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과 상상력2002/09/17

02.9.12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 입니다. 원고는 기존에 섰던 글들을 덜고 보태어 만든 것입니다.

운동과 상상력

사진가 이시우

상상력
가장 초보적인 상상력은 사전적 의미의 단어연결이다. 이보다 한차원 높은 상상력은 사물의 다양한 연관으로서의 비유나 환유이다. 이는 비교를 전제로 한다. 때문에 무엇과 비교하는지를 항상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 다음은 전형을 상상하는 것, 노동자하면 누구의 형 누구의 친구 아무개를 연상하는 것. 초기의 노동연극, 민중극은 개념을 설명하는 게 많았다. 계몽적이었다. 그러나 87년 노동자대투쟁후 여기저기서 노동조합운동의 사례가 쏟아져 나오자 한단계 발전하는데, 계몽에서 감동을 추구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유희로서의 상상에서 감동으로서의 상상, 나아가서 역사적 추동력으로서의 상상까지 상상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상
상상은 여러형태가 있지만 이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이상이다. 이상은 지향의 가장 높은 형태이며, 생활의 최고목적이기도 하다.
1) 이상과 이념, 이상과 요구의 관계
이런 점에서 이상은 이념과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념이 이론적 명제의 형태로 주어진 것인데 비해 이상은 생활의 최고목적이 생생한 현실로, 형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식당에 가면 가끔 액자에 끼워진 ‘이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라는 문구의 내용이 바로 이념형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 때 항상 등장하는 이순신, 임꺽정, 서산대사 등은 이상형이 된다. 역대 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이념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유토피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등의 소설로 이상화의 방법을 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미래적 지향이 이상은 아니다. 이상은 인간생활의 보다 근본적인 요구, 지향과 관련되어 있다. 일시적이며 부차적인 요구나 이해관계는 이상이 되지 못하며 소박한 염원이나 동경은 공상이 된다.
이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요구와 능력과 연관된다. 요구와 능력이 발전하는데 따라 지향도 발전한다. 이상을 키워가는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데서 ‘누구는 이게 문제라서 안돼’ 라고 하기 보다는 ‘누구는 이점이 정말 배워야 할 점이야’ 라고 생각하는 주인된 태도를 갖는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장점을 하나도 남김없이 자기 것으로 하려할 때 우리는 어려울 때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된다.

2) 이상의 특징
앞의 내용을 정리하기도 할 겸 이상에 대하여 구성요소와 그들간의 관계를 통해 특징을 알아보자.
이상을 분석해 보면 더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처럼 세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대상에 대한 지식이다. 대상은 두말 할 것 없이 자기가 지향하는 대상이며, 지식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둘째는 대상의 장래발전에 대한 생생한 형상이다.
셋째는 사람의 활동을 추동하는 동기이다. 이 추동적 동기가 이상의 본성을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하기에 셋중에서도 기본을 이룬다.
이 세가지 요소의 관계를 보면 첫째, 이상의 지식적 측면은 인식의 전제조건을 이룬다. 과거에는 비약하고 왜곡된 지식에 기초해서 단순한 소원이나 주관적 희망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객관적이고 가치있는 지식만이 이상의 참다운 전제조건이 된다.
둘째, 장래발전에 대한 생생한 형상은 그것이 어떤 사람, 어떤 집단의 것인가에 따라 내용과 가치가 결정된다. 회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따라 건전한 이상을 제기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추동적 동기는 기본요소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현실에 대한 태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상 미래로 지향하기에 자기가 바라는 세상이 되었다 해도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면서 현실을 비판하고 깨어있게 된다. 이런 현실에 대한 태도가 현실을 변화발전 시키기 위한 활동에로 사람을 고무하고 추동한다. 지식과 형상, 동기 세요소의 관계로부터 이상은 희망이나 소원, 이념과는 다른 세가지 큰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사람의 전망적인 요구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표현하기에 사람의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이상을 가질 때 사람은 훌륭한 미래에 대해 동경하며, 풍부하고 다양한 정서를 체험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설령, 생명의 위협을 받는 때조차도 낙천적인 정서와 건전한 감정을 잃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고문과 감옥 속에서도 주옥같은 예술작품을 남기는 것을 보면 어림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둘째는 생활에서 일정한 지향성을 가지게 한다. 사진 한장을 봐도 우리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사람이고 그 다음이 배경이다. 이처럼 자기가 관심이 집중되는 대상에 우선 시선을 돌리는게 인지상정이다. 이상은 사람의 전망적인 요구로 근본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상을 가질 때, 우선 주의를 돌리고 집중하며, 그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을 수행한다.
셋째는 이상이 인간의 요구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표현하는 것으로 하여 현실적인 것에 비해 보다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형상이라도 사람들에게 매혹과 애착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것은 참다운 이상이라 할 수 없다. 과거의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해 웅장한 형상을 창조하길 좋아했지만 그것이 애착보다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한 결코 우리의 이상으로 될 수 없었다.

