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평화체제와 일본-요시카즈 2001/11/06 400

동아시아 평화체제와 일본

사카모토 요시카즈 (동경대 교수)

나는 독일통일에 대한 희망을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내 생애에 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바이츠제커 전 독일대통령

나는 내 생애에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

햇볕정책: 평화를 위한 모험

지난 6월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냉전 해체의 시작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앞으로 구체적인 의제들에 대한 충돌과 역행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정상회담에서 기본적인 합의에 도달했으므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긴장 완화를 향한 역사적 전환이 일련의 정치적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평화와 화해를 향한 철학, 국민들에게 책임지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한 용기 있는 결단과 창조적 비전에 기반하고 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의 동방정책이 동서독의 데탕트에 기여했고 소련공산당 총서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신사고가 냉전을 종식시켰던 것처럼, 일련의 정치적 노력은 한반도의 두 정상이 회담으로 결실을 맺음으로써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태도를 쉽게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추구해온 햇볕정책이었다. 김대통령의 정치적 노력은 엄청난 인내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고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2년 전 김대통령의 일본방문이 떠오른다. 그의 선임자들이 일본 방문을 결정할 때 그들에게 당면했던 가장 민감한 문제는, 방문에 앞서 억압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정부의 진지하고도 공식적인 사과를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문제는 일본 스스로가 풀어야할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 방문에 앞서 이 문제를 선행조건으로 내거는 것을 삼갔다. 일본정부의 반응에 대해 분명한 사전지식이 없는 채 그렇게 한 것은 그에게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방적인 노력을 통해 그는 일본정부의 협력적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고 양국관계는 상호 신뢰와 이해라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다.

북한문제와 관련하여, 김 대통령은 대북 지원이 북한만 이롭게 할 것이라는 국내 비판에도 불구하고 식량과 비료 지원을 계속했고 사기업의 대북 투자를 권장했다. 3월 9일 김대통령은 한국정부가 고속도로, 항만, 철도, 발전소, 통신수단을 포함한 북한의 산업기반시설 확충을 돕겠다는 ‘베를린선언’을 발표했다. 이러한 김 대통령의 이니셔티브가 북한이 남한의 고위급 회담 제의를 수락하게끔 했음이 분명하다.

사실 심각한 경제난에 처해있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는 전략적 함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한 국가가 반드시 경제적 측면을 우선시하는 외교정책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는 1990년대 들어 지속적인 흉년과 소련으로부터의 원조 중단 등 심각한 경제난에 처한 북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북한정권은 경제위기에 처한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했었다. 국제적으로, 북한 지도자들은 고립된 국가를 적대 세력들로부터 방어할 필요에 직면해 있었다. 국내적으로, 김정일은 새로 상속받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군부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햇볕정책의 핵심내용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 경제난 때문에 폐쇄적인 군사국가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보다 개방적인 국가로 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북한 권력구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란 매우 어렵다. 필자는 1999년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한반도 냉전 종식에 대한 구상’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한 바 있다. 그 논문에서 필자는 북한 내부 권력구조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 한국, 일본이 긴장완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자 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상황 진전에 주목하였다.

첫째,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에 대한 특별히 긴 애도기간이 끝나는 시점인 1998년 9월을 기다려 헌법을 수정하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군사적 자격이 없었던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군부에 대한 그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1999년 김정일은 현지지도의 중심을 점차 군사기지에서 농장과 공장으로 옮김으로써 경제의 중요성을 시사하기 시작했다.

