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통일실현의 전망-한호석 2002/08/30 434

6.15 공동선언 이후의 통일정세와 조국통일실현의 전망

한 호 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례 >

(1) 조국통일은 현재진행형의 민족사적 위업이다

(2) 6.15 공동선언은 어디서 잉태되었는가?

(3) 6.15 공동선언 이후 조국통일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4)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대사변

(5) 대통령 아들들의 뇌물수수사건과 반통일세력의 책동

(6) 조·미 고위급 정치회담을 가로막은 서해교전

(7) 조국통일의 신심을 가질 수 있는 근거

나는 2002년 7월 7일부터 15일까지 재일동포 조국통일운동단체인 조국평화통일협회(회장 리종활)의 주선으로 재일동포사회를 방문하였다. 이번 방문은 2000년 7월, 2001년 4월에 이어 세 번째 방문이었다. 나는 이번에 삿뽀로시(혹가이도), 고오리야마시(후쿠시마현), 다치카와시(도쿄), 지바시(지바현), 사이타마시(사이타마현), 오카야마시(오카야마현), 오고오리시(야마구치현) 7개 지역에서 해당 지역의 강연회 준비위원회가 주최한 대중강연회에 연사로 출연하였다. 강연회가 열리는 날, 원근각처에서 달려온 각계각층 동포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민족성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재일동포 3세 청년들의 눈빛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큰 힘을 얻었다. 나는 강연일정에서 짬을 내어 삿뽀로시에 있는 조선초중고급학교와 오카야마시에 있는 조선초중급학교를 각각 방문하였고,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도 방문하였는데, 장병태 학장을 예방하고 조선역사박물관과 조선자연박물관을 관람하였으며 3학년 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글은 일곱 차례에 걸친 강연 내용을 다시 보완·정리한 것이다.

(1) 조국통일은 현재진행형의 민족사적 위업이다

6.15 공동선언 이후에 저는 수많은 강연회, 간담회에 연사로 출연해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른바 ‘국가정보원’이라는 집단에 의해서 부당한 입국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저는 남(한국)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연하였습니다. 또한 제가 살고 있는 재미동포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여기 재일동포사회에서도 꽤 여러 지역에서 강연회에 출연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재일동포 여러분들의 초청에 의하여 일본 열도의 동북방에 있는 혹카이도에서 시작하여 서남방에 있는 야마구치현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통일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연회에 참석한 동포들이 저에게 공통적으로 물으시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조국통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조국통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는 그 물음 속에는 7천만 겨레의 절절한 통일염원이 스며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를 저에게 묻지 마십시오. 조국통일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 그렇습니다. 조국통일은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조국통일이 내일에 이루어질 미래형의 민족사적 위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통일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기로부터 일본 땅에서 살아오신 재일동포 1세들은 지난날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염원하였고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다. 그러나 너희 2세들 대에 가서 통일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재일동포 1세들이 통일염원을 가슴에 안고 이 땅을 떠난 뒤로 세월은 자꾸 흘러갔습니다. 지난날 그 이야기를 들었던 재일동포 2세들의 머리에도 어느덧 흰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재일동포 2세들은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1세 부모님들의 뒤를 이어 통일을 염원하였고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지만 아직 통일의 길은 보이지 않는구나. 우리 대에 조국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너희 3세들 대에는 통일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동포 여러분, 그러나 그게 아니올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조국통일은 3세들 대에 가서 이루어질 미래형의 위업이 아니올시다. 조국통일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민족사적 위업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조국통일의 이정표인 6.15 공동선언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조국통일을 실현하고 있다. 너희들에게 통일조국을 물려주마. 반드시 물려주마.”

동포 여러분, 그렇습니다. 조국통일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조국통일은 우리 대에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조국통일위업을 완수하는 통일의 날은 미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통일위업은 전혀 실현되고 있지 않다가 앞으로 7년 뒤 혹은 10년 뒤 어느 날 갑자기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통일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으며 장차 통일의 날에 완수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국통일이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객관적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근거는 6.15 공동선언에 의하여 전변된 통일정세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의 통일정세는 우리에게 조국통일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의 생활력과 실천력에 의하여 조국통일위업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 이전에는 조국통일위업이 희망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은 조국통일위업을 희망의 영역으로부터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이것이 6.15 공동선언의 생활력과 실천력에 의해서 변화되고 발전된 오늘의 통일정세입니다.

그러므로 6.15 공동선언 이후에 우리는 조국통일을 희망의 언어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 조국통일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통일위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더욱 힘있게 투쟁하여야 합니다.

(2) 6.15 공동선언은 어디서 잉태되었는가?

오늘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고 있는 6.15 공동선언은 어느 날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그것을 잉태한 모체가 있고 그것이 태어난 때와 장소가 있는 것처럼, 6.15 공동선언도 그러합니다.

6.15 공동선언은 어디서 잉태되었을까요? 백두산에서 잉태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2000년 1월 어느 날 눈보라 휘몰아치는 백두산정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사나운 산짐승들도 세상만물을 뒤덮는 백두산 눈보라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었고, 거대한 밀림도 천하를 압도하는 백두산 눈보라의 기세 앞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고 서 있던 백두산, 바로 그곳에서 6.15 공동선언이 잉태되었다는 말입니다.

2002년 6월 14일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공동으로 발표한 「민족사에 길이 빛날 통일애국실록」이라는 글에는 6.15 공동선언의 잉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초에 영하 40도를 오르내리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백두산에 올랐는데, 그 백두산정에서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기 위한 북남수뇌상봉을 마련한 단호한 결심”을 내렸다는 대목입니다.

최근에 남측 언론에는 2000년 6월의 남북 최고위급회담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박재규 씨의 발언이 소개되었는데, 그의 발언 가운데는 6.15 공동선언의 잉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00년 1월부터 북측으로부터 여러 통로를 통해 긍정적인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남측과 북측에서 나온 두 자료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은 2000년 1월에 북측에서 남측에게 남북 최고위급회담을 개최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6.15 공동선언이 2000년 3월 9일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에서 잉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베를린 선언은 2000년 1월에 있었던 북측의 제안에 대한 응답형식으로 나온 것이었고, 베를린 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천명했던 남북 당국자회담이란 최고위급회담이 아니라 장관급 회담이었습니다.

6.15 공동선언은 2000년 1월 눈보라 휘몰아치는 백두산에서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언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7천만 겨레의 최대 숙원인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이정표인 6.15 공동선언은 다른 데서 잉태될 수 없고 다른 데서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7천만 겨레의 역사가 시작된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잉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산입니까? 단순한 산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주민족의 상징이며, 조국통일의 상징이 아닙니까.