상상이란 단어에 능력이란 단어를 결합시킨 것은 상상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상상력은 흔히 인간의 자유와 연관되어 생각되엇다. 상상의 자유야말로 현실의 구속에 대한 한줄기 희망이며 그것은 낭만과 낙관의 근거이기도 하다.

관성 – 상상력의 적
베르그 송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다 라고 말했다.
자유의 반대는 보통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자유의 반대는 관성이다. 구속은 자신이 구속된 상태를 자각하지만 관성은 자신이 관성화되어 있다는 것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구속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고 관성은 내부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관성도 구속처럼 외부로부터 온다. 유행하는 패션을 고르는 손은 자유의지에 의한 판단처럼 보이나 광고나 선전에 의해 조성된 거짓 의지이기에 외부의 것이다. 외부에 의한 것임에도 자기 내부에 의한 판단이라는 오해, 여기에 관성화의 실체가 있다.
‘어떻게 하든 이 겨울을 넘기고 나면 다시 봄이 오겠지.’ 이런 생각을 희망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것은 관성의 되풀이 일 뿐이다. 상상력의 고갈은 우리에게 다가온 희망도 관성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어둠
내 스스로가 낡은 관성에 젖어 있다는 생각에 한참 부대끼고 있을 때 찾았던 곳이 신탄리역 근처의 폐터널이었다.
전쟁때 인민군 수백명이 몰살된 페터널이 있다는 말에 무작정 찾아 나섰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남쪽까지 밀려 내려갔던 전선이, 다시 북으로 밀려 올라가는 중공군의 후퇴작전단계에서 1951년 5월 28일과 31사이 이곳에서는 중공군의 역습이 있었으나 다시 중공군은 후퇴하게 된다. 폐터널에서의 인민군학살은 바로 이 4일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이들이 중공군이었는지 인민군이었는지는 중국과 북의 주장이 달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민들은 인민군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전투기도 첨단장비도 없었던 공산군은 미군의 전투기가 나타나면 터널로 무조건 피했다. 가장 튼튼한 대피시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투기는 백이면 백 터널에 대해서는 직상승 하는 방법으로 예외 없이 폭격을 해댔다.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던 군인들에게 터널은 무덤이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의정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탄리 역에 내려 장마비가 지난 뒤의 땡볕을 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경원선 철도 종단표지판을 지나 옛 철길터로 1시간을 걸었지만 10분쯤 가면 나올 거라던 터널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길을 잃은 것 같진 않았는데, 다시 마을로 되돌아와 물으니 어쨌든 계속가면 나타난단다. 다시 1시간 10분쯤을 걸어 탈진할 때쯤 과연 터널이 나타났다. 입구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터널저편은 막혀있어 캄캄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콘크리트 벽은 지하수에 트고 부서져 자갈돌을 비죽비죽 드러 내놓고 있는 것이 마치 동굴 벽 같았다. 바닥은 질퍽했고,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목덜미에 떨어져 흠칫 놀라게 했다. 무척 길게 느껴지는 터널을 계속 걷고 또 걸으니 과연 터널은 시멘트를 쏟아 부어 막혀진 채 끝이 나 있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뭔가가 있을 것 같았는데 막막한 마음에 문득 고개를 돌려 들어왔던 터널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터널에선 눈부신 광선이 쏟아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터널을 찾기까지 탈진하도록 지치게 했던 빛이 이토록 눈부신 것인 줄이야. 빛은 밝았다. 순간 스쳐가는 말이 있었다.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만이 가장 밝은 빛을 볼 수 있다.”
세상이 빛을 잃은게 아니라 내가 빛 속에 빠져있어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의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거나 회피한 결과, 우리는 빛을 잃었다.
우리운동의 궤적엔 민족- 민중- 계급- 시민이란 징검다리를 가지고 있다. 시민사회의 부조리와 허구를 비판하기 위해 쓴 자본론으로부터 시민사회의 그늘에 가리워 어둠속에 잇었던 노동자계급을 발견한 것이 마르크스였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그 계급의 부정으로 시민이란 말을 복원시켰다.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시민은 월급쟁이 노동자들 아닌가? 민족이란 단어에서 연상하던 얼굴은 누구이고, 민중이란 단어에서 연상하던 얼굴은 누구이며 계급과 시민이란 단어에서 떠올리는 얼굴은 누구인가? 소시민과 중산층, 서민이란 단어에선 어떠한가? 한사람을 시대마다 다르게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일이 비단 우리시대에만 있는 일은 아니었던지 다음과 같은 구전이 우리의 뇌리를 친다. 쥐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랑감을 찾아떠난다.
처음엔 햇님이었고 그 다음은 햇님을 가릴 수 있는 구름이었고, 그 다음은 구름을 날려버릴수 있는 바람이었고 또 그 다음은 바람에도 끄떡없는 돌부처였다. 그러나 돌부처가 마지막으로 자기를 쓰러뜨리는 것이 쥐라는 것을 말해주고 나서야 처녀 쥐는 신랑으로 쥐를 선택한다.
관성에 빠지면 보이지 않던 자신의 살아있는 모습을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겨우 발견하는 것이 역사 발전과정의 중턱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서구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 논리의 궤적은 한 존재를 따로 따로 분석하고 규정한다. 그러나 한사람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에 민족도 계급도 시민도 서민도 통일되어 있다.
어떤 관계를 중심으로 보는가의 문제다.

