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토론회: 김대중정부의 경제구조조정 이시우 2002/08/31 996

[서울대 민교협 토론회: 김대중정부의 경제구조조정] 2000. 11. 20(월). 서울대 문화관 중강당

구조조정의 경제철학 비판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

1. 머리말
IMF신탁통치가 한국사회에 고유한 후진성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개조론과 사대사상(=미국숭배론)이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모든 것에서 미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미국식 약육강식 자본주의와 카지노 자본주의가 한국경제의 뼈대를 무너뜨리면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대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기업들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던 전통적인 금융구조를 증권시장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영미식 금융구조로 혁명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의 자금난과 은행의 부실화가 더욱 심화했고, 증권시장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모한 한탕주의가 국민경제와 국민정서를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멍들게 했다. 또한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비용 절약을 강조하는 바람에 대규모의 해고가 발생하고 정규직 노동자가 임시직 계약직으로 전환했지만, 공동체적 단결과 연대성을 통해 이룩되던 노동생산성 향상은 사라지고 노동자들 사이의 상호반목과 불신 및 노사분규가 증가하고 있다. 대외경제 면에서는 개방과 자유화가 외국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있지만, 언제 단기성 투기자본의 침략을 받아 주가폭락과 외환위기를 겪게 될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IMF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구조조정정책들이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를 고찰하면서 그 철학들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2. 1997년 12월의 공황: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
미국숭배자들은 미국경제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공황을 경험했으며 앞으로도 또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든지 은폐하고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큰 공황이었고, 1987년 10월 19일(Black Monday라고 부름) 뉴욕증권시장의 주가폭락은 1929년 10월의 주식시장 공황을 훨씬 능가했다. 물론 한국경제에는 극복해야 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곤란을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나, 연줄(cronyism) 또는 연고 때문이라고 분석해 버리면 한국경제의 뿌리를 개혁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1997년 12월의 공황을 자본주의 경제 일반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자본주의 일반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근본적인 개혁은 현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는 스스로 경기순환을 만들면서 진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공황, 불황, 회복, 호황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성장 발전하고 있다. 동종 산업 안이나 이종 산업 사이에서 자본들의 경쟁은 생산과 소비와 투자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하여 어느 시점에서 경제 전체를 거대한 공황(crash)으로 몰아 넣는다. 더욱이 산업자본들의 경쟁이 은행, 제2금융권, 증권시장, 국제금융시장에서 조달한 신용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에, 호황기의 규모 확대는 더욱 거대하게 되어 공황기의 규모 축소를 더욱 심각하게 하며, 산업자본의 도산은 금융산업의 도산을 야기하여 경제 전체를 마비시키게 된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경쟁력이 있는 기업들만 살아 남아 시장을 독점하거나, 새로운 생산방법, 시장, 제품과 원료, 노동조직을 찾아내는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경제는 다시 회복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경제는 주기적으로 공황, 불황, 회복, 호황이라는 국면을 거치면서 발달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1997년 12월에 폭발한 한국의 공황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서는 동남아와 중국의 기업들에 밀리고, 기술집약적 산업에서는 일본 미국 독일의 기업에 밀리던 한국의 기업들(특히 대기업들)이 1990년 초부터 대규모 설비투자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은행, 제2금융권, 증권시장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는데, 외국은행들은 한국경제의 기적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해 한국의 은행과 제2금융권에 거대한 자금을 대출했고 외국투자자들도 한국의 증권시장에 투자했다.
그런데 세계시장의 가격과 판매량이 기업들의 예상보다 크게 낮았기 때문에, 기업들은 과잉투자, 과잉설비, 과잉채무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1996년 하반기부터 전경련에서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 때문에 경제위기가 오고 있다고 외치기 시작했고, 1997년 초부터 한보철강, 삼미특수강,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해태, 뉴코아 등등 대기업들이 퇴출(매각, 합병, 법정관리, 화의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의 퇴출은 은행과 제2금융권에게 부실채권을 누적시키고 손실을 확대했기 때문에, 금융기관은 도산 위험성에 직면하여 새로운 신용을 제공하지 않고 오래된 신용을 회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기업의 퇴출을 더욱 증가시키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은행들이 대출 기한의 연장을 거부하고 대출의 상환을 요구하며, 외국투자자들이 증권시장에서 증권을 팔아 외화를 본국으로 송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서 기업, 은행, 제2금융권이 외채상환만기일에 외채를 갚을 수 없게 되자,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IMF에 특별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12월 3일 받게 되었다.
이처럼 간단하게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에 의해 1997년 12월의 한국 공황의 발생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정부가 경제정책의 실시, 공기업의 소유와 출자, 각종의 인허가, 경제활동의 감독을 통해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공황을 야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정부의 개입방식에 의해 악화되어 공황을 앞당기거나 심화시킬 수도 있고, 또한 그 문제점들이 공황이라는 시장메카니즘에 의해 스스로 해결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1997년 말의 공황을 낳게 되는 제도적 환경으로서 정부가 잘못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정부가 산업정책을 포기함으로써 대기업들의 과잉중복투자를 조정하지 못했다는 점, 금융자율화와 개방화를 실시하면서 금융거래(특히 대외단기자본거래)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는 점,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을 과시하려고 환율을 낮은 수준에 유지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 정부가 대마불사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줌으로써 대기업들은 과잉투자에 매진하고 금융기관들은 과잉대출을 꺼리지 않았다는 점.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환경을 공황의 원인이라고 파악하여, 정부가 산업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또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않았다면, 공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황이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모든 선진자본주의 경제에서도 발생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의 가치증식을 최대한 추구하는 과정에서 숙명적으로 공황에 부닥친다면, 구조조정의 진정한 방향은 경제의 운영 목표를 자본가의 이윤 추구에 둘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욕구 충족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수익성보다는 공공성을 강조하는 부분이 경제에서 점점 더 커져야 한다. 즉 수익성에 얽매어 호황기에는 무모한 과잉투자를 하고 불황기에는 대규모 해고를 단행하는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대외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수출확대를 위한 국제경쟁력 강화 정책의 약화를 의미한다. 모든 나라들이 수출확대를 위해 임금억압을 시도한다면 세계시장은 축소할 수밖에 없고, 어느 나라도 수출확대를 통해 고용과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3. IMF의 특별 구제금융: 벼랑외교의 필요성
1997년 12월의 공황은 외환 부족과 환율 폭등으로 금융기관과 기업이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는 형태를 띠면서 폭발했다. 만약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금융기관과 기업에게 스스로 외채상환문제를 해결하라고 내버려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금융기관과 기업은 당연히 외채지불불능(default)을 선언하게 되었을 것이고, 채권외국은행 중 몇몇은 큰 손실을 입고 고객들의 신뢰를 잃어 도산했을지도 모르고, 국제금융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특히 대출시장은 각국의 신용등급을 다시 매기느라고 크게 축소했을 것이다. 물론 한국계 금융기관이나 기업은 당분간 국제금융시장에서 차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19세기의 국제금본위제에서는 시장의 자동조정기능에 대한 믿음과 자유방임사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채무자가 파산하면 국제간의 대차관계는 청산되었다. 따라서 외국은행이나 기업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채무자가 일부러 파산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한국정부나 IMF는 시장에 맡겨 두지 않고 금융기관과 기업의 외채상환에 개입했는데,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금융기관과 기업의 모든 외채 원리금 상환을 가장 불리한 조건으로 떠맡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정부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IMF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고, 그 뒤 외국은행의 단기차관을 장기로 전환시키는 교섭과정에서 정부가 원리금 상환을 보증하고 국제금리보다 매우 큰 금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IMF와 외국은행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정부는 최대의 무지와 무능을 드러냈고, 국민들은 실업과 생활수준 저하 등 큰 고통을 입었다.
IMF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국의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한국정부에게 외채의 원리금 상환을 책임지라고 강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부는 금융기관과 기업이 외채지불불능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을 이용하여 원리금의 탕감이나 상환기일의 연장을 협상할 수 있었다. (북한의 벼랑외교를 생각해 보라.)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외채위기를 예로 들어 보자. 외채지불불능을 선언하면 외채의 원리금이 곧바로 외국은행의 손익계산서에 손실로 계상되어 그 은행은 몰락하기 때문에, 채권외국은행은 외채지불불능을 선언하지 않도록 애원한다. 원리금의 일부를 탕감하거나 원리금의 상환기간을 연장하거나 이자율을 인하하거나 추가적인 자금을 지원하는 등등. 이것을 외채의 조정(rescheduling)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국의 은행들이 부실대기업을 퇴출시키지 않은 채 부채를 탕감하고 대출을 계속하면서 워크아우트를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상 외국은행들도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해 과잉대출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한국경제의 기적이 계속되리라고 예상하여 거대한 금액을 대출했기 때문에, 이 잘못된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고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IMF, IBRD뿐 아니라 국제신용조사기관인 스탠다드 앤 푸어(S & P)도 은행을 포함한 외국투자자들에게 옳지 않은 정보를 제공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런데 IMF와 미국정부가 외국은행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모든 책임을 한국정부에 지운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997년 12월의 공황은 한국의 금융기관이나 대기업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은행들의 도적적 해이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은행들은 IMF와 미국정부가 대신 받아 주리라고 믿고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에게 무리한 대규모 대출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정부는 IMF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 들였는가? 첫째는 IMF나 미국정부를 상대로 어떻게 감히 협상할 수 있는가, IMF나 미국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면 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라는 사대사상 때문이었다. 이 사대사상은 정부관료 정치인 지식인 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도 퍼져 있었는데, 일부는 친미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일부는 무지 때문에 그러했다. 둘째로 1997년 12월 3일은 대통령 선거의 절정기에 있었기 때문에 여당의 후보나 야당의 후보나 모두 미국정부나 IMF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IMF는 대통령 입후보자들 모두에게도 협정 내용을 보증하는 서명을 요구해서 받았다. 셋째로 정부나 정당의 엘리트가 국민이나 민중의 이익이라는 시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4. 금융구조의 혁명 추구: 은행중심에서 증권시장 중심으로.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가계가 주로 은행에 예금하고 기업들은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성장했다. 이리하여 기업(특히 대기업)은 은행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장기적인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으며, 주식을 추가적으로 발행하지 않기 때문에 대주주는 기업을 계속 지배할 수 있었다. 그 반면에 기업은 자기자본에 비해 부채가 너무 커서 금융비용이 많이 들고, 경기가 좋지 않아 기업이 대출의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게 되면 기업과 은행이 동시에 파산할 위험성이 컸다. 그리하여 대기업들이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발행해 자기자본을 증가시키는 방식을 취할 수 있도록 정부가 증권시장의 육성에 힘썼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탕주의가 팽배하기 때문에 증권시장은 항상 투기장이 될 뿐 자본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조달 창구가 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증권시장을 육성하기 시작했지만 정치군인들이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해 증권시장을 한동안 투기열풍으로 몰아 넣어 일반 투자자들의 재산을 수탈했기 때문에 증권시장은 그 뒤 침체에 빠졌다. 증권시장은 노름판이고 잘 하면 대박을 얻을 수 있다는 한탕주의는 일반 투자자들에게 널리 퍼져있어 어떤 좋은 소문에도 증권시장을 잠깐 동안 과열시키지만, 곧 주가가 폭락하여 투기적인 거래가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돈을 잃은 일반 투자자들은 증권시장을 떠나기 마련이다. 1997년 이전에도 정부는 증권시장을 활성화하여 대기업들의 거대한 자금 수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투자신탁회사에게 증권 매입을 독려하여 주가를 인상시킴으로써 일반 투자자의 한탕주의를 자극했다. 그러나 주가는 결국 해당 주식회사의 장래 수익에 달려 있기 때문에 주가가 계속 상승할 수는 없고 언젠가는 폭락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지시에 순응한 투자신탁회사는 도산위기에 빠지게 되고, 정부가 공적 자금을 지원하여 그 투자신탁회사를 회생시키게 되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증권시장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지만, IMF 신탁통치 아래에서는 증권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겼다. IMF가 대기업의 부채/자본 비율을 감축할 것과 은행의 자기자본/위험대출 비율(BIS비율)을 8 %까지 증가시킬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대기업과 은행은 주식 발행을 통한 증자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권시장의 활성화는 외국자본에게 유리한 투자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부족한 외환을 유치한다는 측면이 컸다. 이 과정에서 외국의 투자자들이 낮은 가격으로 한국의 주요 기업들의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대주주가 된 경우가 많다. 더욱이 정부는 2000년 4월의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거래소시장과 코스닥시장에 투기열풍을 일으켰지만, 그 뒤 곧 투기적 거래가 몰락하고 증권사 연금공단 금융기관 기업 가계 모두가 손실에 허덕이고 있다.
미국 영국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증권시장 중심의 금융구조는 한국사회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은행중심의 금융구조에서는 주식을 발행하지 않고 차입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대주주는 자기의 지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므로, 인수와 합병이 어렵다든가 기업의 경영실적이 곧바로 시장에서 평가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증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주가를 높은 수준에 유지할 필요가 있고, 이렇게 되면 기업은 불확실성이 많은 장기투자보다는 단기투자에 몰두할 수밖에 없어 한국경제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기가 어려워진다. 더욱이 국민경제를 일정한 수준에서 계획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은행중심의 금융구조가 오히려 기여할 수 있다.

5. 외국자본에 대한 우대: 외국 매각과 투기적인 단기자본의 문제점
김대중 정부는 IMF의 요구대로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했고, 외국자본의 국내 투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 DJ 스스로 투기꾼 소로스를 접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외국투자자들의 환심(또는 신뢰도)을 살 수 있는가에 고심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목적이 국민경제의 안정적 성장과 고용의 증대에 있다기보다는 외국자본의 도입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외환부족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외국의 상류인사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오해받게 된다.
제일은행을 외국투자자에게 매각하면서 정부가 수용한 조건들은 너무나 불리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제일은행을 파산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제일은행의 채무를 갚기 위해 거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어느 정도 정리한 뒤, 외국투자자에게 헐 값으로 매각하면서 앞으로 부실채권이 발생하면 그것도 (합의한 조건에 맞으면) 정부가 공적 자금으로 대신 지급하겠다고 합의한 것이다. 이런 헐 값 매각은 그 뒤의 모든 매각 협상에서 하나의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매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서울은행이나 대우자동차의 매각 협상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매각 협상에서 정부는 외국투자자들의 약속을 너무 쉽게 믿는다는 점이다. 외국투자자가 우리는 결코 현재의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해고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정부가 선전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외국투자자도 국내투자자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가치증식을 목적으로 하지 국민의 필요 충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기가 나빠지면 당연히 해고할 것인데, 경제에서 외국자본의 지배가 커질수록 정부는 외국자본의 요구를 점점 더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의 대기업을 인수한 외국자본가가 채산성이 맞지 않아 문을 닫겠다고 경고하면서 정부에게 거대한 금액의 지원을 요구한다면, 정부는 그 대기업이 차지하는 산업상, 고용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외국자본가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외국자본가가 매우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면, 정부와 여당은 당면한 선거 때문에 그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사실상 이러한 상황은 선진국에서도 여러 차례가 발생했다. 영국에 투자한 미국계 자동차회사(크라이슬러)는 공장폐쇄를 구실로 영국정부로부터 거대한 지원을 받았다.
다시 말해 국내의 은행이나 기업을 외국에 매각하는 것의 이익이 사대사상과 시장주의 때문에 과대하게 평가되고, 국가소유나 공공소유의 비효율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공공부문 중 일부는 정부의 낙하산 인사 때문에 경영이 부실해진 것이다. 공공부문이 국민들의 감시 속에서 책임경영을 실시한다면, 거대한 공적 자금을 국민들의 재산과 고용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이 외국투자자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에, 단기적인 투기성 자금의 유출입이 심해지고 있다. 지금 증권시세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외국자본인데, 이러한 외국투기꾼들이 금융시장, 증권시장, 외환시장의 불안정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외국투기자본이 들어오는 것보다는 한꺼번에 몰려 나가는 데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투기자본이 예컨대 약 500억 달러라고 하고, 이 규모의 자본이 갑자기 원화를 외화로 환전하여 국외로 탈출하려고 한다면, 정부의 외환보유고로서는 환율의 폭등과 외환부족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또다시 외환공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투기성 외국자본의 유출을 통제하는 조치를 미리 마련해야 한다. 더욱이 2001년부터는 외국 송금이 자유화한다는데,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러한 자유화를 추진하는지, 또 어떤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는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6. 남한 대중의 희생과 북한에 대한 동포주의: 모순의 격화
김대중 정부는 IMF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부자들의 투자능력을 북돋우고 투자의욕을 강화해야 한다는 철학에서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확대하고 적나라한 치부욕을 자극했다. 몇 개의 정책을 살펴 보자.
첫째로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종합소득세 등의 실시에 철저하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상 부정부패의 방지와도 관련을 가지는 것이므로, 김대중 정부가 부정부패의 방지에 어느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여당이 선거 때마다 동원하는 거대한 정치자금이나 계속 폭로되는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보면, 김대중 정부도 별 수 없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40년 이상의 야당 생활에서 가신들의 고통이 심했을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부정과 부패를 제거하지 못하면 아무런 개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구조조정의 칼 자루를 쥐고 있는 고위층이 뇌물을 받아 구조조정의 내용을 바꾼다면, 어느 누구가 뇌물을 바치려고 하지 않겠는가 ? 뇌물 규모만 키우면서 구조조정은 아무런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둘째로 정리해고, 변형근로제, 파견근로제를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조합의 동의를 받아 통과시켰다. 노사정위원회를 자본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결국에는 노사정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정리해고 등에 노동조합이 동의한 것은 민주노총의 합법화나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 등과 교환한 것이지만,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크게 손상시켰다. 정규직 노동자에게 압력을 가해 비정규직 노동자(임시직 계약직 노동자)로 지위를 강등시켜 임금을 인하하고 고용에 불안을 느끼도록 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은 참으로 한심하다. 나란히 함께 정규직 노동자로 동일한 임금과 대우를 받던 노동자가 하루 아침에 파견근로자가 되어 매우 낮은 임금과 대우를 받는다면, 노동자들 사이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 선진국에서 강조하는 협조적 노사관계의 핵심은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생산성 향상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노동의 유연화 정책은 더구나 한국 풍토에서는 장기적으로 기업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미국문화에 영향을 받았지만, 여전히 일본식의 종신고용이 노동자들의 애착과 헌신을 끌어내는 방식일 것이다.
셋째는 금융기관이나 공기업은 주인이 없기 때문에 부실하게 되었으므로 구조조정의 핵심은 주인 찾아주기이어야 한다는 철학은 금융기관과 공기업을 모두 외국인에게 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 왜냐하면 금융기관이나 공기업을 매입하려면 거대한 자금을 가져야 하는데, 재벌과 외국투자자 이외에는 이러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주체가 없고, 재벌은 이미 구조조정의 대상이므로 외국투자자들만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력이나 한국통신이나 서울지하철이 주인(대주주)을 찾았다고 하자. 이 대주주가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요금을 대폭 인상한다면 국민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을 것인가 ? 공기업을 매입하는 민간자본은 이윤 획득이 목적이기 때문에 공기업의 매각 조건이 이윤 획득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매입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공기업의 공익성은 민영화와 더불어 사라진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로 빈민과 실업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의 구축에는 엄청난 재정지출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새로운 세원을 개발하거나 세금을 철저하게 징수하거나 고소득층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조세개혁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는 남한의 대중에게는 적자생존을 강조하고 경제위기의 모든 부담을 전가시키면서, 대북 정책에서는 북한 인민의 빈곤에 동정하면서 경제력에 넘치는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행태는 결코 오래 계속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남한의 대중이 이익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치들을 취해야 할 것인데, 아직 정부는 이 점에서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평화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국방비나 대북관련 사찰비를 대폭 삭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출 삭감으로 사회안전망의 구축이나 연구개발의 활성화에 지출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소규모의 직업군인제를 실시하면서 국민개병제를 철폐한다면, 청년들의 연구역량과 민주역량이 크게 향상되어 과학입국과 민주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도 국방비를 삭감하여 인민의 생활 개선에 전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대북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의 노동인구를 활용하는 것에 착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북한의 노동자를 남한의 노동자처럼 다룰 수는 없을 것이고, 북한 자체의 시장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 북한 정부가 남한 자본을 몰수해 버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7. 공적 자금: 기득권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이 희생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에 거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주식회사가 망하면 그 회사의 자산에서 부채를 갚고 순자산을 주주들이 나누어 가지면 된다. 그런데 오히려 부채가 더욱 큰 경우에는 주주들은 책임이 없고 채권자들만 손해를 보게 되는데, 특히 금융기관의 손실과 도산은 경제 전체에 큰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부가 금융기관의 구출과 업무정상화에 거액의 혈세를 쏟아 붓고 있다. 지금 대체로 100조원 정도를 투입한 것 같은데, 이 규모는 내년의 정부 예산 규모와 비슷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적 자금이 누구를 위해 지출되는가라는 것이다. 파산한 기업의 경영자나 주주의 잘못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부실기업에 대출한 금융기관이나 그러한 대출을 지시한 고위층의 잘못에 대해, 국민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국민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파산 지경에 이르러서야 국민들의 혈세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국민들은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사회적으로 관리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하기 때문에, 소유는 국가소유가 되더라도 관리나 경영은 정부가 임명하는 경영자보다는 이해당사자들(종업원, 채권자, 소비자, 전문경영자 등)이 담당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정부가 임명하는 경영자들은 기업이나 은행의 전문가가 아니든지 전문가인 경우에도 기업이나 은행의 경영혁신보다는 임명자에게 충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으로 혈세를 내는 국민들을 공적 자금을 받는 기업이나 은행의 경영에 참가시키는 방식이 새로운 경영문화와 산업민주주의를 꽃 피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8. 맺음말
김대중 정부는 IMF 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이익을 크게 희생시켰지만, 그렇다고 자본가들이나 중산층의 이익이 크게 향상된 것도 없다. 주식 투기 붐을 통해 중산층에게 돈 버는 재미를 주어 중산층의 인기를 얻으려고 했다가 주가 폭락 때문에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정부의 비판세력은 더욱 커졌다. 더욱이 끝없는 부정 부패의 소용돌이—예컨대1999년 일년 동안을 끌어온 옷 로비 사건, 앞으로 일년을 끌고 갈 한빛은행과 동방신용금고 사건—는 김대중 정권의 존립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그리고 이 정부는 대통령이 너무 똑똑하여 모든 것을 스스로 챙겨야 하기 때문에 국무총리도 실권이 없고 여당 대표도 실세가 아니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어 독재정부라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다. 서슬이 시퍼런 군사독재기에 야당을 지켜오면서 터득한 지혜를 대통령이 된 지금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점점 더 하락하는 상황, 대통령 혼자만 실세인 상황, 그리고 국민 대부분이 장래를 매우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현재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나타날 수 있다. 야당이 사사건건 정부의 활동을 방해할 수도 있고,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도 있고, 국민들의 폭동 가능성도 있다. 김대중 정부는 현재와 같은 대북 관계 개선만으로는 여론을 자기 편으로 돌이킬 수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하며, 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개혁 정책을 재빨리 실시함으로써 야당의 공세와 군사쿠데타 위험을 사전에 봉쇄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정부의 구조조정정책

