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지뢰회견자료집1 2006/02/07 95
주한미군의 한반도 내 대인지뢰 매설과 그 피해현황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
후원:
차 례
1. 개요
※과거 미군 매설 지뢰와 그 피해 현황에 대한 개요
2. 주한미군의 과거 지뢰매설관련 조사 자료
1) 미군이 과거 지뢰 매설을 한 지역과 민간인 피해 실태 상세 보고서
2) 미군의 지뢰 비축 관리실태
3) 한국 전쟁당시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상황
자료1. 한국에서의 전투지원 (Combat Support in Korea)
자료2. 한국 전쟁의 보.포.기갑 소부대 전투(Combat Actions in Korea)
3. 미군 매설 지뢰 제거에 관한 미국의 책임
자료3. [한국일보] 1997-09-19 (국제/외신) 기획연재 12면 “클린턴 ‘금지협약’ 대응책 발표”
자료4. [연합뉴스] 1997-11-01 “지뢰제거 책임에 관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발언”
4. 미군지뢰문제 해결을 위한 소파 3조와 4조의 개정
자료5. 과거와 현재 주한미군 현황
■참고자료1:
한국지뢰실태조사보고서-후방36개 대인지뢰 매설지역 실태조사보고서
■참고자료2:
ICBL(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발간,
2002 LANDMINE MONITOR수록 한국부분
1. 개요
1. 1997년 10월 31일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대인지뢰전면금지조약의 서명에 반대함으로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되자 미국이 2010년까지 지뢰제거를 위해 매년 10 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뢰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국가의 민간인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2. 과거 미군은 한국 전쟁 당시로부터 60년대까지 수십 곳의 주둔기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지뢰 제거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지뢰 매설 정보조차 한국군에게 이양하지 않아 미군이 매설한 지뢰로 인한 피해가 2002년까지 계속 되었다. 이번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 피해는 21개 지역 100명에 이르며 김포, 파주, 연천, 철원, 고성 5개 지역 주민들은 집단피해를 당했고, 주한미군조차도 5명이 지뢰사고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3. 또한 미군이 지뢰매설정보를 이양하지 않은 것이 소파3, 4조에 의해 규정된 ‘통고불이행’과 ‘원상복구불이행’ 조항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파 3, 4조의 개정이 시급하다.
4. 조사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과거 미군 기지의 지뢰매설정보는 고사하고, 철수한 미군기지의 위치에 대해서도 전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음이 밝혀져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미군의 과거 행적이 밝혀져 피해보상 등 반드시 주권을 행사할 일이 생겨도 객관적인 근거가 될 만한 기초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KCBL은 미국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발표와 특정재래무기금지협약 및 정전협정에 근거하여 과거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며 한미소파의 3조와 4조의 내용이 그에 준하여 개정될 것을 촉구한다.
※ 과거 미군 매설 지뢰와 그 피해 현황에 대한 개요
A. 미군 주둔 시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
시기
피해
내용
1
미 해병 1 연대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1951.9.18~10.31
1951년
주수산
50년대 중반
다리 절단
미 제 25사단
1953.5.13~7.27
1953년
미 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 A중대
1962년
1971년
미 제 2사단 23연대 3대대 B중대
1962년
1971년
2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
1953.5.13일~7.27
1953년
김중식
1960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38연대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71년
조만손
1965년
오른쪽 발목 절단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
3
경남 하동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및 용산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1971년
조성재
1969년
사망
4
캠프 리버티벨(CP LIBERTIBELL)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한국 전쟁 중, 1962년
현재 주둔중
미군1인
2001.5월
오른쪽 다리 부상
5
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의정부 가능동 호명산
가능동주민
1998.8.12
유실지뢰로 인한 불안감, 관광객 감소로 인한 재산피해
B. 미군 철수 후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1
경남 하동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및 용산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1971년
조헌필
1974.8.2
발목 절단
김영순
1976. 4월 초
발가락 절단
2
미 제 1사단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사격장과 자유의 다리 북쪽지역
1953.7
1971년
조두현
1983년
발목 절단
정정숙
1980.12.
발목 절단
윤금옥
1988년
발목 절단
신형식
1983년
발목 절단
이덕준
1979.8.14
왼쪽 발목 절단, 오른쪽 다리 파편부상
미 제 2사단 38연대
1962년
옹일랑
1976.3.29
발가락 절단
최명환
1980.1.13
발목 절단
이재연
1980년
발목 절단
이재문
1980년
발목 절단
3
캠프 페터슨
(CP PETERSON)
- 1기병사단 공병대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1960년대
1970년대
보광사 주지 및 신도, 지역주민
1998.8.8
보광사 옆 계곡에서 유실지뢰가 확인됐으나 제때 수거되지 않아 호우로 다시 유실되어 심한 주지외 신도 주민들 정신적 불안감
4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련리
1953.5.13~7.27
1953.7.27
백중현
1970년
다리 절단
미 수색 제 1사단
미군 1명
연도 미상
사망
캠프 그리브스 (CP Greaves)
1962년
현재 주둔 중
캠프 워리어 (CP Warrior)
대성동 주민1명
1993년
부상
캠프 두지 (CP Dooge)
5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 덕천리, 마지리등 20여개 훈련장
1953.5.13~7.27
1953년
윤호영
1961년
두 다리 절단
미 수색1사단
미 제 24사단 48 야포대
1960년 전후
1971.10.21
6
미 제 1사단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 야월산 ATC(항공교통관제-미군)
1951.4.22~11.11
1951년
김문빈
1971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3사단
1951.9.29~10.18
1951년
박금녀
1997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1952.9.18~ 10.31
1952년
김주권
1998.4.22
사망
부대명 미상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60년대초반
전창국
1996.5.24
사망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7
미 제1사단
경기도 연천 대광리와 철원 율리리 경계지역
1951.4.22~11.11
1951년
이민상
1997.3.8.3
손목 절단
김용관
1990.6.30
오른쪽 발목 절단
김일복
1995.7.12
왼쪽 발목 절단
신동윤
1995.8.18
옆구리에 파편이 박힘
미 제3사단
1951.9.29~ 10.18
1951년
강윤구
1995.8.28
양쪽 발목 절단
김찬수
1996.7.26
유실지뢰로 수해복구작업 지연으로 인한 재산피해
허태원
1996.7.30
유실지뢰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
김한풍
1996.7.31
미 제 2사단
1952.9.18~ 10.31
1952년
유성현
1996.8.1
손 찢기는 부상
박수억
1996.8.6
트랙터 타이어 파손
김학길
1996.9.6
일부 장비 파손, 실신
미 1군단 보병부대
1962. 쿠바사태 직후
1971년
성명미상
1996.10
굴착기 완파
오태의
1996.10
지뢰 발견, 심리적 불안감
최광훈
1997.4.5
중장비 파손,
얼굴 등에 전치 2주의 부상
정소이
2002.6.17
왼쪽 다리 절단, 오른쪽다리부상
8
미 제 3사단
철원군 대마리를 비롯
백마고지 전투지
1951.9.29~10.28
1951년
조창행
1965년
왼쪽 다리 절단
유철훈
1968.4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1952년 10월 이전
1952년
장동용
1975년
오른쪽 다리 절단
전병화
1990년
발목 절단
부대명 미상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60년대 초반
박경서
1968.4
대퇴부 절단
이수진
1968년
발목 절단
9
미 제 25사단
철원 김화 북단 생창리를 비롯한 저격능선, 삼각고지 전투지
1951년 10월
1951년
10월 이후
고문현
1979년
사망
박영주
1979년
발목 절단
미 제 7사단
1952년 9. 18.~11. 25
1952.11.26
엄영구
1973.12.4
사망
미공수187연대
1952.10.14~11.25
1953.7.13.~7.27
1953.7.28
박정호
1992.12.4
사망
이은용
2002.4.22
사망
10
미 제 74사단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1951년 10. 8.~22.
1951년
반윤수일병
1997.1.11
사망
미 제 3사단
1953년 7. 13.~27
1953년
서원배병장외 5명
1997.10.11
중경상
11
미 제 24사단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외성동리
1951.10.9~22
1951.10.23
김성곤병장
1998.5.20
사망
임대필일병
사망
김창수이병
사망
박성필상병
부상
12
미 제 25사단
강원도 철원 김화지역
1951년 5. 23.~ 6.10
1951년6.10
고준진
1970년
두 다리 절단
미 제 7사단
1952년 9.18~ 11월
1952년11월
김천수
1996.8.1
유실지뢰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정신적 충격과 농사지연.
미 공수 제187연대
1952년 10.14.~11.25
1952년11.25.
김진두
1997년 5.28
트랙터 일부 파손
미 제 2사단
1953년 7. 13.~ 27
1953년7.27.
철원농민 다수
1996.8
1996년 8.30. 수해로 인한 유실지뢰 제거 되지 않아 농사포기
13
미 제 7사단
강원도 화천군 일대, 파로호 상류
1951.5.23.~ 6.10
1951년 6.10.
한재영
1996.8.4
낚시 중 사고, 발목 절단
최순원
1996.8.31
1년생 송아지 발목 절단
미 제 24사단
한정열
1996.8.12
자신의 밭에서 지뢰 발견. 정신적 충격, 농사일시중지.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14
미해병 제 1사단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오유리, 현리
1951.6.3~9.20
1951.9.20이후
김옥자
1994.6.15
대퇴부 파편
박춘영
1993년
발목 절단
오흥식
1993년
발목 절단
오종식
1994.12
사망
오흥식씨 아들
1994.12
사망
미 제 45사단
1953.5.13~ 7.27
1953.7.27이후
김옥수
1994.12
사망
백춘옥
1998.8.12
발목 절단
이영준
2002.6.17
트랙터 운전 중 대전차 지뢰를 밟아 온몸에 중상을 입고 한쪽 눈 실명, 트랙터는 완파
15
미 수색 제 1사단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 월운리
1951.5.23.~6.10
1951.6.10
윤원근병장
차재욱병장
문승훈병장
김영철이병
1997.6.13
사망
사망
중상
중상
미 제 2사단
1951.8.18.~9.18
1951.9.18
미 제 45사단
1953.5.13.~7.27
1951.7.27
16
미 10군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1951년~1953.7.27
(미 10군단 예하 한국군부대가 매설)
1953년 7.27.
고성주민
1996.4.4
산불이 발생한 뒤 지뢰밭 때문에 진화지연으로 재산피해
정현철병장
1997.3.13
사망
박원갑상병
사망
장대성상병
부상
김유연상병
부상
현승국상병
부상
박진규상병
부상
박기돈일병
부상
홍간낭
2000.5.13
왼쪽 발목 절단
김일동대위
2002.9.4
왼쪽 눈과 양 손에 중상
17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章陵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1960년대 추정
1982년 5월
지역주민 13명
1984.9.1
수해 시 지뢰 폭발로 산사태
방포부대원11명
1994.8
부대 내에서 M18A1크레모아 폭발, 1명 죽고 10명 부상
18
인천 문학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인천 남구 문학동 문학산
1960년대 중반 추정
1977.5.29
포대병2명
1997.3.24
중상
19
충북 진천군 문안산 (文安山)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
1960년대 중반 추정
1977.5.29
부대병장
1명
1993.4.12
발목 절단
20
미 1군단 포병대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영북면 문암리 캠프 카이저 소속 불무산 방공포대
1960년대 중반 추정
1970.11.23
미 제 2사단 장병 3명
1996년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지대에 들어가 지뢰 밟아 사고
21
부산 중리산 미사일기지(부대명 미상)
부산 영도구 동삼동 산 159
1964.6(미군 작전 통제하에 한국군이 매설)
1964년
부산 중부 소방소 대원
1996.2.25
화재 진압 중 지뢰 터져 발목절단
C. 피해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미군에 의해 지뢰가 매설된 지역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시기
1
캠프 보니파스(CP BONIFAS)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한국 전쟁 중, 1962년
현재 주둔 중
2
1 기병사단, 제 5 기병대, 제 12 기병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노파동
1960년대
1970년대
(그러나 현재도 일부시설 사용 중)
3
미 1기갑사단 제 8연대 제2대대 D중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1962년 쿠바사태직후
1971년
4
홍성 제기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남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1970년대
1990년 이전
5
태안 백화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1960년대 추정
1974년
6
울산 오봉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울산시 남구 양정동
77년 이전
미상
7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
(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안중지역) 고등산 (高登山)
1960년대
1980.5.
8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
(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1960년대
1980년
9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1960년대
1977.5.29
10
전북 김제시 황산동 (凰山洞)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전북 김제시 황산동
1960년대
1977.5.29
11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華岳山)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경기도 가평군 화악2리 화악산
1960년대
1977년 전후
12
경남 김해시 장유면 불모산 (佛母山) 및 화산 (花山)(부대명 미상)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미상
1977년 전후
13
강원도 춘천시 대룡산 (大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 대룡산
미상
1977년 전후
14
충남 서천군 옥녀봉 (玉女峰)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충남 서천군 서면 합전리-.호리
미상
1977년 전후
15
캠프 하워드 CP HOWARD
(미공군 탄약저장소)
충남 천안시 성환읍 수향리
미상
1970년 이후
D. 현재 미군 사용시설 중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
D-1)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호명산(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D-2) 경기도 연천군 야월산 ATC
D-3)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파평산 ATC
D-4)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Evn ATC
D-5)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 사격장
D-6)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초평도 미군 훈련장
D-7)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그리브즈
D-8)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보니파스, 캠프 리버티벨
D-9) 부산시 해운대구 장산(캠프 하야리야) 통신대, 미 8군 제 1통신여단 307 통신대대
2. 주한미군의 과거 지뢰매설관련 상세 조사 자료
1) 미군이 과거 지뢰를 매설한 지역과 민간인 피해 실태 상세 보고서
A. 미군 주둔 시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A-1) 미 해병1연대, 미 제 25사단, 미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 A중대, 미제 2사단 23연대 3대대 B중대
연천군 고랑포리를 중심으로 한국전쟁당시인 1951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 미 해병 1연대가, 1953년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25사단이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주둔해 있던 미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와 미 제 2사단 23연대가 1962년 쿠바사태직후 지뢰를 새로 매설하였다. 또한, 이곳은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방어구간의 끝 지점으로 방어가 허술하여 북의 특수부대가 침투했던 지점으로 그 사건 이후 대대적인 지뢰매설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 졌다. 파주 파평면 장파리에 사는 주수산씨가 50년대 중반 지뢰 사고를 당한 곳이다.
▶지뢰피해자
주수산 : 50년대 중반에 야산에서 사고 (인터뷰 내용 : 사고 뒤 생계활동을 할 수가 없어 6 남매들을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신다.)
▶자료출처: 미군 범죄기사, 지뢰피해자 증언
A-2) 미 제 25사단, 미 제 2사단 38연대,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
한국 전쟁 당시인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를 중심으로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제 25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그 뒤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다. 휴전이후 미 제 2사단 38연대,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가 주둔했으며 1962년 쿠바사태 직후에도 지뢰가 매설되었다. 현재도 미군훈련장인 스토리사격장 근처인 이곳에는 지뢰작전에 관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지뢰피해자1 : 김중식
피해 시기 : 1960년
피해 내용 : 왼쪽 다리 절단
지뢰피해자2 : 조만손
피해 시기 : 1965년
피해 내용 : 오른쪽 발목 절단
▶자료출처: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1992년판-행림출판사, 중공군의 한국전쟁사-한국전략문제연구소-1991년판-세경사, 미군 범죄기사, 주민 증언, 미8군 홈페이지
A-3)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지뢰 매설한 것은 분명, 그러나 70년대 초 국군 제 39사단에서 기지를 이양 받을 때 정확한 지뢰 매설 보고서를 인수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연합뉴스기사에 의하면 53년 매설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군에서는 60년대로 확인했다.
조사된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조성재: 69년 지뢰 사고, 94년도에 사망
▶자료출처: 육군보도자료, 피해자증언
A-4) 캠프 리버티벨(CP LIBERTIBELL)
91년 이전까지 미 제 2사단 캠프였으나 91년 이후 병합되어 동쪽 보니파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리버티벨이란 이름이 캠프 이름으로써 존재한다. 보니파스와 함께 인근이 모두 지뢰지대이다. 역시 한국 전쟁 당시 매설된 미확인지뢰지대와 더불어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 매설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병사 : 2001년 5월 중순 DMZ를 따라 정찰 중 미군1명이 M14 대인지뢰를 밟고 오른쪽 발에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미확인지뢰지대에서 일어났고 그 군인이 병원에 가는데까지는 구급차에 닿기까지 급하게 1.5마일을 뛰어간 시간까지 합쳐 2시간 반이 걸렸다.
▶자료출처: ICBL 대인지뢰 모니터 코디네이터 메리 워레함이 2001년 7월 6일 워싱턴 DC 월터리드 군인병원에서 피해 군인과 인터뷰한 내용, 주민증언, 주한미군 홈페이지
A-5) 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경기도 의정부시 및 양주군 양주읍 어둔리 호명산 (號鳴山) 방공포대자리에 위치했다.
미군 기지 반환 후 한국군에 이양되었고 기지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현재 다시 미군이 시설을 점유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군의 기지 철수와 함께 지뢰제거 작업이 실시되었으나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미군이 현재 사용하고 있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가능동주민: 1998년 8월12일 가능3동 호명산 계곡으로 흘러온 유실지뢰가 제거되지 않아 주민들의 생활 불편과 관광객 감소로 재산 피해.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증언, 현장확인
B. 미군 철수 후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B-1)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내용은 위 A-3과 동일하나, 피해자들의 피해시기를 기준으로 분류. 아래의 피해자들은 미군철수 후의 피해자임
▶지뢰피해자
조헌필: 1974년 8월 2일 (당시 14세), 사격장 옆 지뢰 철조망이 없었으며 논과 맞닿아 있는 부분엔 지뢰가 없었다. 지뢰를 밟고 왼쪽 무릎 밑을 절단하고 오른쪽 다리는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현재는 어머님, 아들 1명과 살고 있으며 의족을 끼고 생활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 관절통으로 물리치료를 계속 받아야 한다.
김영순: 76년 4월 초순경(당시 51세) 논으로 가는 길에 고사리를 채취하던 중 철조망 바깥에서 지뢰 사고를 당하고 진주 병원에 2개월여 입원, 새끼발가락을 절단하였다.
B-2) 미 제 1사단, 미 제 2사단 38연대
한국전쟁시기인 1953년 7월 파주시 진동면을 중심으로 전투를 치뤘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되었다. 그 후 이곳은 미확인지뢰지대가 되었다. 미 제 2사단 38연대는 휴전 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사격장과 자유의 다리 북쪽지역에 산개되어 있었다고 한다.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와 장파리의 지뢰 피해자 14명이 모두 이곳에서 지뢰 사고를 당했다.
▶지뢰피해자
조두현 : 83년, 가을 논에서 추수하던 중 사고, 발목절단 (인터뷰 내용 : 1년이 넘도록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정신적 충격도 컸다)
정정숙 : 80년 12월, 논에서 일하다가 사고, 발목 절단 (인터뷰 내용 : 병원비가 없어서 치 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지금도 앉았다가 일어서기가 고통스럽다)
윤금옥 : 88년, 밭에서 김을 매다가 사고 (인터뷰 내용 : 고령의 나이로 의족이 무거워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태임을 호소)
신형식 : 83년, 논에서 작업중 사고. 발목 절단
이덕준 : 79년 8월14일, 미군부대 근로자로 일하다가 기지 철수와 함께 일자리를 잃고 날품 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군부대 마초 작업에 동원되어 작업하다가 사고. 왼쪽 다 리 절단, 오른쪽 다리는 파편이 박혀 불구가 되었다.
옹일랑 : 76년 3월29일, 과거 미군부대가 있던 야산에서 작업중 사고
최명환 : 80년 1월 13일, 과거 미군 부대가 있던 야산에서 작업중 사고. 오른쪽 발목절단. 2000년 사망
이재연 : 1980년, 야산에서 마초 작업 중 사고
조만손 : 1965년, 미군 부대 내에서 시야를 가리는 나무를 벌목하던 중 사고. 오른쪽 발목 절단
이재문 : 1980년 과거 미군부대 지역에서 마초 작업 중 지뢰 사고. 오른쪽 다리 절단
자료 출처: 미군 범죄기사, 주민증언.