쓰는바
한비자에 ‘쓰는바’라는 고사가 전한다.
옛날 한마을에 물일을 가업으로 하여 사는 집안이 있었다. 이들은 물일을 아무리해도 물에 손이 트지 않는 비법을 알고 있었기에 겨울에도 물일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장수가 이마을을 지나다가 이 집안이야기를 듣고 당장 찾아가 겨울에 물일을 해도 손을 트지않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였다. 가장이 나서서 그것은 우리집의 가보여서 누구한테도 가르쳐 줄수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장수는 다음날 다시 찾아가 ‘그럼 내가 당신 가족이 이 물일로 평생 걸려서 벌 수 있는 돈을 줄테니 나한테 그 비법을 팔라’고 제안하였다. 가족들은 회의 끝에 그정도라면 팔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장수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었다.
장수는 돌아가 병사들을 그 비법으로 훈련시켜 겨울에 수전을 일으키니 승리하니 나라가 그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엇다. 그 가족은 비법을 팔아 가문을 일으켰지만 장수는 그비법으로 나라를 일으켰다. 이로서 쓰는바에 따라 누구는 가문을 누구는 나라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하게 되었다. 존재자체가 의미가 잇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망 속에서 읽혀지는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존재에서 관계론으로의 이동이 현대사상의 특징임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하나의 예를들자.
아이들에게 노을을 그려보라고 하면 거의 천편일률적인 그림이 나온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보라고 하면 그보다는 훨씬 다양한 화면이 나온다. 그림은 노을, 즉 존재에 대한 지식으로 그리는 것이고 사진은 현실의 관계속에서 자신이 포함된 채 찍는 것이기에 훨씬 풍부한 영상이 나오는 것이다.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세상이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전혀 바뀔 것 같지 않던 정오의 햇빛이 이때가 되서는 모두 변한다. 노을의 원인이 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해 조차도 이 시간엔 새로운 빛으로 변한다. 서로가 서로에 의해 어느 것 하나 없이 변화하는 시간. 사물자체가 의미를 잃고 관계만이 존재의 의미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관계가 가져다주는 변화의 충만함 때문에 기울어 가는 해임에도 노을은 아름답다.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다시 체계론으로
노을을 잘 보면 또 한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모두가 관계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변화시키지만 그 역할이나 기능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이다. 주동의 역할이 잇고 피동의 역할이 있으며 매개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관계안에 숨어 있는 체계를 발견해야 우리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사물의 지위와 역할을 해명함으로서 우리는 더 풍부한, 더 실재에 가까운 상상력의 틀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체계의 기본적인 개념 몇가지를 정리하고 다음얘기로 넘어가 보자.

1) 체계
한비자에 나오는 “쓰는바”의 고사를 예로들자. 여기서 물일을 하는 가족과 장수는 똑같은 요소(겨울에 물일을 해도 손이 트지 않는 비법)를 가지고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장수는 그의 대국적 속성을 발휘했고, 물 일하는 가족은 개인주의적, 가족주의적 속성을 나타냈다. 장수는 국가적 관계의 구조 속에 있었고, 그 가족은 가정적, 향리적 관계의 구조 속에 있었기에 그 속성도 각기 달랐고 한가지 요소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통합체계는 대상들의 총체적 역할을 한다. 이때 대상들의 상호 작용은 각 체계의 구성 요소들이 이전에 소유하지 못했던 새로운 통합적 속성을 발생시킨다.

2) 요소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체계 안에서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성분이다. 요소는 체계가 어떤 범주인가에 따라 상대적이 된다. 사과라는 범주에서는 후지, 국광 등이 요소가 되지만 과일이라는 범주가 되면 복숭아, 배처럼 사과가 요소가 된다.
이처럼 요소 자체가 체계를 가진 대상으로 취급될 때는 그것대로 자체구조를 갖게 된다. 사회단체를 예로 들면 조직은 회원, 회장, 조직관, 조직의 전망, 조직체계, 조직운영방식, 조직수단(기술정도 등)의 요소들의 집합이다.

