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북한 사진문화연구001/10/01
2) 북한 사진문화연구
(1) 들어가는말
북한 연구는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정보수짐의 한계에 부딪힌다. 북에서는 외부세계에 고림되어 있는게 아니라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이목이 집중되어 조그만 사실도 왜곡선전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정보공개를 꺼려하고, 남은 그나마 그 알량한 정보마저 통제한다. 자료는 어쩔 수 없이 통일교육원 북한자료쎈타의 자료로 만족해야했다. 사진에 관한 이론자료는 화보집말고는 전무했다. 음악이나 영화는 악기하나, 작품 하나에도 책 한 권 정도씩의 정리된 자료가 있는데 비하면 사진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해외에 나가있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자료를 수집해 보려했지만 한번 연락이 가고 나면 감감 무소식이었다. 해외에선 책을 구하기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국가보안법에 혹시라도 어떻게 될까봐 결국 나중에 가선 미안하단 소리 뿐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연구할 것인가가 그래서 가장 고민이었다.
(2) 연구방법
지루할 지 모르지만 가장 가까운 북한을 보기 위해 굉장히 복잡한 방법을 동원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목사님이 직관적으로 도달했던 어느날 갑자기 통일은 됐어 하고 너무 홀가분하고 쉽게 북한이 다가올지 모를 일이다. 우선 송두율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내재론적 접근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이러한 내재적/비판적 사회주의 접근은 어떠한 조사방법과 기술(記述)에 의거하고 있는가? 전체주의적 접근이 주로 역사적인 기술을 통해서 ‘개인우상’이나 ‘일당독재’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주로 분석하는데 비하여, 수렴론적인 접근은 주로 산업화 과정과 관료주의의 분석이나 국제정치적 역학관계의 기능·구조적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주의사회의 내재적 접근은 우선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이념(예를들어 사회적 평등)이 어떠한 ‘성과’로서 현재 사회주의사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유형론적으로 비교·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내재적인 비교사회주의 연구가 근거하는 양적/질적 ‘자료’는 어떠한 것이며 이는 믿을 만한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역시 남아 있다. 양적 수치로 표현된 사회주의사회 스스로 발표한 통계수치나 집계와 같은 일차적 자료는 우선 비판적으로 재해석되고 재평가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에서 사용되는 통계는 정의나 항목이 자본주의와는 다르고(가령 사회주의사회에서의 국민소득 개념은 자분주의의 그것과는 달리 보통 자본주의사회 국민소득의 3분의 1 이상을 점하는 서비스나 3차산업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순전히 물적 재화 생산을 의미한다). 또 자본도 비밀엄수나 선전효과를 위해서 축소되거나 또 과장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해석된 사회주의의 ‘성과’는 동시에 주관적·직관적 서술(인터뷰 여행기 등)과의 일치 또는 상이를 검증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회주의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내재적인 사회주의 접근방식은 전체주의나 산업사회이론이 근거하는 ‘선험적’입장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즉 사회주의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이러한 목적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달성되는가를 사회주의 스스로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실체와 기능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내재적 접근의 특징이 있다.(역사는 끝났는가 209쪽)
우선 내재적 방법론 스스로 지향하는 이념이 어떤 성과로서 구체적으로 실현됐는가를 보는 방법이다. 내재론이란, 예를들면 예술에서는 작가의도론으로 나타나는데 작품의 평가기준이 작가의 의도대로 잘 표현됐는가를 가장 중시한다. 그러나 그 작가의 의도 자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함으로써 작가의 의도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길을 막는다. 그래서 반공주의자에겐 주관적으로 치우친 느낌을 줄 수 있고, 친공주의자에겐 스스로 설정한 이념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 좌절과 실망으로 극단적 편향을 낳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우려는 방법론의 약간의 수정, 보완으로 나타난다.
지금까지의 북한 연구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제한성은 이같은 방법론적 문제에도 있지만, 자료공개가 ‘반공’선전에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우려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자료나 정보 공개를 기피하거나 통제하는 북한의 태도에도 그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러면 이러한 주객관적 어려움 속에서 북한사회주의 연구의 ‘내재적’접근은 가능한가? 필자는 이러한 내재적 연구가 지녀야 할 두 가지 전제를 우선 지적하고 싶다. 북한사회주의 내재적 연구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 중국 등 여러 사회주의와의 ‘비교연구’를 전제해야 한다. 북한사회주의와 다른 나라 사회주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종국적으로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현존 사회주의’와 보편적인 지향을 같이 하면서도 식민지적 낙후성과 국토분단 속에서 진행된 북한사회주의의 혁명과 건설에서 제기된 특수성을 보다 분명히 드러낼 수 있어, 북한사회주의의 내재적 이념과 현실을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북한사회주의 내부에서 계급모순 문제 해결과 더불어 ‘분단’이라는 민족모순 구조 속에서 제기된다.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민족모순 문제는 소련, 유고슬라비아,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문제나 앙골라, 모잠비크의 종족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북한사회의 내재적 요건을 구성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계급모순, 민족모순의 동시적 해결과제가 북한사회주의의 내재적 이념 즉 ‘주체사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이라는 북한사회주의 이념을 전제하고 이 이념이 정치/문화/경제/사회 전 분야에서 어떠한 구체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내재적 비판 속에서 북한사회주의 연구는 진행되어야 한다.(역사는 끝났는가 212쪽)
이같은 비교연구는 결국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다른 구조와 체계에서 서로다른 속성을 나타낸다는 점에 착안한다. 결국 사물이나 사회의 본성은 체계적 연구방법을 통해 그 실체가 더 정확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체계적 방법론을 적용하고자 한다. 체계적 방법은 우선 역사, 구조, 기능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래서 역사는 체계의 발생 발전과정으로, 구조는 체계를 이루는 요소들간의 연관으로, 기능은 다른체계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럴 때 체계라는 동일한 기준으로 서로 달라보이는 영역을 통일적으로 파악할수 있기 때문이다. * (체계적 방법론은 1, 2차 발표회 자료집 참조)
(3) 몸글
1) 북한 사진사
1. 북한의 사진에 대한 관점
사진북한에서 사진사의 기점을 언제로 보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을수 없다. 그러나 거의 확실한 추측을 할수 있다. 북한은 모든 역사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어있기 때문에 사진사 또한 예외없이 이 기준이 적용 될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60년대 역사시기 구분 논쟁을 통해 1926년 김일성의 “타도제국주의 동맹” 결성에서부터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대중을 떠난 교조주의, 분파주의, 사대주의를 극복한 참민족해방운동이 시작되었으므로 이 시점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설정하였다.(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주최. 제1회 통일 및 북한문제세미나. 12쪽)
그리고 정치, 경제 뿐 아니라 예술사에도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특별한 예외가 존재할 리 없는 사진사 또한 현대사진사의 기점을 1926년으로 잡고 있으리라 추측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사진이 존재하는가? 북에서는 현대적이라고하는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반제반봉건 혁명이다. 구체적으로는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시작되는 항일무장투쟁을 형상화한 사진이다. 여기에는 김일성과 항일유격대원들의 기념사진 등이 주조를 이룬다. 이와 관련하여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블어”에는 어린 유격대원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마을에서 사진사를 데려다가 같이 찍히기도 하고 김일성이 직접 찍어주기도 할 정도로 사진 찍기를 좋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일성의 사진에 대한 일화는 현재 까지도 수령의 자애로움의 표현으로 심심치않게 여러 사람의 수기에 등장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현지지도의 나날에 수많은 대회를 지도하시고서도 저희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셨습니다. 1976년 4월 25일 인민혁명군창설 44돐이 되는 날, 전사들과 기념사진촬영을 하고 보초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음니다. 보초병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보시면서 “보초동무의 자세가 참 위용이 있구만. 내가 이제 사진을 찍어주겠소” 하시었습니다. 뒤이어 보라빛 사진이 나왔습니다. 어버이 수령께서는 만족하신 음성으로 “우리 보초병 동무의 사진이 잘되었구만”, “이젠 나와 둘이 찍읍시다”. 그리고 “우리 병사들이 제일 귀중합니다”라고 하시면서 그 보초병의 곁으로 다가 서시었습니다.
