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미학시론2009/11/19
2009.11.21 오마이스쿨 2주년기념 세미나자료집에 들어갈 원고 ‘강화미학시론’입니다
강화미학시론
이시우
지역으로서의 강화
모든 체계는 자기 나름의 요소와 구조와 속성을 갖는다. 지역 역시 하나의 체계로 볼 수 있으므로 자기 나름의 요소와 구조와 속성을 갖는다. 한 요소는 다른요소와 관계 맺으며 구조를 이루고 구조는 다른 구조와 구별되는 독특한 속성을 갖게 된다. 속성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성격일 뿐이지만 이들 개별속성 중 본질적인 속성은 다른 속성들을 규정하는 본성이 된다. 지역체계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속성 ,즉 본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지역체계의 역사와 구조와 기능의 세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지역이라는 체계가 발생, 발전해 온 과정이며, 구조란 지역 요소들 간의 필연적 연관이고, 기능이란 지역이 다른 범주에 대해서 갖는 능력, 즉 영향력이다. 미학의 대상인 아름다움은 한 체계의 본성의 발현과정이므로 강화미학을 논하자면 강화지역의 본성이 우선 연구되어야 한다. 지역의 본성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한 지역이 처한 외적환경이나 외부체계와의 연관에 의해 변화한다. 체계적방법론의 동기를 제공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서문에 인용된 다음의 문장은 오늘날 강화의 본성을 접근하는데 의미 있는 방법론을 제공한다.
하나의 동일한 현상이라도 유기체들의 상이한 총체적 구조, 그것들의 개개의 기관의 다양성, 조건들의 차이등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예를들어 단군사상의 유행이 역사적으로 몇 번 있어왔다. 각 시기마다의 유행은 해당시기 강화의 전체구조와 주변환경등에 의해 전혀 다른 법칙이 적용되어졌다.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 단군사상이 강화지역의 중심사상으로 떠올랐던 고려시대는 몽골침략이후 원종이 원나라로 친조가기 전 민족의식을 고양할 정치적 필요성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조선중기 정제두의 학인들에 의해 단군연구가 활성화되었던 것은 중화적 보편성을 추구하던 주자학에 대해 조선의 특수성을 고민하던 강화양명학의 상황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오늘날 일각일었던 단군사상의 강조도 1990년대 중반 통일을 눈앞에서 준비해야만 하던 시기 통일이념을 모색해야 했던 시대상황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미적 대상으로서의 갯벌은 불과 최근까지 강화의 풍광에서 감추고 싶은 주제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연미정 스케치를 보자. “정자에 오르면 앞이 훤하게 트여있어 5월에도 덥지 않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박한 배 돛대의 위아래로 물고기와 갈매기가 노닐고, 눈이 휘둥그러질 만큼 강산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간혹 중국의 명승지 악양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굳이 흠을 꼽으라면 모래와 물빛이 그리 맑지 않다는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중국 악양에 비길 연미정풍경에서 탁한 갯벌만이 흠이었던 것이다. 갯벌에 대한 이같은 미적인식은 1990년대 이전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환경운동의 태동에 의해 갯벌에 대한 이미지는 바뀌기 시작했다. 환경운동이 불러온 가장 큰 미학적 성과중의 하나는 그 탁한 갯벌이 생명의 갯벌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갯벌은 이제 예술가들에게 연미정의 풍광보다 더 높은 수위로 올라섰다. 함민복의 시와 김애영의 노래에서 갯벌은 철학의 주제로 승화되었다.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강화미학이 요구되는 현재의 상황은 지역이란 관점에서 접근해보면 강화가 가진 지정학적 중요성, 다른지역을 압도하는 유라시아차원의 역사적 경험의 축적, 분단의 해방구와도 같은 한강하구의 가능성등에도 불구하고 지역차별의 대상으로 소외되어 왔다는 것이다. 전국적 차원에서 형성된 지역패권주의의 차별에 대해 강화지역은 저항적 지역주의를 내세워 정면돌파하는 대신 지역패권질서의 하위구조에라도 편입하려는 양상을 보여왔다. 증명되지 않는 지역이익환원을 앞세워 화력발전, 원자력발전에 이어 조력발전댐건설까지 논쟁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같은 패권지역의 하위체계로의 편입의지가 실감난다. 이런 지역문제를 적절히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역의 개념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지역개념
지역은 공간이다. 한축으로는 정치,경제,문화의 통합체계이고 또 한축으로는 그것의 역사,구조, 기능이 총체화되어 있는 공간이다.
우선 공간을 이야기해 보자. 첫째로 생리적인 공간이 있다. 화장실은 아무리 집단주의와 공동체를 강조하더라도 혼자만의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생리적 공간이 침해당하면 개인의 원할한 생리활동이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대인적 공간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공간이다.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을 보면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전기줄에 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또한 사람마다 개인의 장(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대인적 공간은 문화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우리의 지하철을 보면 기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기둥을 등지고 바깥쪽을 향해 보도록 되어 있다. 원심력적인 공간이다. 이에 비해 옛날의 멍석문화는 서로가 마주 바라보고 앉도록 되어 있다. 구심력적인 공간문화이다. 지하철의 기둥의자는 개인간의 공간을 최대로 확장시키고 서로 간의 간격을 벌여놓는데 목적이 있다. 멍석은 개인간의 공간을 최소화 하고 서로간의 간격이 쉽게 허물어지도록 되어 있다. 기둥의자와 멍석의 공간문화가 수평 비교 될 수는 없다. 억지로 개인적 공간을 없애버리려고 하면 공공연하게 대인간의 긴장과 투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취할 때 동료니까 거리낌 없이 같이 살자고 약속하고도 서로간의 생활 습관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갈라서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자주 본다. 전후 독일에서는 복구기간 동안 몇가족이 한집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장실이나 목욕탕을 같이 쓰는 문화가 부족했던 이들에겐 빈번히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이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사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정치적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셋째, 향토적 공간이다. 단일한 문화를 갖는 마을과 이질적인 문화를 갖는 마을간에는 맺어지는 관계에 따라 사회적 공간의 성격이 달라진다. 봉건시대의 공간은 지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평지를 따라 다니기 좋은 곳으로 길이 나고 바위나 산에 막히면 돌아가고 하는 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수지리는 봉건시대의 공간관을 대표한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생기며 이런 공간은 파괴 된다. 신작로는 전통적인 마을사회의 공간을 해체하고 파괴한다. 공간끼리의 긴장이 생기고 이는 곧 정치적인 문제로 되었다.
넷째, 지역적 공간이다. 이는 행정구역을 훨씬 뛰어 넘는 공간이다. 영남, 호남, 서울로 나뉘는 이들 공간에 우리는 익숙하다. 나머지 군소 지역은 이 공간에서 정치적 의미를 드러내지 못한다. 정치적 문제로서의 지역갈등, 지역문제는 이 차원에서 일어난다. 유럽의 지역주의(regionlism)는 이 지점에서 향토주의(localism)와 구별된다. 우리나라의 영호남 차별주의야 말로 전략적 의미에서의 지역문제이다. 정권차원의 통치행위가 민족의 문제든, 민주의 문제든 지역차별적 구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모든 지역에 똑같이 적용된 게 아니라 차별 적용되었다. 98년 이전까지 거의 영남 재벌만을 만들어 냈고, 영남 정권만을 만들어 냈다. 이 구조를 깨기 위한 전략이 정권 교체론이었다.
지역주의니 님비니 하는 현상은 공간을 둘러싼 심각한 정치 투쟁을 반영한다. 이제 사람들은 지역을 살아있는 유기적 공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자에게도 사업장이 속해 있는 지역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은 유기적으로 연관되면서 자신의 생활을 규정한다. 지역은 단순히 노조파업 때 주민들의 호응도를 이끌어 내거나 유지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역은 이처럼 중층적의미를 갖는 공간이므로 지역을 단순히 생활터전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공장도 학교도 모두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가 지배하는 생활 터전인가가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역은 문화공간이다. 지역은 형식적 본질에 있어서 공간이다. 그러나 지역은 반드시 내용을 가진 공간이다. 지역은 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통일을 그 내용으로 한다. 자연은 생활의 조건이고, 역사는 생활의 과정이며, 문명은 생활의 결과이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문화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지역은 문화공간이다. 한편 문화는 정치적 지배권의 행사에 따라 규정된다. 지역자치가 자치권력과 거의 같은 뜻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지역은 정권이 행사되는 문화공간이다.
