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와 주한미군문제-리영희 이시우 2001/11/06 453
남북관계와 주한미군문제,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상황의 질적 변화에 요구되는 발상의 대전환 리영희
오늘 저는 남북 관계에서 특히 군사적 측면에 대하여 저의 견해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정상 회담과 관련하여 지난 5월 22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청와대 초청 각계 전문가·단체장 간담회에서 대통령께 제안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자 합니다.
저는 일찍이 1988년에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논문은 당시에 북한이 아직도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 있다, 사흘만에 10만 공병대를 포항에 투하시킬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팽배할 때, 그러니까 남한의 군사력이 질적·양적으로 북한 군사력의 3분의 1 내지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 상식처럼 믿어지고 있을 때, 우리 남한의 종합적 전쟁 잠재능력이 북한보다 월등하다고 논증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켜져서 국회에서까지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11시간에 걸쳐 논쟁이 이루어졌는데, 저를 증인으로 불러 국회의원 절반이상이 참석한 자리에서 함께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논문에 대해서 검찰과 군에서도 저를 문제삼으려 했지만, 논증한 내용을 가지고서는 어떻게 문제를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논문을 계기로 하여 이제는 남북의 군사적 능력이나 관계에서 우리 군의 실태를 국민에게 다소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정책 변환이 이루어졌고, 3개월만에 부랴부랴 『국방백서』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는 국민세금으로 유지되는 군의 실정을 창군한 지 48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백서’였습니다. 이로써, 제 논문의 내용을 상당 부분 국방부가 시인한 셈입니다.
저는 작년6월15일 서해 교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도, 서해의 소위 군사 국방한계선이 불법적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이런 종류의 논문을 연구하게 된 것은 남북한의 군사적 진실을 공개하는 것이 남북한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고 통일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남한은 절대적으로 선이고 북한은 절대적으로 악이라는 신념 혹은 신앙이 남북 간의 문제에 대한 사실적 인식과 이하, 상호간의 신뢰와 평화 관계의 조성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고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식의 인식은 남북관계에 결코 도움을 줄 수 없고, 국민도 ‘북한 악마설’, ‘남한 천사설’에 사로잡혀 있는 한 통일 문제를 올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남북한 정상회담을 통해서 정치적·경제적·군사적·문화적으로 화해의 시대로 향하는 민족사적 대전환, 심지어는 세계사적인 대전환을 이루고자 하는데, 정치인들이 먼저 냉전 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세에 현명하게 대응하는 ‘발상의 대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북한은 절대적으로 ‘악’이고 남한은 절대적으로 ‘선’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크게 왜곡된 것인지는,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난 이후 휴전선 부근에서 일어난 남북한 사이의 군사도발건수를 비교해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사분야의 정론지로 꼽히는 『군사논단』에 실린 내용에 따르더라도, 여기에서도 무조건 북한이 잘못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1953년 7월27일에서 1998년 6월 31일까지 있었던 북한의 휴전협정 위반 건수는 42만 4,356건(지상 42만 4,140건, 해상 104건, 공중100건)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저널에서는 이것만 강조하고 남한 쪽의 정전협정 위반에 대해 안 쓸 수가 없어서 쓴 것 같은데, 유엔군(남한포함)이 위반했다고 북한측에서 주장하는 건수는 1991년까지 45만 4,605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서로간에 위반 사실을 시인한 것은 지극히 적습니다.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인 문제는 서로 원인을 주고받는 것이요 서로가 문제의 주체가 되는 것이자, 어느 한쪽은 오로지 선이고 다른 한쪽은 오로지 악이라는 남한 천사설, 북한 악마설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회담의 결과를 잘 풀어 나가려면, 북한이 악인 만큼 남한도 악이고 남한이 선인 만큼 북한도 선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4월19일 발표가 있자마자, 그날 즉시로 미국정부는 남북한 정상간에 어떠한 결의나 합의를 하든 상관없이 주한 미군의 지위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미국방부는 “주한 미군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 주둔한다”는 발표를 한 바 있습니다. 그 발표는 그 날 처음 나온 것이 아니며, 심지어 우리 국방부 대변인도 그런 얘기를 공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는 대통령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통일 국가에도 미군 주둔이 계속된다는 것은, 미국의 군사목적에 맞지 않으면 남북통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통일 후에도 계속 주둔하겠다는 것은 통일 국가를 현재의 남한처럼 만들겠다는 뜻이거나, ‘흡수통일’ 또는 미군의 ‘점령통일’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민족에 대한 철저한 모독이고, 용서할 수 없는 미국의 오만불손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남북한 정상이 만나 역사적인 회담을 통해 통일 문제를 논의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분단국가로서 정전협정에 따른 주한 미군의 체계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직 정상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국이 이렇게 성명이나 선언이라는 형식으로 의사표시를 하고 나오는 것에 대해, 주권 국가라면, 주권 국가의 대통령이라면 정상회담 전에 뭐가 발언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결정하든 주한 미군이 그대로 주저앉을 거라고 미국이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고 오만한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통일 이후에도 미군을 주둔시키겠다는 발언은 7·4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민족 자주와 평화통일 원칙을 저해하는, 미국의 군사적 목적에 합당하지 않으면 남북정상 합의조차 허용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가 아니겠습니까?”
