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사건과 반테러전쟁전략 -한호석 2002/08/30 544
9.11 사건과 반테러전쟁전략
한 호 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례 >
(1) 의혹에 쌓인 9.11 사건
(2) 9.11 사건과 반테러전쟁전략
(1) 의혹에 쌓인 9.11 사건
9.11 사건은 아랍인 반미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본토 상공에서 납치한 미국 여객기를 공격수단으로 삼아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한 테러사건이라고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9.11 사건에 얽혀있는 수많은 의문점이 드러나자, 일부 분석가들과 언론들은 그 사건이 아랍인 반미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 아니라 미국의 특정집단에 의한 자해테러조작극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한 의문제기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것은, 미국 군부가 이미 오래 전에 9.11 사건과 비슷한 자해테러사건을 조작하고 그에 따라 ‘보복공격’이라는 명분으로 대외침략전쟁을 도발하려는 음모를 추진하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비밀공작을 파헤쳐 유명해진 언론인 제임스 뱀포드(James Bamford)1)에 따르면,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1962년에 이른바 ‘노스우드 작전(Operation Northwoods)’을 수립했다고 한다. 이 작전은 1961년 4월 17일 미 중앙정보국(CIA)의 배후조종과 지원을 받은 쿠바망명집단이 쿠바의 피그만(Bay of Pigs)을 기습공격한 ‘피그만 침공사건’이 실패하자, 미국 군부가 직접 나서서 쿠바를 침략하기 위하여 꾸며낸 침략전쟁 시나리오였다.
노스우드 작전은 쿠바의 반미테러리스트로 위장한 미군이 미국의 대도시에서 미국 여객기를 공중납치하여 쿠바의 ?따나모에 있는 미 해군기지를 자폭공격으로 파괴하고 나서, 그 테러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쿠바 정부라고 조작하여 보복공격이라는 명분으로 쿠바를 침공한다는 시나리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전은 당시 대통령 케네디가 채택하지 않는 바람에 지금까지 40년 동안 비밀문서고에 파묻혀 있다가 2001년 말에 기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전쟁사를 돌이켜보면, 적대세력을 공격하기 위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자해테러극을 조작하고 그것을 빌미로 하여 침략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언제나 제국주의자들의 관행이었음이 드러난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북경의 노구교(Marco Polo Bridge)에서 자해공격사건을 조작한 것이 그러했고,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기 위하여 자해공격사건을 조작한 것이 그러했으며, 1964년 8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하여 날조했던 ‘통킹만 사건’이 그러하였다.
미국이 자해테러극을 조작함으로써 도발했던 최초의 침략전쟁은 19세기말의 미국-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이다. 미국은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아바나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호를 스스로 폭파하는 자해테러극을 벌렸다. 그 다음날 미국은 스페인에게 식민지 쿠바를 포기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고, 미국 언론들은 스페인의 테러공격에 보복하라고 선동했다. 4월 10일 스페인은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굴복하였지만, 그 다음날 미국은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대기시켜두었던 병력 23만 명을 동원하여 쿠바를 봉쇄하였다. 미국은 자해테러극을 조작하고 침략전쟁을 자행하여 쿠바에서 스페인을 몰아내고 쿠바를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쿠바의 사탕산업을 강탈하려는 미국 자본가계급의 음모가 그 침략전쟁의 배후에서 진행되었던 것은 물론이다.2)
1898년의 자해테러극에 의한 침략전쟁 도발, 그리고 1962년의 자해테러극에 의한 침략전쟁 도발음모를 되돌아볼 때, 2001년의 9.11 사건과 그 사건에 의하여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 건국이래 미국의 심장부가 ‘직격탄’을 맞은 최초, 최대의 사건인 9.11 사건은 한 마디로 의혹투성이의 사건이다. 9.11 사건과 관련하여 그 동안 해내외 언론들과 분석가들이 제기했던 의문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의문 1 – 9.11 사건 직전에 미 중앙정보국이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체포하기는커녕 그와 은밀하게 접촉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미 중앙정보국은 9.11 사건이 일어나기 전 20년 동안 오사마 빈 라덴과 계속 접촉하였고 그를 지원하였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의 보도에 따르면, 중앙정보국은 1979년부터 오사마 빈 라덴을 접촉해 왔다고 한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살면서 빈 라덴 그룹(Bin Laden Group)3)에서 기업가로 일하고 있었던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소련군에 맞서 싸울 반소유격전 지원병을 모집했다. P>P>영국의 텔레비전방송 비비씨(BBC)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비자를 발급하는 미국 대사관 관리는 지난 1980년대에는 오사마 빈 라덴이 모집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청년들이 미 중앙정보국이 지원하는 반소테러훈련을 받은 후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는 일이 미국의 정책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앙정보국은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오사마 빈 라덴에게 무기와 자금을 은밀히 지원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 말 아프가니스탄의 파키스탄쪽 국경부근에서는 반소유격전을 지원하는 미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수 억 달러를 들인 지하시설들이 건설되었다. 그 지하시설을 건설한 건설업자는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지금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 폭격을 피해 숨어있을 그 지하거점은 아마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오사마 빈 라덴 자신이 건설한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한 뒤부터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1994년부터 오사마 빈 라덴은 중동의 미군기지들에 대한 테러를 시작했다.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은 밀월관계를 청산하고 적대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테러로 파괴한 중동의 미군기지는 빈 라덴 그룹이 최신식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이처럼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기지를 공격하는 반미테러의 길로 나서자 아랍권의 최대 친미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결국 그의 국적을 박탈하고 해외로 추방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이 도피한 나라는 아프리카의 수단이었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2001년 10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1996년 5월 수단의 국방장관은 자기 나라로 피신해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여 넘겨주겠다고 미국에게 제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은 그가 테러리스트라는 확증이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1993년 2월에 일어났던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폭파사건의 배후자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하고 있었다. (이 폭파사건은 오사마 빈 라덴의 지령이 아니라 미 중앙정보국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한다) 그런데도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여 넘겨주겠다는 수단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왜 그랬을까?
수단의 국방장관이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여 미국에 넘기겠다는 제안이 나오고 그것을 미국이 거부한 직후인 1996년 6월 25일 사우디 아라비아의 다란 부근에 있는 미군 숙소에서 폭탄이 터져 미군 19명이 죽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 폭파사건에도 연계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1998년 8월 7일에는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대사관이 동시에 폭파되어 미국인 12명을 포함하여 224 명이 죽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에 따르면,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대사관을 파괴한 폭탄은 그 폭파사건 3년 전인 1995년에 미 중앙정보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제공한 미군폭탄이었다. 당시 미국은 미국대사관 연쇄 폭파사건의 배후자가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의 테러거점들을 순항미사일로 공격했다. 1996년에 수단의 오사마 빈 라덴 체포제안을 거부했던 미국이 2년 뒤인 1998년에는 수단이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를 대면서 순항미사일로 수단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2000년 10월 12일 예맨의 에덴항에 정박해 있던 미 해군 구축함 콜호(USS Cole)가 폭탄테러공격으로 파손되고 해군병사 17명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그 사건의 배후자도 역시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지목했다. 구축함에 대한 테러공격이 일어난 직후,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된 테러용의자 18명이 요르단에서 검거되었다.
『워싱턴 포스트』 2001년 12월 23일자의 보도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은 9.11 사건이 일어나기 4년 전부터 약 15명의 아프가니스탄사람들로 구성된 비밀공작반을 동원하여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해왔다고 한다. 이것은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이미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미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비밀공작반은 특수건물이나 훈련기지에 머물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미 중앙정보국은 정보통신이나 위성사진을 통해 한 달에 한 차례씩 그의 위치를 확인해왔다.
그런데 프랑스 언론 『르 피가로』의 보도에 따르면, 오사마 빈 라덴은 2001년 7월 4일 자신의 주치의와 심복 장교, 경호원 4명, 알제리 남자 간호원을 대동하고 파키스탄의 케타 공항을 떠나,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곳에 있는 미국병원으로 직행했다고 한다. 그 병원에서 열흘동안 입원했던 오사마 빈 라덴은 저명한 미국인 비뇨기과 의사 캘러웨이에게 치료를 받았다.
심각한 신장병을 앓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은 그전에도 해외에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가 입원하고 있었던 두바이의 미국병원 입원실에는 자기 집안 식구들과 사우디 아라비아 저명인사들, 아랍에미리트 저명인사들이 문병차 방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오사마 빈 라덴의 입원실에 나타났다. 그를 체포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와 비밀접촉을 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며칠 후 자신이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났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 그 요원은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으로 되돌아간 다음날 미국으로 떠났다.
『르 피가로』의 이와 같은 보도가 나가자 중앙정보국은 그 내용을 부인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국제라디오 방송』은 그 중앙정보국 요원이 래리 미첼(Larry Mitchell)이라고 밝혔다. 『르 피가로』는 오사마 빈 라덴을 치료했던 미국인 의사 캘러웨이와 인터뷰를 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거부하였다.
미국이 수배하고 있는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중앙정보국의 감시망이 깔려있는 지역에 드나들어도 중앙정보국은 왜 그를 체포하지 않았을까? 중앙정보국은 왜 오사마 빈 라덴과 은밀하게 접촉하였을까?