그이께선 보초병의 옷깃도 여며주시고 모자도 고쳐 씌워주시고는 그의 팔을 끼시며 “나도 오늘은 병사입니다”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시었습니다. 어버이 수령께선 보초병의 팔을 다정히 당기시며 얼굴을 들고 용감한 모습으로 찍자고 이르시였습니다. 어버이 수령께선 현상되어나온 사진들을 한 장한장 번지시다가 한 장을 들어 “이사진을 미국놈들이 보면 뒤로 히뜩 나가넘어질것이오”. 그리고는 보초병의 이름을 물으시었습니다… “음, 상등병 박창건”, 어버이수령께선 보초병을 가까이 불러 친히 찍어주신 사진을 한 장씩 번지시며 “한장은 고향에 보내고 한 장은 중대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초병의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을 골라드시고 “이사진을 잘 건사했다가 이다음에 장가갈 때 처녀한테 주시오”… 여기서 저는 우리의 주체적인 사진이 걸어온 역사에는 인민들의 위훈과 행복감을 사진마다에 담아주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온정과 함께 사진발전의 담당자들인 우리 사진가들에게 베풀어주신 어버이 수령님의 드거운 사랑이 또한 자욱자욱 깃들어있음을 말하고 싶다. (<은혜로운 품속에>중에서 [사진마다에 깃든 어버이의 사랑]김승균.P138~157)
* 보초병 박창건이 직접 쓴 글이 <인민들속에서> 중 [병사들의 사진까지 찍어주시며](P225)에 있다
우리는 이 수기에서 북한 사진문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 몇가지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김일성은 우선 사진을 굉장히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수령 중심으로 되어 있는 북한사회에서 수령이 사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진을 같이 박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그 말 뜻 만큼이나 사람관계를 뿌리박게 하는 형식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간의 우호적인 관계와감정을 뿌리 박도록 하는 기능으로서의 사진은 사진도입 초기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미신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 들였던 사진자체에 대한 저항과 반발이, 기대와 사랑의 대상으로 뒤바뀐 점 등에서 현대적이다. 둘째, 사진을 곧 생활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고난과 투쟁의 상황에서 사진은 잊혀진 생활을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 사진이 오로지 선전 선동의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것이라는 예측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일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란 점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것으로 판단된다. 혁명가로서의 김일성은 사진을 통해 혁명과정에서 잊기 쉬운 사적인 생활을 확인시켜주는 자애로운 어버이의 이미지로 선전되고 있다. 세재, 사진사를 다른 예술에서 처럼 예외없이 주체적인 사진사로 이름 붙이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의 중요부분으로 인민들의 위훈과 행복감을 사진마다에 담으주시려는 수령님의 온정과 사진가들에게 베풀어주신 뜨거운 사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이전의 사진문화와 구별되는 경계점이 되고 있다. 1957 10월혁명40주년기념시집 <아브로라의 여운>에 실린 <<레닌의 사진>>을 보자
레닌의 사진
박세영
나는 잊을수없다.
해방의 감격에 들끓던해,
회장안이 붉은 깃발에 싸인 듯
서울에서 가졌던 10월 혁명 기념을.
철창에서 나온 동지들,
공장지구에서 온 동무들,
그립던 동무들의 얼굴은
얼굴마다 비개인 강산과 같았느니.
눈동자 마다 붉은 깃발이 비치는가,
품었던 붉은 별이 반짝이는가,
오직 그 하나를 바라고 싸워 왔기에
희망의 불ㅅ길로 타올라서이리.
아니 회장에서 노나준 레닌의 사진
군중들은 너나없이 가슴에 안았으니,
만년 묻혔던 바위가 햇볕을 받는 듯
새세상을 차지해서이리.
그런데 웬일이냐,
어느틈에 거여들어온 엠M들이냐,
독사같은 눈초리들을 굴리며
기절할 듯 입술을 벌리며.
[레닌의 사진을 내들 놓아라
그것은 위험한것,이리들 내 놓아라]
놈들의 통역도 흉내를 내며
사뭇 으르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 놓으랴,
어느누가 겁내랴,
놈들에게 사진을 내준다는 건
해방을 앗기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네놈들은 진정모르리라,
우리가 레닌의 초상을 품속에 안는 것보다
위대한 레닌이 우리를 품어준 것을
그리하여 불굴의 투지가 치솟는 것을.
이 시의 배경년도는 1927년이다(1917년 러시아 혁명10주년이니까) 시인 박세영은 당시 서울에 있던 것으로 봐서 1926년 만주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과는 다른 활동을 한 조선공산당계열의 카프문인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카프작가들에게있어 예술이 선전선동의 수단이었듯이 사진 또한 투쟁의 상징일 때 의미 있었으리라. 그래서 이 당시의 사진문화는 이태웅이나 임석제들의 경우처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해도 일반 대중들이 생활속에서가지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 전속사진작가 김승균의 글에서 표현된 주체적 사진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사진과의 구분점은 바로 단순히 당정책의 선전수단이냐, 수령-당-대중이 생활속에서 일치된 사진문화이냐인 것이다. 수령-당-대중이 일치된 사진문화란 과연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여기 6.25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단편소설 최부길의 <사진>을 보자.
줄거리를 간단히만 요약하면 이렇다.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엎고 분임은 전쟁통에 사진을 찍기위해 집을 나섰다. 폭격으로 읍의 사진관 하나는 형체가 없어지고 다른사진관도 필름자루가 타버렸다.할수없이 달래강을 건너 현동사진관으로 갈수 박에 길이 없었다.그런데 현동으로 가는 다리가 폭파되어 복구하느라고 위장한 군용트럭들이 서로 빨리 갈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운전수들과 기다리며 아주머니는 무슨 급한일이 있어 그렇게 서두르냐고 묻자 아이사진을 찍으러 가는길이라고 한다. 그러자 모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마디씩 한다. 모두 후방공급임무를 띄고 가는 중요한 일이 라도 있으니 저러겠지하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분임은 꼭 아이사진을 찍어야할 이유가 있어서…김일성장군님이 아이사진을 찍어서 전선에 보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사람들이 놀라며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밭에 나갔다가 마침 현지 지도를 나온 김장군님과 우연히 만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병사들은 가족사진을 보고 애국하니 사진을 보내라고 이야기한다. 고향과 부모형제 친구들을 사랑하지 않는 전사들은 용감하게 싸울 수 없다고 말하며 “사진을 꼭 보내시오 이번에 전선에 나가서 한 전사의 복수기록장을 보았는데 그 갈피속에 사진이 한 장 있었습니다. 무슨 사진인가 물었더니 그 전사의 가족사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사는 가끔 가족사진을 꺼내 본다고 했습니다 전선에서는 그것이 큰 기쁨입니다. ‘가족사진이 폼에 있으니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어려울 때마다 가족사진을 꺼내보면 더 용감해진다’고 그 군인동무가 나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동무에게 그것이 숭고한 애국심이다. 고향과 부모 형제들을 친우들을 사랑하지 않은 전사는 용감하게 싸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분임동무도 현우의 사진 한 장 잘 찍어서 전선에 보내시오” 우리 전사들이 고향과 부모 형제들을 가슴에 품고 싸우게 하신 최고사령관 동지의 말씀은 운전수들로 하여금 제각기 자기 추억에 잠기게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운전병들은 서로 분임을 자기차에 태워주려고 법석을 떤다. 이 때 한 대위의 차가 도착하며 급하니 먼저 가자고 운전병들한테 양해를 구하려 한다. 그러자 운전병들은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안아주신 이 아이를 먼저 건내자고 그럽니다. 그러자 자기 신분을 인민국신문사 기자라고 밝힌 대위는 혹시 이 아이의 이름이 현우아닙니까? 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확인되자 자신은 김장군님의 전화를 직접 받고 분임동무와 현우의 기사를 신문에 싣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사진을 찍읍시다 기자동무”밤에야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겠습니까 아침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 자동차의 전조등을 다 비치면 안되겠습니까?’ ‘아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운전사들은 모두 자기 안해 자기 가족이 사랑의 사진을 찍기라도 하는 듯 그 사진이 자신에게 전해지기라도 하듯 자동차를 움직이고 위치를 바로 잡느라 흥성거렸다. 기자는 전투가방 속에서 사진기를 꺼냈다. 기자는 눈물이 앞을 가려 찍을 수 없었다. 평범한 한 병사의 가족을 통해서 모든 것이 불에타고 잿더미로 된 이땅에서 전쟁에 몰두하여 잊어버렸던 생활을 찾아주시고 그 생활을 지키도록 해주시는 위대한 사랑에 목이 메였다.
전쟁중 김일성의 교시중에서 <전쟁에서 이기려면 후방공급기지가 든든해야 한다>는 전술이 제시된 바 있다. 이것이 전술상의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인민들에겐 먹고 사는 생할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주는 것으로 비치고 있으며, 생활의 작은 이야기와 전쟁이라는 큰이야기를 통일시키는 논리로 인식되고 있는 점이다.
[우리 전사들이 고향과 부모를 가슴에 품고 싸우게 하라]는 김일성의 말은 고향, 부모,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곧 애국이요 주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통일신보에 실렸던 다음글을 보자.
<우리의 것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조국애이며 주체입니다>
혁명과 건설에서 자기 민족문제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고 실천하며 모든 문제를 주인다운 자각을 가지고 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가려는 관점과 태도는 자기의 것을 무한히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상 감정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통일신보 97. 5. 24. 토요일 3면 윤미영 기자)
우리는 여기서 북한의 주체적 집단주의가 서양의 집단주의와 다른점을 발견한다. 서양에서는 개인의 생활이나 시민의 영역이 집단주의를 약화시키고 방해하는 골치아픈 요소인 것에 비해 북한에서의 개인과 사적 영역은 오히려 집단주의를 실현해가는데서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겨야할 요소로 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특성으로부터 연유하는 바도 클 것이다. 특히 북한은 자본주의에 의한 개인으로의 해체과정을 밟을 겨를도 없이 곧장 반제 반봉건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해 갔기에 민족문화의 힘이 특수하게 작용한다. 이것이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가 아닌가를 떠나서 일단 북에서는 가능성있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점에서 맑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달리 주체적 사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2. 사진사 -시기구분, 쟝르구분, 작품분석
앞에서 사진사를 바라보는 북한의 관점을 알아 보았다. 다음으로는 작품을 통해 사진사를 보기로하자. 사진사에 관한 특별히 언급된 자료를 구하지 못했으므로 이 부분은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더라도 역사시기구분과 다른 예술쟝르의 구분을 참고로 가정하여 전개하고자 한다. 사진자료는 전국예술사진 전람회에서 당선된 작품과 화보집인 천리마, 조선 등에 실린 다큐멘타리 사진이다. 보도사진에 대한 정의를 문학예술사전에서 찾아보자.