B-3) 캠프 페터슨(CP PETERSON) – 1기병사단 공병대대
65년 당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캠프 페터슨이 주둔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민증언에 의해 영장리 고령산(高嶺山)과, 개명산(開明山)의 레이다 기지에 이곳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캠프 페터슨의 소속부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뢰피해자
보광사 주지 및 신도, 지역주민: 1998년 8월 6일 산사태로 근무병 2명이 사망한 사실이 있다. 이때 보광사 옆 계곡에서 굴착기를 동원, 수해복구작업을 하던 중 대인지뢰 1개가 굴착기 밑에서 폭발. 또 이곳에서 3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상류에서 떠내려 온 흙더미 속에 구형 대인지뢰(과거미군매설지뢰로 추정) 1개가 파묻혀 있는 사실이 인부들과 시체 수색작업을 벌이던 軍에 의해 확인됐으나 제때 수거되지 않아 9일 호우로 다시 유실되어 심한 정신적 불안감을 느꼈다한다. 주민 증언에 의해 오래 전부터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자료출처: 외무부 공식문서, 주민 증언, 보광사 전 주지스님의 증언, 파주시 공무원 증언. 신문기사
B-4) 미 제 25사단, 미 수색 제1사단, 캠프 그리브스, 캠프 워리어, 캠프 두지(CP Greaves, CP Warrior, CP Dooge)
이들 부대는 임진각 통일대교 건너 파주시 군내면 백련리 남북회담 사무국 근처에 몰려서 위치하고 있으며 미 제 2사단의 506보병 1대대가 주 병력이다. 한국전당시 매설된 미확인지뢰지대가 존재하며 1962년 쿠바사태를 전후하여 다시 매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부대 인근에서 일어난 지뢰 사고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백중현: 문산읍의 백중현씨가 이 부대근처에서 농사 중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했다.
미군1인: 미군이 이 부대근처의 미확인지뢰지대에서 훈련 중 사망(-미 제 1사단 근무병이었던 정봉석씨의 증언)
대성동주민 : 1993년 대성동 마을 외곽에서 한 여성이 지뢰를 밟아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94년3월1일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임야 260ha를 태우고 매설되어 있던 지뢰 50여발이 폭발했다.
▶자료출처: 주민 증언, 미8군 인터넷사이트, ICBL자료
B-5) 미 제 25사단, 미수색1사단 미 제 24사단 48야포대
한국전쟁시기인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25사단과 미 수색1사단이 동두천과 적성, 문산 사이를 오가며 싸웠고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전쟁 후 상당기간 미확인지뢰지대로 남았다. 1960년을 전후로 해서는 미 제 24사단 48야포대를 비롯 미 제 2사단 훈련장이 20여개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방부 답변자료에 따르면
‘71년 3월26일 미군이 징발하던 토지 6,000 만평 중 1,100만평을 징발 해제한다고 발표하고 71년 10월21일 징발 무효조치를 함. 그리고 이 지역은 미 제 2 사단 훈련장으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의 20개 지역으로서 세부내용은 추적이 곤란함.’
지뢰피해자 윤호영씨 대담에 따르면
“ 영국군들이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뒤 미군들이 관리하다 한국군 부대가 들어 왔다.”
현재 미군 범죄 관련한 신문기사를 통해 적성면에서 확인되는 부대는 식현리에 주둔했던 미 제 24사단 48야포대이다. 조사시 인근 국사봉 훈련장에는 국군 70보병연대 3대대장 명의로 “이곳은 미군훈련장이 아님’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과거 미군훈련장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정확한 지뢰매설 미군부대의 소재 파악은 어려우나 우선 확인된 식현리의 미 제 24사단 48포대에 그 혐의를 둔다.
▶지뢰피해자
윤호영 : 1961년 적성면 마지리 민통선에 논을 만들기 위해 민간인 지뢰제거업자와 개간작업을 하던 중 나무를 베어 묶어 내려오다가 지뢰 사고로 두다리를 잃었다. 당시 나이 29세.
▶자료출처: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지뢰피해자 증언, 신문기사, 현장 확인
B-6) 미 제 1사단,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한국전쟁당시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 야월산을 중심으로 1951년 4월 22일부터 11월 11일까지는 미 제 1사단이, 1951년 9월 29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미 제 3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싸웠다. 이곳은 백마고지 전투가 있었던 인접지역으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매설된 지역으로 다수의 지뢰 피해자 발생한 곳이다.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매설이 있었음이 주민증언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도 주한미군 통신 정보시설(ATC)이 위치해 있다.
▶지뢰피해자
김문빈 : 1971년, 야월산 근처 농지를 개간하던 중 사고. 왼쪽 다리 절단.
박금녀 : 97년, 나물을 뜯던 중 M14 대인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가 절단.
김주권 : 98년, 4월22일 철원 동승읍 이평리에 살던 김주권씨가 과거 자신의 고향인 야월산 기슭을 찾아 산나물을 캐던 중 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사망.
전창국 : 96년 5월24일,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에서 나물을 뜯던 중 지뢰 폭발사고로 사망.
▶자료출처: 주민증언, 인터넷사이트
B-7) 미 제 1사단,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미 1군단 보병부대
한국전쟁 당시인 연천 대광리와 철원 율리리 경계지역을 중심으로 1951년 4월 22일부터11월 11일까지는 미 제 1사단이, 1951년 9월 29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미 제 3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전쟁을 치뤘다. 미1군단의 보병부대는 전쟁직후부터 주둔했으며 70년대 초반에 철수하였다. 그 뒤 한국군이 인수하였으나 미군들이 기지를 철수하면서 지뢰지대의 지뢰를 제거하지 않고 떠남으로서 미확인지뢰지대가 되었다. 그 뒤 매년 장마철이 되면 차탄천 상류인 이곳으로부터 한탄강을 따라 M14플라스틱 지뢰가 도처에서 발견되었으며 많은 지뢰피해자들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이민상 : 1973년 8월 3일, 연천군 백학면 노곡1리에서 수해로 떠내려온 지뢰를 군인들이 보 고서도 치워주지 않자 이를 직접 치우다가 사고. 손목이 잘리는 부상.
김용관 : 1990년 6월 30일, 자신의 논에 수해로 쓰러진 벼를 세우다 지뢰가 터지는 사고. 오른쪽 발목 절단.
김일복 : 1995년 7월 12일, 밭에서 일하던 중 수해로 유실되어 떠내려온 대인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발목 절단.
신동윤 : 95년 8월 28일, 백학면 노곡리 임진강변에서 물고기를 잡던 중 차탄천과 한탄강에 서에서 떠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지뢰가 폭발하여 사고. 옆구리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
강윤구 : 95년 8월 28일, 백학면 노곡리 임진강변에서 신동윤씨와 물고기를 잡던 중 지뢰가 폭발하여 사고. 양쪽 발목을 절단.
김찬수 : 96년 7월 26일,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서 수해 때 차탄천에서 떠내려오는 지뢰를 발견하고 수해복구작업을 한 달 이상 하지 못해 재산상의 피해가 더 커졌다고 호 소.
허태원 : 96년 7월 30일, 연천군 신서면 와초리 차탄천 인근 자신의 밭에서 홍수 뒤에 떠내 려온 지뢰와 폭발물을 발견하고 군부대에 신고. 심리적 충격 호소
김한풍 : 96년 7월 31일, 연천군연천읍 상2리 자신의 집 앞 도로에서 홍수로 떠내려 온 M14대인지뢰를 발견 신고 함. 심리적 충격 호소.
유성현 : 96년 8월 1일, 연천군 연천읍 옥산2리 배동훈씨의 밭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수해복 구를 돕던 중 지뢰를 주워 만지다가 손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함.
박수억 : 96년 8월 6일, 연천군 연천읍 와초리 자신의 옥수수 밭에서 소먹이용 사료를 수확 하던 중 대형 트랙터가 대인지뢰를 밟는 바람에 타이어가 터지는 사고를 당함.
김학길 : 96년 9월 6일,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자신의 논에서 중장비로 논을 갈다가 지뢰가 터져 일부장비가 파손되고 실신하여 병원에 입원 치료받음.
성명미상 : 96년 10월,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 차탄천에서 제방복구작업을 하던 중대전차 지 뢰가 폭발하여 굴착기가 완전히 파괴 됨.
오태의 : 연천군 연천읍 옥산리 차탄천 변에서 중장비로 농지정리를 하던 중 M14 발목지뢰 2개를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함 (인터뷰 내용 : 심리적 충격 호소)
최광훈 : 97년 4월 5일, 철원군 철원읍 율리리, 과거 미 1군단 보병부대의 지뢰매설지대 앞 율리천 수해복구 작업 중 중장비가 지뢰를 건드려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 중장비일부가 파손되고 얼굴 등에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음.
정소이 : (33세) 2002년 6월 17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소재 화신폭포 옆 임진강변에 아버지와 나들이를 갔다가 유실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다리 절단, 오른쪽 다리부상
▶자료출처: 미군 근무자 증언, KCBL자료집, 피해자 증언.
B-8)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미 제 3사단은 1951년 10월까지 철원 대마리와 그 인근에 주둔하였으며 그 뒤 한국군 미 제 9사단을 주력으로 하여 미군사령관의 작전 통제 하에 백마고지 전투를 치뤘다. 1952년 10월 전후로는 미 제 2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전 과정에서 대인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 후 지뢰지대를 제거한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전쟁 후 이 지역 전체는 미확인지뢰지대로 방치되었으며 68년 군 경험자들을 중심으로 개척촌을 형성하기 위한 개간작업이 이루어짐. 이 과정에서 마을주민 60여명이 대인지뢰로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으며 현재는 5명만이 생존해 있다. 군에서 중령으로 예편한 후 현재 마을 노인회장을 지내고 있는 모씨(본인과의 약속에 따라 이름을 밝히지 않음)는 62년 쿠바사태 직후 비상이 걸려 민통선 지역에 주둔하던 미군이 일제히 지뢰를 매설하던 시기에 자신의 손으로 수 만 발의 지뢰를 직접 묻었는데 그 지뢰로 결국 주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깊이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생존시 조사가 이루어진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조창행 : 65년 봄, 마을입주 초기라 천막에서 생활하며 경작할 땅을 개간하던 중 지뢰를 밟 아 사고. 왼쪽다리 절단(2000년 사망)
유철훈 : 68년 4월, 대마리로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 집터와 학교터를 닦기 위한 공사를 하던 중 발목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다리 절단.
장동용 : 75년, 자신의 논에서 경운기를 끌고 개간작업을 하던 중 지뢰 사고. 오른쪽 다리 절단.
전병화 : 90년, 대마리 주변지역 개간 시 발목지뢰 밟아 사고. 발목 절단.
박경서 : 68년 4월, 대마리 입주 초기 북과의 교전이 자주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개간한 땅은 재간한 사람이 소유하게 한다는 군의 약속만 믿고 농지 개간 중 지뢰를 밟아 사고. 대퇴부절단. 그 뒤 땅의 원래 소유자가 나타나 개간한 땅을 다시 차지하는데도 군과 정부는 아무런 대책 없이 모른 척. 결국 목숨을 바쳐 개간한 농토를 다 빼앗긴 꼴이 되었다 한다.
이수진 : 68년, 대마리 입주초기 농지 개간 중에 지뢰 사고. 발목 절단.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9) 미 제 25사단, 9군단, 미 제 7사단, 미공수187연대
철원 김화 북단 생창리 등을 중심으로 한국전 당시 저격능선 전투, 삼각고지 전투를 주도한 부대들이다. 51년 10월부터 52년 10월 이후까지 김화 북쪽지역에서 저격능선(Sniper Ridge)전투가 있었으며 미 제 25사단은 초반부에 9군단은 후반부에 한국군을 작전 통제하여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52년 10월 이후 이뤄진 일명 삼각고지전투에서의 주력은 미 제 7사단이었다.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는 미공수187연대가 합류하여 싸웠다. 이 기간동안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된 지뢰는 상상을 불허하는 숫자라고만 전해질 뿐 어디에도 누구에 의해서도 정확한 숫자와 매설지도가 작성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지역은 미확인 지뢰 지대가 되었으며 대마리와 마찬가지로 민간인들이 직접 개간한 땅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김화읍 생창리를 중심으로 조사된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문현 : 1979년, 초등학교 4학년 때 먹을 것이 없어 와수리 동네 야산에 올라가 산열매를 따먹다가 지뢰를 밟아 사고. 사망.
박영주 : 1979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인 고문현과 먹을 것을 찾아 산에 올라갔다가 지 뢰가 터지는 바람에 친구와 함께 사고. 발목 절단.
엄영구 : 1973년 12월 4일, 생창리 학교 앞 공터에서 고철을 수집해 생계를 이어가던 중 고 철 사이에 끼어 있던 지뢰를 건드려 폭발 사고. 그 자리에서 사망.
박정호 : 1992년 12월 4일, 생창리 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이웃의 논을 대신 갈아주다가 지 뢰가 터지는 사고. 그 자리에서 사망.
이은용 : 2002년 4월 22일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 속칭 샘물고개에서 나물을 뜯던 중 지뢰 밟아 사망. 3일만에 시신 발견.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10) 미 제 74사단, 미 제 3사단
1951년 10월9일에서 22일 사이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적근산을 중심으로 하여 미 제 74사단이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수색부대원들이 작전 중 많은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반윤수일병 : 21세로 97년 10월11일 전방진지 보강 공사 중 지뢰사고로 사망
서원배병장외 5명: 같은 날 반윤수 일병과 함께 공사 중 지뢰사고로 중경상
B-11) 미 제 24사단
1951년 10월 9일과 22일 사이에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외성동리를 중심으로 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수색부대들이 작전 중 많은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김성곤병장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임대필일병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김청수이병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박성필상병 : (23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부상.
B-12) 미 제 25사단, 미 공수 제 187연대, 미 제 2사단
강원도 철원 김화지역을 중심으로 1951년 5월 23일부터 6월10일까지 미 제 25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1월까지는 미 제 7사단이,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25일 까지는 미 공수187연대가, 그리고 1953년 7월 13일부터 27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전투를 치룬 곳이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주 하천인 남대천을 따라 큰 홍수 때마다 지뢰가 하천으로 유실되어 지뢰사고를 일으켰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준진 : (20세) 1970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야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 두 다리 절단.
김천수 : (39세) 1996년 8월1일 김화읍 청양3리 남대천 수침교 근처 논에서 일하던 중 유실 지뢰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정신적 충격과 불안감.
김진두 : (42세) 1997년 5월28일 김화읍 청양3리 논에서 트랙터를 타고 모내기하던 중 발목 지뢰가 터져 트랙터 일부가 파손.
철원농민 다수: 1996년 8월30일 수해 뒤 지뢰제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농사포기, 지 뢰제거를 촉구하는 시위
B-13) 미 제 7사단, 미 제 24사단
1951년 5월23일부터 6월10일 사이 미 제 7사단은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 상류의 백석산을 중심으로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같은 기간 미 제 24사단은 춘천호 상류인 화천군에 주둔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주 하천인 북한강을 따라 큰 홍수 때마다 지뢰가 하천으로 유실되어 지뢰사고를 일으켰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한재영 : 1996년 8월 4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무룡1리 참샘골 파로호에서 낚시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 발목 절단. 당시 나이 44세
최순원 : 1996년 8월 31일 역시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무룡1리 참샘골에서 최순원씨가 기르던 1년생 송아지가 지뢰폭발로 발목이 절단 됨. 당시 나이 37세
한정열 : 1996년 8월 12일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1리 춘천댐 하류인 자신의 밭에서 홍수로 떠내려온 지뢰 발견. 정신적 충격과 불안으로 한동안 농사를 짓지 못함. 당시 나이 48세
B-14) 미 해병 1사단, 미 45사단
1951년 6월 3일에서 9월20일 사이 미 해병 1사단,1연대, 5연대, 7연대, 11포병연대 3대대와 미해병 1사단 작전통제하의 국군1해병연대가 양구군 팔랑리와 만대리를 무대로 도솔산 전투를, 그리고 현리, 오유리 등을 무대로 일명 펀치볼 전투를 전개한다. 또한 1953년 5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 미 제 45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전쟁이후 미확인지뢰지대로 방치되었다. 60년대 초 주민들을 이주시켜 지뢰밭을 개간하게 하고 마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현리 마을 한곳에서만 24명의 지뢰피해자가 발생했다. 2002년에도 만대리에서 지뢰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날 정도로 아직까지 지뢰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생존해 있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조사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김옥자 : 94년 6월15일 나물을 캐러 야산에 오르다가 지뢰 사고. (인터뷰 내용 : 엉덩이에 파편이 박혀 진물이 흐르고 걷기가 불편, 사고 충격으로 실어증 증세)
박춘영 : 93년 오유리 마을 뒷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다리 절단 본인을 비롯 가족 4명이 지뢰 피해자인 가장 비극적인 지뢰 피해 가족.
오흥식 : 93년 오유리 뒷산에 올라 생계를 위해 약초를 캐던 중 지뢰 밟아 사고. 발목 절단 박춘영할머니의 둘째아들.
오종식 : 94년 12월 오유리 뒷산에 토끼를 잡으러 조카 함께 갔다가 지뢰 밟아 사망.
김옥수 : 94년 12월 오유2리 인근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가 지뢰 밟아 사망.
백춘옥 : 98년 8월 12일 농사일 끝내고 냇가에 내려가 씻으려는 중 물에 떠내려온 지뢰 밟아 사고. 발목 절단.
이영준 : 2002년 6월17일 트랙터운전중 대전차 지뢰를 밟아 온몸에 중상을 입고 트랙터는 완전 파손.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15) 미 수색 제 1사단, 미 제 2사단, 미 제 45사단
강원도 양구군 동면 비아리, 월운리를 중심으로 일명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이 위치한 곳으로 1951년 5월23일부터 6월10일까지 미 수색 제 1사단이, 1951년 8월18일부터 9월18일까지 미 제 2사단이,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45사단이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군인들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월운리 육군부대:1996년 9월22일 무장탈영병이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 민간인통제선 내 지뢰밭으로 도주하여 수색지연.
윤원근병장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사망.
차재욱상병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사망.
문승호병장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중상
김영철병장외 5명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중경상.
B-16) 미10군단
1951년부터 한국전쟁이 진지전 양상으로 변화되면서 미10군단이 강원도 동부지방을 담당하여 전투를 치뤘다. 그리고 미 10군단 예하 한국군에 의해 강원도 고성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군인과 민간들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성주민 : 1996년 4월 4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달리 범장골 계곡에서 발생한 산불이 계속 번져 갔으나 이 지역이 지뢰밭인 관계로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60ha를 태우고 지역전체의 재산손실을 가져옴.
정현철병장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원갑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장대성상병: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김유연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현승국상병: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진규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기돈일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홍간낭 : 2000년 5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현례면 명파리 야산에서 산나물을 채취하다 지뢰를 밟아 왼쪽 발목 절단.
김일동대위 : 2002년9월4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에서 태풍피해 복구작업을 벌이다 발견한 지뢰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 지뢰가 폭발, 왼쪽 눈과 양 손을 잃는 중상.
B-17)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章陵山)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원래 미군기지였다가 1982년 5월 국군이 인수하였다. 국군에 의한 지뢰 매설이 확인되었으나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사실도 있었다는 주민 증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지역주민13명:1984년 9월1일 수해 시 지뢰 폭발로 산사태가 발생 마을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 소송을 하여 피해 사실을 인정받음.
방포대원11명: 부대 내에서 M18A1 인마살상용 크레모아가 폭발, 사병 1명이 숨지고 10여명 사망.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 소송자료, 주민증언
B-18) 인천 남구 문학동 문학산 방공포대(부대명미상)
77년 5월 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지뢰피해자
인천 포대명 2명: 97년 3월 24일, 인천 포대병 2명이 지뢰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B-19)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 (文安山) 방포부대(부대명 미상)
77년 5월 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지뢰피해자
병장1명: 93년 4월 12일 이 부대에 근무하는 병장이 지뢰를 밟아 발목을 절단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B-20) 미 1군단 포병대
70년 11월 23일 이양된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캠프 카이저 소속 불무산(영북면 문암리) 방공포대는 과거 미 1군단 미사일 기지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사실에 대해서는 국방부나 미군에서 사실 확인을 해오지 않음으로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96년 미 제 2사단 장병 3명이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 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 지대에 들어와 지뢰를 밟는 사고가 일어난 뒤 한국군에 문제를 제기 하지 않고 오히려 군장병들이 부상자들 호송에 협조한 것에 대해 감사패를 수여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미군이 매설한 지뢰지대이기 때문에 그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지뢰피해자: 96년 미 제 2사단 장병 3명이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 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 지대에 들어와 지뢰를 밟고 중상
▶자료출처: 미군 근무자 증언, 군관계자 증언, KCBL 3차 자료집, 신문기사
B-21) 부산 중리산 미사일기지(부대명 미상)
1964년부터 1979년까지 중리산에 있었던 `111 호크미사일대대 제2포대’에 창설 당시부터 근무했던 김문두(69)씨는 ‘군이 지뢰 매설 시기와 수를 속이고 있다’며 군의 발표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문두씨는 ’1964년 부대 창설 직후 미군 고문관 5명의 지도를 받아 국군이 25,000 여 발의 지뢰를 매설했으며, 이에 앞서 1년 간 미국에서 지뢰매설 교육을 받았고 1964년 6월 부산항으로 지뢰매설 장비와 함께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방부의 주장과 다른 것으로 논란이 있다. 특히 매설주체가 한국군인데도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고 미군의 장비로 매설했다는 것은 지뢰 매설에 관한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행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합참과 주한미군에 공식질의를 했으나 이점에 대해 특별한 지적이 없었으므로 일단 미군의 작전통제에 의한 지뢰매설로 간주한다.