독일의 정보 전문가 뷸로프4)는 중앙정보국이 때로 테러리스트들과 비밀연계를 맺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93년 2월에 일어났던 세계무역센터 폭파사건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은 아랍인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했는데, 그들은 미 중앙정보국이 수당을 지급하는 요원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 테러리스트들은 자기들이 세계무역센터에 폭발물을 설치하면, 다른 요원들이 폭발 직전에 그 폭발물을 제거하여 실제로는 폭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앙정보국의 말을 믿고 폭발물을 설치했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폭파사건으로 6명이 죽고 1천여 명이 다쳤다. 중앙정보국으로부터 수당을 지급 받고 있었던 그 아랍인 테러리스트들은 이미 미 국무부의 입국금지명단에 올라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미국에 입국시킨 것은 중앙정보국이었다.
그렇다면 중앙정보국은 테러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감시와 추적을 하고 있었던 오사마 빈 라덴과 비밀연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의문 2 – 9.11 사건 이전에 미국은 자국 본토에 대한 테러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르 피가로』의 보도에 따르면, 2001년 8월 파리의 미국대사관에서는 미 중앙정보국 요원들과 프랑스 정보부(DST) 요원들이 긴급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이 긴급회의에서 프랑스 정보부 요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2001년 7월말 아랍에미리트 세관이 두바이 공항에서 알제리계 프랑스인 자멜 벵갈을 체포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고위급 요인을 만나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 부근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폭파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프랑스 정보부에 따르면, 그 긴급회의에서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위와 같은 정보를 듣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알제리 테러리스트에 관련된 극히 특수한 정보만 캐물었다. 프랑스 정보부 요원들이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들은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2001년 9월 12일 필리핀 경찰청장 아벨리노 라손은 현지 텔레비전과 회견하면서 지난 1993년 2월 에 일어났던 세계무역센터 폭파사건의 용의자를 체포하여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보진카 계획(Project Bojinka)’이라는 여객기 납치테러계획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그 계획은 미국 여객기를 납치하여 공중폭파하거나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미국 중앙정보국 청사,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 등을 포함한 몇몇 목표물에 여객기를 충돌시킨다는 것이었다.
1995년에 필리핀 경찰청장으로 있었던 라손은, 당시 필리핀을 방문하는 교황을 암살하려고 기도했던 혐의로 마닐라의 한 아파트에서 체포되었던 압둘 하킴 무라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1993년의 세계무역센터 폭파사건 용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이 밝혀냈다고 하였다. 무라드는 오사마 빈 라덴의 지시를 받는 람지 유세프가 구축한 테러조직의 성원이었다. 라손의 말에 따르면, 필리핀 수사당국은 무라드에게서 압수한 컴퓨터 자료를 통해서 ‘보진카 계획’이 은밀히 추진되고 있음을 알아냈으며, 무라드는 자신이 자살테러훈련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미 몇몇 테러공격목표가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무라드를 미국에게 넘겨주었고, 1996년 9월 5일 미국 법정에서 그는 유세프와 함께 유죄가 확정되었다. 미국도 ‘보진카 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며, 필리핀의 테러대책당국과 긴밀히 협력해왔다.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레바논 언론과의 회견에서 자신은 9.11 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국에게 경고를 하였다고 밝혔다.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British Independent)』 2001년 9월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 연방수사국은 9.11 사건 3주전에 이미 오사마 빈 라덴의 부하로 추정되는 용의자 2명을 추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은 9.11 사건의 테러리스트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그 보도에 의하면, 미국 정보기관들은 2001년 8월말부터 비상태세에 들어갔으며,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경비가 갑자기 강화되면서 폭발물 탐지견이 동원되고 화물자동차들에 대한 검색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9.11 사건이 일어나기 4일 전 미 국무부는 미국인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경고문을 내보냈다. 이것은 부시 행정부가 9.11 사건 이전에 벌써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민주당 소속의 조지아주 출신 연방하원의원 씬티아 맥키니(Cynthia McKinney)는 부시 행정부의 관리들이 9.11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를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 2002년 4월 12일자는 맥키니의 그러한 주장을 보도하면서, 9.11 사건이 부시 행정부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음모설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의문 3 – 미국 연방수사국은 9.11 사건 직전에 항공기 테러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제보를 받았고, 테러리스트들을 감시하고 있었으면서도 왜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9.11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 가운데 관심을 끄는 사람은 자카리아스 무사위(Zacarias Moussaoui)이다. 그는 2001년 2월 유학생 비자로 미국에 입국한 모로코계 프랑스인이다. 그는 미국에 입국한 뒤 오클라호마주 노먼에 있는 민간비행학교인 ‘에어맨 비행학교(Airman Flight School)’에 입학하였다.
미국 언론 『보스턴 글로브(Boston Globe)』 2001년 9월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에어맨 비행학교’의 부교장 데일 데이비스는 9.11 사건 3주전에 연방수사국 요원들이 찾아와서 그 비행학교에서 비행훈련을 받은 무사위에 대해 조사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데일 데이비스는 연방수사국 요원들이 1999년에도 비행학교에 찾아왔었는데, 당시에는 오사마 빈 라덴의 부하로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운 알리 나와위에 대해 조사하였다고 말했다. ‘에어맨 비행학교’에서는 오사마 빈 라덴의 요청으로 군용항공기 1대를 구입하여 미국에서 수단까지 몰고 간 이집트계 미국인 에삼 알 리디가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고 한다. 1998년 연방수사국은 그를 체포하였다.
오클라호마주의 ‘에어맨 비행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운 무사위는 미국 미네소타주 이건에 있는 ‘팬앰 국제비행학교(Pan Am International Flight School)’로 전학하였다. 그는 9.11 사건 직전인 8월 17일에 ‘팬앰 국제비행학교’에서 점보 여객기의 모의 조종장치를 빌리려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학교 직원들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것은 연방수사국이 아니라 이민국이었다. 그는 학생비자가 만료된 것이 밝혀져 이민법 위반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무사위가 이민국에 체포되던 날, ‘팬앰 국제비행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공군 조종사 출신의 교관은 연방수사국에게 “연료를 실은 747 여객기가 폭탄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하면서,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인 무사위가 항공기 테러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제보하였다.
미네소타주에 이민법 위반혐의로 구금되어 있었던 무사위는 구치소에서 9.11 사건의 소식을 듣고 환호하였다고 한다. 무사위는 9.11 사건이 일어난 직후 테러혐의로 기소된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연방수사국은 9.11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비행학교 교관의 제보도 무시하고, 무사위가 알 카에다 조직과 연관되어 있다는 프랑스 정보부의 제보도 무시하고 무사위를 수사하지 않았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연방수사국 지부는 9.11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워싱턴에 있는 연방수사국 본부에 아랍인들이 민간항공, 기술, 공항운영, 조종훈련을 위해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그들을 감시할 것을 요청하였다. 9.11 사건 때 미 국방부 청사에 충돌하였다고 발표되었던 피랍 여객기는 애리조나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던 아랍인 테러리스트 할리드 알 미드하르와 살렘 알함지가 공중에서 납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2000년 1월에 미국에 입국하여 애리조나 비행학교에 입학하였다. 2001년 8월 하순에 중앙정보국은 그 두 사람이 예맨에서 있었던 미 구축함에 대한 폭탄테러사건과 연관이 있는 테러혐의자의 동료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미 연방이민국(INS)에 그 두 사람을 입국금지대상으로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연방수사국 본부는 그 보고와 요청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9.11 사건의 테러리스트들은 미국 수사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로 입증된다. 첫째, 미국 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한 『워싱턴 타임스(Washington Times)』 2001년 9월 23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들은 9.11 사건 하루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의 부하들이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는 말을 주고받은 통화를 감청하였다는 것이다. 그 통화는 미국에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지지자와 알 카에다의 고위급 성원 사이에 오간 것이었다.
둘째, 9.11 사건의 테러리스트 19명 가운데 9명이 사건 당일 여객기에 탑승하기 직전 정밀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정부 당국자의 말에 따르면, 6명은 항공여객 컴퓨터 신원조회 체계에서 주의대상으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다른 2명은 신원문제로, 또 다른 1명은 신원에 문제가 있는 탑승객과 함께 탑승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밀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공항당국은 이 9명에 대해서 보안검색 절차에 따라 무기 반입 여부와 폭발물 소지 여부를 정밀검사하였다.
그런데 미국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의 감시대상이었던 사람들이 그 감시를 따돌리고 미국에 입국하고 1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알 카에다의 재정지원으로 테러조직을 결성하고 ‘자살공격테러’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9.11 사건의 주범으로 발표된 모하메드 아타(Mohamed Atta)의 출입국 행적도 의혹에 쌓여있다. 2001년 1월 그는 돌연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갔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미국 체류기간을 넘긴 비자를 갖고 있었지만 무사히 재입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기관의 감시대상이 체류기간을 넘긴 상태에서 어떻게 미국에 재입국할 수 있었을까?
의문 4 – 마지막 순간에 자기의 신원을 노출시키는 테러리스트가 있을까?
