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신가이드라인과 한반도위기3 이시우 2001/05/01 325
일미신가이드라인과 한반도위기 자료집3
⑶미일방위협력지침(신가이드라인) 경과해설
김윤옥(평화를만드는여성회 공동대표)
1960년 안보개정과 미일군사협력
1960년 미일안보조약이 개정된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미일간의 군사협력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미일안보조약 제5조에는 ‘일본국 행정하의 영역’에서 일방적으로 무력공격이 가해지는 경우에는 미일이 협력하여 전투를 할 것이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국민들은 그러한 사태를 상정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대미군사협력으로 전쟁에 말려들 것을 더 염려했다.
그 당시 미국은 월남전쟁에 군사개입을 하고 있었고 한국이나 기타 미국의 동맹국들이 부득이 월남전쟁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70년대중반이었다. 73년에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했고 75년에는 월남전이 끝나서 세계적으로 긴장완화(데탕트)라는 말이 유행했던 시대이다.
75년도 미일수뇌회담(미끼수상/포드대통령)의 합의를 거쳐서 ‘방위협력소위원회’가 설치되었다(76년). 이 소위원회에 속한 군관 기관들을 통하여 미일의 군사공동행동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는 것은 미일안보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
가이드라인의 성립과 그 내용
‘방위협력소위원회의 발족과 함께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가 가지고 있던 제동장치는 완전히 이완되었다. ’전쟁포기‘ ’전투력을 가지지 않는다‘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평화헌법 제9조)와 비핵 3원칙(핵을 만들지 않고 가지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다)에도 저촉하지 않으면서 세계적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핵전력지상주의인 미군과 공동행동을 행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1978년 11월에 제정된 ‘미일방위협력의 지침’(이하 가이드라인 78)에는 “연구 협의의 대상으로 하지않는다”라고 이들 제약에 대해 언급하며 피하고 있다. 이 가이드라인 78은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부분은 다른 나라에서 일본을 침략할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평상시부터 미일간에서 어떠한 군사협력태세를 취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일본이 적절한 자위력을 유지함과 동시에 언제나 미군이 원군으로 달려 올 태세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핵공격을 받지않도록 미군의 핵우산을 씌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상시부터 ‘공동작전의 연구’를 하고, ‘공동연습’이나 ‘공동훈련’을 충분히 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둘째부분은 일본에 대해서 실제로 무력공격이 행해지는 사태가 되었을 경우, 미일간에서 어떠한 협력으로 싸울것인가에 대해 기본원칙을 정하고 있다. ‘한정적 그리고 소규모의 침략’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일본이 혼자서 배제하고, 이것이 곤란한 경우에는 미국의 협력을 얻어서 배제한다.
셋째부분은 일본 밖의 극동에서 미군이 싸우는 경우를 위해 미리 ‘일본측으로부터의 편의제공의 방법’에 대해 연구하자는 내용이다.
가이드라인 78의 성과
가이드라인 78의 성립이후 미일의 군살협력관계는 공동작전계획과 공동연습의 실시를 통하여 급속히 긴밀해졌다. 1978년에 가이드라인78이 각료회의에서 인준되자 일본이 무력공격을 받은 경우(日本有事)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 연구는 84년에 최종안이 완료되어 나가소네수상에 보고하여 방위청에서 미일 양군대표에 의한 서명식이 있었고 ‘미일공동작전계획안’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공동연습은 그동안 국민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행해졌는데 가이드라인78이 제정된 이후에는 항공자위대는 재일미공군과 매월 1회정도의 전투기전투훈련을 실시했고 해상자위대도 미일공동연습의 확대를 실시했다. 1980년도의 ‘림팍연습’에의 참가가 그것이다. 당시 ‘림팍연습’에는 미국, 카나다, 호주, 뉴질랜도 4개국 해군이 중부태평양에서 행하는 합동연습이었다.
가장 늦은 것이 육상자위대였다. 국민의 눈을 피해야 함으로 81년도에 통신훈련(자위대 100명과 미군 60명)을 시작으로 ‘지휘소훈련’도 했고 또 ‘실제로 부대를 움직이는 연습(자위대 500명, 미군 200명)도 실시했다. 최근에는 미일 합하여 수만명 규모의 실동연습(實動演習)이 실시되고 있다.
나아가서는 88년 이후부터는 식량, 연료, 탄약, 통신, 수송등의 병참지원의 상호제공을 의무화하는 “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ACSA의 체결을 요구하여 96년4월15일에 체결했는데 단 그 내용은 평상시의 훈련이나 공동연습시에 한정되어 정해진 물품이나 역무를 상호제공하는 것이 내용으로 되어있다.
냉전종결과 군축의 흐름
90년대로 들어서자 가이드라인78에 근거한 미일공동작전계획연구나 이와 병행하여 진행되었던 유사입법 연구는 모두 벽에 부디치게 되었다. 89년말의 미소수뇌회담(말타섬)에 의한 ‘냉전종결선언’은 두 진영대립구도가 소멸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동서독은 통일되었고 소련도 해체되었다. 이리하여 냉전의 속박에서 해방된 구미각국에는 군축의 흐름이 정착하는 듯이 보였다.