지역을 정권이 행사되는 문화공간으로 정의 하는 것은, 지역자체가 전략적 단위임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지역은 민족문제나 계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위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역운동은 다른 범주와 연관되지만 본질적으로 독자적인 영역이다. 민족문제가 계급문제의 단순한 양적확산이 아니듯이 지역문제 또한 민족문제나 민주화 투쟁의 하부단위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논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독일 학계에서 지역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게르데스(Dirk Gerdes)는 ‘Local’ 이라는 말은 원래 ‘교회 종탑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평선내의 협소한 지역’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거대지역(Region)에 대한 대립어로 사용된다. 지역주의는 하위단위의 영토지역이 점진적으로 정치문제가 되어 지역들의 평가절상이 벌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장 큰 공식적 행정단위의 경계도 뛰어넘는 거대 지역이 이렇게 정치화되기 위해서는 이전에 이미 그 어떤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을 원칙적으로 문화공간’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문화의 차이는 일단 자연환경의 차이에서도 유래하지만 근대국가 형성이전이나 이후에 오랜 정치적 지배양식이 미친 역사적 영향이 결정적이다. 이런 관점에서도 지역(region)은 어원적으로 정치적 지배권력에 의해 야기된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나타내기에 적절한 말이다. 원래 지방과 통치를 동시에 뜻하는 라틴어 ‘ragio’에서 유래한 ‘region’은 중세에는 왕국 또는 지배영역을 뜻했기 때문이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regime(정권)’과 독일어의 ‘regierung(정부)’등에 아직도 그 뜻이 남아있다. 실은 지역주의도 통치권을 같이 나누자는 요구나 또는 자치권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다.
저항적 지역주의란 처음부터 민주이념적 정당성을 담보로 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유럽의 다민족국가에서는 민족운동과 섞여 대두되기도 하였다. 이 지역주의 용어의 본격적인 유럽적 확산은 서유럽에서 지역주의적 저항이 본격화되는 1970년대였다. 모든 저항지역들은 예외없이 이 지역주의를 지역차별과 중앙집권주의적 지역억압에 대한 투쟁을 구호화하는 긍정적, 이념적 기치로서 스스로 내걸었다.
서구국가들은 1970년대 이후의 거세진 지역주의의 압력으로 인해 현재 국가의 중앙집권성의 약화와 지방분권화를 초래하는 ‘지역화’ 또는 ‘지방화(Regionalization)’를 겪고 있다. 이는 국제관계 및 국제상업관계의 심화발전, 교통통신 및 국제교류의 확대로 인해 요구되는 국민국가의 세계화(Globalization)현상과 병행되어 진행되고 있다.
타국에 대한 주권의 배타적 선포를 본질로 하는 국가의 구조가 안팎에서 해체되어가는 경향이란 점에서 일관성을 가진다. 오늘날 지방화와 세계화는 종래의 국가에 대해 가해지는 중대한 수정압력인 셈이다.
서양에서 민주주의의 어원인 데모크라시는 고대 희랍의 Demos(지역민)+Cracy(정치)의 합성어이다. 민주주의는 집단적주체로서의 데모스, 즉 전출입을 통해 거주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거주지 개념에 기초한 근대적 지연공동체에 기초한다. 이웃사촌이란 정확한 데모스적 인간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거주지보다 출생지에 대한 정치적 귀속성이 우세한 사회에서는 진정한 데모스와 데모크라시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강화의 오랜 문제중의 하나인 원주민에 의한 이주민의 배타는 거주지가 아닌 출생지를 앞세우는 관념이며,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데모스는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다. 300년 전부터 강화에 살고 있는 사람은 300년 된 이주민일 뿐이며, 한 달전에 강화로 이사 온 사람은 한 달된 원주민이라는 논리는 데모스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지역 집단들 간의 문화적 차이는 왜 소멸되지 않고 강화되는가? 이는 접촉부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헤치터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겔너(Ernst Gellner)가 민족형성과 관련해서 적용했던 문화이론을 원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어딘가에 터잡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전체적 행위 및 표현양식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과 함께 지니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문화는 그의 정체성이 된다. 문화에 의한 사람들의 분류는 물론 민속성(ethnicity)에 의한 분류이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임’은 필연적으로 곧 어떤 민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주변부지역에서의 문화적 지속성은 국가의 목적과 대립되는 사회화 가능성과 정치조직을 제공하는 무기로 간주될 수 있다. 막스베버는 뚜렷이 구별되는 생활양식과 문화를 갖는 집단들을 사회적 명예와 위신의 위계질서 안에서 상이한 서열을 갖는 ‘신분’으로 규정한 바 있다. 서울이나 영남등 패권지역의 사회적 연대유형과 주변지역의 연대 유형간의 차이는 베버의 신분개념에 가깝다.
불평등한 자원배분이 상이한 출신지역과 문화적 배경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언어, 방언, 액센트의 미세하되 선명한 차이등과 같이 관찰 가능한 문화적 차이에 기초해 있다면 불리한 지역집단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불평등대우에 대한 응분의 반응으로서 자신들의 문화를 패권지역집단과 동등하거나 이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주장하고 나설 개연성은 늘 존재한다.
만약 문화적 특징들이 차별화되어 동원 가능한 경우에는 주변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을 별도의 집단 또는 민족으로 느끼기 시작하고 자치와 독립을 모색할 강한 유인과 수단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소외된 주변부지역의 문화적, 미학적 특징은 지역의 본성을 드러내고, 지역본성에 대한 자각은 패권지역의 지배질서에 대항하는 저항의 가치를 생산하며, 다른지역과의 차별에 반대하고 차이를 인정하여, 지역등권의 질서를 정착 할 수 있도록 하는 이해와 관용을 제공한다. 이같은 의미에서 지역본성의 발견과 자각은 민주주의를 지역화, 세계화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지역의 본성은 지역의 역사와 구조, 기능의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강화역사와 미학정신
강화역사를 통해 나타난 미학정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강화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중요인물과 그들의 사상미학의 특징을 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분석한 인물들의 사상미학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인간주체의 자각을 바탕으로 당대에 논쟁되던 사상들을 회통했다는 점이며 이같은 자득, 자각이 사회적으로 표출될 때에는 농민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논리로 발전시켰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자득과 조화’의 미학이라 하겠다.
이규보
강화에 출현한 사상,미학의 역사에서 단연 으뜸은 이규보이다. 이규보는 고려중기 대문호요 시호였다. 그의 학문 본령은 유학에 있었으나 불교와 도교에도 남다른 소양을 지녔으며 제가백가 역시 통달하였다. 불교는 일찍부터 접하고 평생토록 불문에 출입하였다. 그에게 있어 유교는 경세經世 측면에서, 불교는 심성수양 측면에서, 도교는 구세救世 측면에서 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이면에는 삼교일원설이 크게 작용하였던 듯하다. 그는 일찍이 박환고에게 보낸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스승께서는 부처를 전하고 師傳甘蔗氏
나는 노자를 계승하였다 我繼仙李君
노불은 본래 하나의 기러기 釋老本一鴻
어찌 오리제비를 나눌 필요가 있는가 鳧乙何須分
또한 72세 되던 어느 날 한 고관이 방문하여 불경을 독송하는 자신을 힐난하자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유교와 불교는, 이치의 극은 같은 일원이라, 무엇이 잡박하고 무엇이 순일할까, 괴이하도다, 그대의 논한 바여
윗 시의 논지가 도불일원道佛一源이라면 아래글의 논지는 유불일원儒佛一源이다. 도교와 불교 유교의 뿌리를 하나로 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홍명집弘明集, 광홍명집廣弘明集등에서 보이는 삼교일원설과 연관되며, 가깝게는 북송 소식蘇軾의 삼교조화론등과도 일정한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운 최치원의 철학사상과도 연결된다.
이규보 철학사상의 특징은 유불선 삼교융화에 있고, 삼교융화사상의 기저에 민족고유사상이 있다. 그리고 삼교사상은 인간주체의 문제를 통해 서로 회통내지 귀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북한의 조선철학사에서는 고려 전 시기를 통해 관념론을 배격하고 유물론적 철학사상을 고취한 대표적인 학자로 이규보를 들었고 동국이상국집의 문조물問造物(조물주에게 묻노라)등을 분석하여 이규보의 氣철학을 증명하고 있다.
이규보는 사상가이자 시인이었다. 시로 사상을 표현했다고 할 만큼 그의 저술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그런 이규보였기에 그의 문학이론은 우리예술사에 나타난 수준 높은 첫 번째 미학이론이었다. 이규보의 문학론은 이인로의 그것과 비교된다. 이른바 신의론新意論과 용사론用事論이 그것이다. 김시업은 이규보의 신의론은 시의 본질과 시창작태도, 시인의 사명, 문학평가의 타당성, 시론 전반에 대해 새롭게 정립한 이론이고 이규보는 신진사대부를, 이인로는 구 귀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서 문학론도 대립적이라 했다. 조동일 역시 신의와 용사는 분명한 문학관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규보의 신의론은 그의 독창적인 자주적 문학사상이라 했다. 작품을 형상화시키는 창작방식은 이인로가 탁물우의託物寓意를 이규보가 우흥촉물寓興觸物의 방식을 중요시하였다고 하였다. 이규보문학론의 意는 철학개념인 氣와 연관하여 연구되며 발전하였다.
이규보는 인위적인 조탁과 기교를 배격하고 시인의 진실된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현실지향적인 문학이론으로서의 이규보문학의 특징은 창작원천으로서의 개성, 창작내용으로서의 진실성, 창작방법으로서의 창신성, 작품품격으로서의 심미성에 있다.
