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대토론회 무엇을 남겼나.- 한호석 이시우 2001/11/14 506

민족통일대토론회는 민족민주운동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한 호 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 례 >

(1) 안팎의 방해와 장애를 뛰어넘어 금강산으로 가는 길

(2) 53년만에 ‘우리 민족끼리’ 다시 만난 전민족적 정치회합

(3) 민족통일대토론회가 민족민주운동에게 남겨준 과제

(4) 남기고 싶은 이야기

(1) 안팎의 방해와 장애를 뛰어넘어 금강산으로 가는 길

예로부터 유명무명의 시인묵객들이 그 아름다움을 시와 화폭에 모두 담지 못하여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한탄했다는 절승의 경개 금강산. 그 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삼천리 강토의 등줄기를 타고 굽이쳐 흐르는 백두대간의 거대한 지맥이 동해 바닷가에 이르러 문득 하늘로 솟구치며 생겨난 민족의 명산이다.

기암괴석으로 눈부시게 장식된 1만2천 봉우리와 골짜기, 고샅과 시내마다 온갖 전설을 비단처럼 온몸에 감고 서 있는 아름드리 붉은 소나무(紅松)들. 그리고 낮이면 쪽빛 하늘을 머금고 밤이면 고요한 달빛을 담아두는 계곡의 맑은 물. 그 물은 솔수펑이를 휘감아 돌아 옥류가 되고 암벽을 타고 내리면 이내 폭포가 되었다.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압도하는 천하 제일의 절경이 거기에 펼쳐져 있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금강산은 2001년 6월 15일에 또 하나 아름다움을 더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이제 그 산을 민족화해의 명산이라고 불러야 하리라.

2001년 6월 15일 금강산에서 열렸던 ’6.15 공동선언 발표 1돐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는 1948년 4월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이후 가장 뜻깊고 성대하게 개최된 전민족적인 만남의 자리였다. 조국통일을 향한 민족의 염원이 그 토론회장으로 물결처럼 밀려와 일렁이고 있었다. 남측에서 450여 명, 북측에서 200여 명, 그리고 해외동포 20여 명이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 토론회장에 달려왔다. 남·북·해외의 240여 개 단체에서 참가한 670여 명의 동포들이 통일의 열망을 안고 금강산에 모여든 것이다. 1948년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는 남북의 56개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697명이 참가하였는데, 남측 참가자는 397명, 북측 참가자는 300명이었다.

이번에 나는 해외동포 대표단의 한 성원으로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하였다. 남측 참가자들은 ‘현대’가 금강산 관광을 위해 운항하고 있는 관광유람선 설봉호를 타고 동해의 뱃길을 북상하여 올라와 장전항에 내렸고, 우리 해외동포 대표단은 6월 12일 고려민항편으로 평양에 도착하였다. 해외동포 대표단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캐나다, 독일 여섯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조국통일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해외동포단체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평양에서 이틀을 지낸 뒤 14일 아침 일찍 고려호텔 앞에서 대형버스를 타고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 해외동포 대표단의 그날 일정은 원산에 있는 송도원 관광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숨을 돌린 다음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이어진 길은 백두대간을 타고 넘어가는 험한 길이다. 고도가 높아 고막이 멍멍해지는 산간지대를 넘으면서 우리는 많은 자동차굴을 지났고 신평 휴게소에도 들렀다.