3) 구조
구조란 구성 요소들의 상호 연관되고 상호 작용하는 방법의 총체이다. 아주 단순한 기계적 결합체를 제외하면 모든 세계의 현상들은 일정한 구조를 가지며 따라서 구조의 개념은 일반적인 성격을 가진다. 요소들 간의 결합관계나 상태는 원자나 태양계처럼 끊임없이 운동하는 동력학계에서 시공간적 의미를 갖는데 시공간적 배열이 다르면 구조도 달라진다. 관계는 구조를 특징짓는 중요한 측면을 이룬다. 요소끼리 관계 맺는 특성에 따라 대상은 전일적인 통일체를 이루게 된다. 구조의 특징은 요소의 성질에 의해 좌우된다. 한 체계의 구조의 공고성은 체계를 유지하는데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설사 요소가 끊임없이 변하더라도 이 변화는 즉각적으로 구조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한체계가 계속 발전하는가 변질되는가의 기로에서 양적 발전들은 필요조건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체계내부에 양적 변화들이 누적되는가 안되는가는 구조에 의해서 좌우된다.
수소와 산소는 불이 타오르는 속성과 관련된 구조를 가질 때가 많지만 2개의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관계 맺게 되면 불을 끄는 속성을 나타낸다. 이처럼 구조는 대상체계의 속성과 질을 규정하는데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구조의 변화는 속성의 변화를 가져오며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임꺽정의 곽오주란 인물을 보면, 주인과 노비관계에서는 도리깨질이 생산량을 높이는 노동적 속성을 갖지만 의적패를 만들어 새로운 구조속에 들어가자 도리깨는 속성의 변화를 맞는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속성의 변화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인-노비란 구조와 의적패란 구조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쪽 구조에서 다른쪽 구조로 바뀐다는 것은 부분적 속성이 아닌 근본적인 속성, 즉 질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구조의 변화는 단순 반복되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둔감한 상태에서 민감한 상태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됨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발전단계에 있는 존재들의 질적 차이는 구조에서의 차이에 기초한다. 구조의 변화와 발전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과 만나게 한다. 바로 역사이다.

4) 역사
체계론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란 체계의 발생 변화 발전과정이다. 구조에는 필연적 관계에 의해 본질적 속성을 나타내는 측면도 있고, 우연적 관계에 의해 부분적 속성을 나타내는 측면도 있다. 모든 구조의 필연적 연관 관계는 그것이 발생 발전하며 소멸하는 역사적 과정으로 고찰함으로써만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 “구조를 보려고 하면 역사를 볼 수 없고 역사를 보려하면 구조를 볼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구조를 언어활동의 무의식적인 놀이규칙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체로서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고 제맘대로 붙여진 이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조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구성 요소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관념적인 무의식적 언어활동에 의해 보는 것이 되고 이는 곧장 역사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대상의 구조만을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이때에는 구조의 단위 즉 구성요소를 올바로 정해야하며 요소들 사이의 연관을 제멋대로 설정해선 안된다.
한편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 기능이다.

5) 기능
한 요소가 다른 요소나 구조에 대해서 발휘하는 능력으로 기능은 요소에 부여되어 있고 이 기능들은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완성되고 보다 복잡한 대상은 더욱 고급한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구성요소들의 성질이 변하고 이 요소들의 상호작용의 성격이 변하면(즉, 구조가 변하면) 요소자체의 기능과 체계전체의 기능들도 변한다. 구조와 기능의 불가분적인 통일상태는 대상을 구조, 기능적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는 기능 전체가 대상의 내용을 이루며, 기능의 수행질서, 수행방식은 형식을 이룬다.
그러나 대상을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기능 전체가 대상의 형식을 이룬다. 참고로 형식의 개념은 구조의 개념과 구별되며 구조에 비하여 보편적이다.
한편 레비 스트로스 등에 의해 주창된 구조기능주의는 대상에 대한 구조적, 기능적 측면을 과대 평가하고 절대화하여 사회의 구성요소를 주관주의적으로 그릇되게 설정하고 사람들의 심리적 구조와 기능에 기초하여 사회를 해석하면서 오류를 발생한다. 기능은 결국 하나의 구조가 다른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임으로 해서 다른 구조 즉 환경이란 개념과 만나게 된다.

6) 환경
어떤 체계와 가장 밀접한 외부의 체계가 환경이다. 한 체계의 구조가 고도화할수록 이 체계는 환경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며, 다른 한편으로 더욱 능동적으로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생명체는 대부분 환경에 적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할 뿐아니라 자신의 이해와 필요에 맞도록 자연환경을 개조해 나간다.
환경은 대상과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되며 이런 관계를 전제로 대상의 여러 측면의 성질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그 대상의 속성이라 한다.