이규보 미학에서 표현된 인간주체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으로 농민들의 핍박한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해마다 받는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 몸에 몇점의 살이 남았다고 이다지도 모질게 긁어모아 마지막 피마저 말리려드는가”와 같은 표현은 농민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의 핵심주체인 농민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비판과 저항을 넘어 사회의 주인임을 자각하는데서 빛을 발한다.
한 알 한 알을 어찌 가벼이 여길건가 一粒一粒安可輕
생사 빈부가 여기에 달렸는데 係人生死與富貧
나는 부처처럼 농부를 공경하노니 我敬農夫如敬佛
부처도 못살리는 굶주린 사람 농부만은 살리네 佛猶難活已飢人
기쁘다! 늙은 이 내 몸 可喜白首翁
또다시 금년 햅쌀 보게 되니 又見今年稻穀新
죽더라도 부족할 것 없네 雖死無所嗛
봄농사의 혜택이 내게까지 미침에랴 東作餘膏及此身
‘부처도 못살리는 굶주린 사람을 농부만은 살린다’는 대목에서 농부를 부처보다 더 높은 반열에 올리며, 사회의 주인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생산주체라는 자각을 보여준다. 인간주체에 대한 자각을 중심으로 사상을 통일하며 사회적으로는 생산주체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이규보의 현실주의적심미관은 지금도 그 수준을 넘보기 힘들게 하는 하나의 경지를 보여준다.
함허 기화
함허의 생애는 성균관 유생으로 유학에 침잠했던 전반기와 출가이후 승려로서 삶을 마쳤던 후반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는 사서집주, 주자가례, 근사록, 대학연의등을 학습하여 유교의 기본원리를 충실히 이해하였다. 또한 여말선초 혼란기의 현실을 파악하고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21세에 출가하여 관악산 의상암에서 유교의 인仁과 불교의 불살생不殺生에 대한 모순을 깊이 탐구하였다. 불교의 불살생과 유교의 인에 대한 확연한 이해는 그로 하여금 사상적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후기 1391년(공양왕3) 연복사탑 중창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벌어진 유학자들의 불교비판에 대해 함허는 『현정론顯正論』과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을 통해 대응했다. 그의 비판은 단순히 불교옹호 차원에 머물지 않고, 금강경이 지닌 사상의 현실적 실천으로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 일치점과 치세와 교화수단으로서의 조화를 모색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가 ‘마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교의 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도는 깊이의 차이가 있으므로 유교는 자취를 쫓아갔고, 불교는 참에 계합契合하였으며 그 둘 사이에 제접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구실을 하는 것이 도교의 도라고 하였다. 치세의 측면에서는 유가의 오륜과 불교의 오계를 비교하여 일치성을 설명하였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인의 단서를 여는 것이며,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의, 음란하지 않는 것은 예,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은 신, 술 마시지 않는 것은 지의 단서를 여는 것이라 하여 불교의 오계가 인의예지신을 여는 단서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상통성을 우주본체론으로 설명하였다. 불살생은 묘명진성妙明眞性으로 불도不盜, 불음不淫, 불망不妄, 불음주不飮酒를 태동시키는 근본이고, 나머지 사계四戒는 본성인 인의 작용 즉 현상으로 인식하였다. 마지막으로 함허가 제시한 유불상통성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역의 원리와 삼신불三身佛의 상통성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太極, 즉 무극無極은 담적허명湛寂虛明하여 십허十虛의 세계를 포괄하므로 불교의 법신불法身佛과 서로 통한다. 다음으로 태극에서 태초太初(일기가 발한 상태), 태시太始(기가 전시한 상태), 태소太素(영묘함이 순수하고 참됨)가 나오는데 이 가운데 태소에서 음양의 양의兩儀가 나누어지는 이 단계까지가 불의 보신불報身佛에 해당된다. 그리고 음양이 분리되어 24절기가 생성되고 서로 착종하여 오행이 생성된다. 이 오행이 생하여 나타나는 온갖 조화의 무궁함이 곧 화신불化身佛에 해당된다고 했다. 더욱이 그는 유석질의론에서 주역의 우주본체론과 불교의 삼신불사상을 비교하여 상통성을 거론했을 뿐아니라 삼신불의 수인手印을 주역의 무극과 음양오행에 견주어 체體.상相.용用으로 분리해서 각각의 내용과 원리를 치밀하게 설명하였다. 왼손과 오른손을 음과 양에, 그리고 수인의 구부리고 편 것을 천수天數와 지수地數로 표현하였으며 각각의 손가락에 오행을 접목시켜, 주역의 우주본체론과 불교의 삼신불이 그 외적인 형태는 상이하지만 근본적으로 상통함을 설명하였다. 결국 함허가 이용한 체.상.용의 논리는 유교와 불교가 인간중심주의, 현세주의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을 궁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유불이 갖는 통일성 지향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에 나타난 반야사상般若思想의 이해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다만 상相이 허망한 것임을 요달了達하여서 객관(能)과 주관(所)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상을 떠난 것이지 따로 상이 있어서 가히 떠나야 될 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함허는 유학자들의 편견을 금강경에서 집착의 원인으로 설명한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의 네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즉 유학자들이 성리학 우위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한 것은 능소能所, 시비是非, 존망存亡, 득실得失을 야기시키는 상相의 결과로 생각한 것이다. 한편 ‘능과 소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상을 떠난 것’이라고 한 위의 인용문은 상을 떠난 네 개념의 무상無相,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는 특별히 미학이론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시 법왕가에서 미학이론의 전제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마다 예전처럼 비추는 차가운 빛 門門依舊放寒光
지금 여기 떠나지 않고 사방을 비추네 不動今時照四方
물에 빠진 검을 찾고 있는 그대여 爲報舟移求釰客
뱃전에서 찾아보라 검은 거기 없는 것을 不須廻首覓忙忙
예전부터 비추는 빛은 보편을 상징하며 지금여기는 구체성을 전제로 하는 미적상황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에서 사방을 비추고 있는 빛은 보편과 구체, 불변과 변화의 통일인 셈이다. 다음 연에 등장하는 물에 빠진 검의 비유와 무아의 강조는 칸트가 판단이성비판에서 언급한 미적 판단의 특징인 무사심성, 무관심성과 상통한다. 그는 삼교회통사상을 통해 미학에도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원교 이광사
송대 유학자의 시대정신은 학술측면에서 보면 불교에 빼앗긴 사상계의 주도적 위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송명이학의 시대정신의 대표가 선禪의 극복이라는 점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오해는 주자와 양명뿐아니라 조선의 유학자들까지도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선학의 극복은 명대 양명학자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정신이지만 명대 양명학자의 시대정신은 송대와는 달리 나타나는데 자득自得과 조명론造命論의 강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명대의 주자학연구에 있어서 명사明史 유림전儒林傳에 “선유(주자학)들의 가르침을 지켜 잘못이 있어도 감히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로지 주자학을 답습할 뿐 주자학에 대한 창의적 연구를 하지 않았다. 이런 경직된 학술 풍조는 진헌장陣獻章에 의해 타파되기 시작하였고 왕양명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비평받았다. 양명은 “양주와 묵자 그리고 노자와 부처의 도는 성인의 도와 다르지만 그래도 자득自得하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자득개념의 시작은 양명이 아니라 송대의 육상산부터로 봐야할 것이다. 상산은 “맹자를 읽고서 마음으로 자득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도덕의지라는 주체성을 절대적인 표준으로 삼고 있는 공자와 맹자의 철학과도 일치한다. 양명의 자득정신 강조는 사상의 발전을 촉발시켰고, 또 학술에 생기를 불어넣어 유가 본래의 정신인 실천위주의 학술풍조를 조성하였다.
후에 왕간은 조명론을 내세워 시대정신을 계도하였다. 신분의 상승과 하강이 자유로운 사회, 혹은 그것이 보장된 사회에서 구성원은 희망과 우환의식을 갖고서 자기 발전을 추구한다. 조명론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이념이다. 왕간의 시대는 농촌에서 전호와 지주의 수평적 관계로의 전환이 있었고 도시에서 고용주와 기공의 고용이 수평적 관계로 변환하던 때였다. 왕간은 이러한 시대흐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서 “재능의 천분은 비록 하늘이 결정해 주었지만 운명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개조할 수 있다”는 조명론을 주장하였다. 자득과 조명론은 내적으로는 유학의 특성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외적으로는 신분질서에서 능력위주의 사회발전의 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양명학을 계승하여 스스로의 미학이론을 발전시킨 인물로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이광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국진체는 주자학적 서론가인 이서에서 출발하여 윤순을 거쳐 양명학적 서론가인 이광사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동국진체의 발전과정은 왕희지를 전범으로 하여 서예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왕희지를 극복하여 서예의 자득과 개성을 구현해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동국진체의 미학적 기반은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시작되어 양명학적 미학사유로 전환함으로서 다져졌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서예의 미학적 지향은 주자학적 심미사유를 일정부분 벗어나 양명심학적 미학사유를 기반으로 自得과 眞의 서예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것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양명심학적 정신은 규범적이고 합리화된 의고擬古주의에 극렬히 반대하고 인격의 독립과 개인의 심미감수를 중시함으로써 문예전반의 자득을 심화시켰다. 서위徐渭가 왕세정王世貞을 비롯한 문학복고주의자들의 詩作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 대표적이다.
