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2002국가정보보고서-한호석 이시우 2002/08/30 346
미국의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와 한(조선)반도 정세변화의 전망
한 호 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차 례 >
(1) 미국의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는가?
(2) 다시 민족주체적 정세관으로 돌아가서
(3) 2002년의 한(조선)반도 정세가 예고하는 것
(1) 미국의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는가?
2002년 1월 10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미국 연방 상원의 정보특별위원회에 13개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의 종합정보보고서인 ‘국가정보보고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를 제출하였다. 이전의 국가정보보고서는 1999년 9월에 발표된 바 있다. ’2015년 미국에 대한 외국의 미사일 개발과 탄도미사일 위협’이라는 제목이 달린 이 비공개 정보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언론이 이 국가정보보고서의 공개문건을 보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 보고서에서 한(조선)반도의 정세인식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만한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국가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북(조선)은 핵무기급 탄두를 탑재하고 미국 본토의 태평양 연안을 타격할 수 있는 다단계 대륙간 탄도미사일(국가정보보고서에서는 ‘대포동 2호’라고 표기함)을 “시험발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may be ready to test)”는 것이다. 또한 국가정보보고서는 2002년부터 2015년 사이의 기간에 북(조선)이 발사할 사거리 1만2천 킬로미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미국 전역을 사정권 안에 둘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사실을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국가정보보고서는,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이미 한 두 개의 핵무기를 생산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하였다. 이 국가정보보고서에 관한 보도내용을 실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02년 1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2000년 4월에 미 중앙정보국 고위관리가 처음으로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는데, 그때에는 그의 발언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이 핵무장국임을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가정보보고서는 이란과 이라크도 북(조선)과 마찬가지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지만, 그 두 나라가 미사일을 개발하는 목적은 미국 본토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역내 적대국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이 이란, 이라크 같은 반미국가들과는 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러시아나 중국 같은 군사강국과 격이 같은 신흥군사강국, 즉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고 있는 신흥군사강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신흥군사강국인 북(조선)이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에서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에 의하여 명백하게 지적되었는데도,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을 매우 위협적인 존재라고 지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나온 국가정보보고서가 북(조선)을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지목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국가정보보고서는 미국이 이른바 ‘깡패국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로부터 느끼고 있는 위협보다는 반미테러집단이 선박, 트럭, 항공기 같은 비(非)미사일 수단을 이용하여 미국 본토를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느끼는 위협이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위협평가에는 ’9.11 테러사건’에서 받은 엄청난 충격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를 보도했던 미국의 주요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에 나온 국가정보보고서가 제기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미국의 당면한 위협이 이른바 ‘깡패국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이 아니라 반미테러집단이 선박, 트럭, 항공기 등을 이용하여 미국 본토의 목표물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를테면『워싱턴 포스트』 2002년 1월 11일자는 관계기사의 제목을 ‘미국은 위협에 대한 평가를 변경하였다: 중앙정보국에 따르면, 비미사일 공격이 더 가능하다(U.S. Alters Estimate Of Threats: Non-Missile Attacks Likelier, CIA Says)’라고 달았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02년 1월 12일자는 관계기사의 제목을 ‘보고서에 의하면, 미사일은 가장 심각한 위협이 아니다(Missiles Not Biggest Threats, Report Says)’라고 달았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워싱턴 포스트』다. 이 신문에는 2002년 1월 13일과 14일 이틀에 걸쳐 미국에 대한 미사일 위협문제와 관련한 장문의 기사 두 편이 실렸다. 13일에 나온 첫 번째 기사는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능력에 대한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의 평가가 어떻게 과대포장되었는가를 폭로하는 내용이며, 그 이튿날인 14일에 ‘정치권은 위협을 재정의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How Politics Helped Redefine Threat)’라는 제목으로 실린 두 번째 기사는 ‘럼스펠드위원회 보고서’와 1999년도 국가정보보고서를 집중적으로 분석·비판하고 있다. ‘럼스펠드위원회 보고서’는 북(조선)이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3단계 우주발사체인 ‘백두산 1호’에 탑재하여 발사하기 직전인 1998년 7월에 나온 것이며, 1999년도 국가정보보고서는 ‘백두산 1호’의 발사 이후에 나온 것으로서 미국에 대한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설’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문건들이다.