6.15 공동선언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잉태되고 평양에서 태어났으므로, 조국통일위업은 백두산의 힘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백두산의 힘은 우리 나라 영토의 끝인 한라산까지 뻗어가며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3) 6.15 공동선언 이후 조국통일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뒤로 이태가 지나고 있는데, 그 이태 동안 조국통일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측면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남북 사이에서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다방면적인 접촉, 내왕, 대화, 교류, 협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것만 해도, 다음과 같은 성과들을 거두었습니다. 남북 노동자 공동행사와 남북 농민 공동행사가 열렸고, 남북 지식인 공동학술행사와 남북 종교인 공동행사가 열렸으며, 남북 이산가족 상호방문, 남북 적십자 회담, 남북 경제협력회의, 남북 통신협력회담,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남북이 합작하여 과학기술대학을 건립했고, 남북이 합작하여 농기계수리공장을 건설했고, 남북이 합작하여 피씨방을 개설했습니다. 민족통일대토론회와 민족통일대축전이 열렸고, 그리고 제주도민 단체방북이 성사되었고, 총련 동포들의 고향방문이 실현되었지요.

6.15 공동선언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처럼 힘있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남북 사이의 교류와 협력은 6.15 공동선언에 의하여 실현되고 있는 조국통일위업의 일환이며, 조국통일 3대 원칙인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조국통일역량의 주동적인 조치입니다.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을 활발히 추진해야 합니다. 조국통일위업은 남북 사이의 단절, 격폐, 대립이 지속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현되는 것이 아니올시다. 교류와 협력이 심화·발전되는 가운데 실현되는 것입니다.

남북의 교류와 협력은 단절, 격폐, 대립을 해소하고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실현하는 필수조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발표되었던 7.4 남북공동성명에서는 조국통일 3대 원칙만 합의한 것이 아니었고, 그 원칙을 실현하는 필수조건인 남북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도 합의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합니다. 7.4 남북공동성명에서는 “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1991년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 제3장에서도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남북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합의를 이루어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1972년과 1991년에 남북 정부당국이 두 차례나 합의하였던 상호교류와 협력은 반통일세력의 집요한 방해책동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상호교류와 협력은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28년이 지난 2000년 6월에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절, 격폐, 대립에 묶여있었던 남북관계를 풀어내어 상호교류와 협력의 단계로 진입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백두산 눈보라 속에서 잉태되고 평양에서 태어난 6.15 공동선언이 실현하고 있는 조국통일의 당면과업입니다.

둘째, 조국통일의 주체역량이 비상히 강화되고 있습니다.

저는 조국통일의 주체역량이 강화되고 있다는 평범한 표현이 아니라 ‘비상히’ 강화되고 있다는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국통일의 주체역량이 비상히 강화되고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남측과 북측의 조국통일역량이 강화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북측의 조국통일역량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북측은 국가역량을 조직·동원하여 조국통일위업에 힘써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측의 국가역량이 강화되는 것은 곧 북측의 조국통일역량이 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국가역량은 정치·외교력, 군사력, 경제력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북측의 정치·외교력과 군사력은 막강합니다. 지난 1990년대에 초강대국이라고 떠들고 있는 미국의 정치·외교력과 군사력에 맞서서 투쟁하는 동안 북(조선)이 발휘하였던 힘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미국이 제 아무리 ‘힘의 정책’을 동원하여 북(조선)을 압박했어도, 북(조선)은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미국의 전쟁위협을 물리치고 그들을 정치협상의 자리에 끌어내었습니다. 조·미 정치협상이 진행되었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에서도 북(조선)은 불굴의 투혼으로 싸워서 자기의 뜻을 기어이 관철하였습니다. 1993년의 조·미 뉴욕 공동성명, 1994년의 조·미 제네바 기본합의서, 2000년의 조·미 워싱턴 공동성명이 그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측의 경제력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기간에 평양을 방문했던 분들이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당시 ‘고난의 행군’이 얼마나 커다란 시련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측을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경제적 어려움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남측에서 발표한 북측의 경제성장률 추이에 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북측의 경제는 1996년에 -3.6%를 기록했습니다. 1997년에는 -6.3%로 추락했습니다. 어떤 나라의 국가경제가 -6%가 넘게 급락하면 버티기 힘듭니다. 어떤 경제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북측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생산량이 무려 35년이나 후퇴하여 1960년대 초의 생산량으로 격감하였다고 합니다. 1997년은 북측만이 아니라 남측에서도 외환위기로 촉발된 경제파탄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남북이 모두 경제난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때였습니다.

최근에 북측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니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측의 경제전문가들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경제전략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고하였다고 합니다. 관광업을 진흥시켜 외자를 유치하는 전략, 외국의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경제를 부분적으로 개방하는 전략, 그리고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한 대형 발전소 건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른바 ‘경제개방 전략’에 대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자력갱생의 사회주의 건설전략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외세의존을 배격하고 자력갱생으로 국가경제를 되살려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적 방침은 차츰 힘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측 자료에 의하면, 북측의 경제성장률은 1998년에 -1.1%로 올라서더니, 1999년에는 놀랍게도 +6.2%로 도약하였습니다. -6.3%까지 추락했던 국가경제가 불과 이태 사이에 +6.2%로 뛰어올랐습니다. 2001년에는 +3.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1999년부터 연속하여 3년째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북측의 경제력이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북측의 국가역량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북측의 조국통일역량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북측의 조국통일역량은 경제력이 성장하는 것에 따라서 비상히 강화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남측의 조국통일역량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남측의 조국통일역량은 남측의 운동권 역량을 의미합니다. 남측의 운동권 역량도 비상히 강화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남측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까, 남측 운동권 세력은 약 43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핵심적인 활동가는 1만2천 명, 운동권 주도세력은 32만 명, 운동권 동조세력은 400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남(한국)의 한 일간지에서는 해마다 ‘국민의식여론조사’를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1998년에 실시했던 여론조사에서 통일조국의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여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조사대상자 가운데 9.3%였습니다. 1990년에는 8.3%였는데, 8년 동안 1%가 늘었습니다.

그 여론조사를 담당했던 여론조사 전문가 김행 씨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통일된 한반도의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여야 한다는 대답이 약간의 등락을 거치면서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처음 10년 동안 1% 정도씩 늘어가다가 10%를 넘어서면 돌비현상이 일어나 급속도로 확산되고, 그러한 현상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만일 그 여론조사에서 남북의 상이한 체제가 공존하는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물음이 있었다면 아마 9.3% 이상의 응답을 보였을 것입니다. 9.3%의 응답이 나온 시점이 1998년이었으므로,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 그러니까 4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에는 아마 10%를 넘어섰을 것입니다.