자신의 자득한 것에서 나오지 않고 다만 남들이 일찍이 말한 것을 훔쳐다가 말하기를 ‘어떤 편은 어떤 체계이고 어떤 편은 또 그렇지 않고, 어떤 구절은 어떤 사람과 비슷하고 어떤 구절은 또 그렇지 않다.’고 하니 이것은 비록 지극히 공교롭게 꼭 닮긴 했으나 이미 새가 사람의 말을 배운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시 의고주의자들이 옛사람의 시를 표절하여 그럴싸하게 시의 형식만 갖추는 것을 앵무새가 사람의 말소리를 흉내 내는 것에 비유하여 자득이 없이 옛 법에만 머물렀음을 비평하였다. 이광사 역시 가장 힘주어 비판한 것은 왕세정과 이반룡으로 대표되는 명대 의고파의 문장이었다. 그 논거는 육경의 문장처럼 가장 훌륭한 글은 모두 실천을 통한 깨달음 즉, ‘궁행심득躬行心得’으로 자득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문장의 성함은 육경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는 모두 궁행심득에서 나와 말로 표현된 것이다. 공교로움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지극히 정미하다….자득에서 말미암았고 외부에서 구한 것이 아니었기에 육경은 모두 같은 의리를 담고 있지만 일언일구도 서로 힘입지 않았다.
자득의 강조와 의미부여는 비록 소론계열 양명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김창협의 문인으로 소론 치죄를 담당하기도 했던 도곡 김의현은 왕양명의 철학은 부정하면서도 문장은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왕양명의 학술은 비록 그릇되었으나 그 문장은 뛰어나고 슬기롭다. 이것저것 따오고 남의 것을 벗겨오는데 힘을 쏟지 않았으니 모두 가슴에서 나온 自得의 글이다.
자득에서 비롯되어야만 진시眞詩가 되고 진시가 되어야만 자기 진정眞情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문학에서의 진시와 회화에서의 진경산수, 서예에서의 동국진체가 곧 반의고주의反擬古主義에 대한 비판위에서 천기天氣와 성정지진性情之眞을 통해 성령주의性靈主義, 진정주의眞情主義, 자득自得의 정신이 발휘된 것이라 하겠다.
이광사의 자득의 미학은 조선후기 주자학의 안으로만 침잠하던 수신修身, 수가修家의 폐쇄적인 주체지향에서 민족주체의식으로 확대되어 나아간다. “독실한 실천에도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중국을 배울 필요가 없다. 선인의 덕행이 가승家乘에 있으니 밭 갈고 김매듯 받들어 행하라”고 했듯이 자기내면에 대한 신뢰가 집안에 대한 신뢰로, 집안에 대한 신뢰가 자존의 민족주체의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원교의 기질론은 고담준론이 아니라 그의 생활에서 유래한 것임을 벗인 김광수와의 관계에서 읽을 수 있다. 원교와 친구인 성중成仲 김광수金光遂(1699~1770)는 기질이 너무도 달랐다. 그런데도 둘은 말이 없어도 편안한 막역지우였다.
“성중은 세상에 다른 벗이 없고 오로지 나 한 사람과 친하다. 나 또한 다른 벗이 없고 아무리 찾아봐도 오로지 성중 하나와만 친하다. 사람이 서로 친해지려면 반드시 기질과 취향이 서로 맞아 떨어지는 사람에게 향하게 마련이다. 그렇건만 지금은 서로 반대이면서도 유독 친하게 지내다니 참으로 이치에 어긋난다 하겠다. 내가 이런 의문이 들어 성중에게 물었더니 성중은 까닭을 모르겠다고 하였다. 성중이 다시 내게 그 까닭을 물었으나 나도 모르겠다. 나와 성중이 이유를 모른다면 세상사람 누군들 그 연유를 알겠는가? 나와 성중 그리고 세상사람이 알지 못하기에 서로 깊이 사귀어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닐까?”
원교는 “기질을 고치려 하지 않고 기질에 맡겼다”고 할 수 있을까. 노자와 장자의 기에 대한 사유는 “리의 표준을 향해 가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자체 내에 표준을 설정해줌으로써” 이원의 분열을 막고, 소통과 합일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노장은 분열의 기원이 나와 남을 가르고 자기밖에 표준을 설정함으로써 생겼다고 생각한다. 근원이나 이념으로서의 리가 없어야 기가 평등해지고 그 평등하에서 사물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하고 기맥이 열려간다고 생각한다. 이광사의 시문은 ‘기후이방대氣厚而力大’하고 ‘구기어중句奇語重’한데 문장은 시 보다 더 뛰어나 서예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후세에 전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교의 양명학은 인물성동이론의 동론과 궤를 같이 하고 기질성의 선을 말하는 녹문임성주의 그것과 논의를 같이하고 있다.
원교 기질론의 백미인 내도재기來道齋記는 장자가 그리는 “道안에서 노니는 친구들” 그리고 “물고기의 즐거움을 완상하는 장자”의 풍모를 닮았다. 이점에서 노장과 양명학은 방향을 같이 하는바 있고, 그래서 양명학이 노장 선학과 더불어 하나로 묶인다. 양명학 자신은 이를 삼교통합이라하여 긍정적으로 보고, 주자학측에서는 그래서 이단이라고 한다.
원교는 그저 방심, 즉 집나간 마음을 순간의 자각을 통해 불러들이는 것에 주력하라고 말한다. 그는 역시나 기의 사람답게 맹자가 말하는 양기養氣를 강조한다. 그것은 마음의 불건전한 과잉 이를테면『大學』에서처럼 불합리한 호악好惡, 우환憂患, 공구恐懼를 덜어낼 뿐, 특정한 기대를 갖고 마음이나 기질을 교정하거나 한사코 붙들고 있거나 억지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기마음의 인의 자연성을 믿고(必於仁), 그것이 어긋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을 치심治心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원교는 이것이 안자와 공자가 걸은 즐김의 길이었다고 부연했다.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구절이 있다. 아는 것은 객관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요. 좋아하는 것은 가치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며, 즐기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체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아는 것이 인식론에 대입된다면, 좋아하는 것은 가치론에, 즐기는 것은 미학에 대입된다. 원교가 즐김을 통해 사상과 미학을 통합시키는 바탕에는 관념적 이가 아닌 물질적 기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사상이 있다하겠다. 주자학을 숭앙하던 서인계열이면서도 관동별곡 같은 한글가사 창작을 통해 리학理學이 아닌 기론氣論에 도달했던 정철과 마찬가지로 원교가 양명심학에서 기론氣論으로 사상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된 것은 그가 예술과 미학을 통해 철학하는 자였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이광사의 기질의 긍정에 입각한 미론은 아들 신재 이영익에 이르러 다시 주자학으로 귀결된 반면 이충익을 통해서는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충익은 이광현李匡顯의 아들이었다가 1760년 무렵 함경도 갑산으로 귀양 가있던 이광명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갑산과 서울을 오가며 양부를 모시다가 양부가 죽자 강화로 운구하였다. 그뒤 무려 스무해를 유랑하다가 노년에야 강화 초피산 아래로 다시 들어왔다. 이충익은 허학을 배격하고 실학을 이룰 것을 일생목표로 삼아 가설假說이라는 논문을 지었으며, ‘노자’를 애독하여『談老』를 남겼다. 1768년(영조44)무렵에는 승려 혜운慧雲과 함께 마니산 망경대폭포아래에 7간 암자를 지었다가 관가의 벌을 받을까 두려워 스스로 철거하였다. 이광사의 아들이자 종형인 이영익이 이를 조롱하는 시를 써보내자 이를 해명하는 시를 써서 답한다. 그 첫 수에 이충익은 다음과 같이 썼다.
폭포암의 병든 사내 瀑布庵中一病夫
푸른 하늘이 날 위해 머리를 덮어주네 靑天與我盖頭顱
문 앞에 좌선해도 알아주는 이 없으나 門前露坐無人識
삼승의 즐거움을 이미 깨달았도다. 己得三車自在娛
열네번째 수에는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계산을 배워 건넌 뒤에는 그것도 버릴 일 捨筏稽山己度人
삼승의 때맞춘 가르침도 결코 참이 아니네 三乘時敎摠非眞
연기 따라 설법할 일 자취는 따져 무엇 하나 隨綠導說何論跡
문 닫고 문을 엶도 다만 이 한 몸의 일 閉戶開門只一身
이충익 역시 주자와 양명과 선학을 넘나들며 자기의 기준에 따라 자득하여 사상회통, 원융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같은 주체의식과 자신이 처한 불우한 생활조건은 사회적으로 생산의주체이면서도 핍박받던 농민들에 대한 연민으로 나타났다.