셋째, 김정일은 1995년의 글에서, 중국과 베트남에서 추진된 경제개혁뿐만 아니라 소련과 동구유럽 공산주의체제의 실패에 대해 강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최근 그는 중국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으며, 1999년 3월에는 전례 없이 평양 소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하였다. 따라서 지난 5월에 있었던 그의 중국방문과 중국경제개혁에 대한 지지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흥미로운 변화의 조짐은 중국이 그의 방문을 미국, 한국, 일본에 즉각 알렸던 것인데, 그것은 아마 김정일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저간의 흐름을 고려할 때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통해 선제조치를 취했고 북한의 김정일은 방향전환으로 그에 응답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두 지도자의 특별한 결정이 합치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남북한 국민들에게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김대통령과, 국가와 체제의 생존을 위한 김위원장의 고군분투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미국정부가 채택했던 소위 페리보고서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었다. 1999년 5월, 클린턴 대통령의 대북 정책자문을 담당했던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이 전례 없는 평양방문을 감행했다. 그의 방문은 조용히 진행되었으며 현지 조사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귀국 길에 페리는, 자신의 북한방문은 가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미국의 인식을 이해할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아마 북한도 이 방문을 환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페리 전 장관은 북한체제 유지를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양국 정부간의 고위급 대화를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북한이 6월 19일 미사일 실험을 계속 동결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자, 미국은 경제제재 완화로 그에 응답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남북한의 주도 아래 중국과 미국의 노력이 남북정상회담 및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 보면, 분명히 한 행위자가 누락되었는데, 그것은 곧 일본이다.

현상유지정책과 낡은 모델

2000년 3월 일본정부가 1997년에 중단했던 식량원조를 재개하면서 쌀 10만 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중국, 미국의 인도주의적 원조와 비교할 때, 일본의 대북 원조는 너무 초라하고 또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것이었다. 북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은 지난 4월, 그리고 10월 30일부터 3일 동안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일본이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과 일본인 납치사건을 우선적으로 논의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반도 긴장완화의 흐름에 뒤쳐져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제기될 질문은 왜 그런가 하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왜 동아시아 평화와 화해를 향한 진취적인 판단과 비전을 찾을 수 없는가?

과거에 일본은 1973년 미국이 중국과 화해를 선택했을 때에도 뒷전에 있었다. 냉전종식과정에서 일본이 한 역할은 거의 없다. 현재 한반도의 화해분위기 속에서도 일본은 여전히 다른 나라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근원은 매우 깊이 뿌리박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적극적인 주도성 부재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첫째, 종종 지적되어온 것처럼,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서구 산업국가들을 모델로 서양 강대국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질서에 적응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대조적으로 본 논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니셔티브라는 용어는,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면서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상대방의 반응이 불확실한 조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이니셔티브란 상대방의 긍정적인 입장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인 지혜이다.

1930년대에 일본은 서구 열강들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만들려는 노력을 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일본이 했던 것은 서구 제국주의를 일본식 제국주의 지배와 공격적 전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이것은 평화를 위한 주도적 노력에 정확히 배치되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은 낮은 군비지출과 함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미국경제의 쇠락을 목격하면서 일본의 여론주도층은 더 이상 일본의 모델이 될 만한 나라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

처음엔 마치 일본이 전인미답의 길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일본이 선택한 것이 별로 대단한 모델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많은 나라들이 해왔던 것처럼, 무장병력을 해외로 파병하기 위해 헌법적 제약을 줄이면서 정상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정치지도층이 선례 없이는 미래를 구상할 능력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또한 지적하듯이, 戰後 일본은 냉전을 불변의 조건으로 간주했고 미 일 안보체계를 戰前 천황제와 유사한 영원불변의 근본적 정체인 것처럼 유지해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전례 없는 발전을 위해 필요한 어떤 형태의 혁신적 사고에 대해서도 주저하게 만들었다. 냉전의 예기치 못한 종말과 함께 이른바 1955년 체제 혹은 자민당 1당 지배체제가 1993년에 몰락하여 야당연립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시점에서 냉전적 사고를 완전히 재고하고 동아시아 신질서에 대한 창조적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지역 수준, 특히 한반도의 냉전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는 두 가지 상이한 대응방식이 있다. 첫 번째 방안은 냉전적 사고를 지속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 때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냉전해체가 지구적 차원에서 현실화되었으므로 지역 차원의 냉전도 해체될 수 있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주도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일본은 전자를 택했다. 예를 들면, 개념적 타성과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일본은 북한에 대해 냉전시기 중국이나 소련에 대해서보다도 훨씬 더 호전적인 태도로 적의를 보였으며, 한국의 햇볕정책이나 미국의 포용정책보다 훨씬 더 대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대포동 쇼크라 불리는 일본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일본인 납치사건은 현명하지 않다 할 정도로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이런 태도의 저변에는,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재일 한국인들에게 보인 인종주의적 언행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본근대사에서의 뿌리깊은 차별 정서에다가 구시대적인 냉전 정서가 남아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미래의 적극적 비전에 기반을 둔 이니셔티브가 들어설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도피주의적 방관자의 심성

