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켐,직업윤리와 시민도덕 2004/11/14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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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윤리와 시민도덕

Durkheim, E. 1992[1904∼1912]. Professional Ethics and Civic Morals, trans. by Turner, B. S. London: Routledge. [직업윤리와 시민도덕]. 권기돈 옮김. 1998. 새물결.

“우리 시간에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직업생활 속에서 우리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밖에 아무 규칙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심없이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려는 성향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이 저서는 뒤르켐(1857-1917) 사후에 출간된 그의 3회에 걸친 ‘직업윤리’에 관한 강의록(뒤르켐의 조카이자 제자인 민속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에 의해 1937년 [형이상학과 도덕평론]이 출간됨)과 ‘시민도덕’에 관한 15회의 강의를 묶어 1957년 코넬리아 브룩필드가 영문 번역하고 1992년 브라이언 터너가 재판 서문을 붙여 발간한 것으로 뒤르켐의 미발표 강의록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사회적 질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직업집단”을 보았던 뒤르켐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저서로 재판 서문에서 터너는 굴드너(Gouldner, A.)가 주장하였듯이 뒤르켐이 사회 질서에 관한 보수주의 이론가가 아님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를 이 강의록이 제공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뒤르켐은 ‘직업윤리’에 관한 제1강의에서 “산업 발전에 따른 사회적 병폐는 중간적 기관들이 국가와 개인의 고리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였으며 시민도덕 체계의 발전과 더불어 직업윤리와 직업조직체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제2강의에서부터 그는 역사적 편견을 지적하기 위해 사례 분석으로 길드제도를 다루면서 길드는 고대사회 곧, 로마시대에도 존재했던 조직체로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고 무한 경쟁의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데 기여하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그의 핵심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직업윤리 제1강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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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규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종류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인간 일반과 관련된 것, 즉 우리 이웃에 대해서처럼 우리 각자와도 관련된 것이다. 우리 자신이건 우리의 동료이건 인간이 존중되는 방식과 인간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정하는 모든 규칙은 모든 인간에 대해 예외없이 타당하다. 보편적 도덕적인 적응력을 갖는 이 규칙들은 역시 두 가지 군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한 우리 각자의 관계와 관련된 규칙들, 즉 ‘개인적’ 규약이라 불리는 도덕적 규약을 이루는 규칙들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특수한 집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관련된 규칙들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는 다른 종류의 의무들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인간적 본성 일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보여주지는 않는 특수한 자질에 의지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의 차이, 연령의 차이, 친족관계의 친소 정도에서 비롯되는 차이를 찾아낼 수 있으며, 이 모든 차이들이 도덕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는 직업윤리를 구성하는 규칙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교수로서 의무를 갖지만, 상인의 의무를 갖지는 않는다. 상이한 직업이 있는 만큼 많은 형태의 도덕이 있으며 이론상 각 개인은 오직 하나의 직업만을 갖기 때문에, 그 결과 상이한 형태의 도덕이 각각 전혀 다른 개인들의 집단에 적용된다.

우리가 본 연구과정에서 이 윤리에 부여하는 위치는 우리가 막 확인한 이 윤리의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개인적 도덕 속에서는 자리를 차지할 곳이 없는 이 도덕적 다원주의는 가족 도덕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계속해서 직업윤리에서 정점에 도달하고는 시민도덕에서 쇠퇴하다가 마침내 인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도덕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1) 다른 모든 윤리 영역과 비교할 때 직업윤리의 일반적 본성은 무엇인가? (2) 모든 직업윤리를 수립하고 이것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데 필요한 일반적 조건은 무엇인가?

(1) 이런 종류의 윤리의 차별적 특징, 곧 이 윤리를 다른 지류의 윤리와 구별하는 것은 공적의식이 이 윤리를 무관심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반적으로 말해 이 윤리에 대해서만큼 공론이 그처럼 관대하게 바라봐주는 도덕 규칙은 없다. 직업적 업무하고만 관련된 위반은 그 직업분야의 엄격한 테두리 밖에서는 다만 다소 모호한 비난을 받을 뿐이다.

(2) 바로 이 사실이 직업윤리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본조건을 가리킨다. 하나의 도덕 체계는 항상 한 집단의 일이며, 이 집단이 집단의 권위로 보호할 때만 이 체계가 움직일 수 있다. 곧 우리는 직업윤리에서 도덕적 생활의 진정한 탈중앙집중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공동도덕의 기저에 있는 공론은 사회 전체에 걸쳐 분산되어 이제 그것은 이곳이 아니라 저곳에 있다고도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반면에, 각 직업의 윤리는 제한된 지역안에 국지화된다.