김 기 원(방송대 경제학과)

I. 머리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이제 만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김대중정부는 재벌, 금융, 공공, 노동 부문의 구조조정과 대외개방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외환보유고가 900억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일단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벗어났고, 제조업가동률도 IMF사태 이전 수준을 회복했으며, 한때 9%에 육박했던 실업률도 3%대로 하락하였다. 선진적인 제도도 다소 갖추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고용구조가 열악해졌다. 또 국가채무의 급증과 급속한 개방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2차례나 단행된 재벌과 금융기관의 대규모 부실 정리 역시 미진한 상태이다. 제도정비도 어정쩡한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반영하여 김대중정부의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에서는 그 편차가 대단히 크다. 우선 정부측 자신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독일 프라이부르크 학파의 질서자유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바(재정경제부.한국개발연구원,1998), 여기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논자가 있는가 하면(양신규,2000) 정부정책에 적대적인 비판을 가하는 입장들도 만만찮게 존재한다.
게다가 이 비판론자들도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관점으로 갈라진다. 한쪽은 정부정책을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규정한다(김성구,1998 ; 김세균,1999 ; 이병천,1999 ; 장상환,1998).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관치경제의 부활 강화(공병호,1999 ; 유승민,2000), 신중상주의자와 신종속이론자들의 결합(정갑영,1998), 심지어는 자본주의 질서의 부정으로까지 인식하고 있다.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은 이처럼 좌우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는 샌드위치 처지이다. 모자이크작품과 같아서 평자의 보는 각도 즉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정부정책의 모양과 색깔이 달라지는 셈이다. 하지만 정책평가의 복잡한 스펙트럼이 평자들의 이데올로기 차이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김대중정부가 처한 역사적 상황 그 자체가 바로 경제정책의 다양성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보아 김대중정부는 한편으로는 시장경제를 정상화하고 발전시켜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경제의 폐해를 시정하는 조치도 아울러 강구해야 한다. 이런 이중적 위치로 인해 위기관리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상과 같은 관점 하에서 재벌.금융.공공.노동 4대부문의 구조조정과 개방이라는 대외적 구조조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김대중정부 경제정책의 성격을 구명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다음 II장에서는 먼저 구조조정의 의미를 자본주의 일반과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이라는 두 차원에서 따져 본다. 그리고 III장에서는 김대중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을 부문별로 나누어 정리해 본다. IV장에서는 이러한 구조조정 정책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특히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II. 구조조정의 의미
재벌위기↔금융위기↔외환위기로 전개된 IMF사태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IMF사태는 첫째로는 자본주의하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공황의 한 형태였지만(김수행.조복현,1999), 둘째로는 한국자본주의의 특수한 대내외적 구조에 연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첫째 측면과 관련하여 IMF사태 이후의 구조조정에서도 자본주의 일반의 구조조정과 마찬가지로 과잉투자를 해소하기 위한 자본과 노동의 재편이 전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본주의란 이렇게 부실한 기업 및 금융기관을 정리하고 노동규율을 재확립함으로써 새로운 축적조건을 갖추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독점단계에 이르면 거대화한 독점자본의 과잉설비 해소는 용이하지 않다. 또한 글로벌화한 경제에서 일국자본의 과잉성 여부는 세계시장의 여건 변동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으므로 막연한 기대 속의 무모한 버티기가 계속될 수 있다. 더구나 재벌체제가 갖고 있는 황제경영과 선단경영은 그런 경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총자본을 대변하는 정부의 경제개입이 요청되는 소이도 여기에 있는 셈이다.
반면에 과잉투자의 해소가 과도하게 추진될(overkill) 위험성도 존재한다. 원래 과잉투자란 수요와 공급의 상대적 관계 또는 이윤율 수준을 나타낼 뿐이지 절대적 고정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잉투자 해소를 현존의 수요규모에 억지로 끌어내리는 식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잉투자 해소에는 버티기와 과도추진이라는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며, 그 때문에 정부와 재계가 알력을 빚어 온 셈이다.
한편 과잉투자는 생산능력 과잉과 이윤율 저하라는 두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해소도 두 방향으로 전개된다. 우선 전자와 관련해서는 설비와 인력의 축소가 추구된다. 그리고 후자와 관련해서는 기업의 헐값 매각이나 부채탕감을 통해 자기자본이나 타인자본의 가치파괴가 이루어지며 임금 등 근로조건도 악화된다. 따라서 과잉투자의 해소를 둘러싸고 기업.채권금융기관.노동자 사이에서 자신의 손실분담을 최소화하려는 알력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IMF사태 이후 과잉투자 해소를 위한 구조조정에는 자본들 사이의 갈등과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에 대한 조정이 불가피해진다. 그리고 이런 조정 과정에는 시장뿐만 아니라 국가권력도 총자본과 총노동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 시장이 왜곡되어 있고 미발달되어 있는 한국자본주의에선 자본들 간의 갈등조정에서조차 국가의 역할이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자본과 노동의 갈등조정에서는 1원1표.효율성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와 1인1표.민주성을 추구하는 인권의 윤리 사이의 갈등을 국가가 조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IMF사태의 둘째 측면과 관련하여 IMF사태 이후의 구조조정은 과잉투자의 해소과정일 뿐만 아니라 1960년대 이후 성장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운용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정부, 금융기관, 국내외자본, 노동자 등 경제주체들 각각의 내적 구조와 더불어 경제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구조조정은 과거에 대한 투쟁인 동시에 미래를 둘러싼 투쟁이다. 우선 이때까지의 낙후된 금융시스템, 전근대적인 재벌체제, 비효율적인 공공부문, 비생산적인 노사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주어진 과제이다. 갖가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저항도 필연적이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여부가 구조조정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할 것이다.
또한 구조조정 과정은 미래의 한국사회를 규정한다.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을 추구할 것인가, 그렇지 않고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다면 영미식의 주주자본주의를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일본식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지향할 것인가, 혹은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길을 모색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첫째의 과잉투자 해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원1표.효율성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와 1인1표.민주성을 추구하는 인권의 윤리가 갈등하게 된다. 그리하여 양자의 벡터의 합이 우리 경제의 미래를 형성하는 것이다. 효율성과 민주성 모두 긍정적인 가치이므로 둘 다 발전시켜야 마땅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용이하지는 않다.
게다가 IMF사태 이후의 구조조정은 IMF.IBRD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놓이고, 이것이 과연 우리 경제를 선진화하는가 아니면 종속화하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또 선진화한다 하더라도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은 신자유주의의 덫에 빠트리는 것은 아니냐 하는 우려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III. 구조조정의 전개와 평가

1) 재벌 구조조정
재벌 구조조정은 정부와 재벌총수가 합의한 [5+3] 원칙에 의해 추진되었다. 1998년 1월에 맺어진 5대 원칙은 ①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②상호지급보증의 해소 ③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④핵심부문의 설정 및 중소기업과의 협력관계 강화 ⑤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강화였고 1999년의 8.15 경축사에서 제시된 3대 보완과제는 ①산업자본의 금융지배 차단 ②순환출자와 부당 내부거래의 억제 ③변칙상속의 차단이었다.
이들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되는 바, 첫째가 과잉투자의 해소이고 둘째가 재벌총수의 재벌기업지배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고 셋째가 재벌기업의 국민경제지배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다. 첫째 과잉투자의 해소를 위해서 정부는 ‘금융기관 주도에 의한 기업구조조정 추진’이라는 원칙을 설정하고 채권단으로 하여금 재벌계열사들을 정상, 회생가능, 회생불가의 3 종류로 구분케 하였다.
그리하여 회생불가 기업은 퇴출시키기로 하여 1998년 6월에 1차로 55개 기업, 2000년 11월에 2차로 9개 기업을 퇴출대상으로 집단적으로 지목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지정된 퇴출기업에는 대기업들이 별로 포함되지 않아서 재벌의 과잉투자 해소에는 그다지 도움되지 않는 숫자놀음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고 회생가능 기업에 대해선 6대 이하 재벌의 경우엔 워크아웃, 5대 재벌의 경우엔 빅딜(대규모 사업거래)이라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104개 기업이 워크아웃 대상으로 선정되어 그 중 58개 회사가 조기종료 및 퇴출되고 46개 회사가 잔존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워크아웃 대상에는 사실상 회생이 불가능한 기업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 5대재벌은 워크아웃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가 대우그룹의 경우 1999년 8월에 워크아웃에 집어넣는 등 혼선을 빚었다. 애당초 5대와 6대 이하를 구분한 것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한편 5대재벌의 빅딜은 정권 출범 무렵 잠깐 거론된 후 한동안 잠복되었다가 다시 1998년 8월 이후 반도체, 항공기 등 7대 부문을 대상으로 본격 추진되었다. 그러나 반도체 빅딜에 대해선 많은 잡음이 일었고, 자동차-전자 빅딜과 석유화학 빅딜은 결국 실패하였다. 또 빅딜에 성공한 것 같은 철도차량과 항공기도 법인을 통합했을 뿐 구조조정이 제대로 진행되지는 않고 있는 실정이다.
빅딜은 기본적으로 1980년 공황 시에 전두환정부가 실시한 중화학공업 투자조정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핵심역량을 다소 집중시키기는 하지만 과잉투자를 직접적으로 해소하지는 않는다. 또 빅딜이 마치 재벌개혁의 핵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정권 출범 후 1년 동안의 귀중한 시간과 개혁역량이 여기에 집중되었고, 그리하여 정작 중요한 재벌개혁인 소유-지배구조의 개혁이 등한시되어버렸다. 재벌의 헤게모니가 가장 취약한 시점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할 기회를 빅딜 소동으로 놓친 셈이다.
이상의 퇴출조치, 워크아웃, 빅딜과는 별도로 경기침체와 부채비율 저하 요구에 의해서도 재벌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우선 30대 그룹의 계열사가 1997년 4월 819개이던 것이 585개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친인척 간의 지분정리와 단순한 합병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고 완전 정리한 경우도 영세사업체가 많은 한계를 가졌다. 또 부채비율도 대체로 200% 이하로 축소되었지만 계열사 사이의 유상증자에 의한 숫자놀음으로 그 의미가 반감되었다. 부채비율이 200% 이하로 하락했지만 부채총액은 그다지 줄지 않은 현대그룹의 위기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다음 둘째로 재벌총수의 재벌기업 지배체제 즉 왕조적 독재체제를 바로잡는 개혁조치로는 우선 소수주주권의 강화를 들 수 있다. 이는 김대중정부 재벌개혁 중 분명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무임승차 문제 등으로 인해 참여연대와 일부 노동조합이 활용하고 있는 정도이다. 또 결합재무제표가 도입되고 회계관계인의 책임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사외이사제가 도입되고 1999년에는 사외이사의 비율을 늘리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의해 이사회가 이전보다 활성화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는 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곤 사외이사 임명권을 여전히 총수와 경영진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들러리나 로비스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집단소송제와 집중투표제에 대한 실시 요구가 강력하게 제기되었으나 잘 해야 집단소송제는 제한적으로 도입되고 집중투표제의 의무화는 무산될 전망이다.
종업원지주제의 개선에 의한 종업원 소유-경영 참여를 통해 재벌개혁과 생산적 노사관계 구축을 동시에 진전시키려는 시도도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제기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사주조합의 운영을 다소 민주화시킬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지만, 다른 한편 보유의무기간을 1년으로 단축함으로써 종업원들을 소유-경영 참여보다는 단기적인 시세차익 추구에 매몰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초래하였다.
금융자본에 대한 산업자본의 지배를 제대로 차단하면 고객자금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재벌의 소유구조를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금융기관(주요 제2금융권)에 대한 소유제한이나 계열분리 명령제와 같은 적극적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대출제한과 같은 소극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불법.변칙 상속을 막기 위해 제한적 포괄주의의 도입이 검토되고 있으나 기존에 저질러진 불법.변칙에 대해서조차 묵인하고 있는 검찰과 국세청에 기대할 바는 크지 않다. 출자총액제한도 IMF사태 직후 폐지해 버림으로써 재벌의 소유구조에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다음 뒤늦게 다시 부활키로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셋째로 재벌기업의 국민경제지배체제 개혁으로서는 먼저 정부의 벤처육성 방침을 들 수 있다. 이리하여 벤처 붐이 일고 한 때는 마치 벤처가 재벌의 대안인 것으로 착각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벤처는 기본적으로 정보산업에 국한된 현상이었고, 벤처가 재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재벌의 선단문어발 경영을 시정하려는 조치들도 재벌의 국민경제지배체제 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부당 내부거래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고, 상호채무보증을 해소토록 하였으며, 비서실 조직을 해체토록 하였다. 하지만 계좌추적권, 이행강제금 부과제도 등과 관련하여 공정위의 권한이 제한되어 있고, 상호채무보증 해소의 효과는 출자총액제한 폐지에 의해 상쇄되었으며, 비서실 해체와 같은 대증요법은 당연히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재벌이 국민경제를 지배하기 위해 구축한 정치권.정부.언론계.학계와의 네트워크도 정권교체, 일부 언론사 계열분리 등을 통해 다소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그 기본구조는 동요하지 않고 있다. 대우의 파산과 현대의 위기에 의해 상위재벌의 지배력도 약화되기는 했으나 그 대신 삼성의 지배력이 돌출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요컨대 재벌 구조조정은 일부 부실 기업.사업이 정리되고, 재무비율이 개선되었으며, 소수주주권이 강화되었고, 상호채무보증이 해소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두 차례나 일괄 퇴출을 발표했는데도 아직 부실정리는 미흡한 상황이다. 더구나 재벌의 황제경영(왕조적 독재체제)과 선단문어발경영도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일차적으로 정권의 권력적.이데올로기적 한계와 개혁세력의 미결집에 기인한다. 그리고 상호지급보증 해소를 요구하면서 출자총액제한을 폐지한 조치와 같이 개혁의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은 탓도 있다. 하지만 개혁전술 면에서는 재벌체제의 핵심 고리이면서 약한 고리인 총수지배체제를 적절하게 공략하여 책임전문경영체제를 수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못한 탓이 가장 크다 할 것이다.

2) 금융 구조조정
재벌의 구조조정이 효율성 측면에서는 과거의 누적된 부실을 떨어내고 미래의 부실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음은 금융 구조조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금융구조조정은 크게 두 가지 내용 즉 첫째로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금융기관 부실을 정리하는 일과 둘째로 금융감독체계를 재정비하는 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금융기관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정부는 우선 회생 불가능한 금융기관을 퇴출시켜 나갔다. 즉 1997년 말의 종금사에 대한 영업정지를 필두로 사상 초유의 대규모 금융기관 퇴출이 단행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은행은 5개가 인가취소되고 6개가 합병되었으며 제일은행은 해외매각되었다. 또 종금사는 1997년 말의 30개에서 6개만 정상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고, 증권사는 6개가 인가취소되고, 상호신용금고는 43개가 인가취소되었으며 19개가 합병되는 등 제2금융권도 대대적인 정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체 금융기관의 23.2%가 인가취소.합병.해산 등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회생 가능한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공적 자금을 지원하여 자본을 충실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퇴출 금융기관에 대한 예금대지급과 회생가능 금융기관의 증자 및 부실채권 정리 등을 위해 공적 자금 64조원을 조성하고 그 자금의 재사용과 공공자금 분까지 포함하여 총 110조원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금융권의 부실표면화 기피와 대우사태로 인해 금융기관의 부실이 다시 누적되어 2000년 11월의 은행구조조정을 시작으로 2단계 금융구조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또 현대건설,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대기업의 부실이 금융권 대차대조표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2단계 금융 구조조정 역시 마찬가지 한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2단계 금융구조조정에서는 부실 금융기관들을 퇴출시키기보다는 금융지주회사로 묶으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는데 자칫 부실의 대형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 구조조정의 둘째 요소인 금융감독체계의 재정비를 위해 정부는 기구 면에서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설립하고 분산되었던 금융감독기능을 금융감독원으로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BIS비율(은행, 종금사), 영업용 순자본비율(증권사), 지급여력비율(보험사) 등 각종 건전성 규제 기준을 마련하고 이에 의거해 부실을 사전에 예방하는 적기시정조치를 확립하였다.
나아가 은행의 고정 및 요주의 여신의 분류기준을 변경하고, 예전의 자산건전성 분류기준이 원리금의 연체기간만을 따지는 과거실적 위주였던 데 반해 1999년 말부터는 미래의 채무상환 능력을 감안하는 새로운 자산건전성 분류기준을 도입하였다. 편중 여신의 규제를 위해 동일인.동일계열.거액 여신한도도 개편.강화하였다.
이상의 금융 구조조정과정을 통해 금융자본의 과잉투자(overbanking) 문제 완화, 대차대조표의 건전화,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 방지가 다소 진전되었다. 그러나 아직 미해결 문제도 산적되어 있다. 부실금융기관 정리는 부실기업 정리와 맞물리는 것이므로 미진한 부실기업정리가 금융기관 부실을 그대로 잠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금융기관의 소유-지배-경영 구조는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위기극복을 위한 긴급처방으로 국유화한 은행들을 2002년 하반기부터 민영화하기로 하였는데 그 소유구조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은행의 소유한도를 상향조정하여 재벌의 소유를 허용하는 방향이 얼핏 내비쳐지는 형국이다.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금융기관에도 사외이사제를 강화하기는 했으나 그 효과는 아직 미지수이다.
제2금융권에 대한 재벌 특히 상위재벌의 영향력은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다.(박경서,1999) 그리하여 관치금융.정치금융.재벌금융의 폐해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정부도 부실금융기관 정리와 감독체계 정비에 주력했지 내부 경영체제를 비롯한 소유-지배 구조 문제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IMF사태 직후의 고금리정책을 비롯하여 갑작스런 BIS비율 적용과 같은 금융 구조조정방식이 과연 한국에 적절했는가 하는 논란이 일어났었다.(박영철 외,2000) 또 영미식으로 직접금융의 위상을 제고하는 금융 구조조정이 과연 바람직한지, 외국자본에 의한 은행 등 금융기관의 지배가 미칠 폐단은 없는지 등 금융구조조정의 근본방향과 관련된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2001년부터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이라는 구호아래 시행하는 예금부분보장제도의 위험성이 거론되면서 보장한도를 상향조정하는 보완조치가 취해졌다. 그런데 이것으로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확보가 충분한지, 아니면 거꾸로 이런 보완조치에 의해 원래 취지가 크게 훼손된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금융 구조조정에서 민주성이 등한시된 것은 커다란 한계였다. 정부가 중소기업.벤처에 대한 지원을 강구하기는 했지만 재벌이 직접금융.간접금융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금융기관의 경영에서 밑으로부터의 생산적 견제가 작동할 수 있는 장치에 대한 고려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금융감독기관의 행정을 투명화하여 민주적 감시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지 않음으로써, 권한과 비대칭적인 책임구조를 만들고 비리를 온존시키고 있다. 공적 자금의 집행과 관련된 민주적 감시 역시 이제서야 운위되고 있지만 형식적인 위원회 설치 등에 그칠 공산이 크다.