우리가 탄 버스는 마침내 원산항에 들어섰다. 부둣가 바로 곁으로 난 길을 지날 때, 거기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이 보였다. 나에게는 아주 오래 전에 일제 식민지 시기의 문학작품에서 읽은 어렴풋한 기억밖에는 없는 송도원 해수욕장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이름 그대로 드넓은 솔밭 속에 다소곳이 안겨있었다. 싱그러운 솔향기가 바닷바람에 실려와 내 온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오랜 이국생활에 찌든 때를 씻어주었다. 넓은 솔밭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을 한참 걸어가 보니 한적한 해당화 꽃길이 나왔다. 활짝 트인 바닷가를 끼고 길게 이어진 그 꽃길 건너에서 새뽀얀 모래밭과 푸른 파도가 손짓하며 부르고 있었다. 저 멀리 원산만으로 들어오는 바닷길 위에는 외로운 섬들이 몇 개 떠있고, 바닷가의 푸른 산과 언덕들이 어우러진 송도원 해수욕장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바닷바람을 쐬며 사위를 둘러보다가 유난히 눈에 띄는 멋진 현대식 건물 두 채가 있어 관광호텔인가 하고 물어봤더니 하나는 소년단 야영소, 다른 하나는 노동자 휴양소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으며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영어와 일본어로 뒤덮인 관광호텔과 러브호텔, 술집과 바다회집과 오락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 남(한국)에서 해운대 바닷가 한 곳 뿐인가. 남(한국)에서 경치 좋은 곳은 돈과 향락이 질퍽한 불륜의 늪지대로 더럽혀지고 조직폭력배와 윤락조직망이 우글거리는 우범지대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곳 송도원 해수욕장에는 어린이와 노동자를 위한 휴양시설 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순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송도원과 해운대는 남(한국)사회와 북(조선)사회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원산항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남행길은 동해의 푸른 물결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이어지고 있었다. 버스 차창 밖으로는 정겨운 바닷가 마을이 이따금 나타났다가 스쳐가곤 하였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큰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협동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였다. 우리는 바다와 호수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하고 있는 시중호 유원지에서 잠시 쉬었다. 때묻지 않은 정경이었다.

그런데 원산항을 떠나올 때부터 우리 해외동포들이 탄 버스에는 갓 스무 살이 된 여학생 두 사람과 남학생 한 사람이 올라탔다. 해외동포들은 나를 제외하면 나이가 많은 분들이어서 버스간에는 눅눅한 적막감마저 감돌고 있었는데, 그 대학생들이 함께 타자 어느새 버스간은 스무 살 청춘의 밝은 웃음과 목소리, 그리고 흥겨운 노래로 아연 활기를 띠었다. 그 두 여학생은 차내 방송을 통하여 노래도 불러주고 이야기도 건네며 눅눅한 분위기를 아주 능숙한 솜씨로 살려냈다. 그들의 활기 차고 품위 있는 행동과 노래 실력에 대해서 솔직히 나는 감탄하고 있었다. 시중호 유원지에서 잠시 쉬는 짬에 나는 그 두 여학생 가운데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 많은 노래를 악보도 없이 잘 부르는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합니다. 평소에 노래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까?”

문득 던진 물음에 그 여학생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장군님께서 우리 대학생들에게 정치생활을 잘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래와 정치생활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통일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가르침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치 준비된 답변처럼 나에게 던져준 북녘의 그 여대생은 김책공업대학에서 음향체계를 전공하는 리혜옥이었다.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리혜옥의 짧은 답변에 대해서 한참 동안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이어서 열린 축하공연에서 북(조선)의 청년대학생들이 발휘한 노래실력이나 이튿날 금강산 관광을 마치고 금강원 냇가에서 열린 작별공연에서 북(조선)의 봉사성원들(이번 행사에 도우미로 참가한 청년남녀들)이 발휘한 노래실력을 보면서 나는 리혜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장전항을 멀리 굽어보는가 했더니 어느덧 금강산 어귀로 접어들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머리에 이고 무리를 이루며 어우러져 춤을 추는 금강의 붉은 소나무들이 들어찬 천곡만봉의 절경 속으로 우리는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금강산 려관에서 북측 참가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6월 15일이었다. 아침 하늘은 맑았고 아침 공기는 더없이 상쾌하였다. 민족통일대토론회는 그날 아침 금강산 려관 앞마당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북측 참가자들과 우리 해외동포 참가자들은 남측 참가자들이 오는 때에 맞춰 그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려관 앞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남측 참가자들이 나타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남측 참가자들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인데, 남측 참가자들이 금강산으로 오는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측에서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하는 주체를 하나로 꾸리는 문제를 놓고 일부 편협한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남측의 민화협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는가 하면, 참가자 명단을 북측에 보낸 뒤에 설봉호를 타려고 항구에 나간 참가자들 가운데 6명을 남(한국) 정부당국이 끝내 가로막아 오지 못한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을 선별하여 참가를 가로막는 비열한 행위에 대해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북측에서는 남측 참가자들 가운데 반공·반북적 성향을 가진 단체의 성원 6명을 선별하여 상륙허가를 내주지 않고 설봉호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응하였다. 민족통일대토론회가 시작되어야 하는 그 시각에 남(한국) 정부당국이 저지른 반화해적 행위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장전항에 도착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범민련 남측본부의 간부들은 북측 당국자들을 만나 비록 남(한국) 정부당국자들이 반화해적인 태도로 방해하였지만 북측에서 관대한 태도를 보여주고 남측 참가자 6명의 상륙을 허가하여 민족통일대토론회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북측 당국에서는 결국 그들에게 상륙허가를 내주어 민족통일대토론회 앞에 드리워졌던 난관이 걷히게 되었다.

