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본 이시우-2 오철근 2007/06/25 975
내가본 이시우-2와 김은옥 사모님께 [2] 오철근 2007/06/25 975
먼저 오늘도 동분서주하시는 사모님께 감사와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지난번 1인 시위 때 뵌 이후로 아무 소식도, 도움도 드리지 못하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이시우님 면회에 관하여는, 저야 하루라도 빨리 뵙고 싶었지만 이시우님의 건강과 면회를 하고자 하는 많은 분들을 고려하여 뒤로 미루어 오게 된 것입니다.
1회 공판 준비도 있고 하여 부담을 드릴까 염려 되 온즉 제게는 공판 전이든 후이든 상관없사오니 한번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만간 인사동 평화박물관에서 하는 이시우님 사진전시회를 관람하고 그때 늦었지만 저의 탄원서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먼저 보내드린 내가본 이시우 파일은 수정되기 전 것을 게재하였기에 보완하여 다시게재 하오니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이시우님과 사모님, 우성이 그리고 대책위원회 여러분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퀘이커 서울모임 오 철 근 드림.
*저의 전화는 02-874-1780
011-478-1780 입니다.
내가 본 이시우
저는 이시우님이 비폭력평화물결 평화감시팀장으로 활동할 당시인 2005년 6월1일부터 8주간 매주 1회씩 이시우님이 지도하는 유엔사문제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공부내용이 20여 페이지에 달하고 참고자료는 무려500여 페이지 나 되었는데 저를 포함하여 고작4~5명밖에 안되는 공부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이시우님은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버스로 출퇴근하며 삼복더위에도 정성을 다했고 수강료래야 고작3만원, 교통비도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공부자료를 자비를 드려 복사를 해서 나누어 주었으며 종종 막차가 끊어져서 강화대교에서 그의 작업실(거처)까지 20여km를 밤이슬을 맞으며 걸어서 새벽 무렵에야 작업실에 도착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후에 알고 보니 휴전선155마일, 민통선(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을 말함이며 민간인 통제구역)을 도보로 수차에 걸쳐 답사했고, 강화도에서 시작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에 있는 7개의 미군기지를 걷기명상으로 답사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미군기지까지도 답사 했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발로 뛰는 평화운동은 그의 일상사였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어떤 때는 무덥고 피곤하여 공부모임에 빠지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그의 이러한 지극정성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유엔사문제는 이시우님이 옥중서신에서 좁은 지면상 개략적으로 중요한 부분들을 밝혔지만 사안의 중요성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만큼 보다 구체적인 공부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엔사문제를 모르고, 대인지뢰문제의 실상과 그 피해자의 처참한 아픔을 가슴깊이 느껴보지도 못하면서 평화, 통일 운운 하는 것은 다분히 감상적인 공론에 불과 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공부내용은 추후 파일로 만들어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미국 역대 행정부가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한반도의 남북분단 이라는 현실적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으며 허울 좋은 작전권이양이라 는 명분아래 유엔사를 더욱 강화하여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가 독일의 미군기지를 답사하고 돌아와 그 소감을 발표하였는데 “독일 사람들은 대부분 미군의 주둔을 반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철수로 인하여 주둔지역에 야기될 경제적 영향을 고려해 철수를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친미성향을 갖는 것은 당초 미군과 군사협정을 맺을 때 우리나라의 소파협정처럼 차별적이고 굴욕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권리와 관계를 전제로 협약이 이루어 졌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독일이 부럽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주한미군과의 관계가 차별적이고 굴욕적인 것이 국제관계의 힘의 논리에 의한 냉엄한 현실일진대 우리는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여 비폭력 평화정신으로 시위를 해야 하며 반미 감정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뿐 것은 정책입안자인 미 행정부나 군부가 나뿐 것이지 씨들은 어느 나라 씨이든 착한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 운동하는 사람들이 마치 죄수가 감옥에서 먹어보지 못하는 음식 을 꿈속에서 먹는 꿈을 자주 꾸듯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다분히 감정적이고 맹목적이며 실천에 옮기지도 못하면서 공론일색인 반면 이시우님은 그의 옥중서신에서 “사진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과 1%의 영감으로 창작 됩니다” “예술의 발전법칙과 현실발전법칙이 분리 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그의 폭넓은 학문은 단순한 이론이 아닌 발로 뛰면서 체험한 산 학문이었으며 그의 일 거수 일 투족이 진정한 예술행위요 평화운동 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그간의 정황과 옥중서신을 살펴 볼 때 이시우님이 단식을 한 것은 정치적의미도 특정세력의 정세에 대한 대응방향에 영향을 주자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남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도 아니며 단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국가보안법의 비수초차도)을 끌어안고 가기위한 내면적 성찰의 일환으로 이해됩니다.
