러움을 구제하는 것이 불교를 믿는 사람의 공덕임을 알겠는가? 나는 비록 유가 이지만 형제와 같이 깊이 사귀고 사명대사를 가장 깊게 안다. 만일 세상에 묻는 다면 지눌과 나옹선사의 도맥을 이을 사람으로 우리스님을 버리고 누가 있겠는가?’
주9) 혹자는 명심보감을 휴정의 저술로 주장한다. 왜냐하면 삼가귀감중 상권에 속하는 유가귀감의 서술체계가 명심보감과 거의일치하고 유가귀감의 독특한 내용이 명심보감의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휴정의 사상적 영향력을 예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10) 어린시절 유학과 도가를 섭렵했기 때문에 유가와 도가의 논리를 철저하게 분석할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씌여진 책이 삼가귀감(三家龜鑑)이다. 삼가귀감은 당시의 표층사상이었던 유가와 도가 불가의 사상을 각기의 논리로 분석하고 불가의 개념과 비교하고 있다. 유가귀감에서 휴정은 유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휴정 당대에 번성하고 있었던 주자의 신유학이 아닌 공자시대의 원 시유학으로 소급하였다. 그래서 신유학의 理, 氣, 心性으로 파악하는 대신 원시유학인 天으로 파악하였고 그것이 결국 無極이면서 太極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서 天은 곧 道이며, 道는 곧 心이라하여, 결국 유가의 천사상을 불교의 심으로 會通하고자 하였다. 이부분은 논어의 ‘陽貨篇’ 다음 구절로부터 연유하는데,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하시니 자공이 말하였다.”선생님께서 만일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씀하였다.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사시가 운행되고 온갖 말물이 성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이편에서 공자는 수행자들이 대부분 언어로써만 성인의 도를 관찰하기만 하고, 하늘의 이치가 말이 업어도 드러나는 것임을 살피지 못한채 한갖 말씀만을 알고 그것이 말미암음(연유)을 알지못하므로 이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말한 것으로 수행자는 말을 떠난 진리를 실천궁행하는데 힘쓸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를 공식화해 보면 ‘하늘이 곧 도요 도는 곧 마음이다(天卽道 道卽心)’ 라고 결론 짓고 있다. 이는 후대의 정약용이 택했던 방법과도 똑같다. 다산은 뛰어난 금석학 지식을 이용하여 신유학의 사변적 성격을 극복하고 원시유가의 실천적 성격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는바, 이미 휴정이 그 방법론의 물꼬를 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휴정의 이론은 당시 노론계열의 조선성리학보다는 이와 대립적이었던 양명학이나 실학과 더 깊이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11) 휴정은 수행자가 유불도교를 바탕으로 공통의 장점을 실천수행함에 잇어서 불교의 계율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음란함은 청정의 종자를 끊는 것이고, 살생은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이며, 도둑질은 복덕의 종자를 끊는 것이며 망언은 진리의 종자를 끊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끊지 못하면 보살의 종자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유가와 도가가 이런 계율을 기본적인 행동률로만 국한한데 비해 휴정은 이를 귀감으로 수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주12) 제자인 유정은 호남유학의 기대승으로부터 크게 깨닫고 정진하였던 점등을 미루어볼 때 당시 사상계의 분위기와 분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13) 휴정의 의식변화에 대해 가장 변증법적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이 북한 소설가 최명익의 ‘서산 대사’이다.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씌여졌다고 평가되는 이 소설은 서산대사를 민중과 함께, 민중의 지혜를 모아 일본군을 평양에서 대패시키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려주고 있다. 남쪽이 임란의 영웅을 이순신으로 삼는데 비해, 북한은 서산대사를 임란의 영웅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순신이 관군출신이고 인명을 경시하였던 점등을 들며 이에 비해 휴정은 비록 승려로서의 계급적 한계는 있으나 몇척의 배는커녕 무기한자루 없는 상황에서 민중의 힘과 지혜에 근거하여 대승을 이룬점 등을 꼽고 있다.
주14) ‘아아 불자의 옷과 밥이 농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고, 직녀들의 고초가 아닌 것이 없다. 도를 밝히지 못하고서야 어찌 그것을 소화 시키겠는가?’ 휴정은 교단을 지탱하고 유지케하는 민중의 은혜가 지중함을 자각하여 언제나 잊지말기를 경계하여서 수행자가 공부나 수행없이 시주를 받지 말것과, 공양을 받을때는 독을 먹고 화살을 맞듯이 두려워 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하여서 죽음에 임하여서도 사람의 몸을 잃는 인간 최대의 고통을 받지 말기를 경책하였다.
주15) 금강산 당초와 지리산 당초, 양대당초세력들은 각종 민란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며 조선후기 변혁세력의 일파로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