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실천론2004/11/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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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론
인식과 실천의 관계
–앎과 함의 관계에 대하여
毛澤東
1937년 7월

출판사 두레에서 나온 이등연씨의 번역을 참고했습니다.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은 인간의 사회성과 인간의 역사적 발전을 떠난 채 인식의 문제를 관찰했다. 그리하여, 인식이 사회적 실천에 대해 갖는 의존관계, 즉 생산과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의 의존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우선, 인간의 생산활동이 가장 기본적인 실천활동이며 그밖의 다른 모든 활동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인식은 주로 물질적 생산활동에 의존하며 [이를 통해] 자연의 현상과 성질, 법칙성,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인간은 [이러한] 생산활동을 통해, 여러가지 상이한 정도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정한 상호관계도 차츰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지식들은 생산활동을 떠나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계급이 없는 사회 속에서 각 개인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여 일정한 생산관계를 맺고 생산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생활 문제를 해결한다. 여러 종류의 계급 사회에서는 각 계급의 사회구성원들이 역시 여러 상이한 방식으로 일정한 생산관계를 맺고 생산활동에 종사하면서 인간의 물질적 생활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인간의 인식발전의 기본적 원천이다.

인간의 사회적 실천은 생산활동이라는 하나의 형태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 즉 계급투쟁, 정치활동, 과학이나 예술활동 등이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사회의 실제생활 모든 영역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생활뿐만 아니라 [물질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치생활, 문화생활 등을 통해서도,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 사이의 여러 가지 관계를 알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각종 형태의 계급투쟁은 인간의 인식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계급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일정한 계급적 지위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며, 모든 사상에는 틀림없이 어떤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인류사회의 생산활동의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한걸음씩 한걸음씩 발전해 나가기 때문에, 자연계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즉 얕은 것에서 깊은 것으로, 일면적인 것에서 다면적인 것으로 점차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은 사회의 역사에 대해서 그저 일면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착취계급의 편견이 역사를 항상 왜곡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 규모가 협소하여 인간의 시야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전면적이고 역사적인 이해를 하면서 사회에 대한 인식을 [하나의] 과학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거대한 생산력—대규모 공업과 함께 근대 무산계급이 출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 과학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만이 외계에 대한 인간의 진리성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회적 실천과정(물질적 생산과정, 계급투쟁과정 또는 과학실험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사상 속에서 예상했던 결과에 도달했을 때에만 그 인간의 의식은 비로소 검증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즉 기대했던 결과들을 획득하려면 인간은 자신의 사상을 객관적 외계의 법칙에 합치시켜야만 한다. 만약 합치시키지 못한다면 실천에서 실패할 것이다. 샐패한 뒤에라도 그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자신의 사상을 외계의 법칙에 적합하도록 바르게 고친다면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또는 “하나의 좌절을 맛보면 하나의 지혜를 얻는다”는 속담의 뜻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은 실천을 제1의 지위에 두고 모든 인간의 인식은 실천과 조금도 분리될 수 없다고 여기며, 실천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인식을 실천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체의 잘못된 이론을 거부한다. 레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실천은 보편성이라는 가치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현실성이라는 장점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마르크스주의 절착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뚜렷한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계급성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산계급에 봉사한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언명한다. 다른 하나는 실천성으로서 이론의 실천에 대한 의존관계, 즉 이론의 기초는 실천이며 그 이론은 다시 실천에 봉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식 또는 이론의 진리 여부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어떻게 느끼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사회적 실천의 결과가 어떠한가에 따라 판정된다. 오직 사회적 실천만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실천적 관점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에서 제1의, 기본적 관점이다. [2]

그러면 인간의 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실천에서 발생하고 다시 실천에 봉사하는가? 이것은 인식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명백해진다.

