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관여확장전략과 협상공존전략의 대치1 이시우 2001/05/01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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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여․확장 전략과 협상․공존 전략의 대치,
그리고 한(조선)반도 통일 정세의 변동 방향
한 호 석 (미주평화통일연구소장)
(1) 봉쇄․대결 전략과 관여․확장 전략의 이중 수행
오늘 미국은 탈냉전 시대의 추세에 맞추어 동아시아 지역에서, 특히 냉전 질서의 표상인 한(조선)반도에서 봉쇄․대결 전략(Containment-Confrontation Strategy)을 폐기하고 관여․확장 전략(Engagement-Enlargement Strategy)으로 수정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 정치적 부담의 핵심부에는 조․미 관계를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정상화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숙제가 들어있다.
미국의 전략 수정이 한(조선)반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알려면, 먼저 미국의 전략 수립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 의식을 파악해야 한다. 탈냉전의 물결이 몰려오기 시작한 뒤로 워싱턴에 있는 전략 수립가들의 머리 속에는 관여․확장 전략에 대한 생각이 가득차 있다. 우리는 세기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는 저들이 자기들 내부에서 전략 수정에 관한 논의를 어떻게 진전시켜왔는가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의 전략 수립가들이 탈냉전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략을 관여․확장 전략이라는 명확한 개념으로 정리하기까지 저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새로운 태평양 공동체 건설론’이 논의되었다. 이 논의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부시 행정부의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와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 of the States for East Asia and the Pacific)로 임명된 윈스턴 로드(Winston Lord)였다.
‘새로운 태평양 공동체 건설론’을 확장전략으로 개념화한 사람은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와 백악관 국가안보 담당관으로 임명된 앤터니 레이크(Anthony Lake)다. 그가 1993년 9월 21일 미국 존스 합킨스대학원 국제학과에서 한「봉쇄에서 확장으로(From Containment to Enlargement)」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처음으로 ‘확장’이라는 전략적 사고가 모습을 드러내었고(New York Times 1993년 9월 22일자), 한 해 뒤인 1994년 9월 12일 외교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서 그가 한 연설「민주주의의 확장: 힘과 외교의 결합을 위하여(The Reach of Democracy: Tying Power to Diplomacy)」에서 다시 제시한 바있다.
백악관과 국무부를 연결하는 전략적 사고의 진행 궤도와 다른 또 하나의 궤도를 따라 움직여온 집단이 있는데, 그것은 미 국방부의 전략 수립가들이다. 이들이 탈냉전 시대의 전략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고심해 왔는가를 살펴보려 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미 국방부 국제안보 담당관(당시 직책)이었던 조셉 나이(Joseph S. Nye, Jr.)다. 그가 주도하여 작성한 뒤, 1995년 2월에 발표했던 중요한 보고서「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안보 전략(United States Security Strategy for the East Asia-Pacific Region)」에서 저들은 이른바 ‘관여’이라는 전략 개념을 정리했다. 미 국방부의 관여 전략이 지니고 있는 핵심 내용은 부시 행정부의 동아시아 전략 구상(EASI)을 따라 1990년부터 1992년 말까지 시행되었던 주한미군 1단계 감축(7천명) 이후 북(조선)의 ‘핵문제’로 잠시 중단되고 있던 제2단계 감축 계획(1993-1994년도)을 완전히 폐기하고, 주한미군은 현 수준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유지한다는 것을 확정하고 주한미군 3만7천명과 주일미군 4만5천명, 그리고 미 제7함대의 해상 지원 병력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전진 배치한 10만명의 병력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과 동북아시아의 다국간 안보협의체를 창설하려는 구상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미국이 남(한국)과 일본에 전진 배치한 무력을 감축하지 않고 현재 수준을 앞으로 장기간 동안 유지하겠다고 하는 확고한 의지를 공식화했다는 사실이다.
