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상의 뿌리를 찾아서-안동향토주의2004/11/28
이시우의 지역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안동의 향토주의
사진작가 이시우
4월19일 엘리자베스 여왕의 하회마을 방문일정으로 담장 보수에, 마을 청소에 분주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오는 길에 본 지역신문에는 정동호 안동시장이 안동문화의 세계화를 주장하며 흥분하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시장과 함께 쾌재를 부를 다른 안동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번 엘리자베스여왕 방문은 그동안 안동대 임재해교수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일명 안동지역문화의 “세방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 처럼 비춰진다. ‘세방화’란 무엇인가?
임재해 교수는 ‘안동문화의수수께끼’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세기가 국가중심의 시대이자 도시화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이자 지방화(localization)의 시대이다. 도시화에서 지방화로 회귀하는 동시에 국가단위의 분절된 세계에서 지구촌 단위의 열린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에 적응하기위해서도 세계화와 지방화를 함께 겨냥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화와 지방화는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이다. 지방화를 잘해야 세계화가 가능하며 세계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지방화도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시대를 세방화(glocalization)의 시대라고 할수 있다. 이를테면 외국사람들이 서울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회마을의 하회탈춤을 보기위해 한국에 올 때 한국은 세계화되는 것이며, 하회마을과 하회탈춤이 세계화되어야 지방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안동과 안동의 핵이라고 주장하는 하회마을에 대해 세계화 가능성의 요소로 드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안동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주1) 또한 경주는 한시대를 대표하나 안동은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문화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주2) 경주가 불향(佛鄕)이라면 안동은 유향(儒鄕)이자 불향이다.(주3) 안동사람들의 이러한 자부심은 충분히 근거 있는 것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임교수는 재야민속학자로 당시 대부분의 재야학자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실시된 문화재정책에 대한 반대자였다. 문화재를 박제화시킬 뿐아니라 그 선정기준도 다분히 정치적입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경주와 안동에 문화재가 많은 것은 박정희 이후 영남이 패권지역이었던 것과 무관치 않으며, 김대중대통령 당선이후 백제문화연구가 활발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또한 전역사 시대를 통털어 유물이 존재하는 곳도 어디 안동뿐인가? 강화도는 안동못지 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안동을 추로지향(주4)이라 부를 정도로 유향이라 하지만 사실 조선시대 전기간중에 유교적 권력을 장악한곳은 영남지역이 아니라 기호지방으로 불리는 경기충청지역이었다.
그런데 왜 안동문화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까? 우선 모든 지역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내고 발전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전인수격으로 역사를 해석하여 자기 지역의 정체성을 다른 지역문화와의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만들어가고자 할 때 그것은 곧장 긴장을 발생시킨다. 예를들면 논개의 경우가 그러하다. 논개는 장성에서 나서 화순으로 시집가고 진주에서 죽었다. 그런데 논개는 진주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논개를 다시 찾아올려는 장성군과 뺏기지 않으려는 진주시의 긴장은 당사자들에 의해 영호남의 갈등으로 인식되고 있다. 안동시의 자기문화 정체성 찾기는 그 어느지역보다 치열하다. 예로 안동시는 매년 안동사투리 경연대회를 한다. 안동 ‘껑꺼이’로 표현되는 방언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다.(주5) 이러한 지역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한국사회구조에서는 다른지역에 대한 차별과 패권의 문화로 작용한다. 전라도를 비롯한 충청,강원,제주 사람들은 자기 지역 사투리를 쓰면 촌놈으로 찍히거나 심하게는 직장을 잃을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긴 경우 즉시 그 지역 언어에 동화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서울에 사는 호남, 충청,강원,제주민들은 대부분 서울 표준말을 쓴다. 영남지역에 사는 호남사람들은 대부분 경상도말을 쓴다. 이에 반해 영남사람들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영남 사투리를 쓰거나 표준말과 사투리가 혼합된 말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젼 드라마등에서는 깡패, 파출부,운전수등은 호남 사투리를 쓰고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애매하게 충청, 강원도 사투리가 썩여 쓰이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안동의 사투리 경연대회는 지역민들의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지역차별구조속에 왜곡 되고 있는 것이다.