남측 참가단이 토론회장으로 들어설 때 길가 양쪽에 줄지어 서있던 북측 참가단 성원들은 꽃다발과 박수로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였다. 남측 참가단 성원들과 북측 참가단 성원들은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인사하였다. 얼싸안고 탄성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포애의 정으로 무르익기 시작한 토론회장에는 조국통일, 민족자주, 화해협력이라는 구호가 적힌 가로글막 세 개가 각각 커다란 풍선에 매달려 초여름의 하늘가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온갖 방해와 장애를 뚫고 어렵사리 마련한 역사적인 회합이었기에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6월의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2) 53년만에 ‘우리 민족끼리’ 다시 만난 전민족적 정치회합

6.15 공동선언 발표 이전에는 막연하게 생각하였던 민족통일대토론회가 실제로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에서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았는가? 감동과 흥분을 느끼었을 뿐인가. 그렇지 않다. 남·북·해외의 사회단체 대표들은 한 자리에서 만남으로써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직접 체험하였다.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그 역사의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첫째, 민족통일대토론회의 정치적 의의다. 그 토론회는 2000년 6월의 평양회담과 6.15 공동선언에 의해서 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평양회담과 6.15 공동선언이 없었다면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토론회는 6.15 공동선언이 전민족적 차원에서 커다란 실천력과 생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입증하였다. 그 토론회는 앞으로 한(조선)민족이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계속하여 추진하게 될 일련의 전민족적 정치회합의 문을 열고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의의를 가진다.

둘째, 민족통일대토론회의 민족사적 의의다. 그 토론회는 1948년 4월의 연석회의가 후대에게 남겨놓은 역사적 과업을 현 정세의 요구에 맞게 계승하였다는 데서 민족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 토론회가 계승한 역사적 과업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민족끼리’ 만나서 능히 단합할 수 있고 또 마땅히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 만나서 힘을 합해야 우리 민족의 문제, 곧 제국주의세력과 친미예속세력을 타파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8년의 연석회의에서 발표한 문서 ‘전 조선동포에게 격함’은 “우리 조국강토에서 외국군대를 철거하고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우리 민족끼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라!”고 호소하였으며, 이번에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발표한 ‘공동보도문’은 “민족통일대토론회 참가자들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가는 것은 자주통일의 근본담보로”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6.15 공동선언의 제1항을 전민족적인 차원에서 다시 천명한 것이다.

셋째,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한(조선)민족에게 제기되어 있는 민족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토론한 민족문제란 무엇인가? 그 토론회장에 내걸렸던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토론회에서 다루었던 민족문제의 본질은 민족자주, 조국통일, 화해협력이라는 세 가지 구호로 집약된다. 이 세 가지 구호의 대척점에는 제국주의, 분단체제, 민족분열주의라는 적대적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민족자주라는 구호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자주의 과업으로 제시되었다면, 화해협력이라는 구호는 민족분열주의를 반대하는 민족화해의 과업으로, 조국통일이라는 구호는 민족자주와 민족화해에 의하여, 그것을 통하여 실현되는 역사적 과업으로 각각 제시되었다. 그 토론회장에 내걸린 세 가지 구호는 6.15 공동선언의 내용을 집약한 구호였다.

