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전쟁의 약한 고리2004/03/01
테러전쟁의 약한 고리
이시우
1. 테러전쟁의 역사적 위상
냉전,문명,테러라는 개념은 2차대전 후 현재까지 세계질서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되엇다. 우선 이들 개념의 역사를 간략히 알아봄으로서 현재 ‘테러전쟁’의 역사적 지위를 알아보자.
‘냉전’은 얄타체제붕괴로부터 시작된다. 미국에서 왈레스와 조지케난의 대결에서 케난의 득세와 영국 처칠의 ‘철의장막’발언으로 상징되는 분위기는 세계차원에서 사회주의체제 봉쇄의 시작이 되었다. 월남전 이후에 군부의 평가는 봉쇄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더라도 미소간의 양극성을 무너트렸다. 이는 모든 일에 소련이 개입할 것이라는 전제로 미국은 항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확전과 승리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냉전에 의한 봉쇄정책은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전략적 오류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문명’은 90년초 소련의 붕괴로 냉전의 한축이 무너진 후 지정학적 각축의 시대를 반영하는 개념이 되었다. 90년 초 소련 외상이 ‘이제 이념은 지정학으로 대체되었다’라는 선언에서 알수 있듯 지정학은 미국정책입안가들의 필수과목이 되었다. 이는 우크라이나 페르보마이스크의 구소련 핵기지시설에 대한 유지와 해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미스마이어와 페리의 논쟁에서 페리가 승리함으로써 본격화 되었다. 미스마이어는 소련이 냉전시절로 부활할것에 대비 우크라이나의 핵을 억지력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비해, 페리의 논거는 전선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내부의 민족간 문명갈등에 있고 정정의 불안요소는 핵무기 통제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므로 해체하여 위기 사태를 예방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접근법은 90년대를 미국의 예방방위전략의 시대로 이끌었고 99년 유고전이후 군부의 클린턴 정부에 대한 반발등으로 위기를 맞다가 2001년 9.11테러로 예방적 방위는 응징적 방위로 이동되게 된다.
‘테러’는 최근 불거지는 백악관의 테러사전인지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 수많은 의혹에 쌓여 있다. 이는 마치 1941년 루스벨트가 외국의 분쟁개입에 반대하는 중립법에도 불구하고 진주만 폭격사건을 통해 2차대전에 본격 개입할 수 있었던 것과도 매우 유사하다. 이때도 루스벨트는 진주만 폭격 계획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떤 대비도 하고 있지 않아 폭격을 유도했다는 평가마저 받게 된 것이다. ‘테러’는 미국을 위협하는 A,B,C케이스의 위협 중 A케이스에 해당하는 위협으로 이제 미국은 냉전시대보다 더 강력한 안보국가로 가게 되었다.
페리는 미국을 위협하는 방위의 수준을 세가지로 분류한바 잇다. C케이스의 경우는 르완다와 보스니아처럼 미국안보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미국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않는 경우이고 B케이스의 경우는 이라크와 북한처럼 미국의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미국의 이익에는 직접적 위협이 되는 경우이고 A케이스의 경우는 미국의 생존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경우이다.
A케이스의 위협은 다시 5가지로 나누어지는데 1.러시아의 과거 소련화 2.거대중국의 출현3.핵무기의 통제 불가능상태 4.대량살상무기의 확산 5.재앙적 대테러
뉴욕테러사건은 지금까지 있어왔던 테러중에 가장 충격적인 테러이며 재앙적 대 테러이다. 이것을 예방하지 못하므로서 예방적 방위는 응징적 방위로 예방에서 억지로 이동해 간 것이다. 또한 테러는 여지까지 불가능했던 민간인의 자유에까지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부여받으므로서 국가와 개인 사회 거의 모든 부분에서 무소불위의 개입이 가능해 졌다. 새로운 전략개념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테러’의 개념은 형성과정이고 그런만큼 약한고리가 존재한다. 이글에서는 전략차원에서 존재하는 ‘테러전쟁’의 약한고리를 밝혀보고자 한다.