▶지뢰피해자
부산중부소방서대원1명: 1996년 2월 25일 화재 진압 중 지뢰가 터져 발목 절단
▶자료출처: 신문기사, 당사자 증언, 합참, 미군에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
C. 피해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미군에 의해 지뢰가 매설된 지역
C-1) 캠프 보니파스
이 부대는 주한미군이 작전권을 행사하는 유엔사 경비대대로서 91년 이전까지는 DMZ순찰을 책임졌으나 그 후로 판문점을 비롯한 책임 지역 안에 대한 순찰 임무만이 남게 되었다. 이부대 안의 작은 골프장은 미국의 유명한 스포츠 전문지 기자가 와서 보고 골프공이 철조망 밖으로 날아가면 지뢰밭에 가서 터지는 가장 위험한 골프장으로 소개가 된 만큼 주변지역이 지뢰지대였으나 최근 들어서 부분 제거가 되었다.
▶자료출처: 주한미군 홈페이지, 주민증언, 카츄사 증언
C-2) 미 제1기병사단, 제 5기병대, 제12기병대
65년 당시 파평면 노파동에 주둔했었다. 인근 금곡리에 1기병사단이 있었고 이와 연동하여 뒷산인 파평산에 대공방어미사일기지가 있었다. 이 기지는 후에 한국군에게 이양되었으나 이양되기 전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대인지뢰가 매설되어 있으며 이곳을 통해 미군의 항공교통관제(파평산ATC)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료출처: 주민증언, www.globalsecurity.org
C-3) 미 1기갑사단 제 8연대 제2대대 D중대
70년 당시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를 매설 하였다.
▶자료출처: 미군 범죄기사, 미군부대 근무원 증언, 지뢰피해자 증언
C-4) 홍성 제기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남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마을주민과의 대담을 통해 10여 년 전에 미군 철수하고 한국군이 주둔하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예전에 ‘아마존’이란 클럽이 기지 아래 동네에 있어서 미군들 많이 목격했었다 한다. 지뢰지대가 있었고 길이 하나밖에 없어서 사람들 못 다닌다고 했으며 현장 확인 결과 증언과 일치했다.
▶자료출처: 주민증언, 군관계자 증언
C-5) 태안 백화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마을주민들과의 인터뷰에서 주민들은 미군들이 주둔할 때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고 증언 했다.
▶자료출처: 주민증언, 군관계자 증언
C-6) 울산 오봉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97.3.13 공군8991-5부대는 30년 전 매설되었으나 수량과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인근 야산전체를 출입통제구역을 한다고 함.
자료 출처: KCBL 3차 자료집, 현장 확인, 주민 증언
C-7)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안중지역) 고등산 (高登山) 방공포대는 1980년 5월 미군에게 인수받았다(뒤늦게 인수한 편).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지뢰밭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미군에 의해 지뢰매설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미군 범죄기사, 주민증언, 군관계자 증언
C-8)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방공포대는 80년까지 미군 미사일 기지가 주둔해 있다가 한국군에 이양되었다. 방포사령부 지뢰 제거 작전 계획에 따라 시범 지뢰 제거 작전 지역으로 선정되어 98년 4월 1순위로 제거에 들어갔으나 747발 중 734발만이 제거되어 지뢰지대를 철거하지 못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미군 범죄기사, 주민증언, 국방부 국감자료
C-9)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방포부대(부대명 미상)
77년 5월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C-10) 전북 김제시 황산동 (凰山洞) 방포부대(부대명 미상)
77년 5월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주민증언, 현장확인
C-11) 경기도 가평군 화악2리 화악산 (華岳山)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이양 받았다. 마을 주민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한국 전쟁 직후 미군이 항공기로 살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2,040여발이 매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증언, 현장 확인
C-12)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 (佛母山) 및 화산 (花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주민증언
C-13)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 대룡산 (大龍山)방공포대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주민증언, 현장확인
C-14) 충남 서천군 서면 합전리-월호리 옥녀봉 (玉女峰)방공포대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증언, 현장확인
C-15) 캠프 하워드(CP Howard)
충남 천안시 성환읍 수향리 미공군 탄약저장소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기지 주변에 지뢰지대가 있었다는 주민의 증언을 입수할 수 있었다. 현재는 지뢰 지대가 없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외무부공식문서, 주민증언, 현장확인
D. 현재 미군 사용시설 중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
D-1)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호명산(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D-2) 경기도 연천군 야월산 ATC
D-3)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파평산 ATC
D-4)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Evn ATC
D-5)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 사격장
D-6)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초평도 미군 훈련장
D-7)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그리브즈
D-8)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보니파스, 캠프 리버티벨
D-9) 부산시 해운대구 장산(캠프 하야리야) 통신대, 미 8군 제 1통신여단 307 통신대대
▶자료출처: www.globalsecurity.org, 현장확인
2) 미군의 지뢰 비축 관리실태
경기도 동두천시 미 제 2사단 탄약고:
현재 언론을 통해 확인된 지뢰 보관 탄약 콘테이너는 동두천 미 제 2사단 캠프 님블 탄약 콘테이너이다. 미 제 2사단 탄약고는 양주군에 위치한 캠프 광사리와 의정부 교도소 옆 캠프 스탠리가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동두천에서는 캠프 호비에 탄약저장소가 있다. 미군은 무기, 폭발물 안전기준(DA-PAM 385-64)에 따라 탄약고가 잘 관리되고 있다고 공언해 왔으나, 1998년 8월 6일 수해로 탄약고가 침수되면서 수류탄과 지뢰가 담긴 컨테이너가 10개나 유실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경기도 파주시 서부회랑 캔사스 훈련장 내의 지뢰훈련장:
고폭발 지뢰(High Explosive Mine) 등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지뢰가 훈련에 사용되고 있다. 66년 1월 6일 바뀐 미육군 야전교범 FM 23-30, Antipersonnel Mine M18A1 and M18 (Claymore)에 따라 훈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96년 영평 로드리게스 산악 훈련 시 미군3명 지뢰 사고, 캠프 그리브스 부근 미확인지뢰지대에서의 훈련 중 지뢰에 의한 미군 사망 사고 등이 발생하였다.
▶자료출처: 신문기사, www.globalsecurity.org, 현장확인
3)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상황
철원군 대마리와 생창리, 양구군, 파주시에서 과거 지뢰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이 밟은 대인지뢰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 통제권 하에서 매설되었거나 비행기에 의해 살포된 것들이었음이 당시 거주하던 주민들과 군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들 지역은 주로 민통선에 포함되어 있으며 비무장지대 이남에 속한다. 이들 지역은 최근 민통선에서 해제되면서 타지역의 민간인들까지 많은 대인지뢰 사고를 당하는 위험지역으로 돌변하고 있다. 비록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지뢰는 아직도 멀쩡히 민간인을 위협하는 무차별 살상무기로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대인지뢰를 매설했던 미국 당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다음은 그동안 민간인들의 증언으로만 확인되던 한국전 당시 미군들의 지뢰매설 상황이 어떠했는지 미군들 스스로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자료1. 한국에서의 전투지원 (Combat Support in Korea)
by captain John G. Webstover 1955
-combat forces press- p.58~66의 내용
65야전 공병대대 S-2 중위 샘 D. 스태로빈
1. 지뢰란 양면성을 띈 무기이다. 적당히 사용하면 강력한 방어수단이 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재앙이 될 수도 있다.(…)나는 최소한 150대의 사용 불가능한 북의 탱크를 보았는데 이들 중 한 대도 지뢰에 의해 파괴된 것은 없었다. 나는 또한 수많은 미군 탱크와 트럭들이 우리 자신의 지뢰에 의해 파괴된 것을 볼 수 있었다. (…)
2. 미군 지뢰전 교리는 흠 잡을 데가 없으나 8군이 120.000발의 지뢰를 부대에 보낸 후 불과 20.000발만이 보유하고 있거나 매설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100.000발은 버리거나 기록도 하지 않고 매설되었다.
3. 보병들은 가끔 우리 중대에 그들 정면에 공간이 생긴 곳에 무엄호 지뢰지대를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보병 지휘관들에게 이것은 건전한 방법이 아니라고 조언을 했지만 수차에 걸쳐 강압적인 이들 지휘관의 고집에 못 이겨 지뢰지대를 설치해 주었었다. 내 개인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일이 타 부대에서도 자주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4. 적은 무방호 지뢰지대의 지뢰를 뽑아다가 우군전선 후방에다 매설하는 것이 쉬운 일인 것을 알아내었다. 수송수단이 빈약한 적으로서는 20파운드짜리 지뢰의 편리한 공급원을 발견해낸 것이다. (…)
5. 적에게 지뢰를 뺏기는 두 번째 방법은 단순히 버리는 것이다. 전방으로 너무 많은 지뢰를 옮겨 놓았다가 전황이 바꿔지면 대량의 지뢰를 손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지휘관들은 지뢰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접적지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6. 특히 지뢰지대를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 한국전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지뢰가 매설된 지역에 다시 돌아오기 전에는 정확한 지뢰지대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지뢰지대를 설치한다는 것은 이미 매설된 지뢰지대에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거나 또 우군지역 주민과의 친선을 도모할 생각이 전혀 없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을 하지 않고 지뢰를 매설했던 여러 부대의 예를 들 수 있었다. 또 급히 서둘러 철수하는 바람에 지뢰를 매설하라고 하면 이동중인 트럭 위에서 장진된 지뢰를 내어 던져 버리는 식으로 타락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7. 미 제 25사단이 1951년 3월 초에 한강을 도하할 때 우리는 매설기록이 없는 미군지뢰지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 지역에서 작전하는 부대들을 찾아가서 지뢰지대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제3공병대대의 S-3가 철수해야한다는 압력에 못 이겨 기록을 하지 못 했던 의정부 근처의 부대가 설치한 지뢰지대가 있음을 기억해 냈다. 우리는 그가 지적한 지점에서 많은 차량들이 지뢰에 파괴되고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음을 알았다.
8. (…)보병 중대장이 공격선상에 지뢰지대가 있을 때는 그는 공병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제 보병들은 지뢰지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p.70~80 의 내용
영천시 신녕 전투 : 한국군사고문단 소령 데이비드 F. 캠벨
10. (….)공병들은 적 탱크가 사격을 위해 멈췄던 지점 근처 도로상 60야드에 걸쳐 40발의 M6대인지뢰를 매설했다(제1지뢰지대) 과거에 M6지뢰 매설 방식과는 달리 이번 지뢰는 장진이 됐을 뿐 아니라 각 지뢰는 그 밑에 M3대인지뢰 1발씩을 매설함으로서 촉발이 되었고 그러고 나서 3인치 인계철선을 손잡이에 부착했다. 우리는 52개의 대인지뢰를 도로의 좁은 노견부에 연해 매설하고 여기에다 도로와 그 도로의 노견부를 가로질러서 인계철선을 가설함으로써 우리의 대인지뢰를 한층 더 가공한 것으로 만들었다.(…)
11. 이 지뢰지대를 설치하는 동안 근처에 제1지뢰지대와 연결되는 제2 지뢰지대가 설치되고 있었다. 약 250발의 M3 대인지뢰가 요덕동 남방에 역할꼴 모양으로 매설되었다.(…)
13. 8월 31일~9월1일 야간에 한국군 제 9야병 공병대 a중대는 제2지뢰지대의 연장부 (제3지뢰지대)에 90발의 M3대인지뢰를 매설했다.(…)
15. 나는 다음날(9월1일)의 대부분을 촉발장치가 부족할 경우 대용품을 써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소비했고 약간의 시간을 들여 부비트랩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군은 적이 보급품 수송에 사용하는 달구지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우군침투 부대로 하여금 적 달구지의 수레바퀴를 제거하여 그 안의 축을 땅위에 놓고 그 축에 인계철선을 매어 놓는다. 적이 바퀴를 교환하려고 수레를 들어 올릴 때 부비트랩이 터지게 되어 있었다. 이 악명 높은 장치는 한국군 사이에서 ‘면도칼’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이 부비트랩이 터지면 목을 면도칼로 싹 잘라버리는 효과가 있기에 그렇게 부른 것 같다.
16. 같은 날 우리는 대전차 지뢰에도 촉발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제 1지뢰지대를 제외하고는 대전차지뢰에 대한 촉발 장치는 한 적이 없었다. 길이가 500야드 이상이나 되는 지뢰지대에 우리는 20%정도의 촉발장치를 설치했다. 규모가 더 작은 지뢰지대에는 100%의 촉발장치를 설치했다.
(*편집자주: 지뢰를 장진(Ariming)한다는 것은 모든 안전장치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지뢰를 촉발(activating)한다함은 내부에 도화선을 설치하거나 아니면 또 하나의 다른 지뢰를 사용함으로서 외관상으로는 안전하게 보이나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자동 폭발 장치를 설치하는 과정이다.)
17. 그 날 저녁(9월1일~2일) 추가로 두 개의 지뢰지대를 가설했다. 이들 중의 하나인 제 4지뢰지대는 요덕동 후방에 설치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탱크함정 계획의 일환으로 설치한 것이나 우리편이 그 지뢰를 폭파시키지 않도록 피해야만 했다. 이 지뢰지대는 90야드 이상의 정면에 90개의 대인지뢰에다 인계철선을 연결한 것이다. (…)
18. 9월2~3일 야간에 우리는 지뢰지대 설치를 계속하여 추가적으로 두 개의 지뢰지대의 설치작업을 마쳤다.
20. (….)우리는 제 4지뢰지대의 왼쪽으로 돌아서 이동하여 정숙을 유지하고 은폐하여 대기한 다음 적에게 발각 당하지 않고 적진지로 침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화수동의 교량은 이미 미공군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발견하였으나 적은 교량 북동쪽 50야드의 지점에 도섭장을 만들었었다.
21. 교량 북방의 강에서부터 도섭장까지 급조 지뢰지대를 설치했다.(…)
p. 80
34. (…)적은 남쪽으로부터 제 8지뢰지대에 돌아오게 되어 여기에서 10명 내지 15명의 병력 손실을 보았다.
35. 아군보병들이 요덕동 도로를 따라 남으로 728고지를 향하여 철수하고 있을 때 적은 제 2,3지뢰지대를 통해 증강된 연대규모의 공격력으로 의기양양하게 공격을 가해왔다. 이 지뢰지대는 500여발의 대인지뢰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화기 화력으로 엄호되었었다.
36. 이 교전 후 전선을 축소하면서 우리는 계속 도로 대화구를 설치하고 지뢰지대를 증가시켰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지뢰 지대 당 500발정도의 대인지뢰가 매설되었고 8개의 지뢰지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대략 4,000발 정도의 지뢰가 한 국지전투에서만 사용된 것이다. 이들 지뢰는 전쟁 후 공식적으로 제거된 기록이 없다. 어디엔가 묻혀 있는 것이다.
자료2. 한국 전쟁의 보.포.기갑 소부대 전투(Combat Actions in Korea)
R.A.Gugeler. -Association of the U.S army 1954-
p. 158의 내용
9. 지평리전투(경기도 양평근처)
(….)포병 중대들은 기관총을 진지에 거치하고, 박격포 기록사격을 실시하고 대인지뢰를 매설했으며 주위를 둘러싼 고지에 대해 일일 정찰대를 운용했다.
p. 257
14. 벙커고지(800고지)전투
(…) K중대원들은 철조망에 견인 조명탄과 폭약들을 연결시켜 놓았으며 철조망 사이에는 대인지뢰들을 매설해 놓았었다.
이들 자료에서 우리는 지뢰매설이 휴전선 근처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후방지역에서도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국방부로부터의 공식 답변에 의하면 전쟁 이후 90년대까지 지뢰제거작업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으로 봐서 전쟁이후 이들 지뢰가 국가적 행위로서 제거된 적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남 청양의 김유정 어린이 대인지뢰폭발 사고도 인근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지뢰지대가 없어서 최근의 지뢰원으로부터 유실되었을 가능성보다는 과거 전쟁당시의 매설됐던 지뢰로 판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위의 기록에 따른 미군의 행위는 전쟁 중이었다해도 국제법이 정한 민간인보호 의무가 체계적인 명령계통에 의해 무시된 채 집행된 일종의 전쟁 범죄이다. 따라서 이는 국제법을 어긴 명백한 사례가 된다.
1949년의 제네바 4개 협약과 2개의 추가의정서의 기본적 사고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자는 것인데, 위의 기록에서 보이는 미군들의 대인지뢰의 사용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행위이며, 1949년 ‘전시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도 위배되는 상황임이 드러난다. 이들 협약의 정신을 이어받은 1968년 ‘무력 분쟁 시의 인권존중에 관한 국제연합결의’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전투원과 일반민간인의 구별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록 과거의 사건일지라도 무차별한 지뢰의 매설 및 살포가 곧 전쟁범죄임을 선언한다. 미국이 가입을 거부한 1997년 국제대인지뢰금지협약 직전에 그들의 주도로 발효된 CCW특정재래무기금지조약 1조 ’적용범위‘에도 1949년 제네바협약의 정신은 재확인 되어있다.
1조. 이 협약 및 부속의정서는 전쟁희생자의 보호를 위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제협약의 공통제2조가 언급하고 있는 상황과 동 제네바 제협약의 제1추가의정서 제1조제4항에 기술되어 있는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
한반도 대인지뢰피해의 근원이 한국전쟁으로부터 연유함으로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그것을 철저히 밝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또한 미군이 전쟁을 돕기 위해 군사원조를 했다해도 전쟁 중에 민간인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고의적으로 무시한 작전통제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군사원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1949년 제네바협약은 노근리사건과 마찬가지로 지뢰의 무차별한 살포와 매설 또한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 행위임을 지적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미군 매설 지뢰에 관한 미국의 책임
우리는 미국에 대해 세가지 근거를 가지고 과거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첫째는 1997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발언이며, 둘재는 CCW특정재래무기금지조약이며
셋째는 정전협정이다.
첫째, 1997년 미국은 국제대인지뢰금지 협약에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국제적 비난과 외교적 고립의 상황을 염려하여 독자적인 4개 실천방안을 발표한다. 그리고 97년 11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이를 더욱 구체화한 계획을 다시 발표한다.
다음의 두 자료 중 첫 번째는 클린턴 대통령의 4개 실천방안과 관련한 내용이며 두 번째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클린턴 대통령의 4개 실천방안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계획을 밝힌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미국은 한반도의 군용 목적에 의한 대인지뢰에 대해서는 예외로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도 “2010년까지 지뢰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국가의 민간인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매년 1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한반도의 지뢰가 비무장지대에만 묻혀 있으며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단 한 건의 민간인 지뢰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오슬로 회의에서 한국정부의 이성주 대표가 무책임하게 발표한 정보오류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1997년 이후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가 벌여온 대인지뢰실태조사자료에 의하거나 그동안의 수많은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이는 미국이 잘못 알고 있는 정보이다. 또한 지금은 정전상태라고는 해도 주한미군사령관이자 유엔사사령관인 미군장성의 인정하에 비무장지대의 지뢰까지 부분적으로 제거가 된 상황이다. 설령 비무장지대의 지뢰는 군용으로 본다 하더라도 비무장지대 이외지역, 즉 민통선내부지역을 비롯한 이남의 전지역에 매설된 지뢰는 지금까지 민간인과 아군의 피해만을 초래했음이 분명한 이상 이에 대해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둘째, 미국이 주도하여 체결하였고 대인지뢰전면금지협약에 대한 견제용으로 옹호하고 있는 특정재래무기금지협약(CCW) 제2의정서에 의해서도 미국은 한반도에서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CCW개정 제2의정서 10조1항은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10조 1항. ‘체약당사국과 기타 이 의정서를 수락한 무력충돌의 당사자는 적극적인 敵對行爲의 종료후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안의 지뢰지대․지뢰․부비트랩 등을 제거․철거․파괴 또는 유지할 책임을 지도록 한다.’
셋째, 정전협정이다.
미국의 대인지뢰금지협약에 반대한 이유는 한반도 그중에서도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지뢰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국제적인 외교고립을 면하기 위해 미국은 궁색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비무장지대 안의 지뢰를 전후 50년이 지나도록 제거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체결한 중요한 협정을 위반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 협정은 다름아닌 정전협정이다. 정전협정2조 13항 ᄀ조에 따르면
‘본 정전협정이 효력 을 발생한 후 72시간내에 그들의 일체 군사역량, 보급 및 장비를 비무장지대로부터 철거한 후 비무장지대내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는 모든 폭발물, 地雷源, 철조망 및…군사정전위원회에 이를 보고 한다.
미군은 북에 항상 정전협정 준수를 요구해 왔다. 그런 미국이 자신들도 50년 동안 지키지 않은데 따른 결과를 이유로 해서 대인지뢰금지 협약에 불참한다고 한 것이다.
이미 비무장지대의 지뢰제거가 시작된 마당에 미국이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의 지뢰를 예외로 해야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더구나 지금 남북간에 진행되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지뢰제거작업에서 군사분계선 남쪽지역에 대한 제거 책임은 미국이 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하천을 통하여 매년 유실된 지뢰에 의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미국이 떳떳한 외교를 원한다면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의 정화조치에 관한 의무에 근거한 책임을 져야한다.