미국에서는 국민들이 ‘평화의 수당’을 요구했고 여기에 응답하여 대폭적인 병력삭감과 국방비 감축이 실시되었다. 미군의 총병력은 90년도의 약 210만명에서 150만명(96년)으로 삭감되었다. 유럽의 미군은 3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삭감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의 삭감은 극히 소폭으로 실시되었다. 미국방성은 90년4월에 발표한 보고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략적 틀” 안에서 이 지역의 미군을 삭감할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제1단계에서는 재일, 재한, 재필리핀 합하여 약 11만명이었던 미병력에서 15000명만을 삭감했다.
그리고 제2단계의 삭감은 명목적인 것이 되었고 제3단계(96-2000) 삭감은 취소가 되었다. 그 배경에는 북한의 핵미사일개발문제로 한반도의 긴장이 생긴 것과 이락공격을 통해서 재일미군기지의 가치를 다시 인정하게 된것과 재필리핀기지에서 미군의 철수(92년)등이 있었다.
한편 미군 안에서도 조급한 병력감축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군축으로 타격을 받는 미군수산업의 저항도 있었다. 소련연방의 해체로 ‘유일한 초대강국’이 된 미국은 지역분쟁이 빈발하는 냉전후의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계속 세계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언제든지 지역분쟁에 개입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미일안보 재점검과 새로운 방위계획
크린톤정권 발족이후, 미국방성은 소련해체 이후의 대외전략과 미군사력의 철저한 재점검을 실시했다. 그 결과를 묶은 것인 미군재편계획 ‘버톰압 리뷰’(93년9월)는 이락과 북조선을 두 개의 잠정적 적국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동시에 발생하는 두 개의 대규모지역분쟁에 대처하는데 충분한 전력을 배치해야 한다. 그래서 유럽에 10만명, 일본 한국등지에 10만명의 병력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미일안보조약은 원래 ‘소련의 위협’에 대비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재일 미군기지를 확보하며 일본에서 보다 많은 인적 물적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 세계전략에 파장을 맞추어서 미일안보조약을 재점검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리하여 94년 가을부터 미국방성의 죠셉 나이차관보를 중심으로 일본측과 밀접히 협의하며 만들어낸 것이 95년2월에 발표된 두 개의 보고서, ‘동아시아태평양전략보고’와 ‘미일안전보장관계보고’이다.
일본측 당국도 미일안보 재점검은 바라던바였다. 외무당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회원이 되기위한 상황만들기로 ‘미일동맹관계강화’,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의 본격적 참가등 군사적 국제공헌의 확대를 노리고 있었다.
뉴가이드라인은 미일안보체제에 대해 두 측면에서 그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직접적 의의로 ‘일본의 안전을 위해 불가결’이라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간접적 의의로 ‘미일안보체제는 일본의 주변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부여이다.
이리하여 96년4월17일 미일 양수뇌가 서명한 ‘미일안보공동선언’으로 미일군사협력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합의에 근거하여 96년7월부터 미국과 일본 정부사이에서 가이드라인에 대한 재점검작업이 진행되었고 9월19일에는 기본적 방침을 총괄한 ‘제1차중간보고서’가 공표되었다. 그리고 ‘제2차 중간보고서’는 97년6월8일에 발표되었고 97년 9월23일에 최종보고서(뉴가이드라인)가 나왔다.
제2차 중간보고서는 미일간의 군사협력을 1)평소에 행할 협력, 2) 일본에 대해 무력공격이 있는 경우의 협력, 3) 일본주변지역의 사태로 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경우(‘주변사태’)의 협력으로 나누고 있다.
이 3분법은 가이드라인78과 유사하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미일군사협력의 범위는 ‘일본유사’에서 ‘주변사태’로 확대되었고 일본주변지역에서의 미일군사협력에 길을 열기 위해서 정당화할 수 있는 경우들이 검토항목으로서 열거되었다. ‘재외일본인보호’를 위한 출동, ‘인도적 활동’을 명목으로 하는 ‘피난민의 구조와 이송’을 위한 출동, ‘국제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제재에 협력한다’는 공해상에서의 강제적 선박점검, 유엔평화유지활동의 참가등등이다.
또 제2차중간보고서 부속의 별표에는 ‘일본주변지역’에 출동하여 무력행사하는 미군에게 어떻게 협력하는지 40개항목에 걸친 검토항목이 제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미군에 대한 정보제공’, ‘미군을 위한 공해상에서의 기뢰제거, 미군에 의한 자위대시설이나 민간항만, 공항의 사용, 미군에 대한 물자(무기나 탄약을 제외한), 연료 윤활유등의 제공, 일본에 이송된 미군부상자의 치료, 의약품이나 위생기구의 제공, 통신을 위한 주파수(위성통신을 포함함)와 기재의 제공등등이 열거되었다.
나아가서는 ‘일본은 미군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중앙정부와 지방공공단체의 기관이 가지고 있는 권한과 능력 그리고 민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적절히 활용한다’는 규정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일본이 총력을 기울여서 일본주변지역의 미군사 행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현재 [주변사태법],[자위대법의 일부 개정안], [물품.용역상호제공협정 개정안]등의 3개 법안을 중의원에 상정해 놓았다.
이리하여 99년 4월현재, 일본국내에서는 뉴가이드라인에 대한 찬부 양론이 시민자치단체차원과 중의원(국회)차원에서 들끓고 있다. 오키나와, 고오베, 고오치현, 북해도등의 항만과 공항지역의 시민단체들은 연구회와 공청회를 열고있고 종교단체들은 집회나 시위를 통해 성명서와 요청서를 정부에 보내고 있다. 중의원에서는 뉴가이드라인 특위를 구성하여 3월부터 활동하고 있고 NHK TV가 생방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