한 마디로 말하여,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우리 민족끼리 우리 민족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었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하여 생겨나는 민족의 힘을 나라 안팎에 과시한 역사적인 회합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민족통일대토론회가 남과 북의 사회단체들이 만난 ‘토론회’였다고 간단하게 평가하고 있는데, 그러한 평가는 피상적인 관찰에서 나온 오류이다. 그것은 비록 토론회의 형식을 빌려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었다.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까닭은, 그 회합이 3대 지역의 사회정치세력이 만난 전민족적인 회합이었으며, 동시에 3대 사회정치세력이 만난 정치회합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3대 지역의 사회정치세력이 만난 전민족적인 회합이라는 말은 남·북·해외 3개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사회정치세력이 만났다는 뜻이다. 1948년의 연석회의가 남과 북의 사회정치세력이 만나는 정치회합이었던 것에 비하여 2001년의 민족통일대토론회는 남·북·해외 3개 지역의 사회정치세력이 만나는 전민족적 정치회합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53년 동안 한(조선)민족의 내부구성이 더 복잡하게 전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 해외 여러 지역에는 약 500만 명이 더 되는 해외동포사회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해외동포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해외의 여러 사회단체들을 대표하는 20명이 이번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하였다.

둘째, 3대 사회정치세력이 만난 정치회합이라는 말은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과 민족주의운동세력이 만났다는 뜻이다. 분단시대 초기였던 1948년의 연석회의가 사회주의혁명세력과 민족주의운동세력의 정치회합이었던 것에 비하여, 분단시대 말기인 2001년의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사회주의혁명세력, 민족민주운동세력, 민족주의운동세력의 3자 정치회합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948년부터 지금까지 53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한(조선)민족 내부의 사상·이념적 지형이 좀더 복잡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 사상·이념적 지형은 주체사상, 민족민주운동이념, 민족주의이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제국주의, 친미사대주의, 부르주아사상이 적대적 개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한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은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그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조선로동당의 사회정치세력이며,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자주·민주·통일의 강령으로 표현되는 민족민주운동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사회정치세력이다. 그리고 남(한국)의 민족주의운동세력은 민족주의를 신봉하거나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회정치세력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민족민주운동세력과 민족주의운동세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특히 남(한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좌파세력’은 이 두 세력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또는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민족주의운동세력이라고 통틀어 부르고 있는 데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 두 세력의 차이는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 차이를 아는 것은 민족민주운동세력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은 한(조선)민족의 역사로부터 자기에게 부여된 지위, 역할, 임무가 민족주의운동세력의 지위, 역할, 임무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정세변화에 따라 동요하기 쉬운 민족주의운동세력을 견인할 수 있으며, 제국주의세력과 친미예속세력을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자신을 장성시킬 수 있으며, 그 불패의 역량으로 민족주의운동세력과 연대를 강화할 수 있다. 몇 가지 차이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남(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양대 계급운동세력인 노동계급운동과 농민계급운동의 역량을 중심으로 하여 자주·민주·통일의 강령을 구현하려는 정당과 사회단체가 망라된 사회정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비해 민족주의운동세력은 소자산계급적 성향의 사회단체, 종교단체, 시민운동단체의 역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민족주의운동세력은 단일한 지휘체계, 단결된 조직체계에 의하여 움직이는 세력이 아니다.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민족주의운동세력의 갈래를 크게 나누면 대략 좌파와 우파로 구분된다. 민족주의운동의 좌파는 남북 사이의 정치적 화해를 추구하는 세력이고 그 우파는 남북 사이의 비정치적 교류·협력을 추구하는 세력이다. 민족주의운동세력의 내부가 이처럼 복잡하게 분산되어 있는 주된 원인은 민족주의가 단일한 지휘체계, 단결된 조직체계를 꺼려하는 소자산계급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계급, 농민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각각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데 반하여, 소자산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매우 다양하고 분산적이라는 사정과 관련된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면, 자기의 계급적 성향과 그 한계 때문에 식민지 민중(노동계급과 농민계급)의 계급적 요구를 경시하거나 외면했던 민족주의운동세력은 점차 쇠퇴하였고 그 가운데 일부세력은 나중에 민족주의운동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반제민족해방운동으로 전환·포섭되었다.