3) 공공부문 구조조정
공공부문은 재벌.금융기관과는 달리 부실이 누적되어 도산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그리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지는 않았다. 다만 1987년 이후 민영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IMF사태 이후의 공공부문 구조조정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또 IMF사태 이후 국민적 고통분담 차원에서 구조조정이 단행된 측면도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첫째가 인원감축이었고 둘째가 민영화였다. 인원감축은 대략 정부부문에서 1만 7천명(17%), 공기업에서 3만 2천명(19%)의 감축이 이루어졌다. 민영화는 국정교과서, 한국종합기술금융, 남해화학, 청열의 매각이 완료되고 포철과 한전의 해외 DR발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한전의 일부 발전소, 한중 등의 민영화가 일정에 올라 있다.
이러한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민영화를 강력히 주창하는 측에서 보면 극도로 지지부진한 형국이다. 특히 한전이나 한중의 경우엔 노조의 기득권에 구조조정이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부의 민영화가 국가의 기간산업을 재벌이나 외국자본에 팔아 넘기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재벌체제가 온존한 상황에서 민간에의 매각은 재벌로의 매각이 되기 십상이고, 그렇다고 이를 피하려면 외자로의 매각이 불가피한 듯한 상황이다.
사실 전근대적 관료지배체제하의 비효율적인 공공부문을 개혁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다만 다른 개혁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서 효율성과 민주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키는가가 문제이다. 아마도 1인1표의 민주성이 더 중요한 사업이라면 공기업 형태를 유지하면서 경영혁신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고, 1원1표의 효율성이 더 중요한 사업이라면 매각하되 재벌구조가 아닌 선진적인 소유-지배 구조를 갖추는 모범사례가 되도록 하려는 배려가 필요하다. 이러한 비전의 부재가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원감축과 민영화 이외의 경영혁신은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기껏 퇴직금누진제의 폐지와 같은 복지후생 저하조치가 취해졌을 뿐이고, 자율경영.책임경영의 강화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사외이사의 숫자는 늘었으나 정부가 사실상 임명권을 쥐고 있으므로 별로 효과가 없다. 낙하산 인사도 과거에 비해 약간 정도가 완화되었을 뿐이다. 정부 시스템의 구조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4) 노동부문 구조조정
노동부문의 구조조정은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두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노동시장 면에서는 IMF의 요구에 따라 정리해고제를 조기실시하고 파견근로제를 시행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구하였다. 1998년도엔 임금이 하락하기까지 함으로써 임금의 유연성도 어느 정도 증대한 셈이었다. 그리고 도산과 정리해고제에 따라 발생하는 대량실업에 대해선 고용보험제도를 강화하고 공공지출 예산을 증대하여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려고 하였다.
이 결과 실업률이 1999년 상반기엔 9%에까지 육박하였다가 경기회복으로 4% 밑으로 하락했지만 IMF사태 이전의 2% 대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또 고용구조 면에서는 IMF사태 이전의 비정규직 증대경향이 가속화되어 급기야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상회하였다. IMF사태 이후 분배구조 악화에는 이와 같은 실업증대와 고용의 불안정성 심화가 작용한 셈이다.
한편 이런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하여 노동계는 IMF위기 초반에는 동의하였으나, 민주노총 집행부가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사임하면서 노선의 선회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후 노동계는 구조조정에 대해 계속해서 저항하는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하고, 재취업시장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며, 고용조정의 원칙도 정비되어 있지 않고, 공평한 고통분담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노동계는 구조조정에 대해 반사적인 저항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강력한 조직력을 보유하고 있고 다른 노동계층에 비해 상대적인 기득권을 갖고 있는 대공장 노조와 공기업 노조에서 특히 그 저항이 두드러졌다.
둘째로 노사관계 면에서는 민주노총과 교원노조를 합법화시키고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등의 개혁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하여 노동참여적 위기탈출전략을(김형기,1999:239)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제1기 노사정 간의 합의를 비롯하여 2000년 말의 노동시간 단축 합의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합의를 이끌어 냈고 현대자동차사태 등 대형 분규에서 조정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실업자 조합원자격 인정 등의 노사정위원회 합의사항을 정부가 법제화하지 않았고 금융기관 퇴출 등과 관련하여 다른 정부 기관이 노사정위원회를 소외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정리해고제 합의 등 노사정위원회의 활동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지도부까지 교체시킨 바 있는 민주노총은 마침내 탈퇴해 버렸고 한국노총도 탈퇴와 복귀를 반복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면에서 이루어진 구조조정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노사관계 면에서의 일부 개혁 조치와 노사정위원회라는 새로운 노사관계 모델을 통해 김대중정부는 노동계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포섭전략을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김대환,2000). 사회보장제도도 과거에 비해서는 상당히 진전되었다.
그러나 노동시장 면에서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과 노사정위원회의 위상 약화로 말미암아 이런 개혁적 시도들은 거의 묻혀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과 같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노동탄압 사례들은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과거 정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친노동자적이라고 이해되던 김대중정부가 IMF사태라는 위기를 맞이하면서 그 친노동자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약 주고 병 주고 하면서 노동자들과 대립하게 된 셈이다.
물론 김대중정부의 상대적 친노동자성이라는 것도 대통령 개인과 극소수 대통령 주변인물들의 성향이지 정권 전체의 속성이 아니었다. 더구나 정부관료들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데 급급해야 했고 외자유치 지상주의가 정책 기조가 되었으니 구조조정과 외자유치에 저항하는 노동계는 점차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에 걸림돌로 비치게 된 것이다.
개별사업장의 교섭과 투쟁에만 익숙해온 노동계가 국가적 위기에 대처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도 이런 악화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노동부문 구조조정은 1기 노사정합의 이후엔 눈앞의 과제 해결에 매몰되고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발전이나 생산적 노사관계의 기반구축과 같이 보다 근본적인 과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5) 개방
IMF사태 이후 IMF의 강력한 요구 하에 진행된 대외 개방은 외환자유화.자본자유화.무역자유화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외환자유화와 관련하여 제한폭 없는 자유변동환율제로 이행하였고 1999년 4월과 2001년 1월의 2단계에 걸친 외환자유화를 실시하였다. 외환자유화는 1990년대에 들어와 점진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으나, IMF사태 이후 이것이 급진전된 것이다. 그리하여 1단계 자유화에서는 기업 및 금융기관의 외환거래를 자유화하였으며 2단계 자유화에서는 개인의 외환거래를 자유화하였다.
그런데 이 외환자유화의 추진과정에서 환투기와 자본유출의 위험성이 지적됨으로써 몇 가지 보완조치가 취해졌다. 즉 고액자금의 대외지급 시에 취득경위 등을 보고토록 하고, 대외채권의 회수의무를 유지시키고, 국세청 및 관세청에 대한 통보제를 강화하고, 금융정보분석기구(FIU)를 설치하고, 자본거래허가제와 가변예치의무제 등 유사시의 안전장치(Safeguard)를 제도화하고, 비거주자의 원화 투기거래를 제한하였다.
둘째로 자본자유화로서는 외국인의 주식투자한도를 대부분 철폐하였으며, 외국인의 국내단기금융상품 및 회사채 매입제한을 철폐하였고, 외국인직접투자에 대한 제한축소와 우대를 위한 외국인투자촉진법을 제정하였으며, 적대적 M&A를 허용하였다. 셋째로 무역자유화조치로는 수입다변화제도를 폐지하였고, 무역관련 보조금 4개 항목을 폐지하였다.
이러한 개방화 중 외환자유화의 효과는 아직 불분명하다. 하지만 자본자유화에 따른 외자의 유입은 현저하다(유용주,2000). 외국인은 주식보유비중에서 전체의 30%, 외환선물환 거래에서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제일은행의 경영권을 인수하였고, 대다수 시중은행에 지분 참여하였으며, 증권.보험업에의 진출도 활발하다. 비금융업의 경우에도 석유화학.제지.식품에서 외자계가 5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는 등 외자의 비중이 크게 증대하였다. 무역자유화 면의 효과로는 일본 전자제품의 수입급증을 들 수 있다.
IMF사태 이후 이처럼 전개된 대외개방은 자본의 범세계적 운동이라는 대세에 합치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정략적인 국부유출론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또 대외개방만을 갖고서 한국경제의 중남미화를 운운하는 데에도(이찬근,2000.11.8)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게다가 외자유입에 의해 빠르게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난감했던 일부 부실사업체 처리도 마무리지을 수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외자에 의해 선진경영 방식이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은 이런 개방의 긍정성에만 도취되어 외자 지상주의, 개방 지상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외자와 개방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이다. IMF사태의 한국적 특성이란 것도 근본적으로는 국내 재벌.금융 체제의 낙후성이지만, 그런 낙후된 체제를 갖고서도 함부로 대외개방에 나섰던 점도 있다. 그런데 그런 교훈이 완전히 망각되어 버린 것이다.
원래 자본운동에 대해서는 민주적 견제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즉 효율성과 민주성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글로벌화는 거의 고삐풀린 망아지 꼴이다. 세계시민사회와 세계민주주의에 의한 세계적 관리(global governance)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선후진국 자본의 힘은 대등하지 않으며, 자본의 세계적 운동이 일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후진국에선 산업정책의 필요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의 개방과 외자도입은 주체적 선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의 정책기조는 외압을 통한 내부개혁이라는 일종의 배수진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IV.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인가
이상과 같은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한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머리말에서 서술한 대로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는 극단을 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IMF사태 이후 하나의 화두 또는 유행어가 되어버린 일부 진보진영의 신자유주의 규정을 검토하는 데서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신자유주의는 1원1표의 시장원리를 만능시하는 사상과 정책이다. 이는 자본의 이윤극대화를 제약하는 1인1표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고, 특히 자본의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그 힘을 강화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발흥초기의 구자유주의와 다른 점은 이것이 서구의 강력한 노조와 복지정책에 대한 자본의 반격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앞에서 고찰한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에는 분명히 신자유주의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갑자기 강력해진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증대시키는 정책으로서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가 들어 있는 것이다. 외환.자본 자유화도 신자유주의 색채가 짙다. 이런 사안들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IMF가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대중정부 정책은 이런 신자유주의 일색으로 되어 있지는 않다. 복지체제가 극도로 미비되어 있던 우리에게 복지정책에 대한 반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총자본에 있어서도 IMF사태 이후엔 과도한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과소한 복지가 오히려 문제였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서 사회적 안정망을 강화하는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실시된 셈이다. 노사정위원회도 마찬가지 시도이다.
또한 한국자본주의에는 재벌의 왕조적 독재체제와 정경유착이라는 전근대성을 비롯하여 공공부문의 전근대적 비효율이 존재한다.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저해하는 경영의 불투명성도 심각하다. 이것들은 모두 압축적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이때까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던 것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혁파하는 구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해진 셈이다.
이상의 신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구자유주의라는 세 요소가 모두 김대중정부 정책이 지향하는 바였다. 하지만 물론 그 주관적 의도가 실천과정에서 제대로 발휘되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정권 출범 초부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냐 ‘민주적 시장경제’냐 하면서 이념상의 혼란이 빚어졌고(김균.박순성,1998:369-377),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였다. 또 정책을 입안.실행하는 정당조직과 관료조직은 그 자체가 개혁대상인 구태의연한 존재였다. 게다가 위기관리라는 당면과제 해결에 급급하면서 빅딜과 같은 개발독재적 경제정책도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김대중정부 정책은 세 가지 요소를 불완전하게 지향하면서 동시에 과거로부터 개발독재라는 한 가지 요소를 답습함으로써 네 요소로 구성되게 되었다. 이 중 어느 부분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머리말에서처럼 논자들의 평가가 제각기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중 어느 요소가 지배적이냐 하는 논의가 제기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식의 논의도 유의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파악된 지배적인 요소만으로는 김대중정부 정책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우리의 구체적 현실을 한 발이라도 진전시키려는 실천적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요소를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긍정적인 요소를 최대한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지배적 요소를 확정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비판이 유행하면서 시장원리에 대한 과도한 부정이 횡행하는 것 같은 점도 우려되는 바이다. 물론 시장의 폭력성과 불안정성을 시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때문에 이 글에서도 시장(자본)의 논리와 인권의 논리를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장이 갖고 있는 긍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며, 더구나 시장원리에도 못 미치는 전근대성을 탈근대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전근대적인 재벌체제를 뭔가 새로운 진보적인 모델인 것처럼 추켜세우는 것도 이런 착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류이다.
한편 김대중정부 정책을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는 논자들 중엔 재벌개혁과 같은 김대중정부 정책이 자본주의 틀 내의 개혁이므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김성구,1998 ; 채만수,1999). 이것은 하나의 철학적 관점이기 때문에 그 나름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전두환 치하의 자본주의보다 김대중 치하의 자본주의에서 국민대중의 삶이 더 낫고, 인도네시아 자본주의보다 스웨덴 자본주의에서 국민대중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V. 맺음말
IMF사태 이후 김대중정부의 구조조정은 과잉투자를 해소한다고 하는 자본주의 일반의 측면과 1960년대 이후 압축적 고도성장체제의 모순을 시정한다고 하는 한국사회 고유의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은 1원1표의 효율성 원리와 1인1표의 민주성 원리라는 두 개의 원리가 긴장관계 속에서 복잡다기하게 작동하는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재벌, 금융, 공공, 노동이라는 이른바 4대부문과 대외관계 면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또한 과거 정권처럼 통과의례로서 한 차례 개혁이 주창되는 게 아니라, 어쨌든 IMF사태 이후 3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개혁이 정권의 모토가 되고 있다. 정권의 정략적 의도도 깔려 있겠지만 그만큼 누적된 모순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재벌 구조조정에서는 부실기업 정리와 지배구조 개선에서 약간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부실금융기관도 아울러 정리되고 금융감독체계도 정비되었다. 공공 부문에선 인원이 대거 감축되고 민영화가 추진 중이다.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서도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가 도입된 한편 민주노총.교원노조가 합법화되고 노사정위원회라는 새로운 모색도 이루어졌다. IMF사태 이전 점진적으로 추진되던 외환 및 자본 자유화는 일거에 급진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방위적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효율성과 민주성이라는 두 개의 잣대를 기준으로 할 때, 그 성과는 어정쩡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퇴행한 부분도 존재한다. 부실한 재벌.금융기관의 대량정리를 한 차례로 마무리짓지 못하여 다시 2단계 구조조정에 착수했지만 앞으로 3단계 구조조정이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재벌의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도 온존되고 있으며, 금융기관의 경영시스템 개혁도 지지부진하다. 공공부문에서는 효율성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으며, 노동부문에선 참여와 협력에 기초한 생산적 노사관계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근로조건만 악화되었다. 외환.자본 자유화의 속도 및 범위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내걸고 등장한 김대중정부의 이런 경제정책에 대해선 전혀 상반된 평가들이 난무하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선풍과 그에 대한 비판이론이 맹목적으로 수입되면서 일부 진보진영에선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을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매도하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정부의 정책에는 신자유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또한 국민대중의 삶을 한 걸음이라도 전진시키려는 실천적 입장에 선다면 김대중정부 정책의 다중성과 역동성을 이해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원래 한국경제는 압축적 고도성장을 달성해 왔고 그 과정에서 누적된 모순을 압축적으로 개혁하려 하다 보니 김대중정부 정책의 성격이 다중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과거의 개발독재 체질을 계승한 채 신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구자유주의라는 세 요소를 지향함으로써 결국 네 가지 규정성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이 네 요소 중 긍정적인 요소를 확대 강화하고 부정적인 요소를 축소 약화시키는 일이다. 물론 정권의 속성과 전술적 과오로 인해 개혁은 만족스럽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란 우여곡절을 거치더라도 결국 발전한다는 입장에 선다면, 그 과정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시간을 단축하고 가능한 한 최선의 코스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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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정부 구조조정정책의 문제점과
진보적 구조조정의 필요성