이충익은 오랫동안 나무뿌리로 연명하여야 했지만 현실의 부조리에 그냥 눈을 감지는 않았다. 백성과 나라에 대해 지극한 정을 지녀서 술을 마시고 나면 시절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백성과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고통을 공유할 수 있었기에 논쟁이 아닌 눈물로 시대와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솔가루 섞어 죽을 만들어, 여러 번 삼키며 날마다 두 끼만 먹는(屑松拌飯粥數咽日再食)궁핍한 생활을 하며 이충익은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현실을 목도하고 백아곡획도白鵝谷獲稻의 시에서 이렇게 인민의 삶을 애도하였다.
지난가을 농부가 굶어 죽은 뒤 先秋饑死耕田夫
수확하는 자는 누구 며느리와 시어미 獲者爲誰婦與姑
몸 죽어도 이름은 군적에 남아 死身名在軍書裏
인두세를 쌀로 내야 한다나 頭米還須送稅租
결과의 성패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의 진실함을 추구하던 강화학파의 가치는 이념,논리적이기 보다는 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주체의 자각을 통해 제 사상을 통합하고 그것을 다시 사회적 주체인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으로 옮겨간 것에서 강화학파 사상미학의 정수를 본다.
이동휘
자신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당대에 소통되던 철학과 이론을 체화하는 자득정신은 근대의 성재 이동휘선생에게로도 이어져 1920년대 독자적인 민족해방이론과 유라시아의제였던 레닌의 ‘민족식민지테제’의 창조를 주도한다. 이동휘는 강화진위대장에서 강화 보창학교설립자로 의병봉기의 배후로 활동하다 일제에 의해 쫓겨나다시피 만주와 시베리아를 전전하며 풍찬노숙하면서도 독립운동을 지도한 탁월한 지도자였다.
러시아는 제1차대전 직후 협상국의 지지를 받아 독립한 폴란드의 키에프 침공에 맞서 전쟁의 와중에서 다급하게 코민테른 2차대회를 소집하였다. 이 대회는 코민테른 역사상 그 의의가 높이 평가되는 대회였다. 1920년 7월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코민테른2차대회는 ‘민족‧식민지문제에 관한 테제’등을 채택하고 결의하였다. ‘민족‧식민지문제에 관한 테제’는 조선을 비롯한 중국과 인도등 식민지, 반식민지국가들에게는 중대한 결정을 내포하고 있는 테제였다. 3.1운동과 5.4운동을 비롯한 식민지,반식민지에서 출현한 민족운동은 식민지지배체제의 위기를 초래했고, 점차 아시아의 민족운동이 세계의 혁명운동을 좌우하는 주요세력으로 등장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이 민족‧식민지문제에 관한 테제가 제출된 시대적 배경이었다. 1920년 7월~8월 ‘민족‧식민지문제 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한국에서는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사회당에서 박진순이 대표로 참석하였다. 민족‧식민지문제 소위원회에서 주목할 내용은 레닌과 인도출신 공산주의자 로이와의 논쟁이었다.
로이는 소위원회에서 레닌과 식민지국가의 성격과 민족해방운동에서 민족부르조아지의 역할 그리고 동양제국의 혁명운동의 중요성등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벵골의 혁명적 민족주의자라는 배경을 갖고 있는 로이는 인도의 국민회의당과 협력해야만 한다는 전망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는 식민지 부르주아지의 상대적 허약함을 감안할 때 대중은 처음부터 사회혁명과 외국자본주의의 전복에 찬성하고 혁명정당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이는 “식민지의 부르조아민주주의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민족적 정신의 발전을 재촉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지만 이 민족적 정신이 대중의 계급의식의 각성을 방해할 것이다” 라고 하여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의 적극적 의미보다는 혁명적 당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코민테른2차대회 직전인 1920년 7월초에 쓰여진 박진순의 ‘혁명적 동방과 코민테른의 당면임무’(이하 ‘당면임무’)는 1919년 4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2차당대회의 계급노선과 국제주의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면임무’에서 박진순은 이전논문인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표명했던 식민지혁명 전략 가운데 몇가지 중요한 인식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동방에서 2단계혁명론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민족주의자가 이끄는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이고, 두 번째 단계는 봉건체제에 예속된 농민대중에 의한 농업사회혁명이었다. 여기서 박진순은 이전의 혁명론을 수정하여 부르조아민족주의자에 대해 첫 번째 반제부르조아혁명단계에서 그들의 주도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의 상해임정 참여라는 현실 정치지형의 변화와 더불어 한인사회당의 민족부르조아지에 대한 전술이 수정되었음을 의미했다.
또한 박진순은 ‘당면임무’에서 농업혁명론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였다. 아시아에서 산업프롤레타리아의 미약함 때문에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이 곤란함을 인정하고 농업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사회로의 길을 제시하였다. 이는 레닌이 1920년 7월26일 ‘민족‧식민지문제에 대한 소위원회보고’에서 언급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박진순은 서방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하에 자본주의를 경과하지 않고도 점차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로이와는 상반되는 견해였다. 박진순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과 아울러 ‘서방과 동방의 공동투쟁’에 의한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농업혁명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로이의 ‘동방혁명중심론’과 분명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었다. 박진순의 인식은 한인사회당과 1921년 창립되는 고려공산당노선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극동민족대회전후로 레닌을 만난 이동휘일행과 김규식일행의 회고에 의하면 레닌의 답변은 로이가 주장했던 좌경된 노선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동휘에 따르면 레닌은 공포수단은 쓰지 말 것, 일본의 무산자와 결합할 것, 대중에게 선전으로 각오시킬 것의 일반적인 혁명이론 외에도 3.1운동에서 조선민중이 일본이 부설한 철도를 잘 활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조선운동에서는 민족운동이 첫 단계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다. 레닌과의 회담은 이동휘에게 있어서는 한인사회당과 상해파의 입장이 옳았음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철수와 한형권의 회고에서도 이점은 확인된다. 김철수에 따르면 상해파는 이 단계에서도 타도 일본제국주의 민주혁명이라는 정강이 옳음을 주장하였고, 이르쿠츠크파의 사회주의 혁명정강은 좌경이라고 반박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레닌은 상해, 이르쿠츠크 양파의 정강을 보고 “상해에서 세운 정강이 옳다. 식민지의 당이 어찌 바로 사회혁명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르쿠츠크파의 좌경적 오류를 지적하였다는 것이다.
김규식, 여운형 일행이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을 때 레닌은 로이의 입장보다 본래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김규식, 여운형과 일행은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와 한국독립운동간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인데 레닌의 말은 최소한 이들에게 안도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몸담고 있던 독립운동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운동과 상충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 운동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확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파가 민족의 주체적인 상황과 역량을 무시한 채 볼세비키사회주의혁명노선을 추종한 것과 달리 이동휘의 상해파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의 현실적 주체역량을 바탕으로 오히려 레닌까지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동휘의 비서 박진순이 정치를 이론화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면 이동휘는 현실을 정치화함으로서 박진순의 이론적 비약을 가능하게 했다. 이동휘가 현실에 대한 미학적감수를 바탕으로 판단하므로서 당대 논쟁되던 혁명이론을 주체적 입장에서 자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족과 식민지문제에 대한 테제’는 향후 2차대전까지 소련을 유라시아지정질서의 주도자로 만든 의제였다. 1922년 11월 코민테른 4차대회에서 서구에서의 ‘노동자 통일전선’과 더불어 식민지.반식민지 동양에서의 ‘반제 통일전선’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일어나는 혁명운동 과정 속에서 민족주의자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과 아직은 규모가 작은 중국공산당이 통일전선을 이루는 1924년 국공합작으로 귀결되고, 식민지조선에서는 1927년 신간회의 창립을 가져왔다.
한편 한국전쟁당시 강화 양민학살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강화향토방위특공대의 화도면대장 윤성근의 행적은 이동휘의 정신계승이란 점에서 주목을 끈다. 강화사의 기록을 보자.
윤성근은 이동휘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화도면에 보창학교를 설립한 윤명삼의 아들이다. 만주 봉천대학을 수료하고 향리로 돌아와 청년운동의 기수로서 화도면 면장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힘을 기울인 의혈에 넘친 지사였다. 그는 항상 정의와 결백을 신조로 하며 불의와 사우는 과감한 의리의 사나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 6.25동란에 즈음하여 독자적으로 화도특공대를 조직하고 활약하다가 모종의 정보를 듣고 단신으로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강화읍에 잠입하여 적진 가까이 정세를 살펴보고 특공대로 하여금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퇴각시켰으며, 또한 강화특공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훈련을 쌓은 공산군과 대항할 수 없게 되자 작전상 전원 삼산면 석포리를 거쳐 석모리로 일시 후퇴하여 대기상태에 있었다. 이때 삼산 매음리 앞 들판 위엔 이미 남녀노소 40여명이 총살되어 잇는 참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특공대에 가담하였든 낙오군인이 지방 불온분자의 사주에 의하여 대량살상을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이윽고 그는 삼산면 사무소 별실에 면민 50여명을 구금시키고 즉결시키려는 특공대의 비인도적 계획을 알게 되었다. 한편 그곳 면 특공대장은 위 무지한 면민을 구출하여 달라고 애원하는 말을 전하여 왔다. 그는 곧 강화특공대 책임자와 면담 1시간여의 논쟁을 벌인 끝에 별다른 사고를 내지 않고 석방시켜 생환시켰으니 그 순간 이분이 없었다면 큰 참극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뿐이랴 강화 서남단 고도 장봉도로 피난갔던 화도면민 300여명이 굶주림에 지쳐 아사상태에 놓여져 있는 사실을 알고 면 인민위원장과 단독 면담하고 박해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고 식량을 갖고 건너가 구출하였으며 특공대가 무단히 삼림을 남벌한 사건이 있어 길상면민 유지 몇 사람과 충돌한 사실로 말미암아 주민 수명이 무수한 고문을 받고 구속되었다. 이는 특공대 책임자와 면담 격론 끝에 석방시키도록하여 사경에서 구출하였다. 생각하건대 법질서가 없는 혼란한 시기에 수다한 인명이 억울한 죽엄을 얻는 것은 비일비재일 것이다. 그러나 단독 용렬하게 싸워서 여러사람을 곤경에서 또는 죽엄의 순간에서 구출하였다는 것은 특히 찬양할 바 있다.