국가지상주의, 정치만능주의 종교지상 주의가 문제입니다.
국가지상주의는 인류문명이 자라오던 어린시절, 병장놀이를 할 때 철부지 어린아이가 뽐내며 찼었던 칼입니다. 바야흐로 씨은 깨였고 이제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이 민(民)의 시대를 맞이하여 그 보잘 것 없고 녹슬은 칼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합니다. 국가 안보라는 괴물의 덫에 걸려들기만 하면 그가 아무리 지(智) ‧ 재(才) ‧ 학(學)을 고루 갖춘 고매한 인격자일지라도 그 괴물의 잣대에 따라서 영욕(榮辱)의 길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아 왔습니다. 함석헌선생님은 간디의 길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개인으로서는 아무리 고상한 도덕이라도 나라에 들어가면 문제가 달랐다. 자기희생이 개인으로는 다시없이 높은 도덕이나 그것을 국가적으로 하면 죄로 알았다. 그러나 지난날의 도덕‧종교의 힘없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라라는 이름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행하여졌고 얼마나 많은 선이 말살 당했으며 교회라, 하나님이라 하는 이름아래 개인으로는 도저히 허락될 수 없는 살인이 아름다운 덕으로 찬양이 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때문에 개인으로는 수많은 갸륵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도덕‧종교가 사회적으로는 아주 힘없이 온 것이다. 이제 여기 이 큰 모순의 바위에 큰 쇠망치를 내린 것이 간디다. 인제 저가 수염도 한대 없는 조그만 알몸에 개짐 하나만을 차고 ‘사땨그라하’ 운동을 나섰을 때 깨진 것은 대영제국이 아니고, 이 큰 인류 역사의 모순의 경계선이었다. 이제 선에 개인과 단체의 차별이 없어졌다. 개인의 경우만 아니라 단체에 있어서도 생명은 내버림으로만 얻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저 조그만 사람으로 인하여 지나간 날에 인류를 한없이 속여오던 나라요, 교회요 하는 단체라는 우상이 깨어지고 말았다. 진리 앞에 개인도 단체도 없다. 이것은 인류 역사만 아니라 우주 전체의 정신이 자라나는 역사에서 큰 한 걸음을 내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우상이 아직은 채 거꾸러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도 이 고난의 짐을 지는 것이지만 그는 이미 치명상을 입었다. 우리가 완전히 해방이 되는 것은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 . . 인류 앞에 지금 놓여진 길은 간디가 열어놓은 좁고 험한, 그러나 큰 이 참의 길, 평화의 길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하여 보안법의 칼날을 무소불위로 휘둘러대어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군사문화의 잔재인, 봉쇄적이고 패쇄적인 안보를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공산주의 나 불만세력의 온상을 조성하게 되어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는 물론 소위 공안 당국이 말하는 불순세력이나 이적단체를 양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끈미끈한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이 뵈지 않도록 들어서는 울창한 숲 속에 가시넝쿨이 아무리 자라려 한들 어찌 자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한반도의 현실이 남북분단 때문이라고 해도, 그래 이 나라가 이적단체나 불순세력 에 의해 국가의 안전이 위태로울 정도로 허약한 나라며 무능한 정부란 말입니까? 튼튼한 위장은 못 먹을 음식이 없는 것처럼 정말 실력 있는 정부라면 어떠한 사상이라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소중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일부 특권세력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요 주권재민의 나라입니다. 자유는 본래 하늘이 주신 것이지 그 누구도 주거나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라니 곧 스스로(自)하는 제 까닭(由)입니다. 야화방초자총총(野花芳草自叢叢)이라, 하나님의 생명의 동산에 스스로 피어나는 생명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요 도덕의 근본원리 일진대 인생의 목적은 국가를 위한 멸사봉공(滅私奉公)도 아니지만 빙공영사(憑公營私) 즉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개인의 사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 또한 더욱 아닐 것입니다. 함석헌선생님은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사는 목적은 마치 씨의 목적이 아귀를 터서 자라 나무가 되는 데 있는 것같이, 이 바탈(성품, 천 성)을 드러냄에 있습니다.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라, 바탈은 절대명령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 안에 스스로 자기를 확이충지(擴而充之)곧 키워서 온전한 자리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 다. 性성이 선하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략
재유(在宥)란 건드리지 말고 둬두란 말이다. 모든 것의 있음은 저 제대로 스스로 있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이름이 없다, 그저 “있는 이”다(혹은 히브리말 학자들의 의견으로 한다면 현재보다 차라리 미래형으로 말해서 “있으려는 이”)했다. 하나님, 곧 만물의 근본이 그러함으로 만물의 본성은 스스로 함이다. 自存자존, 自在자재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놈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감히 건드릴 권세가 없다.