지난 6월 13일에 남(한국)에서 실시된 지방자치선거의 결과를 분석해보면 김행 씨가 지적했던 ‘돌비현상’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남(한국)에서는 네 개의 정당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그리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입니다. 6.13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51.2%의 지지율을 얻었고,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은 29%의 지지율을 얻었으며, 민주노동당은 8.1%의 지지율을, 자유민주연합은 6.5%의 지지율을 각각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영남권에 편중되었으며, 민주당의 지지율은 호남권에 편중되었고, 자민련의 지지율은 충청권에 편중되었습니다. 그에 비하여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남측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었습니다. 지역주의의 장벽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성된 이후 지금까지 남(한국)의 정치발전을 결정적으로 저해하고 있는 데, 그 장벽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민주노동당에 의하여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민련은 모두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았던 친미사대주의자 이승만, 김성수, 박정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져 지난 반세기 이상 남(한국)의 정치권을 주물러오고 있는 낡고 부패한 반민중적 정당들입니다. 그런데 창당된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청소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이번 선거에서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부상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사회적 현상이 대중적 지지율 10%를 넘어서면 돌비현상이 일어나 급속도로 확산된다고 지적했던 여론전문가의 말을 실감나게 하고 있습니다. 남측의 민족민주운동이 일으키고 있는 돌비현상이야말로 남측의 조국통일역량이 비상히 강화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가장 뚜렷한 증거입니다.

다음으로, 6.15 공동선언 이후의 조국통일운동이 보여주고 있는 몇 가지 특징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는, 조국통일운동의 최전선에 남측의 노동자들이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장차 남측의 1천3백만 노동자가 조국통일운동에 주도세력으로 나서게 되면 곧 조국통일이 실현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00년 7월에 도쿄에서 열렸던 통일토론회에서 저는 남측에서 청년학생들이 조국통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저는 남측에서 조국통일운동의 최전선에 노동자들이 나서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전해드립니다.

거대한 사회·정치적 잠재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1천3백만 노동자들은 분단체제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사회계급입니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언제나 억눌리고 천대받고 수탈당하기만 했던 그들이 오늘은 6.15 공동선언의 기치 아래서 조국통일위업을 자각하고 통일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당당히 나서고 있습니다. 1천3백만 노동자가 나서야 조국통일이 실현됩니다.

둘째로는, 민중 전체의 통일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조국통일운동은 역사상 가장 넓은 범위의 대중이 참가하는 광범위한 민중운동입니다. 조국통일운동은 남녀노소, 계급계층, 거주지역을 불문하고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참가할 수 있는 대중운동이고, 또 누구나 참여해야 할 운동입니다. 6.15 공동선언의 기치 아래 남녀노소의 차이, 계급계층의 상이, 거주지역의 구분을 뛰어넘어서 광범위한 대중역량이 집결되고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은 조국통일운동의 대중화 추세를 힘있게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전민족적 범위의 조국통일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 금강산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렸던 민족통일대토론회와 민족통일대축전을 보십시오. 남, 북, 해외의 각이한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함경도 노동자와 전라도 농민이 만났고, 평안도 처녀와 경상도 총각이 만났고, 충청도 아주머니와 황해도 아저씨가 만났으며, 서울의 회사원과 평양의 지식인이 만났지요. 어디 그 뿐이었습니까. 일본 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과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재미동포들이 만났으며,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재러시아동포들과 지구의 남반구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재호주동포들이 만났습니다. 본국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이 6.15 공동선언의 기치 아래 마음을 서로 통하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하게 되었습니다.

조국통일위업은 본시 민족사적 위업이므로, 그 위업이 전민족적인 거대한 운동력에 의하여 수행되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조국통일운동은 지금 전민족적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4)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대사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면 조국통일의 길이 활짝 열리고 조국통일위업을 곧 완수하게 될 터인데,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길에서 가장 커다란 사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여야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이 열리게 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6.15 공동선언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운동을 방해하는 내외 반통일세력을 진압하고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대사변이 될 것입니다.

6.15 공동선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7천만 민족 앞에 엄숙히 서약한 6.15 공동선언의 핵심과업입니다. 그러므로 그 과업의 이행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서울 방문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초점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는 적절한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요?

저는 2001년 12월초에 발표한 논문 「조·미 공동성명을 이행하는 문제와 민족자주를 실현하는 과업」에서 남북 정부당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를 간파한 미국이 2001년 3월에 김대중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불러 한·미 정상회담을 벌려놓고 부시가 직접 김 대통령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서울에 초청하지 말라고 지시하였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당시 남북 정부당국에 의해서 준비되고 있었으나 반통일세력 미국에 의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올해에 들어와서 남북 정부당국은 또 다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추진하였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것일 뿐 아니라, 반통일세력의 책동을 결정적으로 무력화하고 6.15 공동선언을 한 층 더 높은 차원에서 실현하는 대사변이라는 사실을 남북 정부당국이 잘 알고 있으므로 이를 다시 추진한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북 정부당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6.15 공동선언에서 지적했던 ‘적절한 시기’가 바야흐로 눈앞에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남북 정부당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를 언제 어떻게 이루어냈을까요? 그 중대한 합의는, 놀랍게도 올해 2002년 4월 5일 평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별보좌관 임동원 씨를 지난 4월 3일부터 5일까지 대통령 특사로 평양에 파견하였습니다. 대통령 특사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남북 정부당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기로 합의한 남북공동보도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비록 남북공동보도문이라는 범상한 형식으로 발표된 합의문이었으나, 그 합의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거기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합의문 제2항은 “쌍방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라의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공동선언의 합의사항에 따라 그 동안 일시 동결되었던 남북관계를 원상회복하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의 합의사항에 따라 남북관계를 원상회복한다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남북관계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6.15 공동선언의 마지막 문장으로 기록된 핵심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남북관계를 원상회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남북관계를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던 당시의 수준으로 회복하겠다는 통일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합의문 제2항을 그렇게 해석하는 논리적 근거는 제3항에 있습니다. 제3항은 “쌍방은 남북 사이의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동부에서 새로 동해선 철도 및 도로를, 서부에서 서울-신의주 사이의 철도 및 문산-개성 사이의 도로를 빨리 연결하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남북관계를 원상회복하는 제2항에 이어 제3항에 남북철도 연결사업을 배치함으로써 그 사업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합의문 제3항과 제4항을 비교하면, 남북철도 연결사업이 얼마나 중시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제4항은 “쌍방은 남북 사이의 대화와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고 지적하면서 다섯 가지의 당면과업을 제시하고 있는데,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가동, 금강산 관광 활성화, 남북 이산가족 상호방문 재개, 북측 경제시찰단의 남측 방문, 남북 장관급 회담 재개가 그것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남북 교통망 연결사업은 제4항에 열거되어 있는 몇 가지 당면과업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임동원 특사와 김용순 비서가 합의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남북 사이의 끊어진 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을 남북 협력사업 항목에 넣지 말고 제3항으로 격상시키고 최대 중점과업으로 명시함으로써 그 의의를 특별히 강조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도를 알고자 하면,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1994년 6월 김일성 주석은 당시 남측 대통령(김영삼)을 평양으로 초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결심에 의하여 남측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남측 대통령의 평양 초청은 김일성 주석의 서울 방문을 위한 선행조건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결심은, 먼저 남측의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하고, 그 다음에 김일성 주석이 친히 서울을 방문하여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의 서울 방문은 항공편이나 자동차편이 아니라 남북 사이의 끊어진 철도를 연결한 뒤에 열차편으로 실현되어야 하였습니다.