2. 미국의 테러전쟁이전 테러대응
우선 ‘테러’가 9.11사건을 통해 우연히 도출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96년 대량파괴무기방위법(넌-루가-도미니치개정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국방부가 모든 수준의 정부의 일반 긴급사태교원들을 교육하고 긴급테러대응팀을 구축할 수 있도록 위임하는 것이다. 이는 국방부가 재앙적테러통합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국방부사업예산과 대통령제출예산을 사용 가능하게 하는 조치였다.
1998년 4월 자넷 리노 법무장관은 의회에서 ‘정부가 테러위협을 봉쇄하고 테러행위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들과 요소들을 신속하게 판단하고 배치할 수 있도록 표준구매절차를 단축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절차는 의료품이나 여타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는 것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학교나 산업체에서 그러한 것을 빌리거나 협력관계를 마련할 수도 있게 하는 것이었다.
1998년 5월22일 클린턴은 미해군사관학교 연설에서 미국이 “이 세기에 가장 심각햇던 안보에 대한 도전을 막기 위해 우리가 바쳤던 것과 같은 정도의 엄격함과 단호함을 가지고” 21세기의 새로운 테러에 대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PDD-62호와 63호에 서명하고 국가안보회의 참모중에서 안보, 기간구조보호 및 테러방지를 책임지는 국가안보조정관을 임명하였다. 국가안보조정관은 ‘연례안보준비상황’을 작성하고, 예산안을 준비하며, 위기관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책임지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분산된 권력과 중복된 관계기관들의 문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안보조정관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해야하고 테러에 대응해야할 기관들이 말이 아니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제기가 생겨났다.
4. 테러전쟁의 약한고리
선전포고
부시대통령은 여론의 지지를 업고 의회를 통한 선전포고 절차를 무시했다. 그러나 국민이 함께 한 전쟁이란 새로운 기록을 수립했다. 이는 본토에 대한 직접적 위협의 경우 오히려 절차에 얽매이는 것이 무능력과 혼란의 원인이 됨을 지적해온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은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민주당의 반격이 시작 국론 분열시작. 탈레반 포로들에 대한 처리문제에서 미국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전쟁포로가 아니다. 이 때문에 동맹국들로부터 인권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고, 군부가 걸프전의 가장 큰 성과중의 하나로 정리한 의회의 선전포고 권한문제가 대두되게 되었다.
선전포고와 관련된 혼란은 한국전당시 오마브래들리 육군원수의 말만으로도 명백하다. ‘전문적이든 아니든 간에 일반적으로 의회가 선전포고를 하며, 내가 믿는 한 의회는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으므로 누군가 한국전쟁이 전쟁이엇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며, 이번과 같은 경우 어느 시점에서, 어떤 방법으로 선전포고를 하며, 이를 또한 국민에게 어떻게 납득시키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그 정확한 본질은 나는 모른다.’
전쟁의 목표
빈라덴 체포냐, 탈레반정권 전복이냐!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비롯한 국무부 관리들은 미국이 이번 테러와의 전쟁에서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정권의 완전 전복을 포함해 그 목표를 확대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국무부의 입장은 미국이 설령 최근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북부연합 등 아프가니스탄의 반정부세력에 대한 은밀한 지원등을 통해 탈레반정권을 타도한다고 하더라도 내부 분열로 악명 높은 반정부 세력들 사이에서 안정된 친미(親美)정부가 탄생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이 내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이는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에서 국내문제는 월남정부에 맡기고 미군은 월남을 외부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데만 전념했다면 대 게릴라전교리는 도움이 됐겠지만 내전에까지 휘말리게 되면서 게릴라전교리는 마찰을 빚게 됐다는 결론과도 연관되어 있다.
반면 국방부 일각에서는 테러보복 전쟁에서 탈레반정권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를 지지하는 국방부관리들은 만일 탈레반정권을 목표로 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전략이 성공할 경우,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의 은신처와 테러훈련캠프를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간주하는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무부와 국방부의 이러한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백악관 내 부시 대통령의 고위보좌관들 사이에서는 탈레반정권의 지도자인 오마르의 제거와 이에 대항중인 반정부세력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반정부 세력에 대한 지원은 미국이 카불의 새로운 정권 수립까지는 모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도움을 줌으로써 빈 라덴을 보호하려는 탈레반측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10월 7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보복전쟁 개시와 함께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알 카에다라는 테러조직과 이를 보호하는 탈레반 정권을 응징하겠다고 만 강조했다.