유(宥)는 관대, 곧 너그럽다는 뜻이다. 정치를 맡는 자의 첫째 자격은 너그러움이다. 너그러움은 자기를 비우는 일이다. 마치 울타리가 속이 텅 비어 소나 양이 그 안에 자유로 안전하게 즐겁게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울타리는 하지 않음(無爲무위)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정치도 그렇다.
그래서 서양에도 “The king reigns but he does not rule(임금은 君臨군림하는 것이지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말이 있고, 저 ‘정치적 불복종‘으로 유명한 헨리 소로우도 “도무지 다스리지 않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고 했다. 그래서 불문치천하(不聞治天下)라, 天下 다스린단 말 듣지 못했다 한다. 그 뜻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천하를 다스린다지만 그건 말 같지 않은 소리다”하는 말이다. 그러니 참 정치는 모든 것이 하늘이 준 자성대로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으로 둬두는 일이다. -중략
유(宥)도 마찬가지다. 무위의 태도다. 사람은 각별히 지어먹은 마음 없이, 울타리가 가축을 잊어버리고 있듯이 잊어버린 태도로 대하면 들 가운데 자라는 초목같이 싱싱하지만, 어떤 목적, 어떤 관심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화분에 심은 나무같이 장속에 넣은 새같이 그만 제 속힘을 잃어버린다. 제대로 천연 순진스럽지 못하고 기생같이, 재롱으로 기른 강아지같이, 벼슬아치같이, 깜찍하고, 앙큼하고 모질고 멍청하게 된다. 그것이 천(遷)이다.
사람의 하는 일의 가장 잘된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정치하면 민중이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그것을 고치려고 法법을 더 자세하게 까다롭게 하고 벌을 더 엄히 하고 상을 더 많이 준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다. 소위 정치주의는 이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새를 정말 잘 기르려면 내 입에 좋은 것으로 먹이려 말고 새 제가 좋아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산림(山林)속에 놔 주라는 것이다. 정치는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 민중을 기르려는 일이다. 어리석고 잔혹한 일이다. 하늘은 가지가지로 각각 제 노릇하기를 원하지, 하나만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마다. 제 바탈대로 제 속힘으로 살아가면 거기 참 평화 조화가 있는데, 공연한 수고로 天下 다스리는 정치 하겠다 할 놈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정치 잘 하노라는 놈일수록 죄가 크다.]
-중략
그렇습니다. 옷이 잘 맞으면 옷 입은 줄 모르는 법이요 신발이 잘 맞으면 신발 신은 줄 모르는 것같이 정치가 바로 되면 국민들은 정치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정치를 잊고서 즐겁게 살아갈 것입니다. 요(堯 임금의 통치를 가장 어질게 보는 것은 무위(無爲)의 정신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요임금이 자기의 통치를 백성이 어떻게 생각하나 알기위해 들녘에 나아가 한 농부에게 묻기를 “요임금을 아는가?”하니 농부 왈 제력하유어아재(帝力何有於我哉) 즉 임금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어? 했다고 합니다. 노자가 정치를 하는 것은 약팽소선( 若烹小鮮) 즉 작은 생선을 지지는 것과 같다 한 것은 국민이 자유롭게 살아 갈수 있도록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말아야한다는 뜻이라 생각 됩니다.
