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을 통해본 영해문제(55매)200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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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을 통해본 영해문제

이시우
서해6도라고 하는게 맞겠다. 연평도가 소연평과 대연평 두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은 서해6도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해상분계선등 불가침 선에 대한 제안을 해왔으나 남측과 미군측은 어떤 제안도 하질 않았다. 임의 설정된 NLL만을 고집하는 처신을 해왔을 뿐이다. 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불가침선을 계속 논의한다라고 명시했지만 99년 서해교전이 있기까지 어떤 논의도 없었다. 서해교전이 있고 나서야 북에서 미국에 대해 99년 9월 ‘조선서해해상군사분계선’제안을 하였고, 이에 대한 아무런 반응이 없자 2000년 3월 서해도서에 대한 통항질서를 일방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94년 신해양법 발효이후 북에서는 12해리 영해에 대한 발표가 있었음에도 역시 이에 대한 공식 답변이 없었다. 북에서는 계속 협상을 위한 제안을 했지만 당사자인 미국과 남측에서는 수정제안이나 협상을 위한 준 비가 없었다. 국제관계란 협상의 길이 막히면 전쟁의 길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서해교전 문제 역시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평화체제를 준비하고 노력하지 않음으로서 발생한 현상이다. 서해교전 자체가 더 이상 확전되지 않도록 막는 일 중에 평화적 협상을 위한 준비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는 영해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육당 최남선은 “누가 한국을 구원할 것이냐? 한국을 바다의 나라로 일으키는 자가 그 일 것이다. 어떻게 한국을 구원하겟느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고쳐 만들기 그것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해문제는 분단치유책일 뿐아니라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역사문화적 근거와 정치군사적 균형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1. 서해의 성격
우선 서해의 역사문화적 성격을 알기 위해 지중해와 비교해보자.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서해와 지중해의 역사문화적 유사성에 주목한다. 지중해는 해양문화의 성격을 구비하고 있는 만큼 이동성(mobility)이 강하다. 각 나라들이 내해(inland-sea)를 공유하고, 긴 연안이 여러나라로 갈라져 있어서 국경이 불분명하고 변화가 심하다. 그래서 해양지배권을 둘러싸고 국가간의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많다. 지중해에서는 지속적인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질서의 축이 된다. 균형자의 역할이 항상 필요한 것이다.
한편 지중해는 정치 군사적인 것보다는 교역 문화 등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항상 개방적이고 여러가지의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문화의 차별성을 강화시키고, 교역의 이익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 문화창조활동을 활발히 하여왔다. 따라서 국경이나 종족보다는 문화나 경제개념이 질서를 구축하는데 중요한 인자로 작용하였다. 서해도 지중해의 이런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해는 동이족이 개척하였으나, 고조선과 전한이 첫 대결을 벌인 이후 한민족과 한족은 계속해서 갈등을 벌이면서 서해를 공유하였다. 반면에 비교적 외곽인 남해와 동해는 한민족의 바다이었다. 우리는 해양력을 바탕으로 일본열도를 개척하고 식민을 했다. 그리고 곳곳에 나라를 세웠다. 마치 그리이스인들이 배를 타고 지중해의 연안을 따라가거나 바다를 건너 교역을 하면서 점차 식민지를 세우고, 도시국가(police)들을 건설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지중해적 성격을 띠었다.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연결되는 수렵삼림문화, 몽골과 알타이에서 내려온 유목문화, 황하북쪽 화북지방의 농경문화, 그리고 남방에서 올라오는 해양문화 등 지구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자연현상과 다양한 문화가 만나 상호교류하고 혼재하면서 발전하였다. 다양한 자연환경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제형태나 교역방식 역시 다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해양을 통해서 교류되어 왔으며, 여기서 형성되는 문화는 다양성이라는 지중해 문화의 전형적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정착성(stability)문화와 이동성(mobility)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상호 보완한 것이다.
지중해적 성격을 갖는 서해문화는 동북아 평화문화 건설이란 측면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갖는다.
동아시아 전체를 보면, 이 지역에서의 잠재적 국제적 갈등요인은 해양영토분쟁 등 대부분 바다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은 “앞으로 아시아지역에서 전쟁이나 또는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첫 총성은 틀림없이 바다문제를 둘러싼 문제 때문에 울릴 것이다” 라고 서슴없이 예측하고 있다.