자료 3
[한국일보] 1997-09-19 (국제/외신) 기획연재 12면 “클린턴 ‘금지협약’ 대응책 발표”
자료4. [연합뉴스] 1997-11-01 “지뢰제거 책임에 관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발언”
4. 미군지뢰문제 해결을 위한 소파 3조와 4조의 개정
자료5. 과거와 현재 주한미군 현황
■참고자료1:
한국지뢰실태조사보고서-후방36개 대인지뢰 매설지역 실태조사보고서
■참고자료2:
ICBL(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발간,
2002 LANDMINE MONITOR수록 한국부분
1. 개요
1. 1997년 10월 31일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대인지뢰전면금지조약의 서명에 반대함으로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되자 미국이 2010년까지 지뢰제거를 위해 매년 10 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뢰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국가의 민간인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2. 과거 미군은 한국 전쟁 당시로부터 60년대까지 수십 곳의 주둔기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지뢰 제거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지뢰 매설 정보조차 한국군에게 이양하지 않아 미군이 매설한 지뢰로 인한 피해가 2002년까지 계속 되었다. 이번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 피해는 21개 지역 100명에 이르며 김포, 파주, 연천, 철원, 고성 5개 지역 주민들은 집단피해를 당했고, 주한미군조차도 5명이 지뢰사고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3. 또한 미군이 지뢰매설정보를 이양하지 않은 것이 소파3, 4조에 의해 규정된 ‘통고불이행’과 ‘원상복구불이행’ 조항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파 3, 4조의 개정이 시급하다.
4. 조사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과거 미군 기지의 지뢰매설정보는 고사하고, 철수한 미군기지의 위치에 대해서도 전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음이 밝혀져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미군의 과거 행적이 밝혀져 피해보상 등 반드시 주권을 행사할 일이 생겨도 객관적인 근거가 될 만한 기초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KCBL은 미국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발표와 특정재래무기금지협약 및 정전협정에 근거하여 과거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며 한미소파의 3조와 4조의 내용이 그에 준하여 개정될 것을 촉구한다.
※ 과거 미군 매설 지뢰와 그 피해 현황에 대한 개요
A. 미군 주둔 시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
시기
피해
내용
1
미 해병 1 연대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1951.9.18~10.31
1951년
주수산
50년대 중반
다리 절단
미 제 25사단
1953.5.13~7.27
1953년
미 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 A중대
1962년
1971년
미 제 2사단 23연대 3대대 B중대
1962년
1971년
2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
1953.5.13일~7.27
1953년
김중식
1960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38연대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71년
조만손
1965년
오른쪽 발목 절단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
3
경남 하동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및 용산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1971년
조성재
1969년
사망
4
캠프 리버티벨(CP LIBERTIBELL)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한국 전쟁 중, 1962년
현재 주둔중
미군1인
2001.5월
오른쪽 다리 부상
5
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의정부 가능동 호명산
가능동주민
1998.8.12
유실지뢰로 인한 불안감, 관광객 감소로 인한 재산피해
B. 미군 철수 후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1
경남 하동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및 용산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1971년
조헌필
1974.8.2
발목 절단
김영순
1976. 4월 초
발가락 절단
2
미 제 1사단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사격장과 자유의 다리 북쪽지역
1953.7
1971년
조두현
1983년
발목 절단
정정숙
1980.12.
발목 절단
윤금옥
1988년
발목 절단
신형식
1983년
발목 절단
이덕준
1979.8.14
왼쪽 발목 절단, 오른쪽 다리 파편부상
미 제 2사단 38연대
1962년
옹일랑
1976.3.29
발가락 절단
최명환
1980.1.13
발목 절단
이재연
1980년
발목 절단
이재문
1980년
발목 절단
3
캠프 페터슨
(CP PETERSON)
- 1기병사단 공병대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1960년대
1970년대
보광사 주지 및 신도, 지역주민
1998.8.8
보광사 옆 계곡에서 유실지뢰가 확인됐으나 제때 수거되지 않아 호우로 다시 유실되어 심한 주지외 신도 주민들 정신적 불안감
4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련리
1953.5.13~7.27
1953.7.27
백중현
1970년
다리 절단
미 수색 제 1사단
미군 1명
연도 미상
사망
캠프 그리브스 (CP Greaves)
1962년
현재 주둔 중
캠프 워리어 (CP Warrior)
대성동 주민1명
1993년
부상
캠프 두지 (CP Dooge)
5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 덕천리, 마지리등 20여개 훈련장
1953.5.13~7.27
1953년
윤호영
1961년
두 다리 절단
미 수색1사단
미 제 24사단 48 야포대
1960년 전후
1971.10.21
6
미 제 1사단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 야월산 ATC(항공교통관제-미군)
1951.4.22~11.11
1951년
김문빈
1971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3사단
1951.9.29~10.18
1951년
박금녀
1997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1952.9.18~ 10.31
1952년
김주권
1998.4.22
사망
부대명 미상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60년대초반
전창국
1996.5.24
사망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7
미 제1사단
경기도 연천 대광리와 철원 율리리 경계지역
1951.4.22~11.11
1951년
이민상
1997.3.8.3
손목 절단
김용관
1990.6.30
오른쪽 발목 절단
김일복
1995.7.12
왼쪽 발목 절단
신동윤
1995.8.18
옆구리에 파편이 박힘
미 제3사단
1951.9.29~ 10.18
1951년
강윤구
1995.8.28
양쪽 발목 절단
김찬수
1996.7.26
유실지뢰로 수해복구작업 지연으로 인한 재산피해
허태원
1996.7.30
유실지뢰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
김한풍
1996.7.31
미 제 2사단
1952.9.18~ 10.31
1952년
유성현
1996.8.1
손 찢기는 부상
박수억
1996.8.6
트랙터 타이어 파손
김학길
1996.9.6
일부 장비 파손, 실신
미 1군단 보병부대
1962. 쿠바사태 직후
1971년
성명미상
1996.10
굴착기 완파
오태의
1996.10
지뢰 발견, 심리적 불안감
최광훈
1997.4.5
중장비 파손,
얼굴 등에 전치 2주의 부상
정소이
2002.6.17
왼쪽 다리 절단, 오른쪽다리부상
8
미 제 3사단
철원군 대마리를 비롯
백마고지 전투지
1951.9.29~10.28
1951년
조창행
1965년
왼쪽 다리 절단
유철훈
1968.4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1952년 10월 이전
1952년
장동용
1975년
오른쪽 다리 절단
전병화
1990년
발목 절단
부대명 미상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60년대 초반
박경서
1968.4
대퇴부 절단
이수진
1968년
발목 절단
9
미 제 25사단
철원 김화 북단 생창리를 비롯한 저격능선, 삼각고지 전투지
1951년 10월
1951년
10월 이후
고문현
1979년
사망
박영주
1979년
발목 절단
미 제 7사단
1952년 9. 18.~11. 25
1952.11.26
엄영구
1973.12.4
사망
미공수187연대
1952.10.14~11.25
1953.7.13.~7.27
1953.7.28
박정호
1992.12.4
사망
이은용
2002.4.22
사망
10
미 제 74사단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1951년 10. 8.~22.
1951년
반윤수일병
1997.1.11
사망
미 제 3사단
1953년 7. 13.~27
1953년
서원배병장외 5명
1997.10.11
중경상
11
미 제 24사단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외성동리
1951.10.9~22
1951.10.23
김성곤병장
1998.5.20
사망
임대필일병
사망
김창수이병
사망
박성필상병
부상
12
미 제 25사단
강원도 철원 김화지역
1951년 5. 23.~ 6.10
1951년6.10
고준진
1970년
두 다리 절단
미 제 7사단
1952년 9.18~ 11월
1952년11월
김천수
1996.8.1
유실지뢰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정신적 충격과 농사지연.
미 공수 제187연대
1952년 10.14.~11.25
1952년11.25.
김진두
1997년 5.28
트랙터 일부 파손
미 제 2사단
1953년 7. 13.~ 27
1953년7.27.
철원농민 다수
1996.8
1996년 8.30. 수해로 인한 유실지뢰 제거 되지 않아 농사포기
13
미 제 7사단
강원도 화천군 일대, 파로호 상류
1951.5.23.~ 6.10
1951년 6.10.
한재영
1996.8.4
낚시 중 사고, 발목 절단
최순원
1996.8.31
1년생 송아지 발목 절단
미 제 24사단
한정열
1996.8.12
자신의 밭에서 지뢰 발견. 정신적 충격, 농사일시중지.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14
미해병 제 1사단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오유리, 현리
1951.6.3~9.20
1951.9.20이후
김옥자
1994.6.15
대퇴부 파편
박춘영
1993년
발목 절단
오흥식
1993년
발목 절단
오종식
1994.12
사망
오흥식씨 아들
1994.12
사망
미 제 45사단
1953.5.13~ 7.27
1953.7.27이후
김옥수
1994.12
사망
백춘옥
1998.8.12
발목 절단
이영준
2002.6.17
트랙터 운전 중 대전차 지뢰를 밟아 온몸에 중상을 입고 한쪽 눈 실명, 트랙터는 완파
15
미 수색 제 1사단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 월운리
1951.5.23.~6.10
1951.6.10
윤원근병장
차재욱병장
문승훈병장
김영철이병
1997.6.13
사망
사망
중상
중상
미 제 2사단
1951.8.18.~9.18
1951.9.18
미 제 45사단
1953.5.13.~7.27
1951.7.27
16
미 10군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1951년~1953.7.27
(미 10군단 예하 한국군부대가 매설)
1953년 7.27.
고성주민
1996.4.4
산불이 발생한 뒤 지뢰밭 때문에 진화지연으로 재산피해
정현철병장
1997.3.13
사망
박원갑상병
사망
장대성상병
부상
김유연상병
부상
현승국상병
부상
박진규상병
부상
박기돈일병
부상
홍간낭
2000.5.13
왼쪽 발목 절단
김일동대위
2002.9.4
왼쪽 눈과 양 손에 중상
17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章陵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1960년대 추정
1982년 5월
지역주민 13명
1984.9.1
수해 시 지뢰 폭발로 산사태
방포부대원11명
1994.8
부대 내에서 M18A1크레모아 폭발, 1명 죽고 10명 부상
18
인천 문학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인천 남구 문학동 문학산
1960년대 중반 추정
1977.5.29
포대병2명
1997.3.24
중상
19
충북 진천군 문안산 (文安山)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
1960년대 중반 추정
1977.5.29
부대병장
1명
1993.4.12
발목 절단
20
미 1군단 포병대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영북면 문암리 캠프 카이저 소속 불무산 방공포대
1960년대 중반 추정
1970.11.23
미 제 2사단 장병 3명
1996년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지대에 들어가 지뢰 밟아 사고
21
부산 중리산 미사일기지(부대명 미상)
부산 영도구 동삼동 산 159
1964.6(미군 작전 통제하에 한국군이 매설)
1964년
부산 중부 소방소 대원
1996.2.25
화재 진압 중 지뢰 터져 발목절단
C. 피해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미군에 의해 지뢰가 매설된 지역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시기
1
캠프 보니파스(CP BONIFAS)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한국 전쟁 중, 1962년
현재 주둔 중
2
1 기병사단, 제 5 기병대, 제 12 기병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노파동
1960년대
1970년대
(그러나 현재도 일부시설 사용 중)
3
미 1기갑사단 제 8연대 제2대대 D중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1962년 쿠바사태직후
1971년
4
홍성 제기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남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1970년대
1990년 이전
5
태안 백화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1960년대 추정
1974년
6
울산 오봉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울산시 남구 양정동
77년 이전
미상
7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
(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안중지역) 고등산 (高登山)
1960년대
1980.5.
8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
(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1960년대
1980년
9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1960년대
1977.5.29
10
전북 김제시 황산동 (凰山洞)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전북 김제시 황산동
1960년대
1977.5.29
11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華岳山)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경기도 가평군 화악2리 화악산
1960년대
1977년 전후
12
경남 김해시 장유면 불모산 (佛母山) 및 화산 (花山)(부대명 미상)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미상
1977년 전후
13
강원도 춘천시 대룡산 (大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 대룡산
미상
1977년 전후
14
충남 서천군 옥녀봉 (玉女峰)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충남 서천군 서면 합전리-.호리
미상
1977년 전후
15
캠프 하워드 CP HOWARD
(미공군 탄약저장소)
충남 천안시 성환읍 수향리
미상
1970년 이후
D. 현재 미군 사용시설 중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
D-1)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호명산(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D-2) 경기도 연천군 야월산 ATC
D-3)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파평산 ATC
D-4)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Evn ATC
D-5)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 사격장
D-6)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초평도 미군 훈련장
D-7)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그리브즈
D-8)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보니파스, 캠프 리버티벨
D-9) 부산시 해운대구 장산(캠프 하야리야) 통신대, 미 8군 제 1통신여단 307 통신대대
2. 주한미군의 과거 지뢰매설관련 상세 조사 자료
1) 미군이 과거 지뢰를 매설한 지역과 민간인 피해 실태 상세 보고서
A. 미군 주둔 시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A-1) 미 해병1연대, 미 제 25사단, 미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 A중대, 미제 2사단 23연대 3대대 B중대
연천군 고랑포리를 중심으로 한국전쟁당시인 1951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 미 해병 1연대가, 1953년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25사단이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주둔해 있던 미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와 미 제 2사단 23연대가 1962년 쿠바사태직후 지뢰를 새로 매설하였다. 또한, 이곳은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방어구간의 끝 지점으로 방어가 허술하여 북의 특수부대가 침투했던 지점으로 그 사건 이후 대대적인 지뢰매설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 졌다. 파주 파평면 장파리에 사는 주수산씨가 50년대 중반 지뢰 사고를 당한 곳이다.
▶지뢰피해자
주수산 : 50년대 중반에 야산에서 사고 (인터뷰 내용 : 사고 뒤 생계활동을 할 수가 없어 6 남매들을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신다.)
▶자료출처: 미군 범죄기사, 지뢰피해자 증언
A-2) 미 제 25사단, 미 제 2사단 38연대,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
한국 전쟁 당시인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를 중심으로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제 25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그 뒤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다. 휴전이후 미 제 2사단 38연대,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가 주둔했으며 1962년 쿠바사태 직후에도 지뢰가 매설되었다. 현재도 미군훈련장인 스토리사격장 근처인 이곳에는 지뢰작전에 관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지뢰피해자1 : 김중식
피해 시기 : 1960년
피해 내용 : 왼쪽 다리 절단
지뢰피해자2 : 조만손
피해 시기 : 1965년
피해 내용 : 오른쪽 발목 절단
▶자료출처: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1992년판-행림출판사, 중공군의 한국전쟁사-한국전략문제연구소-1991년판-세경사, 미군 범죄기사, 주민 증언, 미8군 홈페이지
A-3)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지뢰 매설한 것은 분명, 그러나 70년대 초 국군 제 39사단에서 기지를 이양 받을 때 정확한 지뢰 매설 보고서를 인수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연합뉴스기사에 의하면 53년 매설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군에서는 60년대로 확인했다.
조사된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조성재: 69년 지뢰 사고, 94년도에 사망
▶자료출처: 육군보도자료, 피해자증언
A-4) 캠프 리버티벨(CP LIBERTIBELL)
91년 이전까지 미 제 2사단 캠프였으나 91년 이후 병합되어 동쪽 보니파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리버티벨이란 이름이 캠프 이름으로써 존재한다. 보니파스와 함께 인근이 모두 지뢰지대이다. 역시 한국 전쟁 당시 매설된 미확인지뢰지대와 더불어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 매설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병사 : 2001년 5월 중순 DMZ를 따라 정찰 중 미군1명이 M14 대인지뢰를 밟고 오른쪽 발에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미확인지뢰지대에서 일어났고 그 군인이 병원에 가는데까지는 구급차에 닿기까지 급하게 1.5마일을 뛰어간 시간까지 합쳐 2시간 반이 걸렸다.
▶자료출처: ICBL 대인지뢰 모니터 코디네이터 메리 워레함이 2001년 7월 6일 워싱턴 DC 월터리드 군인병원에서 피해 군인과 인터뷰한 내용, 주민증언, 주한미군 홈페이지
A-5) 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경기도 의정부시 및 양주군 양주읍 어둔리 호명산 (號鳴山) 방공포대자리에 위치했다.
미군 기지 반환 후 한국군에 이양되었고 기지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현재 다시 미군이 시설을 점유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군의 기지 철수와 함께 지뢰제거 작업이 실시되었으나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미군이 현재 사용하고 있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가능동주민: 1998년 8월12일 가능3동 호명산 계곡으로 흘러온 유실지뢰가 제거되지 않아 주민들의 생활 불편과 관광객 감소로 재산 피해.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증언, 현장확인
B. 미군 철수 후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B-1)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내용은 위 A-3과 동일하나, 피해자들의 피해시기를 기준으로 분류. 아래의 피해자들은 미군철수 후의 피해자임
▶지뢰피해자
조헌필: 1974년 8월 2일 (당시 14세), 사격장 옆 지뢰 철조망이 없었으며 논과 맞닿아 있는 부분엔 지뢰가 없었다. 지뢰를 밟고 왼쪽 무릎 밑을 절단하고 오른쪽 다리는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현재는 어머님, 아들 1명과 살고 있으며 의족을 끼고 생활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 관절통으로 물리치료를 계속 받아야 한다.
김영순: 76년 4월 초순경(당시 51세) 논으로 가는 길에 고사리를 채취하던 중 철조망 바깥에서 지뢰 사고를 당하고 진주 병원에 2개월여 입원, 새끼발가락을 절단하였다.
B-2) 미 제 1사단, 미 제 2사단 38연대
한국전쟁시기인 1953년 7월 파주시 진동면을 중심으로 전투를 치뤘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되었다. 그 후 이곳은 미확인지뢰지대가 되었다. 미 제 2사단 38연대는 휴전 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사격장과 자유의 다리 북쪽지역에 산개되어 있었다고 한다.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와 장파리의 지뢰 피해자 14명이 모두 이곳에서 지뢰 사고를 당했다.
▶지뢰피해자
조두현 : 83년, 가을 논에서 추수하던 중 사고, 발목절단 (인터뷰 내용 : 1년이 넘도록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정신적 충격도 컸다)
정정숙 : 80년 12월, 논에서 일하다가 사고, 발목 절단 (인터뷰 내용 : 병원비가 없어서 치 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지금도 앉았다가 일어서기가 고통스럽다)
윤금옥 : 88년, 밭에서 김을 매다가 사고 (인터뷰 내용 : 고령의 나이로 의족이 무거워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태임을 호소)
신형식 : 83년, 논에서 작업중 사고. 발목 절단
이덕준 : 79년 8월14일, 미군부대 근로자로 일하다가 기지 철수와 함께 일자리를 잃고 날품 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군부대 마초 작업에 동원되어 작업하다가 사고. 왼쪽 다 리 절단, 오른쪽 다리는 파편이 박혀 불구가 되었다.
옹일랑 : 76년 3월29일, 과거 미군부대가 있던 야산에서 작업중 사고
최명환 : 80년 1월 13일, 과거 미군 부대가 있던 야산에서 작업중 사고. 오른쪽 발목절단. 2000년 사망
이재연 : 1980년, 야산에서 마초 작업 중 사고
조만손 : 1965년, 미군 부대 내에서 시야를 가리는 나무를 벌목하던 중 사고. 오른쪽 발목 절단
이재문 : 1980년 과거 미군부대 지역에서 마초 작업 중 지뢰 사고. 오른쪽 다리 절단
자료 출처: 미군 범죄기사, 주민증언.
B-3) 캠프 페터슨(CP PETERSON) – 1기병사단 공병대대
65년 당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캠프 페터슨이 주둔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민증언에 의해 영장리 고령산(高嶺山)과, 개명산(開明山)의 레이다 기지에 이곳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캠프 페터슨의 소속부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뢰피해자
보광사 주지 및 신도, 지역주민: 1998년 8월 6일 산사태로 근무병 2명이 사망한 사실이 있다. 이때 보광사 옆 계곡에서 굴착기를 동원, 수해복구작업을 하던 중 대인지뢰 1개가 굴착기 밑에서 폭발. 또 이곳에서 3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상류에서 떠내려 온 흙더미 속에 구형 대인지뢰(과거미군매설지뢰로 추정) 1개가 파묻혀 있는 사실이 인부들과 시체 수색작업을 벌이던 軍에 의해 확인됐으나 제때 수거되지 않아 9일 호우로 다시 유실되어 심한 정신적 불안감을 느꼈다한다. 주민 증언에 의해 오래 전부터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자료출처: 외무부 공식문서, 주민 증언, 보광사 전 주지스님의 증언, 파주시 공무원 증언. 신문기사
B-4) 미 제 25사단, 미 수색 제1사단, 캠프 그리브스, 캠프 워리어, 캠프 두지(CP Greaves, CP Warrior, CP Dooge)
이들 부대는 임진각 통일대교 건너 파주시 군내면 백련리 남북회담 사무국 근처에 몰려서 위치하고 있으며 미 제 2사단의 506보병 1대대가 주 병력이다. 한국전당시 매설된 미확인지뢰지대가 존재하며 1962년 쿠바사태를 전후하여 다시 매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부대 인근에서 일어난 지뢰 사고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백중현: 문산읍의 백중현씨가 이 부대근처에서 농사 중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했다.
