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상의 뿌리를 찾아서-예산유교주의2004/11/28
지역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예산의 유교주의
사진가. 이시우
[사진1 예산전경]
1. 김대중의 지역정책
김대중의 지역정책은 성공했는가?
김대중에 의한 정권교체의 역사적 의의를 국민회의에서는 수평적 지역등권의 실현이라고 표현했다. 패권적 지역주의를 극복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지역정책의 오류는 이 역사적 성과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김대중 정책집단의 한명인 황태연 교수는 영남의 소외계층과 소외지역연합이란 말로 대선 전략을 정리했다. 그러나 국민회의의 동진정책은 영남의 소외계층이 아니라 지배계층을 향한 것이 되어버렸고 가장 대표적인 소외계층인 노동자들은 정권에 등을 돌렸다. 또한 호남을 비롯한 충청,경기,제주,강원등 지역패권주의로 부터 소외됐던 지역을 정권교체이후 거의 돌보지 않았다. 주1)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다. 최근의 보선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국민회의는 14곳의 재. 보궐 선거에서 용인시장 보궐선거를 제외하고는 모두 참패를 당했다.주2)
현단계에서 정권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두가지 문제의식을 가져야한다.
첫 번째는 계급, 계층을 중심으로한 민중,시민세력의 연대문제이다.
최장집교수는 그람시 이론에 기초한 지역계층연합론에 대해 지역보다 계층의 문제에 더 힘을 실어야한다고 생각의 변화를 토로한 적이 있다. 정권교체의 세축이었던 호남충청의 지역표와 개혁세력의 표중에서 개혁세력의 이탈이 급속화 되고 있다. 한 여론조사전문가는 “문제는 개혁세력이 한나라당으로 응집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분석했다.주3)
이러한 현상은 한나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국민회의가 너무하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심리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여론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심리구조가 지배해왔다.주4)
이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은 고무적이다.주5)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등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점에서 분명 이전의 민중당과는 다르다. 일단 외형상으로는 지역패권지역의 소외계층인 노동자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계층연합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전략이 지역패권을 무너뜨리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 않다면 지역계층연합은 무의미한 것이며 민중당의 전철을 밟는다는 오해를 씻기 어려울것이다.
총선시민연대의 뜻하지 않은 약진은 87년이후 가장 설레이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총선연대는 중대한 전략적 오류를 저질렀다. 공천반대 명단에서 김종필의 이름이 오르고 이회창의 이름이 빠진 것이다. 명단에 적용된 잣대는 [개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개혁]잣대 에서는 김종필이 명단에 들어간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회창과 김대중도 당연히 들어가야한다. 이회창과 김대중은 진보주의자라도 된단 말인가?주6) 더군다나 김종필은 잡고 이회창은 놔주는 현재의 구도는 궁극적으로 지역등권세력과 지역패권세력이라는 구도를 흐리고, 개혁과 수구의 구도로 몰아감으로서 지역등권세력내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총선연대의 운동이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이회창을 승자로 몰아갈 가능성이 많다. 개혁세력과 지역등권세력이 공동으로 승리할 수 있는 카드는 이회창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한나라당에서 지역패권세력과 지역등권세력을 갈라서게 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 가장 강력한 지역패권세력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보수정치를 청산하는 가장 우선순위는 한나라당을 분열, 고립시키고 지역등권 투쟁에서 승리한 민중과 시민으로부터 새천년민주당을 중립화시키는 것이다. 민중이나 시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관념의 선명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실의 변화가 중요하다. 김대중정권의 개혁정책이 계속 실패하고 있는 것도 지역패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총선연대의 유권자 운동은 이미 이겼다고 생각할만큼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해서만 새로운 구조의 성취가 가능하다.
두 번째는 소외지역연대의 문제이다.
국민회의 내부문건 <영호남을 제외한 지역주민의 정서>에서 “서울,경기,인천,강원등의 중부권 주민들 사이에 영.호남간의 지역편중인사 논쟁이 또 다른 지역이기주의(우리도 뭉치자)를 부추기고 있어 심각한 국가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사문제에 관한한 국민의 정부 출범초기에 영남대 비영남의 구도였던 민심이 현재 호남대 비호남의 구도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 국민의 정부 출범후 중부권 주민들도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라며 3급이상 고위직의 지역별 분포에서 수도권(1.5%) 충청(2.7%) 강원권(0.3%)의 인사들이 각각 줄어든 수치를 근거로 들었다.