이 명제로부터 당연한 귀결에 따라 다른 명제가 나온다. 직업윤리의 각 지류는 그 직업집단의 산물이기 때문에, 각 직업윤리의 본성은 그 집단의 본성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조건이 같다면, 집단구조의 힘이 클수록 그 집단에 특유한 도덕적 규칙들의 수는 더 많아지고 구성원들에 대해 갖는 권위도 더 커진다. 따라서 직업윤리가 더 발전하고 이 윤리의 작동이 더 선진적일수록 안정성은 더 커지고 직업집단 자체의 조직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 가지 전반적인 기능범주가 있다. 산업과 직업 모두에 적용되는 경제적 기능이 그것이다. 동일한 직업을 가진 개인들은 같은 직업을 가졌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접촉하지만 공동 이익 유지외에 이 관계에는 안정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실업계의 직업에서는 이처럼 조직이 결여된 나머지 최대의 중요성을 지닌 한 가지 결과가 생긴다. 즉 사회생활의 이 영역 전체에는 어떤 직업윤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백보양보해서 직업윤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너무 초보적인 것어서, 기껏해야 우리는 그곳에서 미래의 패턴이나 전조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직업윤리는 의식에 아주 가벼운 짐밖에 되지 않고 윤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사소한 것으로 축소된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의 광범위한 집합적 활동이 도덕영역 바깥에 존재한 채 의무의 절제효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셈이다.

이런 사태는 정상적인 걸일까? 이것은 유명한 교의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고전경제학 이론과 사회주의적 교의는 경제생활은 도덕적 권위가 개입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조직하여 질서정연하고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장치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재산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사물이 개인이나 가족의 배타적인 소유권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중으로 이전되는 데 달려 있다. 일단 이렇게 되면 국가는 일정한 시기에 걸쳐 생산된 부의 정확한 통계만 유지하고, 이 부를 연합한 구성원들에게 합의된 공식에 따라 분배하기만 하면된다. 그러나 이 두 이론은 불건전한 사실상의 사태를 법률상의 사태의 수준으로 격상시킬 따름이다. 어떤 사회적 기능이 도덕적 규율없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개인의 탐욕밖에 남지 않으며, 그리하여 개인의 탐욕이란 본성상 한계가 없고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탐욕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탐욕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유럽사회에 고통을 안겨주는 위기가 발생한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경제생활은 열등계급에게 맡겨져 있는 경멸스러운 2차적 기능이기는 커녕 수위에 올랐다. 우리는 군의 기능, 정부의 기능, 종교의 기능이 경제생활 앞에서 점점 더 저하되고 있음을 본다. 과학의 기능만이 경제생활의 근거를 문제삼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과학 조차도 오늘날의 눈으로보면 거의 아무런 위신도 갖고 있지 않다. 경제생활은 바로 그 본성상 자기충족적일 수 없다. 인간들 속에서 질서나 평화의 상태는 전적으로 물질적인 원인이나 맹목적인 매커니즘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과제인 것이다.

또다른 관점에서 보면 경제생활의 이 비도덕적인 성격은 결국 공적 위험으로 이어진다. 이 질서의 기능은 오늘날 나라의 에너지 대부분을 흡수하고 있다. 수많은 개인들의 삶은 산업 및 상업 영역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따라서 이 환경 속에서 있는 사람들이 도덕의 희미한 흔적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실존도 대체로 모든 도덕적 영향력과 분리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같은 사태가 어떻게 탈도덕화의 원천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또 흔히 그렇듯이 애써 귀를 막으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의무감을 상기시키는 어떤 집단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시간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직업생활 속에서 우리가 명백히 자기이익의 규칙밖에 아무 규칙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심없이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려는 성향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제생활이 규제되는 것, 경제생활을 혼란시키는 갈등이 끝날 수 있도록 경제생활의 도덕적 기준을 높이는 것, 나아가 개인들이 더 이상 개인적 도덕에서까지 생명의 피가 빠져나가 버리는 도덕적 진공속에서 살지 않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기능들의 이전 질서 속에서는 직업윤리가 구체적인 것에 더 가깝게, 사실과 더 가깝게, 그리고 오늘날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립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에 대한 참된 치료책은 경제적 질서 안에 있는 직업집단들에게 지금까지 그들이 갖지 못했던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 직업별 노동조합이나 조합체가 단지 상호간의 지속적인 결속력이 없는 모임일 뿐이라면, 이제는 잘 정의되고 조직화된 결사체가 되거나 그런 결사체로 되돌아 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