둘째,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과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은 서로 이념적 친화성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하여, 남(한국)의 민족주의운동세력과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은 그러한 이념적 친화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이념적 친화성에 대해서 반통일세력은 ‘친북’이니 ‘이적’이니 떠들며 마치 난리가 터진 것처럼 소동을 피우고 있다. 민족민주운동세력과 사회주의혁명세력이 사상이 서로 다른 데도 이념적 친화성을 지니게 되는 원인은 그 두 세력이 제국주의세력과 친미예속세력을 반대·배격하는 민족적 단결에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념적 친화성은 그 두 세력이 민족대단결사상을 사상적 공통성으로 지니고 있다는 데서 확인된다. 남(한국)의 민족주의운동세력도 민족적 단결에 대해서 때로 말하고 있지만,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체가 민족적 단결에 대한 이론적 체계와 내용이 빈약할 뿐 아니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운동은 민족감정에 호소하거나 민족감정에 좌우되는 경향이 지배적이므로 민족주의운동세력도 민족민주운동세력과 마찬가지로 민족대단결사상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민족대단결사상은 민족자주의 과업과 민족화해의 과업을 모두 포괄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한(조선)민족의 민족자주와 민족화해의 과업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대단결사상에 의해서 완수될 것이다. 민족대단결사상은 민족주의도 포괄하고 있다. 민족대단결사상은 민족반역세력을 제외한 모든 민족성원의 이익과 요구를 포괄하는 폭넓은 사상이며, 민족성원이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의 사상이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이념적 친화성이 민족대단결사상의 공통성에 있으므로 그것에 대해서 이른바 ‘친북’이니 ‘이적’이니 하는 공격과 배척을 들이대는 세력이야말로 민족분열주의세력으로 낙인찍혀야 한다.

셋째,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친미예속정권을 자주적 민주정권으로 교체하기 위한 전략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데 비해, 민족주의운동세력에게는 그러한 전략목표가 없다. 민족주의운동세력에게는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의 전략목표가 없으므로 친미예속정권에 대한 투쟁력이 크게 떨어지고 정세가 불리하면 그 정권에 대한 태도가 타협이나 투항으로 흐르기 쉽다.

넷째, 민족민주운동세력과 민족주의운동세력은 다같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있지만, 전자는 민중의 계급적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전략목표를 제시하고 제국주의의 지배와 수탈을 반대하는 민족자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데 비해 후자는 몰계급적인 반외세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민족민주운동세력과 민족주의운동세력 사이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차이가 가로놓여 있지만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을 만나기 위해 같은 배를 타고 북녘땅을 찾았고 민족자주, 화해협력, 조국통일의 기치 아래 마침내 3자 화해의 손을 잡았다.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이 3대 세력이 한 자리에 모임으로써 성사된 민족화해의 정치회합이었다.