말이 나온김에 임재해 교수가 표방한 세방화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자. 사실은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논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임재해 교수의 말엔 영남의 지역패권주의가 숨어 있다고 판단된다.
임교수가 쓰고 있는 지방화의 영문 개념인 local은 지역이란 말보다는 향토라는 뜻이다.(주6) 지방화란 말이 등장한 것은 서유럽에서 1970년대 이후 거세진 지역주의의 압력으로 인해 국가의 중앙집권성의 약화와 지방분권화를 초래되면서 부터이다. 이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향토주의(localism)가 아니라 지역주의(regionalisme)였다. 향토주의는 지연공동체의 발전적 기초이고 긍정적 에너지이다. 그러나 지역문제는 주민들의 애향심에 기초한 지역간의 수평적 경쟁관계가 아니라, 특정 지역이 특권을 가지고 그를 통해 다른 지역을 차별화 하는 거대 지방적 갈등이며, 이에 따른 수직적인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가리킨다. 지역주의는 최대의 행정구역의 경계도 뛰어넘는 특권지역과 차별지역의 이해 갈등의 문제인 것이다.그래서 봉건시기의 지역 구분인 영,호남이 현재의 행정구역인 전라 남북, 경상남북을 대신해서 작용한다.
따라서 안동은 수평적 관계의 향토주의를 얘기하기 전에 구조적 차별구조인 지역주의 문제에 대해 답해야한다. 다음으로는 세계화의 문제이다.
임교수가 쓰고 있는 세계화란 말도 세계 패권국가들의 신자유주의와 함께 등장한 용어이며 김영삼정부가 이말을 차용하면서 한국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된 임재해 교수의 다음글을 보자.
서구의 지성들은 21세기 세계사의 중심지역을 ‘베세토(beseto)라인’안에 두고 있다. 중국베이징과 한국의 서울, 일본의 도쿄를 잇는 3각지점이 다음세기를 이끌어갈 세계사의 구심점이란 것이다. 베세토 라인의 동아시아 3국은 전통적으로 유교문화국가이다. 달리 말하면 유교문화국가들이 세계사를 이끌어갈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베세토 라인 가운데서도 지리적으로 중심국가일 뿐아니라 유교문화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중국은 사회주의체제 때문에 유교문화의 전통이 말살되었고 일본은 지나친 서구화로 그러한 전통을 제대로 지키고 있지 못하나, 한국은 아직도 그 전통이 꿋꿋하게 살아 있다. 한국가운데서도 안동은 유교문화의 본산이라 할만하다. 유교의 학문적 전통이 강성하며 그 뿌리도 깊을 뿐아니라 문화적 전통 또한 가장 온전한 양식으로 전승되고 있는 지역이다. 더구나 안동은 도시화와 거리가 먼 지역이다. 지방화로 나아가는 시대상황과 유교문화 중심지로서의 공간적 입지가 다 훌륭한 곳이 바로 여기 ‘안동’이다.(안동문화의 수수께끼)
여기서 펼치고 있는 논지는 동아시아론과 오리엔탈리즘의 복사판이다.(주7)
안동이 동아시아론이나 오리엔탈리즘에 기대어 한국의 중심성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소탐대실하는 태도이다. 깡패한테 실컷 얻어맞고도 저항하지 않고 집에 들어와 그들을 도덕적으로 극복했다고 자위하는 식민지 지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동문화의 이데올로그인 임재해 교수의 한국학은 사실은 중국학이며 일본학이다. 엘리자베스여왕의 안동방문은 안동문화의 세계화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식민지시기 일본의 오카쿠라 텐신이 인도와 중국을 ‘위대한 미를 낳은 나라’로 칭송했듯 영국을 비롯한 서방은 안동을 ‘위대한 문화를 낳은 지역’으로 보는지 모른다. 오카쿠라가 그렇게 말할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폭력에 의해 또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청나라와 러시아에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식민지민들의 저항은 당연히 폭력이 되어야 했고, 공업지향적이었다. 일본지성들의 요구처럼 미적,문화적 대응이 아니었다 해도 할수없다. 그것은 이기고 난 다음에 생각해도 될 문제였다. IMF침략속에서 안동의 대응이 문화적으로만, 생태주의적으로만 가는 것은 과연 현명한가?