미군1인: 미군이 이 부대근처의 미확인지뢰지대에서 훈련 중 사망(-미 제 1사단 근무병이었던 정봉석씨의 증언)
대성동주민 : 1993년 대성동 마을 외곽에서 한 여성이 지뢰를 밟아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94년3월1일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임야 260ha를 태우고 매설되어 있던 지뢰 50여발이 폭발했다.
▶자료출처: 주민 증언, 미8군 인터넷사이트, ICBL자료
B-5) 미 제 25사단, 미수색1사단 미 제 24사단 48야포대
한국전쟁시기인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25사단과 미 수색1사단이 동두천과 적성, 문산 사이를 오가며 싸웠고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전쟁 후 상당기간 미확인지뢰지대로 남았다. 1960년을 전후로 해서는 미 제 24사단 48야포대를 비롯 미 제 2사단 훈련장이 20여개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방부 답변자료에 따르면
‘71년 3월26일 미군이 징발하던 토지 6,000 만평 중 1,100만평을 징발 해제한다고 발표하고 71년 10월21일 징발 무효조치를 함. 그리고 이 지역은 미 제 2 사단 훈련장으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의 20개 지역으로서 세부내용은 추적이 곤란함.’
지뢰피해자 윤호영씨 대담에 따르면
“ 영국군들이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뒤 미군들이 관리하다 한국군 부대가 들어 왔다.”
현재 미군 범죄 관련한 신문기사를 통해 적성면에서 확인되는 부대는 식현리에 주둔했던 미 제 24사단 48야포대이다. 조사시 인근 국사봉 훈련장에는 국군 70보병연대 3대대장 명의로 “이곳은 미군훈련장이 아님’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과거 미군훈련장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정확한 지뢰매설 미군부대의 소재 파악은 어려우나 우선 확인된 식현리의 미 제 24사단 48포대에 그 혐의를 둔다.
▶지뢰피해자
윤호영 : 1961년 적성면 마지리 민통선에 논을 만들기 위해 민간인 지뢰제거업자와 개간작업을 하던 중 나무를 베어 묶어 내려오다가 지뢰 사고로 두다리를 잃었다. 당시 나이 29세.
▶자료출처: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지뢰피해자 증언, 신문기사, 현장 확인
B-6) 미 제 1사단,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한국전쟁당시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 야월산을 중심으로 1951년 4월 22일부터 11월 11일까지는 미 제 1사단이, 1951년 9월 29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미 제 3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싸웠다. 이곳은 백마고지 전투가 있었던 인접지역으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매설된 지역으로 다수의 지뢰 피해자 발생한 곳이다.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매설이 있었음이 주민증언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도 주한미군 통신 정보시설(ATC)이 위치해 있다.
▶지뢰피해자
김문빈 : 1971년, 야월산 근처 농지를 개간하던 중 사고. 왼쪽 다리 절단.
박금녀 : 97년, 나물을 뜯던 중 M14 대인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가 절단.
김주권 : 98년, 4월22일 철원 동승읍 이평리에 살던 김주권씨가 과거 자신의 고향인 야월산 기슭을 찾아 산나물을 캐던 중 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사망.
전창국 : 96년 5월24일,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에서 나물을 뜯던 중 지뢰 폭발사고로 사망.
▶자료출처: 주민증언, 인터넷사이트
B-7) 미 제 1사단,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미 1군단 보병부대
한국전쟁 당시인 연천 대광리와 철원 율리리 경계지역을 중심으로 1951년 4월 22일부터11월 11일까지는 미 제 1사단이, 1951년 9월 29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미 제 3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전쟁을 치뤘다. 미1군단의 보병부대는 전쟁직후부터 주둔했으며 70년대 초반에 철수하였다. 그 뒤 한국군이 인수하였으나 미군들이 기지를 철수하면서 지뢰지대의 지뢰를 제거하지 않고 떠남으로서 미확인지뢰지대가 되었다. 그 뒤 매년 장마철이 되면 차탄천 상류인 이곳으로부터 한탄강을 따라 M14플라스틱 지뢰가 도처에서 발견되었으며 많은 지뢰피해자들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이민상 : 1973년 8월 3일, 연천군 백학면 노곡1리에서 수해로 떠내려온 지뢰를 군인들이 보 고서도 치워주지 않자 이를 직접 치우다가 사고. 손목이 잘리는 부상.
김용관 : 1990년 6월 30일, 자신의 논에 수해로 쓰러진 벼를 세우다 지뢰가 터지는 사고. 오른쪽 발목 절단.
김일복 : 1995년 7월 12일, 밭에서 일하던 중 수해로 유실되어 떠내려온 대인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발목 절단.
신동윤 : 95년 8월 28일, 백학면 노곡리 임진강변에서 물고기를 잡던 중 차탄천과 한탄강에 서에서 떠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지뢰가 폭발하여 사고. 옆구리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
강윤구 : 95년 8월 28일, 백학면 노곡리 임진강변에서 신동윤씨와 물고기를 잡던 중 지뢰가 폭발하여 사고. 양쪽 발목을 절단.
김찬수 : 96년 7월 26일,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서 수해 때 차탄천에서 떠내려오는 지뢰를 발견하고 수해복구작업을 한 달 이상 하지 못해 재산상의 피해가 더 커졌다고 호 소.
허태원 : 96년 7월 30일, 연천군 신서면 와초리 차탄천 인근 자신의 밭에서 홍수 뒤에 떠내 려온 지뢰와 폭발물을 발견하고 군부대에 신고. 심리적 충격 호소
김한풍 : 96년 7월 31일, 연천군연천읍 상2리 자신의 집 앞 도로에서 홍수로 떠내려 온 M14대인지뢰를 발견 신고 함. 심리적 충격 호소.
유성현 : 96년 8월 1일, 연천군 연천읍 옥산2리 배동훈씨의 밭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수해복 구를 돕던 중 지뢰를 주워 만지다가 손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함.
박수억 : 96년 8월 6일, 연천군 연천읍 와초리 자신의 옥수수 밭에서 소먹이용 사료를 수확 하던 중 대형 트랙터가 대인지뢰를 밟는 바람에 타이어가 터지는 사고를 당함.
김학길 : 96년 9월 6일,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자신의 논에서 중장비로 논을 갈다가 지뢰가 터져 일부장비가 파손되고 실신하여 병원에 입원 치료받음.
성명미상 : 96년 10월,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 차탄천에서 제방복구작업을 하던 중대전차 지 뢰가 폭발하여 굴착기가 완전히 파괴 됨.
오태의 : 연천군 연천읍 옥산리 차탄천 변에서 중장비로 농지정리를 하던 중 M14 발목지뢰 2개를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함 (인터뷰 내용 : 심리적 충격 호소)
최광훈 : 97년 4월 5일, 철원군 철원읍 율리리, 과거 미 1군단 보병부대의 지뢰매설지대 앞 율리천 수해복구 작업 중 중장비가 지뢰를 건드려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 중장비일 부가 파손되고 얼굴 등에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음.
정소이 : (33세) 2002년 6월 17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소재 화신폭포 옆 임진강변 에 아버지와 나들이를 갔다가 유실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다리 절단, 오른쪽 다리 부상
▶자료출처: 미군 근무자 증언, KCBL자료집, 피해자 증언.
B-8)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미 제 3사단은 1951년 10월까지 철원 대마리와 그 인근에 주둔하였으며 그 뒤 한국군 미 제 9사단을 주력으로 하여 미군사령관의 작전 통제 하에 백마고지 전투를 치뤘다. 1952년 10월 전후로는 미 제 2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전 과정에서 대인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 후 지뢰지대를 제거한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전쟁 후 이 지역 전체는 미확인지뢰지대로 방치되었으며 68년 군 경험자들을 중심으로 개척촌을 형성하기 위한 개간작업이 이루어짐. 이 과정에서 마을주민 60여명이 대인지뢰로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으며 현재는 5명만이 생존해 있다. 군에서 중령으로 예편한 후 현재 마을 노인회장을 지내고 있는 모씨(본인과의 약속에 따라 이름을 밝히지 않음)는 62년 쿠바사태 직후 비상이 걸려 민통선 지역에 주둔하던 미군이 일제히 지뢰를 매설하던 시기에 자신의 손으로 수 만 발의 지뢰를 직접 묻었는데 그 지뢰로 결국 주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깊이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생존시 조사가 이루어진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조창행 : 65년 봄, 마을입주 초기라 천막에서 생활하며 경작할 땅을 개간하던 중 지뢰를 밟 아 사고. 왼쪽다리 절단(2000년 사망)
유철훈 : 68년 4월, 대마리로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 집터와 학교터를 닦기 위한 공사를 하던 중 발목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다리 절단.
장동용 : 75년, 자신의 논에서 경운기를 끌고 개간작업을 하던 중 지뢰 사고. 오른쪽 다리 절단.
전병화 : 90년, 대마리 주변지역 개간 시 발목지뢰 밟아 사고. 발목 절단.
박경서 : 68년 4월, 대마리 입주 초기 북과의 교전이 자주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개간한 땅 은 재간한 사람이 소유하게 한다는 군의 약속만 믿고 농지 개간 중 지뢰를 밟아 사고. 대퇴부절단. 그 뒤 땅의 원래 소유자가 나타나 개간한 땅을 다시 차지하는 데도 군과 정부는 아무런 대책 없이 모른 척. 결국 목숨을 바쳐 개간한 농토를 다 빼앗긴 꼴이 되었다 한다.
이수진 : 68년, 대마리 입주초기 농지 개간 중에 지뢰 사고. 발목 절단.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9) 미 제 25사단, 9군단, 미 제 7사단, 미공수187연대
철원 김화 북단 생창리 등을 중심으로 한국전 당시 저격능선 전투, 삼각고지 전투를 주도한 부대들이다. 51년 10월부터 52년 10월 이후까지 김화 북쪽지역에서 저격능선(Sniper Ridge)전투가 있었으며 미 제 25사단은 초반부에 9군단은 후반부에 한국군을 작전 통제하여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52년 10월 이후 이뤄진 일명 삼각고지전투에서의 주력은 미 제 7사단이었다.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는 미공수187연대가 합류하여 싸웠다. 이 기간동안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된 지뢰는 상상을 불허하는 숫자라고만 전해질 뿐 어디에도 누구에 의해서도 정확한 숫자와 매설지도가 작성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지역은 미확인 지뢰 지대가 되었으며 대마리와 마찬가지로 민간인들이 직접 개간한 땅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김화읍 생창리를 중심으로 조사된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문현 : 1979년, 초등학교 4학년 때 먹을 것이 없어 와수리 동네 야산에 올라가 산열매를 따먹다가 지뢰를 밟아 사고. 사망.
박영주 : 1979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인 고문현과 먹을 것을 찾아 산에 올라갔다가 지 뢰가 터지는 바람에 친구와 함께 사고. 발목 절단.
엄영구 : 1973년 12월 4일, 생창리 학교 앞 공터에서 고철을 수집해 생계를 이어가던 중 고 철 사이에 끼어 있던 지뢰를 건드려 폭발 사고. 그 자리에서 사망.
박정호 : 1992년 12월 4일, 생창리 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이웃의 논을 대신 갈아주다가 지 뢰가 터지는 사고. 그 자리에서 사망.
이은용 : 2002년 4월 22일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 속칭 샘물고개에서 나물을 뜯던 중 지뢰 밟아 사망. 3일만에 시신 발견.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10) 미 제 74사단, 미 제 3사단
1951년 10월9일에서 22일 사이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적근산을 중심으로 하여 미 제 74사단이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수색부대원들이 작전 중 많은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반윤수일병 : 21세로 97년 10월11일 전방진지 보강 공사 중 지뢰사고로 사망
서원배병장외 5명: 같은 날 반윤수 일병과 함께 공사 중 지뢰사고로 중경상
B-11) 미 제 24사단
1951년 10월 9일과 22일 사이에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외성동리를 중심으로 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수색부대들이 작전 중 많은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김성곤병장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임대필일병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김청수이병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박성필상병 : (23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부상.
B-12) 미 제 25사단, 미 공수 제 187연대, 미 제 2사단
강원도 철원 김화지역을 중심으로 1951년 5월 23일부터 6월10일까지 미 제 25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1월까지는 미 제 7사단이,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25일 까지는 미 공수187연대가, 그리고 1953년 7월 13일부터 27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전투를 치룬 곳이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주 하천인 남대천을 따라 큰 홍수 때마다 지뢰가 하천으로 유실되어 지뢰사고를 일으켰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준진 : (20세) 1970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야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 두 다리 절단.
김천수 : (39세) 1996년 8월1일 김화읍 청양3리 남대천 수침교 근처 논에서 일하던 중 유실 지뢰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정신적 충격과 불안감.
김진두 : (42세) 1997년 5월28일 김화읍 청양3리 논에서 트랙터를 타고 모내기하던 중 발목 지뢰가 터져 트랙터 일부가 파손.
철원농민 다수: 1996년 8월30일 수해 뒤 지뢰제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농사포기, 지 뢰제거를 촉구하는 시위
B-13) 미 제 7사단, 미 제 24사단
1951년 5월23일부터 6월10일 사이 미 제 7사단은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 상류의 백석산을 중심으로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같은 기간 미 제 24사단은 춘천호 상류인 화천군에 주둔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주 하천인 북한강을 따라 큰 홍수 때마다 지뢰가 하천으로 유실되어 지뢰사고를 일으켰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한재영 : 1996년 8월 4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무룡1리 참샘골 파로호에서 낚시 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 발목 절단. 당시 나이 44세
최순원 : 1996년 8월 31일 역시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무룡1리 참샘골에서 최순원 씨가 기르던 1년생 송아지가 지뢰폭발로 발목이 절단 됨. 당시 나이 37세
한정열 : 1996년 8월 12일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1리 춘천댐 하류인 자신의 밭에 서 홍수로 떠내려온 지뢰 발견. 정신적 충격과 불안으로 한동안 농사를 짓지 못 함. 당시 나이 48세
B-14) 미 해병 1사단, 미 45사단
1951년 6월 3일에서 9월20일 사이 미 해병 1사단,1연대, 5연대, 7연대, 11포병연대 3대대와 미해병 1사단 작전통제하의 국군1해병연대가 양구군 팔랑리와 만대리를 무대로 도솔산 전투를, 그리고 현리, 오유리 등을 무대로 일명 펀치볼 전투를 전개한다. 또한 1953년 5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 미 제 45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전쟁이후 미확인지뢰지대로 방치되었다. 60년대 초 주민들을 이주시켜 지뢰밭을 개간하게 하고 마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현리 마을 한곳에서만 24명의 지뢰피해자가 발생했다. 2002년에도 만대리에서 지뢰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날 정도로 아직까지 지뢰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생존해 있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조사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김옥자 : 94년 6월15일 나물을 캐러 야산에 오르다가 지뢰 사고. (인터뷰 내용 : 엉덩이에 파편이 박혀 진물이 흐르고 걷기가 불편, 사고 충격으로 실어증 증세)
박춘영 : 93년 오유리 마을 뒷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다리 절단 본인을 비롯 가족 4명이 지뢰 피해자인 가장 비극적인 지뢰 피해 가족.
오흥식 : 93년 오유리 뒷산에 올라 생계를 위해 약초를 캐던 중 지뢰 밟아 사고. 발목 절단 박춘영할머니의 둘째아들.
오종식 : 94년 12월 오유리 뒷산에 토끼를 잡으러 조카 함께 갔다가 지뢰 밟아 사망.
김옥수 : 94년 12월 오유2리 인근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가 지뢰 밟아 사망.
백춘옥 : 98년 8월 12일 농사일 끝내고 냇가에 내려가 씻으려는 중 물에 떠내려온 지뢰 밟 아 사고. 발목 절단.
이영준 : 2002년 6월17일 트랙터운전중 대전차 지뢰를 밟아 온몸에 중상을 입고 트랙터는 완전 파손.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15) 미 수색 제 1사단, 미 제 2사단, 미 제 45사단
강원도 양구군 동면 비아리, 월운리를 중심으로 일명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이 위치한 곳으로 1951년 5월23일부터 6월10일까지 미 수색 제 1사단이, 1951년 8월18일부터 9월18일까지 미 제 2사단이,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45사단이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군인들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월운리 육군부대:1996년 9월22일 무장탈영병이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 민간인통제선 내 지뢰밭으로 도주하여 수색지연.
윤원근병장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사망.
차재욱상병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사망.
문승호병장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중상
김영철병장외 5명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 거중 지뢰폭발로 중경상.
B-16) 미10군단
1951년부터 한국전쟁이 진지전 양상으로 변화되면서 미10군단이 강원도 동부지방을 담당하여 전투를 치뤘다. 그리고 미 10군단 예하 한국군에 의해 강원도 고성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군인과 민간들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성주민 : 1996년 4월 4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달리 범장골 계곡에서 발생한 산불이 계속 번져 갔으나 이 지역이 지뢰밭인 관계로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60ha 를 태우고 지역전체의 재산손실을 가져옴.
정현철병장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원갑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장대성상병: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김유연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현승국상병: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진규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기돈일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홍간낭 : 2000년 5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현례면 명파리 야산에서 산나물을 채취하다 지뢰를 밟아 왼쪽 발목 절단.
김일동대위 : 2002년9월4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에서 태풍피해 복구작업을 벌이다 발견한 지뢰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 지뢰가 폭발, 왼쪽 눈과 양 손을 잃 는 중상.
B-17)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章陵山)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원래 미군기지였다가 1982년 5월 국군이 인수하였다. 국군에 의한 지뢰 매설이 확인되었으나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사실도 있었다는 주민 증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지역주민13명:1984년 9월1일 수해 시 지뢰 폭발로 산사태가 발생 마을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 소송을 하여 피해 사실을 인정받음.
방포대원11명: 부대 내에서 M18A1 인마살상용 크레모아가 폭발, 사병 1명이 숨지고 10여명 사망.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 소송자료, 주민증언
B-18) 인천 남구 문학동 문학산 방공포대(부대명미상)
77년 5월 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지뢰피해자
인천 포대명 2명: 97년 3월 24일, 인천 포대병 2명이 지뢰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B-19)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 (文安山) 방포부대(부대명 미상)
77년 5월 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지뢰피해자
병장1명: 93년 4월 12일 이 부대에 근무하는 병장이 지뢰를 밟아 발목을 절단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B-20) 미 1군단 포병대
70년 11월 23일 이양된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캠프 카이저 소속 불무산(영북면 문암리) 방공포대는 과거 미 1군단 미사일 기지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사실에 대해서는 국방부나 미군에서 사실 확인을 해오지 않음으로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96년 미 제 2사단 장병 3명이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 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 지대에 들어와 지뢰를 밟는 사고가 일어난 뒤 한국군에 문제를 제기 하지 않고 오히려 군장병들이 부상자들 호송에 협조한 것에 대해 감사패를 수여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미군이 매설한 지뢰지대이기 때문에 그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지뢰피해자: 96년 미 제 2사단 장병 3명이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 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 지대에 들어와 지뢰를 밟고 중상
▶자료출처: 미군 근무자 증언, 군관계자 증언, KCBL 3차 자료집, 신문기사
B-21) 부산 중리산 미사일기지(부대명 미상)
1964년부터 1979년까지 중리산에 있었던 `111 호크미사일대대 제2포대’에 창설 당시부터 근무했던 김문두(69)씨는 ‘군이 지뢰 매설 시기와 수를 속이고 있다’ 며 군의 발표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문두씨는 ’1964년 부대 창설 직후 미군 고문관 5명의 지도를 받아 국군이 25,000 여 발의 지뢰를 매설했으며, 이에 앞서 1년 간 미국에서 지뢰매설 교육을 받았고 1964년 6월 부산항으로 지뢰매설 장비와 함께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방부의 주장과 다른 것으로 논란이 있다. 특히 매설주체가 한국군인데도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고 미군의 장비로 매설했다는 것은 지뢰 매설에 관한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행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합참과 주한미군에 공식질의를 했으나 이점에 대해 특별한 지적이 없었으므로 일단 미군의 작전통제에 의한 지뢰매설로 간주한다.
▶지뢰피해자
부산중부소방서대원1명: 1996년 2월 25일 화재 진압 중 지뢰가 터져 발목 절단
▶자료출처: 신문기사, 당사자 증언, 합참, 미군에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
C. 피해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미군에 의해 지뢰가 매설된 지역
C-1) 캠프 보니파스
이 부대는 주한미군이 작전권을 행사하는 유엔사 경비대대로서 91년 이전까지는 DMZ순찰을 책임졌으나 그 후로 판문점을 비롯한 책임 지역 안에 대한 순찰 임무만이 남게 되었다. 이부대 안의 작은 골프장은 미국의 유명한 스포츠 전문지 기자가 와서 보고 골프공이 철조망 밖으로 날아가면 지뢰밭에 가서 터지는 가장 위험한 골프장으로 소개가 된 만큼 주변지역이 지뢰지대였으나 최근 들어서 부분 제거가 되었다.