원래 실천과정에서 인간은 처음에는 각 사물들의 현상, 각 사물들의 일면적인 부분, 각 사물들 사이의 외적 연관밖에 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외부 사람들이 연안(延安)에 시찰하러 왔다고 했을 때, 그들은 처음 하루 이틀 동안은 연안의 지형·거리·가옥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연회(宴會)·야회(夜會)·군중집회 등에 참가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읽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사물의 현상, 사물의 각 일면, 사물의 외적 관계이다. 이것을 인식의 감성적 단계, 즉 감각과 인상의 단계라고 한다. 즉 연안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연안 시찰단원의 감각기관에 작용하여 그들의 감각을 일으켜 그들의 두뇌 속에 수많은 인상과 그 인상들 사이의 대략적인 외적 관계를 지어내는데 이것이 인식의 제1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아직 심화된 개념들을 형성하거나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사회적 실천이 계속되면서 실천과정 속에서 인간의 감각과 인상들을 일으키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면 인식과정상에서 인간의 두뇌에 갑작스런 변화(비약)가 일어나 개념이 형성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더 이상 사물의 현상, 사물의 여러 가지 일면적인 부분, 사물의 외적 관계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 사물의 전체성과 내적 관계를 파악한 것이다. 개념과 감각은 양적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 차이도 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해 나아가서 판단과 추리라는 방법을 사용하면 우리는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양미간을 좁히면 꾀가 나온다”는 표현이나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좀더 생각해 보자”는 말은 바로 인간이 두뇌 속에서 개념을 사용하여 판단과 추리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식의 제2단계이다. 외부에서 온 시찰단원들이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서 그 자료들을 “곰곰히 살펴보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抗日民族統一戰線政策)은 철저하고 성의있고 진지한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구국을 위한 단결에 보다 진지하다면 이러한 판단은 한걸음 한걸음 더 나아가 “항일민족통일전선은 능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판단·추리의 단계는 인간이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전과정 속에서 한층 중요한 단계인 이성적 인식 단계이다. 인식의 진정한 과제는 감각을 거쳐 사유에 도달하고, 더 나아가서 객관적 사물의 내적 모순, 그것들의 법칙 그리고 하나의 과정과 다른 과정 사이의 내적 관계를 이해해 나가는 것, 즉 논리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 인식이 감성적 인식과 다른 까닭은 감성적 인식이 사물의 일면적 부분, 현상, 외적 관계에 관계된 반면, 논리적 인식은 크게 한걸음 나아가서 사물의 전체성, 본질, 내적 관계에 도달하여 주변세계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준다. 그럼으로써 논리적 인식은 주변세계의 발전을 그 전체 속에서, 모든 측면의 내적 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실천에 기초하여 피상적인 데서 심오한 데로 나아간다는 인식의 발전과정에 관한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마르크스주의 이전에는 누구도 이렇게 해결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맨처음 이 문제를 정확히 해결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인식의 심화과정, 즉 사회적 인간이 생산과 계급투쟁이라는 복잡하고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실천활동 속에서 감각적 인식이 논리적 인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설명했다. 레닌은 “물질이라는 추상, 자연법칙이라는 추상, 가치라는 추상 등 한마디로 모든 과학적(즉 정확하고 진지하며 허구나 피상적인 것이 아닌) 추상은 자연을 더 심오하고 더 정확하고 더 완전하게 반영한다.” [3] 고 말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인식과정의 두 단계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즉, 낮은 단계에서는 인식이 감성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높은 단계에서는 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어떤 단계이건 모두 통일적 인식과정 속의 단계이다. 감성과 이성은 성질이 서로 다르나 서로 분리되지 않고 실천의 기초 위에서 통일되어 있다. 감각된 것은 바로 이해할 수 없으나 이해된 것은 보다 깊이 감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실천은 증명해준다. 