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3월17일까지의 기록

펌] 국보법 위반혐의 이시우 작가 항소심도 무죄 민중의소리 2008/12/30 1489
국보법 위반혐의 이시우 작가 항소심도 무죄
민변 “공안몰이에 대한 사법부의 제동”
윤보중 기자 / bj78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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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사진작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와 관련 항소심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는(박홍우 재판장) 30일 ‘민통선 평화기행‘의 저자인 이시우 사진작가의 국가보안법위반(자진지원,금품수수)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검찰이 주장한 국보법 위반혐의는 공군, 해군, 미군 기지를 사진 촬영하고 인터넷에 이를 게재한 점, 홈페이지와 통일뉴스에 유엔사, 핵무기, 남북관계 등에 관한 생각을 게재한 점, 한호석 씨의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점, 한통련.조총련 간부들을 외국에서 만난 점 등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군사기밀의 지정절차와 비공지성, 이를 게재하는 과정에서 이적 목적성 등을 엄격히 구분했다. 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해서도 한호석 씨의 글을 이적표현물로 인정했지만, 그 소지 목적에 대해서는 이적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일본에서 개최한 6.15 행사에 참여해 조총련 관계자들을 만난 것도 이적 목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 직후 이시우 작가는 기자회견에서 “자유에 대한 반대는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관성”이라면서 “관성을 통찰하지 못하면 법은 구속이 되고 억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평화적 감시활동을 냉전적 시각으로 판단하면서도 원심대로 무죄 판결을 내린것에 대해 “반은 관성, 반은 통찰적인 판결”이었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권정우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냉전의 유물이 남아 있는 파노라마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상)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됐고 그렇기 때문에 국내외로부터 주목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판결에 대해 “대인지뢰 감시를 평화적 감시활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한호석 선생의 글을 이적표현물로 보았다”며 일부 한계를 지적하고 “원심 판결이 맞았다고 판단한 것은 소중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또한 권 변호사는 “예술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면서 실정법상 국가보안법을 제한적으로 해석한 판결”임을 강조하고 “검사가 상고하더라도 항소심까지 승소했고, 대법원에서도 이 같은 엄격성의 잣대는 유효하다”며 낙관적 전망을 제시했다.

민변 미군문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경욱 변호사도 이번 판결에 대해 “정부의 공안몰이에 타격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서 이는 “사법부의 견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강화송년기행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김은옥 2009/01/03 732

반가운 손님들과 항소심 무죄선고를 예고라도 하듯 행복하고 뜻깊은 송년모임이 되었습니다.

2008년은 모두가 다사다난한 한해였지만, 이시우작가를 비롯한 저희 가족모두 참으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그런 잊지못할 한해가 되었습니다.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모든 가정에 행복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펌] 이시우작가에 대한 국가보안법 무죄선고를 환영한다 민 변 2009/01/06 730
[논 평]

이시우 작가에 대한 국가보안법 무죄선고를 환영한다

오늘 서울고등법원(재판장 박홍우)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시우(본명 이승구) 평화사진작가에 대하여 1심과 마찬가지로 공소사실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가보안법 상 국가기밀이 되기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기밀로 분류되고 일반적으로 공지되지 아니한 사실로서, 그 내용이 누설될 경우 국가안전보장,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해할 실질적 가치를 요한다고 전제하고, 그런데 공소사실 중 미군기지 사진, 민통선 사진 등은 공지의 사실로서 국가 기밀이 되지 아니한다며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나아가, 일부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 이적표현물로 인정된 것이라 하더라도 피고인이 평화사진작가로서 남북간 교류 내지 평화적 통일을 주장하고, [민통선 평화기행] 등을 집필하는 등 합법적 창작의 범위 내에서 활동한 것이 인정된다면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다는 이적목적을 부인하였다.

모임은 그동안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왔지만, 법원이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 이적목적 등을 대법원 취지에 부합하여 엄격히 해석, 적용한 것은 당연한 것이면서, 한편 실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실천연대, 사노련 등뿐만 아니라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공안정국의 거센 칼날이 드세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무죄판결은 검찰의 투망식 기소를 견제하고, 나아가 시민의 생각과 행동을 국가가 검색하고 지정하려는 국가주의적 발상에 대하여 일침을 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법과 원칙]을 일면 존중하면서도 특정 정치권력에 편승한 [법과 원칙]의 적용을 반대한다. 또한 국가가 나서서 시민의 생각과 행동을 지시, 관찰, 처벌하려는 국가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예술,창작의 자유, 그리고 평화적 생존권에 기반한 평화감시활동을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적 잣대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고양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이번 법원의 무죄판결을 환영한다.

2008년 12월 30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백 승 헌

양심수 이시우씨에 대한 무죄선고를 환영한다^^ 앰네스티한 2009/01/08 644

http://cafe.naver.com/amnesty2238.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798

한국전쟁 중 서산에서 1865명 집단학살 솔향 2009/01/17 916
진실화해위원회는 16일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전쟁 중 서산군에서 1865명이 주역혐의로 군경에게 집단학살당했다고 했다.