장 상 환(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Ⅰ. 머리말
1998년 경제위기, IMF 관리통제하에서 한국사회 전체에는 구조조정 광풍이 몰아쳤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구조조정만이 탈출구인 것처럼 산업별, 기업별로 다양한 형태의 구조조정이 단행되고 있다.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란 기업(또는 그룹)의 제한된 자원(자본 등)을 자본축적, 즉 자본이익율의 유지와 향상에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사업체 또는 사업부문을 통폐합·축소·폐업·매각·확대·신설·매수함으로써 사업구성(구조)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구조조정의 주요 수단들은 통폐합, 저수익·저성장 부분의 축소·폐업·매각, 고수익 고성장 부문의 확대·신설·합병과 인수(M&A), 매수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한 타기업 매수 등이 있다. 기업의 수익성을 개선하는 것이 구조조정의 핵심이다. 구조조정은 산업구조조정, 기업구조조정, 금융 구조조정, 공공부문 구조조정, 노동시장 구조조정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산업구조조정은 석탄산업, 일부 섬유산업, 신발 제조업 등과 같은 한계산업을 폐기하고, 성장산업을 육성하는 산업부문간 구조조정과 인수 합병 등의 형태로 추진되는 부문내 조정으로 구별할 수 있다. 기업경영의 구조조정은 부실기업의 퇴출과 기업간 인수 합병, 한계기업의 퇴출, 워크아웃, 일부 사업 매각, 부채의 출자전환 등에 의한 재무구조의 개선 등을 의미한다.
공공부문을 포함하여 1000조원에 이르는 부채규모와 100조원의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두고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자본주의경제에서 경기순환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1997년의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사태는 특수한 형태의 경제공황 상황이었으므로 부실기업과 부실채권문제를 해결하고 향후 그러한 파국적인 경제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구조개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구조조정의 내용과 방향이다. IMF와 정부는 금융구조조정과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시장규율을 확립하고 이를 토대로 대외신인도의 제고와 외국자본의 유치가 이루어지면 이것이 다시 국내기업의 생산성을 강화할 것이며 결국 경제가 회생된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구조조정과정에서 실업의 발생은 불가피하지만, 실업의 근본적 해결방안은 구조조정의 성공을 통한 우량기업의 도산 방지와 창업증가를 통해 고용을 유지하고 새로 고용을 창출하는데 있고, 또 구조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실업에 대해서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IMF와 IBRD는 일반적으로 구조조정의 정책목표를 경제의 구조적 효율성 제고, 특히 배분적 효율성 제고에 둔다. 1980년대 이후 형평성 제고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지배구조의 개선도 배분적 효율성을 위한 것이다. 배분적 효율성 추구는 철저히 자본의 수익성을 중시하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서 거시경제환경의 안정, 경제성장 촉진과 빈곤 퇴치, 경제개방 촉진, 무역제한 완화 또는 철폐, 유인체계의 투명성 제고, 경쟁 강화, 자원배분의 효율성 제고, 자유화·민영화 등 민간부문 확대, 제도 구축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목표 설정에 있어서 단기적 목표로서 대외불균형 시정, 중장기적 목표로서 경제성장의 추구가 적절하지 못한다는 문제와 장단기 목표가 조화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IMF의 거시 안정화정책은 단기적으로 성장을 희생시키는 부작용이 있으며, 장기적으로도 성장을 결정하는 요소인 생산성 향상이나 새로운 산업의 창출 등을 촉발하는 정책수단을 강구하지 못함으로써 성장을 저해할 소지도 있다. 개방은 경제체질을 강화하는 면도 있지만 경제의 취약성을 노출시키는 효과도 있다. 또 자유화 논리는 시장과 정부를 대립적으로 인식하면서 국가의 경제개입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필연적이고 선진국에서 일반적인 데도 개도국에 대해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는 모순된 권고를 한다.
한국에 대한 IMF/IBRD의 개혁 프로그램은 거시정책으로는 물가상승 압력을 억제하면서 경상수지 흑자를 낼 수 있도록 긴축정책을 운용하였다. 구조조정책면에서는 금융시스템의 건전화·투명화·효율화를 위한 금융부문 구조조정을 핵심사항으로 하여 무역 자본 자유화, 기업지배구조 개선,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98년 4월 외평채가 성공적으로 발행된 이후 환율이 안정되는 등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긴축정책이 경기를 과도하게 위축시키는 과다살상현상을 시정하기 위해 통화, 금리, 환율 등의 목표변수를 신축적으로 조정하여 금리를 계속 인하시켰다.
IMF/IBRD 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김대중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정책은 한편으로는 자본간의 재편으로서 시장원리에 따른 금융기관 및 기업의 퇴출과 인수합병, 외국자본에게로의 매각과 인수합병 및 외국자본 유치를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 강화로서 정리해고를 통한 대량해고 등 고용의 유연화와 연봉제 도입 등 임금유연화의 방향에서 구조조정을 추구했다. 이렇게 진행된 구조조정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전사회적으로 산업의 규모를 조정하고 개별 기업차원에서는 비합리적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소수 재벌의 독점을 보다 강화시켜주며 개별 기업차원에서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유연성 확보’를 위해 ‘능력주의’·’성과주의’적 노무관리를 보다 완전히 관철시키는 계기로 악용되었다.
기업과 정부에 의해서 추진되는 구조조정의 목표는 생산 및 관리효율을 높여 경쟁력을 강화하고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여 이윤율을 높이는데 있다. 위기에 빠진 재벌체제를 되살아나게 하고, 외국자본의 적극적 유치로 외국자본의 직접적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부실경제의 회복비용을 노동자와 국민에게 전가시키고 노동자계급에게는 시장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의 부담을 감당하도록 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결과 외환위기는 다소 완화되었으나 불황이 만성화되고 있고, 독점의 심화, 실업의 급증, 빈부격차의 확대, 대외종속의 심화 등의 부작용이 초래되고 있다.
경제위기 하에서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은 경제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다.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은 경영난에 빠져서 그냥 두면 자연히 망하게 되어 있는 기업과 은행의 퇴출을 촉진하는 것일 따름이다. 외환위기가 파급되어 경제가 공황상태에 처한 상황에서 기업과 금융기관의 몰락을 촉진하고 실업을 양산하는 것은 공황을 심화시킬 뿐이다.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은 경제위기를 불러온 대외종속체제와 재벌지배체제와 그 행위자들인 재벌과 관료들을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구조조정의 주체로 나서서 경제위기 조성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금융구조조정정책 등의 내용을 검토하고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의 결과 발생한 여러 부작용을 분석한다. 그리고 진보적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Ⅱ. 기업구조조정 – 허구적 재벌개혁
김대중정권은 당선후 곧 재벌총수들과의 면담과 합의를 통해 기업구조조정의 5원칙을 정했다.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핵심부문 설정,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강화 등이 그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은 IMF와의 합의에 따라 1998년 4월 이후 추진되기 시작하여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정부정책의 핵심과제가 [외화유동성 확보]에서 [구조조정]으로 전환되었다.
1단계 기업구조조정은 1998년 6월 18일 채권은행단의 55개 퇴출기업 명단 발표(5대그룹 계열사 20개, 6-30대그룹 계열사 23개)로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그 뒤 7월 28일 6∼64대 그룹을 대상으로 1차 워크아웃 대상이 선정되었고, 5대 그룹에 대한 워크아웃은 8월말 시행키로 했으나 다소 지연되었다. 기업부채비율 개선, 상호지급해소 등 투명성 제고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병행 추진되었다. 6-64대 그룹을 대상으로 한 1차 워크아웃 결과 약 20개 그룹이 부도 또는 협조융자 대상으로 전락하고 32개 기업을 부실기업으로 지정하였고, 16개 그룹 43개 기업을 회생가능기업으로 워크아웃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러한 구조조정 결과 6위 이하 재벌들간의 부침과 순위 바꿈이 격심하였다.
5대 재벌에 대한 구조조정의 결정판으로서 1998년 12월 7일 청와대 정재계 간담회 결과로 5대재벌 구조조정 합의안이 발표되었다. 합의안의 주요내용은 첫째, 핵심주력사업을 선정하고 계열사를 대폭 축소한다는 것이다. 5대 재벌은 사업교환, 합병, 매각, 계열분리, 분사화 등을 통하여 3-5개의 핵심주력사업을 선정하고 계열사를 264개에서 130여개로 대폭 축소하기로 했다. 현대는 63개에서 30개 내외로, 삼성은 65개에서 40개 내외로, 대우는 41개에서 10개 내외로, LG는 53개에서 30개 내외로, SK는 42개에서 20개 내외로 줄인다는 것이다. 회생가능성이 희박한 계열사는 정리하고, 과잉중복투자에 대해서는 그룹간 자율적 구조조정을 추진하여 철도차량, 항공기, 석유화학, 발전설비, 선박용 엔진, 정유 등 6개 부문에 대해서는 단일법인을 설립하기로 하고,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를 교환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재무구조를 개선한다는 것이다. 이(異)업종간 채무보증 12조 7천억원(동종업간 지급보증 1조7천억원 포함)을 연내에 해소하기로 했다. 나머지 보증도 기존 대출금에 대한 가산금리 부과와 보증채권의 가치에 상당하는 금액의 대출금을 출자로 전환함으로써 점진적으로 해소하여 2000년 3월까지 완료한다는 것이다. 또 5대그룹은 1999년말까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총 69조원의 재원을 조달해 평균 부채비율을 국제적인 수준인 200%이내로 맞추기로 했다. 자금조달내역을 보면 우선 부동산과 유가증권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총 23조5천억원을 조달하고, 비주력 계열사 매각및 사업부문 매각 등 자구노력을 하며, 유상증자를 통해 21조2천억원, 국내주식발행을 통해 총17조3천억원,, 해외주식 발행으로 3조9천억원을 각각 마련한다. 나머지는 외자유치로서 해외자금 조달과 장기차입금 형식으로 총260억달러(약30조원)을 조달할 계획이라고 금감위는 밝혔다. 해외에서 조달하는 자금중 유상증자분에 포함돼 중복 계산된 3조9천억원을 제외하면 5대그룹이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조달할 자금은 총69조원이 된다.
셋째, 경영투명성을 제고한다는 것이다. 1999 회계연도부터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도록 준비하고 이사회 중심의 경영체제로 전환하며, 부당내부거래행위를 근절한다는 것이다.
그 후 1999년 8.15 경축사에서 김대통령은 재벌개혁의 후속조처로서 부당내부거래 및 상호출자제한, 재벌의 금융산업 지배 규제, 변칙상속 규제 등을 발표했다. 이를 지난 1998년 1월의 합의안과 합쳐서 재벌개혁 5+3원칙이라고 한다. 이어서 8월25일 열린 정·재계간담회에서 정부가 확정·발표한 재벌개혁 후속조치 방안은 위의 3원칙에다 기업지배구조개선까지 합쳐서 크게 4개 사항이다. 순환출자 억제와 부당내부거래 차단,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기업지배구조개선, 변칙 상속·증여 방지 등이 그것이다. 1999년중 공정거래법을 개정,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도입하되 시행시기는 2001년 4월로 하며, 2000년 결합재무제표제도가 시행되면 금융기관은 각 그룹별 결합재무제표상 부채비율을 여신운영 건전성관리의 기준으로 활용해 순환출자 감축이 신속히 이뤄지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상장기업의 경우 사외이사 비중을 4분의 1 이상에서 2분의 1로 점진적으로 확대하며 사외이사가 중심이 되는 이사후보추천위원회제도를 도입한다. 기관투자자의 권리행사지침을 마련해 경영감시기능을 강화토록 금융감독규정을 고쳐 투자대상 회사에 대한 적극적 소수주주권의 행사, 손해발생시 지배주주와 경영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등이 이뤄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투신사의 자기계열 기업에 대한 주식투자한도를 총자산의 7%로 축소하고 보험사 여신한도도 총자산의 2%로 축소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2단계 기업구조조정이 진행중이다. 기본방향은 자력에 의한 구조조정이 불가능한 부실기업 중 워크아웃 추진중인 기업에 대해서는 연내에 처리를 마무리하고, 재무 및 수익구조 개선 부진기업 중 개선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대해서는 여신거래 특별약관 적용 등을 통해 기업정상화를 추진하며,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며, 상시적인 기업구조조정 시스템을 구축하며,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의 부실화를 사전에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대우 계열 12개사는 매각, 정상화 등 처리방침을 조기에 확정하고 계열사 매각대금에 대한 채권단간 분배 및 잔여 채권의 정리를 한다는 것이다.
2000년 11월 3일 채권 은행단의 2차 퇴출기업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삼성상용차와 삼익건설을 비롯한 18개 기업이 청산절차를 밟고, 11개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29개 기업이 퇴출된다. 또 20개 기업이 매각되고, 3개 기업은 합병처리되어 퇴출기업을 포함하여 모두 52개 부실기업이 정리된다. 현대건설에 대해서는 12월말까지 채권회수를 연기해주면서 자구계획을 통해 경영 정상화 여부를 지켜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정몽헌 회장은 시가 827억원 상당의 보유 계열사 지분 가운데 일부인 300억-400억원 어치를 매각, 현대건설의 유상증자에 참여할 예정이다. 정주영 전명예회장은 이미 처분의사를 밝힌 자동차지분 중 담보분을 제외한 4백여억원으로 현대건설의 회사채 또는 기업어음(CP)을 매입할 계획이다. 현대건설은 또 서산농장(3082만평)을 매각할 계획이었는데 정부는 토지공사를 통하여 2100억원의 선수금을 제공하는 등 현재건설의 회생을 지원하고 있다. 정부는 퇴출 실직자를 채용하는 기업에 6개월 동안 해당 노동자 임금의 1/2 내지 1/3의 장려금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또 퇴출 또는 법정관리 판정을 받은 기업의 노동자가 전직을 원하거나 직업능력이 부족할 때는 재취업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훈련비 전액과 12만원의 수당을 주기로 할 방침이다.
재벌문제 해결의 핵심은 이중적 독재체제를 청산하는 것, 그 중에서도 재벌 총수 일족의 계열회사에 대한 소유경영독점체제를 청산하는 것이다. 이에 비취볼 때 5대그룹 구조조정 내용은 전혀 재벌체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심지어는 국민의 부담으로 재벌총수들을 살려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벌체제로 인한 기업경영의 장기적 위기, 국민경제의 모순 심화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김대중정부는 재벌개혁의 주체와 대상을 혼동하였다. 관련 이해관계자 집단의 요구사항을 전혀 수렴하지 않고서 정부와 재벌만 협의에 참여한 가운데 결정한 것은 중대한 절차상의 문제였다. 노동조합, 중소기업연합단체, 시민단체, 학계 등의 요구를 반영하는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 재벌은 개혁대상이므로 재벌을 제외하고 다른 이해 당사자들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수렴하여 재벌개혁안을 만들고 이를 재벌 총수들에게 통보하고 시행하는 것이 올바른 절차일텐데 재벌들과만 협의하여 합의안을 만들었으니 재벌측이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은 결정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1. 빅딜의 허구성
핵심주력사업 부문 선정은 실제로는 부실 계열사의 정리에 의한 업종단순화, 경영합리화에 불과하다. 첫째, 핵심주력사업을 선정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엽적인 사업만 포기한 것일 뿐, 기존의 핵심 업종 가운데 포기하는 것은 거의 없다. 포기한 업종을 보면 현대는 현대중공업의 발전설비 부문을 한국중공업에 넘기는 것과 문화일보 경영철수 뿐이다. 삼성은 이천전기와 삼성시계, 한일전선, 대도제약을 청산하는 정도인데 모두 사업성이 떨어져 이미 퇴출이 결정된 부문이었다. 삼성자동차의 포기는 의미있는 것이지만 두 재벌의 해당사업은 후발주자로 뛰어들어서 경쟁력을 확보하기에는 엄청난 투자가 소요되는 것들로 그냥 두어도 퇴출 등으로 스스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5대그룹이 전체 계열사 264개 가운데 절반 가까운 130개 정도를 정리하기로 했으나 실제 매출, 자산 등 그룹외형은 거의 줄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은 63개 계열사를 30개 안팎으로 줄이기로 했으나 합병대상을 제외하고 실제 계열분리되는 금강개발 등 8개사의 매출규모는 5조원 수준이다. 현재 63건이 진행된 분사와 현대투자자문 등 청산 4개사의 매출액 1조원을 합하더라도 전체 매출감소 규모는 1997년 그룹 매출액 81조원의 7.4%에 불과하다. <삼성그룹>은 65개 계열사 가운데 25개 정도를 정리하는데, 실제 계열분리나 매각 청산 등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중앙일보 등 보광계열 10개사와 빅딜로 대우로 넘어가는 자동차, 종합화학 등 20개 정도다. 이들의 매출규모는 4조5천억원에도 못미쳐 1997년 그룹 매출액 91조6천억원의 4.9%에 불과하다. 도 53개 계열사를 30개로 줄이기로 했지만, 전자부품, 정유 판매 등 대부분을 주력기업에 흡수합병시키고, 실제 계열분리, 매각, 청산으로 떨어내는 계열사는 10개 미만이다. 이들 정리대상 계열사의 매출액은 4조586억원으로 1997년 그룹 매출액 75조원의 5.4%에 불과하다. 은 42개 계열사를 20개 내외로 줄이기로 했으나 역시 대부분 합병대상이고, 매각이나 청산대상은 SK훅스, 유공몬텔 등 10개 미만이다. 이들의 매출총액은 700여억원으로 1997년 그룹 매출액의 0.16%에 불과해 거의 무시할 정도다({한겨레}, 1998. 12. 11).
요컨대 재벌들은 자동차, 반도체, 석유화학분야의 합병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잉여설비 및 인력감축에 대한 저항이 잇따르고 있다. 과다한 기업부채는 줄어들고 있지만 이는 부채상환을 위한 자산매각 보다는 재무지표 개선을 위한 자산재평가나 유상증자에 의한 것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금리인하로 재벌은 자산매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5대 그룹은 21세기 핵심업종으로 꼽히는 정보통신과 금융에 기업의 사활을 걸고 있다. 현대전자, 삼성전자, LG텔레콤·정보통신, 대우통신, SK텔레콤 등이 모두 주력 핵심업종으로 선정됐다. 금융업도 마찬가지다. 삼성은 11개, 현대는 9개, LG는 6개 금융업종 계열사를 핵심업종에 포함시켰다. 정보통신과 금융업에 관심을 쏟는 것은 이들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투자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5대그룹이 3-5개의 핵심업종을 선정하고 계열사의 절반 정도를 줄이는 사업구조 재편을 단행하기로 했지만 경제력 집중 완화 효과는 거의 없는 것이다. 지난 6월 5대그룹에서 55개 계열사를 퇴출할 때도 이들 정리대상들이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0.5%에도 못미쳤는데 이번 구조조정안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둘째, 계열사 축소방식이 주로 합병에 의하고 있다. 현대 9개, 삼성 5개, 대우 1개, LG 6개, SK 8개 등. 이것은 부실기업을 우량주력기업이 떠안는 것으로서 기업경영의 부실을 심화, 확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1998년에는 기업결합이 구조조정의 주요 수단으로 정착되었는데 기업결합의 특징을 보면 과거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새로운 업종 진출(혼합결합)은 줄어들어 기업들이 문어발식 확장보다는 비슷한 업종끼리의 결합(수평결합)에 치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외국인의 주식소유제한 철폐 등 제도개선에 따라 외국기업에 의한 기업결합 건수도 대폭 증가하여, 총 132건, 금액은 74억불(금액기준, 778% 증가)에 달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기업이 구조조정을 위해 외자를 많이 활용하였음을 나타내며, 이러한 추세는 특히 30대 기업의 경우 더 큰 특징으로 나타났다(공정거래위원회, [1998년도 기업결합동향분석], 1999. 2)
셋째, 계열분리(독립기업화) 조치는 후계자들간에 분할을 앞당기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매출액 기준 30대 소그룹 상당수를 현대·삼성 가문 소그룹이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는 분가(分家)를 통해 정주영 명예회장 아들 및 조카들이 5개 소그룹을 각각 나눠 맡게 된다. 차남인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 부문을 총괄한다. 5남인 정몽헌 회장은 현대전자 및 건설, 서비스 부문인 현대상선과 현대종합상사 등을 맡게 된다. 7남 정몽윤 회장 몫인 현대해상화재는 이미 공정거래위원회에 계열분리를 신청한 상태다. 3남 정몽근 회장이 경영하고 있는 금강개발산업도 2000년 1/4분기까지 계열분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6남 정몽준 고문 계열의 중화학소그룹에 대한 분할도 곧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분가를 하더라도 [현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느슨한 기업연합체로서 존속할 가능성이 크다. 정몽구 회장의 자동차 부문, 정몽헌 회장의 전자·건설 등은 2000년 이후 분가할 경우 매출액 기준 10대 소그룹 안에 진입하게 된다. 삼성의 간판기업인 삼성전자는 대우의 전자와 통신, 반도체까지 합칠 경우 연매출 25조원의 매출 1위 소그룹이 될 전망이다.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증권 등 삼성의 금융소그룹도 삼성전자에 못지 않은 매출을 이루며 삼성의 양대 축이 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다 재계 15위인 한솔, 30위인 새한, 신세계, 제일제당 등 이병철 창업주의 아들·딸의 기업이 모두 현대에 못지 않게 30대 소그룹 안에 포진할 전망이다. 과거 삼성그룹에서 제일제당그룹, 한솔그룹, 신세계그룹이 계열분리되었고, 현대그룹에서 한라그룹, 금강그룹이 계열분리된 사례가 있듯이 계열분리는 실질적인 협력을 하면서 형식상으로는 독립적인 그룹인 것처럼 행동하는 그룹의 세포핵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자동차의 퇴출은 정당화될 수 있으나 LG-현대사이의 반도체 합병 강행은 경제적 논리로 봐서 무리한 것이다. 삼성은 더 이상 자동차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그룹 전체에 부담이 됨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대우와의 맞교환으로 쉽게 퇴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LG측은 애초에는 합병에 격렬히 반대했지만 정부가 LG에 대한 신규여신을 중단하고 기준여신까지 회수하겠다고 위협한 것에 견디지 못하고 마지못해 굴복한 것이다. 현대는 사전에 치밀하게 반도체 빅딜에 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은 1998년 5월 26일부터 년말까지 현대증권 영업부 창구를 통해 현대전자 주식 967만주를 장내 매수하였다. 특히 10월 28일까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현대전자 주식을 매입했다. 또 유상증자에도 참여하여 1400만주를 사들여 지분율을 2.08%에서 21.94%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집중매수에 힙입어 현대전자 주가도 현대중공업의 본격 매수가 시작된지 한달만인 6월 29일에는 주가가 3만2천원까지 2배이상 올랐다. 7월초 유상증자 신주가 상장되면서 주당 1만9천원대까지 내려갔다가 7월 28일에는 다시 2만9천원대를 회복하였다. 현대상선도 6월 18일부터 6월 30일까지, 11월 10일부터 12월 28일까지 현대전자 주식 177만주를 장내에서 사들였다. 대기업 계열사가 동일계열의 다른 회사 주식을 장기간에 걸쳐 장내에서 사들이는 것은 인수합병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는 일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LG반도체와의 빅딜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준비차원에서 현대중공업을 동원하여 현대전자의 주가관리에 나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매일경제}, 1999. 1. 27).

2. 국민 부담에 의한 재무구조 개선
재무구조의 개선방식도 정부 내지 국민의 부담에 의한 부채비율 축소에 불과하다. 첫째, 연내에 5대재벌 계열사의 빚 보증 3조8000억원을 조건없이 해지해주고 5대 그룹이 일정한 가산금리를 추가부담하는 조건으로 8조9000억원의 빚 보증을 해소해주기로 한 것은 큰 특혜이다. 5대재벌 주요채권단협의회는 12월 8일 제일은행 본점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5대 그룹 상호지급보증 해소방안을 확정하고 올해 말까지 12조7000억원에 달하는 채무보증을 이같이 완전 해소하기로 했다. 협의회 소속 25개 금융기관들은 이중 보증 또는 부실기업이 우량기업에 서준 보증의 경우 조건없이 없애주되 나머지는 해당 기업의 채무상환능력에 따라 가산금리를 물리는 등 대가를 받고 보증채무를 풀어주기로 했다. 채권단은 특히 앞으로 다른 업종 계열사간 보증채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재무구조개선약정에 반영시키기로 했다.
둘째, 총수 경영권에 대한 보호를 전제로 금융기관 대출금을 출자로 전환해준 것은 엄청난 특혜이고 그야말로 재벌을 살려주는 것이다. 그룹별로 1-2개 주력기업에 대해 대출금 출자전환을 적극 유도한다는 원칙을 확정하였는데 출자전환으로 금융기관이 대주주가 되더라도 기존 대주주와 약정을 맺고 경영권은 보호하되 사외이사 감사를 파견해 경영감시기능을 강화하기로 하는데 그쳐 총수의 경영권은 확실히 보장되었다. 금융기관들은 총수의 경영실패로 출자배당을 받지 못하면 큰 손실을 입게 된다. 5대재벌은 IMF체제 1년동안 겉으로는 구조조정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사업매각 등 자구노력보다는 차입금에 의존한 경영을 지속해 왔다. ’1998년 11월말 현재 5대 계열의 자금조달 현황’이란 금융당국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5대그룹이 1998년에 은행 등을 통해 조달한 자금은 1997년 12월에 비해 24조5천억원이 줄었지만, CP나 회사채 발행 규모는 3조4천억원과 39조3천억원이 각각 늘었다. 이에 따라 5대그룹이 98년에 조달한 자금은 97년보다 18조2천억원이 많은 161조원에 달했다. 이는 중견, 중소기업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기업이 98년에 금융권에서 조달한 527조2천억원의 30.5%에 달하는 규모이다. 5대그룹의 총 조달자금 161조원 중 회사채가 차지하는 금액은 전체의 53.2%인 85조5천억원, CP는 28.4%인 45조8천억원, 대츨금은 18.4%인 29조7천억원으로 나타났다. 은행과 종금,리스사에서의 자금조달이 줄어든 반면 회사채 발행이 크게 느는 바람에 투신사로부터의 차입금은 55조7천억원이나 증가했다. 가장 많이 자금조달을 증가시킨 그룹은 대우로 15조원에 달하고, SK는 2조9천억원, 현대는 1조8천억원의 자금을 각각 조달한 반면 삼성은 1조1천억원, LG는 5천억원을 각각 갚았다. 이에 따라 5대그룹의 총 여신규모는 지난 11월말 현재 161조원으로 작년 12월말의 142조8000억원보다 12.7%가 증가했다. 그룹별로는 대우가 44조7천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현대 42조7천억원, 삼성 32조4천억원, LG 27조1천억원, SK 14조1천억원 순이었다({매일경제}, 1998. 12. 15). 부채의 출자전환은 이러한 무리한 차입에 따른 경영압박을 국민의 부담으로 덜어주는 것이다. 실제로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은 “이번 개혁은 재벌기업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취지인 만큼 재벌들도 협조할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중앙일보}, 1998. 12. 8).
셋째, 사업부문 매각으로 20조원을 조달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외자유치도 기대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으로서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재무구조개선 추진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고, 결국 정부가 추가적인 지원을 해주거나 재무구조개선 일정을 늦추어주게 될 것이다. 재벌의 버티기작전이 통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재벌들의 지지부진한 재무구조 개선으로 기업들은 부실을 그대로 껴안고 있다. 잠재적 부실기업을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조차 지불하지 못하여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 /이자비용) 1배 미만의 기업으로 정의할 때 1998년말 기준으로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잠재적 부실규모는 1-5대 재벌의 경우 부실업체수는 전체 149개 중 38-44개로 26-30%, 부실차입금은 24-41조원으로 14-25%에 이르고 6-70대 재벌의 경우는 부실업체수가 무려 46%-47%, 부실차입금은 52-55조원으로 54-57%에 달한다. 전체적으로는 부실기업이 31-33%이고 이들 부실기업의 총차입금규모는 113-13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1999년의 16개 그룹 결합재무제표에 의하면 16개 그룹 가운데 9개 재벌이 영업이익으로 금융차입금 이자도 못내는 수준(이자보상비율 1이하)으로 밝혀졌다. 4대 그룹에서는 삼성이 3.15로 가장 좋았고, 현대는 1 이하로 나타나 최근의 현대문제가 공연히 나온 게 아님을 보여줬다. 한진·쌍용·한솔·두산·코오롱·새한·한라·강원 등도 이자 만큼도 못벌고 있었다. 4대 그룹의 비금융업 부채비율은 평균 225.4%였고, 금융부문 부채비율은 현대가 7308%로 가장 높았다. 16개 재벌의 내부거래 비중은 평균 34.9%로 드러났다. 4대 재벌의 평균은 이보다 높은 39.2%로 나타났다({한겨레}, 2000. 8. 2)
이런 가운데 제조업의 부채 비율은 꾸준히 하락했다. 한국은행의 ’2000년 상반기 기업경영분석’에 의하면 국내 제조업의 부채비율은 1997년말 396.3%에서 98년 303.0%, 99년 214.7%, 2000년 6월말 현재 193.1%로 큰 폭으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차입금의존도는 도 1997년말 54.2%에서 2000년 6월 현재 41.4%로 하락했다. 다만 기업내부의 차별화현상이 심화되어 이자보상배율도 전년 동기보다 64.2% 높아졌지만 제조업체 4개 회사 중 1개사 이상이 영업이익으로 대출금이자를 충당하지 못했다. 30대 그룹 제조업체 중 이자보상배율 100% 미만 업체는 조사대상업체의 41.2%에 달했다.