사진보도 : 출판물과 통신, 텔레비죤방송에서 국내 국제적으로 버어지는 새롭고 가치있는 사실, 사건들을 생동한 사진자료로써 신속정확히 알려주는 보도 사진을 현실의 생동한 사실을 가지고 대중을 교양하는 중요한 직관 교양수단이다. 그 어떤 현실반영수단들도 사진만큼 현실을 가장 생동하게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다. 사진은 그 직관적 성격과 독특한 인식교양적 기능과 역할로 하여 출판보도물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로 되고 있다. 사진을 출판물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인식교양적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기사에소개된 사실과 사건을 직관적으로 확증하며 기사의 내용을 보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진은 또한 출판물의 내용과 형식을 다채롭게 하며 출판물의 면모를 갖추게 하는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보도자료는 해당 력사적 시기의 제반 사실, 사건들을 생동하게 반영한 귀중한 자료로서 그 시기 근로자들에 대한 선전교양 자료로 될 뿐아니라 후대들을 교양하는데로 크게 이바지 한다. 언어에 관계없이 현실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선전 수단인 보도사진은 각이한 언어를 가진 독자들을 대상으로하는 대외선전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당 출판보도물에서 사진보도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활동을 정중하고 감명깊게 반영함으로써 수령님의 령도의 현명성과 고매한 공산주의적 덕성으로 근로자들을 교양하는데 힘있게 이바지한다. 우리 당 출판보도물에서 사진보도는 또한 생산과 건설, 문화와 도덕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 인민이 이룩한 빛나는 성과들을 생동하게 반영함으로써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주체사상과 그 구현인 우리 당정책의 정당성과 불패의 생활력을 보여주는 힘있는 직관교양수단으로 되고 있다.
단 여기에서 예술사진과 보도사진의 장르 구분을 어떻게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석해 보건대 외적형태로 보면 예술사진은 보통 단사진이다. 화보잡지에 예술사진이라고 해서 특별히 한면을 다 차지하는 큰 사진이 있는데 제목과 사진만이 있다. 또하나 특징은 예술사진의 경우 여러 사진을 조합하여 구성한 합성사진등도 눈에 자주 띄인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보도사진은 사진촬영, 편집, 글을 한사람이 다 한다. 경우에 따라 글과 사진이 따로따로 나누어 실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찍은 사람이 글도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점으로 미루어 보도사진은 사진문학편집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합당하리라 생각된다. 이는 사진을 찍을 때부터 잡지화면에 대한 구상속에서 틀, 조명, 시선흐름 등을 미리 계산해서 찍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 시기별로 대표적인 작품을 보자. 여기서 대표작의 선정기준은 필자가 가지고 있는 짧은 식견으로 판단한 것인 만큼 북에서 판단하는 기준과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사회의 보편적인 정치,예술적 기준을 유지 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라는 한계와 변명을 할 뿐이다.
3. 사진사의 전개
** ㄱ)∼ㅂ) 까지는 연대 사회과학연구소 통일 및 북한문제 세미나자료를 참고로 했고, ㅅ)∼ㅌ) 까지는 발언출판사의 조선건축사2 12쪽을 참고로 하였다.
ㄱ) 1866년 – 1884년 : 1866년 미국 해적선 샤만호와 프랑스 침략선의 격퇴로부터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서막으로되는 반침략 투쟁이 전개되고 반식민지 반봉건화 과정의 시원적 계기가 조성되는 시기인 바, 총체적으로 근대사의 시기로 된다.(이때는 개화파와 실학파에 의한 합리주의적 사고가 무르익고 외세의 침략조짐이 노골화 되면서 반외세 반봉건의 저항의식이 생기던 때였다. 1800년대 초반 정약용의 칠실관화설이 소개되고 1870년대에 사진이 들어오는 시점이었다. 사진을 근대정신의 산물로 파악하는데서 개인적으로 합당한 시기구분으로 평가한다.)
ㄴ) 1884년 – 1894년 : 이 단계는 갑신정변으로써 첫 부르조아 혁명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이며, 나라의 반식민지와 과정과 봉건주의를 반대하며 농민대중의 혁명적 전쟁이 전개되며 우리나라에서 첫 부르죠아 개혁으로서의 갑오개혁을 성취시킨 시기이다.
ㄷ) 1895년 – 1910년 : 이 단계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초적 편성이 진행되는 시기이며, 식민지화 과정이 종결되는 시기인 동시에 부르죠아적 민족운동의 대중적 앙양기이다.
ㄹ) 1910년 – 1919년 : 이 단계는 식민지적 조건에서 반봉건적 기반에 기초한 생산방식 편성이 최종적으로 기초지워지는 시기이며, 동시에 3.1운동으로써 부로죠아 민족운동의 시기가 종말을 고하는 시기이다.
ㅁ) 1920년 – 1931년 : 이 단계는 식민지 반봉건적 사회의 청산을 지향하는 로동계급 령도하의 반일민족 해방투쟁의 장성발전의 시기이며, 민족해방 투쟁의 가장 놓은 단계에로의 발전을 위한 력사적 전제 조건들이 성숙되는 시기이다.
ㅂ) 1932년 – 1945년 : 이 단게는 김일성 동지를 선두로 하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령도하에 근대조선 혁명운동이 가장 높은 무장투쟁의 력사적 승리에 의하여 우리나라에서 식민지 반봉건사회를 청산하는 계기를 열어 놓게 되는 시기이다.
ㅅ) 해방후 민주건설시기 : 해방직후부터 6.25전쟁전 까지의 시기로 보통강개수공사의 첫삽을 뜨는 김일성의 사진을 비롯하여 토지개혁등 반제 반봉건 혁명을 수행하며 현지 지도하는 사진 등이 있다. 이중 보통강 개수공사 사진은 수령이 직접 오른쪽으로 등을 돌리고 삽에 흙을 퍼서 오른쪽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던지는 장면인데 느린 셔터 효과로 던져지는 순간이 잘 표현되었다. 김일성의 반쪽 얼굴 표정 사이로는 넉넉하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뭔가 노동자들과 대화하며 즐겁게 일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초기 사진이 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김일성의 얼굴은 스폿팅과 뒷손질을 하여 마치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이처럼 김일성의 얼굴은 상당기간 동안 모두 이 방식으로 사진 찍은 다음 얼굴에 주름하나 없이 웃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형식을 취한다. 또한 김일성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흙을 망태에 담아 옮기려는 두 노동자의 모습은 신나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이 사진은 김일성 형상화를 중심으로 하다가 다른 인물과의 전체 구성을 보지 못하므로서 스스로 설정한 형상화의 목표에 못미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한장의 사진으로 당시를 다 평가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경향은 꽤 지속된다.
ㅇ)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 : 많은 종군 기자들이 투여되어 전쟁을 기록하여 많은 사진을 남기고 있다. 특히 남에서와는 달리 전쟁의 원인을 북침으로 보는 내용의 사진들과 당시 영웅적으로 전쟁에 임하는 전사들의 형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설명문을 빼고 사진 자체만으로 그런 형상을 전달하는 사진은 많은 것 같지 않다. 기억에 남을만한 사진으로는 북의 노래에도 등장하는 젊은 기관사들의 후송투쟁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을 보면 화면 앞쪽에 폭격으로 고철이 되어버린 열차가 나뒹굴고, 화면 중앙에 시커먼 연기를 하늘에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는 기관차 사진이 있다. 제목 설명문은 적의 폭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숨을 던져 후송열차를 모는 젊은 기관사들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설명문을 빼고 보게되면 그런 진취적인 느낌의 비장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으면서, 폐허와 암담함도 아울러 느껴지는 사진이다. 제목이 사진을 더욱 상승시켜줄 때, 제목을 다는 의미가 있을텐데 이런 경우는 제목에 사진이미지가 딸려가는 경우가 될 수도 있겠다. 형상화의 흠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사진부류는 평범한 인민들이 군인들을 도와 후방공급사업 등에 떨쳐일어나 영웅적으로 싸우는 사진들이다. 이것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전쟁시기 사진에서 주체 미학이 관철되는 가장 전형적인 사진으로 되는데 그 과정은 김일성이 1968.2.15일 인민군 창설 20돐 사진전람회에서 내린 교시 때문이었다. 김일성 전속사진작가 김승윤의 글을 보자
(…)수령님께서는 사진전람회를 보실때나 한 책의 화보를 보실때나 거기에 인민들의 씩씩한 투쟁모습과 행복한 생활 모습니 잘 담겨 있을때 제일 기뻐 하시였다. 인민들의 투쟁 위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위대한 수령님 께서는 이날 몸소 전람회 장으로 오시여 혁명의 매단계에서 우리 인민이 발휘한 영웅적 위훈과 우리 인민의 투쟁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사변들에 대한 사진이 전람회에 잘 반영되도록 따뜻이 가르쳐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2층에 막 올라서시였을 때였다. 여기에는 송악산 전투당시 경비대로 지원하여 용감히 한 농민일가의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은 이 사진을 보시고 만족하시여 교시를 내려주시였다. “경비대를 지원하는 후방 인민들의 투쟁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아주 좋습니다. 가치있는 사진입니다. 저런 사진들이 아주 귀중한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사진가들은 이 사진이 그저 괜치 않게 된 사진이라고 생각하였지 어버이 수령님께 그렇듯 큰 기쁨을 드리게 될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인민들의 투쟁 모습을 잘 찍은 사진이 가치있고 귀중한 사진 이라고 하시며 내세워 주시는 어버이 수령님의 숭고한 사랑에 우리 모두의 눈시울은 뜨겁게 젖어왔습니다. 실로 그이께서는 한 장의 사진을 두시고도 인민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것이 인민을 위해 더 잘 복무할 것을 바라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수령님께서는 이날 제가 찍은 사진을 그이께서 고사포중대 군인들 속에 계시는 사진을 보시고는 이렇게 군인들 속에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어버이 수령님의 이 말씀에서 언제나 인민들 속에 계실 때 기쁨을 느끼시는 그의의 숭고한 인민적 풍모를 다시금 가슴 뜨거인 느꼈기 때문입니다. 군민일치를 보여주는 한 사진을 보시고 군대와 인민간에 사랑이 끓어 넘친다고 치아하신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다른 한 사진에 이르시어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하시었습니다. 그것은 수령님께서 한 피살자 유가족을 만나 주시는 사진이었습니다(…). 이때 한 일꾼으로부터 그 딸이 인민경제대학에 와서 공부하였다는 말을 들으시고서야 마음 놓이시는 듯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보시고도 어느 한 현지지도의 길에서 만나시었던 피살자 유가족의 일을 그렇듯 깊이 회고하시는 수령님을 우러르던 저는 그만 고개를 숙여 눈굽을 훔치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지난 조국전쟁해방시기 우리 인민의 투쟁을 담은 사진을 보충할 데 대해서도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시종 인민들의 투쟁, 인민들의 힘의 위대성에 대해 강조하셨으며 우리의 사진이 모든 것을 인민을 중심에 놓고 인민을 위해 더 잘 복무하도록 이끌어 주시었습니다.