안동의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안동의 지역전략
IMF위기론은 서민들에겐 고통인내론이고 지배집단에겐 권력재편론이다. 권력재편을 위한 시간벌기와 권력집단간의 눈치보기와 권력다지기까지 IMF위기론은 구미 당기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현재 권력재편의 최전선은 지역문제이다. 지배집단이 IMF를 통해 민족적 정권, 민주적 정권을 만들려고 할 리 만무하다. 87년 부터 92년, 97년 10년 동안 현실에서 민족민주적 과제는 지역문제로 집중되었고 정권교체는 되었으나 지금도 이문제는 한국정치에서 태풍의 눈이다. 한나라당과 국민회의를 구분짓는 경계를 상대적으로 민족적이냐,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냐에서 찾는다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과 국민회의의 차이는 패권적 지역주의 세력이냐, 수평적 지역등권 세력이냐의 차이이다.
우리나라에서 모든 민족적 민주적 과제는 지역문제로 집약된다. 재벌의 문제는 영남재벌의 문제이며 정경유착은 영남재벌과 정치인들의 유착이다.(주8)
따라서 IMF정리과정에서 영남의 지역패권세력이 영남내 소외계층과 소외지역에 군림하는 것을 막느냐 못막느냐의 문제가 핵심문제이다. 동서화합 같은 문화프로그램보다 본질적인 구조인 정치경제적 패권구조가 해결되어야한다. 안동은 대구경북권의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농업도시로서 지역적 차별을 몸으로 느끼는 지역이다.(주9)
안동은 TK세력이 표방하는 선비정신을 제공한 사상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TK세력이 조선시대 안동의 선비정신을 계승한 정통 보수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에대해 통일국시론 발언으로 옥고를 치를만큼 원칙파인 국민신당의 유성환의원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원래 대구문화는 선비문화였지만 일부 인사들이 5·16군사쿠데타를 합리화해 권력에 기생하면서 권력지향의 출세문화로 변질됐다.’
대구경북의 패권세력이 강조하는 ‘조선의 인물 반이 영남에서 나고 영남의 인물반이 안동에서 났다’는 안동예찬론은 오카쿠라의 중국과 인도문화 예찬론과 본질적으로 같다.(주10)
그러나 지역패권세력은 선거때 표가 되지 않는이상 정치경제적 자립능력을 거저 주지는 않는다. 안동이 정당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투표하는 성향은 패권지역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권을 누리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정서를 반영한다. 주목해서 볼 것은 김영삼시절 패권의 핵심이 TK에서 PK로이동하면서 영남헤게모니구조가 부분적으로 균열되게되고 경북과 충청일부가 정치적으로 자립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동안 영남패권의 중심을 차지해온 TK세력이 지역소외감정을 맛보고 지역패권에 대항하는 저항적 지역주의의 흐름에 부분적으로 편입된 것이다. 현재의 지역전선은 PK를 한편으로하고, 호남충청을 중심으로하여 TK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저항적 지역주의세력을 한편으로 하여 형성되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국민회의는 동진정책의 교두보로 안동을 설정한다.(주11)
이런 성과에 기초하여 국민회의는 한나라당이 패권적 지역주의의 부활을 노리고 마산,구미집회를 강행하자 이에 대한 맞불작전을 안동에서부터 시작했다.(주12)
안동의 지역전략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찾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패권과 지역등권의 전선에 자신을 세우는것이다. 안동문화의 세계화 보다도 저항적 지역주의와 소외계층문화와의 연대형성이 더욱 중요하다. 이는 국회의원 선거 결과가 증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지난 선거에서 한나라당에서의 공천 탈락으로 무소속을 달고 나온 권정달의원과 안동 하회출신으로 풍산류씨인 신한국당 유돈우후보와의 대결에서 유후보가 도덕성과 전문성을 집중부각시키며 권후보와의 차별성을 꾀했으나 권후보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주13) 유후보는 지역패권세력과 안동문화의 정체성을 긴밀히 결합시킨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반지역패권적 성격을 표방한 권후보에게 지고만 것이다. 결국 안동의 유권자들은 5공출신인 권후보에 대해 민주-반민주구도가 아닌 지역패권-지역등권구도를 적용 시켜 표를 몰아준 것이다. 권후보가 과거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지역패권 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권후보는 낡은시대의 인물이다. 그를 당선시킨 것은 안동시민들의 반지역패권주의 였지 권후보의 능력이라고 볼 순 없다. 이것이 안동의 과제이다. 민족 민주적 과제가 더 이상 지역문제에 의해 왜곡되지 않도록 지역패권과 지속적으로 타협없이 싸워나갈수 있는 민족민주적 전략을 가진 조직과 인물에 의해 교체되어야한다.