3. 총수일족 지배구조의 존속
첫째, 계열회사 경영난 심화와 국가적 경제위기에 대한 재벌총수 일족들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99년 회계연도부터 시행되는 결합재무제표 작성은 총수경영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사외이사 및 감사제도 도입, 소액주주 권한 강화 등도 상반기부터 시행하였지만 이제까지의 실적을 보면 총수일족의 경영전횡을 실질적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2월 결산법인을 보면 1998년 3월말 현재 501사가 650명의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그러나 1년 사이에 85명이 사임하고 46명이 새로 선임되어 1998년말 현재 활동중인 사외이사는 474사에 611명에 그치고 있다. 사외이사제도가 정착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현재의 기업 경영지배구조 때문이다. 권한은 없이 책임만 과중한 기형적인 사외이사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99년 주주총회부터 모든 상장사는 이사수의 25% 이상을 사외이사로 임명해야 하지만 이에 대비해 대부분의 회사들은 사외이사를 2명 이하로 줄이기 위해 전체 이사수를 8명 정도로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사외이사도 선임때부터 대주주의 입김이 작용한다.
1999년 6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집중투표제(이사 선임투표에서 1주당 선임할 수 있는 이사수에 상당하는 복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도 정관에서 이를 배제할 수 있도록 됨으로써 도입도 되기 전에 사문화될 가능성이 크다. 1998년 12월 결산법인 111개사 가운데 43.2%인 48개사가 정관변경 안건에 집중투표제를 배제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으로 파악되었다. 정부는 2000년 11월에 증권거래법 개정사항 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회계장부열람권 행사요건을 완화(1%이상→ 0.1% 이상)하는 등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기업이 특수관계인과 일정규모 이상의 거래시 이사회 승인 및 사후 주총에 보고토록 하며, 사외이사 선임절차 개선 및 직무수행에 대한 평가기능을 강화하고,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안 하되 실시요건을 완화하며, 집단소송제는 단계적 도입방안을 마련하였다. 2000년 5월말 기준 집중투표제를 정관에 도입하고 있는 상장회사는 전체상장법인의 22%(707개사중 155개사) 수준이다.
둘째,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철폐한 것은 재벌체제를 공고히 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8년 2월 출자총액제한(순자산의 25% 이내)제도가 폐지된 후 5대재벌의 출자총액은 9월말 현재 14조4천1백70억원으로 7개월동안 3조4천억원이나 늘어났다. 재벌그룹들은 1998년에 기업구조조정과정에서 유상증자를 하면서 계열사를 동원해 상장계열사에 대한 내부지분율을 더 높였다. 구조조정을 위해 대규모 유상증자를 하면서 계열사들을 대거 동원한 결과이다. 증권거래소가 10대 그룹을 대상으로 1998년도 최대주주와 총수의 친인척 등 5% 이상 대주주의 지분변동현황을 조사한 결과 내부지분율이 1998년 1월의 30.4%에서 1999년 1월에는 35.6%로 5.2% 포인트 높아졌다. 주식수로는 1999년 1월 현재 13억8천9백만주로 1998년초보다 5억5700만주(67%) 늘어났다({한겨레}, 1999. 2. 18)
이와 관련하여 재벌개혁의 2단계로 2001년 4월부터 30대 재벌의 과다한 업종 다각화에 따른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계열사 및 타법인 주식소유를 순자산의 25%로 제한하는 출자총액제한 제도가 다시 도입된다. 단 1년간의 해소기간을 주도록 할 방침이다. 현재 30대 재벌의 내부지분율 가운데 계열회사 지분율이 35%를 차지하고 총수지분율이 10%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제도 도입되면 총수의 지배력은 많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식지분율이 낮아지더라도 여러 계열회사에 대한 경영권을 계속 확보할 수 있다면 재벌해체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출자총액제한제 실시를 눈앞에 두고서도 LG나 SK는 최근 차세대이동통신(IMT-2000) 사업자 선정이나 한전 자회사 파워콤 인수에 나서는 등 막대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엘지와 에스케이가 노리는 사업의 투자규모가 수 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계획대로 투자가 진행될 경우 양쪽 모두 출자총액한도를 크게 초과할 것으로 보여, 정부가 추진중인 경제력집중 완화정책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있다. 엘지와 에스케이가 해소해야 할 초과 출자총액은 각각 4조100억원과 2조7300억원에 이른다. 2000년 4월15일 기준으로 엘지의 출자총액은 8조836억원으로 순자산 대비 49.6%에 이르고 있으며, 에스케이도 6조5851억원으로 출자비율이 42.8%나 된다.
셋째, “부당한 자금 지원 등 내부거래행위를 근절하여 경영역량을 핵심분야에 집중하고 공정경쟁원칙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부당내부거래의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실제로 재벌들은 계열기업간의 많은 거래가 부당한 거래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예컨대 계열기업의 모든 건설사업을 계열 건설회사에 몰아주는 것은 명백히 내부거래이고 시장의 범위를 좁히고 다른 경쟁사의 영업기반을 축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부당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넷째, 지주회사 설립허용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만 초래할 것이다.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의장은 1998년 12월 8일 “그동안 재벌들의 상호지급 보증이 완전히 해소되는 2000년 4월 이후에 지주회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5대 그룹들이 구조조정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함에 따라 내년부터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했다.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하더라도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막기 위해 부채가 일정비율 이내인 기업에 대해서만 이를 허용하는 등 보완장치를 마련한다고 하지만 지주회사제도는 과거 패전전의 일본 재벌의 예에서 보듯이 재벌의 문어발확장의 주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특히 검토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재도입 방침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Ⅲ. 금융 구조조정
금융 구조조정은 부실 금융기관의 퇴출, 공적자금에 의한 부실채권의 정리,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 강화 등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첫째, 부실 금융기관이 퇴출되었다. 금융 구조조정은 부실이 심한 제2금융권에 대해 우선적으로 퇴출조치를 단행했으며 은행권에 대해서는 1998년 6월 29일 5개 부실은행을 퇴출조치했다. 1997년 12월 9개 종합금융회사에 대해 영업정지를 내리는 등 16개 종금사, 6개 증권사, 4개 보험사, 2개 투신사에 대해 퇴출조치를 단행했다. 6월 29일 5개 부실은행에 대해 퇴출을 단행하고 이들 은행들을 5개 우량은행이 각각 자산부채이전(P&A)방식으로 인수하도록 조치했다. 경영평가위원회는 승인 : 4개 은행(조흥, 상업, 한일, 외환), 조건부승인 : 2개 은행(강원, 충북), 불승인 : 6개 은행(동화, 대동, 동남, 평화, 충청, 경기)으로 평가하였는데 금융감독위윈회는 불승인 대상에서 평화은행을 빼고 5개 은행을 퇴출대상으로 최종 선정했다.
둘째, 막대한 재정적 지원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했다. 정부는 98년 9월말로 1차 금융구조조정을 마무리하고 1999년 상반기까지 총 64조원의 자금을 국채발행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부실채권 정리기금을 통해 부실채권을 매입하는데 32.5조원, 예금보험기금을 통해 폐쇄된 금융기관의 예금을 대지급하고 은행 증자를 지원하며, 금융기관의 손실을 보전하는데 31.5조원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금융지원에 따르는 이자로 1998-99년간 8.3조원의 재정지원이 이루어질 계획이다. 22개 은행은 부채탕감에 대응한 대손충당금 적립 등으로 1998년에 14조48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적자를 입었고, 1999년에도 10조원에 이르는 적자를 볼 것으로 전망된다. 충당금이 부실채권 매각손실규모에 훨씬 못 미쳐 1999년에도 추가적인 대손충당금 적립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가 IMF 구제금융 초기에 예금자보호를 지나치게 두텁게 해준 것은 오류였다. 예금보호 대상기관이 아닌 한남, 신세기투신이 도산하자 정부나 나서서 예금을 사실상 보장해줬다. 금융기관 부실의 원천인 기업주에 대해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공적자금 조성과 투입은 국민의 부담으로 부실기업주, 은행 경영진, 부실금융기관, 예금자를 보상해주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따라 부실금융기관 경영진과 부실기업주, 예금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공적자금 투입액이 애초 예정이었던 64조원에서 109조원으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공적 자금을 처음 투입할 때의 금융기관 부실채권규모가 112조원이었는데 2000년 6월말 금융권 부실채권은 61조원으로 51조원이 줄어들었지만 투입된 공적 자금분 109조원중 이자비용을 뺀 순투입분 92조원에 비하면 오히려 41조원의 부실채권이 늘어난 꼴이다({매일경제}, 2000. 11. 13)
셋째,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 체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여신심사관행 및 제도의 개선, 리스크 관리체제의 구축, 내부통제체제(지배구조)의 개선 등이 추진되었다. 금융기관 자체내에 건전성 감독에 대한 축적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당 기간동안은 정부나 금융기관 협의회에 의한 외부감독이 중요할 것이다.
넷째, 금융기관의 소유경영구조 민주화 조치는 미약했다. 일부 금융기관은 외국 금융기관에 매각하는 조치를 취했다. 12조5천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케피탈사에 인수되었다. 8조1천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서울은행은 홍콩계 증권회사가 관심을 가졌으나 포기했다. 일부 은행들은 재벌에 인수당하였다. 조흥은행과 강원은행(현대 종금 인수)의 합병과정을 보면 현대그룹은 조흥은행과 합병이 추진중인 강원은행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강원은행의 주식가치를 물타기했다. 조흥은행에 의하면 강원은행은 현대종금과 합병하면서 자본금을 5배 물타기한 반면 조흥은행은 4.3대 1의 비율로 감자를 해 자본금을 2065억원으로 줄였다. 2월 9일자로 합병을 마무리한 강원은행은 자본금 1조8792억원에 현대 계열사들이 61.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합병전 강원은행의 자본금은 250억원, 현대종금은 3441억원에 그쳤으나 합병비율을 산정할 때 현대종금 1주당 강원은행 주식 5.3배씩 영업권가치를 인정해줘 합병 강원은행의 자본금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이는 결국 현대종금이 530% 무상증자를 해 강원은행과 합병한 것으로 현대종금 상장주식의 70% 이상을 보유한 현대계열사들에게 특혜를 준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 주식가격을 기준으로 조흥은행과 합병하면 합병은행의 대주주는 현대가 된다({한겨레}, 1999. 2. 13). 김대중정권은 금융기관의 소유주체로서 국민들이 아니라 재벌과 외국 금융자본을 등장시켜가고 있는데 시장경제에서 자원배분기능이 금융기관에 있음을 고려할 때 이것은 국민경제를 그야말로 소수의 세력에 내맡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최근에는 2단계 금융구조조정이 진행중이다. 금융감독위원회는 1단계 금융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추진함으로써 누적부실 정리를 통해 자금중개기능이 활성화되어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하며, 금융기관의 도적적 해이를 방지하고 채권금융기관이 기업구조조정을 주도하게 되는 등 시장경제 원칙이 정착되도록 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직 금융기관의 경쟁력이 취약하고 부실기업을 시장기능에 따라 상시적으로 구조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구축과 소프트웨어 측면의 개혁은 미흡하다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성장 속도가 둔화되는 속에서 금융구조조정이 지연될 경우 실물경제 불안과 금융불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구조조정 성과를 크게 훼손할 우려가 있으므로 금융구조조정을 조속히 완료하여 금융산업을 정상화시키고 금융불안을 제거함으로써 경제안정기조를 확립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정부는 2단계 금융구조조정의 기본방향을 공적 자금 투입을 통한 잠재부실 요인의 조기정리와 건전성 회복, 부실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통해 시장 중심의 구조조정 기반 구축, 금융산업의 경쟁력 강화 등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40조원의 공적 자금 투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부실채권을 구입해주는 방식을 계속하고 있어서 효과 측면에서 문제가 될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은행법 개정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현행 제도에서는 비상임 이사(사외이사)가 상임이사 수보다 많고, 비상임이사의 구성은 대주주 대표 50%, 소액주주 대표 30% 이사회 추천 20%이며, 비상임이사도 포함된 추천위원회에서 은행장 후보를 추천한다. 이것을 주주대표 70%, 이사회 추천 30%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현행 동일인 지분 4% 규제한도를 장기적으로 개선하여 주주권 행사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5대 재벌에게 주주대표 자격을 허용하며, 기관투자가에도 주주 대표자격 허용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주주 중심으로 사외이사가 선임되므로 사외이사제도가 유명무실해진다는 것과 재벌의 제1금융권 진출을 허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공적자금 투입은행의 경우, 강제적 합병을 통한 상장 뒤 매각과정에서 동일인 소유지분의 한도를 폐지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금융지주회사 법안 역시 문제를 안고 있다. 금융지주회사법안의 주요내용은 부실금융기관의 효과적인 구조조정수단으로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순수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하며, 100% 자회사 형태의 은행 및 비은행 금융기관 소유를 허용하고 비은행 지주회사에는 은행법상의 동일인 소유지분 한도를 두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금융지주회사 제도의 도입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금융지주회사 방안은 정부의 금융정책 실패를 회피하고 공적자금 투입분을 회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제시되었다. 다른 업종 금융기관의 통합이 아닌 금융지주회사의 설립이기 때문에 전문화 및 경영효율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이 안고 있는 부실채권의 정리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금융지주회사로 통합되는 것은 대규모 부실과 경영효율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 은행권 부실화의 주요한 문제인 워크아웃 여신에 대한 처리문제가 완전 해결되지 않아 잠재적 부실이 발생에 따른 추가 부실 발생위험에 대한 안전장치가 없다. 국유화된 금융지주회사를 상장 뒤 재매각한다는 것인데, 주식시장에서 공적자금 투입 금융지주회사의 주식을 대량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을 갖춘 구매자는 현실적으로 투기자본이나 재벌에 한정되어, 재벌의 은행소유를 촉진할 수 있다. 또한 금융지주회사에 대한 금융전업가 소유 허용은 재벌화 및 대주주 중심의 폐단적 소유구조를 초래할 수 있다. 금융전업가에게 은행지배를 위해 소유지분 한도를 완화적용하는 것은 은행을 부실화시킨 주된 원인인 기업·은행의 폐단적 소유지배구조를 확대재생산하고 재벌의 은행소유를 촉진할 것이다. 금융전업가의 기준의 모호성으로 인해 사실상의 재벌 은행소유를 허용하는 것이 된다. 은행지주회사의 경우 사실상 재벌참여를 허용해 은행의 재벌 사금고화를 촉진한다. 계열분리 후 5년이 지나면 은행지주회사를 소유할 수 있어 산업의 금융지배와 방만·과다차입 경영을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과다 차입 및 방만 대출로 인한 기업·은행 지주회사의 재무구조 악화 가능성을 제공한다. 비은행 지주회사의 경우 동일소유지분한도가 제한이 없어 재벌화 경향을 촉진시킨다. 산업자본이 비은행권을 사금고화하는 경향을 양산해 경제위기 재발 가능성을 상존시킨다. 재벌개혁이 미진한 상태에서 비은행지주회사에 재벌참여 허용은 계열사 지원도구로 비은행지주회사를 이용하도록 한다.

Ⅳ. 공공부문 구조조정
김대중정부는 [1차공기업민영화계획](1998. 7. 3) 등을 통하여 108개 공기업 중 32개 기업을 민영화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중공업은 포항종합제철 등과 함께 완전민영화하고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등은 단계적으로 민영화할 계획이다. 민영화의 목표는 소유지배권의 변화를 통하여 내부비효율을 제거함으로써 기업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것과 정부 보유주식 또는 공기업의 자산을 매각함으로써 매각수입을 재정수입으로 활용하려는 것, 경제를 민주화하려는 것 등이다. 김영삼정부 때까지는 효율성의 제고에 초점을 맞춰왔고, 공기업을 재벌들에게 매각했을 때 경제력 집중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민영화가 늦추어져 왔으나 IMF체제하에 김대중정부는 공기업 매각에 의한 제정수입 확대 및 외자유치를 중시하였고, 해외자본에게 신속하게 매각하려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1998년말 정부는 여당단독으로 열린 임시국회에서 [공기업의 경영 구조개선 및 민영화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켜, 한국담배인삼공사, 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중공업 등 민영화 대상 공기업에 대하여 동일인의 주식소유한도를 7%에서 15%로 확대하고, 단 한국중공업에 대해서는 동일인 주식소유한도를 적용하지 않도록 했다. 또 2003년 1월 이후 매각할 수 있도록 한 제한을 폐지하여 공기업을 단기에 매각할 수 있도록 했다.
기획예산위원회는 1999년 3월 2일 ‘제4차 공기업민영화추진위원회’ 회의를 갖고 발전설비 빅딜문제로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한국중공업 국내외 공개매각을 계획대로 상반기중 끝낸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정부는 완전민영화 대상 5개 공기업 가운데 이미 매각된 국정교과서와 종합기술금융을 제외한 종합화학, 포항제철, 한국중공업에 대해 1999년내에 정부지분을 대부분 정리하거나 경영권을 민간에 넘길 방침이었다.
포철은 1998년 12월 9일부터 정부(3.1%)·산은지분(23.6%)을 매각하여, 2000년 10월 4일 민영화를 완료했다. 매각 수입은 2조8340억원이었다. 민영화 이후의 지분구성은 금융기관 21%(기업은행 5%), 일반법인 10%, 자사주 15%, 개인 8%, 외국인 46%로 되었다. 한국중공업(현재 지분구성: 산은 43.8%, 한전 40.5%, 외환은 15.7%)은 2000년내 65∼75%의 지분을 매각, 지배주주를 선정·민영화할 계획이다. 공모상장 24%, 웨스팅하우스, GE 등과의 전략적 제휴 5-15%, 경쟁입찰(4대 재벌 제외, 유사·동종업종으로 제한) 36%, 2001년 잔여지분 매각 25-35% 등의 계획이다. 공공부문 인력감축을 강행하여 1998-2000년에 41,234명을 감축할 계획이었는데 99년말까지 33,359명을 감축하였고, 2000년 9월중 한국통신(1,600명) 등 2,750명 감축에 이어 10월에는 석탄공사 감축(321명), 11∼12월중 한국통신(1,884명) 등 2,223명 인력감축을 완료할 계획이다. 이렇게 인력감축은 계획대로 추진되는 반면 공기업의 민영화는 외환 획득이라는 목표가 이제는 현실성이 없어졌고, 부실이 심한 공기업은 별로 없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한 편이다.
현재 정부의 빅딜과 공기업 민영화 추진계획대로 되어간다면 대부분의 공기업은 외국자본과 컨소시움을 한 재벌자본에게 넘어갈 것이 필연적이다. 공기업을 재벌에게 넘겨주는 것은 재벌총수의 소유경영독점, 과잉중복투자, 부실경영이라는 재벌체제의 문제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과거 1980년대초에 유공의 민영화로 현재 SK(주)로 된 것은 공기업 민영화의 전형적 실례이다. 재벌의 계열기업이 될 경우 경영이 개선된다는 것은 보장할 수 없고, 전문경영체제가 불가능하고 오너경영체제가 확립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경영이 악화될 수 있다. 독점적 대기업이 사적 개인에게 장악되는 것으로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며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될 수 있다. 공기업 민영화는 재벌의 문어발 업종 확장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수한 공기업에서 발생한 이익이 다른 부실계열회사 지원으로 사용될 수 있다. IMF시대에 들어와서까지도 극성을 부리고 있는 재벌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의 실태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 공기업이 해외자본에 매각할 경우 외국의 선진 경영기법이 도입됨으로써 일시적으로 기업경영의 효율성 증대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기간산업이 외국자본의 손으로 넘어가면 국가경제의 대외종속성이 심화된다.

Ⅴ. 노동부문 구조조정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를 도입하기 위해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용유연화(정리해고, 희망퇴직 등을 통한 노동력의 수량적 감축과 임시직, 일용직화)와 임금유연화(임금체계 개편 및 임금총액의 감축)를 동시에 본격화하고 있다. 즉 1990년대 초반부터 시도하였으나 노조의 강한 저항으로 미처 관철시키지 못한 반노동자적 인사제도의 다양한 변용들이 ‘경제위기’를 빌미로 보다 전면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임금삭감, 노동강도 강화’ 등 일방적인 고통분담을 강요받으며,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위기에 처해졌다.

1. 고용의 유연화
김대중정권과 재벌들은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과 정리해고에 의한 대량 실업을 동시에 강요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 결정 후부터 자본측과 기득권세력들은 경제파탄 책임론의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정리해고에 대한 적극적 공세를 폈다. 이를 통하여 재벌들은 사회적 쟁점을 경제파탄 책임추궁에서 정리해고로 이동시켰다. 노동자들은 경제위기에 대해서 책임을 질 것이 별로 없는데도 ‘정리해고를 수용하지 않으면 경제위기를 가중시키게 된다’는 재벌주도의 여론에 몰렸다.
정리해고제 법제화의 효과와 관련해서는 한국경제가 미국과는 다른 노동시장 여건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첫째, 미국에서는 노동시장내의 각 부문간의 장벽이 비교적 약하다. 직업간 이동에 대해서도 사회적 인식상의 장애가 적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생산직 종사자가 관리직으로 옮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관리직, 전문직이 생산직으로 옮긴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직업간의 이동장벽이 높다. 둘째, 미국은 컴퓨터소프트웨어, 컨설팅, 광고, 영화, 위락산업 등 세계최강의 서비스산업을 갖추고 세계 각국의 우수한 인력과 자본을 유입하여 세계 각국에 수출함으로써 제조업에서 방출되는 인력을 꾸준히 흡수할 수 있다. 산업구조조정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국가는 미국을 제외하는 별로 없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에서도 해고가 까다롭고 또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억제를 통해 고용문제에 대처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생산적 서비스산업이 대단히 취약한 한국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정리해고를 하면 나머지 노동자는 안전하다든가, 정리해고가 쉬우면 기업들이 채용도 쉽게 할 것이므로 오히려 고용이 늘어날 수 있다는 논리는 이러한 현실적 조건을 무시한 탁상공론이 될 수 있다. 국제금융자본과 미국자본의 강요에 따라 전혀 조건이 다른 미국 노동시장의 흉내를 냈다가는 대량실업의 재앙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현장에서 이미 실업대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정리해고제 법제화는 기름에 불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벌 구조조정에 따르는 대규모 인력감축문제 등에 대한 대책이 결여되었다. 외국에서는 인수합병은 정리해고의 사유가 될 수 없도록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인수합병을 정리해고 조건으로 당연시하고 법에 명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5대그룹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조정의 파장이 해당그룹 뿐만 아니라 협력업체에까지 미치면서 기업 구조조정의 최대 난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1997년말 총63만명이던 5대그룹의 인력은 1998년 9월말 현재 57만여명으로 10% 정도 줄었지만 사회적 여파는 5개은행 퇴출 등에 따른 금융기관 고용조정만큼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5대그룹이 계열사를 인수합병, 사업 맞교환, 매각 등을 통해 드러내놓고 정리할 수밖에 없다. 전체 임직원이 10만5천명인 대우그룹의 경우 41개 계열사를 10개로 줄이는 과정에서 인수합병으로 1만3천명, 분사(分社)로 1만5천명, 매각청산 등을 통해 1만여명이 각각 정리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삼성그룹도 이미 빅딜이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방침이 결정된 자동차 항공 종합화학 등에 종사하는 1만5천명의 인력이 일단 고용조정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5대재벌보다 더 심각한 것이 협력업체 종사자들의 고용문제다. 재벌그룹이 대부분의 업종에서 중소부품업체들을 장악하고 있는 우리나라 산업구조에서 재벌의 대대적 고용조정은 중소기업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협력업체뿐만 아니라 가전 및 자동차 대리점, 비주력계열사 판매망들의 대대적인 축소도 잇따를 것으로 보여 이 분야 종사자들 역시 실직 위기에 직면할 전망이다.