▶자료출처: 주한미군 홈페이지, 주민증언, 카츄사 증언
C-2) 미 제1기병사단, 제 5기병대, 제12기병대
65년 당시 파평면 노파동에 주둔했었다. 인근 금곡리에 1기병사단이 있었고 이와 연동하여 뒷산인 파평산에 대공방어미사일기지가 있었다. 이 기지는 후에 한국군에게 이양되었으나 이양되기 전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대인지뢰가 매설되어 있으며 이곳을 통해 미군의 항공교통관제(파평산ATC)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료출처: 주민증언, www.globalsecurity.org
C-3) 미 1기갑사단 제 8연대 제2대대 D중대
70년 당시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를 매설 하였다.
▶자료출처: 미군 범죄기사, 미군부대 근무원 증언, 지뢰피해자 증언
C-4) 홍성 제기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남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마을주민과의 대담을 통해 10여 년 전에 미군 철수하고 한국군이 주둔하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예전에 ‘아마존’이란 클럽이 기지 아래 동네에 있어서 미군들 많이 목격했었다 한다. 지뢰지대가 있었고 길이 하나밖에 없어서 사람들 못 다닌다고 했으며 현장 확인 결과 증언과 일치했다.
▶자료출처: 주민증언, 군관계자 증언
C-5) 태안 백화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마을주민들과의 인터뷰에서 주민들은 미군들이 주둔할 때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고 증언 했다.
▶자료출처: 주민증언, 군관계자 증언
C-6) 울산 오봉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97.3.13 공군8991-5부대는 30년 전 매설되었으나 수량과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인근 야산전체를 출입통제구역을 한다고 함.
자료 출처: KCBL 3차 자료집, 현장 확인, 주민 증언
C-7)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안중지역) 고등산 (高登山) 방공포대는 1980년 5월 미군에게 인수받았다(뒤늦게 인수한 편).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지뢰밭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미군에 의해 지뢰매설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미군 범죄기사, 주민증언, 군관계자 증언
C-8)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방공포대는 80년까지 미군 미사일 기지가 주둔해 있다가 한국군에 이양되었다. 방포사령부 지뢰 제거 작전 계획에 따라 시범 지뢰 제거 작전 지역으로 선정되어 98년 4월 1순위로 제거에 들어갔으나 747발 중 734발만이 제거되어 지뢰지대를 철거하지 못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미군 범죄기사, 주민증언, 국방부 국감자료
C-9)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방포부대(부대명 미상)
77년 5월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C-10) 전북 김제시 황산동 (凰山洞) 방포부대(부대명 미상)
77년 5월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주민증언, 현장확인
C-11) 경기도 가평군 화악2리 화악산 (華岳山)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이양 받았다. 마을 주민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한국 전쟁 직후 미군이 항공기로 살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2,040여발이 매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증언, 현장 확인
C-12)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 (佛母山) 및 화산 (花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주민증언
C-13)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 대룡산 (大龍山)방공포대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주민증언, 현장확인
C-14) 충남 서천군 서면 합전리-월호리 옥녀봉 (玉女峰)방공포대
과거 미군기지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현재 지뢰 지대가 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증언, 현장확인
C-15) 캠프 하워드(CP Howard)
충남 천안시 성환읍 수향리 미공군 탄약저장소였다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기지 주변에 지뢰지대가 있었다는 주민의 증언을 입수할 수 있었다. 현재는 지뢰 지대가 없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외무부공식문서, 주민증언, 현장확인
D. 현재 미군 사용시설 중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
D-1)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호명산(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D-2) 경기도 연천군 야월산 ATC
D-3)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파평산 ATC
D-4)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Evn ATC
D-5)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 사격장
D-6)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초평도 미군 훈련장
D-7)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그리브즈
D-8)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보니파스, 캠프 리버티벨
D-9) 부산시 해운대구 장산(캠프 하야리야) 통신대, 미 8군 제 1통신여단 307 통신대대
▶자료출처: www.globalsecurity.org, 현장확인
2) 미군의 지뢰 비축 관리실태
경기도 동두천시 미 제 2사단 탄약고:
현재 언론을 통해 확인된 지뢰 보관 탄약 콘테이너는 동두천 미 제 2사단 캠프 님블 탄약 콘테이너이다. 미 제 2사단 탄약고는 양주군에 위치한 캠프 광사리와 의정부 교도소 옆 캠프 스탠리가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동두천에서는 캠프 호비에 탄약저장소가 있다. 미군은 무기, 폭발물 안전기준(DA-PAM 385-64)에 따라 탄약고가 잘 관리되고 있다고 공언해 왔으나, 1998년 8월 6일 수해로 탄약고가 침수되면서 수류탄과 지뢰가 담긴 컨테이너가 10개나 유실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경기도 파주시 서부회랑 캔사스 훈련장 내의 지뢰훈련장:
고폭발 지뢰(High Explosive Mine) 등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지뢰가 훈련에 사용되고 있다. 66년 1월 6일 바뀐 미육군 야전교범 FM 23-30, Antipersonnel Mine M18A1 and M18 (Claymore)에 따라 훈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96년 영평 로드리게스 산악 훈련 시 미군3명 지뢰 사고, 캠프 그리브스 부근 미확인지뢰지대에서의 훈련 중 지뢰에 의한 미군 사망 사고 등이 발생하였다.
▶자료출처: 신문기사, www.globalsecurity.org, 현장확인
3)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상황
철원군 대마리와 생창리, 양구군, 파주시에서 과거 지뢰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이 밟은 대인지뢰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작전 통제권 하에서 매설되었거나 비행기에 의해 살포된 것들이었음이 당시 거주하던 주민들과 군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들 지역은 주로 민통선에 포함되어 있으며 비무장지대 이남에 속한다. 이들 지역은 최근 민통선에서 해제되면서 타지역의 민간인들까지 많은 대인지뢰 사고를 당하는 위험지역으로 돌변하고 있다. 비록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지뢰는 아직도 멀쩡히 민간인을 위협하는 무차별 살상무기로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대인지뢰를 매설했던 미국 당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다음은 그동안 민간인들의 증언으로만 확인되던 한국전 당시 미군들의 지뢰매설 상황이 어떠했는지 미군들 스스로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자료1. 한국에서의 전투지원 (Combat Support in Korea)
by captain John G. Webstover 1955
-combat forces press- p.58~66의 내용
65야전 공병대대 S-2 중위 샘 D. 스태로빈
1. 지뢰란 양면성을 띈 무기이다. 적당히 사용하면 강력한 방어수단이 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재앙이 될 수도 있다.(…)나는 최소한 150대의 사용 불가능한 북의 탱크를 보았는데 이들 중 한 대도 지뢰에 의해 파괴된 것은 없었다. 나는 또한 수많은 미군 탱크와 트럭들이 우리 자신의 지뢰에 의해 파괴된 것을 볼 수 있었다. (…)
2. 미군 지뢰전 교리는 흠 잡을 데가 없으나 8군이 120.000발의 지뢰를 부대에 보낸 후 불과 20.000발만이 보유하고 있거나 매설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100.000발은 버리거나 기록도 하지 않고 매설되었다.
3. 보병들은 가끔 우리 중대에 그들 정면에 공간이 생긴 곳에 무엄호 지뢰지대를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보병 지휘관들에게 이것은 건전한 방법이 아니라고 조언을 했지만 수차에 걸쳐 강압적인 이들 지휘관의 고집에 못 이겨 지뢰지대를 설치해 주었었다. 내 개인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일이 타 부대에서도 자주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4. 적은 무방호 지뢰지대의 지뢰를 뽑아다가 우군전선 후방에다 매설하는 것이 쉬운 일인 것을 알아내었다. 수송수단이 빈약한 적으로서는 20파운드짜리 지뢰의 편리한 공급원을 발견해낸 것이다. (…)
5. 적에게 지뢰를 뺏기는 두 번째 방법은 단순히 버리는 것이다. 전방으로 너무 많은 지뢰를 옮겨 놓았다가 전황이 바꿔지면 대량의 지뢰를 손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지휘관들은 지뢰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접적지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6. 특히 지뢰지대를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 한국전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지뢰가 매설된 지역에 다시 돌아오기 전에는 정확한 지뢰지대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지뢰지대를 설치한다는 것은 이미 매설된 지뢰지대에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거나 또 우군지역 주민과의 친선을 도모할 생각이 전혀 없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을 하지 않고 지뢰를 매설했던 여러 부대의 예를 들 수 있었다. 또 급히 서둘러 철수하는 바람에 지뢰를 매설하라고 하면 이동중인 트럭 위에서 장진된 지뢰를 내어 던져 버리는 식으로 타락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7. 미 제 25사단이 1951년 3월 초에 한강을 도하할 때 우리는 매설기록이 없는 미군지뢰지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 지역에서 작전하는 부대들을 찾아가서 지뢰지대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제3공병대대의 S-3가 철수해야한다는 압력에 못 이겨 기록을 하지 못 했던 의정부 근처의 부대가 설치한 지뢰지대가 있음을 기억해 냈다. 우리는 그가 지적한 지점에서 많은 차량들이 지뢰에 파괴되고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음을 알았다.
8. (…)보병 중대장이 공격선상에 지뢰지대가 있을 때는 그는 공병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제 보병들은 지뢰지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p.70~80 의 내용
영천시 신녕 전투 : 한국군사고문단 소령 데이비드 F. 캠벨
10. (….)공병들은 적 탱크가 사격을 위해 멈췄던 지점 근처 도로상 60야드에 걸쳐 40발의 M6대인지뢰를 매설했다(제1지뢰지대) 과거에 M6지뢰 매설 방식과는 달리 이번 지뢰는 장진이 됐을 뿐 아니라 각 지뢰는 그 밑에 M3대인지뢰 1발씩을 매설함으로서 촉발이 되었고 그러고 나서 3인치 인계철선을 손잡이에 부착했다. 우리는 52개의 대인지뢰를 도로의 좁은 노견부에 연해 매설하고 여기에다 도로와 그 도로의 노견부를 가로질러서 인계철선을 가설함으로써 우리의 대인지뢰를 한층 더 가공한 것으로 만들었다.(…)
11. 이 지뢰지대를 설치하는 동안 근처에 제1지뢰지대와 연결되는 제2 지뢰지대가 설치되고 있었다. 약 250발의 M3 대인지뢰가 요덕동 남방에 역할꼴 모양으로 매설되었다.(…)
13. 8월 31일~9월1일 야간에 한국군 제 9야병 공병대 a중대는 제2지뢰지대의 연장부 (제3지뢰지대)에 90발의 M3대인지뢰를 매설했다.(…)
15. 나는 다음날(9월1일)의 대부분을 촉발장치가 부족할 경우 대용품을 써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소비했고 약간의 시간을 들여 부비트랩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군은 적이 보급품 수송에 사용하는 달구지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우군침투 부대로 하여금 적 달구지의 수레바퀴를 제거하여 그 안의 축을 땅위에 놓고 그 축에 인계철선을 매어 놓는다. 적이 바퀴를 교환하려고 수레를 들어 올릴 때 부비트랩이 터지게 되어 있었다. 이 악명 높은 장치는 한국군 사이에서 ‘면도칼’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이 부비트랩이 터지면 목을 면도칼로 싹 잘라버리는 효과가 있기에 그렇게 부른 것 같다.
16. 같은 날 우리는 대전차 지뢰에도 촉발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제 1지뢰지대를 제외하고는 대전차지뢰에 대한 촉발 장치는 한 적이 없었다. 길이가 500야드 이상이나 되는 지뢰지대에 우리는 20%정도의 촉발장치를 설치했다. 규모가 더 작은 지뢰지대에는 100%의 촉발장치를 설치했다.
(*편집자주: 지뢰를 장진(Ariming)한다는 것은 모든 안전장치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지뢰를 촉발(activating)한다함은 내부에 도화선을 설치하거나 아니면 또 하나의 다른 지뢰를 사용함으로서 외관상으로는 안전하게 보이나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자동 폭발 장치를 설치하는 과정이다.)
17. 그 날 저녁(9월1일~2일) 추가로 두 개의 지뢰지대를 가설했다. 이들 중의 하나인 제 4지뢰지대는 요덕동 후방에 설치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탱크함정 계획의 일환으로 설치한 것이나 우리편이 그 지뢰를 폭파시키지 않도록 피해야만 했다. 이 지뢰지대는 90야드 이상의 정면에 90개의 대인지뢰에다 인계철선을 연결한 것이다. (…)
18. 9월2~3일 야간에 우리는 지뢰지대 설치를 계속하여 추가적으로 두 개의 지뢰지대의 설치작업을 마쳤다.
20. (….)우리는 제 4지뢰지대의 왼쪽으로 돌아서 이동하여 정숙을 유지하고 은폐하여 대기한 다음 적에게 발각 당하지 않고 적진지로 침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화수동의 교량은 이미 미공군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발견하였으나 적은 교량 북동쪽 50야드의 지점에 도섭장을 만들었었다.
21. 교량 북방의 강에서부터 도섭장까지 급조 지뢰지대를 설치했다.(…)
p. 80
34. (…)적은 남쪽으로부터 제 8지뢰지대에 돌아오게 되어 여기에서 10명 내지 15명의 병력 손실을 보았다.
35. 아군보병들이 요덕동 도로를 따라 남으로 728고지를 향하여 철수하고 있을 때 적은 제 2,3지뢰지대를 통해 증강된 연대규모의 공격력으로 의기양양하게 공격을 가해왔다. 이 지뢰지대는 500여발의 대인지뢰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화기 화력으로 엄호되었었다.
36. 이 교전 후 전선을 축소하면서 우리는 계속 도로 대화구를 설치하고 지뢰지대를 증가시켰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지뢰 지대 당 500발정도의 대인지뢰가 매설되었고 8개의 지뢰지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대략 4,000발 정도의 지뢰가 한 국지전투에서만 사용된 것이다. 이들 지뢰는 전쟁 후 공식적으로 제거된 기록이 없다. 어디엔가 묻혀 있는 것이다.
자료2. 한국 전쟁의 보.포.기갑 소부대 전투(Combat Actions in Korea)
R.A.Gugeler. -Association of the U.S army 1954-
p. 158의 내용
9. 지평리전투(경기도 양평근처)
(….)포병 중대들은 기관총을 진지에 거치하고, 박격포 기록사격을 실시하고 대인지뢰를 매설했으며 주위를 둘러싼 고지에 대해 일일 정찰대를 운용했다.
p. 257
14. 벙커고지(800고지)전투
(…) K중대원들은 철조망에 견인 조명탄과 폭약들을 연결시켜 놓았으며 철조망 사이에는 대인지뢰들을 매설해 놓았었다.
이들 자료에서 우리는 지뢰매설이 휴전선 근처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후방지역에서도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국방부로부터의 공식 답변에 의하면 전쟁 이후 90년대까지 지뢰제거작업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으로 봐서 전쟁이후 이들 지뢰가 국가적 행위로서 제거된 적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남 청양의 김유정 어린이 대인지뢰폭발 사고도 인근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지뢰지대가 없어서 최근의 지뢰원으로부터 유실되었을 가능성보다는 과거 전쟁당시의 매설됐던 지뢰로 판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위의 기록에 따른 미군의 행위는 전쟁 중이었다해도 국제법이 정한 민간인보호 의무가 체계적인 명령계통에 의해 무시된 채 집행된 일종의 전쟁 범죄이다. 따라서 이는 국제법을 어긴 명백한 사례가 된다.
1949년의 제네바 4개 협약과 2개의 추가의정서의 기본적 사고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자는 것인데, 위의 기록에서 보이는 미군들의 대인지뢰의 사용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행위이며, 1949년 ‘전시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도 위배되는 상황임이 드러난다. 이들 협약의 정신을 이어받은 1968년 ‘무력 분쟁 시의 인권존중에 관한 국제연합결의’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전투원과 일반민간인의 구별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록 과거의 사건일지라도 무차별한 지뢰의 매설 및 살포가 곧 전쟁범죄임을 선언한다. 미국이 가입을 거부한 1997년 국제대인지뢰금지협약 직전에 그들의 주도로 발효된 CCW특정재래무기금지조약 1조 ’적용범위‘에도 1949년 제네바협약의 정신은 재확인 되어있다.
1조. 이 협약 및 부속의정서는 전쟁희생자의 보호를 위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제협약의 공통제2조가 언급하고 있는 상황과 동 제네바 제협약의 제1추가의정서 제1조제4항에 기술되어 있는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
한반도 대인지뢰피해의 근원이 한국전쟁으로부터 연유함으로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그것을 철저히 밝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또한 미군이 전쟁을 돕기 위해 군사원조를 했다해도 전쟁 중에 민간인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고의적으로 무시한 작전통제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군사원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1949년 제네바협약은 노근리사건과 마찬가지로 지뢰의 무차별한 살포와 매설 또한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 행위임을 지적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미군 매설 지뢰에 관한 미국의 책임
우리는 미국에 대해 세가지 근거를 가지고 과거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첫째는 1997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발언이며, 둘재는 CCW특정재래무기금지조약이며
셋째는 정전협정이다.
첫째, 1997년 미국은 국제대인지뢰금지 협약에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국제적 비난과 외교적 고립의 상황을 염려하여 독자적인 4개 실천방안을 발표한다. 그리고 97년 11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이를 더욱 구체화한 계획을 다시 발표한다.
다음의 두 자료 중 첫 번째는 클린턴 대통령의 4개 실천방안과 관련한 내용이며 두 번째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클린턴 대통령의 4개 실천방안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계획을 밝힌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미국은 한반도의 군용 목적에 의한 대인지뢰에 대해서는 예외로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도 “2010년까지 지뢰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국가의 민간인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매년 1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한반도의 지뢰가 비무장지대에만 묻혀 있으며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단 한 건의 민간인 지뢰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오슬로 회의에서 한국정부의 이성주 대표가 무책임하게 발표한 정보오류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1997년 이후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가 벌여온 대인지뢰실태조사자료에 의하거나 그동안의 수많은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이는 미국이 잘못 알고 있는 정보이다. 또한 지금은 정전상태라고는 해도 주한미군사령관이자 유엔사사령관인 미군장성의 인정하에 비무장지대의 지뢰까지 부분적으로 제거가 된 상황이다. 설령 비무장지대의 지뢰는 군용으로 본다 하더라도 비무장지대 이외지역, 즉 민통선내부지역을 비롯한 이남의 전지역에 매설된 지뢰는 지금까지 민간인과 아군의 피해만을 초래했음이 분명한 이상 이에 대해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둘째, 미국이 주도하여 체결하였고 대인지뢰전면금지협약에 대한 견제용으로 옹호하고 있는 특정재래무기금지협약(CCW) 제2의정서에 의해서도 미국은 한반도에서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CCW개정 제2의정서 10조1항은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10조 1항. ‘체약당사국과 기타 이 의정서를 수락한 무력충돌의 당사자는 적극적인 敵對行爲의 종료후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안의 지뢰지대․지뢰․부비트랩 등을 제거․철거․파괴 또는 유지할 책임을 지도록 한다.’
셋째, 정전협정이다.
미국의 대인지뢰금지협약에 반대한 이유는 한반도 그중에서도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지뢰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국제적인 외교고립을 면하기 위해 미국은 궁색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비무장지대 안의 지뢰를 전후 50년이 지나도록 제거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체결한 중요한 협정을 위반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 협정은 다름아닌 정전협정이다. 정전협정2조 13항 ᄀ조에 따르면
‘본 정전협정이 효력 을 발생한 후 72시간내에 그들의 일체 군사역량, 보급 및 장비를 비무장지대로부터 철거한 후 비무장지대내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는 모든 폭발물, 地雷源, 철조망 및…군사정전위원회에 이를 보고 한다.
미군은 북에 항상 정전협정 준수를 요구해 왔다. 그런 미국이 자신들도 50년 동안 지키지 않은데 따른 결과를 이유로 해서 대인지뢰금지 협약에 불참한다고 한 것이다.
이미 비무장지대의 지뢰제거가 시작된 마당에 미국이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의 지뢰를 예외로 해야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더구나 지금 남북간에 진행되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지뢰제거작업에서 군사분계선 남쪽지역에 대한 제거 책임은 미국이 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하천을 통하여 매년 유실된 지뢰에 의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미국이 떳떳한 외교를 원한다면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의 정화조치에 관한 의무에 근거한 책임을 져야한다.