(3) 민족통일대토론회가 민족민주운동에게 남겨준 과제

1948년의 연석회의가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거의 모두 참가한 정치회합이었다면, 2001년의 민족통일대토론회는 민주노동당만 자기의 대표를 참가시킨 가운데 주로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정치회합이었다. 그러므로 연석회의에서 토론한 내용, 채택한 문서와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6.15 공동선언과 민족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토론한 내용, 채택한 문서의 수준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석회의에서는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전 조선동포에게 격함,’ ‘사회주의 쏘비에트연방공화국 정부와 북미합중국 정부에 보내는 전 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요청서’가 채택·발표되었고,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는 ’6.15 공동선언 발표 1돌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 공동보도문’과 ‘일본당국의 역사왜곡책동을 규탄하는 공동성명’이 채택·발표되었다. 문서를 채택·발표한 형식이 결의문이 아니라 보도문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연석회의와 민족통일대토론회의 수준 차이가 엿보인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토론한 내용과 채택한 문서는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총적 지향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반제투쟁노선과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는 조국통일방안이 뚜렷이 제시되지 못했다. 전투적인 반제노선을 천명한 것이 아니라 외세는 한(조선)민족의 통일노력을 방해하지 말라는 정도의 온건한 내용을 발표하였을 뿐 아니라, 그 외세가 아메리카 제국주의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지적하기도 힘들었다. 따라서 한(조선)민족이 수행해야 하는 최대의 당면과제인 주한미군을 철퇴하는 문제는 언급하지 못하였다. 또한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는 연방제 통일의 정당성과 실현방도에 관하여서도 언급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조국통일, 또는 한(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이라는 포괄적 개념이 제시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정은 민족통일대토론회가 연석회의와 비교하여 정치적 수준의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연석회의에서는 미·소 양군이 동시에 철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민족분열주의세력의 단독선거 강행책동 및 단독정부 수립책동을 반대하고 전조선의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을 합의·결정했으며 그 결정을 당면과제로 내세우고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여, 제국주의세력과 친미예속세력에 대해서 연석회의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결의한 정치회합으로 되었던 것에 비해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상대적으로 덜 투쟁적인 정치회합이었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주한미군 철퇴문제와 연방제 통일문제가 언급되지 못한 까닭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 미국 정부와 남(한국) 정부당국이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을 반대하고 있는 조건에서 만일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을 경우, 미국 정부와 남(한국) 정부당국은 앞으로 민족통일대토론회를 비롯한 남북 사회단체들의 모든 정치회합을 봉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민족통일대토론회를 이번에 한 차례로 끝낸다면 모르지만,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이나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이 민족주의운동세력과 함께 앞으로 3자 정치회합의 수준과 내용을 높여가면서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려면 처음부터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남측에서 참가한 사회단체 대표들 가운데 민족주의운동세력에 소속된 성원들 거의 모두는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이나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그러한 현실조건을 무시하고 민족주의운동세력에게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을 합의하자고 요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요인을 생각할 때, 앞으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민족통일대토론회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가면서 그 수준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민족통일대토론회가 민족민주운동에게 남겨준 중대한 과제는 민족자주의 위업과 연방제 통일의 위업을 민족주의운동세력과 합의하고 그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을 결의하는 높은 수준의 정치회합으로 차츰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민족민주운동은 이번에 민족통일대토론회의 경험을 통하여 그러한 과제와 발전전망을 지니게 되었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한 대표들은 옷차림만큼이나 각양각색이었다. 태어나 살고 있는 지역도 서로 다르고, 생활방식과 생활경험, 그리고 사상과 정견도 서로 다르고, 계급적 처지도 서로 달랐다. 언뜻 훑어보면 공통성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역시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의 일치성과 공동의 이해관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있는 민족성원이라는 일치성 위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분열주의세력의 분열고착화책동, 이질화책동에 의하여 오래 동안 잊고 지내왔던 민족의 동질성을 고스란히 되찾았다.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이라는 주제로 일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민족통일대토론회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이 민족관을 정립하고 민족자주사상으로 무장하는 과제를 제기하였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정립해야 할 민족관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은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발전된 가장 공고한 사회적 집단이며, 근대국가를 조직·건설하는 역사발전의 주체라는 두 가지 명제로 정리될 수 있다.

민족관의 첫째 명제에 따르면, 민족이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발전되면서 공고한 사회적 집단으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것은 혈통문제와 언어문제라는 사실이다. 혈통과 언어를 일체화하고 단일화하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의 혈통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입증되는 종족 혈통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혈통이 서로 다른 여러 종족이 사회·역사적 과정에서 융합되어 형성된 개념이다.

민족관의 둘째 명제에 따르면,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들어서는 전환기에 동아시아 지역에 등장했던 근대국가들은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근대국가는 중화민족에 의하여, 일본국은 야마도민족에 의하여, 몽골인민공화국은 몽골민족에 의하여,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은 베트남민족에 의하여 각각 건설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적 임무는 전근대적 봉건국가를 근대국가로 교체하는 것과 더불어 민족이라는 공고한 사회적 집단의 힘으로 제국주의 세력이 강요한 식민지체제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임무는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임무와 일치되었다. 물론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예외적으로 동아시아 여러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하는 제국주의화의 길로 나아갔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에 비하여 유럽지역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적 임무는 중세기의 낡은 봉건지배계급을 타도하는 데에 집중되었으며, 따라서 그 지역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임무는 계급모순을 극복하는 사회혁명의 과제와 일치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이 구심력이 되어 근대국가를 건설했던 것에 비하여, 유럽에서는 계급이라는 사회적 집단이 구심력이 되어 근대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유럽의 계급중심적 근대국가 건설경험과 동아시아의 민족중심적 근대국가 건설경험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차이는 사회관, 국가관, 계급관의 차이를 수반한다.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한 경험과 건설의 원리는 그렇게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근대국가를 건설했던 유럽의 역사적 경험에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에서 형성된 ‘민족’이라는 사회·역사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인에게 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민족이라는 말 자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유럽인의 지적 능력에 의하여 구성된 계급과 국가에 관한 모든 담론은, 그것이 부르주아적 담론이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담론이건 간에 모두 계급중심적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유럽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계급과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론을 남(한국)의 사회변혁이론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좌파세력’의 시도는 몰역사적인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동아시아에서 중화민족, 야마도민족, 몽골민족, 베트남민족은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였으나, 유독 한(조선)민족은 근대국가 건설의 임무를 아직 완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이 아직 대만을 통합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들도 근대국가 건설의 임무를 아직 완수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여 대만은 주권국가가 아니라 아직 통합되지 못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변방으로 분류되므로 중화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완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업의 견지에서 보면 한(조선)민족의 조국통일과업은 곧 민족분열을 극복한 근대국가, 곧 범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과업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한(조선)민족이 범민족통일국가를 아직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인 원인은 제국주의세력에 의해서 형성되고 그 세력에 의해서 유지·관리되고 있는 분단체제가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제국주의세력은 한(조선)반도를 분할하고 분단체제를 세움으로써 단일민족을 갈라놓았으며, 통일된 근대국가를 건설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지금까지 민족분열책동을 지속하고 있다.