그리고 민족분단의 비극과 6.25의 상흔, 고엽제와 열화우라늄 탄, 대인지뢰 피해자들의 처절한 삶을 온 가슴으로 끌어안았으며 고인돌에 서려있는 우리민족의 얼인 화해와 평화정신을 특유의 감수성으로 담아낸 이시우님의 역작,「민통선평화기행, 창작과 비평사 펴냄」은 친우들께서 대부분 읽으셨으리라 생각되오나 내용의 중요성을 보다 널리 알려야 된다 생각되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부분만 발췌하였습니다. 전문을 지면상 모두기록하지 못하고 생략한 부분도 있고 하여 작가의 깊은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음을 몹시 아쉽게 생각하며 가능한 책을 구독하여 숙독하시기를 깊이 권고하는 바입니다.
친우여러분! 이 땅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진정으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성취된 것 같기도 한, 즉 사이비한 것들에 속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정보는 특권세력이 독점 하고는 국가보안이다 국가기밀이다 하며 마치 머리털을 까기고 눈알을 뽑힌 체 연자방아를 돌리고 있는 성경 속에 나오는 삼손모양, 국민이 반발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자유와 복지국가라는 장밋빛 치장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깃발아래 국민의 알권리는 차폐되고 백년지대계라는 교육조차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인간을 생산의 도구화, 자원화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국가지상 안보 지상의 슬로건에 압도되어 있는 이 현실을 직시하여 사람답게 사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 냉철히 자신을 되돌아보며 국가보안법폐지 운동에 적극참여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국가란 인류문명이 자라나가는 데 있어서. 선 과 진리와 평화를 위한 싸움을 하기위한 내가 소속되어있는 부대요, 전선에 타고가야 할 한필의 말입니다. 그 천리마 의 발길질에 걷어차이느냐 아니면 필마동체(匹馬同體)가 되어 승리의 영광을 누리느냐는 우리 씨들의 몫입니다.
간디는 정치형태란 평균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힘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평균적 개인이 가진 혼의 힘(average individual’s soul-force)은 어떤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정치형태는 영적인 힘의 구체적 표현일 따름입니다. 나는 평균적 개인이 가진 영혼의 힘은 정부의 정치 형태와 분명히 구별되고 동떨어진 채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민족은 결국 그 민족에게 마땅한 정부를 갖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 나라의 정치형태는 다름 아닌 우리 국민의 영적인 힘의 구체적 표현일 따름인 것입니다. 끝으로 5‧16군사 독재에 맞서 온몸으로 항거하며 사자후(獅子吼)를 발하셨던 함석헌의 글, ‘정신 바짝 차려’ 는 우리도 그와 같이 참을 위해 오직 비폭력적인 혼의 힘으로 싸워야 하는 우리들에게 깊은 혼의 울림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
씨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참 안녕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데 있습니다. 자는지 깼는지, 정신이 흐리멍덩해서 뒹굴고 있는 것이 참 건강이 아닌 것같이, 한 나라의 씨들이 나라가 어떤 길을 달리고 있는지, 문명이 어떤 물결 위를 밀려 내려가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저 밤낮으로 자고 깨고 먹고 노는 일에만 멍청하고 있는 것이 참 평안은 아닙니다. 정신의 초점을 모아 내 선 자리가 어디며, 내 잘못이 무엇이며, 내 할 의무가 무엇인지, 거기 대해 다급한 마음을 가진 것이 정말 산 씨이요, 살아 있어 역사를 지어갈 수 있는 씨입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소위 3‧1사건으로 인해 재판받으러 왔다 갔다 하느라고 거의 모든 시간을 다 써버리고, 이제 5년 징역 5년 자격정지에 형 집행정지라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나는 재판을 받을 때마다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제 손으로 독배를 들어 마신 것은 결코 그 법을 옳다 생각해서도, 자기가 정말 죄를 지었다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기의 옳은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자기를 죄주고 죽이는 그 아테네 국민을 불쌍히 여겨, 그들로 하여금 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재판 받으러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외국 신문 ‧ 잡지의 기자들을 만났는데(국내의 기자는 정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게 조직의 능력과 성패의 앞을 내다볼 만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나는 성공이거나 실패거나 그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은 없고, 다만 이것이 내 할 의무이기 때문에 할 뿐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은 이상, 몇 해가 되겠는지 몇 십 백년이 되겠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마침내는 우리가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에는 까딱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낯빛을 고쳐서 알았노라 동의를 했습니다.