각감은 단지 현상의 문제를 해결할 뿐이며, 이론만이 본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결코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누구든지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면 그 사물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즉 사물의 환경 속에서 생활(실천)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의 법칙을 미리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자유경쟁단계에 살았던 마르크스는 제국주의시대의 특수한 법칙들을 미리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제국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최후단계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닌과 스탈린만이 이 과제를 담당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이 그들의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천재였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당시의 계급투쟁과 과학실험이라는 실천에 몸소 참여했다는 데 있다.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그러한 실천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학자는 문 밖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천하를 다 안다”는 말이 한낱 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이 말이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몸소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실천과정에서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이 문자와 기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학자’에게 전해졌을 때 비로소 학자는 간접적으로 “모든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 하나의 사물 또는 어떤 종류의 사물들을 직접 인식하고자 한다면, 현실을 변혁하는 투쟁, 즉 하나의 사물 또는 몇 개의 사물을 변혁하는 실천적 투쟁에 직접 참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러한 사물의 현상과 접촉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변혁하는 실천적 투쟁에 직접 참여해야만 한 사물 또는 어떤 종류의 사물들의 본질을 밝혀내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실제로 밟아가는 인식의 과정인데 오로지 일부 사람만이 사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하여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자신이 ‘천하제일’이라 자처하는 ‘박식가’들로서 이것은 자신을 모르는 소치의 결과이다. 지식은 과학의 문제로서 조금의 허위나 자만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정반대, 즉 성실하고도 겸손한 태도이다. 지식을 얻으려면 현실을 변혁하는 실천에 참여해야만 한다. 배의 맛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배를 먹음으로써 배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원자의 구조와 성질을 알기 위해서는 물리적·화학적 실험을 통해서 원자의 상태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혁명의 이론과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혁명에 참여해야만 한다. 모든 참된 지식은 직접적인 경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사실 우리들의 지식의 대부분은 과거의 지식과 외국에서 전해진 지식과 같이 간접적인 경험에서 유래한다. 물론 그러한 지식도 옛사람과 외국인에게는 직접적인 경험이었다. 또한 이러한 지식이 직접경험과정에서 레닌이 말하는 “과학적 추상”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과학적으로 객관적 사물을 반영하고 있다면 이 지식들은 신뢰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지식은 다름아닌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더우기 자신에게는 간접적인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경험일 수가 있다. 따라서 지식을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지식도 직접경험에서 분리될 수가 없다. 모든 지식은 객관적 외계에 대한 인간의 육체적 감각기관을 통한 감각에서 발생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러한 감각과 직접경험을 부정하거나, 현실 변혁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를 부정한다면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박식가’가 어리석다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속담에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실천의 경우에도 진리이며 인식론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실천을 떠난 인식이란 있을 수 없다.