또한 저항적 지역주의에 입각한 안동문화의 정체성을 발굴해내야 한다.
안동의 지역주의
현재에는 유교세력보다 기독교세력이 훨씬 큰 실세 임에도 안동은 왜 추로지향임을 강조하는가? 이것이 국가적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데에는 전적으로 박정희의 역할때문이다.(주14) 지역패권을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한 시초인 박정희는 근대화 사상의 정통성을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뤄진 실학운동에서 찾고자 했다.(주15) 실학과 이황의 교조적 유학은 얼핏 인연이 없을 것 같으나 사실 실학은 공맹에 대한 정통교조적 태도의 일관성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황은 3명의 제자와 사승관계를 형성하는데 그들이 김성일, 유성룡, 정구이다. 이중 정구에게서 허목이 나오고 허목에게서 이익이 배운다. 이들을 일컬어 근기 남인 학파라 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초기 실학자들이다. 이 계보는 근기남인계열로 분류되는 정약용에게 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박정희가 계승하고자 했던 이황의 사상과 문화는 박정희의 지역 패권적 독재주의와는 아무 인연이 없다. 이황도 유성룡도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지역을 차별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황은 호남출신인 고봉 기대승과 사상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4년동안 사단칠정론에 관한 논쟁을 했지만 서로를 비방하거나 모략한적이 없다. 부정적인면이긴 하지만 둘은 서로를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사상적으로 타협,절충하는 데로 결론을 맺을 지경이었다. 또 기호지방, 서인 계열의 한석봉으로 하여금 도산서원의 편액을 쓰게 한것도 그렇다. 또한 서애 유성룡의 집안과 호남의 고산 윤선도의 집안은 400년간이나 친척처럼 교류한 사이 였으니 박정희는 자신의 지역패권을 합리화 하기위해 이황과 유성룡을 부당하게 이용한 셈이다. 붕당은 지역의 차이보다는 사상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산림에 근거한 사림세력이 후퇴하고 서울을 중심으로한 사림세력이 나타난 후에는 말할것도 없고 그전에도 마찬가지 이다. 지역을 통한 패권통치는 박정희에게서 나타난 현상이다. 안동은 박정희의 지역패권주의의 사상적 연원이 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이황의 이조 전기간에 걸쳐 봉건통치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한것에 대해 보수적 유학자를 제외하고 이의를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유성룡에 대해서는 진보계열에서도 그 판단이 뚜렷치 않다. 그것은 대체로 문화유산 답사의 유행과 함께 부각된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에 힘입은바 클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사상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전혀 별개도 아니다.그런이유로 문화는 현대와 당대의 시대사상과 조응하여 판단되어져야한다. 우리나라의 건축가들이 눈물을 흘릴정도로 감탄했다는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시대의 사상문화적 일치를 보여주는데 손색이 없다. 나는 서애의 미학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병법]의 한구절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事)이 그 차례(序)를 얻으면 예(禮)라하고
물(物)이 그 조화(和)를 얻으면 악(樂)이라하니
…백만의 무리가 분수가 정치하여 마치 그ㅡ물눈이 벼리에 달려있는것과 같으니 서序라고 말할수없겠으며, 만인이 한마음이어서 그 사이를 올라탈 수 없으니 화和라고 말할수없겠는가? 천하의 어느 한가지 일도 예악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일찍부터 병법은 일가운데서도 큰일인데 예악없이 가능하겠는가?