이때 당시의 사진에서 어떤기준이 김일성의 주체미학적 기준에 부합되는가를 잘알수 있는 글이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의 중요한 사진 몇점을 품평해 보자.
김일성이 후방공급사업을 조직하고 장기화 되는 전쟁에서 인민들의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직접 농촌에 현지지도를 내려가 논두렁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의 사진이 있다. 여기에서도 김일성의 얼굴은 약간 오른쪽을 향하여 고개숙인 뒷모습의 농부와 자신감 넘치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위의 글에서 처럼 인민의 생활속에 함께하는 수령의 형상화란 점에서 중요한 사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진을 잘보면 김일성과 김일성을 수행하는 비서인듯한 사람을 모습을 빼고는, 머리의 수건을 쓰고 논두렁 비탈에 편치 않게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 어색한 듯이 웃고 있는 늙은 농군의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고 마치 불편한 자리에라도 앉아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사진도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형상화에서 큰 흠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내용의 인식적 측면이 강조되는데 비해서 내적, 외적 형상화에서는 미흡함이 발견된다.
ㅈ) 전후 복구건설 및 사회주의 기초 건설시기: 53년부터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된 60년까지로 한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8월 5일 제6차 전원회의에서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3년을 전후복구기로 정했고, 1956년부터 1960년까지는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축성하는 단계로 정하고 제1차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계획은 액수상으로는 2년 8개월만에 끝냈고, 지표상으로는 4년째인 1959년에 끝냈습니다. 남은 1년인 1960년은 완충기로 설정했습니다. 이 기간에 기계제작공업을 핵심으로 하는 중공업의 기초를 축성했습니다. 이 기간에 처음으로 트렉터, 자동자, 불도저 같은 중력기계들을 생산했습니다.
<북조선 경제의 이해를 위하여(미주 평화통일연구소 소장, 사회과학원 주체경제학연구소 소장 김원삼교수와 한득보박사와의 대담):통일원 인터넷자료>(이하 북조선 경제의 이해를 위하여)
사회주의 토대의 역사적 발생문제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맹아, 1956년 토대 확립, 1958년 체제 확립으로 정리될 수 있다. 1958년 8월에 북한 전역에 사회주의 경제체제-농업의 집단화-가 완성됨으로써 북한 사회는 인민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 시기 논쟁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셈이다. 문예학계의 리얼리즘 발생 발전 논쟁은 당시 역사학계에서 벌어진 근대사 시대구분 논쟁과 함께 사회주의 토대 완성의 지적 표출, 상부구조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논쟁이 진행되던 시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으로서 과거 문학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가 비판된 것도 같은 맥락하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반대파 축출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를 ‘문예게에서의 반종파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우리 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 사계절, 김성수 엮음>
앞의 두 인용글이 이때의 상황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때의 대표적인 사진으로 잡지 {조선} 64년의 앞표지 뒷면에 한성걸이 찍은 사진, <밭갈이가 시작되였다>를 보자. 앞쪽으로는 자체 생산된 트랙터를 끌고 밭갈이를 나가는, 목도리와 다리덮개를 한 농업노동자가 오른쪽 상단을 치켜올려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손을 들어 흔드는 장면과 뒤쪽으로는 밭을 힘있게 갈아엎고 가는 두 대의 트랙터 장면이 펼쳐진다. 이 사진은 언뜻보면 단 사진 같지만 조명상태의 미묘한 엇갈림, 공간 구성의 뒤틀림등을 볼 때 두장을 조합한 사진임을 알수 있다. 여기에 자랑스럽게 등장한 트랙터는 전시기 경제건설의 성과임을 상징하며 노동자의 희망찬 모습에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시위하는 사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두장의 사진을 조합한 흔적으로하여 생동한 묘사의 원칙을 잃고 있는점이 아쉽다. 물론 다른 사진에서는 생동감 넘치는 사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국가적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조합해서라도 사진을 만드는 목적의식성을 반드시 나쁜것으로만 판단해야할지는 판단을 유보한다.
*트랙터와 관련한 이야기 하나: 1958년 11월 기양 트랙터공장(오늘의 금성트랙터연합기업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두 대의 트랙터를 분해한 2천 여 개의 부품을 가지고 30여일 동안 거의 수제공정으로 두들겨 조립한 트랙터가 시험운전을 하자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만 갔다는 일화다. 그로부터 한 해 뒤에는 3천대의 트랙터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북한경제의 이해를 위하여, 31쪽>
ㅊ)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기: 제1차 7개년 계획 수행시기인 1961년부터 1970년까지로 한다.
“1961년부터 제1차 7개년 계획을 세우고 경제건설에 힘썼는데, 7개년 계획이라면 68년에 끝나야 하는데, 1970년까지 3년이 연장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카리브해 위기(‘쿠바사태’를 말함), 베트남 전쟁 등으로 우리나라의 정세가 매우 긴장하게 되어, 경제건설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방건설을 병진해야 했습니다. 이 기간에는 경제건설에 대한 투자를 국방건설에도 돌려야 했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국방비는 1956년부터 1970년까지 14년 동안 사회주의 공업화를 완성지은 것입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기술개조를 기본과업으로 한 6개년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기술혁명은 사상혁명, 문화혁명과 함게 3대혁명의 기본인데, 이것은 공업노동과 농업노동의 차이, 중노동과 경노동의 차이를 줄이는 과업을 뜻합니다. 특히 고열노동, 유해노동이 크게 감소했습니다. 물론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하는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기술혁명의 과업에는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하는 과업이 들어있지 않다고 하지만, 이것은 가사노동을 덜어줄 수 있는 부엌살림을 꾸려주는 것, 가정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가공원료로 꾸려주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 기간에 새로 건설한 공장은 1만7천7백여개나 됩니다.<북한 경제의 이해를 위하여 5쪽>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카프문학이 아니라 만주 빨치산 시절의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공연’된 ‘항일혁명문학예술’이 주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김일성,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김일성선집} 제4권(조선로동당출판사, 1960) 참조.<우리 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 사계절, 김성수 엮음, 350쪽>
이 시기의 사진에서는 김일성의 교시가 어떻게 관철되는지 김승균의 같은 글에서 보자.
공화국창건20돌 기념사진 전람회 때에는 당과 공화국을 받들어 온 우리 인민의 투쟁이 더 잘 반영이 되도록 가르쳐주시면서 우리의 사회주의 제도하에서의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모습이 사진마다에 잘 반영되도록 하시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었다. 이 전람회 장에는 소년단원들의 즐거운 야영생활을 담은 사진이 있었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사진을 보시고 생활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런 사진이 좋다고 거듭 치하하시면서 오래도록 말걸음을 멈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린이 건강진단을 하는 사진이 전시되었었는데 사진이 참 좋다고 하시며 생활이 있고 사진을 크게 만드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인민들의 행복감을 보여주기 위한 사진, 실로 우리에겐 그런 사진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행복과 영광을 담은 사진은 위대한 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찍은 그런 사진인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현지지도의 나날에 수많은 대회를 지도하시고서도 회의의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 탄생65돌 기념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이었습니다. 개천군 연풍 고등중학교에 찾아가시었습니다. 온 학교 직원들과 학생들이 감격에 목매여 만세삼창을 부르며 어버이 수령님을 맞이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사진기를 가져오라고 하시었습니다. 저희들이 올린 사진기를 받아드신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오늘은 자신께서 이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시겠다고 하시며 어린이들을 하나하나 앞세우고 사진을 찍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사진에 활달하신 글씨로 자신의 성함을 친히 적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기 속에서는 1970년 {조선}에 실린 노동자 작곡가라는 제목의 사진편집문학(필자가 임의로 붙임)작품을 보자. 자료상황 때문에 사진을 싣지 못하고 편집상태나 글을 따로 실을 수밖에 없음이 아쉽다.