한겨레 신문기사를 올려놓습니다.

한겨레홈 > 뉴스 > 사회 > 사회일반

“한국전 서산·태안 민간인 2천227명 군경에 희생”
진실화해위, 5곳 희생사건 규명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16일 “한국전쟁 때 서산ㆍ태안 등 5개 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에서 모두 2천227명이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가 이번 규명한 사건의 지역은 서산ㆍ태안과 순창, 불갑산, 담양ㆍ장성, 함양 등 5곳으로 모두 한국전쟁 무렵 군경의 부역자 색출 및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민간인이 집단 희생된 사건이다.

충남 서산ㆍ태안사건은 경찰과 치안대가 1950년 10월부터 3개월간 이 지역 부역혐의자 1천865명을 희생시킨 사건으로 민간인들을 3등급으로 분류해 `처형이나 경찰서 이송’ 등급을 받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즉결 처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지금까지 규명된 사건 가운데 단일 사건으로는 희생자 규모가 가장 크다고 진실화해위는 설명했다.

특히 당시 경찰은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세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과 우익단체가 주축이 된 치안대를 혐의자 연행과 취조, 분류 과정에 참가시킴으로써 감정적 요소가 개입됐고 무고하게 처형된 민간인이 많았다고 진실화해위는 전했다.

전북 순창사건은 국군.경찰에 의해 195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최소 129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사건으로 희생자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이 전체의 48%에 달하는데, 거동이 불편해 피난을 못 가고 마을에 남아있다 변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군경은 가족 전원을 몰살하거나 희생자의 귀를 잘라 빨치산 토벌 전과로 보고하는 잔혹성을 보이기도 했다. 생존자 조모씨는 “총을 두발 맞고 쓰러져 있었는데 군인들이 내가 죽은 줄 알고 오른쪽 귀를 잘라갔다”고 진실화해위에서 진술했다.

1951년 2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에서 주민 90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불갑산 사건에서는 군경이 임산부를 사살하거나 마을에 남아있던 노인의 집에 불을 질러 살해하기도 했다.

또 담양ㆍ장성사건은 1949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 지역 민간인 57명이 경찰 특공대와 의용경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경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해를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또 1949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경남 함양지역에서는 군경이 86명의 민간인을 빨치산과 협조, 내통했다는 이유로 강제연행해 사살했다고 진실화해위는 전했다.

진실화해위는 “5개 사건에서 군경은 노약자를 살해하거나 희생자 귀를 잘라 전과로 보고하고 집에 불을 질러 주민을 소사시키는 등의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며 “공식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군경에 대한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국가에 권고했다”고 말했다.

이시우기사-구마모토니치니치신문熊本日日新聞2008.11.22 이시우 2009/01/21 624

교토통신편집위원인 石山永一郞씨가 취재한 특집기사를 구마모토니치니치신붕에 ‘아시아 태평양의 성조기’(하)란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한국노총통일선봉대 노동자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의 스케치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정보자유법에 따라 기밀해제한 자료를 입수하여 한국과 오키나와에 열화우라늄탄 300만발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과 국가보안법으로 체포 구속되었다는 내용등을 소개한 후 한국에서 주한미군주둔에 대한 여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중앙일보여론조사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철기교수의 분석과 무건리에서 주민들과 싸우고 있는 평통사 김종일처장의 인터뷰도 실렸다.

이시우기사-고베신문神戶新聞2008.11.20 이시우 2009/01/21 681

교토통신편집위원인 石山永一郞씨가 취재한 특집기사를 고베신붕에 ‘신 전쟁과 평화’(하)’란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같은 내용이 구마모토신문에도 실렸다.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한국노총통일선봉대 노동자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의 스케치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정보자유법에 따라 기밀해제한 자료를 입수하여 한국과 오키나와에 열화우라늄탄 300만발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과 국가보안법으로 체포 구속되었다는 내용등을 소개한 후 한국에서 주한미군주둔에 대한 여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중앙일보여론조사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철기교수의 분석과 무건리에서 주민들과 싸우고 있는 평통사 김종일처장의 인터뷰도 실렸다.

강화 기독교사회주의자 – 권충일 [4] 솔향 2009/01/24 1076
교동선교 100년사(교동교회연합회, 1999년)에는 1899년에 홍의교회 교인 권신일에 의해서 감리교가 전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열정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로 인해 인사리의 방마리아, 민다비다, 황초신, 황순경, 황한신 등이 예수를 믿었고 읍내리와 서한리에도 신앙인이 생겼다. 이후 그는 원주과 부평지역을 선교했다. 때로는 굶주림과 추위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 말로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1919년을 전후로 권인일 등 3형제가 실종되었고 막내 아들 권충일만이 생존했다.

