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한국사진산업현황2001/10/01
다) 한국사진산업현황
1) 앞글
해방 후의 사진산업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진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지도 30년에 이르고 85년 이후 사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이 열 명 이상이나 되는 해외유학생의 성행과 대학원의 증가되는 현상에서 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많다고 하겠다. 자료의 부족이 아니라 없음과 나의 게으름에 의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였다.
2) 가운데 글
(1) 해방후 한국경제의 전개과정
2차 대전후 한국을 비롯한 후진국의 자본주의 발전은 선진국으로부터 원료와 중간재를 공급받으면서 선진국에서 요구하는 형태의 공업화를 담당하는 내용으로 추진되었다.
한국에서도 경제구조 변동은 국내적으로 유기적 연관을 결여한 재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은 대외적인 요인, 국제변동에 민감한 영항을 받아왔다.
한국자본주의는 해방후 농지재혁을 통한 전근대적 유제의 청산과 자녀교육 확대로 우수한 노동력이 확보된데다가 60∼70년대의 세게자본주의의 유례없는 대호황이라는 조건과 수출지향공업화정책이 맞아떨어지면서 단기간에 고도성장을 해왔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은 군부독재와 국가보안법에 의한 정치적 억압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고도성장을 지탱한 것은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희생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억압하에서의 고도성장과정은 세계에서 가장 심한 불균형과 모순을 안게 되었고 다수 국민들의 삶은 황폐해졌다.
한국의 수출이 국제경제의 변동에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한국경제가 선진국자본에 종속되었음을 말해준다. 경제적 종속이란 “세계경제체제에서의 국제분업에 불평등하게 편입됨으로서 일국경제의 재생산 구조중 중요부분을 선진국에 의존한 채 외적규제를 받는 불평등한 경제관계를 말한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와 대외경제개방이 대폭 확대되었다. 90년대에 들어와서도 1995년 한국은 WTO체제원년 맞이하여 경제개방이 더욱 확대되었다. 우선 수입자유화율은 95.4%로 거의 완료되었고,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본자유화도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러한 개방에다가 95년 3월 29일 정부는 경제개발협력기구가입을 신청했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움직임은 제조업의 후퇴와 산업구조의 서비스업의 비대화, 재벌의 경제력집중과 금융지배, 소유집중과 경영지배, 정부의 편향된 재벌정책에 따른 중소기업문제의 악화현상, 외국인 노동자문제의 대두, 소득등 격차확대에 따른 인력불균형에 따른 노동문제의 심화, 노동자에 대한 지배심화, 토지문제의 심화, 농산물 수입의 급증과 식량자급율의 하락등 농업해체의 위기, 관료적 부패의 심화, 금융자율화의 진전과 재벌편중의 금융, 소득분배의 악화 등 현재 한국경제을 누르는 요인들이다.
(2) 해방후 사진산업의 전개와 그 현황
해방 후 처음으로 미군의 진주와 더불어 도입된 컬러사진은 미국의 코닥회사제품인 코닥코롬으로 이필름은 외형발색식 포지필름으로 국내에서는 현상을 할 수가 없어서 미국의 하와이에 있는 코닥현상소로 보내졌다.
1950년대는 사진의 기업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1956년에는 부국사진공업사가 최초의 국산인화지 혜성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미보양행은 앤스코 한국대리점인 컬러사진현상소를 차리고 컬러필름을 현상맟 인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지필름으로 사진의 발색효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문제점이 있었다. 이전에는 흑백사진에 물감을 채색하는 수준이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제대로 된 컬러필름을 현상하기 시작했다.
1957년 이종상은 당시 세게적 메이커인 독일의 아그파회사로 가서 컬러현상기술을 들여와 1961년 아그파 컬러 한국대리점인 한국천연사진현상소를 개설하였다. 이로서 인화용필름의 컬러사진인화시기로 들어섰다. 김종양은 미국에서 들여와 새한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장남수는 현대교역주식회사를 차리고 현상을 하였다. 이외에도 여러사람에 의해 현상소가 개설되었다.
1960년대는 정부의 1, 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힘입어 사진산업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1961년에 전쾌일의 국일사진화학공업사, 1962년 김부혁의 한국필름공업회사, 성문산의 한국필름공업주식회사, 이도훈의 태성사진공업주식회사, 이완태의 현대사진공업사등 등의 개설되었고 적극적인 인화지 양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공부에 의해 사진의 군소기업육성이라는 명분으로 일체의 외국산 인화지 수입 전면금지조치가 있었다. 1965년 미국의 이스트만코닥회사가 한국에 상륙해서 한창양행을 통해 한국대리점을 냈다.1965년 한일협정조인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트이자 후지필름과 사쿠라필름이 한국시장으로 침투해 왔다
1970년대에는 급격한 경제성장의 시기로 사진산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술과 시설도입을 하면서 새로은 기업간의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김병길의 대한광학공업주식회사에 의해 VERIX, KOBICA 카메라 생산 판매가 시작되었고, 김숭유의 비비드주식회사, 안치산의 럭키사진화학공업사에 의해 각종 현상약 및 청착약이 시판되었다.정두현의 세기광학주식회사에 의해 각종 렌즈가 생산되었으며, 신일산업주식회사에 의해 건조기 및 각종사진기구가 제작 판매되었다. 그리고 일이산업주식회사에 의해 플래스벌브와 확대용 전구가 생산되었으며, 황보의 태일양행에서는 컬러사진전자기기를 제작하였다. 이때에는 국산인화지, 카메라와 교환렌즈가 수출에 역점을 두고 국제시장에 진출하였고, 이는 1970년대 수출 100억불 달성을 하는데 사진이 한몫을 담당하였다. 1975년에는 김종양(회장), 변종관(사장)이 경영하는 대한사진필름주식회사에 의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필름을 제조하여 시판하기 시작하였다, 필름생산은 고도의 정밀과 정확성이 요구되는 작업이며 아직 시설과 미비로 소형카메라 필름에 한정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진산업의 움직임에 대해 정부는 외국산필름의 수입금지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진계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이후 기자단이 사용하는 고감도필름에 대해서는 수입금지조치가 해제되었다. 나중에는 정부의 수입자유화정책에 의해 모들 필름에 대한 금지조치가 철폐되었다.
90년대는 세동물산에 의해 컴퓨터시스템을 갖춘 사진인화현상기가 출현하였으며 1년만에 백여대가 보급되고 삼환사진기계에 의해 S.T쉬트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제작판매하는 등 자체적 기술개발을 하는 중소업체의 자구적 노력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상기는 외국사제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주)선경에 의해 일본의 캐논사와 직계약을 체결하고 직수입을 하기로 하고 일선 판매망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공진청에서는 국내외 제품을 비교한 결과 국산자동카메라가 성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일본의 카메라에 의한 한국사진업계의 시장이 잠식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엔고가 상승함에 따라 카메라가격이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3) 마무리 글
해방 후 사진산업이 걸어온 길은 한국경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이 중소업체가 각종 사진기자에에 대한 기술투자와 연구개발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어느정도 유통망을 확보하고 판매가 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지금 현재 산재해 있는 현상소에 대한 직접조사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나 지금 우리 사진분과에 속한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카레라와 쓰고 있는 필름을 생각해 볼 때 어느정도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