7) 속성
체계의 개별적 측면을 특징짓는 규정성으로 속성은 구조에 의해 규제된다. 따라서 구조가 달라지면 속성도 달라진다. 속성은 다른 대상과의 관계,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성질이다. 따라서 속성은 감각되지 않으나 현상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속성은 질과 달리 개별적 측면을 특징짓지만(그래서 질은 하나이지만 속성은 다양) 본질적 속성은 질과 같다. 왜냐하면 체계의 존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물현상의 질을 규정하는데서 기본적이며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적 속성이 다르면 질도 다른 것이 된다.

8) 요인
요인이란 구조와 함께 그 체계의 질을 유지하고, 기능을 발휘 및 발전을 보장해주는 힘들, 장치들 및 기관이다. 가장 보편적인 체계요인은 대상의 상호작용을 보장하는 세계의 연관과 통일이다. 이 원리는 각각의 체계의 특수한 유형에 따라 독특한 형식을 띈다. 생물적 체계나 사회적인 체계들의 경우 이 원리는 조절이라는 형식을 띈다. 고등동물의 조절기관은 신경계이다. 사회에는 두 가지 유형의 조절이 존재하는데, 자연적 조절과 목적 의식적 조절이 그것이다.

9) 동력
요소들은 서로 동등하지 않다. 각 요소들은 그 체계가 제기능을 발휘하는데서 담당하는 지위와 역할 면에서도 다르고, 자신들이 발전될 전망의 면에서도 다르다. 따라서 어떤 체계를 연구할 때 그 체계들의 특징을 순전히 현상태에서 검토해선 안된다. 체계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갖는 동력을 해명하여야, 그 체계의 구조를 규정하는 본질적 속성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요소들이야말로 체계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체계라는 범주는 세계의 본질을 해명하는데서 방법론적 의의를 갖는다.

태도
관계속에서 관계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관계맺기에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는 사람과 관계 맺을 때 4가지 태도를 갖는다. 추종하기, 배려하기, 눈치보기, 무시하기가 그것이다. 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생긴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긴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연대를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 때 생긴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 때 생긴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란 점에서 뿌리를 같이 한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의식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또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 근대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으며 현대에는 문화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한다. 이런 자리에 사람 사랑이 존재 할 리 만무하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이다. 하루는 배가 나온 상사한테 ‘그것도 인격’이라고 말해서 ‘그래도 자네 밖에 없어’하고 칭찬을 들었는데, 다음날엔 ‘아니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하고 꾸중을 듣는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 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 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한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이것을 일컬어 사랑과 평화라고 한다. 사랑은 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주체의 발견이란 예를들면 자신의 아픔까지도 집단과 사람관계속에서 발견하고 풀줄 아는데 있다. 얼마전 병원에서 갓 태어난 딸을 선천적인 병 때문에 한달도 안되서 저세상으로 보내야 햇던 선배의 얘기가 생각난다. 누가 들어도 좋은 일이 아니어서 두 부부만 가슴아프고 말자는 생각으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조용히 화장해서 강에 뿌렸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새로 태어난 딸은 아프다더니 어떠냐,예쁘냐,이름은 어떻게 지었냐하고 자꾸 물어와서 사실을 말했다. 이미 자신은 다 마음 정리가 끝나서 웃으며 얘기 했는데 사람들은 그얘기를 듣고 나서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지 몰라서 만날때마다 난처해 하고 어떻게 만나야할 지를 몰라서 만나는 것조차 피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 주변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짐이 생긴 것이다. 이럴 때 남들은 다 우는데 자신은 울지 않은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것이다. 그 형님은 결국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도 같이 나누어야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자신의 아픔조차도 집단의 것임을 자각하는일, 상대방이 아픔조차 같이 할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 이것이 주체적 태도이다. 비극은 주체를 약화시킬수 있다는 선입견을 벗고 사람을 믿고 비극미로 승화 시키려는 자세 ,사랑과 배려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전제 되어있다.
주체의 성장이란 예를 들면 사소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모습에서 표현된다. 사소한 약속이든 중요한 약속이든 어떤 경우에도 약속은 주체의 실현과정이며, 주체가 실현되는 만큼 주체는 성장한다. 약속시간 5분, 10분 늦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은 상대방의 주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상대방의 시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이때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하는 문제는 상대방의 주체에 대한 무시는 결국 자신의 주체에 대한 무시로 된다는 것이다. 약속은 서로간의 주체성을 실현 확장하고자 하는 연대의 행위이다.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나의 주체가 실현될 수 있다는데 약속이란 형태의 특성이 있다. 따라서 상대의 주체를 무시하는가 존중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주체가 무시되기도 하고 존중되기도 한다. 약속을 어기는 행위는 자신이든, 상대든 주체성을 퇴보시키고 병들게하는 위험한 행위이다. 이처럼 주체의 성장은 사회적 관계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주체란 믿음이 전제된 배려와 사랑이다. 사랑이 전제되었을 때 눈치와 무시는 배려가 되고 추종은 존경이 된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개조하고 세상을 개조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개조하는 유일한 혁명이다.