“오사마 빈 라덴에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9·11테러 직후, 빈 라덴을 최우선 혐의자라고 지적했던 부시 대통령이 그의 이름을 개전선언문 같은 가장 중요한 연설에서 제외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9월 25일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동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재 임무는 테러리스트를 색출, 정의에 회부하는 것이며 아프간에서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대조된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기자들로부터 전쟁 승리의 개념과 목적을 수정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걸프전쟁은 전쟁 참모들에게 상반된 교훈을 주고 있다. 럼스펠트를 한편으로 하는 그룹은 미국이 걸프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승리했으나 승리하지 못한 전쟁’으로 이해한다. 이에 비해 당시 직접 걸프전을 지휘했던 파월은 후세인 제거를 위한 확전 주장에 대해 ‘만약 전쟁을 계속하려면 우리는 유프라테스문명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다’라며 단호히 전쟁을 정리했다.
럼스펠트그룹은 91년1월 16일 이라크전쟁의 목표를 선언한 부시대통령의 연설을 잊고 잇는게 분명하다. 부시는 연설에서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사담후세인의 군대가 쿠웨이트를 떠나는 것입니다’ 분명 후세인 제거는 이라크전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번복하려는 것은 군사교리상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전쟁의 정치적 목적과 군사적 목표의 혼란에 대해 미군부의 인식은 어떠한가 보자.
1981년 야전교범 100-1, [육군](FM100-1,the Army)에 따르면
‘현대전의 강도와 범위는 … 정치적 목적과 군사적 목표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된다. 군사작전, 정치적판단, 그리고 국가의지의 상호작용들은 성취 가능한 전쟁목표들에 의해 심화된 정의를 내리고 때때로 그것들을 한정하고 그리하여 전재의 지속과 전재의 종결을 위한 조건들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세가지의 전쟁목표가 발표됐다. 1.빈라덴 체포, 2.알카에다 해체, 3.탈레반정권 전복. 이중 탈레반정권 전복만이 가시적으로 성취됨으로써 파웰의 입장이 아프간 전쟁이후 후퇴하고 럼스펠트가 주도권을 잡는 국면이 되었다. 이는 전쟁목적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전개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승리
전쟁교리의 결함은 여러 가지 혼동을 가져오는데 그중 하나가 ‘승리’에 대한 개념이다.
맥아더는 51년 한국전쟁에 관한 상원위원회의 ‘대논쟁(the Great debate)’에서 1,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토대로 승리란 오직 적군의 완전한 섬멸과 적국의 무조건항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국전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승리를 쟁취해야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군부의 평가는 1954년 군사교리에도 있듯이 과거나 지금이나 “승리”라는 개념이 반드시 적군의 완전한 격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승리란 전쟁의 이유가 되었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맥아더의 전쟁승리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한국전에서 이기고도 이긴 것을 모르는 상황이 오랫동안 벌어졌다는 것이다.
월남전이후 84년 와인버거에 의해 군사정책의 교리로 재도입된 클라우제비치주의와 그의 [전쟁론]에 따르면
“전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반드시 상대방을 완전히 패배시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적 부대를 격멸하거나 적의 영토를 정복하거나 또는 일 시적으로 적의 영토에 침입하여 이를 점령하거나, 아니면 정치적 목적과 직결된 제반 계획이나 심지어 적의 공격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우리가 만일 어떠한 이론적 이유로 그중 하나의 전쟁 양상을 부인한다면 다른 모든 전쟁형태도 부인하는 것이 되어 현실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지게 되고 말 것이다.” 아프간에 대한 테러보복전쟁은 처음의 목적이었던 이 전쟁의 정치적 이유인 ‘테러리스트와 그 조직’을 섬멸하는 것에서 주변적 목표였던 그를 비호하는 주변세력인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는 것으로 잠시 마무리되었다. 더구나 아프간 전쟁에 대한 승리선언도 정확히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이라크, 이란, 북한등 새로운 전쟁의 목표를 설정했다. 이는 걸프전에서 확인된 미군 자체의 군사교리와 마찰이 되는 사안이다. 다음 전쟁이 실행되기 위해서 미군부가 정상적이라면 새로운 교리를 만들든가, 이전에 확인된 교리로 돌아가든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비대칭전쟁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비대칭적 위협이었던 테러에 대한 전쟁이 대칭적 개념의 전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95년부터 미국정부의 공식문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비대칭개념은 처음엔 항공과 지상, 항공과 해상등 상이한 전력간의 교전이란 의미로 단순하게 사용되었다.