일(事)과 물(物)은 내용이며 차례(序)와 조화(和)는 형식의 범주를 말하는 것이다. 예(禮)란 도덕을 말하고 악(樂)이란 예술을 말한다. 서애는 이글에서 군사의 문제가 곧 미학의 문제임을 꿰뚫어 보고 있다. 이러한 유성룡의 관점은 후학들이 매사를 예악의 관점으로 보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도산서원이 도식적이라면 병산서원이 자연과 건축의 행복한 일치를 보여주는 성취를 이룰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사상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초역사적인 것으로만 확대하면 오류에 빠질수 있다. 왜냐하면 당대의 역사적 높이에서 보면 서원건축은 학파가 당파로 발전해나가는 붕당정치의 물질문화적 기초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악사상은 이황의 철학에서 복잡한 인식론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하는 실천론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이점은 율곡학파의 후학들도 경우가 비슷했다. 예학으로의 경도는 점진적인 개혁 또는 정체를 초래했다. 서인이나 동인이나 지배세력으로서 동반관계를 즐길수 있었다. 그러나 이 틀을 뒤집고 정치적 대의명분과 예악을 분리해서 보는 일단의 학자들이 나타나 이황을 계승한다. 서울,경기,강원지방을 연고로 하여 근기(近機)남인계열로 불리는 실학파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허목은 예를 새롭게 해석하여 ”等位등위를 엄격히하고, 친소 親疎를 가르고, 동이同異를 구별하며, 嫌疑혐의를 판결하는 것이 예’라고 정의 한다. 유성룡이 미학적 차원에서 예를 보고 있다면 허목은 엄격한 가치체계로 본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길 ‘피폐한 정치와 무질서해진 법,흩어진 백성과 혼란한 나라는 예가 아니면 평정될수없다.’라고 말하며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들은 이황의 이론을 정통으로 받아들여 ‘춘추가 예악의 대종’(주16)이라 생각하므로서 예악은 춘추정신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노론과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으로 전개되는데 예송논쟁이 그것이다.(주17) 이들은 허목과 한백겸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몰락한 양반들로서 벼슬하지 않고 포의의 선비로 지내며 민중의 생활을 실제로 목격 체험할 수 있었다. 실학파들이 특권화되어가던 지배집단에 대하여 공격적인 입장을 갖게되고 그들의 특권을 해체하고자 한 것은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안동에 연고를 두고 학파를 유지한 유씨가문은 중소지주로서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유성룡이후 유씨가문의 학풍이 예악사상적 관점을 벗어나지 않았던데 비해 근기남인학파는 춘추대의의 명분질서관에 입각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노론과 훈구척신(주18)등 세력화된 신권의 억제와 민중의 생활을 해치던 사대부들의 비대하고 부도덕한 권력에 도전해 갔다. 그 결과 조선성리학을 표방한 노론의 개혁론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노론이 이미 특권층으로서 미온적 개혁안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이들은 그 특권을 박탈함은 물론 자영농 육성을 통한 민중경제의 활성화와 신분적 강제의 해소를 통한 평등사회를 추진하고자하는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개혁안을 내놓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근본적으로 이황의 성리학을 근본으로하였으며 급진적 개혁안을 정당화 할 수ㅌ 있는 근거를 성리학에서 찾기도 한다.(주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탐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데 실학자들의 의의가 있다. 결국 이황의 성리학은 유성룡에 의해서보다 지역의 기득권을 박탈당하고 민중과 함께 연대 했던 이들 근기남인 계열의 실학파들에 의해 계승발전된 셈이다. 안동이 그토록 자랑으로 여기는 이황주의는 예악적 문화주의로 흘러 역사적 한계속에서 사라질뻔 했으나 소외받은 지역과 소외받은 민중세력과 연대함으로서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던 셈이다.