통일 이후에도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겠다는 미국의 발언은 곧 남북한의통일 과정이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하에서만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주도의 통일, 흡수통일, 미국 점령하의 통일로 해석되는 것인데, 이는 정상 회담의 정신에 위배되는것이자, 민족의 자존을 해치는 일로서 반드시 해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후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주한 미군 주둔과 한·미·일 군사적 공조는 남한에 유리한 만큼 북한에도 유리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사관 학교나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언급한 주한 미군의 주둔에 관련된 내용은 “미군주둔과 미군기지는 남한을 위한 것이며, 동북아 정세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한·미·일 공조는 남한에 유리한 만큼 북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듣고 동의하거나 이해한 것으로 짐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대통령께서 사실 이상으로 내어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과연 통일 이후 미군 주둔이 진정한 의미의 민족통일정책에 일조하는 것이 되고, 또 이것을 김 대통령께서 진정 바라는 것인지? 과연 한반도가 미국의 군사 기지로 반영구화되는 것이 동북아시아의 정세 안정과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저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여러분들께서도 남북 정상 회담의 진전을 위해서, 또 통일 과정의 전반에 걸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 많이 고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런 요지로 얘기를 했습니다. 남북의 민족적 염원을 담은 남북 정상 회담의 두 지도자간의 신뢰감을 굳히고, 남북간의 군사적 위기가 해소되고, 남북한의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신뢰가 쌓이고,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재발할 수 없게끔 제반 정세와 상황이 개선되면, 그렇게 되면 자연히 주변 동북아시아 열강의 이해 관계 조절을 위해서나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권위와 주권을 위해서나 주한 미군의 지위에 일정한 변경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위 변경에 앞서 대통령께서 앞으로 남북한간에 추진하고자 하는 신뢰 회복과 평화관계의 구출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군사적 위기 구조의 해소와 병행해서 또는 약간의 시차(time lag)를 두어 주한 미군과 미군 기지를 감축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미국 군민의 요구도, 세계의 전반적인 요청도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남북한의 관계가 더 진전되어 연방이냐 연합이냐 하는 아주 초보적이고 정치적인 단계로 들어가면, 자연히 주한 미군과 군사 기지의 감축과 더불어 잔류하게 될 소수의 미군을 포함해, 유엔 회원 국가들에서 차출한 평화유지군(Peace Keeping Force, PKF)으로 대체할 계획이나 구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미국 군사 운영상 미국 군대가 있는 곳에는 세 가지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핵무기로 그 지상 주둔군을 커버할 수 있는 핵포지션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지상미군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미국은 미국 군대가 포함되는 다국적군의 전투 또는 전쟁 행위에 있어 반드시 미국인이 사령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1지역1사령관(one theater, one commander)원칙입니다. 셋째로, 미군의 전쟁 범죄나 비인간적·반도덕적 행위, 민간인에 대한 학살 등에 대해서 다른 나라의 재판에 미국 군인의 신병 인도를 하지 않고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현재 4만 명의 미군이 군사 기지로 우리 국토 7,800만평을 점유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이에 대해 한 품도 받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직접 원조비 3억 달러에 그 밖에 간접 지원비까지 합쳐서 약 25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문제도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전협정 체결 5년 뒤인 1958년 10월1일, 중국 의용군은 전면 철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주둔이 필요했던 까닭은 전쟁 직후에 우리가 취약했던 점도 있겠지만, 소련·중국에 대해 사실은 일본의 수호를 위해서 전초 기지로서 남한을 필요로 한 점이 더 컸습니다. 