그런데 미국의 정치권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언론매체인 『워싱턴 포스트』가 ‘럼스펠드위원회 보고서’와 1999년도 국가정보보고서의 ‘미사일 위협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나섬으로써 북(조선)의 ‘미뾰 ?위협설’의 논리적 근거를 뒤흔들어놓은 것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가 미국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협은 북(조선)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테러집단의 테러공격이라고 지목한 것과 『워싱턴 포스트』가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설’의 논리적 근거를 뒤흔들어놓은 것은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
둘째,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는 북(조선)이 ‘백두산 2호’(국가정보보고서에서는 ‘대포동 2호’라고 표기함)의 발사를 2003년까지 유예한 조치에 의하여 조·미 협상이 진전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을 위협적 존재가 아니라 정치협상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태도의 변화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나는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에 이 대목이 포함되어 있음을 매우 중시한다.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가 북(조선)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상 처음으로 인정하였으면서도, 북(조선)이 미국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라고 지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미 정치협상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얼핏 생각하면 논리적으로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결코 논리적으로 모순된 인식이 아니다.
그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미국이 북(조선)을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시켜 한(조선)반도에서 첨예한 적대관계를 유지하여왔던 종래의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함으로써 국교수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 미국의 궁여지책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4,000기 이상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은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100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은 미국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러시아와 중국이라고 지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지목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그 두 나라를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기는커녕 그 두 나라와 국교를 수립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미국은 자기에게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겨누고 있는 군사강국들에 대해서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교를 수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러·미 관계와 중·미 관계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은 자기들이 침략전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군사강국에 대해서는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 적대정책을 펴지 않으며, 침략전쟁의 대상이 될만한 약소국들에 대해서만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적대정책을 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의 정치·군사전략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기묘한 역설’(strange paradox)이다.
이 기묘한 역설은 오늘 한(조선)반도의 정세인식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북(조선)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지 못했던 지난 시기에 미국은 북(조선)을 침략전쟁의 대상으로 여기고 ‘위협적인 존재’라고 규정하였으며 적대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북(조선)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신흥군사강국으로 등장한 지금 미국의 태도는 달라지고 있다. 미국은 북(조선)을 침략전쟁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협상의 대상으로, 더 나아가서 평화공존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북(조선)을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조·미 관계에 관련한 중요한 인식변화의 내용이다.
(2) 다시 민족주체적 정세관으로 돌아가서
나는 이미 지난해에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보유사실을 자료분석에 근거하여 내 나름대로 치밀하게 논증한 두 개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나는 그 두 논문에서 북(조선)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무력위협에 눌려 일방적으로 봉쇄와 압박을 겪고 있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무력위협에 당당히 맞서고 있는 신흥군사강국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미국의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그러한 나의 인식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한(조선)반도의 정세에 관한 나의 견해는, 그 동안 이러 저러한 기회에 발표한 나의 여러 논문들에 들어있는데, 그 논문들에 포함되어 있는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에 전 세계를 제국주의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초강대국’ 미국은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신흥군사강국으로 등장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하여 세계 지배야욕의 기세가 꺾이면서 한(조선)반도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전략과 전쟁계획(‘윈-윈전략’과 ’5027 작전계획’)을 수정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조·미 정치협상의 자리에 끌려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지난해에 등장한 부시 정권은 북(조선)이 클린턴 정권과 7년 동안이나 수많은 고비를 넘으면서 정치협상을 추진한 끝에 이룩한 최대의 성과인 조·미 공동성명을 외면하고 조·미 관계를 개선하는 길에 난관을 조성하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돌출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미국은 머지 않아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폐기하고 조·미 국교수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정세전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다.