97년 국방태세보고서에서 재래식군사영역에서의 미국의 지배는 적들로 하여금 미국의 이익,그리고 미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비대칭적수단 사용을 고무시킬 것이라고 하여 주목하기 시작했다. 99년 joint strategy review는 공식적으로 비대칭을 광범위하게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이 예상했던 작전방법과는 완전히 틀린 방법으로 미국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시도’ 들이다.
Joint Vision 2020에서는 비대칭적접근방법을 가까운 장래에 미국이 직면할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엿으며 2001국방태세점검보고서 서문에는 미국은 과거의 위협기반(threat-based)모델보다는 능력기반(capabilities-based)모델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습, 기만, 그리고 비대칭전쟁에 의존할 적들을 억제하고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갖춰야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비대칭적적인 테러집단에 대한 테러전쟁의 개념은 악의 축 발언과 함께 대칭적 적인 국가에 대한 전쟁개념으로 환원됐다. 또한 비지정학적 전략에서 전통적인 지정전략으로 환원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처럼 전통적, 대칭적 개념은 강화되면서 본래의 비대칭적 전쟁과 위협에 대한 대처는 갈수록 혼동되고 있다.
예를들면 탄저균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실패, 신뢰할 수 없고 잦은 테러경계발령에 의한 불신, 민간인에 대한 사찰과 감시를 합법화시킴으로서 발생하는 시민자유권에 의한 저항, 수많은 지역에서의 테러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책임의식 결여등 뉴욕사건 이전까지 추진되어 온 제한된 권한에 대폭 힘을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대한 공포감만 증가 시켰다.
군사학 박사로 러시아 현역 육군소장인 블라디미르 슬리프첸코는 비대칭적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비대칭적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미국처럼 재래식 또는 최첨단 무기를 이용해 전지구적 테러리즘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한겨레신문2001.12.1)
공포
비대칭위협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비대칭위협을 전쟁으로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한 결과는 공포의 증가이다. 공포는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 대해서도 사기를 저하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인도한다. 한국전에서 중공군의 참전을 경험하며 생긴 공포는 미군으로 하여금 월남전에서도 당연히 중공군이 참전할 것이란 예측을 하게 하고 그것은 스스로 전쟁수단을 제한함으로서 전쟁의 패배를 가져왔다. 이러한 공포는 사고의 마비를 불러오고 실제적인 위험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그 원인을 kautsky 교수는 자기실현적예언(self-fulfilling prophyecy)이란 말로 분석한다.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 새로운 행동을 유발시키고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최초의 그릇된 판단 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예를들면 월맹을 중공의 앞잡이라고 믿어버린 것이 현실에서 중공이 참전할것이란 공포로 나타났고 그것은 결국 중공의 개입을 기피한 제한적 전쟁을 하게 했고 그 결과 실패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테러전에 대한 공포가 심화되는 가운데 일어난 이태리에서의 테러경보는 이와 같은 경우이다. 2002.3.27일 로마의 미국대사관이 세부사항은 생략한 채 극단주의 테러그룹이 부활절을 겨냥, 베네치아와 피렌체, 밀라노, 베로나의 미국인을 상대로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한다. 특히 미국인이 많이 모이는 클럽이나 식당, 종교시설, 실외 오락 이벤트 등을 대상으로 지목했다. 전 주미 이탈리아 대사 세르지오 로마노는 “테러리즘이 불안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이번 경고는 알 카에다에게 총 한방 쏘지 않은 승리라는 선물을 안길 것(일간지 ‘카리에레 델라 세라’)”이라고 비판했다.
만우절의 탄저균발견 거짓 제보가 테러대응기관을 마비시킨 경우도 이와 같다.
옛 소련군 대령으로 생물무기 개발자였던 케냐잔 알리벡코프는 ‘만약 테러 공격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면 미국 사회 내부의 저항과 공포감이 확산되고 이에 따라 미국의 국제문제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정치인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질 수 있다’ 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서히 현실이 되고 있다.