중은 주광을 아래쪽 사광을 써서 부드럽게 집중시켜 주고 있으며 보조광을 반역광을 강하게 주어 악센트
활력을 표현하고 있다. 빛나는 눈동자와 꼭다문 작은 입술은 주인공의 성격을 잘 표현해 준다.
가는 로우앵글로 역동적이고 힘찬 노동자상을 표현하며
나는 바아얼린과 현을 들고 있어서 예술인텔리의 느낌을 준다.
다는 바바리와 담배공초를 들고 얘기하며 걷는 모습에서 간부다운 고상한 노동자의 풍모를 표현하고 있다.
라는 연주지도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이다.
구성면에서 보면
-. 중의 시선이 가의 자기 모습위 설명글을 향하고 가의 시선이 중을 보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 가와 나가 거울의 대칭구도로 대치을 이루며 기울어져 있다.
-. 나의 오른쪽 동생과 다의 왼쪽 부주인공이 대칭구도를 다시 이룬다
-. 라 또한 자체의 대칭구도를 주어 전반적 구성의 통일성을 보장하고 있다.
다음은 이 사진편집에 대한 설명글 사진문학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제 날에 천대받던 로동자가 시인으로, 공훈배우로, 작곡가로 되는 것은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김명희 동무도 로동속에서 자라나는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김명희 동무는 평양전기 기관차공장 조립직장의 조립공이다. 그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 조국 보위의 초소에서 근무하다가 얼마전 총을 용접봉과 바꾸어 들고 로동계급의 대열 속에 들어왔다. 그는 지금 26세밖에 안되는데 이미 여러 편의 음악 작품을 창작하였다. 즉 인민군 예술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은 <모범군인전사 박차돌>을 비롯하여 독창곡 <나의 일터>, <용해장에 우유차 행차했네>, 경음악곡<붉은 기호 조립자 풍경>, 남성독창곡<달려라 묽은기 전기차>등이다. 이 밖에도 그는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7차 전원회의 결정을 받들고 궐기한 근로자들의 투쟁모습을 형상한 독창곡<평양상품 쏟아진다>를 최근에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는 김명희 동무가 달성한 성과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그의 음악 수업의 경로를 물어보았다. 어린시절부터 무척 노래를 즐기던 그가 음악수업에 착수한 것은 조국보위 초소에 있을 때부터였다. 그가 입대하자 얼마지나지 않아 부대에서는 그의 음악적 자질을 발견하고 음악강습소에 보내 주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체계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되었으며 각종 악기의 연주법도 배웠다. 그가 음악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게 되자 생활의 기쁨과 랑만을 그대로 느끼고만 지낼 수 없었다. 그의 가슴에선 작곡을 해 보자는 충동이 파도처럼 설레였다. 그는 밤을 잊어가면서 작곡법을 배웠고 열번 스므번이고 실패해도 락심하지 않고 작곡수업을 계속하였다. 제대된 후 그는 불꽃튀는 보람찬 일터에서 자기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로동 속에서 자신이 직접 체득한 감정을 노래로 부르기 위하여 불타는 정열로 작곡을 계속하였다. 공장에서도 물질적 조건을 지어 주었으며 방조와 격려를 그치지 않았다. 조선 작곡가 동맹 중앙위원회 신인 지도부는 그를 작곡가 강습소에 받아들여 매주에 1차씩 전문적인 지도를 주었고 여러면으로 음악수업을 더 잘 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 주었다. 이리하여 김명희 동무는 높은 문화소양을 소유한 로동자작곡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전리마의 기세로 사회주의의 높은 봉우리를 향하여 내달리는 로동자들의 생활 속에서 새로운 선율을 찾는데 자기의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글 : 박상규>
ㅋ)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위한 투쟁시기: 1970년부터 1980년대 전반기까지로 한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제2차 7개년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기본과업은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입니다. 지금까지 수행해온 공업화의 성과를 세계발전의 추세에 맞게 더욱 고조시키자는 것입니다. 현대화 과업이란 구체적으로 종합적 기계화·자동화를 말하며, 주체화의 과업은 부문구조를 완비하고 원료토대를 강화하는 것을 말하며, 과학화란 경영활동에서 전자계산화·로보트화를 말합니다. 제2차 7개년 계획이 성과로 농업노동에서 손으로 하는 노동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북한경제의 이해를 위하여>
이때 부터는 김정일이 문예정책지도의 전면에 나서서 영화예술론, 종자론, 속도전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내고 영화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지도하는 시기이다.
종자론
종자론은 북한이 주체문예이론과 함께 독창적 문예이론이라고 자랑하는 것으로 주체문예이론이 미학원리라면 종자론은 예술창작에 임하는 실천강령이다. 여기서 종자란 작품의 사상 예술적 핵으로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기본문제이자 북한사회가 공동의이념과 가치를 규정하는 하나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종자란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가장 핵심적인 미적요소이자 사상적 요소라고 할수 있는데 이 두가지 요소중 사상성의 문제가 보다 중요한 것이다. 즉 종자의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님의 교시와 그 구현인 당정책의 요구에 맞는것이라고 못박고 있다.<북한의 이해, 230쪽, 통일연수원자료>
속도전
“속도전은 모든 사업을 전격적으로 밀고나가는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형식입니다.”
속도전을 벌인다는 것은 모든 사업을 전격적으로 밀고나가 최단기간 내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속도전은 전격전, 섬멸전의 원칙과 방법으로 최단기간 내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전투형식이다. 속도전의 본질적 측면의 하나는 그것이 전격전, 섬멸전을 기본 원칙과 방법으로 삼고 있는 전투형식이라는 데 있다. 속도전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업을 최단기간 내에 번개와 같이 빨리 해내는 전격전이다. 속도전은 소극과 보수, 침체와 답보를 허용하지 않고 맡겨진 혁명과업을 철저히 해내며 끝까지 수행해 나가는 섬멸전이다. 속도전의 본질적 측면의 다른 하나는 모든 사업을 최대한으로 빨리 밀고나가면서 그것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조장하는 것을 기본요구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속도전이 기본요구는 모든 사업에서 높은 속도와 질을 다같이 보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최단기간 내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하는 것이다. 속도전이 요구하는 속도는 가장 높을 질을 전제로 하는 가장 빠른 속도이며 속도전이 요구하는 질은 가장 높은 속도를 전제로 하는 최상의 질이다. 속도를 높인다고 하여 질을 낮추거나 질을 높인다고 하여 속도를 늦추는 것은 속도전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속도전이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형식으로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주체사상과 계속혁명사상을 구현한 가장 혁명적인 사업전개원칙이기 때문이다.<철학사전,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편>
1970년 1월 9일 김정일은 문예일꾼들을 불러 주체적문예사상연구모임을 발기한다.
<당결산총회에서 다 비판되고 총화되므로 따로 총화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전에 나쁜놈이 만들어 놓은 총화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작가/예술인들은 수령님의 교시를 자로하여 사고하고 창작하여야 하겠습니다. 수령님의 교시는 곧 법이며 지상의 명령입니다. 수령님이 교시에는 문예작품창작의 총적인 방향 뿐 아니라 세부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다 밝혀져 있습니다.>
<수령님께서 작품별로 교시를 주시는 것만큼 수령님의 교시 집행정형에 대한 총화는 작품별로 해야 합니다.>-1964년 예술영화촬영소에서 진행된 예술총화회의를 비판하며, ‘말공부만하였지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하며
<그때 반당,반혁명 분자들은 예술 총화회의를 저들의 음흉한 목적을 실현하는데 리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자유토론장이 되어버린 ‘미학총화’를 폐지해야한다며 <이제부터는 예술총화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1970년 1월 12일 오전 9시 주체적 문예사상연구모임의 개회를 선언 <앞으로 수령님의 문예사상연구모임을 실속있게 조직하면 전반적인 문예창작사업에서 큰 전환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조선영화 1992.11월호 18쪽>
이런 시대 배경속에서도 사진이 눈에 띄게 발전한 흔적을 보기는 힘들다. 1978년 5월 전국 제 21차예술사진전람회에 당선된 작품들을 살펴보자. 서명두의 작품 <새들이 날아든다>는 혁명의 도시평양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대동강에 새들이 날아가는 장면이다. 평양을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새들이 날아드는 생활혁신의 도시로 사회주의 건설의 모범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풍경사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상하리 만큼 한결같이 )순광을 씀으로써 역동성과 화면의 긴장같은 것은 보기 힘든 밋밋한 작품이 되었다.