오늘은 권충일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는 한국전쟁중 인천에서 군경에게 학살되었다. 목사의 아들, 그것도 한분 하나님만 믿겠다고 호적 이름도 바꾼 신앙인 권신일의 아들, 권충일이 좌익으로 살해되었다.
권충일은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이 말은 “기독교인이 사회주의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권충일은 1905년 강화군 교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목회지를 옮기면서 영등포, 인천 화수리에서 살았다. 그는 1921년 배재고보를 입학했고 1926년 졸업한 후 협성신학교(감리교 신학대학)를 입학했다. 배재에 다닐 때 그는 야구를 했고 이후 화수리에서도 야구부를 설립했다. 그는 유도 5단으로 운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했다. 인천 체육회를 만들 때는 내리교회 교인 이보운, 박남칠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25년까지는 하기성경학교 간사를 맞는 등 교회 청년으로 활동하지만 그의 부친이 사망한 후인 1927년에는 인천지역 청년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29년에는 인천청년동맹의 회장으로 할동했다. 1929년 이승엽은 권충일을 인천 좌익운동의 리더로 인정했다. 당시 인천신간회 회장인 곽상훈, 인천청년회장 권충일 등 신간회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1931년 인천신간회 해소운동을 전개했고 이후 블라디보스톡으로 도피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이후 인천 원산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했고 체포된 후 1935년에 3년을 선고 받았다. 1938년 이후 일제 총동원령에 의해 몇번의 연설을 했다. 이후 1940년 전후로 태화관에 있는 기독교서회에서 책을 팔면서 선교사 통역을 담당했다.
해방 후 인천의 민전에서 활동했고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한국전쟁 중 부역혐의로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권충일은 북한에 부역한 것은 없다. 다만 부역을 했다는 혐의와 이전에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혐의만으로 살해된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떤 신앙인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단지 그는 민족의 수난기에 양심적인 기독교인이 걸어온, 현재는 그 역사를 찾아보기 힘든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단초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면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민족의 수난기(일정시대, 한국전쟁)에 그를 통해 그와같은 무리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구의 최문식, 서울의 이만규, 최탁, 김창준, 양평의 여운형, 여주의 최영래, 평창, 인천, 김해, 수원, 강화 등에서 이런 사람들은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대개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신간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 건준, 민전, 근민당 등에서 활동하다 전쟁 중 보도연맹원이 된다. 그리고 이들은 전쟁 중 부역자로 처형되거나 월북을 하게 된다.

권충일 그는 아버지 권신일처럼 매우 희생적이며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처 황감실(황정숙)은 늘 그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며 살았고, 그로인해 집안의 가난은 해결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1919년 3.1운동은 기독교의 독립운동이 민중과 민족에게 희망을 주어지만 자기만족에 빠지고 있었으며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친일화 되고 있었다. 따라서 권충일은 다르 기독교 청년들처럼 이 문제에 갈등했고, 민족의 독립과 평등사회를 위해 사회주의의 물을 먹는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뿌리박힌 사람이다. 예수의 사랑을 어릴 때부터 권신일과 어머니 브르스길라로 부터 배웠다. 팔레스타인의 민중을 사랑한 예수의 사상이 몸에 베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더이상 조선의 미래에 대안을 주지 못할 때 기독교에서 나와 사회주의를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체포후 온갖 고난을 당할 때 그는 다시 엄마의 품과같은 신앙의 품으로 잠시 돌아갔다. 1940년 전후로 추정된는 사진(선교사들과 함께 촬영)을 보면 20~30년대에 찍은 사진과 달리 근심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지만 자신에게 부끄러웠던 그는 교회에서 잠시 쉴 곳을 찾았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뿌리엔 여전히 신앙이 남아있었다는 증거였다.
이른바 양심적 기독교인들, 혹은 기독교사회주의자들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고독한 인생을 산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결국 일제 말기에 일본 총도부, 친일파, 친미 사대주의 목사, 선교사 등에 의해 제거 되었다. 해방 후 친미 사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이들의 뿌리를 흔들었고, 전쟁은 이들의 씨를 말렸다.

오늘날 기독교가 미국을 마치 자기의 조국인냥 미국기를 들고 예배를 들리고 신학교나교회나 친미주의 방공주의로 꽉찬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기독교인들이 일정시기에 그리고 해방과 전쟁기에 제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라진 기독교인들, 사라진 역사 정말로 복원하고 싶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권충일, “한분 하나님께 충성한다”라는 의미의 이 사람의 역사를 복원하고 그 역사를 배우는 것이 강화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솔향 [2009/02/07] :: 유경근은 강화근현대사를 연구하는데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전쟁 이후에도 생존해 있었으므로 전쟁과관계된 솔직한 이야기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유경근의 후기 모습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월곶리 노인들과 손자들을 만나고 싶은데 여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솔향 [2009/02/07] :: 제적등본 상에 유두희의 본적은 월곶리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권평근은 다소 복잡한데 어머니와 관련된 사람들이 월곶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권평근의 조부는 충청도에 살았는데 그의 조모가 어린 아버지를 데리고 팔미도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후 권평근의 아버지는 전등사에서 생활했고 이후 양도면 능내리에 정착햇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이동휘가 서립한 보창학교의 후신인 합일학교를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학교는 조산교회와 흥천학교에 있었는데 아마 조산교회에 있는 학교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1919년 이후 조산교회 엡웟청년회 임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조산교회의 보창학교(합일학교)는 이동휘와 의형제인 윤명삼이 세운 것입니다. 윤명삼, 이동휘, 유경근은 강화에 보창학교를 세울 때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이시우 [2009/02/07] :: 권평근 유두희 류경근등이 모두 월곶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했습니다. 한강하구 역사에서 월곶의 의미는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유경근, 오태식등이 전쟁전후 우익청년단체가 되는 과정이 여전히 궁금합니다.