1994년 7월 7일 김일성 주석은 끊어진 남북 종단철도를 연결하여 서울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그 과업을 비롯한 몇 가지 통일사업을 추진하기로 한다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에 서명한 직후에 서거하시었습니다. 북측 지역의 최남단인 판문점 북측 경비구역에는 김일성 주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필적을 새긴 친필비가 있는데, 거기에는 “1994. 7. 7.”이라는 서명 날짜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서명하였던 최후의 결정서에는 끊어진 남북 종단철도를 연결하여 서울을 방문한다는 조국통일과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북 종단철도 연결과 서울 방문은 두 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조국통일과업으로 되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통일유훈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북측은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훈을 무조건 관철하여야 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남긴 통일유훈대로 서울을 방문하여야 하며, 서울을 방문하기 위한 남북 종단철도 연결공사를 추진해야 합니다.

서울에서 신의주로 통하는 남북의 끊어진 철도 구간은 20km가 되는데, 그 가운데서 남측의 12km 구간은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이미 완공되었습니다. 나머지 북측의 8km 구간만 완공하면 철도연결공사가 완공됩니다. 북측의 8km 구간을 연결하는 공사는 조선인민군이 맡고 있는데, 조선인민군은 아직 공사에 착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철도연결공사에 들어가는 자재나 노동력이 부족해서 착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할 수 있는 조건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착수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할 수 있는 조건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는데 조선인민군이 남북철도 연결공사를 완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철도로 남북의 경제시찰단이나 이산가족들이나 장관들이 오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훈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애써서 길을 닦아놓았더니 문둥이가 먼저 지나가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철도는 경제시찰단이나 이산가족들이나 장관들이 먼저 이용해서는 안 되는 통일유훈의 철도입니다. 그 철도는 한(조선)반도와 유라시아대륙을 연결하는 물류유통의 통로이기 이전에, 반통일세력이 끊어놓았던 우리 겨레의 지맥과 혈맥을 다시 하나로 이어놓는 조국통일의 동맥입니다.

20세기의 끊어진 철도를 21세기의 통일철도로 재생시키고, 그 철도로 서울을 방문함으로써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훈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굳은 결심입니다. 4월 5일 평양에서 채택된 남북공동보도문 제3항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그러한 결심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3항을 자세히 읽어보면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빨리 연결한다’는 구절입니다. 지금까지 남북 사이에서 많은 합의문들이 채택되었건만, 이번처럼 ‘빨리’라는 말로서 당면과업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표현한 적은 없었습니다. ‘빨리’라는 이 말 한 마디는 남북 교통망을 연결한다는 범상한 의미를 뛰어넘어서, 하루 빨리 통일철도를 연결하여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려는 비범한 통일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일철도를 빨리 연결하여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훈을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의지가 ‘빨리’라는 한 마디의 말에 농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통일철도를 빨리 연결합시다!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조국통일위업을 하루라도 빨리 실현합시다!”, 바로 이것이 4월 5일의 남북공동보도문을 통하여 7천만 겨레에게 전달되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뜨거운 통일의지입니다.

이처럼 4월 5일에 채택된 남북공동보도문에서 끊어진 철도를 빨리 연결하기로 발표하였으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선인민군에게 철도연결공사에 착수하라는 명령만 내리면 불과 두 달만에 통일철도는 완공될 것입니다.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심대로 통일철도 연결공사가 지난 5월에 착공되었더라면, 남측에서 6월의 월드컵 열기가 가라앉고, 부시 정부의 대북특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조·미 고위급 회담이 재개되는 7월말쯤에는 아마 완공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는 8월 15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는 역사상 최대 사변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역사적인 그날 아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열차가 수십만 북녘동포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평양역을 출발합니다. 지난해 여름 21세기의 자주화를 천명한 모스크바 선언을 선포하였던 역사의 현장에 이르기 위하여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질렀던 ‘자주행 열차’, 밤이나 낮이나 북측 인민들의 생활현장을 끝없이 찾아가는 ‘인민행 열차’, 바로 그 열차가 그날에는 통일열차가 되어 남행길에 오릅니다. 우리 나라 영토를 갈라놓은 통한의 군사분계선을 뚫고 남으로 남으로 질주합니다. 임진강 철교를 건너 남녘 동포들을 찾아갑니다.

그날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남측의 최북단에 있는 도라산역에 나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정중히 영접할 것입니다. 드디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열차가 도라산역에 도착하면, 두 분은 감격 어린 두 번째의 상봉을 하게 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 대통령, 이 열차에 오르십시오! 통일열차를 타고 함께 갑시다!”라고 호탕하게 말씀하시면서 김 대통령과 동승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함께 타신 통일열차는 분단원흉 주한미군이 도사리고 있는 문산과 파주의 주둔지를 돌파하고 계속 서울을 향해 쾌속으로 질주합니다.

통일열차가 당도하게 될 서울역에는 이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감격적인 대사변을 맞이하는 수십만 환영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 것입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남대문을 거쳐, 시청 광장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진 서울 중심가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환영하는 수십만 군중이 손에 손에 푸른색 한(조선)반도 영상이 그려진 통일기를 들고 ‘조국통일 만세!’를 목메어 외칠 것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을 것이며, 조국통일운동을 크게 전진시킬 것입니다.