한(조선)민족은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합되지 못한 채 여러 종족으로 분산되어 존재했던 봉건국가의 전근대성을 극복하여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범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조선)민족은 원래 단일민족으로 살아오다가 제국주의세력의 식민지체제와 그 뒤를 이어 생겨난 제국주의세력의 분단체제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분열된 민족을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합하는 특수한 방식으로 범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한(조선)민족이 통일된 근대국가를 건설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분열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은 이미 지적하였다. 문제는 민족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 분단체제를 유지·관리하고 있는 제국주의세력의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민족주의운동세력, 사회주의혁명세력과 손잡고 제국주의세력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민족민주운동세력의 민족관은 제국주의세력을 반대·배격하는 민족자주사상을 자기의 사상적 기초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통일대토론회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이 민족관을 정립하고 민족자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둘째, 민족통일대토론회는 민족민주운동세력에게 친미예속세력을 타파하는 과제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한(조선)민족의 현실에서 제국주의세력에게 종속적으로 결탁되어 있는 반역세력은 친미예속세력이며, 바로 그 친미예속세력이 민족자주와 민족화해를 가로막고 있는 민족분열주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친미예속세력은 곧 반통일세력이다. 1948년의 연석회의에서 발표된 문서 ‘전 조선동포에게 격함’은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의 국토를 양단하며 우리 조국을 또다시 새로운 식민지 예속물로 되게 하는 것을 도와주는 놈들을 민족 천추의 죄인으로 저주할 것이며, 자손만대의 반역자로 낙인할 것”이라고 단죄한 바 있는 데, 오늘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그 내용 그대로 친미예속세력을 ‘천추의 죄인’으로 ‘자손만대의 반역자’로 단죄하고 있다.

1948년의 연석회의에서 채택된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에서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의 음흉한 배족망국적 시도를 반대”한다고 선언했던 내용은 53년이 지난 오늘도 그대로 유효하다. 친미예속세력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민족분열을 극복하고 민족화해의 위업을 실현할 수 없다. 민족화해가 실현되지 못하면 6.15 공동성명에 제시된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성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민족화해가 실현되면 그것이 곧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성을 실현하는 것이며 6.15 공동성명에서 천명된 통일방안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6.15 공동성명에서 제시된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성을 실현하려면 친미예속세력을 타파해야 한다.