자료 3
[한국일보] 1997-09-19 (국제/외신) 기획연재 12면 “클린턴 ‘금지협약’ 대응책 발표”
자료4. [연합뉴스] 1997-11-01 “지뢰제거 책임에 관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발언”
4. 미군지뢰문제 해결을 위한 소파 3조와 4조의 개정
자료5. 과거와 현재 주한미군 현황
■참고자료1:
한국지뢰실태조사보고서-후방36개 대인지뢰 매설지역 실태조사보고서
■참고자료2:
ICBL(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발간,
2002 LANDMINE MONITOR수록 한국부분
1. 개요
1. 1997년 10월 31일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대인지뢰전면금지조약의 서명에 반대함으로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되자 미국이 2010년까지 지뢰제거를 위해 매년 10 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뢰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국가의 민간인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2. 과거 미군은 한국 전쟁 당시로부터 60년대까지 수십 곳의 주둔기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지뢰 제거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지뢰 매설 정보조차 한국군에게 이양하지 않아 미군이 매설한 지뢰로 인한 피해가 2002년까지 계속 되었다. 이번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 피해는 21개 지역 100명에 이르며 김포, 파주, 연천, 철원, 고성 5개 지역 주민들은 집단피해를 당했고, 주한미군조차도 5명이 지뢰사고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3. 또한 미군이 지뢰매설정보를 이양하지 않은 것이 소파3, 4조에 의해 규정된 ‘통고불이행’과 ‘원상복구불이행’ 조항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파 3, 4조의 개정이 시급하다.
4. 조사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과거 미군 기지의 지뢰매설정보는 고사하고, 철수한 미군기지의 위치에 대해서도 전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음이 밝혀져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미군의 과거 행적이 밝혀져 피해보상 등 반드시 주권을 행사할 일이 생겨도 객관적인 근거가 될 만한 기초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KCBL은 미국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발표와 특정재래무기금지협약 및 정전협정에 근거하여 과거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며 한미소파의 3조와 4조의 내용이 그에 준하여 개정될 것을 촉구한다.
※ 과거 미군 매설 지뢰와 그 피해 현황에 대한 개요
A. 미군 주둔 시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
시기
피해
내용
1
미 해병 1 연대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1951.9.18~10.31
1951년
주수산
50년대 중반
다리 절단
미 제 25사단
1953.5.13~7.27
1953년
미 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 A중대
1962년
1971년
미 제 2사단 23연대 3대대 B중대
1962년
1971년
2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
1953.5.13일~7.27
1953년
김중식
1960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38연대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71년
조만손
1965년
오른쪽 발목 절단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
3
경남 하동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및 용산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1971년
조성재
1969년
사망
4
캠프 리버티벨(CP LIBERTIBELL)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한국 전쟁 중, 1962년
현재 주둔중
미군1인
2001.5월
오른쪽 다리 부상
5
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의정부 가능동 호명산
가능동주민
1998.8.12
유실지뢰로 인한 불안감, 관광객 감소로 인한 재산피해
B. 미군 철수 후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1
경남 하동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및 용산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1971년
조헌필
1974.8.2
발목 절단
김영순
1976. 4월 초
발가락 절단
2
미 제 1사단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사격장과 자유의 다리 북쪽지역
1953.7
1971년
조두현
1983년
발목 절단
정정숙
1980.12.
발목 절단
윤금옥
1988년
발목 절단
신형식
1983년
발목 절단
이덕준
1979.8.14
왼쪽 발목 절단, 오른쪽 다리 파편부상
미 제 2사단 38연대
1962년
옹일랑
1976.3.29
발가락 절단
최명환
1980.1.13
발목 절단
이재연
1980년
발목 절단
이재문
1980년
발목 절단
3
캠프 페터슨
(CP PETERSON)
- 1기병사단 공병대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1960년대
1970년대
보광사 주지 및 신도, 지역주민
1998.8.8
보광사 옆 계곡에서 유실지뢰가 확인됐으나 제때 수거되지 않아 호우로 다시 유실되어 심한 주지외 신도 주민들 정신적 불안감
4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련리
1953.5.13~7.27
1953.7.27
백중현
1970년
다리 절단
미 수색 제 1사단
미군 1명
연도 미상
사망
캠프 그리브스 (CP Greaves)
1962년
현재 주둔 중
캠프 워리어 (CP Warrior)
대성동 주민1명
1993년
부상
캠프 두지 (CP Dooge)
5
미 제 25사단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 덕천리, 마지리등 20여개 훈련장
1953.5.13~7.27
1953년
윤호영
1961년
두 다리 절단
미 수색1사단
미 제 24사단 48 야포대
1960년 전후
1971.10.21
6
미 제 1사단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 야월산 ATC(항공교통관제-미군)
1951.4.22~11.11
1951년
김문빈
1971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3사단
1951.9.29~10.18
1951년
박금녀
1997년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1952.9.18~ 10.31
1952년
김주권
1998.4.22
사망
부대명 미상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60년대초반
전창국
1996.5.24
사망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7
미 제1사단
경기도 연천 대광리와 철원 율리리 경계지역
1951.4.22~11.11
1951년
이민상
1997.3.8.3
손목 절단
김용관
1990.6.30
오른쪽 발목 절단
김일복
1995.7.12
왼쪽 발목 절단
신동윤
1995.8.18
옆구리에 파편이 박힘
미 제3사단
1951.9.29~ 10.18
1951년
강윤구
1995.8.28
양쪽 발목 절단
김찬수
1996.7.26
유실지뢰로 수해복구작업 지연으로 인한 재산피해
허태원
1996.7.30
유실지뢰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
김한풍
1996.7.31
미 제 2사단
1952.9.18~ 10.31
1952년
유성현
1996.8.1
손 찢기는 부상
박수억
1996.8.6
트랙터 타이어 파손
김학길
1996.9.6
일부 장비 파손, 실신
미 1군단 보병부대
1962. 쿠바사태 직후
1971년
성명미상
1996.10
굴착기 완파
오태의
1996.10
지뢰 발견, 심리적 불안감
최광훈
1997.4.5
중장비 파손,
얼굴 등에 전치 2주의 부상
정소이
2002.6.17
왼쪽 다리 절단, 오른쪽다리부상
8
미 제 3사단
철원군 대마리를 비롯
백마고지 전투지
1951.9.29~10.28
1951년
조창행
1965년
왼쪽 다리 절단
유철훈
1968.4
왼쪽 다리 절단
미 제 2사단
1952년 10월 이전
1952년
장동용
1975년
오른쪽 다리 절단
전병화
1990년
발목 절단
부대명 미상
1962년 쿠바사태 직후
1960년대 초반
박경서
1968.4
대퇴부 절단
이수진
1968년
발목 절단
9
미 제 25사단
철원 김화 북단 생창리를 비롯한 저격능선, 삼각고지 전투지
1951년 10월
1951년
10월 이후
고문현
1979년
사망
박영주
1979년
발목 절단
미 제 7사단
1952년 9. 18.~11. 25
1952.11.26
엄영구
1973.12.4
사망
미공수187연대
1952.10.14~11.25
1953.7.13.~7.27
1953.7.28
박정호
1992.12.4
사망
이은용
2002.4.22
사망
10
미 제 74사단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1951년 10. 8.~22.
1951년
반윤수일병
1997.1.11
사망
미 제 3사단
1953년 7. 13.~27
1953년
서원배병장외 5명
1997.10.11
중경상
11
미 제 24사단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외성동리
1951.10.9~22
1951.10.23
김성곤병장
1998.5.20
사망
임대필일병
사망
김창수이병
사망
박성필상병
부상
12
미 제 25사단
강원도 철원 김화지역
1951년 5. 23.~ 6.10
1951년6.10
고준진
1970년
두 다리 절단
미 제 7사단
1952년 9.18~ 11월
1952년11월
김천수
1996.8.1
유실지뢰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정신적 충격과 농사지연.
미 공수 제187연대
1952년 10.14.~11.25
1952년11.25.
김진두
1997년 5.28
트랙터 일부 파손
미 제 2사단
1953년 7. 13.~ 27
1953년7.27.
철원농민 다수
1996.8
1996년 8.30. 수해로 인한 유실지뢰 제거 되지 않아 농사포기
13
미 제 7사단
강원도 화천군 일대, 파로호 상류
1951.5.23.~ 6.10
1951년 6.10.
한재영
1996.8.4
낚시 중 사고, 발목 절단
최순원
1996.8.31
1년생 송아지 발목 절단
미 제 24사단
한정열
1996.8.12
자신의 밭에서 지뢰 발견. 정신적 충격, 농사일시중지.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
시기
지뢰
피해자
피해시기
피해
내용
14
미해병 제 1사단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오유리, 현리
1951.6.3~9.20
1951.9.20이후
김옥자
1994.6.15
대퇴부 파편
박춘영
1993년
발목 절단
오흥식
1993년
발목 절단
오종식
1994.12
사망
오흥식씨 아들
1994.12
사망
미 제 45사단
1953.5.13~ 7.27
1953.7.27이후
김옥수
1994.12
사망
백춘옥
1998.8.12
발목 절단
이영준
2002.6.17
트랙터 운전 중 대전차 지뢰를 밟아 온몸에 중상을 입고 한쪽 눈 실명, 트랙터는 완파
15
미 수색 제 1사단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 월운리
1951.5.23.~6.10
1951.6.10
윤원근병장
차재욱병장
문승훈병장
김영철이병
1997.6.13
사망
사망
중상
중상
미 제 2사단
1951.8.18.~9.18
1951.9.18
미 제 45사단
1953.5.13.~7.27
1951.7.27
16
미 10군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1951년~1953.7.27
(미 10군단 예하 한국군부대가 매설)
1953년 7.27.
고성주민
1996.4.4
산불이 발생한 뒤 지뢰밭 때문에 진화지연으로 재산피해
정현철병장
1997.3.13
사망
박원갑상병
사망
장대성상병
부상
김유연상병
부상
현승국상병
부상
박진규상병
부상
박기돈일병
부상
홍간낭
2000.5.13
왼쪽 발목 절단
김일동대위
2002.9.4
왼쪽 눈과 양 손에 중상
17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章陵山)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1960년대 추정
1982년 5월
지역주민 13명
1984.9.1
수해 시 지뢰 폭발로 산사태
방포부대원11명
1994.8
부대 내에서 M18A1크레모아 폭발, 1명 죽고 10명 부상
18
인천 문학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인천 남구 문학동 문학산
1960년대 중반 추정
1977.5.29
포대병2명
1997.3.24
중상
19
충북 진천군 문안산 (文安山)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
1960년대 중반 추정
1977.5.29
부대병장
1명
1993.4.12
발목 절단
20
미 1군단 포병대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영북면 문암리 캠프 카이저 소속 불무산 방공포대
1960년대 중반 추정
1970.11.23
미 제 2사단 장병 3명
1996년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지대에 들어가 지뢰 밟아 사고
21
부산 중리산 미사일기지(부대명 미상)
부산 영도구 동삼동 산 159
1964.6(미군 작전 통제하에 한국군이 매설)
1964년
부산 중부 소방소 대원
1996.2.25
화재 진압 중 지뢰 터져 발목절단
C. 피해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미군에 의해 지뢰가 매설된 지역
미군기지명
위치
매설시기
철수시기
1
캠프 보니파스(CP BONIFAS)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한국 전쟁 중, 1962년
현재 주둔 중
2
1 기병사단, 제 5 기병대, 제 12 기병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노파동
1960년대
1970년대
(그러나 현재도 일부시설 사용 중)
3
미 1기갑사단 제 8연대 제2대대 D중대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1962년 쿠바사태직후
1971년
4
홍성 제기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남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1970년대
1990년 이전
5
태안 백화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1960년대 추정
1974년
6
울산 오봉산 방공포대(부대명 미상)
경남 울산시 남구 양정동
77년 이전
미상
7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
(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안중지역) 고등산 (高登山)
1960년대
1980.5.
8
캠프 험프리 소속 방공포대
(예하 부대명 미상)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1960년대
1980년
9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1960년대
1977.5.29
10
전북 김제시 황산동 (凰山洞) 방포부대
(부대명 미상)
전북 김제시 황산동
1960년대
1977.5.29
11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華岳山)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경기도 가평군 화악2리 화악산
1960년대
1977년 전후
12
경남 김해시 장유면 불모산 (佛母山) 및 화산 (花山)(부대명 미상)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미상
1977년 전후
13
강원도 춘천시 대룡산 (大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 대룡산
미상
1977년 전후
14
충남 서천군 옥녀봉 (玉女峰)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충남 서천군 서면 합전리-.호리
미상
1977년 전후
15
캠프 하워드 CP HOWARD
(미공군 탄약저장소)
충남 천안시 성환읍 수향리
미상
1970년 이후
D. 현재 미군 사용시설 중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
D-1)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호명산(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D-2) 경기도 연천군 야월산 ATC
D-3)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파평산 ATC
D-4)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Evn ATC
D-5)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 사격장
D-6)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초평도 미군 훈련장
D-7)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그리브즈
D-8)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캠프 보니파스, 캠프 리버티벨
D-9) 부산시 해운대구 장산(캠프 하야리야) 통신대, 미 8군 제 1통신여단 307 통신대대
2. 주한미군의 과거 지뢰매설관련 상세 조사 자료
1) 미군이 과거 지뢰를 매설한 지역과 민간인 피해 실태 상세 보고서
A. 미군 주둔 시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A-1) 미 해병1연대, 미 제 25사단, 미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 A중대, 미제 2사단 23연대 3대대 B중대
연천군 고랑포리를 중심으로 한국전쟁당시인 1951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 미 해병 1연대가, 1953년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25사단이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주둔해 있던 미1기갑사단 9기병대 1수색대대와 미 제 2사단 23연대가 1962년 쿠바사태직후 지뢰를 새로 매설하였다. 또한, 이곳은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방어구간의 끝 지점으로 방어가 허술하여 북의 특수부대가 침투했던 지점으로 그 사건 이후 대대적인 지뢰매설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 졌다. 파주 파평면 장파리에 사는 주수산씨가 50년대 중반 지뢰 사고를 당한 곳이다.
▶지뢰피해자
주수산 : 50년대 중반에 야산에서 사고 (인터뷰 내용 : 사고 뒤 생계활동을 할 수가 없어 6 남매들을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신다.)
▶자료출처: 미군 범죄기사, 지뢰피해자 증언
A-2) 미 제 25사단, 미 제 2사단 38연대,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
한국 전쟁 당시인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를 중심으로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제 25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그 뒤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다. 휴전이후 미 제 2사단 38연대, 미 제 2사단 503보병 2대대 4중대가 주둔했으며 1962년 쿠바사태 직후에도 지뢰가 매설되었다. 현재도 미군훈련장인 스토리사격장 근처인 이곳에는 지뢰작전에 관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지뢰피해자1 : 김중식
피해 시기 : 1960년
피해 내용 : 왼쪽 다리 절단
지뢰피해자2 : 조만손
피해 시기 : 1965년
피해 내용 : 오른쪽 발목 절단
▶자료출처: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1992년판-행림출판사, 중공군의 한국전쟁사-한국전략문제연구소-1991년판-세경사, 미군 범죄기사, 주민 증언, 미8군 홈페이지
A-3)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1960년대 미군 주둔 시 지뢰 매설한 것은 분명, 그러나 70년대 초 국군 제 39사단에서 기지를 이양 받을 때 정확한 지뢰 매설 보고서를 인수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연합뉴스기사에 의하면 53년 매설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군에서는 60년대로 확인했다.
조사된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조성재: 69년 지뢰 사고, 94년도에 사망
▶자료출처: 육군보도자료, 피해자증언
A-4) 캠프 리버티벨(CP LIBERTIBELL)
91년 이전까지 미 제 2사단 캠프였으나 91년 이후 병합되어 동쪽 보니파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리버티벨이란 이름이 캠프 이름으로써 존재한다. 보니파스와 함께 인근이 모두 지뢰지대이다. 역시 한국 전쟁 당시 매설된 미확인지뢰지대와 더불어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 매설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병사 : 2001년 5월 중순 DMZ를 따라 정찰 중 미군1명이 M14 대인지뢰를 밟고 오른쪽 발에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미확인지뢰지대에서 일어났고 그 군인이 병원에 가는데까지는 구급차에 닿기까지 급하게 1.5마일을 뛰어간 시간까지 합쳐 2시간 반이 걸렸다.
▶자료출처: ICBL 대인지뢰 모니터 코디네이터 메리 워레함이 2001년 7월 6일 워싱턴 DC 월터리드 군인병원에서 피해 군인과 인터뷰한 내용, 주민증언, 주한미군 홈페이지
A-5) 캠프 레드클라우드 통신대
경기도 의정부시 및 양주군 양주읍 어둔리 호명산 (號鳴山) 방공포대자리에 위치했다.
미군 기지 반환 후 한국군에 이양되었고 기지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현재 다시 미군이 시설을 점유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군의 기지 철수와 함께 지뢰제거 작업이 실시되었으나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미군이 현재 사용하고 있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가능동주민: 1998년 8월12일 가능3동 호명산 계곡으로 흘러온 유실지뢰가 제거되지 않아 주민들의 생활 불편과 관광객 감소로 재산 피해.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증언, 현장확인
B. 미군 철수 후 미군 매설 지뢰로 인한 피해 실태
B-1)경남 하동군 금남면 금오리 금오산 (金鰲山) 및 용산 (龍山) 방공포대 (부대명 미상)
*내용은 위 A-3과 동일하나, 피해자들의 피해시기를 기준으로 분류. 아래의 피해자들은 미군철수 후의 피해자임
▶지뢰피해자
조헌필: 1974년 8월 2일 (당시 14세), 사격장 옆 지뢰 철조망이 없었으며 논과 맞닿아 있는 부분엔 지뢰가 없었다. 지뢰를 밟고 왼쪽 무릎 밑을 절단하고 오른쪽 다리는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현재는 어머님, 아들 1명과 살고 있으며 의족을 끼고 생활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 관절통으로 물리치료를 계속 받아야 한다.
김영순: 76년 4월 초순경(당시 51세) 논으로 가는 길에 고사리를 채취하던 중 철조망 바깥에서 지뢰 사고를 당하고 진주 병원에 2개월여 입원, 새끼발가락을 절단하였다.
B-2) 미 제 1사단, 미 제 2사단 38연대
한국전쟁시기인 1953년 7월 파주시 진동면을 중심으로 전투를 치뤘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되었다. 그 후 이곳은 미확인지뢰지대가 되었다. 미 제 2사단 38연대는 휴전 후 파주시 진동면 스토리사격장과 자유의 다리 북쪽지역에 산개되어 있었다고 한다.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와 장파리의 지뢰 피해자 14명이 모두 이곳에서 지뢰 사고를 당했다.
▶지뢰피해자
조두현 : 83년, 가을 논에서 추수하던 중 사고, 발목절단 (인터뷰 내용 : 1년이 넘도록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정신적 충격도 컸다)
정정숙 : 80년 12월, 논에서 일하다가 사고, 발목 절단 (인터뷰 내용 : 병원비가 없어서 치 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지금도 앉았다가 일어서기가 고통스럽다)
윤금옥 : 88년, 밭에서 김을 매다가 사고 (인터뷰 내용 : 고령의 나이로 의족이 무거워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태임을 호소)
신형식 : 83년, 논에서 작업중 사고. 발목 절단
이덕준 : 79년 8월14일, 미군부대 근로자로 일하다가 기지 철수와 함께 일자리를 잃고 날품 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군부대 마초 작업에 동원되어 작업하다가 사고. 왼쪽 다 리 절단, 오른쪽 다리는 파편이 박혀 불구가 되었다.
옹일랑 : 76년 3월29일, 과거 미군부대가 있던 야산에서 작업중 사고
최명환 : 80년 1월 13일, 과거 미군 부대가 있던 야산에서 작업중 사고. 오른쪽 발목절단. 2000년 사망
이재연 : 1980년, 야산에서 마초 작업 중 사고
조만손 : 1965년, 미군 부대 내에서 시야를 가리는 나무를 벌목하던 중 사고. 오른쪽 발목 절단
이재문 : 1980년 과거 미군부대 지역에서 마초 작업 중 지뢰 사고. 오른쪽 다리 절단
자료 출처: 미군 범죄기사, 주민증언.
B-3) 캠프 페터슨(CP PETERSON) – 1기병사단 공병대대
65년 당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캠프 페터슨이 주둔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민증언에 의해 영장리 고령산(高嶺山)과, 개명산(開明山)의 레이다 기지에 이곳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캠프 페터슨의 소속부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뢰피해자
보광사 주지 및 신도, 지역주민: 1998년 8월 6일 산사태로 근무병 2명이 사망한 사실이 있다. 이때 보광사 옆 계곡에서 굴착기를 동원, 수해복구작업을 하던 중 대인지뢰 1개가 굴착기 밑에서 폭발. 또 이곳에서 3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상류에서 떠내려 온 흙더미 속에 구형 대인지뢰(과거미군매설지뢰로 추정) 1개가 파묻혀 있는 사실이 인부들과 시체 수색작업을 벌이던 軍에 의해 확인됐으나 제때 수거되지 않아 9일 호우로 다시 유실되어 심한 정신적 불안감을 느꼈다한다. 주민 증언에 의해 오래 전부터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자료출처: 외무부 공식문서, 주민 증언, 보광사 전 주지스님의 증언, 파주시 공무원 증언. 신문기사
B-4) 미 제 25사단, 미 수색 제1사단, 캠프 그리브스, 캠프 워리어, 캠프 두지(CP Greaves, CP Warrior, CP Dooge)
이들 부대는 임진각 통일대교 건너 파주시 군내면 백련리 남북회담 사무국 근처에 몰려서 위치하고 있으며 미 제 2사단의 506보병 1대대가 주 병력이다. 한국전당시 매설된 미확인지뢰지대가 존재하며 1962년 쿠바사태를 전후하여 다시 매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부대 인근에서 일어난 지뢰 사고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백중현: 문산읍의 백중현씨가 이 부대근처에서 농사 중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했다.