류한인의 칼라작품 <아침노을>은 평양광장의 김일성 동상을 측면에서 찍었다. 오른쪽 1/3선에 위치시킴으로서 왼쪽공간을 여유있게 배치함으로써 아침노을이 눈부시게 동상에 비치는 장면이다.조명과 구성 화면의 긴장감등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윤재의<주체농법의 요구대로>는 머리수건을 쓴 두 여자 농업노동자가 온도계를 땅에서 뽑아올리면서 토론하는 장면인데 농사는 과학이다라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형상화에서 연출된 티가 드러남으로서 어색함을 떨칠수 없게 한다. 박태성의<뜨락또르운전기술을 배운다>나 로정빈의<더많은 전력을>등은 연출을 하여 사람들의 표정들을 짓게 함으로서 사살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생동감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ㅍ) 1980년대 후반기부터 현재까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제3차 7개년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물질·기술적 토대를 강화하기 위하는 목표와 인민생활수준을 높히기 위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공업생산 총규모에서, 그리고 강철, 화학섬유, 전력을 비롯해서 몇 가지 중요한 지표들이 목표량에서 미달되었습니다. 그밖의 다른 지표들에서는 목표량을 달성했습니다. 미달하게 된 원인은 우리나라 경제건설에서 아주 엄혹한 정세가 조성된 것 때문인데, 소련과 동구 나라들이 무너지니까 그 나라들과 맺었던 대외경제관계가 막히고 말았습니다. 또한 미국이 팀스피리트 합동 군사훈련을 하면서 군사대결로 나오는 바람에 우리나라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일정한 수준에 올라있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기만 하면 자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경제토대를 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1만톤 프레스, 대형 산소분리기를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냈습니다.”<북한 경제의 이해를 위하여>
1996년 영화예술에는 새로운 문예정책으로 70년대 속도전에 이어 실력전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북한 예술의 정체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실력전은 시대의 명작을 더 많이 창작하기 위한 결정적 담보] (홍국원)
김정일 동지께서는 고전적 노작 <문예부문에서 명작을 더 많이 창작하자>에서 조성된 정세와 당앞에 나선 혁명적 임무로부터 문예부문에서 어느 때보다 분발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생전의 뜻이 담겨있는 붉은기 정신과 <고난의 행군> 정신,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는 당의 혁명적 인생관이 철저히 구현된 작품, 우리 인민들을 더 힘있게 불러 일으키며 그들에게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과 낙관을 주는 명작을 더많이 창작할데 대한 혁명적 로선을 제시하시었으며 그 성과적 실천을 위한 과업과 방도를 전면적으로 밝혀주시었다.(…)
실력전의 된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현시기 당이 요구하는 명작 창작 전투를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근본문제 이다.
김정일 동지는 <시대의 요구, 인민의 요구와 지향을 반영한 명작을 많이 창작하기 위해서는 작가예술인들 속에서 실력전을 힘있게 벌려야 합니다.> 실력전을 벌린다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재능과 정열을 다 발휘하여 인민들의 사랑을 받으면 예술적 생명력이 있는 높은 사상성과 고상한 예술성을 가진 명작을 창작하도록 한다는 것을 말한다.
실력전은 말 그대로 실력을 겨루는 것이기 때문에 실력과 함께 남보다 앞서야겠다는 정열이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 당이 의도하는 실력전은 단순히 국내에서 자기들끼리만 하는 경쟁에 머물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과 견주어 보는 실력전이며 작가 예술인들 자체가 세게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예술인으로 될 것을 지향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실력전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 예술인들속에서 허송세월하거나 남의 그늘밑에서 살아가는 현상도 없애고 그들이 다 제구실을 하게 할 수 있다.(…)
실력전은 잘 벌리면 그 과정에 재능있는 작가, 예술인들도 많이 나올 수 있다.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자라난 많은 작가예술인들이 우리곁을 떠나갔으며 새세대들이 문예창작사업의 기둥이 되어 우리 문예의 운명을 떠매고 나가는 조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예술인들이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절박한 문제이며 당에 의해 교양 육성된 창작역량을 보존강화하여 문예부문에서 당의 업적을 고수하고 빛내기 위한 중대한 문제이다.
더욱이 당의 품속에서 주체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새세대들이 작가·예술인 대렬에 섰으며 마땅히 그들속에서 이름있는 작가/예술인들이 많이 나와야 주체교육의 정당성과 위대한 생활력을 뚜렷이 보여줄 수 있다.(…)
우리 문예가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수행에 적극 이바지하자면 무엇보다 당보의 사설과 같이 호소성이 높아야 하며 현실보다 앞서 가면서 혁명발전의 매시기, 매단계에서 동원적 역할을 해야 한다.
작가·예술인들의 실력을 정치적 식견과 창작적 기량이다. 우선 정치적 식견에서 실력은 표현된다. 우리 당이 창작을 단순한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혁명사업으로 보며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한 열렬한 애국자만이 진실로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우수한 문예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높은 정치적 식견과 넓은 정치적 안목은 우리 당의 정책적 의도를 깊이 파악하는 데서 생겨난다. 당의 정책적 의도는 시대의 요구, 인민의 의사와 요구의 집중적인 반영인 만큼 당의 정책적 의도를 제때에 깊이 파악해야 시대와 인민이 절실히 요구하는 의의있는 문제를 종자로 설정하고 가치있는 명작을 창작해 낼 수 있으며 혁명과 건설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실력은 높은 창작적 기량에서 표현된다. 작가·예술인은 당의 령도를 예술의 무기를 들고 기량으로 받들어 나가는 지식인들이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일찍이 민족문예의 흥망성쇄가 그 담당자이며 주인인 작가·예술인들의 기량수준에 크게 달려 있다고 보시고 문예사업을 영도하시는 첫시기부터 작가/예술인들의 기량을 높이는데 주목을 돌리시었다.
그중에서 중요한 문제는 당의 사상에 기초하여 형상의 대를 세울줄 아는 능력과 창작적 사색을 통하여 무르익힌 구상을 작품에 재치있게 형상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예술인들은 학습과 훈련을 꾸준히하고 기량발표회에도 적극 참가하며 자매예술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인류문예발전과정에 이룩된 우수한 성과와 경험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한다.
실력전의 요구에 맞게 많은 명작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자기실력을 높히는 한편 현실체험을 잘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중요한 문제는 당의 방침도 똑똑히 알고 현실에 들어가는 것이며 똑똑한 목표와 높은 탐구정신을 가지고 현실체험을 하는 것이다.(…) 현실체험을 수박겉핥기 식으로 하면(…) 구호식으로 외쳐대기만 하거나 현실을 미화 분식하는 작품밖에 내놓을 수 없게 된다.(그러기 위해선) 주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높이도록 조직지도사업을 짜고 들어야 한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전적로작 <문예부문에서 명작을 더많이 창작하자>에서 작품창작에 대한 지도에서 견지해야할 원칙과 방도, 문예부문 당 조직의 역할을 높일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 주심으로서 현시기 작품창작에 대한 지도체계와 방법을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더욱 강화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길을 환히 밝혀 주시었다.
참으로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독창적으로 밝혀주신 실력전을 힘있게 벌려 시대의 명작을 더많이 창작할데 대한 가르치심은 시대의 요구, 인민의 요구와 지향에 맞게 주체문예로 끊임없이 개화 발전시켜 위대한 수령께서 개척하신 주체 혁명 위업수행에 적극 이바지하게하는 근본방도를 명백히 밝혀주시고 그 성과를 확고히 담보하는 과학적이며 혁명적인 가르치심으로 된다.
2) 북한사진문화구조
1. 북한사진가 동맹
ㄱ) 조직
조선사진가동맹은 1946년 10월 창설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산하의 「북조선사진가동맹」으로 발족하였다. 그후 1953년 9월「문예총」의 해산으로 일단 해체되었다가 1961년 1월 22일 「조선사진가동맹」으로 다시 발족하여 같은해 3월 2일 창립된「조선문예총」산하 단체로 망라되었다.
사진가동맹 중앙위원회에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있다. 그 밑에 보도사진분과위원회, 예술사진분과위원회, 평론분과위원회가 있으며 지방조직은 없다. 이 중에서 보도사진분과가 사진가동맹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북한에서의 사진이란 결국 그 선전성 때문에 중요시 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진작가동맹은 수시로 ‘전국예술사진현상모집’ 등을 실시하여 당선된 동맹원들에게는 표창을 하고 동맹원이 아닌 사람에게는 후보맹원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맹]의 임무와 기능은 첫째 당의 노선과 정책 특히 사진분야의 시책을 사진가들속에 침투시켜 그 관철을 위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도록 동원하며, 둘째, 사진가들속에 김일성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사진가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양」강화에 기여하며, 넷째, 사진가들의 창작활동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지도, 통제하며, 넷째, 사진작가들이 공장, 기업소와 협동농장의 노동현장에 내려가서 근로자들과 로동을 같이하고 그들의 「노력투쟁」은 고무할 수 있도록 지도, 통제, 감독하고 다섯째, 사진가들의 기술수준과 자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과 지도사업을 하며, 여섯째, 「사진가동맹」 당위원회를 통하여 사진가들의 당생활을 지도 통제하는 것 등이다.
ㄴ) 활동
북한은 사진이 직관선전에 매우 효과가 크다고 평가하고, 사진분야에 큰 관심을 돌리고 있다. 사진분야도 순수사진작품의 창작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사진 제작이다.