이시우 [2009/01/27] :: 참으로 귀한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동휘를 비롯하여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문제는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역사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이시우기사-사카이심보(세계신보)2009.1.21.수요일 이시우 2009/01/27 638

포토저널리스트 토요타나오미씨가 2009년 1월21일 사카이심보에 게재한 열화우라늄탄반대운동과 관련된 내용의 기사입니다.

김석영 – 비운의 레슬러 솔향 2009/02/01 1059
일제 강점기 인천청년들은 청년회, 노조, 운동 등을 통해 활동했습니다. 인천청년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인천연맹이 해산되고 1927년 인천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 당시 인천청년동맹의 중심 축 중에 하나는 인천 신화수리 청년들이었다. 화수리의 중심인물은 강화 출신의 권충일이었다.

권충일, 이보운, 갈홍기 등은 인천출신으로 배재학교를 다니던 인배회 회원이었다. 인천의 상당수 청년들은 야구, 유도, 레스링 등을 연마했다. 이보운은 배재학교를 다닐 때 강타자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당시 레스링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은 김석영이었다. 김석영은 해방후 최초로 열린 런던올림픽에 참석했다. 이 올림픽에는 3명의 레스링 선수가 참석했는데 그 중에 김석영은 라이트급으로 참석해 5위(?)에 입상했다.

그는 매우 인격적이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이자 후배인 배00은 그는 의협심이 많고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당시 인천의 운동가들은 신체를 사용하는 운동 뿐 아니라 진정한 민족의 주권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위한 운동도 열심이었다. 그는 해방 후 민족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자신의 집을 모임장소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인천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의협심과 힘없는 사람들을 도로보던 그의 평소 습관대로 고문으로 인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군함에 태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김석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의 제자는 김석영이 덕적도 인근에서 군인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김석수(가명)도 같은 말을 했다. 문서도 이를 확인해 주었다.

해방 후 최초의 올림픽이었던 런던올림픽에 태극기를 들고 참여했던 김석영은 2년 후 인천 앞 바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인사리 협성회와 초기 교동교인(황초신, 황순경, 황한신, 민다비다) [1] 솔향 2009/02/13 1162
인사리교회 최초 교인은 민다비다, 방마리아, 황초신, 황한신, 황순경이다.

이들의 신앙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방마리아는 똥물을 먹으면서까지 신앙을 지켰고, 이후 온갖 고통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소천했다.

민다비다는 그가 늘 부르던 찬송 처럼 “불같은 시험많으나…” 그것을 이기고 산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은 한으로 꽉차 있었으나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승화시켰다. 민다비다만 생각하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양반집의 맏며느리로 시집가서 1951년 돌아가실 때는 몸하나 누일 곳이 없어서 주관진 장로 소유의 산에 묻혔다.

민다비다의 남편인 황초신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180도 다른 인생을 사셨다. 그는 befor와 after가 분명히 달랐다. 전에는 일가 사람이 설날 절을 하러 오면 마당에서 절을 하고 가게 했을 정도로 교만했지만 후에는 동네 사람들과 친척으로 부터 온갖 하대와 질시를 받으며 교회를 다녔다. 그는 읍내리에 있는 교회를 갈 때 돌에 맞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의 전도생활을 돕기위해 직접 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황순경은 황초신의 친 동생이다. 4형제 중 2째가 황초신이었고 4째가 황순경이었다. 황순경과 그의 아내 전도부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집안이 최후까지 인사리의 신앙인으로 남은 것은 사실이다. 황초신은 백부의 양자가 되어 제적등본상에는 순경이 친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황한신, 본명은 황점익이고 황봉익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황한신은 민다비다, 방마리아, 황초신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했고 1902년 존스선교사와 함께 겔릭호를 타고 하와이 이민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이후 권사로 전도사로 교동에서 활동했다.이 사람도 황초신과 가까운 집안의 사람이었고 그의 조카벌 이었다. 그는 고구리의 방희상과 함게 1940년대 까지 교회를 지켰던 교동교회사의 핵심적 인물이다.