(5) 대통령 아들들의 뇌물수수사건과 반통일세력의 책동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게 되었습니다. 왜 이러한 급변현상이 일어났을까요? 4월 5일의 남북공동보도문이 이행되는 것을 방해하려는 반통일세력이 책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가로막은 반통일세력의 책동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평양에서 남북공동보도문이 채택되었던 날로부터 나흘이 지난 4월 9일 서울에서는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사건은 속칭 ‘최규선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최규선이라는 사람이 기자회견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폭로사건이 남(한국)의 정치권을 뒤흔들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 유학 시절인 1994년에 알게 된 김대중 대통령의 셋째 아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모두 7만 달러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폭발한 대통령 아들들의 뇌물수수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평생 따라다녔던 이른바 ‘동교동계 좌장’이라고 하는 실세인물도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지자 하루아침에 쇠고랑을 찼고, 대통령의 두 아들이 한꺼번에 뇌물수수사건에 걸려들면서 쇠고랑을 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집권당은 뇌물수수사건이 터지면서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받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6.13 선거에서 집권당이 겨우 29%의 지지율밖에 얻지 못하고,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노무현 씨의 지지율이 ‘노무현 돌풍’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은 바로 뇌물수수사건 때문에 생긴 급변현상입니다.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이 민심을 잃어버리고 정치적 타격을 받게 된 조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고 해도 남측의 대중은 김대중 대통령을 혐오하고 있기 때문에 두 분의 상봉을 별로 환영하지 않을 것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서 조국통일에 관한 중대한 합의를 채택한다고 해도, 남측의 대중은 그 합의를 지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뇌물수수사건은 4월 5일의 남북공동보도문에 따라서 곧 추진될 예정이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가로막고 말았습니다. 뇌물수수사건이 갑자기 불거져 나오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가로막은 불행한 사태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세력은 무엇일까요? 최대의 반통일세력인 미국의 국가정보기관이 그 배후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와대의 해명수사를 전담하는 부서이며, 대통령 친인척 관리를 임무로 하는 부서인 경찰청 특수수사과를 지휘하고 있었던 총경 최성규 씨는 ‘최규선 사건’이 터지자 미국 정부의 해당기관은 4월 19일에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도록 방조하였습니다. 뇌물수수사건이 세상에 폭로된 경로를 파헤쳐 보거나,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과거행적을 추적해 보면 무수히 많은 의혹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의혹들은 그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반통일세력의 방해공작에 의해서 발생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6) 조·미 고위급 정치회담을 가로막은 서해교전

극적으로 마련되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계획이 김대중 대통령 측근과 아들들의 뇌물수수사건이 세상에 폭로됨으로써 불투명해지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한 편에서는 조·미 사이의 고위급 정치회담을 재개하는 준비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부시 정부는 원래 잭 프릿처드로 내정하였던 대북특사를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로 급을 격상시켜 제임스 켈리를 7월 둘째 주에 평양에 파견하기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켈리가 대북특사로 평양에 가면 조·미 고위급 정치회담이 재개되는 것입니다.

조·미 고위급 정치회담이 재개되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요? 클린턴 정부 말기에 조·미 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막후에서 합의에 이르렀던 조·미 미사일 협정이 체결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시의 ‘악의 축’ 폭언 이후에 자꾸 꼬여만 가던 조·미 관계는 국교수립을 향한 급류를 타고 진전될 것이며, 이른바 ’2003년 위기설’은 꼬리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입니까? 북(조선)의 외무성 당국자와 미 국무부 당국자 사이에서 대북특사의 방북일정이 합의되고 제임스 켈리가 평양행 항공편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대형사건이 터졌습니다. 지난 6월 29일 서해의 연평도 해역에서 제2차 서해교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1999년 5월말 당시 클린턴 정부의 대북특사 윌리엄 페리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인 6월 15일에 서해교전이 일어났었는데, 이번에도 부시 정부의 대북특사 제임스 켈리가 평양을 방문하기 직전에 또다시 서해교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 정부의 대북특사 파견과 서해교전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 그것을 두 사건의 우연한 연동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제2차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미국의 여론은 조·미 고위급 회담 재개에 대하여 등을 돌렸고, 결국 제임스 켈리의 평양 방문은 기약 없이 연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서해교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영해와 관할수역이라는 두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해는 영토, 영공과 더불어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며 주권국가의 인민의 생활공간입니다. 함선, 상선, 어선이 다른 나라의 영해에 허가를 받지 않고 들어가는 행위는 주권침해가 되며, 따라서 나포되거나 격침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바다를 끼고 있는 모든 나라들은 자기 영토의 해안선으로부터 12해리까지의 바다를 영해로 삼고 있다는 것도 또한 상식입니다.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나라도 반도의 해안선을 기점으로 하여 12해리까지의 해역을 영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분단국가입니다. 우리 나라 영토에는 6.25 전쟁 직후 남북을 갈라놓은 지상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이 지상 군사분계선은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 쌍방의 합의에 의하여 그어진 경계선인데, 군사분계선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영토를 갈라놓는 국경선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을 북측의 영토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북측의 관할지역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지상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이 남측의 영토가 아니라 남측의 관할지역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1953년 당시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복잡한 과정에서 쌍방은 지상 군사분계선은 확정지었으면서도 해상 군사분계선 설정에 관해서는 논란을 거듭하였으나 확정짓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 영토에는 정전협정에 따라 지상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있지만, 우리 나라 영해에는 해상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영해에는 해상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지만, 임진강 하구에서 끝나는 지상 군사분계선의 서쪽 끝부분을 기준점으로 하여 황해남도와 경기도의 바다에 그어지는 중간선은 사실상의 해상 경계선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해상 경계선의 이북수역은 북측의 관할수역이고, 그 이남수역은 남측의 관할수역입니다.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므로 북측의 영해, 남측의 영해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으며, 북측의 관할수역, 남측의 관할수역이라는 개념만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북측의 12해리 관할수역 안에 남측의 관할지인 연평도가 자리잡고 있다는 데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천항에서 연평도를 오가려면 북측의 관할수역을 통과해야 하고, 연평도 어민들이 어로작업을 하려고 해도 북측의 관할수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9년에 주한미군사령관은 황해남도 해안선과 연평도 사이의 좁은 해역에서 시작하여 백령도까지 이르는 바다 위에 제멋대로 해상 경계선을 그어놓았는데, 그것이 이른바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입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북(조선)과의 아무런 합의도 하지 않고, 북(조선)에게 아무런 통보조차 없이 북측의 관할수역 안에 제멋대로 해상 경계선을 그어놓은 것입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자기가 북방한계선을 그어놓은 사실을 군사기밀로 하였으므로 아무도 그러한 해상 경계선이 그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999년 6월 15일에 제1차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북방한계선의 존재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주한미군사령부와 남(한국) 정부는 북(조선)에게 북방한계선을 인정하라고 요구해오고 있는데, 그것은 국제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신성불가침의 주권영역인 북(조선)의 12해리 관할수역을 인정하지 않고, 그 관할수역 안에 제멋대로 그어놓은 해상 경계선을 북(조선)이 인정하고 지키라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요구입니다.

서해교전이 일어났던 연평도 근해의 해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평도 해역에 그어놓은 북방한계선 말고도 두 개의 선이 더 그어져있는데 그것이 ‘조업통제선’과 ‘어로한계선’입니다. 북방한계선은 연평도 북쪽 바다와 황해남도 남쪽 바다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서쪽으로 길게 그어져 있는데, 그 아래 남쪽 해역에 조업통제선을 그어놓았고, 다시 그 아래 어로한계선을 그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북(조선)의 12해리 관할수역 안에 북방한계선, 조업통제선, 어로한계선을 제멋대로 그어놓은 것입니다.