9.11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모하메드 아타는 보스턴에서 승용차로 2시간 거리인 사우스 포틀랜드까지 가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곳의 상점에서 종이상자 자르는 칼(box cutter)을 샀다. 연방수사국은 그가 사우스 포틀랜드에서 묵었던 숙소, 그리고 종이상자 자르는 칼을 산 상점에 설치되어 있는 폐쇄회로 녹화기에 그의 모습이 촬영된 것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연방수사국은 아타의 그러한 행동이 테러 이후 예상되는 수사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라고 밝혔다. 아타는 보스턴에서 가능하면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9.11 사건의 테러리스트로 지목된 사람들이 주도면밀하다는 사실은 연방수사국의 다른 관계자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그 관계자는 테러 용의자들이 수사기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다는 것을 숨기려고 주도면밀하게 위장했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관계자는 테러 용의자들과 공범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로 연락하면서 수사기관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암호를 사용하거나 범죄와 관계없는 내용으로 위장했다는 증거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9월 15일 연방수사국은 아타가 9.11 사건 직전에 사용했던 승용차를 보스턴 로건공항 주차장에서 발견했는데, 그 차에는 그의 소지품이 들어있는 가방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놀랍게도 그 가방에서는 9.11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랍어로 받아쓴 5쪽 분량의 ‘테러시행지침’, 아랍어로 인쇄된 보잉 757기와 767기의 비행훈련 교습서, 그리고 아랍어로 적힌 자필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연방수사국이 발견한 아타의 가방에 들어있던 이 세 종류의 문서들은 9.11 사건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연방수사국은 이 증거물을 토대로 하여 테러리스트 19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또한 몇 일 뒤에는 아타의 여권이 세계무역센터의 붕괴잔해가 산더미처럼 쌓인 사건현장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미국에서 16개월 동안 머물면서 ‘알라의 뜻에 따른 자살공격작전’을 수립하고 그 작전을 거의 완벽하게 수행했던 주도면밀한 완벽주의자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인 문서들을 가방에 담아 남겨두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을까? 테러공격의 마지막 순간까지 비행훈련 교습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테러리스트가 있을까? 자기가 죽은 뒤에 자기들의 신원을 확인시켜주려는 의도적인 행동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그러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의 여권이 철골마저 녹여버린 엄청난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고, 무너지는 80여 층의 붕괴현장을 무사히 뚫고 지상에 떨어져서 발견된 것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보아야 할까?
전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을 감시·추적하고 있는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9.11 사건에 대해서는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하면서, 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만에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테러리스트 19명에 대한 완벽한 신상명세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여권에 있는 모하메드 아타의 명함판 사진도 공개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 씨엔엔(CNN)이 공개한 탑승객 명단에는 그 테러리스트들의 이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탑승객 명단에 없는 테러리스트들의 이름은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과연 어디서 찾아냈을까?
의문 5 –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두 대의 피랍 여객기는 누가 조종하여 충돌시켰을까?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여객기의 조종사들은 아무도 지상관제소에 긴급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이것은 조종실이 이미 테러리스트들에게 제압당하였음을 뜻한다. 테러리스트들이 조종사들을 칼로 협박하였다고 해서, 그 조종사들이 협박이 두려워 스스로 여객기를 조종하여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랍 여객기는 누가 조종하였을까?
연방수사국의 발표에 따르면, 테러리스트 19명 가운데 주범인 8명은 모두 비행기 조종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이 직접 여객기를 조종하여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는 추정이 지금까지 언론에 알려진 내용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던 보잉 767기와 같은 첨단 항공기는 고도로 숙련된 조종술을 익힌 조종사가 조종하여야 한다. 그런데 미국의 비행학교에서는 그곳에서 비행훈련을 받았다는 테러리스트들이 경비행기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미숙한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미숙한 수준의 조종술밖에 없었던 테러리스트들이 어떻게 첨단 항공기를 조종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세계무역센터가 먼 곳에서도 잘 보이는 매우 커다란 목표물이라고 해도, 매우 빠른 속도로 저공비행을 하면서 목표물에 돌진하여 오차 없이 충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충돌한 여객기의 속도는 시속 586마일(943km)이었으며, 북쪽 건물에 충돌한 여객기의 속도는 시속 486마일(782km)이었다. 시속 586마일의 속도는 당시 그 여객기의 고도를 감안할 때 그 여객기의 최고비행속도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고 보잉사는 밝히면서, 그러한 속도로 계속 저공비행을 하는 경우 공중에서 폭발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저공에서 고속으로 돌진하는 여객기의 속도와 바람 등을 감안한다면 목표물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이 장애물이 없는 태평양 상공에서 미군 항공모함이나 순양함을 대상으로 자살공격을 자행했지만 그 성공률이 50%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층건물로 둘러싸인 맨해튼 상공에서 여객기를 저공으로 조종하여 단 한번에 목표물에 충돌한 것은 매우 숙련된 조종술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것은 여객기를 완만한 횡경사의 각도를 유지하는 고도의 조종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경비행기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한다고 하는 테러리스트들이 어떻게 그토록 고도로 숙련된 조종술을 발휘하여 첨단 항공기를 조종할 수 있었으며, 오차 없이 목표물에 돌진하여 충돌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영국의 항공전문가들은 피랍 여객기는 테러리스트가 조종한 것이 아니라 미군 당국이 지상에서 원격조종장치를 가동시켜서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 견해에 따르면, 여객기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이후, 미군 당국이 피랍 여객기를 원격조종해서 세계무역센터에 충돌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피랍 여객기를 원격조종하여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기술을 이미 오래 전에 개발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테러리스트들은 원래 세계무역센터에 피랍 여객기를 충돌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했던 것일까? 피랍 여객기를 다른 나라의 공항으로 몰고 가서 승객과 승무원들을 인질로 잡아두고 요구조건을 내놓는 ‘전통적인 항공기 테러’, 또는 뉴욕과 워싱턴 상공에서 공중폭파하는 ‘전통적인 항공기 테러’를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국 정부 정보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영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테러리스트 19명 가운데 11명은 자기들이 납치한 여객기를 다른 나라의 공항으로 끌고 가서 승객과 승무원들을 인질로 잡는 테러에 동원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 자폭테러에 동원되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미 연방수사국은 조종술훈련을 받은 주범 8명은 다른 공범 11명과 달리 처음부터 자기들이 자폭테러를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자폭테러란 피랍 여객기를 공중에서 폭파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 연방수사국의 추정에 따르면, 공범 11명은 최근에 미국에 입국한 사람들이고 조종술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사건 현장에서 승무원과 탑승객을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언론인 티에리 메쌍은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한 사건은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공중납치된 여객기를 미군 당국이 원격조종으로 돌진시켜 충돌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무역센터의 파괴는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계획되었고, 최대의 피해장면을 연출하여 최대의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하여 꾸며진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의문 6 – 9.11 사건의 의혹을 풀 수 있는 단서인 블랙박스는 어디로 갔을까?
지상에서 미군 당국이 피랍 여객기의 원격조종장치를 가동할 경우, 블랙박스는 자동적으로 작동을 중지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블랙박스를 찾아내어 그 기록내용을 분석하면 원격조종장치의 가동여부를 알 수 있다. 블랙박스의 음성기록장치(CVR)는 마지막 30분 동안의 조종실 대화를 녹음하며, 비행정보기록장치(FDR)는 비행속도와 고도 및 사고 당시 비행기 작동체계의 작동상태를 기록한다. 그러므로 블랙박스는 9.11 사건의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4대의 피랍 여객기에 설치되어 있던 블랙박스는 모두 8개다. 블랙박스는 항공기가 충돌할 때 충격을 가장 적게 받는 항공기의 꼬리부분에 설치되어 있다. 블랙박스는 충돌하는 순간 자기 무게의 3,400배의 충격에도 견딜 수 있고, 섭씨 1,100도의 고열 속에서 30분 동안 견딜 수 있도록 특수제작되어 있다. 블랙박스에는 주파수 발신장치가 들어있는데, 발신장치의 건전지 수명은 6년이다.
펜실베니아주 서부지역에 추락했다고 발표된 여객기(유나이티드 항공 제93편)에 설치되어 있던 블랙박스는 다음날인 9월 12일에 발견되었다. 국방부 청사에 충돌했다고 발표된 여객기(유나이티드 항공 제77편)에 설치되어 있던 블랙박스는 9월 13일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두 여객기에 설치되었던 블랙박스의 행방은 묘연하다.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여객기의 블랙박스는 항공유가 한꺼번에 타면서 생긴 고열로 완전히 녹아버려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항공유가 한꺼번에 타면서 생기는 온도는 섭씨 800도에서 1,000도라고 한다. 그런데 블랙박스는 섭씨 1,100도의 고열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특수제작된 것이다. 세계무역센터의 철골은 섭씨 600도에서 녹아 내렸다고 한다. 그 정도의 고열이라면 특수제작된 블랙박스가 완전히 녹아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붕괴현장에서 완전히 파괴된 것일까? 미국 교통안전국(NTSB)은 미국에서 비행기가 추락한 뒤에 블랙박스를 발견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블랙박스의 기록내용을 완전히 해독하려면 통상 3개월이 걸리며, 만일 블랙박스가 손상되었을 경우에 그 기록내용을 완전히 해독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블랙박스를 해독한 자세한 내용은 국제민간항공조약에 따라 세상에 공개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발견된 블랙박스에서 밝혀진 대강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혹시 부시 행정부의 관계기관은 블랙박스를 발견했으나 공개할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 7 – 9.11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 공군은 왜 속수무책이었을까?