황순경의 형수가 민다비다이고 그의 형이 황초신이다. 황초신의 아버지 황혁주는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이름은 1남 우정, 2남 우만(초신), 3남 우경, 4남 우벽(순경) 이었다. 이들 중에 우정의 처와 며느리 전씨(진익의 처, 권사), 우만(초신)과 민다비다와 아들 황태익과 손자 손녀(황순임, 방희혁의 처), 4남 우벽(순경)과 처 한씨(전도부인)과 아들 황화춘 황화인 황문익과 황문익의 처와 자녀들은 기독교인이었다. 3남 황우경과 아들 기익 며느리 한씨 손자 인광 인천 인광은 기독교인이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황한신(점익, 봉익)의 아들 인춘은 점익의 형 범익에게 양자로 들어간다. 인춘의 아들이 용환인데 연희전문대를 졸업하고 기독교인이었으며 협성회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황용익의 딸 황경림과 황숙림이 기독교인인데 이들은 남로당원 황인섭의 동생들이지만 기독교인들이었다. 특히 인사리 교회가 용익씨의 마당에 있었고 황숙림은 늘 찬송을 부르며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1남 우정, 2남 초신, 4남 순경의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고 이들은 최소 한국전쟁 전까지 인사교회의 중심적인 기독교인들이었다. 일정시대 때 협성회 소속이었던 황시익 등에 의하면 인사리에는 협성회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18세 이상 35세 이하의 인사리 청년들은 모두 협성회에 가입되었고 회장은 1년에 한번씩 새로 임명되었다고 했다. 이 곳에서는 안중근 등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는 연극을 하는 등 민족의식이 분명했다고한다. 특히 황인식은 연백에서 공연되었던 ‘고독한 사람’이라는 연극을 보고 그대로 외어서 대본을 적었고 인사리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협성회는 황시익, 황부익등이 주도했으며 주로 황화춘의 집에서 모였다고한다. 이곳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협성회회원들이 회의를 했다고 한다. 황화춘은 교동의 최초교인 황초신의 조카이고 황순경의 아들이자 인사교회의 황화인 장로의 형님이며 월북한 황문익의 장형이다.

협성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해방 후 협성회 회원이었던 황시익도 그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감리교인과의 관계는 부정할 수 없다. 인사리의 협성회에 가입된 청년들은 한국전쟁 당시 군경과 특공대에게 모두 집단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 학살된 사람은 교동의 최초 감리교인인 황순경 권사의 처이자 전도부인인 한씨와 황화춘, 황문익의 처(박씨), 황문익의 딸들과 초신의 형 우만의 며느리 전씨(권사)와 황인태와 가족, 초신의 동생 우경의의 아들 기익과 가족이다. 또한 50년 이상 교동교회를 지켰던 황한신의 손자 황용환과 황용익의 딸 황숙림과 황경림. 그리고 황초신의 손자 사위 방희혁과 희혁의 형 방희상(교동교회 권사)과 아들 방문기 등이 희생되었다.

국경과 특공대에게 살해된 기독교인들 중 최소 10여명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특히 인사리 교회는 1899년 감리교가 전파된 후 교동교회의 중심을 이루어왔던 인사리 교인과 해방 전후 교회가 가장 어려운 시기 교회를 지켰던 방희상 권사 등의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함으로써 교회의 구성원들이 확연히 달라졌다. 이후 인사교회는 자취를 감추었고 교동교회의 교인들은 피난민과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지역 주민들로 바뀌었다.

민다비다는 1951년에 사망했다. 그는 알콜중독이 된 큰아들 황태익과 이화여전을 다니던 큰 딸, 작은아들과 그의 가족이 질병으로 모두 죽는 고통을 겪었고 전쟁 당시에는 자신이 소개한 손녀 사위 가족, 남편의 형과 동생들의 가족이 몰살당하는 경험을 했고 자신과 50년을 함께 신앙생활해온 한신의 손자와 자신이 전도한 황숙림 형제의 죽음을 보면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헌신과 희생으로 상징되는 초기 교동교회 신앙인들의 후손들은 한국전쟁 당시 집단 살해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초기 신앙인들의 희생과 헌신은 일제강점기 그 후손들에게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을 갖게 했고 이것이 당시 민족해방의 대안인 진보적 사상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문제가 전쟁 중 희생의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우 [2009/02/14] :: 놀라운 기록입니다. 3.1운동을 평가하면서 중국공산주의자 진독수가 기독교를 경시하는 버릇을 버리자고 호소한바 있습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전통을 다시 정립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죽산을 모독하지마라!-김제영 [1] 이시우 2009/02/27 1130
竹山 조봉암을 모독하지 마라!

김달호가 친일을 했다고???

청주기별 김제영 객원논설위원(소설가, 미술칼럼리스트)

“도대체 미를 추구하는 예술인의 옷차림이 그게 뭡니까? 김선생 처음 만났을 때(2000년) 첫 인상이 어땠는지 아세요?”

“어땠는데요?”

“앞이는 빠졌죠. 옷차림은 엉망이죠. 집도 절도 없는 독고노인인줄 알았어요. 살만치 살면서 그게 뭡니까? 제발 치과에 먼저 가세요”

그렇지 않아도 차일피일하던 차였기에 졸다가 얼음물 끼 얹어진 기분으로 앞이를 해 넣었다. 내 몰골이 그렇게 추례했단 말인가? 얼마나 불쾌감을 주었을까. 그래서 요즘에는 집을 나설 때 거울을 한번 들여다본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급히(기차 시간을 놓칠까봐)윗도리를 갈아입기도 한다. 그럴때면 우리 모임의 좌장격인 통일연대 상임고문 전창일은 ‘이제 예술가다와요!’ 해서 좌중을 웃기기도 한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느낌을 솔직히 지적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게 바로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의 용기이다.