2. 임금의 유연화
임금의 유연화는 주로 연봉제의 도입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연봉제는 능력과 업적을 기준으로 임금을 결정함과 동시에 임금체계 유연화를 통하여 ‘능력주의 인사관리’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실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연봉제 도입을 개별 기업에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도입되고 있는 연봉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도입되던 연봉제와는 조금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 이전 연봉제가 사무직 일부에 국한되던 것과 달리, 직종과 상관없이 공무원·대학 등을 비롯, 거의 전 업종에 걸쳐 도입되고 있다. 둘째, ‘비조합원’인 관리직이나 일부 상위직책에만 국한되어 실시되던 경향과는 달리 최근에는 전직원을 상대로 전면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이는 이전 연봉제가 노조의 강한 반발로 어려움에 처하자 비조합원인 상급자들을 주요 대상으로 했다면 IMF 이후 본격적인 구조조정기에 접어들어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주춤한 틈을 타 조합원을 포함한 전직원에게 확대적용함으로써 보다 강력하게 연봉제를 실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조가 수세적인 틈을 타 노동자들과의 합의없이 일방적으로 실시하는 등 도입과정 자체가 폭력적이다. 넷째, 연봉제의 형태에 있어서도 기존과 같이 일정부분 연공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성과에 대한 성과급을 지급하는 형태의 ‘부분적 연봉제’가 아니라 호봉표를 완전히 폐기하기도 하며 ‘미국식 연봉제’를 모델로 한 이른바 ‘완전연봉제’를 실시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다섯째, 이전에 도입된 연봉제는 인센티브제를 가미한 ‘플러스섬(plus sum)’방식을 택한 것이 특징이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업적이 떨어진 부서 및 성원의 급여를 감해서 유능한 부서나 성원에게 주는 ‘제로섬(zero sum)’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연봉제는 노동자간 임금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뿐 아니라 성과가 낮은 노동자에 대한 ‘임금삭감’을 정당화시킨다.

Ⅵ.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의 귀결

1. 고용문제의 악화
고용 사정도 기업도산 증가와 구조조정의 여파로 크게 악화되었다. 실업률이 1997년 11월 2.6%에서 1998년 7월 7.6%(계절조정치는 8.6%)로 상승하였고, 실업자수는 1998년 7월 165만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후 실업율은 99년 9월에는 4.9%(계절 조정치 5.3%) 실업자 107만명, 2000년 9월 3.6%(계절 조정치 4.0%) 실업자수 80만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경기하강과 제2차 구조조정의 여파로 실업율은 상승할 전망이다. 노동연구원은 2001년 1/4분기 실업률이 최소 4.3%(94만명)에서 최대 4.8%(104만명)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불과 4-5개월 사이에 증가하는 30만명의 가운데 경기적 요인에 의한 실업자 증가는 17만명이다.
고용의 내용도 악화됐다. IMF 이전인 1997년 7월에 정규직 노동자 710만 명에 대해 임시직 노동자가 426만 명이고 일용직 근로자가 199만 명으로 정규직 노동자의 비중이 53.2%로 더 높았다. 그러나 ’1999년 9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임금 노동자 1천294만7천명의 47%인 607만9천명만이 정규직이고 나머지 53%이다. 국제통화기금이 강요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결과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은 1999년 상반기에 신규 취업자의 92%가 임시·일용직인 것으로 집계했다. 고용조건이 나빠지면서 임금 차이도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12개 은행에서 3급 이하 은행원 348명을 뽑아 실시한 조사에는,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이 정규직의 41%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수당과 복지후생 등을 고려하면 격차는 최고 89%까지 벌어진다. 임시·계약직의 급증은 여성 노동의 증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통계청은 1999년 9월 신규 취업 여성이 27만 8천 명으로 남성의 19만 8천 명보다 많다고 밝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율은 남성이 58%대 42%인 반면, 여성은 30%대 70%였다.

2. 독점의 강화
구조조정의 결과 하위 재벌들의 다수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대상으로 전락한 반면에 상위 재벌들은 대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독점적 경제력을 강화하였다. 재벌들은 향후 주력업종 이외 더 이상의 업종 확장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현대재벌은 다른 재벌과 대조적으로 한국 최대 재벌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부채비율이 600%에 이르지만 현대는 자동차, 정유, 금융산업의 기업들을 인수했다. 그리고 다른 재벌들이 개혁와중에 수년간 이익을 낼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대북투자안을 계획하였다. 800만평의 해주공단 개발, 평양에 10만 kw급 화력발전소 건설, 연간 24만대의 자동차 라디오 조립공장 건설, 원산에 20만톤 규모의 수리조선소 건설, 북한 석유 개발, 제3국 공사에 북한과 공동진출, 통신사업 등등. 현대는 금강산 관광사업에만 향후 6년간 9억6백만달러를 북한에 지급하기로 했다.
5대 재벌이 시장지배적 사업자와 품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어 이들의 독과점적 지위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시장지배적 사업자 발표에 의하면 5대 재벌이 시장지배적 품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년의 39.8%에서 99년 45%로, 시장지배적 사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30.9%에서 99년 33.0%로 각각 높아졌다. IMF관리체제하에서 김대중정부가 추진한 기업구조조정을 거치면서 5대 재벌의 독과점적 지위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주력업종도 상위 2-3개사로 재편되는 과점화가 진행되었다. 반도체와 자동차는 2사체제로 재편되었고, 석유화학은 통합이 완료되면 8개사에서 6개사로 재편된다. 금융부문에서도 독과점이 진전되어 5대그룹 소속 비은행 금융기관의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5대그룹 소속 투신사의 수탁고는 99년 11월 현재 총 81조7천억원에 달하고 점유율은 97년 3월 5%에서 99년 3월 현재 30%를 넘어섰다. 향후 재벌들은 금융시장의 독점력을 바탕으로 실물부문에서 독점력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정보통신분야의 독점화가 급격히 진행될 것이다. 에스케이텔레콤이 신세기통신을 인수하여 이동통신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어섰다.
재벌개혁은 대우사태와 투신사문제가 불거진 이후 실종되고 있고, 부채비율 200% 달성만이 추진되었다. 김대통령도 향후 경기회복에서 재벌의 견인차 할을 기대하면서 소유자의 경영독점과 문어발 확장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대그룹의 경영난을 계기로 정주영이 총수일족은 현대 그룹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했지만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물러나지 않았고, 정몽헌도 현대아산의 금강산사업을 지휘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경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재벌들은 부채비율 200%로 낮추기를 부실기업 매각이 아니라 우량기업 수익을 부실기업에 출자하여 달성한 결과 30대그룹 계열회사들이 다른 회사에 출자한 돈이 2000년 4월 15일 46조원으로 지난 1년 동안 사상 최대 규모인 16조원이나 증가했다. 이에 따라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면 부채비율은 300%로 높아지고, 매출액은 30-40%, 당기순이익은 20-30%로 줄어든다. 부채비율 200% 달성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3. 빈부격차의 확대
김대중정권은 긴축적 거시경제정책과 함께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정책을 폄으로써 불황을 심화시켰다. GDP 성장률이 98년 1/4분기 -3.8%로 80년(4/4분기) 이후 18년만에 첫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경기침체가 가속되었다. 연간으로는 1997년 5.5% 성장에서 98년 -6.4%로 하락했다가 99년 10.5%로 성장하여 외환위기 이전의 1997년 수준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 외환 위기 이후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질소득이 큰 폭으로 감소하고 소득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었다. 98년 3/4분기 도시근로자 가구당 실질소득이 전년동기대비 20% 감소하여 4년전 수준으로 후퇴했다. 전국지니계수는 1997년 0.399, 98년 0.440, 99년 0.437로 높아졌고 선진국의 평균 0.319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 조세 및 사회보장급여를 통한 소득재분배 역할은 극히 미미하여 1998년에 세전 및 사회보장급여 이전 지니계수는 0.440인데 세후 및 사회보장급여 이후 지니계수는 0.374로 개선정도는 0.066에 불과하다. 선진국에서 대체로 0.1-0.2 수준에 있는 것과 크게 비교된다. 1996년 하위 20%의 소득이 상위 20%의 30.5%였으나, 99년에는 17.4%로 낮아져 격차가 두 배 가까이 확대됐다.
고용 불안정 등으로 빈곤층이 크게 늘어났다. 유엔개발계획과 참여연대의 연구에 따르면, 빈곤선인 1일 4달러를 기준으로 한국의 빈곤율을 추정했을 때 1997년 8.6%에서 1998년 19.2%로 급격히 높아졌다. 또 1999년 1/4분기에 월평균 가계 지출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가구수는 전체의 18.8%인 270만여 가구로 97년의 14.4%에 비해 점점 높아졌다.
이러한 소득격차와 빈곤 확대는 소비수요의 위축을 초래하여 2000년 하반기부터 경기가 하락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총소비는 1999년에는 전년에 비해 8.5% 성장하여 10%대의 고성장을 뒷받침했으나 이것은 외환위기 충격에 의한 1998년의 일시적 소비감퇴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였고, 2000년 하반기에 들어와서는 전년 대비 증가율이 3/4분기 5.0%, 4/41 분기 3.9%로 하락했다.

4. 대외적 종속의 심화
김대중정권의 구조조정과 과도한 대외개방으로 경제의 대외종속이 심화되었다. 외국인투자 촉진정책에 힘입어 1998년에 유입된 외국인직접투자는 88억5천만달러로 1997년보다 27%가 증가했다. 1999년에는 70%가 증가하여 155억달러에 이르렀다. 업종별로는 제조업 68억달러, 서비스업 83억달러로 서비스업의 비중이 55%로 우세했다. 뉴브리지가 제일은행을 인수하여 외국인행장이 취임했고, 대우자동차에 대해 GM이 인수의사를 밝혔다.
증권투자도 확대되어 외국인의 투자회사, 보험회사, 증권회사, 연금, 기금에 대한 소유지분율은 1999년 10월 현재 20.6%(약 58조원/500억달러)에 달한다. 1998년에 외국인 주식투자 유입 165억달러, 유출 117억달러, 순유입 48억달러였는데 1999년에는 유입 415억달러 유출 363억달러, 순유입 52억달러로 유출입 합계로 본다면 외국인 주식투자는 98년에 비해 2.6배로 늘어났다.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지분률은 2000년 7월 12일 현재 30%를 넘어섰다. 1999년 10월 현재 외국인이 국내 최대주주보다 보유주식수가 많은 상장사는 98년보다 8개 늘어난 45개사이다. 이들 45개사의 외국인 지분율은 한해 동안 8.13% 포인트 늘어난 32.55%이고 국내 대주주 지분율이 외국인보다 높은 528개사의 외국인 지분율은 오히려 1.92% 포인트 줄어든 6.78%로 나타났다. 최대주주가 한국인이면서 외국인이 국내 대주주 보다 지분율이 높은 회사는 삼성전자(외국인 지분율 47.09%, 2000년 7월 12일 현재 56.89%로 상승), 하이트맥주(46.8%), 신한은행(41%), LG화학(34.95), 포항제철(30%), 현대자동차(29.9%) 등이다. 지식산업과 정보통신산업의 성장을 배경으로 향후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한미, 한일 투자협정 추진, WTO 뉴라운드 협상의 개시로 국제적으로 신자유주의정책이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므로 외국자본의 진출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이러한 외국자본의 급속한 진출로 한국경제는 외국자본의 움직임에 더욱 심하게 노출되었고, 경제의 핵심중추가 외국인에게 장악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김대중대통령은 외국자본이 더욱 많이 들어오는 것이 한국경제에 대한 외국자본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으로 한국경제에 유익한 것이라는 논리를 펴지만 이것은 한국자본주의와 선진국, 특히 미국자본주의가 처한 상황이 다름을 간과한 탁상공론이다. 미국에 진출한 외국자본은 미국의 중핵산업을 장악할 수 없고,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정도에 불과한데 비해 한국에 진출한 선진국의 자본은 수익성 높은 중핵산업을 지배하면서 모국과 경쟁될 수 있는 독자적 기술개발과 국제적 판매망 구축을 저지한다. 최근에 와서는 국내 금융기관 중 경쟁력이 취약한 투자은행 투자신탁, 뮤추얼펀드, 재보험, 재무설계분야에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추진되고 있는 2단계 외환자유화는 사실상 외환거래의 완전자유화를 완료하겠다는 것으로 위험하다. 제1차 외환자유화 시행(99.4.1)의 주요내용은 선물환 거래에 대한 실수요 원칙 폐지, 재무건전 기업에 대한 1년 단기 외화차입 허용, 기업의 대외영업활동과 관련한 경상지급 제한 철폐, 기업·금융기관의 해외직접투자 및 해외부동산 취득자유화, 외국 업무의 등록제 전환 및 환전상 설치의 자유화 등이었다. 제1차 외환자유화 조치 이후 외국인 증권투자자금의 유출입 규모가 외환거래에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었다. 재경부가 제출한 제2단계 외환거래법 개정안의 주요내용은 해외여행 경비제한 완화, 유학비 등 증여성 송금의 규제철폐(5000달러 규제 완전철폐), 4인 가족 기준 100만달러인 해외이주비 규제를 철폐한다. 기업은 현재는 상품판매대금을 건당 5만달러 이상이면 만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국내로 들여와야 하는데 내년부터는 건당 한도가 대폭 상향조정됨에 따라 기업주들이 수출대금을 해외에 예치한 뒤 변칙적 운영이나, 자금세탁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내년 도입예정인 금융소득 종합과세 도입, 예금부분보장제 시행으로 위협을 느낀 거액재산가들의 재산해외도피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며, 단기적 투기자본에 대한 보호장치가 완전 해제되는 것이다. 재경부는 불법자금의 해외유출입 규제를 위해 대외금융정보시스템을 발족시켰으나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

Ⅶ. 진보적 구조조정의 필요성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이 경제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면 불황과 경제위기 속에서 노동을 보호하는 진보적인 내용의 구조조정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진보적 구조조정은 ①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을 자산가들의 부담으로 축소하고, ②소득재분배로 국가지출을 확대하여 불황을 완화하고 경기를 호전시키며, ③기업과 금융기관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법으로 소유의 사회화와 노동자의 통제를 확대하며, ④국제적으로 국제금융자본의 운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런던사회주의경제학자회의가 1978년에 발표한 대안경제전략(Alternative Economic strategy, AES)은 불황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전략으로 공공투자의 확대, 조세제도의 진보적 재구성 등의 구조적인 경기 재팽창; 계획협약, 개입주의적 국가기업위원회, 국유화 그리고 금융시스템으로 통한 산업통제계획 등의 산업전략;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수입 통제 등에 의한 자본의 세계화 제한을 제시하였다.
1997년말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사태를 맞이한 지 벌써 3년을 맞이하는 지금, 그동안노동자들의 희생만 가중되는 가운데 재벌과 외국자본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을 경험한 노동자계급도 이제는 경제위기에 대해서 선진국에서 추구해왔듯이 노동자의 생존권 중심, 자본가적 지배 억제 등 사회화 경제전략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000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은 월차·생리휴가 폐지 등 제2의 노동법 개악 음모 중단,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 2001년 전산업 동시 도입, 대책 없는 실업대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중단, 전체 노동자의 53%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 전임자 임금 문제 노사자율 원칙 등을 요구하였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공기업의 민영화와 해외매각 반대 및 기업의 공기업화 확대; 건설업에 대한 국가 투자 확대에 의한 건설업 부양; 대우자동차의 독자적 회생방안을 위한 노조, 회사, 채권단, 정부가 참여하는 4자 공동대책위원회 구성;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차별 철폐, 노동조건의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 등을 주장하고 구조조정 저지와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쟁의행위찬반투표의 조직과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하였다.

1. 자산가들의 부담에 의한 기업 부실문제의 해결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의 핵심은 살아있는 사람인 노동자들이 일자리에서 내쫓겨야 하는가, 자산소유자들이 소유자산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가에 있다. 방향은 분명하다. 돈보다 사람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들의 과다한 부채문제를 완화하기 위하여 부실기업의 부채를 은행의 출자금으로 전환하고, 부채의 만기조정과 일부 탕감이 필요하다. 부실기업정리 때 노동자들은 실업으로, 국민들은 세금부담으로 피해를 입는데 투자자들은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투자자들도 적절한 손실을 분담해야 한다. 외국자본과 국내 고액 금융자산 소유자들은 원리금 중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채상환기간 연장과 부채 일부 탕감 조치 등이 재벌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방향으로 악용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조정과정에 노동자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정부가 보증하거나 정부가 직접 조성하는 기업단위 내지 산업단위 노동자 투자기금을 통한 재무구조개선방안이 있을 수 있다. 정부 보증의 경우 정부는 노동자투자기금 조성을 위한 금융기관 대출에 대한 지급을 보증하고, 기업과 노동자투자기금 및 노동조합간에 대출금 상환 및 노동자 경영참가협약을 체결하도록 한다. 증자 및 자사주를 노동자투자기금에 분배하는 것도 이를 촉진할 수 있다. 대출금 상환은 이자비용 및 투자기금 관련 비용은 기업이 지급하고 원금만 기업의 이익을 기초로 한 노동자 분배몫으로 노동자들이 장기 상환하도록 한다. 이 방식은 노동자 소유참가를 동반한 기업재무구조의 개선을 가져온다.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기 때문에 대출 미반환에 대한 위험이 없으므로 금융기관의 재무구조 개선 효과도 있다. 정부 조성의 경우 무분별한 공적자금 투입분을 기업·금융기관의 노동자투자기금으로 전환하는 방안이다. 노동자투자기금 및 노동조합과 기업·금융기관간에 자사주 분배 및 상환협약을 체결한다.
‘예금부분보장제’를 실효성있게 실시해야 한다. 시행 연기론자들은 금융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실시하면 혼란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예금부분보장제도가 실시되면 다량의 예금이 우체국과 외국은행 또는 외국지분이 높은 대형은행으로 이동하여 금융기관간 부익부 빈익빈 등 혼란을 조장할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5년간 시행을 유예했다가 다시 2002년까지 2년을 더 연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예금보장제의 시행을 연기해서는 안된다. 이미 시행 예고되었고, 예금자들과 은행은 이에 대비하여 이미 충분히 움직였다. 불량 금융회사에서 높은 금리를 누리는 소수의 거액 예금자들을 국민들의 세금부담으로 보호하는 것은 정부의 도덕적 해이이다. 금융기관들의 방만한 운영도 법과 제도로 예금보장으로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금융개혁을 제대로 못한 일본의 실패사례를 답습해서는 안된다. 다만 보장할 예금의 규모는 약간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 예금보험공사의 분석에 따르면 96.6%의 예금주가 예금액 2천만원 이하로 충분히 보호된다. 그리고 보장금액을 1인당 2천만원으로 하더라도 5인 가족일 경우 1억원이 가능하고 또 여러 은행에 예금을 하면 수억원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1천만엔, 미국의 경우 10만달러로 1인당 국내총생산의 약 3배에 달한다. 이것을 우리 경제에 적용하면 약 3천만원 정도로 상향조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채권시가평가제’를 2000년 7월 1일부터 실시하기 시작한 것은 늦었지만 당연한 조치이다. 대우사태가 커진 것도 채권시가평가제 실시를 연기해 투자신탁회사에 투자하는 자산가들의 손실을 막아줬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기존 펀드에 대한 유예조치도 폐지하여 즉시 투자 전액에 대해서 채권시가평가제를 실시해야 할 것이다.

2. 소득재분배와 불황완화정책
소득재분배에 의한 경제활성화야말로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다. 우선 군사비 축소가 필요하다. 한국의 군사비 수준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국가군에 속하며, 한국의 경제적 수준에 비춰볼 때 과도할 정도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높은 수준의 군사비로 인하여 사회복지에 대한 일반 예산 지출은 20%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이 사회복지에 37% 이상을 지출하는 것과 비교할 때, 그리고 중상위 국가군이 22%의 사회복지 지출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커다란 차이가 아닐 수 없다. LG 경제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의 안보위협도가 ‘상’에서 ‘중’으로 낮아질 경우 방위비는 24.5%, 군병력은 53%의 감축이 가능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GNP는 매년 1.4%(5조)의 성장을 이루게 되며, 고용은 매년 2%(50만명) 가량 성장한다. 또한 수입과 수출은 급속히 성장하여 각각 8%, 3%의 성장을 거둘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군비축소와 병력감축은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연구는 안보위협이 ‘중’이라는 가정 하에서 이뤄진 것으로서, 최근처럼 평화의 기운이 높아질수록 안보위협은 ‘하’의 수준으로 낮아지며 그에 따라 군사비 지출과 병력수는 더 많이 줄일 수 있다. 이 경우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클 것이 명백하다. 군축은 사회복지의 증진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정부예산 중 군사비는 약 14조 4천억원, 주한미군에 대한 지원비는 약 3조 6천억원으로, 한국의 군사관련 지출은 매년 총 18조원에 달한다. 만약 18조원을 9조원으로만 줄이더라도 민중의 삶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사회보장을 확대 실시해야 한다. 한국의 국가복지비 지출은 1996년 현재 GDP 대비 3.98%로 OECD 회원국 평균치인 21.15%에 비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스웨덴, 독일, 영국 등에 비하면 약 1/8 – 1/6 수준, 일본에 비하면 약 1/4 수준에 불과하다. GDP의 1.4%로 비교적 높게 나타난 법정 민간지출비(법정 퇴직금)를 포함한 전체 사회지출비를 보아도 한국은 다른 국가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국가복지비 지출 규모가 작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 1인당 국가복지비 수혜 규모도 우리 나라는 연간 500달러 정도의 국가복지비 혜택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OECD 회원국 평균치인 4,203달러의 1/8 수준에 불과한 것이며 스웨덴의 1/12, 미국의 1/8, 그리고 일본의 1/6 수준에 불과한 금액이다. 사회보장비지출 중에서 순수하게 중앙정부가 지출하는 사회보장 관련 예산의 추이를 보면 보건복지부 예산은 GDP 대비 0.6%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회보장예산은 0.9%, 사회개발예산은 1.2%-1.33%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95년 이후 약간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사회복지비 지출을 향후 5년간 GDP 대비 10%까지 확대해야 한다.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을 확충하고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50% 수준까지 지원하며, 공무원 연금, 사학연금 등 특수직역 연금을 개혁하고 정부의 재정부담을 확대해야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추가 예산을 확대하고 실업부조 제도를 도입하고 출산, 육아 및 영유아교육비를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
구조조정과 경제회생에는 막대한 재정자금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 비용의 대부분은 재산소유자들이 감당해야 한다. 사회적 불평등과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경제불황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세개혁을 통해 소득재분배에 필요한 사회보장예산을 대규모로 확충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조세징수를 늘려야 한다. OECD자료에 의하면 조세부담율은 1998년 현재 OECD 회원국 평균(사회보장기여금 제외) 27.6%인데 한국의 경우는 19.1%에 불과하다. 또한 간접세 중심에서 직접세 중심으로 세제를 개혁해야 한다. 1996년 우리나라의 GDP대비 직접세의 비율은 9.5%로 OECD국가 평균인 26.4%에 훨씬 미달했다. 조세구조 개혁의 기본목표는 GDP대비 직접세율을 OECD평균수준에 근접하도록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핵심적인 과제는 직접세의 누진율을 강화함과 동시에 조세의 형평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세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더욱이 각종 탈루소득이 많아 누진과세의 의미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탈루소득에 대한 세금징수와 함께 재산 및 소득에 대한 최고세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세제개혁을 병행해야 한다.
고액 금융소득자의 금융소득을 조세로 흡수해야 한다. ‘금융소득 종합과세제’를 조속히 실시해야 한다. 1천만원 이상의 금융소득을 올리는 자들의 금융자산이 400조원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자율 15%로 계산해도 금융자산 소득은 60조원으로, 절반만 조세로 흡수해도 30조원에 달한다. 1996년 이전까지는 금융자산에서 발생하는 이자소득이나 배당소득은 분리과세되었고, 1996년부터는 금융소득이 4,000만원이 넘는 고소득자에 한하여 다른 소득과 합산하여 종합과세하는 금융소득종합과세제도가 실시되었으나 IMF금융위기를 이유로 1997년 12월 국회에서 이 제도가 유보되었다. 이는 경제적 혼란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금융자산을 볼모로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특권층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현재 금융소득이 4,000만원을 넘는 사람은 약 4만 4천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제도의 유보는 전체 국민이 1/1000, 즉 0.1%의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특권적인 조치로 볼 수밖에 없다. 물론 김대중 정부는 다시 2001년부터 금융소득종합과세제도를 실시할 것을 발표하고는 있지만 조세개혁에 대한 별다른 의지가 없는 상태이다. 정부는 재정적자의 확대에 따른 부담을 노동자와 국민일반에게 전가하지 말고, 음성탈루소득에 대한 환수조치를 우선적으로 단행하여야 한다. 기준금액도 4,000만원으로 지나치게 높아 그 이하의 금융소득이 여전히 분리과세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기준금액을 2000만원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아울러 주식, 채권의 양도차익에 대해서도 금융소득의 종합과세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나아가서 지출확대를 통하여 경기부양책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자 확대를 감수해야 한다. 과잉생산 공황기에는 디플레 현상이 심화되므로 적자재정에 다른 인플레이션문제가 크게 발생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제기하는 국가채무 과다문제는 과장된 것으로 부유층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지 말라는 것으로 함축한 친자본가적 행태이다. 선진국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국가채무가 GDP의 6할 이하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1999년말의 국가채무는 지방채무를 합칠 경우 112조원으로 GDP의 23%로 OECD 국가 평균 69.5%에 비해 아직은 낮은 편이다.