모든 항공기 조종사들은 이륙하기 전에 항로결정서(SID)를 받게 되는데, 그에 따라 비행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항공기가 정해진 고도에서 90m, 정해진 항로에서 1.6km 밖으로 벗어날 경우 지상관제소로부터 항로를 이탈했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
연방항공관리청(FAA) 보스턴 관제소는 보스턴 로건공항을 이륙한 문제의 여객기(어메리컨 항공 제11편)가 이륙한 ?얼마 되지 않아 뉴욕주 올버니 상공에서 정상항로로부터 남쪽으로 100도, 약 21.3m 왼쪽으로 이탈하였음을 포착했다. 그 순간 관제소에서는 조종실 마이크로폰을 통하여 테러리스트들이 조종사들을 협박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피랍 여객기의 자동신호응답기가 작동을 멈추고 여객기의 상황이 민간 관제소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첨단장비를 갖춘 미군의 항공탐지기지는 1,200피트(365m)의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여객기의 항로이탈을 재빨리 포착하고 비상조치를 취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사건 당일 미군의 대응행동은 정상이 아니었다.
피랍 직후 북미방공사령부(NORAD) 산하 동북지구 방공사령부에 어메리컨 항공 제11편 여객기가 공중납치되었다는 연방항공관리청의 비상통보가 전달되었다. 그때가 오전 8시 40분이었다. 3분 뒤인 8시 43분에는 유나이티드 항공 제175편 여객기도 공중납치되었다는 비상통보가 전달되었다.
그로부터 3분 뒤인 8시 46분에 보스턴 부근의 팰머스에 있는 오티스 주방위군(National Guard) 공군기지에서 에프(F)-15기 2대가 발진했다. 발진시각은 피랍 여객기(어메리컨 항공 제11편)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던 8시 46분이었다.
또 다른 피랍 여객기(유나이티드 항공 제175편)가 세계무역센터에 두 번째로 충돌하던 9시 2분에 그 요격기는 사건 현장으로부터 비행거리로 8분이 걸리는 100km 밖을 비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올버니 상공에서 세계무역센터 상공까지 고속으로 비행할 경우 24분이 걸린다.
그런데 보스턴 로건공항을 이륙한 또 다른 여객기(유나이티드 항공 제175편)는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북쪽으로 항로를 바꾸기 전에 4분 동안이나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세계무역센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미 공군기지는 애틀랜틱 시티 부근에 있는 주방위군 공군기지인데, 그 기지로부터 세계무역센터까지 요격기로 비행하면 18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그러므로 그 공군기지로부터 출격한 요격기가 현장에서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6분이나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동북지구 방공사령부는 세계무역센터 사건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애틀랜틱 시티 부근의 주방위군 공군기지에 요격기 발진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미 국방부 관계자들은 사건 당일 보스턴 부근에 있는 오티스 주방위군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에프(F)-15 두 대가 사건 현장으로 날아갔지만, 두 번째 피랍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뒤 6분이 지났을 때에 사건 현장에 도착하였다고 발표했다. 사건 현장에서 가까운 데 있는 공군기지는 놔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공군기지에 요격기 발진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는 6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던 것이다.
워싱턴 근교에 있는 덜레스 공항을 이륙한 어메리컨 항공 제77편 여객기가 공중납치되었다는 연방항공관리청의 세 번째 비상통보가 동북지구 방공사령부에 전달된 시각은 9시 24분이었다. 9시 30분에 버지니아주 랭글리 공군기지에서 에프(F)-16기 2대가 발진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북지구 방공사령부는 이번에도 국방부 청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앤드류 공군기지에 요격기 발진명령을 내리지 않고 버지니아주 랭글리 공군기지에 발진명령을 내렸다. 국방부 청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앤드류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전투비행단은 비상시 백악관과 의사당, 국방부 청사를 공중에서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동북지구 방공사령부가 전투기를 24시간 비상대기시켜놓고 있는 공군기지에 발진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버지니아주 랭글리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에프(F)-16기 두 대가 국방부 청사 상공에 도착하였을 때는 국방부 청사가 파괴되기 2분전인 9시 36분이었다고 한다.
미국 정보분석가들에 의하면, 9.11 사건 다음날 누군가가 앤드류 공군기지 웹싸이트에서 전투기의 비상대기업무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였다고 한다. 미 공군은 사건 당일 앤드류 공군기지에서는 전투기가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것은 미 공군이 앤드류 공군기지 웹싸이트의 비상대기업무 관련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면서, 사건 당일 앤드류 공군기지에서는 전투기가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국방부 청사가 공격받은 것은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받은 때로부터 약 40분 뒤였다. 그렇다면 40분 동안 요격기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부 전문가들은 1999년 10월 미국 프로골퍼가 탑승한 경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하였을 때도, 에프(F)-16기가 출격했으며, 만일 이 경비행기가 인구밀집지역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격추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9.11 사건 현장에 출동했던 요격기들은 네 번째의 피랍 여객기(유나이티드 항공 제93편)를 10시 3분에 펜실베니아주 생스빌 교외에서 격추하였다. 그러나 9월 13일 연방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했던 미 공군대장 마이어스는 미 공군이 피랍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부인하였다.
미 공군은 이상하게도 9.11 사건 당일에 늑장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 관리는 국방부 청사가 공격받은 뒤 15-20분이 지나도록, 세계무역센터가 두 번째 공격을 받은 뒤 40분이 지나도록 워싱턴 상공에는 요격기가 단 한 대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요격기가 늦게나마 출격했다는 미군 당국의 발표와 배치된다.) 미 공군의 늑장대응은 실수였을까, 아니면 의도적인 행동이었을까?
의문 8 – 미 국방부 청사는 왜 조금만 파괴된 것일까?
미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국방부 청사 사건현장에서 미군 56명, 민간인 직원 69명, 여객기 탑승자 64명 등 모두 189명이 사망했으며 111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미 국방부 청사는 1941년 9월 11일에 착공식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9.11 사건은 같은 날 일어났다.
미 국방부 청사에 대한 테러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프랑스의 언론인 티에리 메쌍이 펴낸 화제의 책 『2001년 9월 11일, 믿을 수 없는 협잡극: 펜타곤에 충돌한 여객기는 없었다』이다. 그 책은 테러리스트들이 피랍 여객기를 조종하여 미 국방부 청사에 충돌했다는 미 국방부의 발표를 뒤집는 충격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응용물리학 교수 스티븐 블록의 분석에 따르면, 미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여객기 보잉 757기는 무게가 145t이나 되고 항공유 6만2천리터를 싣고 있었으며, 시속 850km로 충돌하였다고 한다. 보잉 757기의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파괴력은 무게 20t짜리 초대형 재래식 폭탄 25개(TNT 500kg)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엄청난 파괴력(히로시마 원자폭탄 파괴력의 25분의 1)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미 국방부가 공개한 9.11 사건 당시의 현장사진에 나타난 파괴현장은 그러한 엄청난 폭발에 의해 파괴된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국방부 청사는 지상 다섯 층으로 된 건물이 다섯 겹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오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미 국방부가 공개한 현장사진에 촬영된 파괴현장은 다섯 층 건물에서 맨아래층이며, 그것도 제일 겉에 있는 건물의 맨아래층이다. 공중에서 지상을 향해 비스듬한 각도로 돌진했던 여객기가 어떻게 맨아래층, 맨겉의 건물에 충돌할 수 있었을까? 파괴현장사진에 촬영된 파괴부분의 너비도 19m에 지나지 않는다. 보잉 757기는 길이가 47.32m, 날개를 포함한 너비가 38m인데, 어떻게 파괴부분이 19m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미 국방부는 피랍 여객기의 기체 전체가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것이 아니라 청사 앞 잔디밭에 추락하면서 국방부 청사에 충돌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국방부의 주장대로 피랍 여객기가 잔디밭에 추락하면서 청사에 충돌하였다면, 여객기의 항공유 6만2천리터가 한꺼번에 불타면서 엄청난 화재가 일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국방부 청사는 화재로 불탄 것이 아니라 폭발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사건 이튿날 미 국방부는 피랍 여객기가 충돌했다는 사건현장의 잔디밭에 서둘러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모래를 덮어버렸다. 그것은 사건현장을 은폐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살만한 행동이었다.
파괴현장사진에는 국방부 청사에 지름 2.3m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 그 구멍은 건물이 다섯 겹으로 되어 있는 청사건물 가운데서 건물을 세 겹이나 뚫고 들어간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렇다면 그 구멍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피랍 여객기의 기체가 지상충돌 순간 깨져나가면서 약간 뾰족한 모양으로 생긴 머리부분이 기체에서 떨어져나가 건물을 뚫고 들어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객기의 머리부분에는 전자항법장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기수표면은 금속이 아니라 비금속물질인 카본(carbon)으로 덮여있다. 따라서 약한 비금속물질로 된 머리부분이 견고한 석재(인디애나산 석회암)로 되어 있는 세 겹의 건물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견고한 건물을 뚫고 들어간 물체는 무엇이었을까? 티에리 메쌍은 그 미확인 관통물체가 미사일 파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현장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것은 보잉 757기가 아니라 8-12명 정도가 탈만한 소형비행기로 보였으며 전투기가 비행할 때 내는 고음의 쇳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자는 사건현장에서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사건발생 직후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의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터(Mike Walter)는 『워싱턴 포스트』와 씨엔엔 방송에서 사건현장을 설명하면서 미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것은 여객기가 아니라 날개가 달린 순항미사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발생 당시 워싱턴 근교에 있는 덜레스 공항의 지상관제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관제사 대니얼 오브라이언(Danielle O’Brian)은 시속 800km의 고속으로 날아가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레이더에서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그처럼 고속으로 비행하는 것은 여객기가 아니라 군용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방부의 주장에 따르면, 피랍 여객기가 국방부 청사 앞 잔디밭에 추락하면서 청사에 충돌하여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피랍 여객기인 보잉 757기는 무게 145t, 길이 47.32m, 폭 38m의 대형물체다. 그만한 대형물체는 지상충돌로 산산조각이 난다고 해도 거대한 잔해를 남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국방부 청사의 파괴현장에서는 여객기의 잔해가 보이지 않았다. 미 국방부는 사건발생 이틀 뒤에 여객기의 등부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을 뿐이다.