2. 서해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대원군이 청나라가 한반도에 대해 어떤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가졌는가를 잘 읽지 못하여 불러들인 자들에게 납치당하는 수모를 당했던 것처럼, 우리가 서해를 둘러싼 지정학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구한말의 수모를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일 한중 한러 어업협정이 다 맺어졌거나 맺어지는 과정이다. 이들중에 어느 나라가 가장 큰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미국이다. 중국은 서해를 통해 대만근처의 조어도 분쟁을 해결하는데 지역적 관심이 있고, 일본은 세계적 해양패권을 추구하지만 현재까지는 독도문제가 관건이다. 러시아는 군사적 측면에서 동해를 필요로 하지만 해양패권국가는 아니다. 오히려 지상군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국가다. 북도 주력은 지상군이지 해군이 아니다. 만약 북이 공격을 한다해도 파주의 자유로나 철원의 육로를 이용하지 바다를 축선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미국은 서해에 어떤 지정학적 연고가 없음에도 가장 큰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4대열강과 남북의 해군력은 모두 연안해군이나 지역해군을 벗어나지 않지만 미국은 대양해군을 가지고 있다. 해군력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그리고 미국이 서해에서 연고를 갖고 있는 근거중 하나가 바로 서해 6도이다. 미국이 정전협정문제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 서해에서는 바로 이들 섬 때문이다. 서해가 다양성과 평화지향성이라는 지정학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려면 패권적인 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서해문제의 최대과제라고 볼 수 있다.

3. 영해문제의 역사
국제법적으로 영해문제는 일제기의 어로금지선. 전쟁중이었던 52년 이승만대통령이름으로 선포된 평화선과 해상 봉쇄를 목적으로 했던 클라크라인이 있다.
평화선은 52년 연안수역을 보호하고, 월등한 수산기술을 가진 일본과의 어업분쟁가능성을 막고, 공산세력의 침투를 막고 세계각국의 영해확장 추세에 대처하기 위해 설정한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주권문제로서의 영해문제에서 핵심은 영해의 너비문제이다. 역사적으로 3해리와 12해리가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3해리안은 16∼17세기경의 가시(可視)거리설을 거쳐, 연안포가 미치는 범위를 기준으로 하는‘착탄거리설(着彈距離說)과, 전 해안에 걸쳐 일정한 범위의 재산권적 권한(dominium)을 인정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일정범위설(약 4해리)’이 영해폭의 기준이 되어왔었다. 해양법학자 갈리아니가 1792년 “연안포(砲)의 배치 여부와 상관없이 영해의 범위를 3해리(약 5.56㎞)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제안한다.
이 두가지 설을 융합해 만들어진 3해리안은 1793년 4월 미국이 프랑스에 중립을 선언할 때 중립수역 범위를 3해리로 규정함으로써 최초로 공식 채택됐다.
그러나 3해리안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스페인 등 각국의 영해폭 확대 경향에 밀려 점차 위축돼 1958년 제1차 유엔해양법회의가 열릴 시점에서는 4해리, 6해리, 12해리를 넘어 2백해리를 주장하는 나라들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연안국의 영해너비를 작게 하려는 3해리안은 해양제국주의 국가들이 연안국의 영해를 축소시켜 연안국의 바다를 좀더 마음대로 수탈하기 위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구나 미국은 다른 나라에는 3해리안을 강요하면서 미주대륙에는 300해리를 선포한데서도 그 불공평성을 드러낸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의 압력에 의해 3해리안을 수용할 위기가 있었는데 한 공무원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이를 저지한 사건이 있었다.