핵무기
럼스펠트는 테러전쟁에서 집요하게 핵무기의 사용과 개발을 추진해왔다.
월남전에 대한 평가에서 군부가 가장 불만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전장교리가 군사학이 아니라 핵과학과 사회과학에 의해 주도되고 군사전문가가 아니라 민간인 아마추어들에 의해 기본전략이 형성되었던 최초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1945년이래 전쟁교리와 전략은 원자시대에는 과거의 모든 지나간 군사이론과 경험들이 전적으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는 민간핵전략가들의 현란한 개념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결과 장군과 제독이 아닌 오로지 핵전략가들만이 미래의 전쟁에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월남전의 베테랑조종사였던 작셀 브로톤대령은 ‘우리는 원자무기들이 운반을 위해 한국전 종식이래 전술항공의 기본을 무시해 왔다. 공군은 대량보복이라는 국가전략을 실행하는 것이 임무인 전략공군사령부에 의해 지배되었다. 한국에서 배운 근접항공지원, 공대공전투등 모든 것이 망각되었다. 베트남전이 시작되었을 때 우린 다시 배워야했고 그렇게 하는데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재래전으로의 복귀가 이루어졌고 91년 부시의 핵감축정책에 따라 핵전문가들은 국방성을 떠났다. 럼스펠트가 MD를 추진했고 재래무기와 핵무기의 중간형이란 구실로 지하터널파괴용 핵무기 개발을 선언했다. 이는 다시 핵전략으로의 조심스러운 복귀를 의미한다. 미국 탄도미사일의 탄두는 핵폭탄이다. 물론 화학무기나 생물학무기도 실을 수 있지만 미국은 화학무기금지협약과 생물학무기금지협약의 주도국이기 때문에 이들이 공식적으로 실을 수 있는 것은 핵이다. 때문에 미사일의 문제는 동시에 핵문제이며, 재래전략의 문제이자 핵전략의 문제이다. 맥아더로부터 파월은 전자에 관심을 가졌고 덜레스로부터 럼스펠드는 후자에 관심을 가졌다. 핵전략은 50년 동안 군부와 백악관을 분열시킨 주제였으며, 재래전략은 이들을 단결시킨 주제였다. MD의 틈새는 재래전략이 아닌 핵전략에 있다. 한반도를 비핵지대화 하는 것이다. 핵문제는 모두 지나간 일처럼 되어 버렸는데 북미제네바합의 시한인 2003년이 되면 비핵지대화 문제가 다시 대두될 것이다. 비핵지대의 설정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하는 안과 타원형으로 하는 안이 있을 수 있는데 엔디코트가 주장한 타원형으로하여 미국과 대만까지를 포괄하는 안이 가장 진보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잇다. MD반대가 방패라면 비핵지대화는 창이다. 때문에 미국의 의도에 견인당하지 않으려는 러시아, 중국, 이북은 핵으로 위협하려고 한다. 그런데 북은 2003년까지 핵보유 선언을 할 수 없다. 91년 핵파동 당시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주장하다가 남북비핵화 선언으로 양보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남과 북은 핵을 가질 수 없지만 미국은 관계없다.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하지만 않으면 될 뿐, 핵을 날릴 수는 있는 것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비핵지대화인데 북은 91년 비핵화선언을 뒤집고 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전쟁양상-테러전쟁과 게릴라전
1962년 판 미육군교범에 의하면 전쟁양상(Spectrum of war)라는 개념이 도입되는데 전쟁의 양상은 냉전으로부터 제한전, 전면전에 이르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교범에 의하면 냉전과 제한전을 구분하는 기준은 아주 명확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만 두가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냉전’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평시의 고조된 긴장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제한전’은 실제 적대행위를 하는 전시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는 개념이다. 현재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간전쟁이 마무리 된 것 같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교리상으로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잇는 것은 이 때문이다. 테러전쟁은 냉전이 아닌 수많은 제한전을 수행해야하는 과제에 당면해 있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의 테러전쟁은 신냉전이 아니며 세계적 차원의 제한전이다.
테러를 전쟁으로 보는가 전쟁이외의 상태로 보는가는 중요하다.