사건발생 직후 미 연방수사국이 수사에 들어갔지만, 미 국방부의 요구에 따라 연방수사국 수사진은 사건현장에서 철수하였다. 미 국방부 청사에 대한 테러사건은 수사 자체가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티에리 메쌍의 주장대로, 미 국방부 청사를 파괴한 것은 피랍 여객기가 아니라 순항미사일이었을까? 그렇다면 피랍 여객기인 보잉 757기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의문 9 – 세계무역센터 사건현장에서 전세계 38개 나라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유독 이스라엘 사람은 왜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았을까?
원래 세계무역센터에는 외국계 대기업 수십 개가 입주해 있었다. 중국의 씨노쳄 아메리카 홀딩스, 일본의 닛코 증권과 후지 증권, 독일의 코메르츠방크, 영국의 캔톨 피처럴드, 이 앤드 디에프(E & DF) 만 홀딩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짐 어메리칸 해운사 등이다. 이스라엘 기업인 짐 어메리컨사에는 200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세계무역센터에서 9.11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2,992명이다. 그 사건으로 사망한 외국인들의 국적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미주 – 캐나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주엘라, 엘살바돌, 도미니카 공화국
아시아·태평양 – 남(한국),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필리핀, 호주,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대만
유럽 –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 벨기에, 덴마크, 포르투갈, 스웨덴, 스위스
중동·아프리카 –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짐바브웨, 터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다. 우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일간지 『하레츠(Haretz)』 2001년 9월 26일자 보도에 의하면,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서비스회사인 ‘오디고’의 이스라엘 지사에 9.11 사건 발생 두 시간 전에 누군가가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긴급연락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지사의 직원 2명이 그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스라엘 국가정보기관 모사드는 혹시 9.11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세계무역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전에 대피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의문 10 – 9.11 사건 직전에 그 사건에 관련된 특정회사들의 주식을 거래하여 50억 달러의 이익을 챙겨간 세력은 누구일까?
9.11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세계무역센터에 입주해 있었던 투자회사들과 민간항공사들의 주식을 사고 파는 거래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공사의 주식을 거래한 내역을 살펴보면, 피랍 여객기가 소속된 두 항공사에 관한 거래뿐이었다. 누군가가 9.11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특정 항공사의 주식을 내다 팔았던 것이 분명하다.
블룸버그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9.11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어메리칸 항공사의 주식거래량은 통상 거래량의 5배 정도로 폭증했다고 한다.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주식거래량도 9.11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에 폭등하였다. 또한 세계무역센터에 입주해 있었던 금융회사 모건 스탠리와 사건 현장 부근에 있는 금융회사 메릴린치의 주식거래량도 통상 거래량보다 최저 12배에서 최고 25배나 폭등하였다.
미국 증시감독위원회의 조사를 인용한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 2001년 10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9.11 사건으로 폭락할 주식들, 예를 들면 항공사의 주식, 보험사의 주식, 여행사의 주식을 미리 내다 팔고, 그 대신 불경기에 가장 잘 나가는 5년 만기 국채를 사들여서 50억 달러의 이익을 챙겨간 세력이 있다고 한다. 증시감독위원회는 상상을 넘어서는 규모의 단기 거래에 테러조직이 개입한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9월 11일 직전에 진행되었던 단기거래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사는 과연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의문 11 – 부시 행정부가 결정적인 증거물로 제시한 영상녹화물(videotape)은 조작된 것이 아닐까?
2001년 12월 13일 미국은 9.11 사건이 오사마 빈 라덴의 지령에 의해 일어났음을 입증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물을 공개했다. 문제의 영상녹화물이 그것이다. 미 국방부가 11월말에 입수했다고 하는 그 영상녹화물에는 11월 중순 파키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찾아간 방문객을 맞이한 오사마 빈 라덴이 자기 부관들과 함께 9.11 사건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촬영되어 있다.
그 영상녹화물에 나타난 오사마 빈 라덴은 오른손잡이다. 그러나 1999년 6월에 미 연방수사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현상수배하면서 그가 왼손잡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 영상녹화물에 나타난 오사마 빈 라덴은 귀고리를 달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사진 가운데 손목시계 이외의 다른 장신구를 단 모습은 없었다.
그 영상녹화물은 대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잡음이 심하고, 화면도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다. 그런데 카불에서 찾아간 방문객은 오사마 빈 라덴에 비하면 음성도 분명하고 얼굴도 번번이 화면 정면에 나타난다. 오사마 빈 라덴의 음성은 더듬거리는 소리로 되어 있고 얼굴은 옆모습만 보인다.
영국 언론 『가디언(Guardian)』 2001년 12월 15일자 기사는 영상녹화물을 제작하는 전문가의 견해를 전하면서, 그러한 영상녹화물은 디지털 화상합성과 음향삽입기술로 쉽게 조작할 수 있으며, 잡음은 마지막 조작단계에서 집어넣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그 영상녹화물에는 오사마 빈 라덴이 9월 11일에 “우리 시간으로” 5시 30분에 라디오를 틀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영상녹화물의 시청자를 의식한 듯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시차까지 계산하여 현지 시각을 밝히고 있다.
그 영상녹화물이 촬영된 시점은 오사마 빈 라덴을 겨눈 미군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던 때였다. 목숨이 위급한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 공습을 피하여 피신해야 하였던 때인데도, 그는 여유작작하게 자신의 극비정보를 외래방문객이 촬영하는 영상녹화물에 남겨주고, 그것이 미 국방부에 넘어가도록 방치하였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 영상녹화물이 공개되고 1주일이 지난 12월 30일 독일 공영텔레비전(WDR)의 시사프로그램은 그 영상녹화물에 자막으로 나오는 영어번역문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우리는 (9.11 사건의) 사망자를 사전에 계산했다”고 말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사전에(in advance)’라는 말은 원래 그의 말에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난 화요일부터 이날 테러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말도 대화내용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미국에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테러작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는 말도, “그들이 미국으로 가기를 바랐다”고 번역해야 하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음질이 나쁘다고 한다.
공인번역가 2명과 함께 영상녹화물 내용을 분석한 독일의 아랍학 교수는 “미국인 번역자들이 미국 정부가 듣고 싶어하는 문장을 여러 곳에 삽입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 부분을 확인하려고 몇 번이나 들었지만 헛수고였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나중에 영상녹화물의 영어번역에 일부 실수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과연 부분적인 실수였을까?
오사마 빈 라덴은 9.11 사건 직후 서방 언론에 보도된 첫 발언에서 자기는 9.11 사건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는 9.11 사건이 이스라엘, 러시아, 인도, 세르비아의 테러조직이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9.11 사건이 악마가 저지른 범죄이며, 자기의 조직 알 카에다는 미국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뒤에 촬영된 영상녹화물에서 그는 알라신은 미국의 가장 취약한 곳을 타격했으며, 이 공격을 완수한 이슬람 전사들은 하늘의 복락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왜 불과 몇 주 사이에 양극단을 오가는 말을 하였을까?
의문 12 – 미국은 9.11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혐의자를 왜 체포하지 않는 것일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기 시작했던 2001년 10월 8일 파키스탄 군정보부(ISI) 부장 아흐마드가 해임되었다. 1999년에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한 현재의 파키스탄 군사정권에서 군정보부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평상시도 아니고 인접국인 아프가니스탄에서 반테러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왜 군정보부장이 느닷없이 해임되는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을까?
이 이상한 사건의 내막은 파키스탄의 숙적 인도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인디아 타임스(India Times)』 10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인도 정부는 아흐마드가 9.11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를 미국에게 넘겨주었고 그에 따라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 압력을 가해 아흐마드를 해임시켰다는 것이다. 미국은 아흐마드가 테러리스트 우마르 셰이크를 통하여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여객기를 납치했던 모하메드 아타에게 10만 달러를 보낸 사실을 확인하고, 파키스탄 정부에게 아흐마드를 해임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9.11 사건이 일어나던 그 시각 아흐마드는 놀랍게도 워싱턴에서 미 중앙정보국 및 국방부 당국자들과 비밀회담을 하고 있었다. 독일 언론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 Algemeine Zaitung)』 9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파키스탄 군정보부는 2001년 3월부터 미국과 비밀회담을 하였으며, 이 회담에는 탈레반 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의 측근, 최근 탈레반 이후의 정부 수반으로 떠오르는 자히르 전 국왕의 측근도 참석했다고 한다. 미국은 2001년 3월부터 탈레반 정권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재편하려는 구상을 해왔으며, 아흐마드는 9월 11일 사건 당일에도 미국의 중요한 협상상대였다.