셋째, 2차 세계대전이래 반세기 동안 일본은 한반도의 분단을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해왔다. 즉 일본은 오랫동안 남한이 냉전시기에 일본과 공산주의국가 사이에 그리고 냉전이후에는 일본과 북한 사이에 존재하는 전선이자 완충국가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1964년 일본과 남한의 관계정상화 협정을 지지했던 자민당의 Kakuei Tanaka 간사장이 공산적기가 부산까지 다다르게 되면 일본으로서는 큰 위협이 된다고 한 말에서도 드러났다. 그것은 일본이 남한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한 일본은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전선에서 싸워야만 하는 남한과, 남한이 요새 역할을 한다는 가정 하에 후방에서 안주할 수 있는 일본 사이에는 핵심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남한이 한반도의 분단에서 기인하는 사활적 위험에 직접 대면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관련 당사국으로서의 긴박감을 갖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오랫동안 일본은 불확실한 미래와 현재 사이의 역사적 완충국가로 기능했던 서구 선진산업국가를 실존하는 모델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조망할 능력을 갖추지 않은 채 그럭저럭 생존해왔다. 이와 유사하게 일본은 남한을 지정학적 완충국가로 활용함으로써, 전쟁과 분단의 두려움이 극복되는 미래에 대한 기획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전자가 일본의 역사적 이점에 대한 의존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일본의 지정학적 행운을 보여준다. 이로써 일본은 직접적인 관련당사자로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과업을 회피할 수 있었다.

넷째, 국내외에서 자주 비판되어왔던 주제로서, 전후 일본은 계속해서 침략과 식민화의 역사에 대한 책임에 대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교과서문제는, 일본정부가 다음 세대를 포함한 자국민에게조차 져야할 책임을 가능한 한 모호하게 하려고 노력해왔다는 증거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냉전기간 동안 반공진영에 함께 위치해있던 남한과의 관계에서도, 1951년에 시작된 한일협상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기까지 7차례나 열렸다. 협상이 지연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사죄와 보상문제를 처리하지 않는 일본정부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불신이었다. 한일협정은 한일 양국 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에 대항하여 냉전체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던 미국이 두 당사자에게 협정의 부담을 감수하라고 압력을 가함으로써 체결되었다.

식민지배에 대해 반성하려하지 않는 태도는 일본정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야당, 언론매체 그리고 남한과의 협정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나타났다. 이들은 세 가지 이유에서 한일협정을 위한 협상에 반대했다. 첫째, 일본인의 조업권을 제한했던 일명 이승만라인을 남한이 일방적으로 그은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이 있었다. 둘째,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의 군사독재에 대한 광범한 반대의식이 있었다. 셋째, 남한과의 외교관계 개방이 한반도의 분단을 심화, 지속시키고 결과적으로 남북한 적대관계에 일본이 개입됨으로써 냉전을 격화시킬지도 모른다는 평화주의적 두려움이 있었다. 어떤 경우든 일본의 제국주의전쟁에 따른 죄과가 협정에 반대하는 이유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공산주의 북한에 대해 일본의 전시 침략과 제국주의 지배를 인정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부각되지 않은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남북한 두 나라가 모두 공통으로 제기하는 요구를 무시함으로써 보상과 배상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노력해왔다. 그 결과 자신의 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뒤쳐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화해에 기여하고자 하는 비전과 결의를 갖고 있지 않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본의 책임 있는 선택

이론적으로 볼 때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한반도 긴장완화와 화해 분위기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주도권을 획득하는 데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모호함의 장막 뒤에 안주하는 기존의 외교적 관성에 따라 행위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은 자신의 부정적 역사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멘탈리티와 의식을 다음과 같이 변화시켜야 한다.