자연, 역사, 문명
영국자연주의 시대의 비평가 러스킨은 인류가 살아가는 동안 세권의 책을 쓴다고 말했다. 하나는 자연의 책이고, 둘은 역사의 책이고, 셋은 문명의 책이라고.
마르크스주의는 자연의 범주에 대해 유물변증법을, 역사의 범주에 대해 사적유물론을 적용했다. 문명에 대해서는 스탈린 시절에 사적유물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범주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언어에 관한 문제가 그것인데, 언어가 토대에 속하는가 상부구조에 속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스탈린은 이 토론에서 언어는 토대이기고 하고 상부구조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일단 내린다. 그뒤 코징, 뮤어의 토론, 주체사상 등에서 이들 문제가 광범위하게 논의된다.
그래서 우선 세계의 범주를 분류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으나 나는 자연, 역사, 문명이란 틀로 구분해보고자 한다.
자연, 역사, 문명은 독자적이면서도 관계속에서 서로 상호규정하고 작용한다는 점을 이해할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순수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함께 문명과 함께 형성되어 왔다. 조선에 소나무가 많고 소련에 자작나무가 많은 것은 이미 자연이 인간의 역사와 문명과 호흡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역사는 자연의 절대적 지배를 받지 않으나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문명은 자연과 역사의 총화란 점에서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들 관계를 범벅으로 보지않고 체계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 관계의 동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생활이다. 사람의 생활을 중심으로 보면 자연은 생활의 조건이고, 역사는 생활의 과정이며, 문명은 생활의 결과이다. 즉, 자연, 역사, 문명은 체계론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생활을 중심으로 통일된다.
구석기시대의 돌도끼는 현재의 통일운동이나 시민운동과 전혀 관계 없을 것처럼 생각된다.고인돌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유적 유물을 사람의 생활을 중심으로 연관 통일시키면 고고학적 틀에만 갇혀 있던 문명이 현재와 미래운동의 길잡이가 된다. 그래서 이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도 필요하지만 체계적 관점에서 종합 통일시키는 연구도 필요하다. 굳이 학문적 틀로 설명하자면 미학적 틀이 이에 가장 적합하다.