남한 자체를 위해서라면 6·25 때 미국이 5만 명의 자국 청년들을 죽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북한 평화 정착 구조에 진전에 병행해서 남한에서 대부분의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일본의 미군주둔력을 그대로 확보하면서 유엔평화군 등을 통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시켜 나간다면, 동북아시아의 지역적 안정과 안전은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 미국의 군사적 전략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단계적인 상황 과정에서 저는 팀 스피리트 훈련의 계속이나 일본과 함께 수시로 군사동맹 행동을 벌여 미·일·한 ‘군사적 3국공조’로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북한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 유럽에서 나토와 바르샤바 동맹 사이에 ‘헬싱키 협정’이 체결된 뒤, 서로 대규모 군사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 이듬해인 1976년부터 그것을 작은 한반도에 옮겨서 허약한 북한을 상대로 시작한 것이 이 ‘팀스피리트’ 훈련입니다. 그것은 세계 최대이자 최고이며 최강인 핵 공격 군사 훈련입니다. 막강한 공격용 항공모함 2척과 20여 척의 핵 장비 함정을 중심으로 핵폭탄을 실제로 적재한 중폭격기, 평균 20만 명의 지상군이 동원되는 이런 팀 스피리트 훈련을 무려 17번이나 했습니다. 이 때마다 북한이 국가적으로 마비되고 경련을 일으키고 까무러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방어용’ 군사 훈련은 공장 직공과 농민에게 기관총을 주고, 어선에 박격포와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국가의 생산 기능이 거의 중단되고 마비되다시피 하는 것이 사실인데, 우리는 이런 것을 마치 선량한뜻에서 하는 천사 같은 군사 훈련이라고 주장해 온 것입니다. 미국이 1991년 막강한 핵 군사력으로 이라크를 공격했던 바로 그 해군력과 공군력으로 이 작은 북한에 대해 17회나 위협적인 군사 훈련을 한다는 것은 실제로 엄청난 협박이나 다름없습니다. 북한 공군의 첨단 무기인 MIG-29전투기는 소련에서 제공받은 지 3년 뒤인 1991년에는 이미 부속품 구매와 연료 구입이 불가능해져서 연간 조종사 훈련을 4시간밖에 못하는 상태입니다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연간 130시간 훈련받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저는 남북 문제를 생각하면서 늘 군사적인 측면에서 ‘역지사지’라는 입장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거꾸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블라디보스톡에 기지를 둔 소련 해군 극동함대의 핵 공격 항공모함 2척과 핵무장 함정 20여척, 핵폭탄을 적재한 장거리 폭격기가 우리 휴전선 위의 강릉·삼척·강화 위를 날고, 거기에 소련군과 인민군, 중공군 27만 여명이 동원되어 ‘소련·중국·인민군판 팀 스피리트 훈련’을 1∼2주일도 아니고 한달 두 달씩, 한 해도 아니고 20여 년 동안 해마다 계속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이해한다면 남북정상 회담에 앞서서 서로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어떤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이와 동시에 군사적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가 북한에 비해서 4배 내지 5배를 더 쓰고 있는 군사비를 이제 동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상황이 북한에게는 국가적으로 목이 졸리는 것과 같은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한 미군을 제외하고라도, 북한보다 군사비 지출이 훨씬 많습니다.(이제는 군도 이 점을 공식 시인하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반대로 북한의 위협만을 강조했습니다.)북한이 자연 재해로 타격을 받기 전, 정상적으로 국가 예산을 운영하던 마지막 해인 1993년도의 군사비만 비교해 보아도, 22억 달러이던 북한에 비해 남한은 117억 달러나 되었습니다. 우리 국방부는 그 당시 북한의 군사비가 45억 달러라고 했지만, 외국의 군사전문가나 연구소에서는 30억 달러에서 35억 달러 사이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소련이나 공산주의 국가, 북한에 대해서 가장 적대적인 미국의 유명한 반공정책 자문 기관인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이 발표한 1993년 『북한예산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이 공표한 국가 예산의 11.2퍼센트인 군사 예산 21억 6천만 달러보다 조금 많은 22억 달러라고 평가했습니다. 이것은 북한을 두둔하는 성격의 기관이 아니라 철저하게 북한을 경계하고 반대하는 공화당계의 호전적·반공적인 헤리티지 재단의 북한 군사 예산 평가입니다.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것과 헤리티지 재단이 주장하는 것의 중간 부분을 치더라도 30억 달러에서 35억 달러인데, 그 해의 우리 군사비는 이것보다 적어도 세 배 이상이 됩니다. 율곡 사업에서 드러났듯이 1980년 이후 해마다 책정되는 남한의 신무기 및 장비의 개발·구입비만도 연간 40억 달러나 되는 것을 감안하면, 북한 군사비 전체를 합해도 남한의 1년 간의 무기·장비 구입 및 연구 비용도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북한에는 과거 소련 및 중국의 주둔군이나 군사 기지가 없었고, 1990년을 전후해서는 이들 나라가 오히려 남한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우호 관계를 가지면서, 북한과의 군사동맹을 백지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은 국제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되고, 동맹관계에서도 고립되고, 핵 우산화에서도 제외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북한의 생존을 위협하는 군사적 훈련과 군사비 증강, 미국과 핵을 중심으로 북한을 위협하는 전략은 이제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1980년대 말부터의 핵·미사일화 시도는 군사력 우월의 표시가 아니라, 그와 같은 미국의 군사적 협박 앞에서 갖게 되는 심각한 군사적 위기감과 군사적 열세의 표시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1970년대 