아흐마드는 9.11 사건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람이므로, 미국은 그를 테러지원자로 체포하여 수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를 방치하고 있다.
의문 13 – 9.11 사건의 심층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세력은 누구일까?
미국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변호사 단체인 ‘쥬디셜 워치(Judicial Watch)’는 2001년 11월 14일 성명을 발표했다. 그 성명에 따르면,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미 연방수사국 요원이 9.11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테러조직에 대한 수사가 방해를 받고 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그 증언자는 테러조직 수사에는 상부에서 설정한 한계선이 있는데, 말단 수사관들이 그 선을 넘어서면 상부로부터 보복 조치를 당한다고 폭로했다. 그 폭로가 사실이라면, 9.11 사건의 심층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상부’는 누구일까? 그 ‘상부’는 자기들과 9.11 사건의 테러리스트들이 은밀히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날까봐 심층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방수사국 요원이 9.11 사건의 심층수사가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던 바로 그날 프랑스에서는 『빈 라덴, 금지된 진실』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장 샤를 브리사와 기욤 다스키가 함께 지은 책이다. 브리사는 1990년대 말까지 프랑스 기업의 전략분석가로 일했고, 3년 전에는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조직망을 분석한 보고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정보부 출신이기 때문에 그 책의 출판사는 그 책을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출판허가를 받았다. 다스키는 국제정보담당 언론인이다.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주목해야 할 사람은 존 오닐이라는 미국인이다. 그는 미 연방수사국에서 테러조직 수사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수사관이었으며, 2001년 8월까지 연방수사국 부국장으로 뉴욕시의 수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일어난 미국 대사관 동시테러사건, 그리고 예맨에서 일어난 미국 구축함 테러사건을 수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오닐은 자신이 수사했던 테러사건마다 오사마 빈 라덴이 개입했다는 확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조직이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미국의 심장부가 테러목표가 되고 있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닐은 결국 연방수사국을 떠났다. 『빈 라덴, 금지된 진실』의 저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테러조직에 대한 수사가 방해를 받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여 연방수사국을 떠났다고 말하면서, 미국 석유기업들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이권문제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수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고위 정보통의 말을 인용한 영국 언론 『가디언』 2001년 11월 7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가 관련된 수사에는 언제나 엄격한 통제조치를 취해오고 있는데, 특히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 통제는 더욱 심해졌으며, 테러사건들 가운데는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상부의 압력으로 중단된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 오닐이 연방수사국을 떠날 무렵 미국 법무부와 연방수사국은 그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가 조사를 받게 된 이유는, 2001년 여름 오닐이 연방수사국 회의장소였던 어느 호텔에서 극비문서가 담긴 가방을 잃어버렸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 문서에는 테러조직의 동향과 반테러작전, 반테러작전 요원들의 신상을 기록한 비밀정보가 들어있었다. 그 가방은 몇 시간 뒤에 그대로 발견되었다. 연방수사국은 극비정보가 누출되었을 것을 염려하여 그 문서에 대한 지문감식까지 했는데, 결국 단순도난사건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 법무부와 연방수사국은 다시 그 가방분실사건을 끄집어내서 오닐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오닐은 연방수사국을 떠난 2001년 8월에 세계무역센터 안전책임자로 채용되었다. 그는 세계무역센터의 안전조치를 총점검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그는 9.11사건의 잿더미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영국 텔레비전방송 비비씨(BBC)는 2001년 11월 6일에 방영한 ‘비비씨 뉴스 나이트’라는 방송순서에서 오사마 빈 라덴과 미국의 흑막을 폭로했다. 그 방송은 미국의 국가안보 관련문서임을 뜻하는 고유번호 ’1991WF213580′이 붙어있는 미 연방수사국의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그 비밀문서에 따르면, 연방수사국은 미국에 살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가족(그의 조카 20여명)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자금지원을 받는 아랍계 청년조직의 테러혐의를 잡고 수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수사활동은 결론이 나기 전인 1996년에 중단되었다. 9.11 사건 이후에 미국 정부가 새로 지정한 테러지원조직명단에 그 아랍계 청년조직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 연방상원과 연방하원의 정보위원회는 9.11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2002년 5월 8일 상원 정보위원회 위원장 로버트 그레이엄은 미국의 수사기관, 정보기관들이 9.11 사건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문제를 조사하는 연방의회의 합동조사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9.11 사건의 심층수사를 ‘상부’가 방해하고 있다면,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의문 14 – 미국 정부와 미국 석유자본의 정경유착은 9.11 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일까?
부시 가문이나 부시 행정부의 고위관리들은 거의 모두 미국 석유기업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부통령 딕 체니는 2000년까지 석유시공기업인 헬리버튼의 대표였고, 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 칸돌리자 라이스는 석유회사 셰브론의 중역이었다. 상무부 장관 에번스, 동력자원부 장관 에이브러햄도 석유기업체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부시 행정부는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카스피해 석유자원을 독점하려는 전략을 놓고 협상을 진행했다. 부시 행정부는 탈레반 정권과 직접 협상을 벌였는데, 그 협상은 워싱턴, 베를린, 이슬라마바드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 탈레반 정권의 협상은 2001년 8월에 이르러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6개국과 러시아를 포함시킨 6+2 회담도 병행하였다. 전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프랑스 언론에 공개한 바에 따르면, 2001년 7월 베를린에서 열렸던 6+2 회담에서는 탈레반 정권을 연립정부로 교체하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그 회담에서 미국 대표는 탈레반 정권대표를 협박하면서, 만일 탈레반 정권이 미국의 연립정부 구성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협박은 미국이 9.11 사건이 일어난 뒤인 2001년 10월 7일에 탈레반 정권에 대한 무력공격을 개시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실행되었다.
의문 15 – 빈 라덴 그룹과 부시 가문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있는 것은 아닐까?
9.11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날 워싱턴에 있는 리츠 칼튼 호텔에서는 세계 최대의 사모 투자기업(private equity)5)인 칼라일 그룹(Carlyle Group)의 연례 투자회의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회의에는 전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 전 국방장관 프랭크 칼루치, 오사마 빈 라덴가의 대표들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칼라일 그룹의 회장은 전 국방장관 프랭크 칼루치, 선임 고문은 전 대통령 조지 부시, 선임 자문관은 전 국무장관 베이커, 유럽담당 회장은 전 영국 총리 존 메이저 등이다. 필리핀의 전 대통령 피델 라모스, 태국의 전 총리 아르난도 판야라춘, 독일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칼 오토 폴, 미국의 합참의장을 지낸 존 샬리캐쉬빌리, 전 증권감독위원장 아서 레빗, 전 세계은행 재무관 아프사네 마세에키 등이 이사로 있다.
현 대통령 조지 부시도 1990년에 칼라일 그룹이 소유한 여객기 기내식 공급업체 케이터 에어(Cater Air)의 이사로 있었다. 2년 뒤에 그는 텍사스 주지사에 당선되자 그 회사를 떠났다. 영국 언론 『가디언』의 2001년 10월 31일자 보도에 따르면, 칼라일 그룹의 유럽담당 회장인 영국의 전 총리 메이저는 1년에 한 달 정도 일해주는 대가로 10만 파운드를 받는다고 하며, 칼라일 그룹의 선임 고문인 전 대통령 부시는 한 차례 일해주는 대가로 8만-10만 달러를 받는다고 한다.6)
칼라일 그룹은 1997년에 버지니아주에 있는 군수기업 유나이티드 디펜스(United Defense)를 8억5천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 기업은 미 해군함정에 장착된 미사일 수직발사체계 등 여러 종류의 무기를 만들어내는 군수기업이다. 이 기업은 2001년 9월 26일에 미 국방부와 계약을 체결하여 2003년 4월까지 6억6천5백만 달러에 달하는 크루세이더 야포를 생산하기로 했다. 미 육군이 크루세이더 야포를 사들이는 사업은 현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에 의하여 결정되었는데,7) 그는 칼라일 그룹의 회장인 프랭크 칼루치와 절친한 사이다.
9.11 사건이 부시 행정부의 음모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던 연방하원의원 씬티아 맥키니의 주장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가 전개하고 있는 반테러전쟁은 칼라일 그룹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고 있다고 한다.
9.11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9월 27일 미국의 경제전문지 『월 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의 반테러전쟁에 의해 군사비가 증액될 경우 군수산업부문에 주력하고 있는 칼라일 그룹의 투자자인 빈 라덴 그룹이 이익을 보게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전 대통령 부시, 전 국무장관 베이커, 전 국방장관 칼루치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제다에 있는 빈 라덴 그룹의 본부를 방문하였다. 전 대통령 부시는 칼라일 그룹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998년 11월과 2000년 1월에 빈 라덴 그룹 인사들을 만났다.
빈 라덴 그룹은 1995년에 칼라일 그룹 런던지사를 통해 2백만 달러를 ‘칼라일 파트너 펀드’에 투자했다. 그러나 칼라일 그룹은 9.11 사건 이후 빈 라덴 그룹과 거래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 라덴 가문은 오사마 빈 라덴이 반미테러활동을 시작한 1994년부터 그와 관계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하고 있다.