친미예속세력을 타파하기 위해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것이다. 지금처럼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는 조건이라면 민족통일대토론회와 같은 전민족적 단합의 계기가 앞으로 계속 마련된다고 해도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주한미군 철퇴와 연방제 통일에 관하여 자유롭게 자기의 의사를 밝히고 논의하기 힘들 것이며 정세변화에 따라 동요하기 쉬운 민족주의운동세력을 자주통일의 길로 견인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어떻게 하여야 민족통일대토론회를 높은 수준의 전민족적 정치회합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과제이며, 민족민주운동의 장래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과제이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민족통일대토론회 과정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현상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한 남측 인원은 약 450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표는 200명이었다. 대표와 참관인을 가르지 않고 450여 명 모두를 정치적 견해를 기준으로 하여 구분하면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민족민주운동단체에 소속된 성원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에 소속된 성원들이다. 그 비율을 살펴보면, 민족민주운동단체 성원은 약 25퍼센트였고,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에 속한 성원은 약 70퍼센트였다. 그 밖에 반공·반북 성향의 단체에 속한 성원은 약 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1948년의 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대표들의 비율을 살펴보면,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약 58퍼센트, 그리고 민족주의운동세력이 약 42퍼센트였다. 1948년의 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다수집단이었던 것에 비하여, 2001년의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한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양적으로 소수집단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소수집단인 민족민주운동세력이 다수집단인 민족주의운동세력을 앞으로 어떻게 상대해야 하며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과 남(한국)의 민족주의운동세력을 만나는 자리, 바로 그곳이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서야 할 자리이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그 만남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말은 중립적 회색공간에 안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두 세력을 민족적 단결의 길에서 서로 연결시키는 자기의 고유한 정치사업을 전개해야 한다는 뜻이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서야 할 그 만남의 자리는 민족대단결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고난의 자리이며, 나라 안팎에서 준동하고 있는 민족분열주의세력의 온갖 방해책동을 제거하는 투쟁의 자리이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그 만남의 자리에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울 때, 북(조선)의 사회주의혁명세력과 연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한국)의 민족주의운동세력을 자주·민주·통일의 길로 이끌어 가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1948년의 연석회의에서 발표된 ‘결정서’에서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조선인민이 자기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던 내용은 53년이 지난 오늘도 그대로 유효하다. 지금 민족민주운동세력은 통일정세를 관망하거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제국주의세력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을 조직·추동하고 친미예속세력을 타격·제거하는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피아의 역량관계를 잘 타산하고 그에 기초하여 영민한 전략과 전술을 내놓고 대담한 작전을 펼쳐야 한다. 지금처럼 통일정세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시기야말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남김 없이 바쳐 전선운동의 투쟁력과 조직력을 비상히 강화해야 할 때다.

(4) 남기고 싶은 이야기

만일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어디서 개최될 수 있었을 까? 남(한국)의 자본가계급이 개발해놓은 관광자원이 조국통일위업을 위하여 그처럼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특색 있게 조국통일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지적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났다.

민족통일대토론회 참가자들은 첫날 오후에 평양모란봉교예단이 남북 평양회담 1주년을 경축하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교예공연을 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고, 이튿날 오전에는 금강산 구룡폭포까지 오르내리면서 개별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구룡폭포를 구경하고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어떤 참가자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북측 참가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남측 참가자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다.

“남녘 동포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외래어와 외국어를 많이 섞어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민족의 주체성을 살려나가는 데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거의 없는 단체에서 참가한 사람으로 보이는 남측 참가자는 그 물음에 대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서울에는 외국인이 수십만 명이나 살고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은 한 해에 수백만 명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외래어와 외국어가 일상언어가 되었습니다. 세계를 향해서 열린 현대 사회의 특징이지요.”

내 등뒤에서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두 사람이 어떤 얼굴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그 산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남과 북의 동포들이 어떻게 그 침묵의 무게를 덜어내고 민족의 현실을 서로 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를 내내 생각했다.

민족통일대토론회는 산행을 끝으로 1박2일의 짧은 일정을 마감했다. 헤어져야 할 시각이 되었다. 참가자들은 금강산의 ‘김정숙 노동자 휴양소’ 앞마당에서 작별인사를 나누는 간단한 폐회식을 진행하였다. 남·북·해외 참가자들은 서로 뒤섞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마지막 시간을 꿈처럼 만났다가 꿈처럼 헤어진 이별의 시간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통일된 조국에서 함께 살아가는 희망을 서로 나누는 약속의 시간이었다.

남측 참가자들이 떠난 뒤에 해외동포 참가자들과 북측 참가자들은 해금강으로 발길을 돌렸다. 파도의 물거품 속에 발목을 잠근 채, 해송 몇 그루를 벗삼아 수수만년 풍화작용을 견디며 서 있는 바위섬들은 신비한 조형물로 변모하여 해금강의 풍광을 아름다움의 극치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남녘땅 화진포 해수욕장이 손에 잡힐 듯 내다보였다. 우리가 해금강의 경치에 취해있을 때 마침 남측 참가자들을 태운 설봉호가 저 멀리 수평선으로 떠가고 있었다. 해금강의 아름다운 경치 위로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만났던 남측과 북측 참가자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면서 나는 민족민주운동이 앞으로 헤쳐가야 할 험난한 항해의 앞길을 생각했다. 그리고 승리의 항로로 이어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2001년 6월 25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