미군1인: 미군이 이 부대근처의 미확인지뢰지대에서 훈련 중 사망(-미 제 1사단 근무병이었던 정봉석씨의 증언)
대성동주민 : 1993년 대성동 마을 외곽에서 한 여성이 지뢰를 밟아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1994년3월1일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임야 260ha를 태우고 매설되어 있던 지뢰 50여발이 폭발했다.
▶자료출처: 주민 증언, 미8군 인터넷사이트, ICBL자료
B-5) 미 제 25사단, 미수색1사단 미 제 24사단 48야포대
한국전쟁시기인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25사단과 미 수색1사단이 동두천과 적성, 문산 사이를 오가며 싸웠고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전쟁 후 상당기간 미확인지뢰지대로 남았다. 1960년을 전후로 해서는 미 제 24사단 48야포대를 비롯 미 제 2사단 훈련장이 20여개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방부 답변자료에 따르면
‘71년 3월26일 미군이 징발하던 토지 6,000 만평 중 1,100만평을 징발 해제한다고 발표하고 71년 10월21일 징발 무효조치를 함. 그리고 이 지역은 미 제 2 사단 훈련장으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의 20개 지역으로서 세부내용은 추적이 곤란함.’
지뢰피해자 윤호영씨 대담에 따르면
“ 영국군들이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뒤 미군들이 관리하다 한국군 부대가 들어 왔다.”
현재 미군 범죄 관련한 신문기사를 통해 적성면에서 확인되는 부대는 식현리에 주둔했던 미 제 24사단 48야포대이다. 조사시 인근 국사봉 훈련장에는 국군 70보병연대 3대대장 명의로 “이곳은 미군훈련장이 아님’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과거 미군훈련장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정확한 지뢰매설 미군부대의 소재 파악은 어려우나 우선 확인된 식현리의 미 제 24사단 48포대에 그 혐의를 둔다.
▶지뢰피해자
윤호영 : 1961년 적성면 마지리 민통선에 논을 만들기 위해 민간인 지뢰제거업자와 개간작업을 하던 중 나무를 베어 묶어 내려오다가 지뢰 사고로 두다리를 잃었다. 당시 나이 29세.
▶자료출처: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지뢰피해자 증언, 신문기사, 현장 확인
B-6) 미 제 1사단,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한국전쟁당시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 야월산을 중심으로 1951년 4월 22일부터 11월 11일까지는 미 제 1사단이, 1951년 9월 29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미 제 3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싸웠다. 이곳은 백마고지 전투가 있었던 인접지역으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매설된 지역으로 다수의 지뢰 피해자 발생한 곳이다. 1962년 쿠바사태 직후 지뢰매설이 있었음이 주민증언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도 주한미군 통신 정보시설(ATC)이 위치해 있다.
▶지뢰피해자
김문빈 : 1971년, 야월산 근처 농지를 개간하던 중 사고. 왼쪽 다리 절단.
박금녀 : 97년, 나물을 뜯던 중 M14 대인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가 절단.
김주권 : 98년, 4월22일 철원 동승읍 이평리에 살던 김주권씨가 과거 자신의 고향인 야월산 기슭을 찾아 산나물을 캐던 중 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사망.
전창국 : 96년 5월24일, 연천군 신서면 도밀리에서 나물을 뜯던 중 지뢰 폭발사고로 사망.
▶자료출처: 주민증언, 인터넷사이트
B-7) 미 제 1사단,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미 1군단 보병부대
한국전쟁 당시인 연천 대광리와 철원 율리리 경계지역을 중심으로 1951년 4월 22일부터11월 11일까지는 미 제 1사단이, 1951년 9월 29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미 제 3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전쟁을 치뤘다. 미1군단의 보병부대는 전쟁직후부터 주둔했으며 70년대 초반에 철수하였다. 그 뒤 한국군이 인수하였으나 미군들이 기지를 철수하면서 지뢰지대의 지뢰를 제거하지 않고 떠남으로서 미확인지뢰지대가 되었다. 그 뒤 매년 장마철이 되면 차탄천 상류인 이곳으로부터 한탄강을 따라 M14플라스틱 지뢰가 도처에서 발견되었으며 많은 지뢰피해자들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이민상 : 1973년 8월 3일, 연천군 백학면 노곡1리에서 수해로 떠내려온 지뢰를 군인들이 보 고서도 치워주지 않자 이를 직접 치우다가 사고. 손목이 잘리는 부상.
김용관 : 1990년 6월 30일, 자신의 논에 수해로 쓰러진 벼를 세우다 지뢰가 터지는 사고. 오른쪽 발목 절단.
김일복 : 1995년 7월 12일, 밭에서 일하던 중 수해로 유실되어 떠내려온 대인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발목 절단.
신동윤 : 95년 8월 28일, 백학면 노곡리 임진강변에서 물고기를 잡던 중 차탄천과 한탄강에 서에서 떠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지뢰가 폭발하여 사고. 옆구리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
강윤구 : 95년 8월 28일, 백학면 노곡리 임진강변에서 신동윤씨와 물고기를 잡던 중 지뢰가 폭발하여 사고. 양쪽 발목을 절단.
김찬수 : 96년 7월 26일,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서 수해 때 차탄천에서 떠내려오는 지뢰를 발견하고 수해복구작업을 한 달 이상 하지 못해 재산상의 피해가 더 커졌다고 호 소.
허태원 : 96년 7월 30일, 연천군 신서면 와초리 차탄천 인근 자신의 밭에서 홍수 뒤에 떠내 려온 지뢰와 폭발물을 발견하고 군부대에 신고. 심리적 충격 호소
김한풍 : 96년 7월 31일, 연천군연천읍 상2리 자신의 집 앞 도로에서 홍수로 떠내려 온 M14대인지뢰를 발견 신고 함. 심리적 충격 호소.
유성현 : 96년 8월 1일, 연천군 연천읍 옥산2리 배동훈씨의 밭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수해복 구를 돕던 중 지뢰를 주워 만지다가 손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함.
박수억 : 96년 8월 6일, 연천군 연천읍 와초리 자신의 옥수수 밭에서 소먹이용 사료를 수확 하던 중 대형 트랙터가 대인지뢰를 밟는 바람에 타이어가 터지는 사고를 당함.
김학길 : 96년 9월 6일,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자신의 논에서 중장비로 논을 갈다가 지뢰가 터져 일부장비가 파손되고 실신하여 병원에 입원 치료받음.
성명미상 : 96년 10월,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 차탄천에서 제방복구작업을 하던 중대전차 지 뢰가 폭발하여 굴착기가 완전히 파괴 됨.
오태의 : 연천군 연천읍 옥산리 차탄천 변에서 중장비로 농지정리를 하던 중 M14 발목지뢰 2개를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함 (인터뷰 내용 : 심리적 충격 호소)
최광훈 : 97년 4월 5일, 철원군 철원읍 율리리, 과거 미 1군단 보병부대의 지뢰매설지대 앞 율리천 수해복구 작업 중 중장비가 지뢰를 건드려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 중장비일 부가 파손되고 얼굴 등에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음.
정소이 : (33세) 2002년 6월 17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소재 화신폭포 옆 임진강변 에 아버지와 나들이를 갔다가 유실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다리 절단, 오른쪽 다리 부상
▶자료출처: 미군 근무자 증언, KCBL자료집, 피해자 증언.
B-8) 미 제 3사단, 미 제 2사단
미 제 3사단은 1951년 10월까지 철원 대마리와 그 인근에 주둔하였으며 그 뒤 한국군 미 제 9사단을 주력으로 하여 미군사령관의 작전 통제 하에 백마고지 전투를 치뤘다. 1952년 10월 전후로는 미 제 2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전 과정에서 대인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 후 지뢰지대를 제거한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전쟁 후 이 지역 전체는 미확인지뢰지대로 방치되었으며 68년 군 경험자들을 중심으로 개척촌을 형성하기 위한 개간작업이 이루어짐. 이 과정에서 마을주민 60여명이 대인지뢰로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으며 현재는 5명만이 생존해 있다. 군에서 중령으로 예편한 후 현재 마을 노인회장을 지내고 있는 모씨(본인과의 약속에 따라 이름을 밝히지 않음)는 62년 쿠바사태 직후 비상이 걸려 민통선 지역에 주둔하던 미군이 일제히 지뢰를 매설하던 시기에 자신의 손으로 수 만 발의 지뢰를 직접 묻었는데 그 지뢰로 결국 주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깊이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생존시 조사가 이루어진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조창행 : 65년 봄, 마을입주 초기라 천막에서 생활하며 경작할 땅을 개간하던 중 지뢰를 밟 아 사고. 왼쪽다리 절단(2000년 사망)
유철훈 : 68년 4월, 대마리로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 집터와 학교터를 닦기 위한 공사를 하던 중 발목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다리 절단.
장동용 : 75년, 자신의 논에서 경운기를 끌고 개간작업을 하던 중 지뢰 사고. 오른쪽 다리 절단.
전병화 : 90년, 대마리 주변지역 개간 시 발목지뢰 밟아 사고. 발목 절단.
박경서 : 68년 4월, 대마리 입주 초기 북과의 교전이 자주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개간한 땅 은 재간한 사람이 소유하게 한다는 군의 약속만 믿고 농지 개간 중 지뢰를 밟아 사고. 대퇴부절단. 그 뒤 땅의 원래 소유자가 나타나 개간한 땅을 다시 차지하는 데도 군과 정부는 아무런 대책 없이 모른 척. 결국 목숨을 바쳐 개간한 농토를 다 빼앗긴 꼴이 되었다 한다.
이수진 : 68년, 대마리 입주초기 농지 개간 중에 지뢰 사고. 발목 절단.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9) 미 제 25사단, 9군단, 미 제 7사단, 미공수187연대
철원 김화 북단 생창리 등을 중심으로 한국전 당시 저격능선 전투, 삼각고지 전투를 주도한 부대들이다. 51년 10월부터 52년 10월 이후까지 김화 북쪽지역에서 저격능선(Sniper Ridge)전투가 있었으며 미 제 25사단은 초반부에 9군단은 후반부에 한국군을 작전 통제하여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52년 10월 이후 이뤄진 일명 삼각고지전투에서의 주력은 미 제 7사단이었다.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는 미공수187연대가 합류하여 싸웠다. 이 기간동안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된 지뢰는 상상을 불허하는 숫자라고만 전해질 뿐 어디에도 누구에 의해서도 정확한 숫자와 매설지도가 작성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지역은 미확인 지뢰 지대가 되었으며 대마리와 마찬가지로 민간인들이 직접 개간한 땅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김화읍 생창리를 중심으로 조사된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문현 : 1979년, 초등학교 4학년 때 먹을 것이 없어 와수리 동네 야산에 올라가 산열매를 따먹다가 지뢰를 밟아 사고. 사망.
박영주 : 1979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인 고문현과 먹을 것을 찾아 산에 올라갔다가 지 뢰가 터지는 바람에 친구와 함께 사고. 발목 절단.
엄영구 : 1973년 12월 4일, 생창리 학교 앞 공터에서 고철을 수집해 생계를 이어가던 중 고 철 사이에 끼어 있던 지뢰를 건드려 폭발 사고. 그 자리에서 사망.
박정호 : 1992년 12월 4일, 생창리 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이웃의 논을 대신 갈아주다가 지 뢰가 터지는 사고. 그 자리에서 사망.
이은용 : 2002년 4월 22일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 속칭 샘물고개에서 나물을 뜯던 중 지뢰 밟아 사망. 3일만에 시신 발견.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10) 미 제 74사단, 미 제 3사단
1951년 10월9일에서 22일 사이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적근산을 중심으로 하여 미 제 74사단이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수색부대원들이 작전 중 많은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반윤수일병 : 21세로 97년 10월11일 전방진지 보강 공사 중 지뢰사고로 사망
서원배병장외 5명: 같은 날 반윤수 일병과 함께 공사 중 지뢰사고로 중경상
B-11) 미 제 24사단
1951년 10월 9일과 22일 사이에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외성동리를 중심으로 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수색부대들이 작전 중 많은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지뢰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김성곤병장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임대필일병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김청수이병 : (22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사망.
박성필상병 : (23세) 98년 5월20일.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탐지 및 통로개척 작업 중 지뢰 사고로 부상.
B-12) 미 제 25사단, 미 공수 제 187연대, 미 제 2사단
강원도 철원 김화지역을 중심으로 1951년 5월 23일부터 6월10일까지 미 제 25사단이, 1952년 9월 18일부터 11월까지는 미 제 7사단이,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25일 까지는 미 공수187연대가, 그리고 1953년 7월 13일부터 27일까지는 미 제 2사단이 전투를 치룬 곳이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주 하천인 남대천을 따라 큰 홍수 때마다 지뢰가 하천으로 유실되어 지뢰사고를 일으켰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준진 : (20세) 1970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야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 두 다리 절단.
김천수 : (39세) 1996년 8월1일 김화읍 청양3리 남대천 수침교 근처 논에서 일하던 중 유실 지뢰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정신적 충격과 불안감.
김진두 : (42세) 1997년 5월28일 김화읍 청양3리 논에서 트랙터를 타고 모내기하던 중 발목 지뢰가 터져 트랙터 일부가 파손.
철원농민 다수: 1996년 8월30일 수해 뒤 지뢰제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농사포기, 지 뢰제거를 촉구하는 시위
B-13) 미 제 7사단, 미 제 24사단
1951년 5월23일부터 6월10일 사이 미 제 7사단은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 상류의 백석산을 중심으로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같은 기간 미 제 24사단은 춘천호 상류인 화천군에 주둔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주 하천인 북한강을 따라 큰 홍수 때마다 지뢰가 하천으로 유실되어 지뢰사고를 일으켰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한재영 : 1996년 8월 4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무룡1리 참샘골 파로호에서 낚시 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 발목 절단. 당시 나이 44세
최순원 : 1996년 8월 31일 역시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무룡1리 참샘골에서 최순원 씨가 기르던 1년생 송아지가 지뢰폭발로 발목이 절단 됨. 당시 나이 37세
한정열 : 1996년 8월 12일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1리 춘천댐 하류인 자신의 밭에 서 홍수로 떠내려온 지뢰 발견. 정신적 충격과 불안으로 한동안 농사를 짓지 못 함. 당시 나이 48세
B-14) 미 해병 1사단, 미 45사단
1951년 6월 3일에서 9월20일 사이 미 해병 1사단,1연대, 5연대, 7연대, 11포병연대 3대대와 미해병 1사단 작전통제하의 국군1해병연대가 양구군 팔랑리와 만대리를 무대로 도솔산 전투를, 그리고 현리, 오유리 등을 무대로 일명 펀치볼 전투를 전개한다. 또한 1953년 5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 미 제 45사단이 이곳에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으며 전쟁이후 미확인지뢰지대로 방치되었다. 60년대 초 주민들을 이주시켜 지뢰밭을 개간하게 하고 마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현리 마을 한곳에서만 24명의 지뢰피해자가 발생했다. 2002년에도 만대리에서 지뢰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날 정도로 아직까지 지뢰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생존해 있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조사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김옥자 : 94년 6월15일 나물을 캐러 야산에 오르다가 지뢰 사고. (인터뷰 내용 : 엉덩이에 파편이 박혀 진물이 흐르고 걷기가 불편, 사고 충격으로 실어증 증세)
박춘영 : 93년 오유리 마을 뒷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지뢰를 밟아 사고. 왼쪽 다리 절단 본인을 비롯 가족 4명이 지뢰 피해자인 가장 비극적인 지뢰 피해 가족.
오흥식 : 93년 오유리 뒷산에 올라 생계를 위해 약초를 캐던 중 지뢰 밟아 사고. 발목 절단 박춘영할머니의 둘째아들.
오종식 : 94년 12월 오유리 뒷산에 토끼를 잡으러 조카 함께 갔다가 지뢰 밟아 사망.
김옥수 : 94년 12월 오유2리 인근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가 지뢰 밟아 사망.
백춘옥 : 98년 8월 12일 농사일 끝내고 냇가에 내려가 씻으려는 중 물에 떠내려온 지뢰 밟 아 사고. 발목 절단.
이영준 : 2002년 6월17일 트랙터운전중 대전차 지뢰를 밟아 온몸에 중상을 입고 트랙터는 완전 파손.
▶자료출처: 한국 전쟁사료, 피해자 증언, 인터넷 사이트
B-15) 미 수색 제 1사단, 미 제 2사단, 미 제 45사단
강원도 양구군 동면 비아리, 월운리를 중심으로 일명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이 위치한 곳으로 1951년 5월23일부터 6월10일까지 미 수색 제 1사단이, 1951년 8월18일부터 9월18일까지 미 제 2사단이, 1953년 5월13일부터 7월27일까지 미 제 45사단이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군인들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월운리 육군부대:1996년 9월22일 무장탈영병이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 민간인통제선 내 지뢰밭으로 도주하여 수색지연.
윤원근병장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사망.
차재욱상병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사망.
문승호병장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거중 지뢰폭발로 중상
김영철병장외 5명 : 1997년 6월13일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비아리에서 백두산부대 잡목 제 거중 지뢰폭발로 중경상.
B-16) 미10군단
1951년부터 한국전쟁이 진지전 양상으로 변화되면서 미10군단이 강원도 동부지방을 담당하여 전투를 치뤘다. 그리고 미 10군단 예하 한국군에 의해 강원도 고성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뢰가 무차별 살포 또는 매설되었다. 전쟁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미확인지뢰지대로 남게 되었으며 군인과 민간들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피해사항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고성주민 : 1996년 4월 4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달리 범장골 계곡에서 발생한 산불이 계속 번져 갔으나 이 지역이 지뢰밭인 관계로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60ha 를 태우고 지역전체의 재산손실을 가져옴.
정현철병장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원갑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장대성상병: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김유연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현승국상병: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진규상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박기돈일병 : 1997년 3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비무장지대 내에서 육군 뇌종부대원으로서 도로정비 및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
홍간낭 : 2000년 5월 13일 강원도 고성군 현례면 명파리 야산에서 산나물을 채취하다 지뢰를 밟아 왼쪽 발목 절단.
김일동대위 : 2002년9월4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에서 태풍피해 복구작업을 벌이다 발견한 지뢰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 지뢰가 폭발, 왼쪽 눈과 양 손을 잃 는 중상.
B-17)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장릉산 (章陵山)방공포대(부대명 미상)
원래 미군기지였다가 1982년 5월 국군이 인수하였다. 국군에 의한 지뢰 매설이 확인되었으나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사실도 있었다는 주민 증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뢰피해자
지역주민13명:1984년 9월1일 수해 시 지뢰 폭발로 산사태가 발생 마을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 소송을 하여 피해 사실을 인정받음.
방포대원11명: 부대 내에서 M18A1 인마살상용 크레모아가 폭발, 사병 1명이 숨지고 10여명 사망.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주민 소송자료, 주민증언
B-18) 인천 남구 문학동 문학산 방공포대(부대명미상)
77년 5월 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지뢰피해자
인천 포대명 2명: 97년 3월 24일, 인천 포대병 2명이 지뢰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B-19)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 (文安山) 방포부대(부대명 미상)
77년 5월 29일 미군에게서 이양 받은 기지이다.
▶지뢰피해자
병장1명: 93년 4월 12일 이 부대에 근무하는 병장이 지뢰를 밟아 발목을 절단
▶자료출처: 후방지역지뢰실태조사보고서(KCBL/녹색연합), KCBL 질의에 대한 국방부 답신, 주민증언, 현장확인
B-20) 미 1군단 포병대
70년 11월 23일 이양된 경기도 포천군 운천면 캠프 카이저 소속 불무산(영북면 문암리) 방공포대는 과거 미 1군단 미사일 기지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미군에 의한 지뢰 매설 사실에 대해서는 국방부나 미군에서 사실 확인을 해오지 않음으로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96년 미 제 2사단 장병 3명이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 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 지대에 들어와 지뢰를 밟는 사고가 일어난 뒤 한국군에 문제를 제기 하지 않고 오히려 군장병들이 부상자들 호송에 협조한 것에 대해 감사패를 수여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미군이 매설한 지뢰지대이기 때문에 그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지뢰피해자: 96년 미 제 2사단 장병 3명이 영평 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산악 훈련 중 불무산 방공포대 지뢰 지대에 들어와 지뢰를 밟고 중상
▶자료출처: 미군 근무자 증언, 군관계자 증언, KCBL 3차 자료집, 신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