윤성근의 행적은 마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자기 공장 직원들을 살려내기 위해 희생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전쟁중에 동네 우익청년들이 주민들을 좌익으로 몰아 학살하려했을 때 그들을 설득하여 살상을 막았던 철원제일감리교회 서기훈목사의 사례를 비롯하여 전쟁중에 보기 드물게 일어났던 이러한 용기는 당시로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하여 화도면에는 면특공대와 소년단 150여명이 조직되어 있었다. 특공대장 윤성근은 청년방위군출신으로 특공대 조직과 관련하여 형 윤재근과 상의하였다. 화도면 소년단원이었던 한00의 진술에서 좌익성향의 김00이 9.28수복 후 개풍으로 피신하였다가 가족의 생사를 염려하여 1.4후퇴 시 화도로 왔었고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윤성근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돌아간 것만은 확인하였다. 그런데 화도면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좌익성향의 김00과 우익성향의 윤성근면특공대장이 서로 사상은 달랐지만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듣고 존중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념과 기질을 달리했음에도 서로를 존중한 대목은 이광사의 기질과 닮아있으며 이념이나 이론을 앞세워 학살을 자행했던 강화 12개면 특공대와 달리 화도면에서만 기적같이 학살이 없었다는 것은 윤성근이 이동휘의 정신을 계승한 가계에서 보듯 이념형 인간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강화사상미학의 준령을 형성했던 위 인물들 간에는 직접적 사승관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주체의 입장에서 자득의 정신으로 사상담론을 통일,조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자기주체에 대한 자득을 확장하여 사회의 생산주체와 민족주체를 고양시키는데로 나아갔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강화지역의 구조
지역은 7가지의 요소로 구성 된다. 1.지역사상 2.지역전략, 3.지역전술, 4.지역조직체계, 5.지역체계의 운영방식, 6.지도자와 지역주민, 7. 지역의 기술,문화적 수단이 그것이다. 지역의 사상은 윗장의 글로 대신한다. 아래글은 지역전략을 중심으로 지역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강화의 자연과 역사 지정학적 위치등은 강화의 다양한 요소를 구성하며 환경, 지역차별과 소외, 정전협정과 통일, 유라시아평화질서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묵직한 주제와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요소와 다양한 속성의 발견은 그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어느지점에선가 서로 갈등.충돌하는 지점이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선인들이 여러 가지 충돌하는 주제에 대해 주체적 입장에서 회통,원융해 간 원리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요소와 연관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밝혀냄으로써 강화지역이 추구할 장기목표, 전략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환경,농업,통일의 연관
여차리 강화갯벌센타의 자료에 의하면 한강하구 갯벌의 나이는 약 7천년에서 1만년 정도이다. 이는 마지막빙하기 이후 육지였던 서해에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한 이후, 문명에 의한 숲의 파괴와 황폐화가 시작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숲의 파괴로 초래된 강 퇴적물의 증가와 자연 스스로의 고단한 적응과정을 통해 이룩된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갯벌인 것이다. 숲과 인간의 관계에서 복원 불가능해진 토사는 이제 강이란 새로운 관계의 장으로 모여들어 갯벌을 만든 것이다.
강화에서 갯벌을 메우는 본격적인 간척은 유라시아제국이었던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대몽항쟁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니 강화간척지는 유라시아체계에 저항했던 거대한 민중의 유산인 셈이다.
간척은 간석지를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맞게 개조하기 위한 자연개조사업이다. 강화간척사업의 특징은 방조제가 곧 해안 방벽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고사는 문제인 전쟁과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가 하나로 일치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간척에는 천문과 지리 식생에 대한 과학지식과 방조제, 수문, 수로 등 토목기술과 토지개량, 품종개량 등에 대한 농업기술,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야하는 동원사업이란 성격에 동반하는 사회체제의 문제가 얽혀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쌀 문제였다. 갯벌간척의 목적은 농토확장 즉 농업문제였기 때문이다. 통일농업이란 관점에서 보면 북한에 쌀을 본격적으로 지원해야 할 시점이 되면 연간 100만톤 이상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쌀 부족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약 30만 헥타르의 남측 논을 여유분으로 보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측은 쌀이 남는 실정이다. 식탁에 오르는 쌀만으로는 공급과잉이고, 쌀 가공식품의 성장둔화로 수요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가 현실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농업생산자원을 비축해 놓는다는 의미에서 논에 농사를 안 짓더라도 논이 황폐되지 않도록 관리비용을 들여서라도 관리를 해둘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농지자원을 비축하는 사례가 많다. 그중 생물다양성관리계약 제도는 주목할 만하다. 농민들이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벼, 보리 등 농작물을 수확하지 않고 철새 먹이로 남겨 놓는 대신 지자체로부터 일정액의 보상금을 받는 제도이다.
간척지의 환경농업은 갯벌로 들어가는 오염원을 해소하고, 철새 등 다양한 생물의 서식처와 활동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농업이 남북의 통일농업 역시 준비하고 이끌 수 있을 때 갯벌과 간척의 관계가, 개발과 파괴가 아닌 상생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북의 생존을 위한 간척사업은 남측이 제기하는 환경문제를 고려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향후 남북통일시 쌀 부족분을 채워줄 경작지의 보전이란 점에서, 간척지 친환경농업의 환경에로의 환원이란 점에서, 생물다양성관리계약제도는 부분적이지만 간척농지의 환경과 통일, 농업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할 대안 중의 하나로 주목된다.
강화지역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의 필연적 연관을 통찰할 때 어느 하나의 의제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회통,원융의 대안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이러한 필연적 연관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요소와 특성만을 강조하거나 강요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최근 논란이 되는 조력발전댐건설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조력댐건설문제
강화지역에 조력발전소를 짓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조류발전이나 파도의 힘을 이용한 파력발전이 아닌 강화주변섬들을 연결하는 댐을 지어 밀물 때 가두어 두었다가 썰물 때 낙차를 이용하여 터빈을 돌린다는 구상이다. 필자가 알기로 이것은 조격발전인데, 어쨌든 한강하구에 제방이나 제언을 쌓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이러한 구상이 나올 때 마다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홍수와 해일의 문제이다. 한강을 비롯한 한국의 장마나 호우는 1년에 올 거의 대부분의 강수량이 여름한철 그것도 하루이틀사이에 집중된다는 특성이 있다. 게릴라성 호우이다. 역사서와 지지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강화지역에서 홍수와 해일피해와 관련된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숙종 22년(1696) 음력 5월 바닷물이 넘쳐 강화지역 여러 곳의 제언이 무너지고 농경지가 침수되었으므로 강화유수는 인력을 동원하여 제방을 보수하고 수문을 만들었으며 정조 14년(1790) 7월 17일에는 교동, 강화등 경기만 일대의 8개읍이 해일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철종 2년(1851) 가을에도 해일이 발생하여 강화지역의 넓은 전답들이 유실되고 인명과 가축이 상했으며, 고종 35년(1898) 6월에는 맑은 날 제방이 무너지고 논이 침수되었고, 1920년에는 해일을 동반한 태풍이 불어 해변의 농경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55년 가을에도 해일이 발생하여 도처의 방조제가 붕괴되었는데 석모도의 상주언과 망월평의 제방 일부가 붕괴되고 토양이 유실되었으며 교동도의 중앙에 발달한 영산평 위로 한강하구물이 범람하여 많은 농경지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1956년의 제방 보수공사 시에는 석모도의 상주언 동쪽 제방을 안쪽으로 옮겨 쌓고, 교동도의 영산평 북쪽 해안의 방조제를 전보다 견고하게 보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강화지역 주민들은 근래에 더욱 잦아진 해일의 발생이 해수면의 상승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강화지역 조력댐을 만들면 모델실험결과 수위가 약 68cm 상승한다고 한다. 10여년전 강화읍내가 다 잠긴 대홍수 때의 수위에서 68cm가 더 잠긴다고 생각하면 그 피해를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같은 홍수, 해일피해는 한강하구 일대의 간척지가 가진 특성인 지반침하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한강하구지역에 해일피해가 급증하는 이유도 간척지 지반침하의 결과인 것으로 생각된다.