3. 기업과 금융기관의 사회화
기업, 금융기관, 학교, 병원 등에 대한 사적 자본의 독재체제를 청산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조조정이다. 재벌들이 지배하고 있는 기업들을 공익성이 높은 일부는 공기업으로, 나머지 대부분은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재벌그룹기업의 총자산을 100으로 할 경우 총수 일족의 직접 출자한 지분은 2밖에 되지 않으므로 재벌총수들이 계열기업경영을 전횡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더군다나 대량 정리해고를 해야 할 정도로 경영에 실패한 재벌총수들이라면 소유경영권은 당연히 박탈되어야 한다. 전경련 등의 재벌체제 옹호론자들은 재벌체제가 정부의 규제가 강력한 속에서 기업활동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고, 따라서 재벌개혁을 위해서는 정부부문의 규제완화 등 개혁과 관치금융의 중단에 의한 금융기관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제연구원장 좌승희는 재벌의 행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규제는 반대하고 재벌이 처한 경제적 여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최선이며, 그 방향은 정부 규제 완화와 개방, 시장경제질서에 의한 경쟁의 도입이라고 주장한다. “재벌은 민간기업으로서 정부 경제정책을 포함한 주어진 경제여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조직일 뿐이며, 재벌의 경제적 행태는 정부나 국민의 시각에서 좋게 보이든, 나쁘게 보이든 궁극적으로 주어진 경제여건의 산물이다. 따라서 재벌의 행태를 교정하려는 정책은 무엇보다도 재벌이 처한 경제적 여건을 바꾸는데 주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 경제여건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경제주체는 정부이다. 재벌은 정부경제정책의 산물이며, 재벌의 행태를 바꾸고자 하는 정책은 재벌에 대한 직접 규제가 아니라 재벌의 생성을 초래한 경제여건으로서의 정부정책의 개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경제가 자율화 개방화되고 세계경제가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경제운영에 있어 보호나 차별에 의한 직접규제적 개입정책의 효율성은 떨어지기 때문에 시장원리에 따른 간접관리방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되는 하나의 지구촌 경제하에서는 정부가 재벌을 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수단을 가지지 못한다. 재벌은 지구촌 기업으로 한국경제를 떠날 수도 있다. 단지 재벌간의, 그리고 대기업간의 경쟁을 통해서만 재벌의 시장지배력을 제어하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고 고성장을 지속하면서도 재벌의 행태를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재벌부문에 보다 치열한 경쟁을 도입하는 일이다. 국내외로부터 재벌부문에의 진입을 자유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이러한 재벌옹호론자들의 문제점은 재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려는 의도가 과도하여 사실적 인과관계를 왜곡하는 데 있다. 경영여건이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 심화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 시장구조와 구조와 총수일족 소유경영독점구조가 반대로 경영여건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컨대 재벌총수들은 정치인들과의 유착이나 언론에 대한 장악력을 이용하여 법령의 제정과 집행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도록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현재의 경제불안은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잠식하는 부실을 야기한 소유지배구조의 폐단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부실해결의 당장의 선결과제는 채무자인 기업의 부실경영을 차단할 수 있는 노동자이사·감사제를 중심으로 하는 경영참가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자의 경영참가가 안정된 기반을 갖기 위해서는 기업의 소유구조가 사회화되어야 한다. 재벌 총수일족의 지분을 강제로 환수하여 재벌대기업에 대해서 연기금, 노동자 투자기금 등이 지배적 지분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부도처리되어서 법정관리에 들어가 파장이 대단히 크다. 대우자동차의 부도원인을 살펴보면 우선 정부와 채권단의 일방적이고 무분별한 해외매각 방침이 포드의 인수포기로 일단 좌절되면서 대우자동차에 대한 국내외 신인도가 급격히 추락하고 자금난이 심화되었다. 산업은행을 주채권 은행으로 하는 채권단은 소극적인 채무조정과 신규자금 대출로 일관하여 총 5조원의 출자전환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채권단이 선임한 경영진들의 출혈경영이 대우자동차를 더욱 부실화시켰다. 여기에다 체불임금 등으로 노사간의 갈등이 계속되어왔고, 대우자동차 부실에 대한 김우중 등 전직 임원들에 대한 책임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우자동차의 처리에 있어서는 우선 처리과정에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해야 하며, 추가로 조성되는 공적자금을 대우자동차의 재무개선에 직접 사용하여 대출금 출자전환을 정부 보증의 노동자투자기금 형식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대우자동차를 우선 공적 소유로 하여 경영을 정상화하고 그 후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우중씨와 전직 임원 및 외부감사인에 대해서 분식회계 처리 등에 대하여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공기업은 원칙적으로 공기업체제로 유지해야 하고 일부 공익성이 낮은 공기업의 경우에도 외국자본과 재벌들에게 매각할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 연기금, 해당 공기업 노동자가 소유와 경영에 참여하는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금융기관은 제조업체와는 국민경제적 위치가 다르므로 소유경영구조는 사회적 형태로 전환시켜야 한다. 은행 등 핵심적 금융기관은 공적 소유가 우위에 있도록 하고, 소규모 금융기관은 연기금 등 공적 기금과 해당 금융기관 노동자들의 투자기금이 소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노동자들의 경영참가를 통한 민주적 통제를 확립해야 한다.
금융구조조정은 은행권의 무원칙적인 합병이 아니라 소유지배구조 개선에 초점을 둔 개혁이어야 한다. 현재 은행권의 문제는 산업자본의 흐름이 원할하지 못한 상태를 반영하는 것과 함께 은행권 자체의 소유지배구조의 문제, 정부의 정책적 방임이 상호작용 하여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난 2년간의 구조조정을 통해 국내 은행들은 약 40%의 인원감축을 강제당했지만, 현재의 전산투자 상황 하에서는 오히려 인력부족의 상태에 직면해 있다. 추가 인원 감축은 경영효율성이라는 문제와 별 관련이 없는 내용이며, 실질적인 효과도 미비하다. 부실채권을 지속적으로 양산하거나 양산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의 재무구조 및 지배구조에 대한 개혁을 통해 추가적 부실채권 양산을 막는 방향으로 맞춰져야 한다.

4. 국제적 자본운동에 대한 통제 강화
우선 주식시장의 과도한 시가변동을 억제하기 위하여 현재 주식총액의 30%의 비중을 차지하면서 시세차익의 획득에서는 지배적 지위를 행사하고 있는 외국자본의 비중을 10% 이내로 제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외환거래 자유화를 제한하고 토빈세의 시행이나 외화가변예치제 등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토빈 교수는 1998년 11월 16일 프랑스 ‘르 몽드’와의 회견에서 지난 70년대 자신이 제시한 이론이 현재의 금융위기로 그 타당성이 입증됐다고 강조하면서 ‘토빈세’의 실현을 위해 우선 선진 20개국이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그는 ‘토빈세’에 대한 회의론을 반박하며 20개국이 이를 도입한 후 2단계 조치로 IMF나 기타 국제금융기구의 가입조건으로 ‘토빈세’ 도입을 내세울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빈교수는 IMF등 국제금융기구들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위기 타개책으로 개방확대를 권고하고 있는데 대해 “지나친 개방 때문에 위기가 발생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개방요구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토빈교수는 단기자본 이동의 규제와 함께 미국이나 프랑스등 선진국들처럼 금융에 대한 체계적인 통제체제를 갖추지 못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독자적인 금리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이같은 상황에서 관계당국이 최소한의 통제조치마저 포기할 경우 금융선진국들의 지부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한국일보}, 1998. 11. 17).
2단계 외환자유화 조치를 유보하고 선물환거래 실수요자 원칙을 복원해야 한다. 헤지펀드 등 단기성 투기자금을 운용하는 외국투자자가 원화를 빌려 환투기를 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외국인들의 원화 차입거래를 제한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파생금융상품의 거래자유화 조치는 대규모 외국인의 원화 차입거래를 허용하는 것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 기업의 1년 단기차입을 규제해야 한다. 한국 국적 비거주자에 대한 송금액 한도를 규제하고, 기업의 수출대금의 해외예치 대금한도도 규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제2의 경제위기설

김성구(한신대 경제학부)

1. 되풀이되는 경제위기설의 근원
포드의 대우차 인수포기와 함께 국제유가의 등귀, 주력수출품목인 반도체가격의 하락 등으로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해지면서 이러다가 제2의 외환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아울러 미국경제의 막바지 호황에 대해서도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붕괴를 동반하는 공황으로의 전환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년 초보다 크게 높아진 상태이다. IMF의 처방에 따른 구조조정의 진행과 함께 이런 경제위기설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곤 하였는데 대우차의 부도와 최근의 경제상황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사고하도록 해주는 것 같다. 물론 한국정부를 비롯하여 낙관론자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거시경제지표가 전반적으로 양호해서 이런 상태를 과연 위기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즉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경제성장률은 작년 10%를 넘어섰고 올 상반기에도 비슷한 수준의 높은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실업률은 이제 4% 이하로 떨어졌고 물가상승률은 안정적이다. 또 경상수지의 대규모 흑자는 그 폭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올해에도 100억 달러를 예상하고 있고 외국인 자본유입도 활발해서 급기야 외환보유고는 900억 달러를 넘어서 세계 제5위의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따라서 대내적으로는 위기적 상황이 아니며 다만 국제경제의 환경이 악화되고 있거나 그에 대한 과도한 심리적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단순히 한국경제의 토대는 건실한데 국제경제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가 양호한 거시경제지표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적 불안정과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불안정과 위기의 근저에는 아직도 상당한 규모의 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이 자리잡고 있다. 정부는 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을 정리하기 위해 또는 회복하기 위해 100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왔는데 그럼에도 상황이 그렇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거시지표가 안정적이라고 주장하는 정부도 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이 한국경제를 압박하고 금융시장의 불안정을 가져오는 주요한 요소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제도언론을 포함하여 외국의 저명한 저널과 연구기관은 이러한 상황을 하나같이 구조조정과 개혁이 불철저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구조조정의 가속화를 처방으로 제시한다. 한국경제는 아직 위기의 상황은 아니지만 구조조정과 개혁과제를 미적대다간 제2의 외환위기를 맞게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죽일 기업과 금융기관들에 대해서는 시장원리에 입각하여 과감하게 퇴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비판적인 시민운동의 이론가들 또한 이런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불안정한 경제상황을 배경으로 국내외 언론과 시민단체가 합작하여 정부에 대해 구조조정 가속화의 여론을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급기야 정부는 년 말까지 기업과 금융구조조정을 완결짓고 내년 2월까지는 공공부문과 노동부문의 구조조정도 완수하겠다고 2단계 구조조정의 일정을 못박아 놓았다. 물론 정부의 구조조정과 이른바 개혁 정책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어서 새삼 여론의 압박을 운운하는 것도 적당치 않을 지 모른다. 정부는 그전에 이미 2단계 구조조정을 예고해 놓은 상태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신자유주의의 정책 기반 위에서도 구조조정과 개혁의 강도 및 속도는 보다 강화될 것처럼 보인다. 11월 3일 정부는 29개 기업의 퇴출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런 전망을 현실화하였다.
그러나 구조조정과 이른바 개혁의 가속화에 앞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지금도 지속되는 위기적인 요소들은 과연 구조조정정책이 미진해서 청산되지 못한 것인가, 다시 말해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의 방향은 올바른 것인데 보수적인 세력들과 노동조합 같은 이익집단들의 저항으로 그 집행력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은 원래 이런 위기적 요소들을 청산할 수 없는 모순적인 정책인가,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의 실행으로 오히려 위기적인 요소들이 심화되어 온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 여하에 따라서 정부의 구조조정과 개혁의 가속화는 위기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위기를 심화시키는 극약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경제위기 초기부터 IMF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과잉생산과 과잉자본을 청산할 수 없는, 모순적인 정책이고 그 정책의 관철은 오히려 위기를 새롭게 심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작금의 상황은 우리의 평가가 올바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이 미진했던 것은 단순히 보수주의 진영과 진보진영의 저항 때문만이 아니라 그 정책 자체가 그대로 현실에서 관철되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위험과 비용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 대한 저항이 있었음으로 해서 그 정책이 가져올 위험과 비용이 줄어들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지금 여론의 압박을 받아 심기일전해서 구조조정을 가속화하겠다고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결코 계획대로 되지는 못할 것이다. 부실기업의 대명사가 된 현대건설과 쌍용양회까지 구제되었을 뿐 아니라 동아건설 같은 퇴출기업의 처리에서도 시장적 방식이 아닌 국가적 개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부가 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가속화할 수 없는가, 정부는 왜 지금까지 구조조정을 근본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는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위기를 근본적으로 청산하기는커녕 어떤 위기를 새롭게 전개시켰는가, 그렇다면 이에 대해 진보진영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검토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서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성장회복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2.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위기의 심화
외환위기 극복에서 정부가 자랑하는 경상수지의 대규모 흑자는 기업과 금융 구조조정의 성공적인 결과 한국자본의 국제경쟁력이 제고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높은 환율과 심각한 경기침체의 결과 수입수요가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달성된 것이다. 성장과 고용 그리고 환율의 희생하에 98년 경상수지는 406억 달러 흑자라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수출은 97년에 비해 오히려 하락하였고 수입이 500억 달러 이상 줄어든 데서 볼 수 있듯이 경상수지 개선은 높은 환율에도 불구하고 수출증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환율증대와 경기침체에 따른 대폭적인 수입감소에 의해 달성된 것이었다. 99년에는 경제성장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는 아직 커다란 흑자(250억 달러)를 나타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수출증가 효과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제가 아직도 정상적인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한 것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1986-89년을 예외로 하면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동반하였고 이는 대외종속적인 경제성장의 구조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만성적인 적자구조, 이런 구조를 필연적이게 하는 대외종속적 무역구조 및 생산력구조는 구조조정과정에서 극복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되었다. 따라서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 수입수요가 대폭 증대하면서 경상수지의 흑자기조는 다시 적자기조로 반전되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들어 수출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 흑자가 대폭 줄어들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다름아닌 그 표현이라 할 것이다. 또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개방화, 자유화정책의 결과 대규모 자본유입이 이루어졌는데 외국인투자(신고기준)는 98년 88억 달러, 99년 155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특히 경제회복기에 자본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투기적 자본 유입으로 이제 우리의 주식시장에서 외국인투자자금은 600억 달러를 넘어서 비율로도 시가총액의 30%에 이르렀다. 경상수지의 대규모 흑자와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외환보유고는 900억 달러를 넘어섰지만, 투기적 자본유입은 원화의 과대평가, 국제수지의 적자기조로의 반전과 아우러져 투자회수가 촉발될 경우 새로운 외환위기를 가져올 위험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90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로도 외환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외환위기는 직접적으로는 경상수지의 대규모 적자와 외환보유고의 고갈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근저에는 주지하다시피 재벌기업들의 일련의 부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한국자본의 과잉생산과 과잉자본 그리고 이윤율의 압박이 있었다. 따라서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문제는 경제위기를 단지 재벌이라는 독점자본 지배의 특수한 한국형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선진국형 독점자본지배로의 전환에서 위기극복책을 찾고 있는 이른바 재벌개혁론자들의 시야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물론 재벌개혁론자들도 과잉자본과 부실자본을 말하기는 하지만, 이를 (독점)자본 일반 또는 (신식민지) 독점자본의 과잉과 부실이라기 보다는 재벌총수의 독점지배구조의 산물로 이해할 뿐이어서 선진국형의 근대적 독점으로 전환시키면 해소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들은 왜 재벌총수의 황제경영 폐해에서 벗어난 선진국의 독점자본주의가 과잉자본의 문제로 구조불황에 허덕이는가를 이론시야에 담아내지 못한다. 이것이 재벌개혁론의 근본적인 이론적 한계이다. 결국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의 핵심은 재벌개혁 또는 재벌해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과잉생산과 부실자본을 청산하고 이윤율조건을 개선시키는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만 새로운 축적과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은 친재벌적, 반민중적 성격으로 인해 단지 부분적으로만 그 성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즉 기업과 금융부분의 부실부분에 대해 대주주 및 경영자 그리고 일반투자자 등 자산계급의 손실부담을 최소화했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와 고용조건의 악화를 강제하는가 하면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막기 위해 100조원의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등 부실부분은 청산되었다기보다는 금융부실로부터 국가부실로 이전되었다. 5대재벌간의 빅딜정책도 과잉자본을 해소하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고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노동조건의 악화를 통해, 또 부실부분의 국가부담을 통해 구조조정정책은 재벌과 금융기관의 이윤조건을 일정하게 개선시켜 주었다. 그러나 부실자본의 근본적 청산이란 점에서는 실패하였다. 부채비율의 뚜렷한 감소, 수익률의 일정한 개선이야말로 경제성장의 동력을 이룬 것이지만, 그것은 과잉생산과 부실부분의 불철저한 청산 위에서 진행되는 것으로서 위기를 잠재화하고 있다.(재벌들의 부채비율 감소는 주로 순환출자의 증대와 자산재평가에 기인한 것으로 실제의 부채비율 감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98년과 99년 1년 사이에 30대 재벌의 출자총액은 16조 1천억 원이나 증가했는데 그 대부분은 계열사간 순환출자이었다. 그 결과 내부지분율은 44.5%에서 50.5%로 증대했다. 한겨레, 2000. 6. 23.) 과잉자본과 부실자본의 불철저한 청산, 이것이 다름아니라 경제성장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타나는 경제위기와 위기설의 근원을 이룬다. 한국자본주의에 있어 기업부문의 부실은 실로 구조적인 것이어서 경제위기정세만의 문제도 아니다. 지난 8월 초 16개 재벌그룹의 결합재무제표가 공표되면서 그 심각한 상황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99년 말 금융부문기업을 포함하여 4대그룹의 부채비율은 350%(기업부문만은 225%)이었는 바, 200% 이하로의 부채비율감소라는 그간의 선전은 허구였음이 드러났고 영업이익으로 차입금 이자도 갚지 못하는 재벌그룹이 16개 중 9개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6개 그룹의 영업이익률은 6.6%, 해외영업에서는 1.6%의 이익률에 지나지 않았고 4대재벌의 해외영업이익률도 1.7% 정도였던 것이다. 이는 재벌개혁의 문제를 넘어가는 것으로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열악한 축적조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한겨레, 2000. 8. 2.) 과잉자본과 부실자본의 근저에는 이렇게 대외종속적인 한국자본주의의 열악한 대외경쟁력, 즉 국민적 생산력 기반의 취약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한국에서 재벌개혁이 천민적인 독점지배를 선진적인 독점자본주의로 재편한다 하더라도 선진국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독점자본주의의 구조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 여기서 우리는 재벌개혁을 통해 천민적 독점지배를 선진적인 독점자본주의로 재편할 수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천민적인 독점지배는 한국의 재벌들이 열악한 국제경쟁의 조건을 만회하는 신식민지 독점자본의 강력한 축적수단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이야말로 재벌개혁론자들이 이론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한국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근본적 문제이다.
기업부문의 부실과 그 청산의 지연은 다름아닌 금융부문의 부실이 지속되는 토대가 되었다. 살벌한 금융구조조정과 막대한 공적자금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지난 6월말 현재 11개 주요 시중은행의 부실채권(고정이하) 규모만도 40조 원으로 이들 은행의 전체 여신액의 13.1%를 차지하고 있다. 또 전경련 연구소인 한국경제연구원의 한 보고에 따르면 금융권의 잠재부실채권 규모는 정부의 공식적인 수치인 90여 조원을 훨씬 넘어 110-120조 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조사대상 상장기업의 20%에 이르는 기업들은 수익으로 이자도 지급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매일경제, 2000. 7. 30 및 7. 18.) 이러한 상황은 외환위기 이전과 비교하여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98년 초 요주의이하 부실채권(현재의 새로운 기준에 따르면 고정이하 부실채권)이 은행의 총여신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4.9%이었는데(한겨레, 98. 4. 10) 그 동안 새로 드러난 부실채권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부실채권의 비율은 그에 못지 않게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새로운 경제성장은 과잉자본과 과잉생산 부분을 잠재화한 채 이루어지고 있어서 고도성장을 압박하고 보다 쉽게 새로운 위기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면 왜 정부는 이와 같은 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들을 과감하게 퇴출시키지 못할까? 이 부실기업들을 시장방식으로 퇴출시키면 부실부분이 청산되어서 깨끗한 기업과 금융기관들로 경제토대가 견실해질텐데 이 간단한 해법을 정부는 왜 실행하지 못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부실기업과 워크아웃 그리고 공적자금투입이라는 구조조정의 최대쟁점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아건설(또는 대우차라고 생각하자)의 채권은행단의 입장에서 보면 동아건설을 지원하여 존속시키는 경우와 퇴출해서 청산시키는 경우를 비교하여 그 가치를 평가하고 그에 따른 채권회수 또는 손실부담을 계산해서 간단하게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동아건설의 퇴출은 채권은행단의 채권회수의 문제를 넘어 동아건설 하도급업체(대우차의 경우 방대한 하청업체)의 일련의 도산이라든지 그에 따라 금융기관으로의 일련의 새로운 부실전가 그리고 일련의 실업 발생 등 동아건설 청산시의 채권은행단의 계산에는 들어가지 않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런 비용을 채권은행단은 떠 맞지 않아도 되지만 정부는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연쇄적인 위기와 사회적 위기를 동반하는 것이어서 정부는 이런 시장주의적 퇴출정책을 감행하기 어렵고 불가피하게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워크아웃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개 대기업의 퇴출도 이러할진대 금융기관의 시장주의적 퇴출이라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워크아웃이란 부분적으로 과잉자본을 청산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과잉자본을 청산하기보다 오히려 공적자금의 투입을 통해 과잉자본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라 위기의 지연과 이전을 가져온다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끊임없이 돌출하는 경제위기설은 그 자체 특정한, 부분적이고 금융적인 위기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순히 부분적인 기업위기, 금융위기가 아닌 한국경제의 총체적 위기로 증폭되어 이해되는 것에는 이상과 같은 위기적인 구조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으로는 위기를 결코 해결할 수가 없고 오히려 그 직접적 효과로서 위기가 지속되고 새로운 위기의 조건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런 구조조정정책이 지속되는 한, 위기의 심화는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은 결국 제2의 외환위기를 가져올, 또 한번의 총체적 위기로 발전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것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국경제의 호황이 당분간 지속된다면(?), 올해나 내년에는 적어도 경제위기설이 제기되고 또 부분적인 위기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아직 총체적인 위기로 발전할 그런 위기는 아닐 것 같다. 현재의 경제지표들을 감안하면 전반적인 위기로의 발전까지에는 새로운 성장 하에서의 위기의 심화와 잠재화(부실화 심화와 수익률 저하), 주력수출상품들의 세계적인 과잉생산, 국제수지의 위기, 투기적인 금융자본의 준동 등을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위기설들의 토대가 다름아닌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에 있음을 인식하고 새로운 위기설과 불안정한 금융시장 상황을 기화로 해서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구조조정 강화를 선동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한국경제를 위기로 몰아가는 것이며 재벌과 초국적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기만적인 행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놓자.