현실을 변혁하는 실천의 기초 위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과정—인식이 점차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다음에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무산계급의 인식은 기계 파괴나 자연발생적 투쟁을 하던 실천의 초기에서는 단지 감성적 인식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여러 가지 현상 중에서 일면적 부분 또는 외적 과계밖에 인식하지 못했다. 그때의 무산계급은 아직 이른바 ‘즉자적 계급’이었다. 그러나 실천의 제2기인 의식적·조직적 경제투쟁 및 정치투쟁의 시기에는, 마르크스·엥겔스가 실천과 장기간에 걸친 투쟁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여러 가지 경험을 과학적 방법으로 종합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무산계급을 교육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사회의 본질, 사회계급들 간의 착취관계, 그리고 자신의 역사적 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무산계급은 ‘대자적 계급’이 되었던 것이다.

중긱인민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제1단계는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과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등 막연한 배타주의적 투쟁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표면적·감성적 인식단계이다. 제2단계에서야 비로소 중국인민은 이성적 인식단계에 도달하여 제국주의의 내적·외적 모순들을 간파함과 동시에 제국주의가 중국 매판계급 및 봉건계급과 결탁하여 중국인민대중을 억압·착취하고 있는 본질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1919년 5·4운동 전후에 시작되었다.

다음엔 전쟁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전쟁의 지도자들이 전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처음 단계에서 그들은 구체적인 전쟁(가령 우리의 지난 10년간의 토지혁명전쟁)의 심오한 지도법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 단계에서 그들은 단지 많은 전투 경험을 하는 데 지나지 않고 게다가 많은 패배를 맛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승리의 경험, 특히 패배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전쟁 전체에 관철되고 있는 내부적인 것, 즉 구체적인 전쟁의 법칙성을 이해할 수 있고 전략·전술을 알게 되어 마침내 자신있게 전쟁을 지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시기에 지도자가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바뀐다면 그 또한 몇 번의 패배를 겪은 후에(경험을 얻은 후에) 전쟁의 법칙을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일부 동지가 과업을 용감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왜 자신이 없는가? 그것은 그가 이러한 종류의 일을 지금껏 접촉해 본 적이 전혀 없었거나 접촉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조금밖에 못했기 때문에, 활동의 내용과 환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러한 활동의 법칙성에 대해 알지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의 성격이나 조건을 자세하게 분석한 후에는 비교적 자신을 갖게 되고 그 일을 기꺼이 하려고 한다. 만약 그가 그 일 속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게 되어 그 일에 대한 경험을 얻고 문제를 주관적·일면적·표면적으로 보지 않고 상황을 겸허한 자세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 일을 추진시켜 나갈 방법에 대한 결론을 몸소 내길ㄹ 수 있게 되고 일에 대한 자신감도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주관적·일면적·표면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라 할지라도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사물을 전체적으로(사물의 역사와 전반적인 현상황) 바라보지 않으면 사물의 본질(사물의 성질과 이 사물과 저 사물 사이의 내적 관계)에 접촉하지 않은 채 혼자 옳다고 여기면서 호령하고 명령한다. 그러한 사람은 실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인식 과정에서 제1보는 외계의 사물과 접촉하는 감각단계이다. 제2보는 감각된 자료를 정리하고 재구성하여 종합하는 개념·판단·추리의 단계이다. 감각된 자료가 아주 풍부하고(단편적이거나 불완전하지 않고) 실제에(착각이 아닌) 상응할 때만 그 자료는 정확한 개념과 이론을 형성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해 두어야 하겠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서 다시 강조하는 것은 이성적 인식이 감성적 인식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성적 인식이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낱 관념론자이다. 철학사에는 ‘합리론’이라는 학파가 있는데 그들은 이성의 실재성만을 인정하고 경험의 실재성은 인정하지 않으며, 이성만을 신뢰할 수 있고 감각적 경험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학파의 오류는 사실을 전도시켰다는 데 있다. 이성적인 것은 확실히 감각에서 유래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은 원천없는 물줄기나 뿌리없는 나무처럼 주관적·임의적이며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인식과정의 순서에서 감각적 경험이 첫번째로 작용한다. 따라서 사회적 실천만이 인간의 의식을 낳게 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식과정에서 사회적 실천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자신을 객관적 세계로부터 차단시킨 사람에게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인식은 경험에서 출발한다—이것이 인식론의 유물론이다.

둘째, 인식은 심화되어야 하고 인식의 감성적 단계는 이성적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이것이 인식론의 변증법이다. [4] 인식이 낮은 감성적 단계에 머무를 수 있고 감성적 인식만을 믿을 수 있으며 이성적 인식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는 역사상의 ‘경험론’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 이론의 오류는 감각 재료가 객관적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진실성은 반영하지만(나는 여기서 경험이 내재적 체험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적 경험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일면적이고 표면적일 뿐 사물을 불완전하게 반영하고 본질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에 있다. 완전히 사물 전체를 반영하고,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사물의 내재적인 법칙성을 반영가히 위해서는 사고작용을 통해 풍부한 감각자료를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를 골라내며, 가짜를 제거하고 진짜를 취하며, 이것에서 저것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진전하는 사고 작용을 통해서 감각된 풍부한 자료들을 개조하여 개념 및 이론 체계를 구축해야만 하며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비약해야만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인식은 보다 공허하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인식과정에서 실천적 기초에 근거하여 과학적으로 개조된 것이라면,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객관적 사물을 더욱 심오하게, 더욱 정확하게, 더욱 완전하게 반영한 것이다. 이에 반해 통속적인 실무주의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이론을 경시하고 경험만을 존중하므로 명확한 방침이나 장기적인 전망의 결여로 인해 객관적인 과정 전체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없고 자그마한 성공이나 편협한 소견을 갖고 자기만족에 빠진다. 이런 사람이 만약 혁명을 지도한다면 그는 혁명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말 것이다.