김부자의 사진은 기관, 단체의 건물 내외는 물론 각 가정에 이르기까지 걸어야하기 때문에 연간 수십만개의 복사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또한 김부자의 활동을 찍은 사진들은 화보와 사보, 잡지들에 게재해야하므로「정성들여」찍도록 지도 통제하고 있으며 일단 사진 원본이 나오면 정무원 출판총국 검열부의 검열을 받아서 싣도록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재일동포들이 복송된 후 개인이 사진기를 소유하고 남기고 싶은 생활에 대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인화지와 현상약품들의 일반보급이 되지 않아서 마음대로 촬영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북한에서의 사진은 「정무원」문화예술부 직속인 「중앙사진제작소」에서 주로 만들어지는데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① 김부자 우상화 사진
김부자 가족들의 초상사진, 김부자 현지지도, 백두산 등 자연 배경업망, 군중대회 및 외국원수급 환영, 환송 행사시 집무실태 및 각종 집권행사시 과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찬양한 그림의 사진복사, 동상 및 「주체사상탑」을 비롯한 상징물, 전적지 및 사적지 선전사진 등
② 사회주의 건설 사진 : 평양사를 비롯한 주요도시 선전, 새로 준공된 공장, 기업소, 근로자들이 헌신적 노동장면, 모범노동자 농민 사진, 해외 선전용 각종 사진 등
③ 전투성을 고취시키는 사진 : 인민군의 무력시위, 교도대, 노동적위대 행진, 6.25시 인민군의 「전투위용」사진 및 그림 복사 등
④ 대남비방사진 : 반정부데모, 혼란사진, 미군만행사진 등
⑤ 북한사회찬양사진 : 복리시설등을 선전,
이같은 사진들은 사진전시회, 각종 박물관, 기념관, 전람관, 도서관, 구락부, 선전실 등에 공급되거나, 사보, 잡지, 화보 등에 이용된다.
<북한총람(1983∼1993) 사단법인 북한연구소 9679 94. 5. 3.판>
2. 사진이론
사진이론은 평론분과가 사진가 동맹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이론서나 논문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조선어를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설정 나름대로의 체계화를 위해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다음은 백과전서의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사진
빛이나 다른 복사선의 작용에 느끼는 물질을 리용하여 자연과 사회의 현상들을 기록하는 과정 또는 기록한 영상. 흔히 보는 사진은 사진기를 써서 필림에 빛을 쪼여준 다음 그것을 현상, 정착 등 공정을 거쳐 가공하고 인화지에 다시 찍어 만든다. 필림은 젤라틴용액 속에 은염(브롬화은, 염화은, 요오드화은)을 넣어 만든 사진유제를 필림지지체에 얇게 발라서 만든 것인데 여기에 빛을 쪼여주면 Ag+이온들은 빛느낌핵들의 주위에 몰려가 전자를 내여주고Ag원자로 된다. 그리하여 숨은 영상을 만드는데 이것은 Ag량이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진을 만들기 위하여 빛을 받는 필림을 현상액 속에 놓으면 Ag량은 대단히 빨리 늘어나 가려볼 수 있을 정도로 까지 된다. 빛느낌층에서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을 정착과정에서 완전히 빼버리면 음화사진이 된다. 이것을 인화지에 되찍은 다음 현상, 정착, 말리기 등 공정을 거쳐 사진을 만든다.
사람은 세계를 인식하고 개조, 정복, 지배해 나가는 과정에 생활과 사물현상을 생동하고 진실하게 수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랜기간 그림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써 보았으나 묘사기록에 대한 요구를 원만히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욕망은 18세기초 햇빛에 의하여 은염의 색을 변화시키려는 첫 시도가 나온 때로부터 100여년후인 19세기 20년대에 현상과정이 창안된 이후에야 비로소 실현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사진은 현대적 기술로서의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상과정을 받아들인 첫 사진이 은판사진인데 이 사진은 은(Ag)판에 요오드(I)김을 쏘여 요오드화은(AgI)을 만든 다음 거기에 사진을 찍고 그것을 수은김 속에 넣어 현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사진법은 질은 높았으나 촬영시간이 길었고 특히는 찍은 사진에서 촤우가 바뀌며 한번에 한 장의 사진밖에 만들 수 없는 결함들이 있었다. 이러한 결합들을 없애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첫 방법이 겉면에 요오드화를 형성시킨 종이로 음화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닭알 흰자위에 빛느낌물질을 넣어 만든 인화지에 옮겨 찍는 음화-양화법이었다. 이렇게 음화-양화법이 쓰이면서부터 사진은 실용성있는 것으로 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세기 70년대 젤라틴이 사진 유제에 쓰이고 여러 가지 엇모임을 바로잡은 렌즈들이 발명되어 새로운 사진기들이 쓰이면서부터 사진은 더욱더 그 질이 높아졌다. 이 시기 젖은 판사진법이 발명되고 1870년대초 브롬화은(AgBr)을 푼 젤라틴용액을 유리판에 발라만든 마른판사진법이 발명되면서부터 사진재료의 빛느낌성이 훨씬 높아지고 쓰기에도 편리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금증감법이 연구되어 은판법 당시에 비하여 빛느낌성이 수백만배에 달하는 고감도미립자 빛느낌물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토리피름의 완성은 사진기의 구조적발전에 획직적 계기를 열어 놓았으며 영화기술을 드디어 자기 발전의 길에 올려 세울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들은 사람들의 생활과 사물현상들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밖에는 기록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촬영대상이 가지고 있는 색을 그대로 사진에 옮길 수 없겠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욕망은 1935년 발색 깨우기법에 의한 여러층 천연색 사진법이 나오면서 실현될 수 있었다. 천연색사진은 색내기약들의 질을 높이고 이것들을 현상액속에 넣는 방법 또는 사진유제속에 넣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리하여 오늘에 와서는 매우 질이 높은 빛느낌재료들이 생산되고 있으며 렌즈의 질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자동화된 사진기들이 설계 제작 리용되고 있다.
이와함께 빛느낌 색소들에 대한 연구가 깊어져 사진을 찍어서 불과 수십초 안에 훌륭한 천연색사진을 만들 수 있게 끔 그 기술이 발전되였다. 이밖에 적외선, 자외선, 뢴트겐선 등에 느끼는 빛느낌재료들과 비은염사진재료들에 대한 연구가 깊어져 여러 가지 특수 사진기술들이 발전하고 있다. 뿐 아니라 사진재료들의 기록성이 높아졌고 사진유제의 종류가 많아져 사진은 과학, 기술, 체육, 문화, 군사 등 분야에서 여러 가지 형식과 방법들로 쓰이고 있다. 최근 우주 비행학의 발전에 따라 사진기술은 우주 개발에도 적극 리용되고 있다.
<깨우기> 빛이나 다른 복사선의 작용으로 사진재료에 생긴 숨은 영상을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만드는 처리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은 화학적으로 볼 때 빛을 받은 할로겐화은이 다시 은으로 환원되는 과정이다. 즉 환원된 은이 숨은 그림을 이룬 알갱이에 선택적으로 더 많은 은알갱이들이 모이게 하여 보이는 그림으로 되게 하는 과정이다. Ag++R1→Ag+R2+H+여기에 R1-현상제, R2-현상제가 산화된 형태이다. 이런 환원반응이 빛을 많이 받은 부분에서는 많이 일어나고 적게 받은 부분에서는 적게 일어남으로써 짙음새를 가진 사진이 만들어진다. 사진깨우기는 흑백사진에서 화학현상과 물리현상으로 나누며 기타처리방법과 쓰이는데 따라서 그리고 깨움액의 특성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눈다. 화학현상에서는 사진재료에 있는 빛을 받은 할로겐화은이 현상액속에 들어있는 환원제에 의하여 환원되여 깨워지며 물리현상에서는 사진재료에 생긴 숨은 영상에 현상액 속에 들어 있는 녹음성은염이 환원되여 덧붙는 방법으로 깨워진다. 현상액은 흔히 유기환원제로 만드는데 적당한 활성을 주기 위하여, 알칼리를,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아류산나트리움을, 흐림을 막기 위하여 브롬화갈리움을 덧 넣어 만든다. 환원제로는 흔히 지금까지 활성뿌리(-OH,-NH)를 2개 이상 가진 벤졸핵이나 나프탈린핵의 방향족 화합물을 써왔다. 대표적인 것들은 히드로키논, 아드롤, 피로카데킨, 피로카롤, P-아미노페놀, 메톨, 글리신 등이다. 무기현상 재료는 2가철의 싱아산 혹은 에틸렌디아민 태트라 토산염과의 착화합물 등을 쓴다. 천연색사진깨우기에서는 환원제에 의하여 금속은이 생기면서 동시에 천역색물감이 생긴다.
<정착> 사진재료를 현상액에 놓어 깨운 다운 빛을 받지 않은 할로겐화은을 물에 잘 풀리는 은염으로 만들어 빼버리는 과정, 즉 빛을 받지 않은 할로겐화은을 물에 풀어버림으로써 깨운 사진을 안정하게 고착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사진재료에 들어 있는 할로겐화은들은 물에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착액에는 이 할로겐화은들을 물에 잘 풀리는 착염으로 만드는 그러한 물질을 넣는다. 이 물질을 정착제라고 하는데 흔히 티오류산나트리움(Na2S2O3)을 쓴다. 정착액에는 정착제와 기타 덧넣는 약들을 넣는데 덧넣는 약으로는 보존, 산성화, 막굳ㅎ힘, 완층 등을 할 수 있는 것들을 쓴다. 정착 속도는 정착액의 농도와 온도에 크게 관계된다. 티우황산나트리움을 쓰는 경우 농도 20∼40%, 온도 16∼24℃에서 정착속도가 가장 빠르다. 정착이 끝나면 사진재료를 물로 충분히 씻어야 한다.