주1) 흔히 경주가 가장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안동이 최다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주2) 안동은 성주신앙의 본원지인 제비원이 있다. 고조선문화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용단지신앙이 있다. 신라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전탑(벽돌탑) 문화는 목탑에서 석탑으로가는 중간단계의 양식으로 탑의 수용과 발전경로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인데 안동에 거의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봉정사 극락전에서 보여지듯 불교의 한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국보인 하회탈과 탈놀이는 이미 고려때부터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 고려 공민왕때는 홍건적의 침략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을 왔고 이때 충성심이 강한 안동사람들이 노국공주가 냇가를 건널 때 발에 물을 묻히게 할수 없다해서 허리를 구부려 사람다리를 즉석에서 만들어 건너게 한데서 놋다리 밟기놀이가 유래되었다. 조선조에는 유교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서원과 양반집이 건축되고 목조건축의 보고가 되었다.
주3)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뿐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과, 전국에서 가장 많은 불교전탑양식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4)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나라가 각각 추나라 노나라라 하여 공맹의 학풍을 정통으로 잇고 있다는 자부심으로부터 만들어진 말이다
.주5) 방언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안동만의 특수한 것은 아니다. 다른나라 지역운동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프랑스의 브레따뉴지방은 19세기 구전가요와 신화가 수집되고 문예 및 문화잡지가 발간되고 독자적인 브레따뉴어 글자가 모색되었다. 영국의 웨일즈 지역운동과정에서 수많은 고유언어 강습소와 강습단체가 생겨나고 사투리 경연대회가 열렸다.스페인의 바스크가 또한 그렇다.
주6) 독일에서 지역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게르데스는 [사회운동으로서의 지역주의](1985)라는 책에서 ‘local’이라는 말은 원래 ‘교회 종탑에서 내려다 볼수 있는 지평선 내의 협소한 지역’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거대지역(region)에 대한 대립어로 사용된다.
주7) 동아시아론의 주된 논지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잠재력을 재해석함으로써 문화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같은 자의적 범주는 유학으로써 동아시아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미국 하버드대의 뚜웨이밍(두유명)을 비롯한 신유가 학자들의 구도에서 온 것이다. 뚜웨이밍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등을 유교문화권으로 통칭한다.유교자본주의로 불리는 그의 이론은 유교의 공동체윤리, 충효사상등이 자본주의 발전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고 보고 있다.유교가 동아시아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서구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유교로써만 경제발전을 해석함으로써 문화결정론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이의 연장선상에서 중국, 일본의 패권주의에 대한 인식없이 한국의 위상을 과대평가하는 자기환상에 대한 경계도 제기된다.중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유교부흥론의 근저에는 92년 인민일보를 통해 본격제기되고 있는 중화민족주의가 갈려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제도 문화가 모두 중국에서 기원하고 중국을 정점으로 한 체계에 의해 비로소 위치를 부여받고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이다.따라서 한중일의 베세토라인에서 한국이 중심이라는 생각은 주관적 소망일뿐이다.