셋째, 북(조선)이 신흥군사강국으로 등장하여 조·미 관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역사의 우연한 현상이 절대로 아니고, 어디까지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전략이 이룩한 성과라는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민족주체적 정세관에서 조·미 관계를 인식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민족주체적 정세관이란, 북(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근본목적을 미국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고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관점을 배격하고 민족주체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에 대해서 일부 무지한 사람들은 ‘친북적 관점’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민족주체적 관점에서는 친북이니 친남이니 하는 민족분열주의적 관점이 원천적으로 파기되며 친북, 친남을 갈라놓고 정세를 파악하려는 자기분열적 정세인식은 배제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족주체적 정세관을 가지고 북(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근본목적을 이해하면 어떠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북(조선)이 신흥군사강국으로 부상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군혁명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한(조선)반도의 정세인식에 과연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오늘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또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정세인식의 방향과 내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인식과 전망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북(조선)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전략에 의하여 신흥군사강국으로 등장한 현 정세의 변동방향은, 조·미 적대관계를 청산함으로써 북(조선)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봉쇄와 압박에서 벗어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역사발전의 지향점을 향하여 꾸준히 움직이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나의 정세인식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전략이 조·미 정치협상을 진전시켜 주한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구도를 폐절하고 한(조선)민족 전체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전민족적 차원으로 수행되고 있으며, 21세기 초반에 기필코 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함으로써 한(조선)민족의 절절한 숙원이며 21세기의 민족사가 지향하고 있는 총적 목표인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여 삼천리 강토 위에 부흥강성하는 연방통일대국을 일으켜 세우리라는 것, 이것이 나의 정세전망이다.
이러한 나의 인식과 전망은 주관주의적 해석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정세변화의 실상이다. 미국의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는 그러한 정세변화의 일단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3) 2002년의 한(조선)반도 정세가 예고하는 것
조·미 공동성명을 백지화하려 하고, 한(조선)민족의 6.15 공동선언의 이행을 방해하려는 부시 정권의 책동으로 한(조선)반도에 냉기류가 흐르고 난관이 조성되고 나서 어느덧 1년이 지났다. 그 한 해 동안 조·미 정치협상과 남북 정부당국의 정치협상에서는 이렇다할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처럼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답보상태에 빠지게 된 모든 책임은 무분별한 책동으로 정세발전을 가로막으려고 했던 부시 정권에게 있다.
그런데 올해로 넘어오면서 워싱턴에서는 조·미 관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색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북(조선)에 대한 부시 정권의 관심과 미국 여론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조선)에 대한 부시 정권의 관심과 미국 여론의 관심은 국제원자력기구가 북(조선)의 핵시설을 사찰하는 문제와 북(조선)이 보유하고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문제로 집약된다.
먼저 북(조선)에 대한 부시 정권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한 일련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다음과 같다.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가 상원 정보특별위원회에 제출되던 날인 1월 10일 뉴욕에서는 한(조선)반도 평화회담 특사인 잭 플리처드가 유엔주재 북(조선) 대표부의 박길연 대사를 만났다. 미 국무부는 논평에서 ‘의례적인 만남’이라고 하면서 그 의미를 축소하려고 하였지만, 지금 조·미 정치협상과 관련하여 워싱턴 정가에서 변동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를 축소하기는 힘들다. 1월 하순으로 예정된 한·미 외무장관 회담에서 두 나라의 대북정책이 중점적으로 논의될 것이고, 2월 하순으로 예정된 부시의 남(한국) 방문에서도 또한 대북정책이 중점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워싱턴 타임스』는 2002년 1월 12일자 기사에서 부시가 남(한국)을 방문하면 대북정책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한·미 외무장관 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조선)반도 평화회담 특사와 유엔주재 북(조선) 대사가 만난 것은 ‘외교가의 상견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 미국의 여론은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매우 중시해야 할 변화다.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가 발표되기 직전인 1월 11일 미국의 최대 활자언론매체인 『뉴욕 타임스』는 ‘더욱 심각한 위험(The Greater Danger)’이라는 제목으로 니콜러스 크리스토프가 쓴 판문점발 기사를 실었다. 