초 남한의 국가적 잠재력이 북한보다 절대적으로 열등했을 때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이 주한 미군 1개사단 철수와 군사적 직접지원의무를 대폭 축소한 정책 전환(닉슨 독트린)으로 위기에 처한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이 이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계획을 추진했던 바로 그것과 같은 성격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대통령께서 임기로 계시는 앞으로 1,2년만이라도 우리가 해마다 한 자리 또는 두 자리 숫자로 증액하는 국방예산을 동결하겠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안한다면, 북한의 신뢰를 유도하고 군사적으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유도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감히 그런 조그마한 희망이나마 가져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대한 민국 군대의 작전지휘권 문제인데, 군대에서 작전 지휘권이란 전투·전쟁 상황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소위’평화시’에 한국군 장성이 형식적’지휘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입니다. 군사력이 전쟁 능력으로 발동하지 않는 평화시에 이것은 한국 국내의 내부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군사적인 의미를 띨 때, 곧 전시의 작전 지휘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한 미군은 원래 북한의 남침에 대한 방어용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군대의 위험스러운 대북 군사행동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 협정을 깨기 위해 실제로 아무런 군사적 실력도 없으면서 한국군을 동원해 웅진반도 등 북한의 서해안 지역을 공격, 미국을 다시 한국전쟁에 끌어들여 백두산까지 치고 올라가는 이승만식 통일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서해상의 소위’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은 미국이 휴전 조인 이후 남한군의 북한 영내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서 서해안에 설치한 유엔군 내부 규정입니다. 해상에서 미국이 대한민국 해군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발표하는 것이 ‘서해안의 북방한계선’이었던 것입니다.
남북한 군사 대결 구조의 완화로 전쟁 위험이 사라지면 한국군 작전 지휘권도 평화시나 전쟁시의 구분 없이 대한민국 주권에 반환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또 남북한 정상회담의 결과로 앞으로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할 필요 조건이 사라지면, 작전 지휘권을 회수해야 합니다. 지금 매향리 폭격 기지의 문제라든가 한미행정협정의 문제라든가 상당한 정도까지 개선되지 않은 채 주한 미군이 과거와 같은 자세와 법적 지위를 그대로 유지해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 봅니다.
또 하나 남북관계에 있어서 상당한 관계 진전이 이루어진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 민족의 평화를 위한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미간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미 방위조약’구조로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군사행동을 하게 되면 대한민국(군대)은 과거 베트남전쟁에서 전쟁당사자가 되었던 것처럼 거의 자동적으로 (실제로는 필연적으로)미국군사 작전의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미 방위조약 제2조의 의무)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어쩌면 미국이 개입하는 군사적인 위기를 상정할 때 한국(군)이 중국을 적으로 해서 미국군과 함께 전쟁을 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미방위조약은 미국이나 우리의 무식한 이들이 주장·생각하는 것처럼 ‘남한의 방위’만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에 동반자가 되는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반도 내의 환경이 나아진다고 할 때 남북한이 각기 군사동맹 체제를 해제하여 강대국의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반도 평화는 물론 동북안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소련과 이미 군사동맹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극적인 군사동맹관계에 있는 중국과의 ‘우호협력조약’에서 벗어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북한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는 우리 또한 적어도 한미방위조약에 상당한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소위 북방 3각 군사동맹(소련·중국·북한)이 사실상 해체되어 있는데(지금은 2분의 1이상이 해체되어 있습니다).