10월 중순께였을까. 매목요일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제주통돼지집(게이트웨이타워 맞은편 02-753-8833)으로 가는 남산길을 부지런히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반색을 하며 내게 다가오고 있다. 4월혁명회 한찬욱 사무처장이다.

“선생님 안 계셔서 어쩌나 했는데, 여기서 뵙게 되어 천만다행입니다.”

“왜 무슨 급한일이라도….”

“네 지금 제주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다른 분들의 동의는 다 얻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서명해주십사 해서요.”

“뭔데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서 김달호 선생님을 그 명단에 올린다지 않습니까.”

“에이, 한선생도 … 그런 농담이 어데 있어요?”

“농담이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면 그들이 무슨 몽유병에 걸리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한선생이 너무 많은 일거리에 ?기다 보니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아요. 친일 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있어요. 양심과 지성, 논리성으로 사물을 진단하는 그의 형안은 크리스탈보다 투명해요. 그가 있는 곳에 실수가 있을 수 없어요. 임헌영 교수를 믿듯 한 선생도 믿으니깐, 서명날인을 하긴 하는데 침착하게 탐문해보세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편찬위원회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게요. 그러니 다시 잘 알아보세요.” 하고 한찬욱 처장과 헤어졌다. 통일을 지향하는 행사마다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그의 짐이 너무 무거운데서 발생한 착오려니 생각을 하며 회합장소에 들어섰다. 매주 그러하듯 전창일선생은 내게 컴퓨터에서 뽑은 나의 칼럼(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내가 쓰고도 누가 뽑아주지 않으면 읽을 수가 없다)을 건네며 “김선생, 이번에 꼭 다루어야할 칼럼거리가 있어요.” 진지한 표정이다.

“뭔데요?”

전창일은 김달호선생의 친일인명사전명단 등재에 관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방금 한찬욱 처장을 만났는데, 그럼 사실이란 말이군요.”

“큰일입니다. 북한은 친일을 청산했습니다. 남한도 늦은 감은 있지만 친일인명사전정리는 북한에 버금가는 정신적 기강확립의 위대한 성업이라고 늘 그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는데, 이건 큰 과오입니다.”

“물론 칼로 무 베듯 친일인사를 가려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김달호선생이 이 나라 민주화 운동에 솔선수범 앞장을 섰던 일은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습니까? 임헌영 교수가 관여하는 곳이, 그 곳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심사위원이 누구입니까? 혹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폄하하기 위한 공작이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심사위원들이 쟁쟁한 서울대 출신 엘리트학자들이에요.”

“뉴 라이트도 서울대 출신학자 교수들 아닙니까? 서울대 출신이라고 믿을 바 못돼요. 도대체 김달호 선생을 친일로 단정한 심사기준이 뭡니까?”

“일제 때 판사였다는거죠.”

“김달호판사의 부당한 판결로 피해를 입은 피고가 고발을 한 일이 있습니까?”

“웬걸요. 김달호 선생이 청진 지방법원판사 재직시 <조선에서는 돈도 일본인이 벌고 총독도 하고 심지어 도회의원까지 일본인이 하려하니 그렇다면 조선인은 해먹을 것이 무엇이 있나...> 라는 항일발언으로 구속 기소되어 구형된 도회의원후보자 이씨에게 무죄 석방한일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일본인 상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인에게는 일본인과 차별이 갈 정도로 판결이 너그러웠습니다. 그래서 미운털이 박힌데에다 창씨개명을 비판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반일사상이 노출되어 늘 요시찰인물로 미행당하고 좌천되고 경찰에 가 조사받고 끝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사표를 던졌습니다. 변호사로 항일투사를 변론이나 하자는 생각에 변호사 개업을 신청했으나 3년간이나 허가가 나지 않았었습니다. 2차 대전 패전될 무렵에야 허가가 나왔죠. 김달호 선생은 합법성을 최대로 활용, 항일사상을 고취한 분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했습니다. 김달호 선생은 6.10만세 광주항일휴학동맹 등 그리고 1934년 일본 요꼬하마 전문학교(가나가와 대학의 전신) 재학 중에는 전국적인 전문대학생 연설대회에 평화와 노동자라는 연제로 참여하였고, 이 연설에서 조선안의 일본군인을 살인노동자로 규정하고 조선에 있는 살인노동자들은 모두 물러가야 한다라고 역설하여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자퇴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깐 김달호 선생의 반일사상은 청년기에서 해방정국의 평화통일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김달호선생이 친일을 했다면, 이승만 박정희 패거리들과 떵떵거리고 영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김달호 선생이 민주화 투쟁으로 투옥되고 박정희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 딸 들 중에서 현재 조국을 배반한 자가 있습니까? 박근혜 보십쇼. 그녀의 외할어버지는 그 곳에서 주재소후원자였습니다. 일본소장이 부임하면 맨 먼저 육대감(육영수여사 父 )에게 큰 절을 했답니다. 아버지(박정희)도, 외가도 친일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기에 박근혜는 국가 보안법을 몸으로 막고 강정구를 벌하라고 떠들지 않았습니까? 강원도 출신 최○○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일제가 하사한 작위를 그 아비의 제사 때마다 신주 모시 듯 한답니다. 아비에 대한 효도라고요. 그자는 6.15공동 선언을 무산시키려는 한나라당요직이었고 자금책이었습니다. 일제 때 관직에 종사했다고 한 묶음으로 친일로 몰아부친다면, 일제 때 왜 죽지 않고 살아남았느냐와 같은 이치지요. 심사가 뭐가 필요합니까. 문선공처럼 직업을 가려내면 되지.”

