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기-허용철 선생님2005/04/28
경청하기-허용철 선생님
허용철선배는 인천민예총의 지회장이시다. 언젠가 강남종고미술실에 선배를 보러갔다가 책상에 놓인 전시회 팜플렛을 보았다. 화가 이종구선생이 쓴 발문에 작품평에 앞서 발로 뛰는 활동가상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누구나 화가에 앞서 헌신적인 활동가로 소개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허용철 선배가 작업실 의자에 빠지듯 깊이 앉아 계시다. 넓은 화실이다. 임영미선생님께서 이층에서 차와 쑥 버무리를 들고 내려오셨다. 5월달 평화나눔아카데미에서 민통선기행갈 때 당신도 참여해서 같이 가게 되었다고 그때 또 뵙자고 알려주시곤 어머님 병원모시다 드리러 나가노라고 총총히 사라지신다.
책상위에 지도를 펴고 설명을 드린다. 이상한 것은 장선배님 댁에서 보다 설명 시간이 길었다는 것이다. 허 선배가 너무 진지하게 경청해주신 때문이리라.
“내가 문수산 지나서 성동리하고 애기봉 사이 있는데서 군대 근무를 했거든. 근데 언제쯤인지는 다 기억이 다르긴 한데, 유도에서 1개 대대가 주둔을 했었다는 거야. 그런데 북 특수부대 애들이 와서 전멸을 시켰데, 한명만 남기고… 그 한명은 어떻게 살아남게 됐냐면 이 친구가 자다가 갑자기 대변을 보러 나왔다는 거야. 근데 하도 급해서 화장실까지 안가고 내무반 뒤쪽 풀숲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총소리가 나서 아예 풀숲으로 엎드려 있었던 거지. 그리고 조용해진 다음 나와 보니 다 죽어 있더라는 거야. 그게 그러니까 군대라는데가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만들어지는 데니까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그 뒤로는 병력을 빼고 무인도로 만들어 놓은거라고 하드라고”
“그거 굉장한 이야기네요. 정전협정의 부속합의서상으로 한강하구에는 무장병력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우리가 주둔을 하고 있었다는 거네요.”
“하여튼 나도 한강하구가 이런데라는 거는 전혀 몰랐네. 왜 몰랐지. 허허”
“그리고 옛날에는 교동이 세곡선이 거쳐 가는 곳이어서 교동사람들이 강화본도 사람들을 오히려 촌놈이라고 했다고 하더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계시는 군요. 장진영선배 이야기로는 전교조가 중심이 되면 교장선생님들이 반대할거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을걸. 학교라는게 내가보기엔 동사무소 같아서 위에서 공문으로 협조요청 내려오면 교육청 통해서 일선학교로 그냥 내려간다고. 이런 행사야 학교장들도 좋아할 행사네. 그러쟎아도 6.25행사가 재미가 없는데. 내가 볼 때는 민화협이나 이런데서 교육부랑 협조가 되고 그게 공문으로 내려가도록 처리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그리고 종이배를 띄운다 고하면 거기에 편지를 쓰든 뭔가 내용을 담아서 하면 좋을텐데… 그런 것을 재료까지 챙겨서 일선학교에 내려보내 주면 그건 다 좋아하지. 내가 예전에 백마강에서 무슨 축제하고 난 뒤에 연등을 띄우는 것을 봤는데 와! 그거 진짜 좋데. 너무 괜챦았어. 그러니까 이것도 크게 배모양으로 큰등을 한 둘 만들어서 바닥에 물 스미지 않게 장치해서 띄우면 종이배만 띄우는 것 보다는 훨씬 분위기가 살 것 같애”
“이것이 외양은 이벤트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지역주민들이 주인공이 되도록 그렇게 꾸려가야 겠다는 생각인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렇게 되면 좋지. 작년에 민통선 안에 북성초등학교 있쟎아. 폐교되고 나서 예술가들이 작업실로 개조해서 쓰고 있는…거기가 이전에 가보면 북이 바로 보이고 진짜 뭔가 해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거기 입주한 미술가들이 진보적인 작가들은 아닌데 학교랑 학교 앞에 가을걷이 하고 난 논까지 사용해서 평화를 주제로 전시회를 한번 했더라구. 거기를 가보지는 않았는데 그것도 괜챦았던 것 같애.”
“그렇군요. 굳이 우리가 전체가 다 모여서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애요. 작더라도 나름대로 진정성을 추구하는 그런 흐름이 여기저기서 생기면 되니까요. 그 각각의 프로그램에 한강하구 문제가 더욱 상상력을 발휘하고 더 좋은 성과가 나도록 하는 방향으로 가면 되지 않나 싶어요.”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해야 할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장선배가 5월12일 경에 한번 만나서 논의해보자고 하시던데 시간 괜챦으세요.”
“글쎄…” 한참을 머뭇거리시다가 달력을 찾아 들고는 석연챦은 표정으로 “그런데 우리가 만나서 뭘 할거지”
“이것을 위해 실행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추진해 갈지 등을…뭐 문제라도”
“아니 다른 것하고 겹쳐서 딴 생각을 했어. 그렇게 하지”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제법 분다. 그래봐야 봄바람이다. 겨울바람과는 결이 다르다. 말은 공들여 들은 만큼 기억되고 결국은 기억된 만큼 들은 것이다. 허 선배는 이야기를 많이 하도록 했다. 내가 말을 많이 한 만큼 오히려 내 말에 경청하신 것이리라. 말에도, 말과 말이 오가는 대화에도 제각기 결이 있다. 그 결을 놓치면 말은 겉도는 법이다. 기억되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혼신을 다해 듣는 진지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결을 타야 결국 제대로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