연평도 북쪽 바다와 황해남도 남쪽 바다가 만나는 해역은 그 폭이 너무 좁아서 조업통제선과 어로한계선을 그어놓을 수 없으므로, 북방한계선만 그어져 있습니다. 연평도 어민들은 그 비좁은 바다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연평도 서쪽 바다, 다시 말해서 북측의 관할수역에 들어가서 어로작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4월부터 6월까지는 연평도 근해의 깊은 바다 속에서 살고 있는 꽃게들이 산란기를 맞아 따뜻한 연안해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일본사람들은 꽃게를 ‘와따리가니’라고 부릅니다. 꽃게들은 산란기가 되면 따뜻한 바다를 찾아 황해남도 남쪽 연안해역로 이동합니다. 바로 이 기간에 남북의 꽃게잡이 어선들이 몰려들어 꽃게를 잡습니다. 물론 꽃게를 잡는 바다는 북측의 관할수역입니다.

꽃게잡이는 하루 종일 그물을 드리우고 꽃게가 잡히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표가 여러 개 달린 커다란 그물을 바다에 쳐놓고 연평도로 돌아왔다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그물을 재빨리 걷어오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측 어선들이 꽃게를 잡으려고 북측의 관할수역에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남측 어선들이 북측의 관할수역에서 꽃게잡이 그물을 내리거나 올리는 동안에 만일 북측 경비정이 나타나면, 남측 어선들은 “빨간 바가지가 떳다”는 은어를 비상신호로 주고받으면서 재빨리 연평도로 되돌아간다고 합니다. 북측의 경비정들은 북측의 관할수역에 잠깐씩 들어가서 꽃게를 잡아가는 남측 어선들을 마음만 먹으면 수없이 나포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평도 어민들이 일년에 한 철 꽃게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북측은 연평도 어민들이 북측의 관할수역에 잠깐씩 들어가서 꽃게를 잡아가는 것을 묵인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남측 어민들이 북측에서 살기 위하여 어선을 타고 월북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남측 군부는 남측의 해군 경비정들이 연평도의 꽃게잡이 어선들이 북방한계선을 넘어가서 북측 경비정에게 나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해교전이 일어난 바다에 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북측은 북방한계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남측 어선들은 북방한계선을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북측의 관할수역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북측 경비정은 자기의 관할수역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있는 남측 어선을 나포하지 않고 있으며, 북측 경비정이 나타나면 남측 어선들이 재빨리 연평도로 되돌아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남측 어선의 북방한계선 월선을 방지하고 피랍을 방지한다는 구실을 내걸 수 있겠습니까.

미 해군 함정들과 남(한국) 해군 함정들이 연평도 해역에 끊임없이 출동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그 해역에 제멋대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 이남 해역을 주한미군사령관이 관할하는 ‘작전수역’으로 언제까지나 장악하려는 정치·군사적인 의도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북(조선)의 관할수역 안에 제멋대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과 조업통제선 사이의 바다를 이른바 ‘완충수역’이라고 부르는 데, 그 완충수역에 남(한국)의 해군 함정이 들어가려면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 완충수역도 역시 북측의 관할수역입니다.

꽃게잡이 어선들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북측의 관할수역에 수시로 드나드는 남측 해군 함정을 밀어내기 위해서 북측에서도 해군 함정을 출동시킵니다. 주한미군사령부와 남(한국) 군부는 북(조선)의 해군 함정들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서 조금이라도 남하하면 정전협정을 위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에서 합의된 적이 없으므로 정전협정을 위반하였다는 주장은 헛소리입니다. 주한미군사령부와 남(조선) 군부가 제멋대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의 존재를 거론하면서 북(조선)의 12해리 관할수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불법적인 ‘북방한계선’을 지키겠다는 구실을 내걸고 북(조선)의 관할수역을 무력으로 장악하려는 것이야말로 정전협정의 기본정신을 위반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사건 당일 6월 29일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날도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명령을 받은 남(한국) 해군 경비정 6척이 두 척씩 세 개 편대로 나뉘어져 연평도 해역에 전진배치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253편대의 경비정 두 척은 연평도 해안 가까이 배치되었고, 256편대의 경비정 두 척은 연평도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바다, 다시 말해서 황해남도 남쪽 해안선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바다에 배치되었으므로 북(조선) 해군을 크게 자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253편대와 256편대 사이의 바다에 232편대 경비정 두 척이 출동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232편대 경비정 두 척은 황해남도 해안이 서남쪽으로 비쭉 나온 강령반도의 맨끝인 등산곶 앞바다에 출동하였습니다. 등산곶에는 북측 해군기지가 있습니다. 서해교전이 일어났던 사건 당일,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명령에 따라서 232편대 경비정 두 척은 북(조선) 해군기지가 손에 잡힐 듯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등산곶 앞바다 북(조선)의 관할수역 안에 전진배치되었습니다. 남(한국)의 경비정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명령에 따라서 북(조선)의 관할수역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등산곶 해군기지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남측 경비정 두 척이 자기의 관할수역에 나타나자 북측도 경비정 한 척을 긴급 출동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북측의 관할수역 안에서 남측 경비정 두 척과 북측 경비정 한 척이 서로 함포를 겨누면서 전투태세에 들어갔습니다.

주한미군사령부와 남(한국) 군부의 주장에 따르면, 남측 어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남측 경비정 두 척을 사건해역에 출동시켰는데, 북측의 경비정 한 척이 갑자기 ‘북방한계선’을 넘어 침범했기 때문에 기동차단으로 대응하였고 그 과정에서 북측의 경비정이 선제공격을 가했다고 사건경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측의 견지에서 보자면, 남측의 경비정 두 척이 북측의 관할수역 안으로 침범해 들어와 등산곶 해군기지에 접근하였기 때문에 경비정 한 척을 출동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상반된 견해와 주장 가운데 어느 것인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핵심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첫째 문제는, ‘북방한계선’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12해리 관할수역을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북방한계선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일방적이고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임의의 해상 경계선이므로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비법적 개념이지만, 12해리 관할수역은 국제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모든 나라들이 국가주권에 의해 선포하고 있는 12해리 영해법에 근거하여 설정되는 합법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는 12해리 영해법을 유린하면서 북(조선)이 12해리 관할수역으로 선포한 황해남도 앞바다를 자기의 ‘작전수역’으로 장악하고 있고, 남(한국) 정부당국은 자기의 12해리 관할수역을 주권영역으로 지키고 있으면서도, 북측이 황해남도 남쪽 바다에 12해리 관할수역을 선포한 것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북측에게 주한미군사령관이 비법적으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강요입니다.