이성적 인식은 감성적 인식에 의존하고 감성적 인식은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이다. 철학 중에서 ‘합리론’과 ‘경험론’ 어느 것도 인식의 역사적 또는 변증법적 성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각기 일면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유물론적 합리론이과 경험론이지 관념론적 합리론과 경험론은 아니다) 인식론 전체로서 보면 모두 오류이다. 감성에서 이성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운동은 작은 인식과정(가령 하나의 사물이나 과업에 관한 인식)과 큰 인식과정(가령 사회전반이나 혁명에 관한 인식) 모두에 적용된다.

그러나 인식운동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운동이 이성적 인식에서 그친다면 아직 문제의 절반밖에는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절반만을 파악한 데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객관세계의 법칙성을 이해함으로써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객관적 법칙성에 관한 인식을 적용함으로써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혁한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론은 중요하며 이것의 중요성은 “혁명이론 없이 혁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 [5] 는 레닌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론만이 행동을 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올바른 이론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석에 처박아 둔 채 공론만을 일삼고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그러한 이론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식은 실천에서 시작되고 실천을 통해 이론적 인식에 도달되고 다시 실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인식의 능동적 작용은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에 이르는 능동적 비약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나아가 그것이 이성적 인식에서 혁명적 실천에 이르는 비약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법칙성을 파악한 인식을 다시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으로 되돌리고, 그러한 인식을 다시 생산의 실천, 혁명적인 계급투쟁 및 민족투쟁의 실천, 그리고 과학실험의 실천에 적용시켜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이론을 검증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며 전 인식과정의 계속이다. 이론이 객관적 현실에 부합하는가 아닌가는 앞에서 이야기한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인식운동에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며 또한 완전히 해결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성적 인식을 사회적 실천으로 되돌리고 이론을 실천에 적용시켜서 그 이론이 예상했던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보는 것이다. 많은 자연과학의 이론들이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 이론들이 자연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의 과학적 실천에 의해서 검증되었을 때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도 이 학설이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에 의해 과학적으로 만들어졌을 때뿐만 아니라 그 뒤 혁명적인 계급투쟁과 민족투쟁의 실천을 통해서 실증되었을 때인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보편적 진리가 되는 까닭은 누구든지 실천을 할 때 그것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인식의 역사는 많은 이론들의 진리성이 불완전하며, 이 불완전성은 실천의 검증을 통해서 바로잡힌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많은 이론이 잘못되어 있고, 잘못은 실천의 검증을 통해 시정된다.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며 “생활과 실천의 관점은 인식론의 첫째의, 그리고 기본적인 관점이 되어야만 한다” [6] 는 이유가 곧 여기에 있는 것이다. 스탈린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지적했다. “이론은 혁명의 실천과 혁명이론을 지침으로 하지 않으면 맹목적인 실천이 된다.” [7]