책임은 네게
씨여러분, 착각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내가 이 말씀을 왜 하는지 아십니까? 책임을 우리가 스스로 지자고 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생각이 한층 깊어집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아테네의 법관이나 정치가가 아니라 그 씨이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빌라도나 제사장들이 아니라 유대의 씨이었습니다. 참새하나도 하나님이 허락 아니 하시면 땅에 떨어질 수 없는 이 정의의 법칙이 다스리고 있는 이 우주에, 제까짓 놈들이 무엇이기에,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꾀가 있어, 감히 철인 소크테스를 죽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달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아무 사심이 없이 이것이 참이라 하는 결정의 확신 위에 설 때, 누구나 다 스스로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음을 압니다. 목이 칼이 겨누어지는 순간에도, 그때야말로 정말, 예는 예라 하고 아니는 아니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뺏을 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 뺏는데 누가 감히 뺏습니까? 모가지와 정신은 서로 딴 것입니다. 목이 떨어진다고 자유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도 맨발로 세계의 거리를 걷고 있지만, 그놈의 궤변학자들과 그것들을 강아지로 부려먹던 정치가들은 오늘 어디 있습니까? 스물한 살에 신앙에 들어가, 겨우 서른 두 살에 죽게 됐던 승조(僧肇)의 유명한 글귀 아십니까? “목을 내밀어 흰 칼날 받으니 제법 봄바람을 베는 듯 선뜻 지나가는 구나”(以首臨白刃 猶如斬春風)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죽을 수 없는 정신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죽을 수 없는 정신의 사람들의 몸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의 말대로, 그런 사람들의 있을 곳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씨이 그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정신이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하면, 씨 속에 사는 것입니다. 씨이 그를 받아주는 한 그는 씨 속에서 새처럼 참을 노래하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씨이 자기를 버리는 날 그는 구차한 육신을 그 속에 붙여두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떨어지는 별처럼 몸으로써 씨에 대해 항의를 하고 제 영원한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목숨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명령입니다.(「요한복음」10장17~18절)
非我也라 兵也라
씨 여러분, 귀를 불고 들으십시오. 내게다가 5년 징역, 5년 자격정지를 선언한 것은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형집행정지 처분을 한 것도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정부라 하십니까? 당국의 지시로 된 것이라 하십니까? 모르는 말씀입니다. 맹자(孟子)의 유명한 “비아야 병야”(非我也 兵也)라는 말 아십니까? 사람을 칼로 죽여 놓고, 책망을 하면 대답하기를 “뭐 내가 죽였나, 칼이 죽였지”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때의 임금들이, 관리 놈들이 백성을 학대하고 긁어먹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는, 그 책임을 물으면 그 관리들에게 돌리는 것을 지적해서 책망한 말입니다. 오늘 나라의 임금은 누구입니까?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통령이 자신을 말할 때는 ‘나라의 공복’이라 합니다. 옛날의 임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씨 여러분입니다. 나라는 여러분의 나라요, 그 주권은 여러분께 있습니다. 그러면 일의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합니다. 내가 재판을 받으러 서울 길거리를 다닐 때에 상복을 왜 입었던지 아십니까? 재판관이 보라고 입었던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일본제국에 쫓겨 다니고 공산당에 쫓겨 다니느라고 아버지의 상도 어머니의 상도 못 입었습니다. 아마 보다 더 큰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애절한 마음을 가지라고 그렇게 해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정말 큰 아버지요 큰 어머니입니까? 이 나라요 이 민족이지. 그런데 그 나라 그 민족이 나를 죄인이라 정죄하려 드니 어찌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자유가 과연 있느냐, 평등이 과연 있느냐, 평화가 과연 있느냐고, 나는 대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의 표시가 굵은 베옷, 옛날의 모든 예언자들이 일이 있을 때는 눈물로 입고 씨 앞에 나섰던 그 베옷입니다.