오리엔탈리즘, 동양학은「동양에 대한 서양 사고방식의 총체」라고 사이드는 정의 한다. 사이드는 서구의 근대정신이 그 합리성을 내세우기 위해「광기」를 만들어냈다는 미셸 푸코의 주장을 원용,서구가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동양이라는 타자를 필요로 했다고 설명한다.이에 따라 동양은「서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게 된다.서구가 합리적이라면 동양은 비합리적인 것이고 서구가 중심이라면 동양은 주변부라는 식이다. 일례로 플로베르는「보바리부인」[감정교육」등의 작품에서 동양을 성적 환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이와함께 근대 일본 학계에서 제기된 동양학 혹은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정책학의 음습한 그늘에서 자라났다.서구에서 제기된 오리엔탈리즘의 원형이「서구 대 비서구」의 도식이었다면 일본은 이를「일본 대 기타 아시아 국가」란 방식으로 변형했다. 서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도 타자에 대한 우월주의와 함께 대두되었던 것이다.
주8) 한보는 진주재벌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추진하던 결과 터져나온 사건이다. 한편 김영삼정권출범후 장차관출신지별 점유율을 보면 영남이 41.2%를 차지한다. 강원2%, 제주0% 와 비교된다.
주9) 95년 6.27지방선거, 96년 4.11총선 97년 6.4지방선거에서 보수성과 배타성이 짙은 안동은 혈연과 지연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독특한 선거구로 나타난다. 또 안동 유권자들은 유교의 본향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역 낙후성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는 특징이 있다. 이에따라 각 후보들은 이같은 지역정서를 의식, 굵직굵직한 지역개발 공약과 함께 혈연표 다지기에 열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주10) [조선인물고]나 과거급제자 통계를 보면 구한말까지 양반이 안동에 많았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들어 실제 양반다운 인격을 갖춘사람이 다른지역보다 많다는 점을 두드러지게 입증할 근거는 별로 없다. 어떤 통계를 보더라도 안동의 인물이 특히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다.
주11) 국민일보(98.12.29 06면) 국민회의의 동진정책에 따른 지역민심을 싣는 기사. 이원식 경주시장의 국민회의 입당에 대한 반응은 좋지않은반면
‘그러나 무소속으로 당선됐던 5공의 실력자 권정달權正達의원이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국민회의에 입당한 북부지역 안동은 경주와는 사뭇 다른 정서를 보이고 있다. 권의원이 입당 발표를 할 때만 해도 시민들은 당황해 하는 분위기였으나 이젠 `한번 지켜보자'는 분위기로 반전됐다.이처럼 몇 개월 사이 분위기가 바뀐데 대해 정당인 최운연씨(37)는 “지난 여름 수해 때 김옥두(金玉斗)의원 등 여당 의원들이 현장을 방문하고 지난 10월 안동국제탈춤축제에는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참석하는 등 관심을 가져준데다 권의원이 중앙에서 능력을 발휘해 안동시의 문화예술관련 사업비를 확보해 주는등 긍정적인 측면이 상당 부분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안동 신시장 상인 권모씨(52)는 “소속 정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은 경북에서 가장 낙후된 이 지역을 발전시켜 줄 능력을 갖춘 사람을 원한다”며 “욕심 같아서는 경북도청 이전문제까지도 속시원하게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고 털어놨다.
주12) 마산집회를 둘러싼 공방이 계속되자 여권은 세대결로 맞불을 놓고 있다. 국민회의는 21일 경북 안동지구당개편대회에 이어 22일 구미 지구당 개편대회를 주요당직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대규모행사로 진행해‘동진(東進)정책’의 의지를 재확인시켰다.
주13) 유돈우 후보는 중소기업은행등 3개 은행장을 지낸 전문 경영인출신으로 재정경제위에서 8년동안 활동하면서 한번도 물의를 빚은 적이 없는 청렴결백한 인물로 부각되었고 풍산국가공단과 도청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었다.