강화 간척지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이룩한 최영준 고려대 교수는 발행시기가 다른 여러 장의 1:50,00지형도를 비교해 본 결과 송가평 우측의 상주언 중앙부에 있는 벤치마크(bench mark)의 해발고도가 1917년에 발행된 지도상에는 6.4m로 기록되어 있는데 1968년도의 지도에는 6m로 바뀌었음이 확인되었다. 이같은 사실을 검토해 본 결과 연평균 지반 침하율은 송가평이 약 8mm, 염주평이 약 6mm, 선두평은 약 13mm였다. 일반적으로 해안저습지 토양에는 이탄을 비롯한 유기질과 염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러한 땅을 간척하여 염분을 씻어내고 농경지로 이용하게 되면 토양중의 박테리아가 활동을 개시하여 유기질을 분해시킨다. 대책을 세우지 않을 경우 유기질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토양의 체적이 줄어 지반침하가 계속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겹치기에 간척지로 이루어진 강화지역에서 최우선 정책은 해일피해방지이며, 해일피해는 침수피해로 침수피해는 소금물, 즉 염해피해로 연결되어 농사짓는 일을 몇해 간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해수면 상승을 초래할 제반정책에 대해 반대해야한다. 그런데 지금이야기 나오고 있는 조력댐건설은 역사가 가르쳐준 뼈아픈 교훈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국제하천법위반 문제도 심각하다.
분단된 나라에 살다보면 보편적인 국제기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할 때가 있다. 국제하천, 국경하천문제도 그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북한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임진강의 황강댐 방류사건이나 1980년대 금강산댐으로 알려진 임남댐이 공격용댐이라고 국민을 궐기시켰던 사건이나 두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하천의 상류국가가 하류국가와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관리를 할 때 생기는 문제였다. 국경을 이루거나 두 나라 이상에 걸쳐 흐르는 국제하천에서 항행을 비롯한 하천의 이용과 수자원 개발 그리고 환경오염 등으로 인접국가 사이에서는 잦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국제하천에 관련된 1815년 비엔나 의정서,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1921년 바르셀로나 협약 등으로 항해의 자유를 인정하고, 1923년 수력발전에 관한 제네바 협약과 1971년 수자원 이용에 관한 아순숀 조약은 관련국들이 상호 협력하여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공동관리 기구를 만들어 하천의 유역 전체를 통합 관리하도록 했다. 유엔 국제법위원회는 1974년부터 국제하천 법을 준비하여 1984년에 1차 법안을 제정하고, 1991년에 2차 법안을 개정 확정하여, 하천이용의 기본원칙과 국가의 환경보호의무, 국제기구의 기능과 공동협력 제도 등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1992년에는 국제하천과 국제호수의 보호와 이용에 관한 헬싱키 협약이 체결되어, 대부분의 국제하천이 공동 관리되고 있다.
임남댐이나 황강댐 방류문제가 상류국가의 국제하천조약법 위반이라면 1980년대에 비해 두배로 높이 건설된 화천 평화의 댐이나 이번에 회자되는 강화조력댐은 하류국가의 국제하천법위반이 된다. 왜냐하면 하류국가가 높은 댐을 건설하여 방류하지 않으면 상류국가가 침수되어 피해를 받기 때문이다. 황강댐 방류처럼 불가피한 자연재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사과하면 할 말이 없지만, 하류국가에서 불가피한 재해상황이 아닌, 즉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상류국가가 침수의 피해를 받는다면 이는 부득이한 상황을 내세운 사과가 불가능할 것이며 북한은 거꾸로 남한의 의도를 의심하며 비난수위를 높일 것은 자명하다. 또한 이것이 국제문제화되면 우리가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하다.
조력댐 건설은 강화나 김포, 인천지역의 홍수피해는 물론이거니와 하나의 유역을 형성하고 있는 예성강계나 평화전망대 건너편 삼달리평야등에 직접적인 침수피해의 가중을 초래할 것이 예상된다. 조석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하천을 감조하천이라고 한다. 예성강에서 바닷물이 미치는 구간은 하류로부터 51km 지점에 있는 금천군 계정리 부근까지이다. 예성강 수계는 유역면적이 39만ha로 넓지는 않지만 1도 미만의 평탄지 면적이 23.3%, 5도 미만의 완경사지 면적이 14.4%를 차지함으로써 대동강 수계와 마찬가지로 하류지역은 침수피해 가능면적이 넓다. 예성강 수계에는 논 22,000ha, 밭 97,000ha가 분포하고 있다.
조력댐 건설로 수위가 약68cm 상승한다고 하면 예성강 유역 평야의 경사도가 1도인 23%의 지역은 당연히 침수피해가중지역이 될 것이고 5도미만의 경사지도 상당지역이 침수피해가중지역이 될 것이다. 예성강유역 침수에 대해 북이 80년대의 남한처럼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금강산댐이 그렇듯이 강화조력댐건설도 정전협정에 따라 ‘적대행위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판문점이나 남북간회담을 통해 서로 합리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쟁의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강화조력댐이 환경영향평가만이 아닌 분단관리, 위기관리평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화와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 접경지역의 모든 지자체가 준비하고 있는 이때 조력댐은 이같은 맥락을 간과한 근시안, 졸속행정이 될 수 있다.
유라시아체계
체계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강화지역이 실질적 연관관계의 최상위체계를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정묘호란 당시 연미정이 정전협상과 강화조약의 장소가 되었고, 다시 한국전쟁에 의해 한강하구가 정전의 현장이 된 것은 역사적 원인이 서로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한강하구가 지닌 지정학적 지위와 연관이 있다. 우리는 저어새의 이동경로나 황사의 피해영역 등에서 강화의 동아시아적 체계에 대해 실감한다. 그러나 고인돌의 유라시아적 분포, 유라시아제국 몽골의 침략, 병인.신미양대양요와 한국전쟁에 이르면 강화의 유라시아적 체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유라시아체계보다 더 상위체계인 ‘세계체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아직 세계는 강화의 최상위체계로 보긴 어려울 듯하다. 유라시아체계의 바탕은 지정학이다.
한국전쟁당시 강화도와 필적할 지정학적 등가를 굳이 찾는다면 유고슬라비아의 트르스트가 아닐까 싶다. 유고는 1945년 6월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UN의 50개 회원국 중 하나로 가입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 소련과 사회주의 정권들과의 밀착관계로 인해 유고와 서구는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트르스트(Trieste/Trst)지역을 포함해 유고와 주변국가들과의 국경조정문제로 확대된다. 1945년 5월 유고가 장악하고 있던 트르스트를 둘러싸고 이탈리아와 유고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발생했을 때 서구는 분명한 자세로 사회주의를 표방한 유고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음을 표명했다. 1945년 5월 9일 베오그라드협상에 따라 트르스트와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철로와 도로들을 포함한 율리얀(Juliske pokrajne)지방일부와 고대 로마 도시의 유적물들이 상당수 있던 크로아티아의 풀라(Pula) 그리고 다른 여러 아드리아 북부 해안지역들은 미국 등 서유럽 연합국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 지역에는 단지 소수의 유고 해군선박의 순찰만이 허용되었다. 인종적 구성분포와 경제적 중요성 그리고 역사적 소유권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던 유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서구연합국과 베오그라드에서 이루어진 국경조정문제를 둘러싼 협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없는 요구조건이었다. 트르스트와 율리얀 지방에서의 유고군대 퇴각이후 협상에 따라 1945년 6월 12일 이들 지역을 나누어 한쪽 지역에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연합국군대가 진입했고 또 다른 지역에는 유고군 사령부가 편성되었다. 트르스트문제는 한국전이 끝난 후인 1954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유고는 1948년 코민포름 분쟁이후부터 스탈린사망과 뒤이은 한국전 종결시점인 1953년까지 추진해왔던 친 서구정책을 포기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을 형성한다. 이 문제는 유고학자들과 지도부들이 2차대전이후 강대국들에 의한 한반도 분할정책에 대해 긴밀한 관심과 이에 대한 연구를 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0년대 강화도와 필적할 지정학적 등가를 굳이 찾는다면 우크라이나의 세바스트로폴이 아닐까 싶다. 친미화된 우크라이나 정권과 미국의 속셈을 알게 된 열친정부가 예리하게 대립각을 세운 곳이 흑해의 항구도시인 세바스트로폴이었다.
유라시아체계의 토대위에서 생각해 볼 때 가장 복잡한 연관을 보여주는 곳은 한강하구이다. 우선 사회적연관중에 가장 필연적인 관계는 법적형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정전협정상의 지위가 가장 예민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태보존지구의 설정이나, 남북통항과 교류, 통일농업, 치수관리, 유엔차원의 의제설정등 모든 문제가 정전협정에 걸려있다. 국가간 협정은 평화조약이 체결된 상태에서 가능하다. 정전협정은 국내법이 아닌 국제법의 영역이며 그 관련자가 16개 참전국을 포함, 20개국이나 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로 한강하구가 주목을 받자마자, 남북간의 의제인 모래준설, 서해평화협력지대, 이명박정부의 나들섬구상등이 쏟아져 나왔고, 환경쪽에서도 저어새, 물범, 습지등 중요의제들을 부각시켰다. 이는 한강하구가 갖고 있는 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 구조가 반영된 결과이다.