더욱이 한심한 노릇은, 남측과 서방세계의 언론들이 한결같이 북측의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왔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사태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태의 본질은 주한미군사령부와 남(한국) 정부당국이 12해리 관할수역에 관한 북(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문제는, 서해교전 직전에 연평도 해역에서 어느 쪽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남측에서 발표된 두 개의 자료가 있습니다.

서해교전이 일어나기 열흘 전인 6월 19일에 남(한국)의 합동참모본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북측의 해군 함정들은 연평도 해역에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측의 합동참모본부가 발표한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지난 1999년의 제1차 서해교전 이후 북측 경비정들은 북측 어선의 남진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1999년의 제1차 서해교전 이후 남측 경비정들이 북측의 관할수역으로 여러 척 출동해도 북측은 경비정 한 척만 출동시키고 있으며, 남측 경비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즉각 물러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자료는 이번에 서해교전이 일어나기 약 보름 전인 6월 11월부터 13일까지 주한미군사령부가 서해에서 미군 구축함과 남(한국) 구축함 등 10여 척의 함정과 백령도의 해병대 병력을 출동시킨 가운데 한·미 합동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였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에 근거하여 보더라도, 과연 누가 서해교전 직전에 연평도 해역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서해교전이 일어나기 직전 서해에서 한·미 합동 해상기동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북(조선)을 자극한 것은 누구입니까? 주한미군사령관입니다. 북(조선)의 관할수역으로 북진하라는 도발적인 작전명령을 남(한국) 경비정에게 내림으로써 남북의 젊은이들을 무력충돌로 내몰았던 주범은 누구입니까? 주한미군사령관입니다. 대북특사 제임스 켈리의 평양 방문이 일정에 오르면서 어렵사리 마련된 조·미 고위급 회담을 서해교전을 일으켜 무산시킨 한(조선)반도 평화의 교란자는 누구입니까? 주한미군사령관입니다. 서해교전을 일으킴으로써 남(한국)에서 반통일세력의 책동을 부추기고 있는 조국통일의 방해자는 누구입니까? 주한미군사령관입니다. 14살 난 두 여학생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주한미군의 살인범죄에 대한 규탄과 저주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서둘러 그 책임자를 미국으로 빼돌린 것은 또 누구입니까? 주한미군사령관입니다.

동포 여러분,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한 남북의 교류와 협력도, 6.15 공동선언도, 조·미 관계정상화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험난한 장애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은 가장 흉악한 분단원흉입니다. 주한미군은 자기 나라로 떠나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 조국 땅에서 자기들의 무기를 걷어 가지고 모조리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한(조선)반도에는 진정한 평화가 깃들 수 있고, 6.15 공동선언의 기치에 따라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7) 조국통일의 신심을 가질 수 있는 근거

동포 여러분, 지금 분단원흉 주한미군과 각종 반통일세력들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는 조국통일의 험난한 앞길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그 험난한 길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실망과 탄식으로 고개를 떨구고 계십니까?

아니올시다. 6.15 공동선언의 기치가 우리의 대오 앞에서 힘있게 휘날리고 있는데, 우리가 왜 실망해야 합니까. 6.15 공동선언의 기치 아래 수백만 애국동포들이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고 있는데, 우리가 왜 탄식해야 합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민족의 주체역량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최후 승리를 안겨주는 것도 우리 민족의 주체역량밖에 없습니다.

반통일세력의 방해책동으로 고난과 역경이 통일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해도 우리는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설 수 없으며,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저들의 방해책동을 격파하고 나아가 조국통일위업을 반드시 완수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우여곡절 많은 조국통일의 전진행로에서 일시적으로 꼬여있는 난국을 탓하면서 낙담할 게 아니라, 언제나 조국통일의 신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민족의 위대한 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낙담과 실망과 탄식으로 주저앉지만, 자기 민족의 위대한 힘을 믿는 사람은 난관과 역경을 뚫고 전진하는 영웅적 대오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반드시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강인한 신심만이 조국통일운동을 힘있게 떠밀고 나가는 승리의 원천이 됩니다.

저는 이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조국통일의 신심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세상만사가 반드시 준비를 잘 해야 성공하듯이,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위업에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조국통일은 준비기를 거쳐야 마침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국통일의 준비기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1972년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이 확정된 그때로부터 조국통일의 준비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의 일이지요.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로 조국통일 3대 원칙이 확정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비로소 조국통일 준비기에 진입하였고, 그로부터 28년 뒤인 2000년 6월에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조국통일의 이정표가 마련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조국통일 실현기에 들어섰습니다.