(2) 9.11 사건과 반테러전쟁전략
9.11 사건 이틀 뒤인 2001년 9월 13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칸돌리자 라이스는 “이번 테러공격은 대통령과 국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각을 바꾸게 한 사건”이며, “미국의 안보에 대한 사고방식을 영구히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이것은 안보관의 변화를 지적한 말이다. 여기서 라이스가 지적했던 안보관의 변화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9.11 사건 직후에 있었던 부시 행정부 핵심들의 움직임은 부시 행정부의 안보관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말해주는 실례가 된다. 2001년 9월 15일 오전 9시 30분, 미국 대통령 부시는 핵심 참모들을 메릴랜드주 캐코틴 산악지대에 있는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으로 불러모았다. 9.11 테러사건의 대처방안을 그날 하루 동안 집중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날의 논의는 7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회의에서 중앙정보국 국장 조지 테닛은 중앙정보국이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에 관해 지난 4년 동안 조사해왔던 극비 정보자료를 대통령과 핵심참모들에게 제출하였다. 그 자료의 겉장에는 ‘전쟁 시작(Going To War)’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부시가 “21세기의 첫 전쟁”이라고 불렀던 미국의 반테러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9월 17일 9시 35분, 백악관에서는 국가안보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는 두 가지 사항이 결정되었는데, 부시는 그날 오후 두 개의 결정서에 서명했다. 하나는 ‘엠오엔(MON)’이라는 약어로 불리는 중앙정보국의 아프가니스탄 비밀작전 문서였다. 그것은 1986년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서명했던 반테러 비밀작전을 위한 결정서를 오늘의 변화된 정황에 맞게 수정한 것이었다. 10쪽 분량으로 된 이 문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조직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중앙정보국은 전세계 ‘테러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비밀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중앙정보국의 이른바 ‘더러운 전쟁(dirty war)’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다른 한 문서는 2쪽 반 분량으로 전시내각의 업무에 관한 것이었다. 문서 겉장에는 ‘극비(Top Secret)’라는 표시가 적혀 있었다. 이날 국가안보회의는 전시내각으로 전환되었다. 전시내각은 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국가안보보좌관, 법무장관, 연방수사국 국장, 중앙정보국 국장, 합참의장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전시내각의 구성은 부시 행정부가 반테러전쟁의 지휘권을 백악관으로 집중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백악관의 전시내각이 미군을 직접 통제·지휘하면서 반테러전쟁을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심장부가 공격을 받은 9.11 사건을 구실로 하여 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지역에서 미국을 적대하는 세력에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전쟁권을 확보하였다. 9.11 사건은 제국의 수도 워싱턴을 전쟁분위기로 들끓게 하였다. ‘반테러전쟁’이라는 간판을 내걸기만 하면 지구 위에 있는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침략전쟁을 도발하겠다고 덤벼드는 제국주의 호전광들의 기세가 등등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외침략전쟁은 9.11 사건으로 확실한 ‘면죄부’를 얻게 되었으며, 부시 행정부는 앞으로 무한정 연장될 수 있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미국 인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일단 성공하였다.
영국 언론 『더 썬(The Sun)』의 보도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 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커다란 규모의 공군력, 즉 걸프전에 동원했던 공군력을 능가하는 630대의 군용기를 동원하고, 4개의 항공모함 전단을 인도양 해역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동원된 하위 동맹국들은 영국, 캐나다, 체코, 프랑스, 일본, 터키 6개 나라다. 부시 행정부는 9.11 사건 이후 반테러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비로 174억 달러를 책정하였고 지금까지 140억 달러를 지출하였다.
『워싱턴 포스트』 2001년 10월 11일자는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미국 본토를 방어하는 새로운 사령부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를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8) 럼스펠드는 2002년 4월 17일 미국 본토를 방위하는 북부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본부를 콜로라도주 피터슨 공군기지에 설치하기로 했으며 10월 1일부터 가동된다고 발표했다.
9.11 사건 이후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에 반대하는 나라들을 ‘악’으로 규정하였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은 ‘선’이라고 찬양하면서 자국의 군사력과 국가자원, 그리고 하위 동맹국들의 군사력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반테러전쟁전략이 노리고 있는 목표는 무엇일까? 그 목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질서를 무한정으로 유지·확장하려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반대하는 적대세력은 사회주의국가이건 이슬람국가이건 간에 무조건 ‘테러국’으로 규정하고 전쟁수단을 동원하여 제거하겠다는 것이 반테러전쟁전략의 기본목표다. 미국의 반테러전쟁전략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장기전을 추진하는 전략이다. 아마도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될 초장기적 전략이 될지도 모른다.
부시 행정부의 반테러전쟁전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무한정으로 유지·확장하려는 세계지배전략의 변종이지만, 지금 지구 위에는 미국의 세계지배야욕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위협하는 미국의 적대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지배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적대세력들과 정면으로 대결하게 된다. 따라서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려는 침략전쟁을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정치지형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진영으로 재편되었을 때, 미국은 자기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대세력을 공산주의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지난 20세기 후반기에 미국이 자기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확장하기 위하여 도발했던 수많은 침략전쟁들은 ‘공산주의세력의 침략’을 막아내는 ‘자유수호의 전쟁’으로 미화·분식되었다.
그런데 20세기말에 이르러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그리고 중국의 자본주의적 변신은 세계정치지형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사회주의진영의 붕괴 이후에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은 ‘공산주의세력의 침략’에 대항하는 ‘자유수호의 전쟁’을 도발해온 낡은 명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은 침략전쟁도발의 새로운 명분을 조성하고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이 들고 나온 새로운 명분은 ‘반미테러국들의 테러’를 막아내는 ‘자유수호의 전쟁’으로 확정되었다. 그 명분에 따라 미국은 자기의 적대세력을 20세기의 공산주의자(communists)에서 21세기의 테러리스트(terrorists)로 교체하였으며, 미국의 침략전쟁은 20세기의 반공전쟁전략(strategy of the war on communism)에서 21세기의 반테러전쟁전략(strategy of the war on terrorism)으로 전환되었다. 9.11 사건은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9.11 사건은 미국이 반테러전쟁전략을 수립하게 된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9.11 사건이 반테러전쟁전략의 원인이 아니라 거꾸로 반테러전쟁전략이 9.11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라는 말이다. 9.11 사건은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로 세계정치지형이 질적으로 변동된 이후에 미국이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계속하여 유지·확장하기 위하여 수립한 반테러전쟁전략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9.11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반테러전쟁전략이 수립된 것이 아니라, 반테러전쟁전략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9.11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간대를 살펴보아도 9.11 사건의 발생 보다 반테러전쟁전략의 수립이 더 먼저 진행되었음이 드러난다. 9.11 사건 이전에 부시 행정부가 반테러전쟁전략을 수립하였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건에서 입증된다.
첫째, 부시 행정부는 9.11 사건 이전에 이미 미국의 군사전략을 수정·보완하였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기존의 군사전략인 ‘윈-윈 전략(Win-Win Strategy)’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2001년 7월 부시 행정부는 기존의 ‘윈-윈 전략’을 새로운 ‘원-플러스 전략(One-Plus Strategy)’으로 대체하게 된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이 지향하고 있는 전략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반미국가들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겠다는 명분으로 추진하는 군비증강, 곧 미사일방어(MD)체계의 수립이고, 다른 하나는 반테러전쟁의 수행이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은 이 두 개의 전략목표를 추구하기 위하여 4개의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고 있다. 4대 전략방침이란 미국 본토 방어, 침략국의 적대행위 예방, 1개의 전면전에서의 승리, 국지전 수행이다. 지금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반테러전쟁전략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이 제시한 4대 전략방침 가운데 국지전 수행 방침을 반테러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이 끝나면 미국은 4대 전략방침 가운데 1개의 전면전에서 승리한다는 방침을 추진하기 위하여 또 다른 전쟁을 도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라크가 그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 세간의 중론이다.
둘째, 부시 행정부는 9.11 사건 직전인 2001년 8월말 국방정책이사회 자문위원회(PDB)를 보강하고 반테러전쟁전략을 수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미국의 군사전략을 검토하여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에게 보고하는 참모역할을 담당한 준정부기구다. 이 위원회가 부시 행정부의 반테러전쟁전략을 수립하는 데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 위원회는 헨리 키신저(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전 국무장관), 해럴드 브라운(전 국방장관), 제임스 슐레진저(전 국방장관), 제임스 울시(전 중앙정보국장), 리처드 앨런(전 백악관 국가안보담당보좌관), 데이빗 제레미아(전 합참부의장), 뉴트 깅그리치(전 연방하원의장), 리처드 펄(전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위원회의 성원들은 한결같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부추기는 호전광들인데, 위원회의 현재 의장인 리처드 펄은 부시와 럼스펠드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후세인 응징론’, 다시 말해서 ‘확전론’을 주장해온 대표적인 호전광이라고 할 수 있다.
부시와 그 주변의 호전광들은 “반테러전쟁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고 떠들면서 자기들의 반테러전쟁전략을 기준으로 하여 전세계를 반테러진영과 테러진영으로 양분하였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에 반대하는 반미세력을 테러진영으로 분류해놓은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반미세력을 다시 삼등분하여 이른바 반미테러국, 반미테러지원국, 인권침해국으로 나누어놓았다.