“그렇지요. 김선생 주장이 옳아요. 해방 후 투쟁경력이 그 사람의 과거를 말해줍니다.”

전창일 선생은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투옥되기 전에는 미국 건설회사에서 대접받는 부유층에 속한 엘리트였다. 높은 호봉을 받았지만 그는 분단국가에 태어난 지식인에게 부과된 사명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부와 안일을 팽가치고 양심의 소명에 따라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했다. 전창일 선생은 많은 동지들에게 용기와 의로움을 손수행동으로 보여준다. 김일성 주석 서거시에 일본을 통해 조문을 보내고 옥고를 감수했다. 그것은 인륜을 저 버리게 하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김달호 선생에 대한 친일인명사전 건에 대한 전창일 선생의 탄식과 분노와 절망감은 김달호선생의 명예나 유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친일 청산의 위업이 훼손되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절실한 소망 때문이다. 내가 본 받아야할 전창일, 그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부탁이기에 자료를 부탁했고 혹시 내가 인지하지 못한 무슨 친일 행각이라도 있을까하여 자료를 살피었다. 결과는 일제치하의 지식인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흔적들을 발견했을뿐이다.

어저께(2008.11.11)한신대학교 수유리 캠퍼스에서 늦봄 문익환 목사 시비제막식이 있었다. 그전날 나는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 문성근에게 무엇으로 내 마음을 전할까 궁리를 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MBC프로그램에서 죽산 조봉암을 다루었을때 문성근이 해설을 했다. 가슴에 젖어드는 문성근의 음성이 그렇게 따스한지 미처 몰랐었다. 내레이션의 음색, 억양 등 음성의 익스프레션이 어찌나 유연하고 초연한지 죽산의 생애가 유장한 흐름을 이루는 듯 했다.

특히 죽산이 초대농림부장관시 장관실에서 내가 바라다 본 죽산의 칠흙빛 파카 만년필과 손가락 윗마디가 뭉그러진 대목의 고조된 억양의 액센트는 분단이라는 불운에 희생된 위대한 정치인 죽산의 의연한 모습이 떠올라 원통함과 비통함에 가슴이 ?기 듯 아파왔다.

그날의 문성근에 대한 고마움을 내 고정란이 있는 음악과 미술잡지에 사인을 해서 시비 제막식 날 전했다. 뭉그러진 손가락마디는 일제에 맞서 싸운 죽산의 항일 투쟁의 마크였고 파카 만년필의 칠흙빛 윤기는 그분의 고결한 이상과 절개의 상징성이었다. 남한의 진보세력을 ?어놓기 위한 CIC공작으로 그분은 동지를 배반한 배덕자로 낙인 찍혔고, 북한의 간첩으로 조작되어 이승만에 의해 법살되었다.

그러나 죽산은 정치 활동(대통령으로 출마)을 안하겠다고 약속해주면 살려주겠다는 이승만의 교섭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분의 뭉드러진 엄지와 검지에 쥐어진 칠흙의 밤보다 더 새까맣던 파카만년필의 그 윤기는 상기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 여러분께 묻고싶다. 만일 김달호가 친일을 했다면, 조봉암의 무죄를 증명하기위해 피를 토하는 정성으로 죽산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겠는가? 김달호가 친일을 했다면, 모든 진보정당의 발기인으로 진보세력을 규합, 평화통일운동의 기치를 올리고, 앞장섰겠는가? 친일 분자들이 적반하장으로 세상을 주무르고 있는 세태를 목도하면서 누가 친일을 했는지 가려내지 못한단 말인가? 죽산은 죽음으로 정치인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청정한 기개의 정치인이었다. 만일 김달호가 친일을 했다면, 죽산 조봉암이 수하에 사람이 없어서 김달호를 진보당의 제 2인자로 택했다고 생각하는가?
죽산을 모독하지마라!!!

들풀 [2009/03/05] :: 선생님! 게을러터진 마음을 다잡고 갑니다.

미래4년고난-녹색연합패러디영상 이시우 2009/03/01 569

http://www.greenkorea.org/contents/onair/090225.wmv

독립신문의 이시우관련기사 [2] 이시우 2009/03/05 775

http://www.independent.co.kr/

3월 4일 탑기사로 게재

대통령 직속기관이 反이명박 인사를?
민주평통, 이승구(이시우) 씨 초청강연
[2009-03-04 22:10:11]

대통령이 의장으로 있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 지역협의회가 주최하는 행사에, 反이명박정부 성향의 인사가 초청돼 강연을 한다.