위에서 제기한 4가지 요점을 역순으로 생각해보면, 첫째로 일본은 북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북한이라는 국가와 북한주민의 개인적 희생에 대해 선의로 보상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그간 일본정부는 북한에 대해 일본인의 북한피랍문제를 먼저 다루려고 했다. 물론 피랍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족이 겪는 고통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북한이 전시에 피랍된 수십만의 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위안부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 없이 일본인 피랍문제를 협상의 출발로 삼고자 하는 일본정부의 입장을 거절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무엇보다 먼저 일본은 식민시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뒤 일본인 피랍문제를 협상의 의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일의 정확한 순서이며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작은 주도권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정부가 피랍문제를 관계정상화 협상의 출발이슈로 제기한다면, 협상의 진전을 실질적으로 장해하는 것 외에 결국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만약 정말로 일본인 피랍인이 존재한다면, 이는 일본정부가 자국 피랍민의 신변보호를 위해 현실적으로 신중하게 다루어 져야만 한다.

둘째로 북한에 배상해야 할 액수와 관련하여 일본은 보다 큰 액수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배상이 오직 북한의 이익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선언에서 밝혔던 북한의 인프라건설 구상을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의 투자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남북분단을 전제하고 한국을 북한에 대한 방파제로 보는 시각 대신에 분단으로 생긴 한국인의 고통과 분단을 극복하여 화해와 통일을 성취하는 데 드는 비용을 함께 나눠야 할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일본은 방관자적인 입장을 버리고 한국과 같이 평화와 화해를 달성하기 위한 과업에 당사자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이는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냉전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본격적으로 철수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철수문제가 남한 내에서 제기될 때 일본은 한국인과 함께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감축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일본은 지난 50년 동안 오키나와와 일본 내에서 고통과 불화의 원인이 되었던 미-일 안보조약을 넘어서야만 하며, 지역평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인 그리고 제도적인 기초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넷째, 이것은 일본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과업, 즉 화해와 협력을 위한 자율적 지역시스템 건설이라는 역사적인 과업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확실히 동아시아 공영권의 부활 혹은 정상국가라는 진부한 모델로의 후퇴를 거부하는 것이다. 전례 없는 동아시아의 지역평화구조를 건설하기 위한 과업은 미래에 대한 혁신적 비전을 공식화할 수 있는 능력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유럽연합 형성과정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오랜 동안 경쟁국이었던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화해와 협력이 지역통합에 밑거름이 된 것처럼 동아시아의 일본과 한국(통일한국) 사이의 화해와 협력도 같은 기능을 해야 한다. 물론 동아시아와 유럽의 상황은 다르다. 따라서 EU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동안에 고질적인 냉전적 정신구조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현명함이 요구된다. 과연 일본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중인가?

前代未聞의 과제들

김대중 대통령은 분명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이전에 그 누구도 취급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대통령이 다루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통일에 이르는 지도를 만드는 작업이다.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양국의 공동선언문에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명기되어있다. 공통성이란 두 체제가 긴밀한 협조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 통일을 지향하면서 양 체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한반도 통일이 베트남과 같은 무력적 방식이나 독일과 같은 흡수통일 방식이 아니라, 양 체제의 평화공존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실현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체제의 몰락을 예견하지 않는 통일은 햇볕정책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이며, 지금까지 시도된 적이 없는 통일유형이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은 전례 없는 혁신적 사고를 요청 받고 있다. 한일 양국의 합의 아래 일본의 경제력을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여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둘째, 햇볕정책이 지속되어 북한경제가 성장하고 현대화된다면 북한은 자기 방식의 개혁과 개방 노선을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북한이 군사력을 강화하고 현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국내적으로 이것은 북한체제의 군사화와 연계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양상은 국제노동분업체계 내에서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려는 목적으로, 정치적인 억압과 통제를 정당화하는 개발독재의 일반적 특징이다.