조셉 나이는 관여․확장 전략을 영도 전략(Leadership Strategy)이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미국이 탈냉전 시대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관여와 확장을 통해 자국의 영도권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두드러지게 강조한 표현으로 보인다. 영도 전략을 논하면서 그는 “오늘의 안정과 번영을 앞으로 20년 동안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아시아에 관여해야 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이바지해야 하며, 동맹국들을 강화하고 친선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이가 말하는 영도 전략의 세 가지 구성 부분은 동아시아 지역의 동맹국들을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기지로 건설하고 강화하는 것, 미국의 전진 배치 무력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다자간 지역 안보 협의 구도를 창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셉 나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북(조선)이라고 지목하였다. 1995년 10월 11일 미 상원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가 열었던 중국 군사력에 관한 청문회에서 그는 미국의 관여 전략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미국이 중국과 이해 관계를 일치시키는 목적, 미․중 사이의 안보 협력 및 안보 상호 의존도를 향상시키는 목적 등을 달성하는 새로운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크의 확장 전략 개념과 국무부․국방부의 관여 전략 개념이 결합되면서 관여․확장 전략으로 정식화됨으로써 논의의 완결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데, 탈냉전 시기의 이 전략은 지난 냉전시기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이었던 이른바 개입 정책(Intervention Policy)과 다르지 않은 것이며, 말만 바꿔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미 국무부 정치 담당 차관이었으며, 현재는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는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는 미국이 탈냉전 시대에 관여 정책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① 탈냉전 시기에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행동이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 ②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경제 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 ③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 ③ 탈냉전 시대는 혼란과 위험이 가득찬 시기이기 때문에 관여 정책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점.
워런 크리스토퍼도 미국의 외교 전략을 4대 원칙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① 미국의 영도력을 수행하는 원칙, ② 강대국들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생산적인 방향에서 유지하는 원칙, ③ 협력 관계를 강화한 공고한 체제를 수립하는 원칙, ④ 미국의 이익과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지하는 원칙이다. 그는 “미국이 일본과 맺은 전략 동맹 관계는 남(한국) 및 다른 동맹국들과 맺은 전략 동맹 관계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안보와 번영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미국의 관여는 아시아의 안정․번영․민주화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1996년 2월 클린턴 대통령이 내놓은 「관여와 확장에 입각한 국가 안보 전략」이라는 연례 보고서에서도 같은 내용이 되풀이되었다.
관여․확장 전략은 미국이 1994년 한 해 동안에 아시아 지역에서 수출 실적 1천5백30억 달러을 올리고, 이로써 자기 나라에서 직업 3백10만 개를 유지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수립․가동하는 전략이다.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관여․확장 전략을 수행하려면 중국과 북(조선)에 접근․공략해야 하는데, 이 접근․공략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한(조선)반도의 정전협정 체제다. 앞으로 몇 해 안으로 미국은 정전협정 체제를 어떤 경로, 어떤 방식으로든 변경, 또는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데 정전협정 체제 문제와 관련하여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이 얼마전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미군 장성으로 다시 교체하려 했고, 북(조선)이 제의한 조․미 장성급 회담 제안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검토한 적이 있다고 추정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여서 이 글의 뒤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조․미 장성급 회담 제안을 먼저 꺼낸 쪽은 북(조선)이 아니라 미국이었고,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다시 교체될 미군 장성도 이미 내정되었는데, 무슨 까닭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회담 계획과 교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이 아직 한(조선)반도에서 관여․확장 전략을 본격적으로 수행할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낡은 봉쇄․대결 전략에 발목이 잡힌 상태로 일정 기간 동안 두 전략을 병행할 수 밖에 없는 실정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따라서 현시기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 수행은 이중적이며, 대북(조선)관도 이중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미국이 북(조선)을 관계 개선 대상으로 인식하여 1995년 9월 23일부터 열린 평양 회담에 참석하고, 결국 임시 영사 보호권을 상호 행사하기로 합의하면서도, 같은 때에 북(조선)을 ‘잠재 적국’으로 규정한다고 발표하는 전략 수행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좋은 예다.