미국인들에게 조·미 적대관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판문점에서 작성한 이 기사는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미사일방어체계를 일본과 남(한국)에게 팔아먹으려고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이라는 구실을 요구하는 한편, 대북 포용정책을 홀시하였다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그 기사는 오늘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파산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도 부시가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 기사는 1972년에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중국이 전환기를 맞았던 것처럼, 이제는 북(조선)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부시는 “북(조선)과 거래를 재개함으로써 위협적인 공산주의 강대국인 북(조선)을 상대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여론이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남가주대학(USC)의 한국(조선)문제 전문가들인 에릭 헤이킬라와 조오지 타튼 3세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02년 1월 1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조선)반도에서 평화가 사라지지 않게 하라(Don’t Let Korea Peninsula Peace Slip Away)’라는 그 기고문에서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칭송하면서 미국은 한(조선)반도에서 적대정책을 추구하지 말고 동북아지역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중국, 러시아와 함께 손을 잡고 북(조선)의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시 정권과 미국의 여론은 북(조선)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거나 ‘북(조선) 위협설’을 관성적으로 되풀이하는 어두컴컴한 그늘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1월에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원인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 전환의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1월 15일부터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번의 사찰은 북(조선)과 국제원자력기구가 1993년 이후 8년만에 처음으로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협정에 따른 조치를 이행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주장에 따르면, 북(조선)이 핵안전협정에 따른 조치를 이행할 경우 앞으로 북(조선)의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끝마치기까지 3-4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북(조선)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단을 받아들인 것은, 비록 내외 언론에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부시 정권이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것으로 된다.
둘째,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이 종결국면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이 종결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지난해 9월 미국의 심장부를 항공기 테러로 강타당한 엄청난 충격 때문에 반미국가들에 대한 적개심을 안고 있었던 미국의 여론주도층이 이제는 심리적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9.11 테러사건’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여론주도층의 이성을 적개심으로 온통 마비시켰으며, 침략전쟁을 고무·찬양하는 ‘애국주의’가 미국 사회에 범람하였다. 지난해 5월에 미 국무부가 북(조선)을 여전히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았으므로, 반미테러라는 말만 들어도 적대감으로 광분하게 되었던 미국 사회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라는 주장은 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으로 도망쳤거나 아니면 병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미국 언론에 나돌기 시작하고, 알카에다 조직이 재기불능상태로 파괴되었다는 ‘승전보’가 들리는 요즈음, 미국 여론주도층의 적대감은 누그러지고 있다. 이제는 미국의 여론에서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라는 주장이 나와도 신경질적인 반응과 격렬한 비난을 받게 될 위험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 언론에서 요즈음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칭송하고 부시 정권이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흐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북(조선)이 2001년 12월 12일 유엔에서 ‘테러자금 조달억제에 관한 국제협약’과 ‘인질억류방지에 관한 국제협약’에 정식 서명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북(조선)은 반테러 국제협약 12개 가운데 7개 협약에 서명하였다. 2001년 12월 1일부터 4일까지 북(조선)을 방문한 바 있는 스웨덴 특별사절단은 백남순 외무상과 최수헌 외무성 부상을 만난 자리에서 “북(조선)이 ‘테러지원국가’가 아니므로 아직 가입하지 않은 반테러 국제협약 5개에 서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북(조선)이 반테러 국제협약에 서명한 것은 북(조선)을 이른바 ‘테러지원국가’라고 지목하고 있는 미국의 억지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조·미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부시 정권이 집권 이후 강하게 밀고 나간 제국주의 군사전략의 두 가지 목표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부시 정권이 추구하고 있는 일차적인 군사전략목표는 전지구적인 범위의 미사일방어체계를 개발하려는 계획인데, 이것은 부시 정권이 미국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사일방어체제를 개발하는 실제적인 준비에 착수함으로써 사실상 논란은 마무리되었다.
2002년도 국가정보보고서가 연방 상원의 정보특별위원회에 제출되던 날인 1월 10일 부시는 이른바 ‘깡패국가’들의 ‘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삼아 개발하게 된 미사일 방어체계를 위하여 모두 3천1백72억 달러를 투입한다는 예산안에 서명하였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02년 1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21세기의 거대한 첨단군사사업이 될 미사일방어체계 개발사업을 주도할 군수기업으로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있는 보잉사(Boeing Co.)와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 본사를 두고 있는 라키드 마틴사(Lokheed Martin Corp.)를 다음달에 선정할 것이라고 한다.