구석기와 통일의 미학 – ‘결’
전곡리 구석기유적을 예로들어 오늘 우리의 주제인 운동과 상상력에 대해 알아보자.
전곡리구석기유적에서 미학적 원리로 접근하여 설명하고자 하는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결’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한탄강에서 강자갈을 주워다가 냇가에서 주워온 냇돌을 망치 삼아 움켜쥐고 손이 다치지 않도록 부딪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혓바닥으로 입을 훔치고 있는 순간의 신중한 전곡리 조상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서 일어났을 일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양식을 찾는 대신 돌을 찾았다. 전곡리는 석영을 금파리는 규암을 주로 사용했다. 규암이 고운 결을 내며 떨어지는데 비해 석영은 박리면이 규암보다 거칠다. 자연 스스로만이 만들어내던 돌의 결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돌의 발견은 사실 결의 발견이었고 결을 발견하자 자연의 돌은 ‘도구’라는 이름으로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아직 도구가 되기엔 험한 여정이 남았다. 결은 돌 속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어디를 봐도 빈틈이 없는 돌의 표면에서 어떻게 돌의 틈을 가르고 암흑에 갇혀 있는 결을 드러내게 할 것인가? 돌을 더 이상 깰 필요가 없는 현대인과 돌을 깬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더 나아질까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구석기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치열하게 돌을 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의 결여만큼이나 확신의 결여는 사물을 강렬하게 바꾸지 못한다. 전곡리에서 출토된 석기와 석기를 만들고 난 부스러기인 박편 석핵을 보면 2번 이상 타격을 가한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만큼 우연적이고 즉시적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애매모호함과 투박함이 유물의 초기성을 증명한다. 확신의 결여에서 확신의 충만으로 변화하기까지의 긴장이 서려 있어 이들 투박한 박편들에 오히려 더 애정이 간다. 돌과 돌을 강력하게 충돌시키지 않으면 돌의 결은 드러나지 않는다. 돌로서 돌을 깬다. 이것은 현대소립자물리학에서 소립자로서 소립자를 충돌시켜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돌속의 숨어 있는 결을 인식하고 돌로서 돌을 깨어 그 결을 끄집어내는 행위는 지금까지 혼돈일 뿐이었던 자연에서 질서와 구조를 깨닫는 법칙의 발견이었다. 법칙은 필연적으로 연관이다. 중국의 뇌봉이 한 말중에 혁명은 빈틈없는 나무에 못을 박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현실이라도 사람의 힘을 집중을 하면 틈을 내고 의지를 박을 수 있다는 것이다. 틈새하나 없는 돌이라도 사람의 손으로 부딪쳐 깨면 돌의 틈이 갈라지고 필연적으로 결이 나타난다는 확신, 법칙은 인간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것은 대단한 진보였다. 이러한 진보를 끌어낸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과거의 심상을 기억할 수 있게 하고, 그 결과로 미래의 상을 예견할 수 있게 한다. 상상이 전망적인 미래를 향하면 이상이 된다. 상상은 추동력을 주지만 이상은 거기에 덧붙여 확신을 준다.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시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확장된 시간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아낸 것이다. 자신을 발견하므로서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세계를 발견했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질서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세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상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법칙과 확신은 외로움을 낳았다. 법칙은 있는 현실과 있어야할 현실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있어야할 현실이 있는 현실이 되는 순간, 있는 현실은 있었던 현실이 되었다. 있어야 할 현실에는 미래라는 이름을 있었던 현실에는 과거라는 이름을 달 수 있게 되었다. 항상 현실이 확신대로 법칙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혼돈의 과거는 갔는데 법칙의 미래는 오지 않았을 때 위기가 도래한다.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미래는 건설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 위기가 극복될 수 있었는가?
석기가 자연 스스로의 발명이 아니라 인간의 발명이란 점에서 석기의 연구는 인간의 연구와 만나게 된다. 돌다음으로 손에 대해서 탐구해보자. 사람의 손은 도구를 만들 수 잇는 섬세함때문에도 주목되지만 언어능력과도 연관되어 연구가 되고 있다. 바늘에다 실을 꿰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혓바닥이 돌아가는 것을 발견한다. 손의 신경과 혀의 신경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을 세련되게 사용할수록 혀의 근육도 섬세해지고 훨씬 다양한 신호와 분절음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증대한다. 비약적인 소통능력의 진보가 손작업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로부터의 진정한 혁명적인 변화는 생존만을 위한 일차적인 신호체계를 극복했다는 점이다. 동물은 독백을 대화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독백을 방백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때문에 동물은 소통은 가능하나 반성이나 성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전곡인은 고민하고 실험하며 세계를 자기 식으로 탐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탐구는 혼자서 진행하는 토론이자 대화이기에 인간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배고플 땐 먹어야 한다는 오직 한가지만의 반응보다 훨씬 효과적인 대안을 만들어 낸다. 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의 정교한 건축이 사람의 그것보다 낫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러나 개미나 벌은 몇 천년 동안 똑같은 건축만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동물의 언어는 주어진 자극에 주어진 신호만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경직되고 폐쇄된 것이지만, 사람의 언어는 열려있다. 폐쇄되어 있더라도 일시적으로만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내적 성찰과 실험을 통하여 끝없이 외적언어를 확장한다.
만일 전곡인들이 아프리카 상고안(sangoan)에서 발견되어 아슐리안계 석기제작법이라고 불리는 문화를 배웠다고 가정한다면 (최근연구는 중국문화 주류론으로 기우는 추세이나 어쨌든 전파론적 입장은 마찬가지) 전곡인들은 몇가지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각면원구형이라고 불리는 석기에 기록된 흔적이 그러하다. 자갈을 원석으로 사용하여 둥근 모양으로 박편을 떼어 나갔으므로 석기표면에 박편이 떨어져 나간 면으로 많은 각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손에 쥐고 이를 던져서 짐승을 사냥하는데 쓸 수도 있고 고기, 뼈 또는 나무 같은 것을 짓이기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곡유적에는 박편을 내려는 흔적은 있으나 박편을 내지는 못한, 그래서 구별이 힘든 다각면원구형 석기들이 있다. 이것은 차돌의 단단한 재질 특성 때문에 오는 한계이다. 한국상고사학보 10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곡인이 만든 석기중 일부만 그(아슐리안계)와 유사한 것이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은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석기에 대한 연구에서 석기제작과정에서 버려지는 박편과 석핵(石核Core:석기제작과정에서 운석에 타격을 가함으로서 박편을 떼어내고 남은 움푹 패인 부분을 말하는데 몸돌이라고도 한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다른 문화권의 분류개념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독특한 양식이 발견되고 있다. 97년 유용욱에 의한 한탄강유역의 전곡리와 임진강유역의 주월리, 가월리유적 출토의 주먹도끼에 대한 비교연구가 있었는데 주먹도끼의 세장도(細長가늘고 긺) 인장도에 나타나는 형태적인 차이는 제작 집단간의 주먹도끼형태에 대한 인식차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조적이고 폐쇄된 문화보다는 모호하지만 창조적인 문화를 가꾸어 낸 것이다.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소통능력 때문에 스스로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할수 잇었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러나 한가지 요소가 반드시 이들에겐 필요했다. 이상의 내면화가 그것이다. 설령 누군가 석기문화를 전해주었다 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내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 그것은 결코 전수되지 못한다.
직접 먹이를 채집하는 대신 석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원당리나 삼곶리등으로 전파되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것을 만드는 방법과 작업을 고민했거나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직접 채집보다는 애매 모호한 문화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고민의 내면화과정을 포기했다면 전곡인은 단지 소통이 단절 될 뿐 아니라, 사유능력 자체가 상실되었을 것이다. (1964년 제이콥슨은 자신의 문법을 잃어버린 일종의 실어증 환자가 그의 내면적 언어마저 상실한다는 결론을 보고하고 있다.) 새로운 석기혁명이 일어나고 있어도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거나 예감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항상 보는 강가의 돌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이 도구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형식적인 신호가 계속되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동물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애매 모호한 희망’ 같은 것들이 ‘논리나 원칙’ 같은 외적언어로 전이되어야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1944년 타르스키는 모호한 내적언어로부터 직접 완결된 외적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호한 내적언어도 내적언어 자체와 조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사람이게 한 결정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예를들면 천년이상 미륵사상이 소통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전이나 논리보다도 언젠가는 도래할 이상세계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던 것과 같이 전곡인들의 석기혁명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투박하지만 먼 시간 뒤에 실현될 이상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의 내면화와 그를 통한 내적언어의 소통이 결국 석기문화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가혹한 시련과 위기를 딛고 일어선 전곡인이 스스로 고민했고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석기는 우연히 깨어진 돌조각이 아니라 인간진화의 총체적 혁명을 가능케 한 발명이다. 혁명의 이상을 형성할 문화가 있었기에 석기는 탄생한 것이다. 그들에게 돌의 결은 자연의 결이자 사회적 상상력의 결이었으며, 문명의 결이었다. 돌의 결로부터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의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 주인공은 자기를 해석할 수 있게 된 전곡인이었다. 자연은 생활의 조건이 되었고, 시간은 역사가 되었으며, 생활의 결과는 문명이 되었다.
사람의 이상은 그 실체인 ‘결’을 발견함으로서 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다.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돌의 결을 발견하자 이것은 어디에도 적용되게 되었다. 바람결, 물결, 살결, 숨결등 이전에는 혼돈이었을 뿐인 자연과 세계가 ‘결’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의 미학은 민족미학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게 되었다.
문득 한비자의 말이 일리있다.
이(理)란 이미 이루어진 사물의 결(文)이다. {해로(解老)편}