1995년 9월 1일 한․미 국방장관의 호놀룰루 회담에서 ‘한․미 중장기 안보협의체’를 창설하기로 합의하고 있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은 1995년 9월 1일로 임기가 끝난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한․미 연합사 부참모장인 이석복(소장)을 임명한 사실, 그로부터 꼭 한 달 뒤인 10월 1일에는 미국 국방정보국(DIA)이 현재 주한미군사령부 산하에 분산되어 있는 정보 기관들인 육군 501군사정보여단(MIB), 해군 방첩수사대(NIS), 공군 제45지구 방첩수사대(OSI), 제32특활정보대(AFIC)의 대인 정보 수집 기능을 통․폐합하여 ‘미 국방정보국 코리아 지원단’(DODSAK)을 창설하기로 했다는 사실, 그리고 주한미군이 무력 충돌의 위기가 생기면 사전에 긴급히 배치할 신속 전개 억제 전력(FDO)에 더하여 전투력 증강(Force Enhancement) 개념을 추가한 새로운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9월 23일 언론 기관에 흘린 사실 등은 모두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자국의 전략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위에서 파악한 현실을 종합해보면, 지금 미국은 한(조선)반도에서 기존의 봉쇄․대결 전략을 매우 조심스럽게 점진적으로 변경하면서, 관여․확장 전략을 구사하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윈스턴 로드는 미국의 북(조선) 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세 가지 궤도’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미․북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남북 대화 등을 통해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유도하는 것이며, 세번째는 미․북 접촉 확대를 통해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있다. 미국은 북(조선)에 대한 관여와 확장이 확실히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봉쇄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놓고 ‘대결의 칼끝’을 누구러뜨리려 할 것이며, 그 이전에는 이 두 전략의 비중을 따져가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 갈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접근 속도를 조절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제동 역할을 맡은 곳이 미 의회다. 알려진대로, 1995년 9월 18일 미 하원은 대북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 하원 아․태 소위원장의 발의로 1995년 6월말 국제 관계 위원회를 통과한 뒤 일부 수정된 이 결의안은 미 상원의원 프랭크 머코스키가 마련하고 있는 비슷한 내용의 대북 결의안과 조정․통합되어 단일 법안으로 상원을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결의안은 북(조선)이 휴전선 부근에 배치한 군병력을 후방에 재배치하지 않고, 탄도 미사일을 계속 개발하고, 탄도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 살상무기를 계속 수출한다면, 이것은 미국의 장기 정책 목표에 진전이 없는 것이므로 미 대통령은 조․미 관계를 격상하는 조치를 취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미 상원 에너지 위원장 프랭크 머코우스키가 주도하여 외교위원장 제시 헬름즈, 상원의원 존 맥케인, 돈 니클스가 공동 제출한 결의안에는 조․미 국교 수립의 전제조건으로 특별 사찰을 포함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 조치 완전 이행, 남북 대화 진전, 한국(조선)전쟁 당시 실종된 미군 문제에 대한 공동 조사 활동, 국제 테러 지원 중단, 인권 존중, 미사일 기술통제체제(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준수, 모든 폐연료봉의 제3국 반출 허용, 흑연 감속로 완전 해체를 제시하면서, 의회에서 사전에 명시적으로 지출을 허용한 것 외에는 행정부가 전용하여 북(조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북(조선)이 중유를 전용할 경우 더 이상 중유를 제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미 의회의 이러한 보수적 조치들은 한(조선)반도에서 긴장․대결 상태를 지속시켜 잉여 무기를 처분하려고 하는 미국 군수 산업 자본의 ‘선거구 공략’의 영향에 대해서 행정부보다 의회가 더 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어쨋든 조․미 관계 개선에 대한 미 의회의 이러한 거리낌은 조․미 관계 개선의 진전 속도가 관여․확장 전략을 수행하는 궤도 안에서 규제를 받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