1958년 초 미국의 월터 다울링 대사는 1차 유엔 해양법회의에 실무자로 참가하는 김동조외무차관에게 “2월24일부터 4월27일까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제1회 유엔해양법회의에서 미국의 ‘영해폭 3해리’안을 지지해달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지브롤터 해협과 한반도 해안에 대한 미국의 초계활동을 두고 소련이나 북한이 12해리 영해니 20해리 영해니 하며 항의하면 안보상 중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설명이었다. 이대통령도 즉각 제네바대표부에 훈령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후 제네바 해양법회의에서 미국안이 찬반 동수로 부결됐는데 확인결과 그게 한국대표가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어서 미국대표단 뿐만 아니라 우리 외무부까지 발칵 뒤집혔다.
우리측 해양법회의대표단에 정부의 훈령을 무시하고 반대표를 던진 경위를 알아보았더니 대표단 단장 김용우(金用雨) 영국대사가 “3해리안을 지지하면 우리의 평화선은 어떻게 될 것이냐”면서 “3해리라는 것은 전통적인 국제법의 영해제도이지만 중세의 케케묵은 규칙인데 우리가 20세기의 국제정세와 해양기술의 발전을 무시해선 안된다”고 우겨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고 한두달 후 이대통령은 김대사를 파직시켰다. 실무자의 소신있는 결단으로 미국의 이해요구에 넘어가지 않고 세계적 영해주권을 지키는데 공헌을 한 셈이었다.
이처럼 국제해양법에서 영해너비는 가장 주요한 핵심사안이다. 그러나 제1차 1958년 제네바 해양법회의, 1960년 제2차 제네바 해양법회의에서도 국가간의 첨예한 이해관계대립으로 영해 너비를 확정하지 못했다. 마침내 제3차해양법회의(1973-1982)에서 영해 너비를 확정한 신해양법이 탄생했다. 그런데 신해양법의 발효는 60번째 국가가 비준동의서를 기탁 후 1년 후에 가능케 되므로 1994년 11월에 영해너비도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94년 이후 북의 영해주장은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 반면, 남의 NLL은 국제법적 근거나 정전협정상의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해6도상에서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1989년6월3일 유엔군총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북측 함정이 서해도서해상 3해리내에 들어오거나, 대한민국 선박에 대해 발포하고 이들을 격침시키거나 나포하려는등 명백한 도발행위를 자행할 시에 유엔사는 북측에 항의전문 발송 및 군정위 본회의를 소집하여 북측의 행위를 항의/비난할 수 있음.” 89년은 발효만 되지 않았을 뿐 국제법으로서 신국제 해양법이 채택된 뒤였다. 일한 국제적 흐름을 거스르며 유엔사는 3해리를 계속 주장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영해너비문제가 정전체제의 문제로 전화되게 된다. 영해문제는 국제해양법을 존중하며 풀어야 한다. 이미 국제해양법 자체가 수많은 긴장과 대립을 청산하고 어렵게 합의된 성과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편 영해문제를 NLL문제로 대치시키려 하는 시도도 긴장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오히려 가까운 장래에 통일될 것을 전제한 획기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한다면 통일조국의 영해주권은 인접국가와 패권국가들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을 것이며 해양강국으로서의 성취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4. 정전협정에서의 영해문제
미국은 정전협정당시 서해5도에 대해서도 3해리를 주장했다. 북은 만약 영해너비를 표시할려면 12해리로 해야한다고 주장하여 대치하다가 “인접해면”이란 말로 어정쩡하게 타협함으로서 분쟁의 소지를 남기게 된다.
1994년 발효된 국제해양법에 따라 서해6도는 분명 북의 영해에 포함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전협정상 유엔사의 통제권만이 인정된 이들 섬이 자체 영해를 갖는가이다. 전통적인 국제법적 견해는 법적인 섬(신해양법 제121조 1항)은 크기와 위치에 관계없이 자체의 영해를 갖기 때문에 당연히 영해를 갖는다는 주장이 하나 있다.(류병화) 이는 유엔사 군정위에서 취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1958년 국제해양법 회의에서 버마는 동협약 제10조에 “어떠한 국가에 속하는 섬이 다른 국가의 영해내에 있을 때 그 섬은 자체의 영해를 갖지 못한다”라는 문장을 추가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버마대표는 만약 그러한 섬들이 자체의 영해를 가지게 되면, 자체의 접속수역과 대륙붕까지 가지게 될 것이므로 그 결과 심각한 관할권분쟁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또 1973년-1982년 사이에 개최된 제3차 국제해양법회의에서 터키대표가 터키본토에 매우 인접해 있는 그리스 도서의 영해권을 제한하자는 의견을 강하게 제시한 적이 있다. 비록 터키측 도서영해 제한론 의견이 신해양법에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의견은 분명히 국제법상 주요한 주장으로 거론되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서해의 6개 섬들이 영해를 갖는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정전협정에 있다.
정전협정에 첨부된 지도(22개중 3도)에는 이런 주석이 붙어 잇다.

