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작가의 출소인사2007/09/16 3171
이시우 작가의 출소인사
뜻하지 않은 보석통보를 받은 것은 그러니까 9월14일 금요일이었습니다. 4월19일이 구속된 날인데 정확히 그것이 뒤집혀진 날이었습니다. 마침 운동나가던 사동 사람들이 저의 보석소식을 듣고 웅성거렸습니다. 저의 독방에 제 키만큼 쌓여져 있는 경찰 수사자료를 보아온 그분들께도 뜻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진훈이 란 사소님이 “선생님 축하드립니다요. 이건 정말 인간승리입니다요. 제가 선생님 단식 처음 시작부터 지금까지 다 지켜보지 않았습니까요. 제가 영화감독이면 다큐멘타 리로 만들겠습니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요” 라고 말했습니다. 끝에 조직생활을 하던 사람처럼 ‘요’자를 꼬박꼬박 붙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그가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인사말에 감사하면서도 그의 깊은 곳에 있는 부러움과 좌절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를 징역살이를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 철없이 기쁜 표정을 지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보다도 왠지 제 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석통보가 있고 짐을 모두 챙겼는데도 서류가 아직 넘 어오지 않아 출소가 늦어진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차라리 다행이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채 서둘러 나가야 할 상황이었는데…. 뭔가 하나의 매듭이 지어져야 할 것 같 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깊은 명상에 들었습니다. 단식과 복식기간 동안 우여곡절 끝에 평생을 감옥에 있게 된다 한들 내안의 자유를 구속시키지 않을 자신감이 생긴 뒤 였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석방과 불구속 상태에서의 재판진행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새로운 결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기쁨보다는 조심스러운 염려가 앞섰습니다. 나가서 접하게 될 새로운 현실에 어떻게 적응하고 결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국가보안법의 유령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저는 무엇인가를 하기로 마음결 위에 조각도로 각인을 하듯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것이 제자신을 속이고 지워지는 일이 없도록 마음속 깊이 다짐을 받아 놓았습니다. 그러 고 있을 때 운명처럼 복도에서 “출소요” 하고 교도주임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독방문을 나서며 다시한번 방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주임의 “가시죠” 하는 소 리가 들렸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수개월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단식기간중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때도 벽에 등을 기대지 않기 위 해 웅크리고 버티기를 하던 방바닥이나, 면회가던 길에 휠체어를 타지 않겠다며 벽을 짚고 긴복도를 걷다가 근육마비가 오고난 뒤 물구나무서기와 맨손체조를 할 때 지 지대가 되어준 벽이나, 구속도 죽음도 나를 위협하지 못하고 화해하던 순간이나, 분노와 유혹의 관성과 싸우기 위해 매번 무릎꿇고 응시하던 철창살로 막힌 창문이나, 새벽3시부터 하루종일 쉼없이 집필하도록 받쳐주던 앉은뱅이 책상이나, 돌이켜보니 이 작은 방이야말로 제겐 사상의 시험대였습니다.
출소 다음날부터 엊그제까지 주인대신 먼지가 쌓여있던 작업실을 구석구석 청소했습니다. 압수수색의 화를 당한 뒤 누구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작업실의 때를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서야 방과 마루는 제가 편히 앉아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다시한번 느낍니다. 청소는 낡은 때를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묻히는 것임 을….
어제는 처음으로 아침에 선선하고 너그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들판을 걸어 작업실에 당도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옥생활이 아무 불 편이 되지 않는다고, 구속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무작정 걸을 수 있는 자유만은 누릴 수 없었음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옥방에 갇혀 단식이란 방법 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 기억되었습니다. 자유란 제게 걷기의 자유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옥문을 나선지 몇일이 지났 고 집회에도 참석하고, 석방 환영식도 치루었지만 왠지 석방이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이 그 느낌을 유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 다가 어제 아내가 검찰청에서 보석에 항고하는 의견서가 배달되었다고 작업실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 내용은 ‘피고가 사형내지 무기징역의 형이 예상되는 중죄인 이므로 보석허가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러고보니 9월 20일 출소 후 첫 재판에서 저의 지인들은 채 10명도 되지 않았는데, 보수단체의 어르신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이철승회장까지 참석을 한 것이나, 이영재검사가 전쟁기념관 수장고에 위탁 보관중인 저의 압수사진을 몰수하기 위한 증거신청을 제출하면서 중형 을 구형할 의지를 분명히 시사한 점에서 검찰이 이번 보석결정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고, 반격태세를 단단히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사에게서 여유가 사라 지고 경찰 보안수사대 직원들의 발걸음에 긴장감이 돌던 이유가 그제서야 피부에 와 닿습니다.
작은 감옥에서 좀 더 큰 감옥으로 나온 것 뿐이라던 비유가 사실 은 냉정한 현실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이제야 보석석방의 한계와 의미가 몸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재판정이란 제도에 의해 방청석과 피고인석으로 절제되어 존재하던 거리와 공간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수단체의 어르신들과 방청석에 같이 앉아 있다가 피고인석으로 걸어들어 가는 순간 제가 그분들과 같은 자유의 몸이면서 제 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유까지 함께 얻은 것임을 느꼈습니다. 그분들에게 간첩이시우로 알려진 제가 이제 어떤 보호도 없이 그분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하며 전쟁의 상처를 끌어안을 벅찬 자유가 제 앞에 놓여진 것입니다.
더 큰 성찰과 고난의 끌어안음이 필요함을 알겠습니다. 더 큰 감옥을 가치있는 자유로 변화시키기 위해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겠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시처럼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할 과제가 제 앞에 놓여 있음을 알겠습니 다.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시위하기 위해 사형구형을 의도하고 있는 경찰과 검찰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재판부의 균형있는 시각과, 저로서는 상상치 못했던 여러분들의 진심어린 관심과 사랑, 변호사님들의 헌신, 앰네스티인터내셔널과 국제대인지뢰캠페인, 국제열화우라늄탄반대행동, 프랑스국제인권영화제준비위원회 등 국제단체의 탄원과 성명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귀하게 얻은 자유의 가치가 헛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역사속에서 귀중한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지혜롭고 완강하게 한걸음씩 걸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