이렇게 하면 인식운동은 완결됐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완결되었으면서도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의 인간이 어떤 발전단계에서 어떤 객관적 과정을 변혁하는 실천(그것이 어떤 자연의 과정을 변혁하는 실천이건 혹은 어떤 사회의 과정을 변혁하는 실천이건 관계없이)에 참여해서, 객관적 과정의 반영과 주관적 능동성의 작용에 의해 인식을 감성적인 것에서 이성적인 것으로 진전시키고, 객관적 과정의 법칙성에 부합하는 사상·이론·계획 또는 방침을 세운 뒤에 다시 이러한 사상·이론·계획 또는 방침을 동일한 객관적 과정의 실천에 적용하여 예상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즉 예정했던 사상·이론·계획 또는 방침이 동일한 과정의 실천 속에서 사실로 바뀌어지거나 혹은 대체로 사실로 바뀌어졌다면 이 구체적인 과정에 관한 인식운동은 완성된 셈이 된다. 예를 들어, 자연을 변혁하는 과정에서는 공사계획의 실현, 과학적인 가설의 실증, 기구의 제작, 농산물의 수확,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과정에서는 파업의 승리, 전쟁의 승리, 교육계획의 실현, 이 모두가 예상했던 목적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연을 변혁하는 실천이나 사회를 변혁하는 실천에서 처음부터 예상했던 사상·이론·계획 또는 방침이 조금도 틀림없이 그대로 실현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것은 현실변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인데 그는 과학적·기술적 조건뿐 아니라 객관적 과정 자체의 발전과 표현정도에 따라서도(객관적 과정의 측면 및 본질이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경우)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실천 도중에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사정이 나타남에 따라서 사상·이론·계획·방침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때로는 전체를 수정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 즉, 처음에 예정했던 사상·이론·계획·방침이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현실과 일치하지 않거나 잘못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해야 비로소 그릇된 인식이 시정될 수 있고 객관적 과정의 법칙성에 부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실천 속에서 예상했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시점에 이르게 되면 어떤 발전단계에서 어떤 객관적인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완성된 셈이다.

하지만 과정의 추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인식운동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자연계에 속하든 또는 사회에 속하든 모든 과정은 모든 내부의 모순과 투쟁에 의해 앞으로 전진하고 발전하는 것이며 인간의 인식운동도 이에 따라 진전하고 발전해야 한다. 사회운동 속에서 진정한 혁명지도자는 자신의 사상·이론·계획·방침에 오류가 있을 때에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잘 시정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객관적 과정이 한 발전단계에서 다른 발전단계로 진전하고 변화했을 때 이 변화에 따라 자신을 비롯해 혁명에 참여한 모든 혁명동지들의 주관적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새로운 상황 변화에 들어맞는 새로운 혁명과제와 새로운 활동방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의 시기에 상황의 변화는 매우 급격한데 혁명당원의 인식이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재빨리 변화할 수 없다면 그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그러나 사상이 실제보다 뒤처지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이는 인간의 의식이 수많은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제약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명진영 내에 있는 완고파에 반대한다. 그들의 사상은 변화하는 객관적 상황에 따라 진전할 수 없고 역사에서는 우익기회주의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순의 투쟁이 객관적 과정을 이미 앞으로 전진시켰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채 그들의 인식은 낡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 모든 완고파의 사상은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사상은 사회적 실천과 유리되어 있다. 그들은 사회라는 수레 앞에 서서 안내자의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레의 뒤를 따라가면서 수레가 너무 빨리 간다고 투덜거리고 수레를 뒤로 끌어당겨 뒷걸음질치게 만드는 데 급급하다.