(주2) 각 도서군들을 둘러싼 장방형의 구획의 목적은 다만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두는 각도서군들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방형의 구획은 아무런 다른 의의가 없으며 또한 이에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못한다
(주2)에는 그림 2(협정 첨부지도 제3도)에서 보듯이 다섯(5)개의 섬의 둘레에 섬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보이도록 점선으로 된 4각형을 그려놓았다. 이 섬 둘레의 지도상의 점선 사각형은 (1) 섬의 위치를 명시하는 시각적 목적일 뿐, (2) 그 섬들의 밖으로, 섬에 속하는 공간의 면적을 의미하지 않으며, (3) 그 4각형 점선 안의 공간이 어떤 “수역”, “구역”, “지대”, 도는 “구획” 같은 것을 형성하지도 않으며, (4) 그 점선 4각형을 서로 연결하여 어떤 목적의 “선(線)”을 긋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정전협정에 따르면 서해6도의 각 섬들은 영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남측은 섬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행사해온 것이 아니라 훨씬 넓은 해역을 영해처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지혜를 발휘하면 현재의 상태를 크게 변동시키지 않고도 분쟁 위험성을 줄일수 있다. 국제법에 따른 북의 주장대로 12해리의 영해를 인정한다해도, 정전협정상 6개 섬은 유엔사(남한이 아니다)의 통제하에 있으므로 국제법에 따라 무해통항권은 인정된다. 신해양법 제17조 및 제19조에 따르면 모든 국가의 선박은 연안국의 평화, 질서, 안전을 해하지 않는 한 그 국가의 영해에서 무해통항권을 갖는다. 동시에 연안국은 영해사용자의 자격과 조건을 규정하여 선박의 통항을 규제할 기능을 가지나 그 행사에 있어서 무해통항을 부인.방해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일정한 국제법상 수인의무를 진다. 군함도 무해통항은 인정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심각한 변화가 오진 않는다. 변화가 있다면 무해통항의 예외가 될 수 있는 경우인데, 군함이 바다 한가운데 머물러 있거나 적정행위를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행위등이 제한된다. 해군활동의 약간의 축소는 감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측 정부의 합의로 양군의 불가침을 확실히 보장할 안전장치를 만든다면 오히려 통일과정에서 최초로 서로를 향하던 총부리가 내려지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남북간에 공동어로수역을 정하면 어민들에게는 거의 피해가 없다. 북은 과거 여러차례 공동어로를 공식 제안한 바 있다. 58년 12월29일 개최된 군정위 제 92차 본회의에서 북측 수석대표는 북측정부의 내무성과 어업성이 공동발표한 제안을 읽으면서 동해에서는 명태잡이 계절에, 서해에서는 조기잡이계절에 남측어민들이 일정한 규칙을 지키면 북측 어장에서 고기잡이를 허락하겠다고 했다. 그 뒤 62년, 63년, 67년까지도 반복해서 제안했으나 남측정부가 계속 거절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서해교전은 영해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서로 묵인하는 무법상태가 남측어선들에겐 사실 유리했다. 연평도 어민들은 북의 어민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장비를 가지고 있고, 꽃게잡이 그물만 하더라도 북측은 꽃게에 엉킨 그물을 풀어서 다시 쓰지만 남측은 뚝뚝 끊어버리고 항상 새 그물을 쓰기 때문에 어획량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남측은 서해교전 당시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 북은 서해교전과 함께 열린 판문점회담에서 7월 전까지는 ‘영해’문제를 중심으로 주장을 폈다. 남쪽 군함이 영해침범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7월2일부터의 회의를 기점으로 정전협정 정신에 의거하여 ‘해상분계선’을 논의하자고 제안하였으며, 그리고 그 당사자도 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영해문제는 남북사이의 문제이지만 해상분계선은 정전협정 문제로 북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에서 북미관계로 위치가 이동된 것이다.

5. 민족내부 특수관계로서의 영해문제
그럼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민족내부의 특수관계로 규정된 남북관계에서 영해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현명할까? 분단국인 남북한간의 법적 관계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르면 잠정성, 2중성 그리고 특수성을 띄고 있어 분단고착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평화통일시까지 최종적인 국가경계획정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남북한의 법적 관계는 대외적으로는 국제법적 관계이면서 민족내부적으로는 특수관계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서해6도에서 외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통제하는게 중요하다. 2001년 6월에 발효된 한중어업협정에서 서해5도 수역에 대한 중국의 어로활동을 통제한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다음은 미국이다. 미국의 패권을 통제하는 것은 정전협정 대신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하는 정치군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가능한데 그 이전에라도 앞서 얘기한바와 같이 지혜를 발휘하여 북과 가까와지고 미국과 멀어지는 과정을 밟아 가는게 좋다.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에서 명시한 것처럼 남북간은 잠정적인 특수관계이고, 따라서 분단국가상호간에 경계선은 어차피 모두 잠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남북한의 문제는 엄격한 국제법적 논리로 풀기에는 현실적으로 비논리적 요소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의 싯점까지 엄격한 국제법적 해법으로 중간선 및 등거리원칙을 적용하는 것보다는 [남북한 공동 어로수역] 설정에서 그 해법을 찿는 것이 보다 현실성이 있다고 하겠다. 1992년 9월 11일 국제사법재판소가 폰세카만 사례 “The Gulf of Fonseca” case에서 이 만의 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연안 3국(엘살바도르, 혼두라스, 니카라과)의 공동의 주권을 가진 공유물이라고 판시한 것도 참조할 만하다.
백령도서쪽과 소청도-연평도 간 해상불가침선을 기준으로 일정한 범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남북한 직교역에 대비하여 해상 교통을 위하여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 innocent passage)을 보장하고 해상 교통로를 지정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무해통항로는 백령도 항로대(航路帶)와 연평도 항로대를 지정하여 북한 및 중국과의 해상교통을 원할히 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남북어업협력이 됨과 동시에 미국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을 없애는 일이 된다.
남북 정상회담은 이런 면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동안 논의만 되던 남북공동어로문제등을 당국간에 심도있게 합의했고 전국어민총연합 같은 단체가 북과 만나 민간차원의 구체적인 공동어로문제를 논의하기까지 했다.
전력이나 임진강 수해방지 사례에서 보듯이 ‘남북당국간 수산분과위’를 구성해 회담을 북측에 제의해 추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북측은 지난해 4월 남측에서 어선, 어구자재 등을 제공하고 북측이 어장 및 선원을 제공해 어획한 생산물을 공동 판매하는 합작회사 설립을 수협에 제의한 바 있다. 이런 과정에서 남북공동 어로수역 설정문제를 자연스럽게 합의해내면 될 것이다.