남한은 오히려 일본을 포함한 남방 3각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해 나간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 회복 구축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세계 전체의 판단 기준에서 보더라도 그다지 칭송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앞으로 한 3∼4년쯤 사이 어느 단계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평화 관계가 성립되고, 국교가 개설되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리라고 본다면,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을지라도 미국과 북한간의 정상적 국가 승인과 국가 관계가 수립된다며, 남북 민족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을 줄임으로써 발생하는 예산을 우리 내분의 사회·교육·복지 등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고, 실질 국방예산 GNP 5∼6퍼센트에서 감축되는 GNP 1∼2퍼센트 정도를 순차적으로 ‘통일 비용’에 투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소위 ‘통일 비용’이라는 것이 흔히 국민이 걱정하듯이 마치 국가예산 중에서 뭉텅이로 잘라 내 북한에 돈을 갖다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 평화체제 구축 →주한 미군 지원비 연간 20여억달러 감축→군사력 통제→단계적 군축→전체적 군사비 감축→절감 군사비의 경제·사회적 투자 전용→복지적 사회 건설……로 이어간다면, 소위 ‘통일비용’도 국내의 생활수준이나 경제 생산력에 거의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계와 상황에 이르면 동북아시아가 2개 국가간의 개별적 군사 동맹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 얘기되고 있는 지역 안보 체제 구상에 들어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위 2+4(남·북+미·일·중·러)식의 안보체제를 채택한다면, 지금까지 유럽에 있어서 헬싱키와 같은 안보 체제가 동북아시아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이런 단계를 거치면 반드시 불가능하지도 않은 그런 지역 안보 구조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국민의 정서에는 맞지 않겠지만, 통일될 나라의 7천만 내지 1억 인구의 능력을 가지고, 군사력 강화로 안보에 대처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오스트리아처럼 주변 강대국(중·일·미·러)이 승인하는 ‘영세중립국’(물론 유엔이 보장하는)구조로써 한반도의 안보를 구상하는 것입니다. 일본과 미국, 러시아, 중국이라는 4대 열강의 지정학적인 대각선상에 놓여 1,300년 동안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간의 각축과 영토쟁탈전의 희생물이 되고 전쟁터로 바쳐왔던 우리의 처참한 위상을 오히려 거꾸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로 들어오는 열강의 핵 융합적인 힘을 분산·조절·중화·균형화함으로써 군사적 의존보다는 경제·외교·정치·과학·기술·도덕적인 위상에서 월등히 훌륭하고 성숙한 통일 민족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세 중립 국가의 구상을 국회의원 여러분께 제안해 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국가운영패러다임으로서’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제와 관련되지는 않지만 김 대통령에게 두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앞으로 남북한 정상회담이 잘 진행되고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일본이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하게 될 텐데, 제발 남한이 과거 36년 간의 식민지 경험과 그 피해를 2억 달러 무상원조로 팔아 넘긴 ‘김종필-오히라 메모’따위 같은 치욕적인 방식으로 국교정상화를 하지 않도록, 우리가 민족적인 대승적 차원에서 북한을 도와주고 일본에 대해 강력하게 압력을 가해달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적어도 북한은 식민지 청산 및 그 후 50년 동안 일본이 북한에 가해 온 온갖 부당한 행위에 대한 배상까지도 민족의 이름으로 떳떳이 받아 낼 수 있도록, 그런 문제에 한해서는 민족의 차원에서 일본하고가 아니라 북한과 공조를 해야 할 것이라고 건의했습니다.
또 하나는 정상회담과 관련해서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과 공작원, 장기수 문제와 함께, 남한이 북한에 투입해서 지금까지 생사가 불명하고 행방이 묘연한 미귀환 간첩·공작원 7,762명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제의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북한만이 남파 공작을 해 온 것처럼 얘기하고,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숫자만 해도 희생자가 최소한 7,762명(정전협정 이후 파견된 간첩과 공작원으로 행방 불명되거나 미귀환한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이들의 가족은 국방부에서도 정상적인 명예회복과 보상은커녕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 과정에서 희생된 당사자들의 소재 확인과 가족들에 대한 명예 회복 및 보상에도 힘써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와 더불어 해방 및 6·25어간에 자진 월북한 사회주의자와 그 밖의 수많은 인사들의 명예는 물론 연좌제로 고통받아 온 그들의 수십만 가족들의 명예까지 회복하며, 그들의 상봉도 실현해야 합니다.
오늘 저의 이야기의 중점은 그러나 남·북한, 한·미간, 통일 한국과 지역 국가간에 관련된 국가적 구상에 두었습니다. 낡은 냉전 시대와 미국 예속 체제의 국가적·민족적 생존 양식을 근본적으로 뜯어보는 ‘사고의 대전환’이 없이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냉전 시대와 미국예속의 상태로 머무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꿉시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