현단계 강화의 지역전략은 유라시아차원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나가는 평화전략을 우선순위로 통일을 연습하고 준비하며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환경과 생명농업의 발전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지역의 전술 계획
지역전략은 그것을 실현할 전술을 가질 때 힘을 발휘한다. 여의도 광장을 뜯어내고 공원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경이란 주제로의 전환이면서 집단주의 문화를 가족주의와 개인주의 문화로 바꾸는 전술적 사업이었다. 청계천 복원공사 역시 성공한 전술사업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강하구를 유라시아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술사업으로 한강하구평화의배띄우기가 제안되고 실행되었다. 이는 전술사업이므로 계속 지속될 필요는 없다. 4년 동안 치루어진 이 행사는 결국 유엔사와 합참의 불허로 한강하구 진입에 실패하였다. 이제 합참과 유엔사는 정전협정상의 위법을 저지른 것이 명백해졌고 유엔차원이나 미국법원에 고발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이 문제는 12월이면 유엔총회의장에게 전달 될 계획이며, 미국법원에도 고발될 예정이다. 한국도 아닌 한국의 변방지역에 불과한 한강하구가 유엔차원의 의제로 격상할 수 있는 것은 한강하구가 가진 유라시아체계적 구조 때문이다.
지역의 조직체계
지역의 관공서는 물론이고 각종 사조직들은 지역의 본성을 실현해 나가는데 적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는 정교한 체계를 구성한다. 지역은 이 차원에서 사상과 전략과 전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한강하구를 예로들면 한강하구라는 전략의제를 실현시키기 위한 조직으로서 한강하구 관할권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룰 ‘한강하구위원회’가 제안되어 있다. 한강하구의 관할권문제는 현재 유엔사와 이견이 발생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남북사업의 중요축으로 한강하구가 주목을 받으면서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사관할권주장의 허구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한강하구위원회는 유럽의 다뉴브강위원회나 라인강위원회처럼 국경하천을 공유하고 있는 남북을 포함하여 정전협정의 쌍방을 구성하고 있는 18개국이 자격요건을 갖는 국제하천성격의 위원회가 될 수 있다. 또한 민간의 주도성이 인정되면 최초로 민관복합의 국제하천위원회가 탄생하는 셈이다. 한강하구위원회는 다양한 분과를 두어 수질, 수량, 농업, 기상, 유역관리, 항행, 문화, 관광, 교육, 군사등의 현안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기구가 될 것이다. 이 기구가 평화협정체결과정에서 한강하구 관리문제를 담당할 주체로 인정받을 경우 한반도 평화협정에 공식적인 기구로 등재될 것이며 이를 통해 역사상 최초로 정부 간 조약이 아닌 민관합동 조약이 될 것이다. 21세기 ‘신외교’ 개념에 의하면 민관 합동기구는 평화체제의 유지 관리의 안정성을 훨씬 강화시킨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강화지역은 기초지자체에 불과하지만 한강하구지역은 강화, 김포, 인천, 파주, 고양, 서울등 권역지자체의 성격을 갖는다. 한강하구를 통해 지역차별의 소외지역이었던 각 지자체가 정치,외교적 단위의 지자체로 격상될 것이다. 평화조약상의 ‘한강하구위원회’가 전략조직이라면 이를 준비하고 실험하기 위한 ‘한강하구준비위원회’는 평화조약 체결전까지 전술조직으로 역할할 것이다.
지역조직의 운영방식
21세기의 조직운영 방식이 민관협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넓은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관료사회는 독재시대와 달리 유능한 관료의 영입과 민주적인 운영방식의 도입으로 혁명적 변화에 의한 전복대상에서 개혁대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혁명적 구호를 앞세우던 시민, 민중사회도 관료행정의 관리영역으로 들어간 지 오래이며 민관의 상호의존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관료조직만이 주도하던 영역을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경우도 생겼고 이러한 역동성은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관료사회는 좀 더 민주적이 되어야 하며, 시민사회는 좀 더 체계적일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기초지역의 현실은 중앙행정 조직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지역거주자 우선, 능력우선이기 보다는 출신자 우선, 인맥과 정실우선이 강조되고 있으며 공직자 비리를 견제할 아주 사소한 법질서조차 정실주의에 의해 무너진다.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한 법과 질서가 강조되어야 할 영역으로 여전히 공직사회는 개혁1호이다. 유라시아차원의 포부와 전망을 가진 인재가 공직사회에 있더라도 그런 인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 지역조직의 운영방식은 더 많은 개혁을 요구받고 있다.
한편 시민사회는 과거 치국평천하를 논하던 거시적 안목이 축소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에 착목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지원금공모 위주의 사업은 그러한 결과를 은연중에 키워왔으며, 그 결과 처음의 거시적 안목과 관점을 부담스러워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조직운영방식을 상호 비판견제하며 극복해 갈 필요가 있다.
지역의 지도자와 지역민
소외지역의 주민들은 억압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해도 그 이상까지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상이 가상의 영웅을 만들어 낸다. 철원의 임꺽정이 그렇고 서해5도의 임경업이 그렇다. 패권지역은 소외지역에 대해 그들 소외지역의 지도자가 저항적 지도자이길 원치 않는다. 김대중이 처음 당선된 곳이 인제였지만 정권교체가 되고 나서야 인제군은 김대중 대통령의 첫 선거 승리처로 자신의 지역을 말할 수 있었다. 지역의 지도자는 지역의 이익과 본성을 온몸으로 대변하며 지역주의를 밝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저항의 과정에서 지역민과 운명을 함께 한다면 때론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발휘 할 수도 있다. 오키나와 기노완시의 시장의 경우가 그렇다. 그것은 합리성만으로 표현되지 않는 지역민들의 강한 정서와 결합될 때 가능하다. 또한 지역의 지도자는 지역을 대표하지만 전국적, 세계적 차원에서 민족적, 또는 인류적 보편 가치를 추구하고 확장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역의 지도자는 지역이기주의의 대변자가 아니라 보편가치와 연결된 지역본성을 실현하는 대변자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성격과 전망에 따라 지역조직의 운영방식도 변할 수 있고, 지역조직의 외연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역민의 변화이다. 지역민은 지역조직과 지도자등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며 지역민의 주체적인 자각의 성숙이야말로 지역의 마지막 희망이다.
지역의 문화
지역본성 실현의 최종형태는 문화이다. 따라서 어떤 지도자, 조직체계, 전략, 전술도 그 자체로서는 아직까지 가능성일 뿐이다. 그것이 힘을 얻는 것은 지역주민들이 지역본성을 생활양식으로 즉 문화로 체득했을 때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축제는 좋은 가능성이지만 지역민을 중심으로 지역의 사상과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진 못하다. 이러한 문화적 기획이 지역민들을 주체로 세울 수 있기 위해서는 지역본성의 총체적 실현이란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지역브랜드는 지역사상과 전략, 전술, 조직체계와 운영방식의 변화까지 가져올 문화적 미학적상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타민 강화는 ‘섬 전체에서 느껴지는 자연에너지가 품고 있는 열정, 기상등이 가득한 보물창고’를 의미하여 자연의 섬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명품자족도시등의 전략제시와 고품격농산물공동브랜드 개발이나 강화 전체의 경관디자인 작업등이 추진되어 왔다. 가치는 역사적 통찰력과 철학적 지혜가 민감하게 표출되는 주제이다. 따라서 지역의 가치제시는 지역사상과 미학으로부터 근거할 때 지속성과 감동을 제공할 것이다. 강화군이 제시한 자연의 생기는 생활의 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강화사상미학의 흐름에서 살펴본바와 마찬가지로 강화는 인간주체에 의한 자각과 실천, 자득에 의한 거대담론의 통합이라는 사상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이규보, 기화, 이광사등에서 확인되는 3교 회통과 원융, 이동휘에서 확인되는 민족주체의 자각과 유라시아차원의 의제설정이 가능했던 것은 ‘나’란 주체의 자각과 ‘타인’의 주체를 존중할 뿐아니라 조화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득과 조화’야말로 압축적인 가치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두가지 브랜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는 ‘아하! 강화’(Aha! Kangwha)이다. 아하!는 자각의 탄성이자, 강화의 자연과 역사에 대한 감탄사이며, 갯벌에서 유라시아체계까지 강화가 가진 끊임없는 가능성을 열어가는 구호를 상징한다.
또 하나는 ‘무지개 강화’(Rainbow Kangwha)이다. 이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은유하는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작은 물방울과 빛의 연관이 창조하는 관계와 변화를 통한 조화를 상징하며, 하늘에 남지 않고 언제든지 사라진다는 점에서 관계에서 연유하되 집착하지 않는 혁신을 상징하며, 지금.여기의 구체성을 강조하며, 창조와 혁신의 창신성을 추구하는 의미를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