결의 미학을 통일의 결을 발견하는데도 적용해보자.
돌의 결을 발견하는 과정만큼이나 통일의 결을 발견하는 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다.
90년대 통일운동은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간의 소통이 단절되고 계속 자기얘기만을 되풀이하는 반복이 서로를 지치게 하고 만성적 위기는 많은 사람을 외로움의 이름으로 이탈되게 했다. 전곡리인들의 석기제작에서 발견되는 문화적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전곡리식 석기라는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기 위해서 법칙을 발견하고, 상상력으로 미래의 이상을 예견하며 자기반성과 내적언어를 통해 열렬히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결과 애매모호했던 서로의 의사는 소통됐고 그를 통해 혼돈자체인 자연과도 소통됐다. 자연의 결이 발견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무후무한 역사적 실험인 통일의 과정도 이와 같으리라. 언제가는 통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른 곳에서 석기가 발명된 것을 알 듯이 다른 나라의 통일을 보고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통일이 되지 않는다. 세상은 아는것보다 좋아하는 것에 의해 바뀌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에 의해 더 많이 바뀐다. 현실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풍부해야한다.
상상력의 부족과 결핍은 현실을 미래로 전진시키지 못하고 과거로 퇴행시킨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해교전이 나자 “그럼 그렇지” 하며 과거 생활의 방식으로 쉽게 생각한다면 이는 통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곡리인들도 석기를 만들다 만들다 안되면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먹이만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력을 잃지 않았다. 상상이 전망적인 미래를 향하면 이상이 된다. 이상은 빛이 아니라 어둠을 향한 도전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어둠에서 길을 찾아가는 방법이 ‘결’이다. 이상을 실현할 결을 발견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반성의 능력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반성은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의 내면의 언어가 충만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세계에 소통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했다. 99년 서해교전 이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대중대통령이 북의 인민군의 사열을 받게 될 것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어떤 언어와 논리도 정리되지 않았지만 통일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기에 두 지도자가 만날 수 있었다. 타르스키가 지적한 인간만의 능력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보여준 정신을 따라 통일의 결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