민주평통 강화군협의회(회장 김영애)는 오는 17일부터 24일까지 대회의실에서 『제3기 통일시대 시민교실』을 개최한다. 강화군민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는 이번 행사에는 민주평통 자문위원을 비롯해 공무원, 기관단체, 시민사회여성단체, 새마을지도자, 해설사 등 200명이 참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가운데 이번 행사에서는 군사기밀을 수집·탐지해 북한에 넘긴 혐의로 기소(국가보안법 위반 등)된 바 있는 소위 평화사진작가 이승구(필명 이시우) 씨의 강연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강연주제는 ‘한강하구의 역사와 생활문화’ 및 그동안 추진됐던 ‘남북교류협력’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李씨는 그동안 촛불시위 사진전을 여는 등 뚜렷한 反이명박 성향을 보여왔다. 최근(1일)에는 자신의 홈페이지(siwoo.pe.kr) 게시판에 李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의 패러디동영상을 게재해 놓은 상태다.

이러한 인사가 대통령 직속기관의 지역협의회가 주최하는 행사에서 강연을 한다는 사실은 더할나위 없이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한편 위에서 언급했듯, 李씨는 국보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작년 법원은 1·2심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검찰이 중형(징역10년)을 구형한 사건에 무죄를 선고했다는 점에 더해 이념적 논란이 강하게 일었었다.

역시 무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도 ‘원심(1심)은 다소 부적절한 점이 있다’는 취지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김남균 기자]doongku@nate.com

들풀 [2009/03/18] :: 그러게요. 저도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그런 사진전도 했었나? 했네요.

김은옥 [2009/03/15] :: 이시우`평화사진전`은 여러번 한적이 있어도, 촛불시위사진전은 한 사실이 없습니다. 사실확인 취재없이 기자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쓰는분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유감입니다.

강화민주평통 강의안내기사 이시우 2009/03/06 855
막무가내식 북방유적지 관광 ‘그만’

서울일보 2009-03-05 00:25

강화 민주평통, 해설사 양성 ‘통일시대 시민교실’ 개강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화군협의회(김영애 회장)는 이달 셋째주와 넷째주 화요일인 오는 17일과 24일 강화군청 4층대회의실에서 제3기 통일시대 시민교실을 개강한다.

강화군민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시민교실에는 평통자문위원, 공무원, 기관단체, 시민사회여성단체, 새마을지도자, 해설사, 시민 등 20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시민교실을 주최한 김영애 회장은 “한강하구를 따라 연미정과 평화전망대 등 북방유적지가 개방됐는데도 이곳에 대한 역사와 생활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해설사가 충분치 않아 방문객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시민교실을 개설하게 되었다”고 개강취지를 설명했다.

강화군 북방유적지는 대부분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민통선지역에 있어 민간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지만 학생 시민들의 평화통일교육의 학습장으로 이곳을 개방할 것을 민주평통을 중심으로 제안해 오고 있다.

3기 시민교실에서는 서강대 김영수 교수의 ‘통일시대 국민통합방안’과 명지대 심의섭 교수의 ‘동북아 국제관계’ 강좌가 개설돼 있으며, 한강하구의 저자 이시우씨를 초청 ‘한강하구의 역사와 생활문화’ 그리고 그동안 추진됐던 남북교류협력의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수료생들은 앞으로 북방유적지를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해설 및 안내를 맡게 된다.

이에 앞서, 10일에는 민주평통 이기택 수석부의장이 강화를 방문, 강화평화전망대를 시찰하고 군부대를 위문할 예정이다. 오후2시에는 강화군청 4층대강당에서 기관단체장, 공무원, 군민지도자, 해설사 등 300여명에게 통일특강을 실시한다.

이기택 수석부의장은 국내 주요지역과 해외동포들에게 ‘이명박 정부의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에 대해 순회강연을 실시하고 있다. / 박종이 기자

인디다큐페스티발 2009상영작 [1] 김은옥 2009/03/17 685

이시우와 강제숙등을 주인공으로 하여 만들어진 다큐입니다.

작년에 스톤워크 한일실행위원회가 주최한 ‘한일시민이 함께 하는 오키나와-제주 평화기행’이 김환태 감독의 열정과 수고로 『국경은 없다』의 제목을 달아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 2009에서 최초 공개 상영된다고 합니다.

3월 26일(목)과 29일(일) 두 번의 상영이 있지만, 3월 26일(목) 오후 5시 10분에 함께 모여 관람하고자 합니다. 표를 미리 받아야 하기에 23일(월)까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상영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의 소식도 나누고자 합니다.

자세한 일정과 장소는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www.sidof.org/

들풀 [2009/03/26] :: 헉! 보고싶네요. 그러나 이것저것 일정이 많네요. 아이고 아쉬워라 ㅠㅠ, 모두들 좋은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