부시 정권의 미사일방어체계 개발사업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미 국방부는 오산에 주둔하고 있는 제7공군사령부에 전역미사일방어(TMD)기구를 이미 창설하였다는 것이다. 2001년 10월까지 주한미군 부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미 육군중장 찰스 헤플바워가 이 기구를 창설하는 작업을 주도하였으며, 한미연합사령부는 전역미사일방어기구와 관련하여 이미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을 들먹이면서 미사일방어체계의 필요성을 떠들었던 부시 정권은 올해에 들어오면서 미사일방어체계 개발사업을 위한 막대한 예산을 따내는 데 성공했으므로 이제는 북(조선)의 ‘미사일 위협’이라는 구실이 부시 정권에게 더 이상 절실한 요구로 되지 않게 되었다. 그로써 부시 정권이 조·미 정치협상에 나설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부시 정권이 추구하고 있는 또 다른 군사전략목표는 중앙아시아에 미군을 영구주둔시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아시아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전에는 소련의 세력권 안에 있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련의 승계국인 러시아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지역이다. 중앙아시아는 미국이 21세기의 세계 지배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잠재적인 위협요인으로 등장하는 3대 강국인 러시아, 중국, 인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전략요충지다. 북쪽으로는 러시아가, 동쪽으로는 중국이, 서쪽으로는 카스피해가, 동남쪽으로는 인도가 자리잡고 있는 전략요충지다. 중앙아시아에는 21세기의 세계 석유산업을 움직일 엄청난 양의 원유가 묻혀있는 카스피해 유전지대가 있으며, 21세기에 유라시아대륙을 관통하는 물류이동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게 될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부시 정권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중앙아시아에서 이미 쇠퇴하고 있던 러시아의 세력권을 밀어내고 아시아대륙의 한 복판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전략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9.11 테러사건’을 계기로 하여 이른바 ‘반테러전쟁’을 수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벌였고, 결국 3대 강국의 세력권이 맞서고 있는 전략요충지에 미군을 주둔시켰을 뿐 아니라 카스피해 유전지대를 장악하기 위한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 요인들을 생각해보면, 부시 정권이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은 일정하게 충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부시 정권에게 과연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려는 생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부시 정권이 만일 올해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조·미 정치협상의 재개를 외면하면서 대북 적대정책을 계속 고집하는 경우, 그것은 부시 정권에게 매우 불리한 ‘부메랑 효과’를 안겨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내년 2003년에 가서도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버리지 않을 경우를 예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3년에 미국과 전면적인 대결을 불사하겠다는 시한부 통첩을 주었기 때문이다. 2003년에 가서 또 다시 조·미 대결상태가 격화되면 북(조선)은 지난 1990년대보다 더욱 강해진 국가역량을 총동원하여 부시 정권을 대결의 벼랑끝으로 밀어버릴 것이며, 결국 부시 정권은 정치적 패배를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부시 정권은 2003년에 다가오게 될 조·미 대결의 숨막히는 위기감과 그 대결에서의 정치적 패배를 일찌감치 피하기 위해서는 올해 안에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것이 자기들에게도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부시가 2월 19일부터 서울, 도쿄, 베이징을 연이어 방문하려는 것은 이러한 판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할 때, 올해는 부시 정권의 방해책동으로 막혀있었던 조·미 정치협상이 다시 시작되면서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올해 남(한국)의 지방자치제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남(한국)의 정치정세를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시킬 것이다. 이러한 정세변동을 예고하듯이 북(조선)의 언론은 새해 벽두부터 부시 정권에 대해서 미국의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강한 요구를 들이대고 있다.
2002년의 한(조선)반도 정세는 조·미 정치협상을 재개하는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올해의 마지막날에 우리는 얼마나 달라진 정세 속에서 2003년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2001년 1월 1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