그러나 군사 현대화의 외적 측면은 필연적으로 북한과 같은 권위주의적 국내정치구조의 기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1997년 금융통화위기 직전의 경제성장기에 아시아 NIES국가들과 동남아 국가들은 군대를 현대화하기 위해 첨단무기를 사들이면서 중동을 제치고 미국ㆍ러시아 등 무기수출 5대강국의 세계최대의 무기수출시장으로 떠올랐다. 군대 현대화는 원래 국가가 무정부적 주권체계 내에서 경제성장과 함께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정책노선이며, 특히 개발도상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정책이 된다.

만약 북한이 그러한 정책노선을 따르지 않고 시민적 요구를 우선시하는 경제성장정책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신흥개발국가들이 취해온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로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경로를 택하는 방향으로 북한을 유인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은 대북 경제원조를 확대할 때 예전과는 다른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련 당사국들–한국ㆍ일본ㆍ중국ㆍ러시아ㆍ미국–이 북한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평화적 국제질서를 창출해야 한다.

이것은 북한만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운 국제환경을 북한에 제공하기 위해 관련국들은 자신들 사이에 평화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동아시아지역 내에서의 자국의 안보를 강화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의 안보만을 보장하는 차원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어떠한 형태이든 한반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미군병력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강화하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요컨대 이제 일본에게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일본이 미래를 만들어나갈 능력이 있으며 북한과 동아시아 전체를 향해 일본 자체의 햇볕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후기: 햇볕정책의 미래

햇볕정책은 남북분단구조를 깨뜨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민족통일을 향한 공통점이 있는 두 정부가 공존을 이룩하는 데도 수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과연 이 정책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를 논하기는 시기상조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한국의 국제적 지위에 관하여 중대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한반도의 장래에 관계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현재 기대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당사자들의 정부든 비정부든 당장 행동할 것인지 아닌지 등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2000년 8월 21일,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의제에 오른 중요한 이슈 한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김정일 총비서는 통일이후에도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미군의 주둔을 지지하는 본인의 입장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군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 주둔해야만 합니다. 나는 김정일 비서에게 만약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철수하여 군사적 공백상태가 된다면,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들–일본, 중국, 러시아–의 패권다툼의 장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권력공백상태에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패권다툼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와 한반도 점령이었다는 사실을 19세기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제국주의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지정학적 관계 속에서 강대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김대통령의 발언에는 새겨들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다. 먼저 김대통령은 식민지배로 귀결되었던 두 차례의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지적하면서, 일본국가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사실상의 망명 혹은 옥중생활 시기에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지지했었다) 이 부분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둘째로, 김 대통령은 한반도의 미래를 패권적 지정학의 관점에서 정의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를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구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김 대통령의 관점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김대통령은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그러한 입장은 불확실성의 조건에서 정책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역사적 경로를 바꿀 수 있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정책을 만들어 나가려는 관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전지구적이고 초국경적인 연계가 급증하는 시대에 지정학적 결정론은 적실성을 점차 상실해 갈 것이다. 또한 필자는 김대통령의 견해가 일본의 보수적 지배엘리트들의 냉전적 심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심히 우려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극우보수주의의 정당화 근거를 김대통령의 입장에서 찾을 것이고, 결국 변화될 것은 없으며 일본은 굳이 현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 주도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필자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전쟁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현재의 세계가 환경위기에 더하여,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초국경적인 사회경제적 균열이 등장하고 있으며, 국가 간보다는 국가와 사회 내부의 폭력적 갈등이 점차 증가할 것으로 본다. 우리는 국가 중심적인 지정학적 결정론에서 벗어나 미래사회에 등장할 새로운 갈등의 원천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