누구를 괴롭히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괴롭다면 내 마음이 터질듯하고 여러분을 향해 몸부림을 하고 싶을 뿐이지, 그밖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고 자유생각 평화생각이 나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어리석어도 물거품과 시비를 할 나는 아닙니다. 그 거품이 얼마나 가다가 꺼지겠습니까. 그 거품을 일으키고 또 꺼지게 하는 그 흐름, 맑았거나 흐렸거나, 그 흐름과 씨름을 하는 것이 내 일입니다.
정치인이요, 관리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옛날 종살이에 젖은 눈에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뵐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은 여러분 허리에 찬 큰 칼 작은 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써서 선한 일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싸우자 !
그러기 때문에 나는 싸우렵니다. 끝까지 씨과 싸울 것입니다. 싸움은 사랑하는 이와 하는 것입니다. 짐승과는 싸우지 않습니다. 짐승과 싸우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마음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정부와 싸워왔습니다. 그것은 그 속에 적게나마 나의 어느 부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인정 ‧ 이성이 있음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조금 더 참아보기는 하겠지만, 3‧1사건에 관련된 인권문제의 처리를 보고 그 믿어오던 줄이 끊어져갑니다. 그 이유는 잘못을 저지를 뿐 아니라, 그대로 주저앉으려하고, 주저앉을 뿐 아니라 따라가며 설명하여 합리화하려 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믿어지는 한 가닥이 있을 때 싸움이라도 하지, 그 가는 한 가닥도 없는 때에 말을 아직도 하려는 것은 자기아첨, 자기기만이요, 진리에 대한 모욕입니다. 일러 말하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지 말라” 했습니다.
옛날 봉건시대에 났더라면 나도 임금을 위하여 사직(社稷)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내가 상대로 싸울 것은 씨입니다. 3‧1사건의 책임도, 인권문제의 책임도 씨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미끈미끈한 아름드리가 하늘이 뵈지 않도록 들어서는 울창한 숲 속에 가시넝쿨이 아무리 자라려 한들 어찌 자랄 수 있겠습니까? 씨 전체가 제 권리 제 의무에 충실하여 발을 대지에 디디고 머리를 하늘에 두고 설 때에 부정 ‧ 부패는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가시넝쿨이 땅을 뒤덮은 것은 숲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은 가시넝쿨에는 둥지를 틀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남은 그루터기를 보호하고 야기(夜氣)에 맡겨 자라게 두십시오. 그러면 가시넝쿨은 베는 나무꾼 없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학은 다시 와서 새끼를 칠 것입니다.
내가 정부와 싸워온 것은 씨의 하나로서 전체를 대표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둘을 믿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이요 아래로는 씨입니다. 열다섯의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감히 나섰을 때 믿은 것도 그 둘입니다. 하나님에는 물론 변하심이 없습니다. 씨 전체가 같이 하나님 편에 섰을 때 골리앗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야심을 가지고 씨을 충동해 분열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 씨의 전적인 지지를 얻을 때까지 죽음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씨이라고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씨 전체가 지배자와 하나가 되어 잘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는, 씨 속에 그 죽게 된 양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몇 사람의 의로운 씨도 없을 때는, 하나님은 한 큰 시련을 주기위해 흉악한 적국의 손에 아주 내주어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의인을 감당 못한다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부끄러운 경험을 가진 민족입니다. 또 한 번 하렵니까?
씨 여러분,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갑니다. 나의 부족을 모르는 척 감히 나서서 정부와 싸웠을 때 나는 사실 씨 전체가 지지해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처사가 인간의 떳떳한 도리의 길을 벗어난 것을 보고도……. 나는 약과 침, 뜸의 힘이 다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데 병이 들어간 것을 본 의사의 심정 같은 심정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싸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인간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싸웁니까? 나는 그가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 해도 무조건 순종할 수밖에 없는 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절대 순종을 해야 하느니만큼 나는 여러분과, 곧 나 자신과,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도록 싸워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죽도록 이지요. 여러분 속에 나의 있을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른 말로 해서, 내 속에 여러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말로 해서, 몸 안에서 하나님을 모실 곳이 없다면 차라리 이 몸을 제물로 바쳐서까지 라도 하나님의 품을 찾아야지요. 그러니 마음이 어찌 무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상하게도 신앙의 눈이 띄어 첨으로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할 때 에레미야의 사적을 공부하는 것을 계기로 하였는데, 뭔지 모르게 앞에 오는 것도 그렇게 슬픈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여, 하는 말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하는 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