맺음말
우리는 6.15선언을 합의하는 역사적 성과를 성취하고도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세부 방법들을 실현시켜 6.15 선언을 실현하고 정착시키는 일에 부족함이 많았다. 그런 부족함의 틈만 보이면 전쟁의 위기는 성큼 대든다. 확고한 안보태세 확립으로 전쟁을 준비하면 전쟁이 찾아오지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다. 평화적 수단을 발전시켜 평화를 맞이할 준비가 될 때만이 평화는 찾아온다. 그런점에서 영해문제는 북방한계선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를 해결할 건설적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북방한계선 비판과 아울러 영해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가
1982년 4월에 있었던 유엔의 제3차 국제 해양법회의 협정에 대해 북해어업사례는 예외적 상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바 (영해)기선을 긋는데 실질적 문제는 사실상 이들 선안에 놓여 있는 해역들이 하수지배를 받기 쉽게 국내토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해당지역에 대한 독자적인 경제적 이해와 그 해당지역에 대한 실체성과 중요성이 오랜사용으로 명백히 입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중 후자는 역사적 응고의 원칙을 말하고 있다.

질문
저..그럼..남측 고속정이 북측해역(이른바 NLL 북방)을 휘젓

고 다녀도 괜찮은가보네요? ^^; 휘젓고 다니면 북한은 어떻

게 나올까요? 우리처럼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럼 거기

에다 대고 우리도 포를 싸도 괜찮을까요? 잘모르겠네요..

답변
글을 읽고 처음으로 질문을 주신 분은 처음이십니다. 감사하고 반갑네요.
우선 북측에선 NLL을 설정한적이 없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답변드려야 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북방한계선이 휴전선인것 처럼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전협정에는 서해상에 군사분계선(휴전선)이 합의되질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서해에는 어떤 군사상의 ‘선’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다만 서해5도에 대한 유엔군의 관할권만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서해5도에 대한 유엔사령관의 관할권이 있다고 해서 서해5도를 둘러싼 일정해역이 남측의 영해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정전협정에는 이런 오해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 서해5도에 대한 유엔사령관의 관할권이 관할권이외에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라고 명백히 표시하고 있습니다.
(정전협정의 원문은 평화자료실에서 ‘정전협정’이란 검색어를 치시면 보실수 있습니다.)

정전협정상의 이 조항으로 해서 서해5도는 50년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화약고 구실을 해왓습니다. 정전협정에서 합의되지 않음으로 해서 새로운 평화협정을 합의하거나 국제법의 일반적 관례를 따를 가능성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해12해리를 규정한 신국제해양법이 1994년 발효됨에 따라 서해5도는 모두 북의 영해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정전협정상으로는 서해5도의 관할권만 인정되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항하거나 어업활동등에 대해서는 북의 허락과 양해하에서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국제해양법에 따르면 다른나라의 영해라도 무해통항권은 인정되기에 서해5도를 배가 오가는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단 군사적 행위만이 통제될 뿐입니다.

어쨌든 남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는 북방한계선을 고집하며 또다시 3차 서해교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북과 영해문제등에 대한 협상을 벌여야 합니다. 이는 예민한 문제지만 남북정상회담에 의해 서로가 비약적으로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통일지향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우리에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로서는 무척 손해보는 느낌이 들지 모르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고 통일의 과정에서 실리적인 협상을 벌이는것이 지혜로운 일 일것입니다.

평화적 대안을 준비하면 평화가 오고 전쟁을 준비하면 전쟁만이 온다는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