<후처리> 후처리 공정에는 물씻기, 말리기, 감력, 보력, 색넣기, 바래기 등이 속한다. 정착과정에 사진의 겉면에는 티오류산은착염이 남아있게 되는데 이것을 물로 깨끗이 씻어버리지 않으면 열이나 습기의 영향으로 분해되여 노란색이나 밤색으로 변하여 사진을 못쓰게 만든다. 물로 씻을 때 착염이 빠지는 속도는 지수함수적으로 변하므로 물온도를 높이고 저어주면 훨씬 빨라진다. 물씻기는 중성염용액으로도 한다. 물로 착염들을 완전히 씻어버린 다음 사진재료를 더운 바람 속에서 고르좁게 말린다. 인화지는 광택건조기에 넣어 말린다. 감력이란 산화제로 일부 은을 분해시켜 사진상의 농도를 작게 해주는 것을 말하며 보력이란 사진상에 은이나 수은 및 기타 화합물들을 덧붙여 사진상의 농도를 크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감력과 보력에는 그 특성에 맞게 여러 가지 약제들을 쓴다. 조색이란 중간정도의 회색영상을 색으로 물들여 보기좋은 사진으로 만드는 화학적 처리과정을 말하는데 조색법에는 현상액에 조색액을 섞어넣는 방법, 특수한 현상액을 쓰는 방법, 영상의 은을 류화은과 같은 착화합물로 만들어 색을 나타내는 방법 및 색을 띤 금속염을 가라앉히는 방법 등이 있다. 색소영상은 천연색 깨움 방법으로도 만들 수 있다. 바래기는 감력이나 천연색 깨움처리 및 반전깨움을 할 때에 하는데 흔히 과망간산칼리움이나 중크롬산칼라움 등을 쓴다.
<특성량> 사진의 특성을 표시하는 량, 여기에는 빛 느낌도, 농도, 대조도, 사진폭, 해상력, 선명도 등이 들어간다. 사진재료의 빛느낌도란 촬영대상을 정확히 사진재료에 찍기 위하여 필요한 빛의 량으로 특징짓는 값을 말하는데 흔히 빛느낌도 기준점의 사진농도에 대응하는 빛쪼임량의 거꿀수로 정한다. 지금 빛느낌도 기준점은 사진특성곡선의 흐림농도우의 농도 0.1을 택한다. 사진농도란 깨운 필림이나 인화지에 있는 사진영상의 검은 정도를 나타내는 량을 말하는데 흔히 광학 농도를 쓴다. 광학농도는 필림에서는 투명도의 거꿀수의 로그값(D) 여기서 D-빛농도, I-필림에 지쳐진 빛, I-그중 투과한 빛, -투명도이다)으로 표시되며 인화지에서는 되비침도의 거꿀수의 로그값(D=(I/R), R=(I/I) 여기서I-인화지에 비쳐진 빛, I-되비쳐나온 , R-도비침도이다)으로 표시한다. 사진에서 가장 밝은 부분과 흰부분의 비를 대조도라고 하는데 사진특성곡선에서 곡선의 직선부분이 수평축과 사귀는 각의 땅겐스(tan)값으로 표시한다. 사진재료의 대조도는 흔히 0.5∼6범위에 있는데 대조도가 0.5∼1인 것을 묽은 것, 2∼3인 것을 표준인 것, 4이상인 것을 굳은 것이라고 한다. 표준인 것과 묽은 것은 인물사진용으로, 굳은 것은 글자나 지도같은 것을 찍는데 쓴다. 사진특성곡선의 직선부분이 수평축에 던진 그림자의 크기를 사진폭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클수록 촬영대상의 각이한 밝기를 정확히 나타낼 수 있다. 인물이나 자연풍경을 찍을 때에는 사진폭이 큰 것을 쓰며 글자나 지도등을 찍는데는 사진폭인 작은 것을 쓴다. 해상력이란 사진재료가 얼마나 섬세한 부분을 갈라낼 수 있는가를 특징짓는 량을 말하는데 흔히 1mm구간안에 갈라볼 수 있게 찍은 선들의 수로 표시한다(선/0mm) 해상력은 할로겐화은 결정알갱이의 크기가 작을수록 커진다. 흔히 쓰는 보통 사진필림의 해상력은 50∼80선/mm이며 영화음악필림의 해상력은 55∼75선/mm, 복사필림의 해상력은 80∼140선/mm, 현미경 필림의 해상력은 200∼300선/mm이다. 선명도란 서로 다른 빛쪼임을 받은 부분의 경계를 사진재료가 얼마나 명확하게(예리하게) 나타내는가를 가르는 사진학적 개념이다.
3. 사진산업
사진산업은 우리와 달리 자립경제 건설노선에 따라 필름 등을 자체 생산하고 있다. 이는 87년 5월 조선영화 15쪽에 김정일이 부사필름공장을 현지 지도한 소식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팔름을 회수하기 위한 방법이 소개된 자료가 있다.
-버리는 필림에서 은을 회수하는 방법
안봉선 :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영화필림은 나라의 귀중한 재부입니다> 영화필림이 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필림은 기반과 감광층으로 되어 있는데 감광층은 감광성물질인 할로겐화은을 젤라틴에 분산시킨 사진유제를 발라서 만든다. 유제 속에 할로겐화은은 직경 0.02 – 0.03 미크론으로부터 수미크론인 미세한 결정 알갱이 상태로 존재한다. 영화를 촬영하고 현상하면 빛을 받은 부분의 할로겐화은은 환원되여 금속은상으로 되고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의 할로겐화은은 환원되지 않는다. 환원되지 않는 할로겐화은은 정착과정에 감광층으로부터 제거되고 필림에는 은상만 남아 있게 된다. 즉 흑백사진상은 은상인 것이다. 그러면 필림에 은이 얼마나 포함되여 있는가를 보기로 한자.
보통 생음화필림 1,000메터 속에는 은이 약 200그람정도 포함되어 있고 생양화 필림 1,000메터 속에는 80-90그람이 포함되여 있다. 그 중에는 정착 과정에 60∼70% 용해되고 30∼40%는 사진상으로 필림 남아있게 된다. 현상소와 복사공장들에서 정착액 속에 용해된 은을 전기분해하여 금속은 상태로 회수하고 있다.
필림에 사진상으로 남아 있는 은을 효과적으로 회수하는 문제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필림을 복사하여 보급망을 통하여 보급된 다음 회수하게 된다. 보통 예술영화 1편을 10권으로 본다면 필림은 3,000메터에 해당하게 된다. 그러면 다음으로 파필림에서 은을 회수하는 방법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파필림에서 은을 회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필림을 태워서 은을 회수하는 방법
*필림을 알칼리용액으로 처리하여 은을 회수하는 방법
*효소를 리용하여 회수하는 방법들이 있다.
이 방법들 중에서 첫째 방법과 둘째 방법은 공해를 동반하고 기반을 회수할 수 없으므로 셋째 방법 즉, 효소를 이용하여 회수하는 방법이 가장 많이 리용되는 방법이다. 효소를 리용하는 방법은 기반을 회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림기반을 손상하지 않고 재생할 수도 있으므로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효소를 리용하여 어떻게 은을 회수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지만 필림은 기반과 제라틴 속에 미세한 은분말이 분산된 감광층으로 되어 있다. 효소는 감광층 중의 젤라틴을 가스분해한다. 젤라틴은 효소에 의하여 분해된 결과 미세한 은 알갱이들이 젤라틴 속에서 유리되여 용액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효소배양은 강냉이대두박살겨 젤라틴을 원료로 하고 일정한 온도 페하 습도조건에서 진행한다.
파필림에서 은을 회수하는 공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0.2-0.5% 효소용액을 만든다. 이때 용액의 온도는 45-50도로 보장한다.
다음 800리터의 용액에 360킬로그람의 필림을 가늘게 짤라서 담근다
*다음 약 45분동안 젓는다.
*다음 용액과 필림기반을 분리한다. 효소활성을 측정하고 용액속에 가늘게 짜를 필림을 또 다시 첨가한다. 우의 조작을 반복한다.
*다음 필림기반을 세척하고 건조하여 다시 리용한다.
용액을 두었다가 우에 뜬 액과 침전물을 분리하던가 원심분리한다. 이 침전물 속에 은이 포함되여 있는데 이것을 건조시켜 미분말 상태의 은으로 회수하든가 녹여서 덩어리 은으로 만들면 된다
순수한 은을 얻으려면 질산에 용해하여 전기분해하면 된다
영화필림을 다루는 사람들은 필림이 곧 은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필림을 아끼고 절약하며 버리는 일이 없이 모조리 회수하여야 할 것이다.
3) 맺음말
북한의 사진문화는 자립적 산업의 토대와 자체의 통일된 문예이론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진문화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용이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보다 많은 연구가 진행될 필요를 느끼며 북한 사짐문화의 본성에 대한 애초의 질문은, 통일 사진문화를 연구전개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찾아볼 것을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