또한 우리는 극좌공론주의(極左空論主義)에도 반대한다. 그들의 사상은 객관적 과정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뛰어넘어 어떤 사람은 환상을 진리로 여기고 또 어떤 사람은 장래에 가서야 현실화될 수 있는 이상을 억지로 현실화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실천과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며, 행동상으로는 모험주의로 나타난다.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 기회주의와 모험주의는 모두 주관과 객관의 분열, 인식과 실천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과학적 사화적 실천을 특징으로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인식론은 이러한 그릇된 사상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세계의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개개의 구체적인 과정의 발전은 모두 상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의 큰 물줄기 속에서 각각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하나의 구체적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상대적인 진리성밖에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무수한 상대적 진리의 총화가 곧 절대적 진리이다. [8] 객관적 과정의 발전은 모순과 투쟁으로 가득찬 발전이며 인간의 인식과정의 발전 또한 모순과 투쟁으로 가득찬 발전이다. 객관적 세계의 모든 변증법적 운동은 언젠가는 모두 인간의 인식 안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사회적 실천의 발생·발전·소멸의 과정은 무한하며, 인간의 인식의 발생·발전·소멸 또한 무한하다. 일정한 사상·이론·계획·방침에 따라 객관적 현실의 변혁에 매진하는 실천이 하나하나 진전해 가면서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하나하나 심화되어 간다. 객관적 현실세계가 변화해가는 운동은 영원히 완결되지 않으며 실천을 통한 인간의 진리인식도 영원히 완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는 결코 진리의 종착점은 없으며, 그것은 부단한 실천을 통해 진리의 인식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 있다. 우리의 결론은 주관과 객관, 이론과 실천, 그리고 앎과 함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통일이며 구체적 역사를 떠난 모든 ‘좌익’ 또는 우익의 그릇된 사상에 반대하는 것이다.

사회가 현단계까지 발전함에 따라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변혁할 책임은 이미 역사적으로 무산계급과 그 정당의 어깨 위에 지워져 있다. 이처럼 과학적 인식에 근거하여 결정된 세계변혁의 실천과정은 세계나 중국 속에서 하나의 역사적 시기에 도달했다. 이 역사적 시기는 세계와 중국에 존재했던 암흑을 완전히 일소해 버리고 전에 없던 광명의 세계가 되는 역사상 미증유의 중대 시기인 것이다. 세계를 변혁하기 위한 무산계급과 혁명적 인민의 투쟁은 객관적 세계를 변혁하고 자기의 주관적 세계를 변혁하는, 다시 말해 자기의 인식능력을 변혁하고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관계를 변혁하는 임무를 실현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지구상의 일부지역에서는 이미 이런 변혁이 행해지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소련이다. 소련의 인민은 지금도 이러한 변혁의 과정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과 세계의 인민은 모두 이러한 변혁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변혁될 객관적 세계에는 변혁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먼저 강제적인 변혁단계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자발적인 변혁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전체가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혁하고 세계를 변혁할 때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 진리를 발전시킨다. 감성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능동적으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시키고, 또 이성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능동적으로 혁명적 실천을 지도함으로써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변혁한다. 실천·인식, 다시 실천, 다시 인식이라는 형식이 끝없이 순환·반복되고 이렇게 순환할 때마다 실천과 인식의 내용은 한층 높은 수준으로 심화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전체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앎과 함의 통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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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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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 I. Lenin, “Conspectus of Hegel’s The Science of Logic”. Collected Works, Russ. ed., Moscow, 1958, Vol. XXXVIII, p. 205.

[2] Karl Marx, “포에이르바하에 관한 테제”.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Selected Works, in two volumes, Eng. ed., FLPH, Moscow, 1958, Vol. II, p. 403, and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 ring. ed., FLPH, Moscow, 1952, pp. 136-4.

[3] V. I. Lenin, “Conspectus of Hegel’s The Science of Logic”, Collected Works, Russ. ed., Moscow, 1958, Vol. XXXVIII, p. 161.

[4]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의 기초 위에서 이해하고 연구하기 시작해야 하며 경험에서 일반으로 고양되어야만 한다”는 구절을 참조 (앞의 책, p. 197.)

[5] V. I. Lenin, “What Is to Be Done?”, Collected Works, Eng. ed., FLPH, Moscow, 1961, Vol. V, p. 369.

[6] V. I. Lenin,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Eng. ed., FLPH, Moscow, p. 141.

[7] J. V. Stalin, “The Foundations of Leninism”, Problems of Leninism, Eng. ed., FLPH, Moscow, 1954, p. 31.

[8] See V. I. Lenin,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Eng. ed., FLPH, Moscow, pp. 12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