뉴욕사건 이전까지는 테러는 전통적인 전쟁이 아닌 ‘비대칭적방법’이었다.
“재앙적테러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생명과 재산에 대하여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례 없는 피해를 가하는 것이다.(예방적방위전략p221)”
테러를 전쟁으로 규정하는가 안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 군부는 월남전 당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오류로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당시 행정부는 냉전과 제한전의 엄연한 차이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월남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미국의 월남전전략 p92)”
즉 테러를 전쟁이 아닌 일상의 위협상태로 보게되면 선전포고를 할 수 없다.
1998년 케네디연구소의 21세기통치전망프로젝트에 의해 1997년 설립된 재앙적테러에 대한 대학 연구그룹의보고서에는 재앙적 대테러의 위협을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례없는 피해를 가한다고 하여 전쟁과 구분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테러를 전쟁으로 규정했고 테러리스트라는 비대칭적 대상에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면서도 아프간에 대한 테러보복전쟁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전쟁양상에 대한 교리의 혼란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의 대게릴라전 정책을 보자.
케네디는 당시 육참총창인 데커가 게릴라에 대해 ‘용감한 군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게릴라들을 충분히 맞설 수 있다.’고 맞서자 케네디는 ‘게릴라와의 전투는 재래식 전쟁과는 판이하게 다른 특수한 기술’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대 게릴라전이라는 새로운 교리와전술의 필요성을 역설한 서한을 육군에게 하달한다. 군부가 보기에는 대 게릴라전이 전혀 새로운 임무인 대민활동, 학교 및 공공의료기관의 건설, 경찰에 대한 지원등’ 민사활동’과 같은 임무로 보였다. 이를 반영하여 68년판 작전 요무령에는 ‘미군의 근본목적은 정부의 각 기관이 합법적인 법률에 의해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거나 회복 도는 창조하는데 있다’고 기술되었다. 월남전 이전의 교리 즉 ‘적성국가를 지원하고 있는 군대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하여 격멸하는 것이다’라는 정의와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월103) 게릴라전 전술교리는 독자적으로 인기를 더해 갔고 ‘세련되고 복합적인 방법에 의해 대처해야 하는 각계각층의 관심이 집중된 과제가 되었다. 뿐 만아니라 이러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전문가들의 재능과 활동영역, 능력 및 경험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였기에 1967년에 이르러 각종 대 게릴라전문위원회와 특별대책 연구팀에서는 이견이 백출하여 마치 인민전쟁의 존속이 관료간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처럼 보였다.(월102)
테러전쟁이전인 테러대응에서도 이러한 혼선은 빚어진다.
애틀란타 올림픽 테러 당시 재앙적 테러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 지역 치안요원들로는 손쓰기 어려운 매우 심각한 사안일 수 있다는 판단에 대해 국방부가 취한 조치를 보면,
연방군의 배치를 승인하고 외국정부와의 관련 가능성을 찾기 위해 국방부 부장관이던 CIA의 도이치를 합류시킨다. 연방 보안관, FBI요원, 조지아주 경찰, 그리고 지방 경찰들이 합동작전을 폈다. 그러나 FBI도 그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다룰때는 사건의 일차적 책임이 지방경찰에게 있으므로 행동의 제약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경찰은 법집행에 대해 훈련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특히 민병대 법에 의해 법집행이 금지된 군부대와 일하는 것을 꺼려 한다.
게릴라전=인민전쟁이란 도식은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폭동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서 잘못된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게릴라들은 미군과 월남군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고 월맹정규군은 재래전으로 결정적인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군부의 결론은 월남의 국내문제는 월남인 자신들에게 맡기고 미군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만 전념하게 했다면 대 게릴라전 교리는 미군사작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라는 점이다.
비대칭전쟁으로서의 테러전은 게릴라전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교리의 혼란은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때문에 테러전쟁 교리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의 테러전이 상대국가의 정규군과 함께 동맹국가의 게릴라와도 싸워야 할 상황에 닥치면 이는 테러전의 약한고리가 될 것이다.
특히 게릴라의 형태가 이전과 같지 않고 더욱 ‘비대칭적’일 때 양상은 더 복잡해질 것이다.
2002.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