부시 행정부는 반미테러국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친미예속국으로 교체하겠다는 극도의 적대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반미테러국은 부시 행정부에 의하여 반테러전쟁의 일차적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그 다음으로 미국의 반테러전쟁전략이 노리고 있는 공격대상은 반미테러국과 연계되어 있거나 반미테러집단을 비호·지원하는 반미테러지원국들이다. 해마다 5월 1일에 미 국무부가 발표하고 있는 국제테러에 관한 연례보고서(Annual Terrorism Report)에서 ‘반미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하고 있는 7개 나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쿠바다.
지금까지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을 제멋대로 바꾸어왔다. 1990년도에 발표된 ‘테러지원국’ 명단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쿠바, 이란, 시리아, 리비아, 남예맨 6개 나라가 들어가 있었다. 당시까지 미국에게 순응하였던 이라크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1991년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무력공격을 감행한 뒤부터, 남예맨이 명단에서 삭제되는 대신 이라크가 포함되었다. 1993년부터는 수단이 그 명단에 포함되어 ‘테러지원국’은 오늘까지 7개 나라로 변동 없이 지정되어 있다.
미국이 북(조선)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은 것은 1988년부터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미국은 북(조선)을 변함없이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정황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1998년 9월 5일 뉴욕에서 열렸던 제7차 조·미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이 북(조선)의 테러지원국 해제를 위한 양자회담을 개최하자는 북(조선)의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러한 변동의 원인은 북(조선)이 견디기 힘들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주체의 일심단결’을 완강하게 고수하면서 1998년 8월 31일에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탑재한 ‘백두산 1호’를 발사함으로써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전략무기를 보유한 군사강국임을 미국에게 암시한 것에 있었다.
‘백두산 1호’가 발사되었던 그해 9월 28일 워싱턴에서는 북(조선)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 위한 조·미 실무급회담이 열렸다. 북(조선)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 위한 조·미 정치협상은 1999년 11월 15일에 베를린에서, 2000년 3월 8일에는 워싱턴에서 각각 열렸다. 그리고 2000년 8월 9일과 10일에는 평양에서도 열렸다.
그 3차 협상의 결과에 따라 2000년 10월 6일 북(조선)과 미국은 ‘국제테러에 관한 조·미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역사적인 진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인 조명록 차수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하기 4일 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국제테러에 관한 조·미 공동성명’의 마지막 구절은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국 법률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협력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실현된 조·미 합의를 무시하고 2001년 5월 1일에 발표한 국제테러에 관한 연례보고서에서 북(조선)을 또다시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았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는 조·미 합의를 제멋대로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로 나왔지만, 북(조선)은 2001년 12월 12일 유엔의 ‘테러자금 조달억제에 관한 국제협약’과 ‘인질억류방지에 관한 국제협약’에 서명하면서 약속을 이행하였다.
지금 미국이 무력으로 공격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테러지원국’ 명단에 들어있는 나라가 아니다. 9.11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지 않고 탈레반 정권에 대해서 적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되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지난 시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저항하는 반소정권이었다. 1945년 이후 1990년대까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으로 존속하였던 반공전쟁전략의 견지에서 보면, 미국은 소련의 인도양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미국이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을 통하여 탈레반 정권과 오사마 빈 라덴의 반소유격전을 지원하였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9.11 사건 이후 미국이 혈안이 되어 체포하려는 오사마 빈 라덴이 미 국무부의 국제테러에 관한 보고서에 등장하는 것은 1999년 5월 1일의 일이다.
둘째,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개발하여 파키스탄의 항만을 통하여 유럽과 동북아시아에 수출하려는 야심적인 계획을 1990년대 중반부터 추진한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노컬(Unocal)이라는 에너지기업이다. 유노컬이 그 에너지자원 개발계획에 따라 설치할 장거리 송유관과 천연가스수송관을 파키스탄까지 연결하려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통과해야 한다. 유노컬은 그 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때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 네브래스카대학 분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탈레반 정권의 관리들을 미국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유노컬은 미국이 탈레반 정부를 합법정부로 인정하게 하기 위한 로비도 벌였다.
그러나 1998년에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대사관 폭파사건이 일어나고 클린턴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자 유노컬은 에너지자원 개발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미테러지원국 7개 나라 가운데 군사력이 약한 나라들을 공격하겠다는 것이 반테러전쟁전략의 두 번째 목표다. 이른바 ‘확전론’이 그것이다. 반미테러국으로 규정된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공격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지난 10년 동안 봉쇄조치에 시달려오면서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반미테러지원국 이라크를 ‘확전론’의 제1차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미국은 군사력이 약한 반미테러지원국을 무력으로 공격할 경우, 당시 조성된 정세와 전쟁도발의 의도에 맞춰서 무력공격의 강도를 조절하게 된다. 이를테면 상대국의 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지 않고 전략거점에 대한 공습과 국경봉쇄를 자행하는 경우도 있으며, 지상군을 투입하여 수도를 점령하고 기존의 반미정권을 새로운 친미예속정권으로 교체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이 분류해놓은 나라들 가운데는 인권침해국이 있다.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와 중국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전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군사강국인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서는 무력공격이 아니라 이른바 ‘인권문제’를 걸고들면서 정치적 압박공세를 계속 취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조·미 공동성명을 이행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미국이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걸고들면서 취해왔던 기존의 정치적 압박공세는 미국 스스로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조·미 공동성명의 이행은 핵문제와 미사일문제를 일괄타결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새롭게 북(조선)의 ‘인권문제’를 걸고들면서 정치적 압박공세를 취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을 ‘테러지원국’이 아니라 ‘인권침해국’이라고 규정하고, 그 두 군사강국의 핵문제와 미사일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를 걸고들면서 정치적 압박공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서 그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북(조선)에 대한 정치적 압박공세도 ‘인권문제’를 동원한 공세로 전환될 것이다. 미 국무부의 연례보고서에서 북(조선)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때부터, 미국은 조·미 관계를 이른바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새로운 갈등국면으로 몰고 갈 것이다.
미국이 지난 14년 동안 줄곧 붙들고 있었던 북(조선)에 대한 ‘테러지원국’의 자의적 규정을 이제 ‘인권침해국’의 자의적 규정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조·미 관계의 현주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질서에 완강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 북(조선)이 반제자주화투쟁에서 쟁취한 정치적 승리를 바라보게 된다. 북(조선)의 반제자주화투쟁은 이 행성의 곳곳에서 이른바 ‘반테러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검은 폭풍을 뚫고 진보적 인류의 앞길을 인도하고 있다. (2002년 5월 10일 작성)
< 주 >
1) 제임스 뱀포드는 미 중앙정보국(Central Information Agency)을 능가하는 비밀정보기관인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의 비밀공작을 폭로한 책 『The Purple Palace』(1982년)을 펴낸 언론인이다. 그는 1982년부터 20년 동안 국가안보국의 비밀공작을 계속 추적하여 『Body of Secrets』(2001년)를 펴냈다.
2)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13년이 지난 1911년 함선 ‘메인’이 인양된 뒤에 선박수리업자들이 몇 달 동안 정밀조사한 결과 그 함선은 내부에서 폭파된 것으로 드러났다. 미 해군은 그로부터 90년 뒤에 그 폭파사건이 조작극이었음을 인정하였다.
3) 사우디 아라비아의 빈 라덴 그룹은 빈 라덴 가문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는데, 아랍권에서 가장 커다란 건축투자기업으로 전세계에서 건축사업을 벌이고 있다. 연간 총매출액은 50억 달러라고 한다.
4) 뷸로프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 사민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방부 차관, 과학기술장관을 지냈다. 독일 통합 이후에는 국회 정보통제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1998년에 서방의 국가정보기관들과 국제테러의 유착관계를 폭로한 책 『국가라는 이름으로』를 펴냈다.
5) 사모투자기업은 공개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회사나 저평가된 회사, 또는 경영난에 빠진 기업을 인수해 흑자로 반전시킨 뒤 되팔아 이윤을 챙긴다. 사기업이므로 전직 행정부 관리들에 대한 로비자금 규정도 적용되지 않는다. 칼라일 그룹은 2001년 9월말 현재 125억 달러가 넘는 투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본부는 워싱턴에 있고, 남(한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에서 160 여 개 기업체의 지분을 갖고 있고 55개 나라에 435명의 투자상담가를 두고 있다. 항공, 에너지, 건강, 정보기술, 부동산, 통신, 미디어 등 사업대상이 매우 넓지만, 주력사업은 군수산업이다. 칼라일 그룹은 지난 10년 동안 연평균 34%의 수익을 올렸다.
6) 전 대통령 부시는 1999년 5월 28일 칼라일 그룹의 고문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그 해 9월 칼라일 그룹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미은행 지분 40.7%를 사들여 제1주주가 되었다.
7) 최근 쿠르세이더 야포 개발계획은 포기되었다.
8) 미군은 지역사령부 4개(태평양사령부, 유럽사령부, 남부사령부, 중부사령부)와 기타 사령부 4개(우주사령부, 특수전사령부, 전략사령부, 수송사령부)를 포함하여 모두 8개의 사령부로 편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