주14)장경호 국립문화재 연구소장은 퇴직하면서 학계에 끼친 자신의 성과보다는「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것으로 퇴직의 감회를 대신했다.『71년 도산서원의 자연스럽고 소박한 옛 막돌담장을 헐어내고 사괴석으로 담장을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진 공사였지만 ‘보존’이 아니라 파괴였기 때문에 요즘도 도산서원담장을 바라볼 때마다 괴롭습니다』.지금도 도산서원 뜰에는 박정희가 청와대로부터 옮겨 심게한 희귀나무종인 금송이 모란이나 매화나무를 제압하고 우뚝서 있다. 박정희는 이순신장군을 파시스트 국가주의 상징으로 이황을 보수의 상징으로 조작했다.
주15)박정희의 충실한 대변인인 조선일보의 조갑제는 박정희를 근대혁명을 완수한 실학자로 묘사한다.
주16) 春秋춘추는 오경의 하나로 노나라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공자가 엮은책으로, 역사를 이른느 개념으로 바뀌었으며, 여기에서는 ‘춘추’와 같은 엄정한 비판적 태도를 이르는 말로 대의명분을 뜻함.
주17) 예송논쟁은 사람이 죽었을 때 상복을 어떻게 입을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벌어진 논쟁인데, 상복의 재질과 양식, 구체적인 제작방법과 착용기일등이 사람들의 신분과 등급에 의해 달리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은 1659년 효종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신권강화론자였던 노론의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상복을 1년만 입으면 된다 하였고, 왕권강화론자 였던 근기남인계열의 허목과 윤휴는 왕위를 계승했으므로맏아들과 다름없다 하여 2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세기 최대의 권력투쟁이었던 이기간동안 수많은 사람이 권좌에서에서 유배지로, 유배지에서 권좌로 자리이동하는 사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게 된다. 개혁적이었던 이이에 비해 후학들은 반동적인 입장에 서있었고, 교조적이었던 이황에 비해 후학들은 급진개혁적 입장에 서있었다.
주18) 훈구파 도는 훈구척신이란 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한명회 처럼 공을 세운 신하나 친척외척들로 국가로부터 엄청난 토지와 권리를 받아 전횡을 휘두르던 집단이다. 이들은 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탄압했으나 이율곡이후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사대부들은 당쟁의 시대로 들어가 분리된다. 이황을 주축으로 했던 동인과 이이를 주축으로 한 서인간의 대립은 서인이 노론(송시열)과 소론으로 동인이 남인(이황)과 북인(조식)으로 분화되어 갔다, 근기남인계열은 기호지방근처에 연고를 두었으면서 이황과 사상적 교감을 같이 했던 실학자들이다. 주19) 반계 유형원은 이황의 어록을 정리한 책의 제목으로 ‘이자수어’ 라고 이름붙였다. 실학자들의 이황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성인에게만 붙이는 ‘子’를 이황에게 붙여 ‘이자’라고 칭송한 것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노론내에서 송자라고 했던것과 연관된다.
사진글
더이상 쓸모없다고 팽개친 조각들이
기둥썩어 기울자 쐐기로 박혀졌다.
누각을 세워주고난 쐐기들은 짓눌리고…
썩어 들뜬 기둥과 박혀 눌린 쐐기도
세월의 결을따라 닳고 또 닳아서
결국은 그리닳아서 하나가 되어있다.
병산서원 만대루를 받치고 선 기둥들은
하늘로 자라다가 마루와 문득만나
그대로 기둥이된 듯 줄지어 마주본다.
나무는 기둥밑의 쐐기로서가 아니라
하늘을 받쳐든 기둥으로서도 아니라
스스로 서로를 향해 한뼘땅에 서있을뿐
병산을 살짝 받아안 듯 휘어진 용마루와 장쾌한 누각의 배치가 뛰어난
병산서원 만대루
안동시는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보다 낙후된 개발에 더 절박한 가치를 두었다. 도산서원 앞을 가로지르는 안동호는 산꼭대기에 있던 비각까지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안동호 한켠의 안내판. 하지 말라는 문구만 있고 내용은 모두 지워져 있다. 도덕은 부정의 비판이 아니라 긍정의 칭찬을 통해 발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