3. 대안은 독점/금융자본의 사회화와 민주적 통제!
이런 점에서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신자유주의 재벌개혁 대안들도 정부의 대안 못지 않게 한국경제의 위기를 더욱 충동하는 위험한 대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단체의 대안들이 설령 정부의 대안보다 민주적인(부르주아적으로 민주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정부보다도 더욱 강력한 구조조정을 촉구하는 이들의 개혁적 대안은 정부의 덜 개혁적 대안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현실의 경제운용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가 구조조정의 가속화에 보다 신중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지 개혁의지의 부재만은 아니고 현실의 모순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단체들의 구조조정 가속화에 대한 요구는 경제정책에 대한 그들의 관념성과 추상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시민단체의 개혁대안은 결코 진보적인 대안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은 오늘날처럼 독점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경제위기와 과잉자본은 공황기구에 의해 시장주의적 방식으로 청산될 수도 없고 또 국가의 개입을 통해 사회적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도 없음을 보여준다. 20년이 넘게 지속되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구조공황은 이런 모순의 표현이다. 그러한 딜레마는 궁극적으로 독점이윤의 원리에 규정되는 생산체제에서 비롯되는 위기이며 독점이윤의 원리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과잉자본이란 어디까지나 이윤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과잉된 자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윤의 규정성을 벗어나는 사회관계 하에서 과잉자본은 더 이상 과잉자본의 위기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선진자본주의의 구조공황도, 한국의 경제위기도 그 해결을 위해 독점자본의 사회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과학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워크아웃정책과 공적자금의 투입은 신자유주의정책의 기조 위에서도 그 선전과는 달리 국가의 사회적 개입과 (자본주의적) 사회화를 회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적) 사회화는 독점이윤의 원리로부터 최종적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위기의 해결이 아니라 그 지연과 심화를 가져올 뿐이었다. 우리가 요구하는 사회화란 소극적으로 보면 산업과 금융에서의 독점이윤원리의 지배를 제한하고 국내외 금융자본의 운동을 통제하는 것, 보다 적극적으로 보면 금융자본을 사회적으로 수탈하고 독점이윤원리를 지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실질적 사회화를 이룩해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수탈한 독점자본에 대한 노동자들과 민중의 민주적 통제가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독점이윤의 원리를 진정으로 지양하는 보루가 된다. 이를 통해서만 경제위기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정책을 극복하고 진보적인 사회화정책으로 전환하는 것과 관련하여 오늘날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 하나만 더 지적하도록 하자. 그것은 일상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금융시장의 기능에 대해서이다. 즉 현재의 상황이 위기냐 아니냐 하는 판단 또는 정부의 경제정책이 위기에 대처한 올바른 정책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을 시장이 한다는 사고다. 이런 사고는 이제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고 상식화되어 버렸는데, 구조조정의 지난 시기동안 이것만큼 신자유주의의 지배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린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다른 정책 효과들에 대해서는 비판과 저항이 있어도 시장의 판단과 신뢰에 대해서만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신으로서 모두가 존경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의 판단이란 금융시장, 주식시장의 반응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판단이란 곧 투자자들의 반응, 투자자들의 기준이며 다시 말해 투자자들의 수익성을 충분하게 보장하는 대책이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국가의 공적자금까지 쏟아 붓게 된 현재의 투신사의 위기가 다름아니라 투자자들의 잘못된 투자로부터 발생한 손실을 투자자들에게서 면제해주고 그 손실을 국민이 떠 안은 데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이 투자자들은 그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한술 더 떠서 자신들에게 충분한 이익을 보장하지 않으면 어떤 정책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것이다.
국제적인 외환금융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금융자본의 운동을 무제한 허용하고 그 투기적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 투기자본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문제인 이상, 투기자들이 지배하는 시장이 정책을 심판하게 해서는 안되며 진보적 정책을 통해 시장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시장과 금융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는 어떤 경제정책도 불신하고 사보타지를 할 것이므로 진보적 경제정책에 대해 당연히 금융시장은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지만 그 통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경제학자와 경제전문가의 고상한 언어사용으로 이제는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신격화된 ‘시장의 판단’, ‘시장의 신뢰’란 것을 집어던지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위기극복을 위한 새로운 대안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보론] 김대중정부와 시민운동의 구조조정정책
김대중정부와 시민단체간의 경제정책 공방과 논쟁이 실제적으로는 어떻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들간에 신자유주의라는 공동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시장과 경쟁, (독점)자본과 이윤의 지배, 자유화와 개방을 기본적으로 승인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의 토대 위에서 그들간의 차이란 정도와 색채,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즉 그들간의 차이란 시장에서의 (독점)자본의 지배를 국가가 어느 정도 규제하는가, 국가가 사회보장정책을 위해 어느 정도 개입하는가, 이해관계자의 경영참가를 어느 정도로 허용하는가 그리고 자유화와 개방의 속도를 어느 정도에서 조절하는가의 차이이다. 재벌들을 대변하는 입장을 차치하면, 이러한 차이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두개의 변종, 즉 영미형 신자유주의와 독일형 신자유주의간의 차이로 이해되곤 한다. 영미형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지배를 절대적으로 승인하고 국가의 개입을 원리적으로 부정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현대판이라고 한다면, 독일 신자유주의는 반독점 경쟁정책과 사회보장정책을 위해 국가개입을 이론화하고 있고 이해관계자의 시장통제와 경영참가를 수용하고 있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의 여러 흐름들은 이 두 개의 변종의 어느 하나로 순수하게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두 개 변종의 혼합물이며 어느 변종의 색채가 보다 강하느냐에 따라 그 경향이 구분될 뿐이다. 예컨대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도 IMF의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개입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고 또 경실련의 경제정책도 영미형 신자유주의를 토대로 하면서 독일형 지배구조를 가미시키고 있다.(강철규, 「재벌개혁의 향후 방향」, 경실련 재벌개혁 대토론회, 1999. 5. 27) 반면 참여연대는 보다 독일형 신자유주의에 경사되고 있지만 영미형 지배구조도 수용하고 있다.(그것은 참여연대 내 경제학자들간 의견의 차이로도 존재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장하성 교수는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가깝고 김기원, 김상조 교수는 독일적 신자유주의의 경향이다.) 따라서 이들간의 차이는 그들간의 외관상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부차적이다. 말하자면 자칭 시민단체의 좌파라는 참여연대는 신자유주의정책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정부의 IMF/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보다 진보적인 독일적 신자유주의(보수적 개혁주의)에 경사되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를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경실련과 달리 김대중정부는 자신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명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반독점 개입과 사회보장정책적 개입 등을 들면서 무언가 온건한 경제정책으로 평가받기를 원하고 이를 근거로 일부의 논자들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로 분류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만(김기원, 김연명 교수 등) 신자유주의의 지평은 독일 신자유주의에서 보는 바처럼 (시장적합적) 정부개입을 포함하고 있고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두 개의 신자유주의 변종의 혼합물이라는 점에서 별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이들간의 차이가 실로 부차적임을 보다 명백히 이해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파업과 정리해고, 재벌개혁과 지배구조개혁, 민영화와 국민기업, 우리사주와 소액주주, 대외개방 등의 개별 쟁점에서 정부와 시민단체의 입장 차이가 과연 어떠한지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정리해고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나 시민단체 모두 경제위기와 중복과잉투자의 현실 앞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의 필요성을 수용한다. 그것은 진보적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참여연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예컨대 김석연 변호사, 김상조 교수 등.) 그러면 정리해고라는 ‘병’을 주는데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같이 하지만 그 처방 약에서는 시민단체가 정부보다 진보적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김대중정부라고 무자비한 정리해고를 강요한 다음에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인 실업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고 98년 10조원, 99년 9조원 규모의 실업대책 예산을 집행하였는데(대략 전체 예산의 10% 수준) 이와 같은 사후 실업대책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수적인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도 차이가 있다면 단지 실업예산의 퍼센티지 논쟁이나 실업예산의 효율적인 집행 여하 정도일텐데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서는 한 정부의 실업예산 비중을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실업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을 강조한다면 실업노동력의 효율적인 사후관리라는 점에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보다 충실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동조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파업기간 중에 보여준 우파 시민단체들의 단호한 입장, “파업은 안된다”는 주장이나 좌파 시민단체의 파업에 대한 양비론적 비판 모두 그 색채만 다를 뿐 동일한 인식 위에 서있는 것이다. 강력한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는 정부의 파업불허정책과 비교하면 시민단체의 입장은 그래도 온건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시민단체의 파업비판 여론이 다름아니라 정부의 폭력적 파업진압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역으로 시민단체들이 조금이라도 노동자파업을 이해하고 동조했다면 구조조정정세는 지금보다는 훨씬 대중들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을 것이다.
한편 재벌개혁과 관련해서 정부는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3대원칙)에 입각해서 재벌지배구조를 선진화, 합리화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재벌총수의 소유지배는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소유지배로부터 발생하는 기업지배와 시장지배를 제한하고 민주화하여 경쟁적인 대기업체제로 전환한다는 실현불가능한 프로젝트이었다. 이에 대해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재벌총수의 소유지배 자체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이른바 소유의 분산) 기업지배와 시장지배를 보다 강력하게 단속할 수 있는 경쟁강화정책(예컨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부활, 부당내부거래 단속 등)이나 민주적인 기업통제정책(사외이사, 사외감사의 강화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어떻게 보면 소유분산에 대한 요구는 정부와 시민단체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경쟁강화나 민주적인 기업통제의 요구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경제에서 소유를 어떻게 분산시킨다 하더라도 소유분산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소유집중은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요구차이는 신자유주의를 너머가는 질적으로 상이한 차이가 아니며 그것은 공기업의 민영화와 관련하여 이미 정부가 소유분산 방식의 민영화도 고려할 수 있다는 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경쟁강화나 사외이사, 사외감사 등을 통한 기업통제와 관련하여서는 현 정부에 의해 상당한 제도장치가 마련된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정부와 시민단체의 차이는 어느 정도 좁혀졌고 문제는 그 실제적인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운영할 수 있는가가 보다 큰 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이다. 재벌개혁과 구조조정에 대한 이상의 입장으로부터 시민단체가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정책을 용인하고 수용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공기업의 폐해가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간섭, 그로부터 비롯하는 부패와 무능, 태만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폐해를 청산하기보다는 이를 근거로 하여 공기업을 재벌과 초국적 자본의 손에 넘겨주려는 정부의 시도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민영화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다만 민영화되는 기업을 그들의 재벌개혁론의 관점에서 민주화시키는 문제(소주주, 국민주, 우리사주 등을 통한 소유분산과 소주주에 의한 민주적 기업통제)에 한정하고자 한다.(김대환 교수 등.) 참여연대의 일각에서는 공기업 구조조정의 핵심이 공기업 경영혁신에 있다는 인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에 근거해서 공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영화를 하면 이미 공기업은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민영화를 공기업 경영혁신의 하나의 방안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안되는 논리를 들이대면서 다양한 주주층(기관투자가, 국민주, 우리사주, 소주주 등)에 의해 지배되는 소유구조 위에서 전문경영인이 지배하는 기업구조를 제시하는 것이다.(참여연대, 『재벌개혁 감시보고서』, 1999. 5) 작년 12월 전력산업의 민영화와 분할매각에 대한 전력노동자와 전력범대위의 저항으로 한국전력의 민영화가 일단 무산되자 개혁의 이름으로 민영화를 강력하게 촉구한 경실련에 비한다면 참여연대의 입장은 훨씬 온건하긴 하지만, 역시 초록은 동색이고 두 단체 모두 동일한 재벌개혁론 위에 서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외개방과 외국자본이 경쟁의 강화와 선진제도 및 기술의 도입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가속시킬 것이라는 인식 또한 어떤 쟁점 못지 않게 정부와 시민단체들이 공유하는 사항이다. 이들에게 국민자본의 문제, 자본의 국적성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정부와 시민단체간의 차이는 자유화와 개방화의 속도 그리고 개방화를 위한 준비와 안전장치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민단체의 주변에서 활동하는 일부 논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오는 투기자본 운동의 위험증대에도 불구하고 자본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정책이 국민경제의 불안정성과 대외종속을 심화시킬 우려를 지적하기도 한다.(이병천 교수 등.) 이른바 ‘종속적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제기는 시민운동의 진영에서는 아무래도 낯설은 것이 아닐 수 없고 오히려 이런 문제제기는 민중운동의 진영에서 제출된 것이었다. 종속적 신자유주의는 제국주의론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일관되게 제출될 수 있는 것이며 독일형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선진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꿈꾸는 이병천 교수의 이론 틀(이른바 한국판 ‘제3의 길’)에서는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이교수는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지적하지만 한국자본주의의 개혁 문제에서 제국주의 지배/종속이 부과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이론화하고 반제국주의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개방과 세계화를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통제장치(예컨대 투기자본의 운동을 제한하는 조처들)를 모색하거나 또는 선별적인 개방과 중도의 길을 탐색하는데 머무르고 만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제국주의의 이론가가 아니라 시민운동의 이론가로서 남을 수 있었으며 종속적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제기는 그 결과 초라한 내용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렇게 보면 시민운동의 정치경제학은 파시즘적, 관료적 조절에 의해 형성, 발전되어 온 한국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시장경쟁이 지배하는 이른바 개방적인 민주적 시장경제, 다시 말해 선진국형의 근대적인 독점적 시장경제로 전환시킨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길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가라는 문제는 일단 차치한다면, 선진국형의 근대적인 시장경제는 시민운동의 최대강령이라 할 수 있다. 재벌개혁과 민영화 그리고 대외개방에 대한 시민운동의 요구들은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최소강령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여기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은 특별히 긴장관계나 모순관계도 읽을 수 없을 만큼 동일한 성격의 내용을 갖는다. 따라서 시민운동에 있어서는 최소강령이 곧 최대강령이며 그 때문에 시민운동에서는 전술과 전략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도 않는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그들이 말하고 실천하는 운동에서 맥시멈을 보여주며 그것을 넘어가는 사회의 변화나 변혁을 전망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의 운동은 이론과 실천에서 별다른 모순을 느낄 것이 없고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전진하면 된다. 물론 시민단체들 내에서는 이러한 평가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논자가 있을 수도 있다. 참여연대의 한 실무자에 의하면 당차게도 독일 신자유주의적 정책 지향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한국자본주의의 개혁과 변혁에서 단지 한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시민운동은 시장주의적 재벌개혁 또는 해체(즉 독립적인 전문 대기업체제+책임전문경영체제)를 너머 대안체제를 모색한다고 한다.(이승희, 「재벌개혁과 시민운동」, 김대환·김균 편, 『한국재벌개혁론』, 나남, 1999.) 이처럼 시민운동에서 대안과 이행문제를 명시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이 쟁점을 둘러싼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승희씨에 의하면 재벌문제는 자본일반의 차원, 독점자본의 차원 그리고 한국형 독점자본(재벌)의 차원 등 상이한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재벌문제는 재벌이라는 특수한 한국형 독점자본의 지배를 해체하는 문제, 다음에는 독점자본 자체를 청산하는 문제, 나아가서는 자본 자체를 지양하는 문제의 세개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는데 현재의 정치지형과 힘의 관계를 고려하면 재벌문제는 현실적으로 세 번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고 그 해결을 통해 비로소 두 번째 독점자본의 청산 문제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차원의 독점자본 청산의 상이 어떤 것인지는 이 간사를 포함하여 참여연대 내에서 제시되고 있지 않다.(첫번째 차원의 대안 상도 명확하지 않다. ‘사회적 불평등이 사라지고 분배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그런 사회의 조건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재벌해체와 변혁운동은 이처럼 세 번째 차원에서 두 번째 차원으로 계기적으로 발전해 가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개량으로부터 변혁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세 번째 차원의 재벌개혁/해체로부터 두 번째 차원의 독점해체로 나아간다는 발상은 한국자본주의가 선진국형 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해 갈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발상이며(제국주의 세계경제에서 종속적인 지위 문제, 따라서 한국에서는 독점자본의 청산이란 곧 한국형 독점자본 즉 재벌의 청산과정과 동일한 과정일 뿐이다) 개량과 변혁은 연속적이고 계기적인 과정이 아니라 변증법적이고 단절적인 과정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독일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해체운동은 반독점변혁투쟁으로의 전화를 사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일형 독점자본 지배를 고착시키고자 하는 보수적 개량주의로 귀착될 우려가 높다.
이에 반해 민중운동진영은 97년 경제위기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더욱 완성시킴으로써 극복한다거나 또는 그에 더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민주화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제국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이 길은 가능한 길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과 시장의 지배를 제한하고 금융기관과 재벌 대기업들을 사회화함으로써 공공적인 영역을 확대하고 이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강화하고 민주화하는 데에서 위기극복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변혁정세에서나 가능한 높은 수준의 추상적인 요구라고 할 지 모르지만 사회화가 진전되는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는 점차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요구이며(이행요구강령) 특히 구조적인 경제위기가 표출함에 따라 객관적으로 요구된 정책이었다. 예를 들면 제일, 서울은행 등 국유화의 조처들이나 워크아웃에 따른 재벌기업들의 사회화 그리고 기아 처리과정이라든가 일정에 올라온 민영화 문제 등에서 사회화정책은 당면한 과제로 전화되었고 민중운동은 이 문제를 미래의 문제로서 회피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높은 수준의 정책은 노동자 대중들 속에서 투쟁의 동력을 확보해야 하는데, 정리해고 반대와 고용안정이라는 노동자들의 일차적인 요구가 민영화 저지 및 사회화 그리고 경영통제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위기정세 때문에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이익 요구투쟁이 사회화 요구투쟁으로 전화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민중운동의 변혁투쟁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개혁투쟁을 개량주의라고 폄하하여 높은 수준의 요구와 추상적인 구호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변혁투쟁은 현실의 개혁투쟁 속에서만 전화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개혁투쟁이 개량주의로 퇴색하지 않고 어떻게 변혁투쟁으로 전화할 수 있도록 고리를 장악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이 동일시되는 시민운동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지점인 것이다. 이 때문에 민중운동의 일상적인 개혁요구(최소강령적 요구)와 시민운동의 최대강령적 요구가 현실에서 중첩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두 개의 운동이 함께 나아가는 공동투쟁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으로의 전화고리의 장악인가 현 질서의 고착인가를 둘러싼 투쟁의 장소인 것이다.

* 이 글의 본문은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에서 발행하는 <당원의 길> 2000년 10월에 실린 글(‘경제위기의 극복인가 아니면 새로운 경제위기인가’)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며 [보론]은 <사회진보연대> 2000년 4월에 수록된 글(‘시민운동의 구조조정정책과 4.13총선’)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