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과 예술운동2005/02/01

6월항쟁과 예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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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벅차 오르는 나날이었다.수천에서 수만으로 점점 인파가 늘어난 것이아니라 6월 10일 호헌철폐 국민대회에는 수십만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누구도 이 대규모를 예측하지 못했다.마치 거대하게 밀려오는 해일앞에서 피할생각은 고사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는 느낌이었다.일상 생활에매어 있었든지 그나마 작은 승리를 체험했던지 이 해일앞에서는 정말 사소한 차이일 뿐 이었다.해일을 본사람들은 순식간에 자신이 해일이 되었다.그리고 그순간 우리 모두의 인생은 바뀌었다.그리고 또 역사도 바뀌었다.국민이 걸어가는 길이 곧 역사이기 때문이었다.70년대 이후 서구 제국의 지식인들이 역사의 종말을 얘기 하고 있을때 극동의 끝 한반도에선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6월항쟁의 해일을 보고 스스로 해일이 되었던 대다수 국민들에겐 그래서 사회주의의 몰락과 진보의 좌절에 아랑곳 없이 우리 스스로 가기로 한 길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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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6월 항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많았지만 가장 관심을 집중 시켰던 것은 이것이 혁명으로 발전할 것인가 아닌가 였다. 언론에서는 시위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건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한 경쟁에서건 매일 신조어들을 만들어 냈다.시민과 학생 시위대가 취루탄을 쏘던 전경들을 포위해서 방패와 무기를 뺏고 포로가되는 장면,페퍼포그차가 뒤집혀 지는 장면과 함께 러시아 혁명때 등장했던 해방구라는 말을 자주 썼다.실제로 군부는 6월 항쟁을 좌익 혁명으로 규정하고 6월 29일전까지 진압을 위한 훈련과 만반의 태세속에 출동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시위대의 요구는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에서 자주없이 민주없다 미국은 물러가라로 발전하고 있었다.혁명과 반혁명의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6.29선언이 나왔다.결국 6월 항쟁은 혁명으로도 반혁명으로도 발전하지 않았다. 우리의 역사가 단번의 비약으로도 단번의 후퇴로도 발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케 했다. 6.29선언이 결코 좌절이 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뒤이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증명 되었다. 6.29선언 다음날 여기저기 나붙었던 “오늘은 기분 좋은날 차값은 무료”의 신바람이 생활터전에서의 자신감으로 이어진것이 노동자들의 대진출이었다. 장마뒤에 울산에서 들려온 총파업 소식을 듣고뛰어 내려간 사람들이 확인것은 너무나 의외였다.지게차와 오토바이를 밀고 울산을 휘저으면서 노동자들이 시민들에게 뿌린 요구안(등사잉크로 찍은)의 1번은 머리를 맘대로 기르게 해달라 였다. 거리에서의 민주 쟁취와 생활 현장에서의 두발자율화.우리의 역사가 큰것과 작은 것의 긴밀한 통일 속에서 발전한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었다. 87년 두발자율화는 그렇게 해서 95년 민주노총건설로 발전하였다. 역사의 큰해일속에서도 작은 파문을 놓치지 않고 준비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91년 5월(강경대 열사정국)까지 역사는 분명히 국민의 편이었다.
문예운동이 이전과는 비교할수 없는 양과 질을 가지고 전개된것이 바로 6월 항쟁이후 거리혁명이 생활혁명으로 전개되던 바로 이시점이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조건개선을 요구 하던 손에는 근로기준법이 쥐어져 있었지만 87년 6월항쟁을 겪은 노동자들의 손엔 북채가 쥐어져 있었다. 역사의 발전은 옳기때문에 운동하던 현실에서 좋아서 운동하는 현실로 이미 바뀌어 있었다.그래서 북을 치며 파업하는 노동자의 모습은 수십년사이에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어렵게 인식해야할 필요도 없이 문예는 운동 속에서 이미 하나였다. 세계적으로 특수한 이현상이 문예운동이 다른 나라처럼 문인운동이 되지 않고 대중의 자주적인 운동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자,부문운동으로 되지않고 전체운동의 노선으로까지 이해되게된 배경이다.신바람의 전신이었던 한국문화운동연구소는 이 격동의 한 복판에서 창립되었다.87년 8월 21일 노래분과란 이름대신 마당소리분과란 이름으로 노래와 선전등 소리와 관계된 모든 대중의 창조적인 문화를 다담으려 했으며,극단 신바람이란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서구적인 연극을 거부하고 우리식의 마당굿을 계승한 열린연극,보이지 않는연극,거리연극등을 개발했다.이외에도 우리옷 연구모임 질경이,새뚝이 영상분과등,이름자체도 신선한 분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이는 내용만 대중을 주인으로 하는게 아니라 형식까지 대중의 무한한 가능성을 담으려했던 진지한 노력과 고민의결과 였다.한문연은 그런점에서 6월항쟁의 거대한 해일을 이루고 있는 작은 파문을 발견하고 준비한 단체였다.87년 대선에서 패배하고나서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있을때 민족문화학교등을 열어 생활현장에서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정확히 제시할수 있었다.그때 교육생으로 왔던 석치순씨는 현재 지하철 노조위원장이되었고,조성범씨는 전국연합사무처장이 되어있다. 또한 일년도 되지 않아 단번에 서울지역 노동자 문화패 협의회를 만들고, 노동자 민족문화운동연합을, 전국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를 출범 시켰다.평범한 직장인들이 전국노동자 문화운동협의회의 주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활시위를 떠난 활과 같았다.연일 승승장구하던 대중문예운동이 침체되기 시작한 것은 93년이후였다. 이미 정부나 기업에 의해 공세적으로 펼쳐진 기업문화운동은 대중문예운동의 성과를 하나씩 등기 이전하기 시작 하였다. 민족문화보급운동의 성과가 서편제와 국악의해로, 통일노래한마당이 열린음악회로 등기이전 되어갔다.기업문화운동의 존재를 가장 먼저 제기했던 노민문연과 전노문협은 뻬치까의 독가스를 감지하는 십자매였지만 그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해산되어야했다.그러고 나서 우리의 문화는 이전과 다른모습을 갖게 되었다.대중가수가 하나둘은 끼어야지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이젠 기성가수들의 새로운 시장이 되어주고 있고 대중문예단체에서 헌신적으로 일했던 일꾼들은 전망이 없다며 하나둘사람들 곁을 떠나고 있다. 6월항쟁의 거대한 해일속에서 발견한 작은파문이 아니라 나약한 감상의 파문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그래서 어떤때는 큰얘기를 시원시원하게 하는 사람이 부러워 보이기도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어쨌거나 공통점은 자기얘기로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데있다.역사의 한복판에 서있었던 선배들의 영광을 생각해본다.지금은 작은 파문을 무수히 일으키며 그파문이 마침내 해일 되게 하는 때 다시 6월의 거리에 서보자. 그날의 해일을 마음속에 일부러 그려보자 해일만도 아닌 파문만도 아닌 해일속의 파문인 자신을 그려보자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