동포 여러분, 제가 강연 첫머리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조국통일 준비기에서 벗어나 조국통일 실현기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조국통일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국통일 준비기는 28년에 걸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지만, 조국통일 실현기는 앞으로 10여 년 안에 마감되고 우리는 조국통일의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28년에 걸쳐 이어졌던 조국통일 준비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1994년 10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체결된 조·미 핵협정입니다. 그 역사적인 핵협정을 체결하면서 조·미 두 나라는 별도의 비공개 합의를 내왔습니다. 핵협정을 체결할 당시에는 그러한 비공개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7년에 가서야 일부 언론이 조·미 사이에서 비공개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보도하자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조·미 비공개 합의를 외교용어로는 ‘비공개 각서(confidential minute)’라고 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국교수립을 전제로 한 정치적 합의를 내올 때는 외부에 공개하는 합의문에 조인하는 한편, 별도의 비공개 각서에도 조인하는 법입니다. 중국과 미국의 국교수립 과정이나, 중국과 일본의 국교수립 과정에서도 그러했으며, 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공개하는 합의문에서는 담아내기 힘든 매우 중대한 정치적 합의를 비공개 각서에 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미 두 나라가 핵협정을 체결하면서 공개하였던 합의문과는 별도로 비공개 각서를 채택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1994년의 제네바 핵협정 체결과정에서 조·미 두 나라는 외부에 공개되는 기본합의문에서는 담아내기 힘든, 매우 중대한 정치적 합의를 비공개 각서에 담았는데,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비공개 각서의 내용은 당연히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부 언론에 흘러나온 정보를 종합해보면, 북(조선)은 모든 핵개발을 중단하고, 미국은 조·미 국교수립을 적극 추진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공개된 기본합의문에서는 북(조선)이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특정한 핵시설을 동결시킨다고 지적하였는데, 비공개 각서에서는 북(조선)이 모든 핵개발을 중단한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공개된 기본합의문에서는 조·미 두 나라가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한다고 하면서 양국관계를 대사급까지 격상시킨다고 표현하였던 것에 비하여, 비공개 각서에서는 미국이 북(조선)과의 국교수립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국교수립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1998년 8월 29일 북(조선)은 광명성 1호라는 비책의 수단을 동원하여 약속 불이행자인 미국을 정치적으로 압박하였습니다. 미국은 견디지 못하고 조·미 고위급 정치회담에 끌려나와야 했고, 결국 2000년 10월 12일 역사적인 조·미 공동성명을 워싱턴에서 채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2000년 10월의 조·미 공동성명은 두 나라 사이의 국교수립을 결정적으로 해결하는 조·미 미사일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선행조치였습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전격적으로 방문하였고, 그에 따라 조·미 미사일 협정문 초안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이미 막후에서 마련된 조·미 미사일 협정문에 조인하면 조·미 국교수립의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클린턴은 조·미 정상회담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2002년 6월 17일에 뉴욕의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for Foreign Relations)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클린턴은 2000년 말 당시에 자기가 조·미 정상회담에 나서지 못했던 이유를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000년에 북(조선)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종식시키는 데까지 근접하였다. 내가 원하기만 했다면 우리는 그 일을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의 안보에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중동 평화협상을 마무리지어야 했기 때문에 북(조선)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끝내는 일에 나서지 못했다. 북(조선)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평양만 방문할 수 없었고 12일 정도의 시간을 내어 서울, 베이징, 도쿄도 방문하여야 했는데 임기 말에 장기순방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94년 10월의 조·미 핵협정에서 비공개 각서가 조인되었듯이, 2000년 말 클린턴의 평양 방문으로 체결될 뻔했던 조·미 미사일 협정에서도 비공개 각서가 준비되어 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언론을 통해서 조금씩 밝혀진 사실을 종합해보면, 2000년 말의 조·미 미사일 협정에 따라 조인되기로 예정되었던 비공개 각서의 내용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는 한편, 미국은 주한미군을 앞으로 5년 동안 단계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만일 2000년 말에 클린턴이 조·미 정상회담에 나와서 조·미 미사일 협정에 조인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공개 각서도 조인되었을 것이며, 그로써 분단의 최대 원흉인 주한미군이 그로부터 5년 동안 단계적으로 철수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며, 그에 따라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이 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2001년에 새로 들어선 부시 정부는 북(조선)이 클린턴 정부와의 협상에서 마련해놓은 조·미 미사일 협정문에 조인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협정 조인을 거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협정을 조인하기 위하여 어렵사리 마련해놓은 정치적 합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조·미 고위급 정치회담을 이런 저런 구실을 내걸고 회피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부시 정부가 조·미 미사일 협정문에 조인하면, 자기들이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려는 구실을 잃어버릴 수 있고, 더욱이 비공개 각서에 조인하면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시 정부가 미사일방어체계를 수립하려는 구실을 잃어버리는 것은, 미국의 군수산업자본에게 이익을 챙겨주기 힘든 조건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는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정치·군사적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사변이며, 우리 민족에게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고 조국통일위업을 완수할 수 있는 국면을 열어놓는 대사변입니다. 이 대사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시 정부는 지금 이렇게 하지도 저렇게 하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시 정부가 조·미 미사일 협정문과 비공개 각서에 조인하지 않고 회피작전, 시간끌기작전에 매달리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2003년이라는 ‘운명의 시간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4년 10월에 조·미 핵협정을 체결할 때 2003년까지 미국이 책임적으로 신포 경수로를 건설해주어야 한다고 규정하도록 조치하였으며, 미국에게 정치·군사적 충격을 가했던 인공위성 발사를 유예하는 조치를 2003년까지만 지속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2003년은 조·미 두 나라 사이에서 핵협정 및 미사일 협정과 관련하여 근본해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적인 시기로 정해져 있습니다. 부시 정부가 몸을 빼려해도 도무지 도망할 곳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2002년은 중반을 넘어섰고 2003년은 자꾸만 다가오고 있습니다.

2002년 7월 13일에 조선중앙방송은 평양의 3대 혁명 전시관에 있는 인공위성 전시관을 소개하면서 북(조선)이 1998년의 첫 인공위성에 이어 개발하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인공위성 모형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북(조선)이 광명성 2호를 개발하고 있으며, 적절한 시기에 광명성 2호를 발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한 의사표시는 미국에게 2003년의 시한부 통첩을 일깨워주는 정치적 압박입니다.

부시 정부는 정세도 읽을 줄 모르고, 전략적 사고도 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 모여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2003년의 시한부 통첩이 주는 무거운 의미를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시 정부는 2003년의 시한부 통첩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게 될까요? 제 예견으로는, 클린턴 정부가 이미 마련해둔 조·미 미사일 협정문안에 조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다른 출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만일 2003년에 가서 조·미 미사일 협정이 조인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협정과 더불어 비공개 각서도 조인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이 2003년부터 5년 동안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한다는 비공개 각서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서 외부에 공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2008년쯤에는 분단의 최대 원흉인 주한미군이 모조리 우리 조국 땅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2007년 말에는 남측에서 정권교체를 위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데, 그때 남측의 민족민주운동권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세력은 반통일세력을 제압하고 집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강연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지금 남측에서 통일세력은 돌비현상을 일으키면서 날로 장성·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속도로 꾸준히 전진한다면 2007년 말에 대통령 선거에서 남측의 통일세력이 집권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한미군이 5년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정세발전의 최대 변수가 통일세력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남(한국) 대중의 반미자주의식이 고양될 것이고, 남북 사이의 접촉, 내왕, 대화, 교류, 협력이 더욱 심화·발전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결정적 국면이 열려질 것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남북 최고위급회담의 정치적 임무를 상설적으로 수행할 통일협의기구를 창설하게 만들 것이고, 통일협의기구를 차츰 강화·발전시키면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2000년 6월에 시작된 조국통일 실현기가 해를 거듭할수록 반통일세력은 차츰 무력화되고 몰락할 것이며, 그와 반대로 통일세력은 힘을 얻어 집권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주한미군이 철수되고 통일세력이 집권하면 어떻게 될까요? 남북의 두 정부는 이미 가동해오고 있는 통일협의기구를 통하여 국가주권의 통합사업을 신속하게 진척시킬 것이며, 1년 안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게 될 것입니다. 7천만 겨레의 환호성이 삼천리 강산을 진감하는 가운데 통일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한(조선)민족 최고의 날, 그 역사적인 날이 바로 조국통일위업을 완수하는 날입니다. 조국통일은 앞으로 10년쯤 뒤에, 참으로 장엄하고 격동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통일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그날까지 조국통일의 신심을 가지고 아무쪼록 건강하게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는 조국통일운동에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바쳐 가십시다. 반통일세력의 방해책동이 제 아무리 심하다 해도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이기고 있습니다. 조국통일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2002년 7월 2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