국민회의내의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중부권 신지역주의’는 97년 대선전 소외지역과 패권지역내 소외계층연합을 주장하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지역패권주의를 개혁이나 민주라는 전선으로서 돌파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민주, 개혁세력이라도 지역패권주의세력일 수 있고 수구반동이라도 지역등권주의 세력일 수 있다. 처음엔 개혁세력이라도 나중에 지역패권구도 속에 들어가면 자신의 개혁마저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회창이 영남패권주의를 부활시키려고 기를 쓰고 이부영이 정형근을 비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지역패권주의가 청산되지 않은 조건에서 민주와 개혁의 기준은 지역등권을 위한 투쟁이다. 지역등권은 여지껏 소외되었던 지역들이 저항적 지역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지역패권세력의 부활의도를 차단시키는 것이다.
만약 독자가 집권세력이라면 지역패권극복을 표방한 현정권의 지역등권정책의 장점을 어떻게 계속 발전시킬수 있을까?
나는 그런 고민 중에 한 지역을 주목한다. 예산이다.
[사진2 이회창 예산방문 환영현수막]
2. 예산
예산은 이회창과 자민련 김종필 또는 공동정권의 결전장이다.
이러한 전선이 형성된 것은 이회창이 예산과 자신을 [고향]이란 이미지로 연결시키면서이다. 97년 예산 보궐선거는 이회창 후보를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리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당시 2선 도전이던 신한국당 후보 오장섭씨는 초선시절 예산의 버스터미널을 예산 외곽으로 옮겨놓는다. 이를 통해 일제때부터 예산의 실질적 생활 중심지였던 예산읍의 모든 구조가 서서히 현 버스터미널 주위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내일신문에 의해 이땅이 오의원 가문의 조상들을 모시는 종중산 대지란 것이 밝혀지면서 그 비리의혹이 대대적으로 제기되는등 인심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오의원을 결정적으로 살려낸 것이 바로 이회창의 예산 고향론이었다. 오장섭 의원은 그 뒤 대선 전까지 예산을 중심으로한 충청표 관리를 위해 이회창의 옆자리에 앉는 사람이 되었다. 그 결과 예산 출신 대통령 만들기 심리는 97년 대선에서도 다른 충청지역과는 달리 이회창 몰표가 나오는 등 일관성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이후 노태우까지 예산을 비롯한 충청도의 지역심리는 한번도 김종필 지도자론을 떠나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종필에서 이회창으로의 극적 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여기에 예산 지역주의의 열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교주의이다.
한번도 근대적으로 봉건성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은 당면 당면의 현실을 움직이는 사회심리의 구조를 찾아내기 위해서 최소한 이씨조선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을 요구한다. 주7)
3. 예산지역주의의 지도자
예산을 비롯한 충청도의 지역주의는 박정희이후 일관되게 김종필지도자를 떠난 적이 없었다. 김종필은 때론 영원한 2인자와 지혜로운 권력의 조정자와 핫바지까지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하며 정치생명을 유지해왔다. 이것은 박정희의 지역패권주의에 의해 전국을 수직적 분업체계로 구획한 결과였다. 호남이나 강원, 제주등과 마찬가지로 소외지역일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호남죽이기의 동반자로 이용당한 역사가 충청의 역사였다. 이것이 87년 대선을 시작으,로한 각종선거에서 민주화의 영향으로 멍청도에서 엄청도로 변모하는 계기를 몇 번 정도는 마련했었다. 그러한 작지만 소중한 발전은 항상 김종필지도자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논리를 이회창이 깬 것이다. 그럼 이회창 지도자론은 충청권에서 볼때는 진보인가?
이회창은 영남지역패권주의를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하는 당의 지도자이다. 김종필은 지역등권을 목표로 공동정부에 참여한 지도자다. 진보와 보수, 신진과 수구의 관점으로 보면 아무래도 대중적 지지는 김종필보다는 이회창에게 쏠릴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예산지역에서 진보와 보수가 주 전선인가?
운동은 의식과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변화와 현실의 변화는 급변하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불균등발전하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고 대립물로서 팽팽히 긴장하게 된다.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긍극적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우선순위에 집중될 때 가장 빨리 극복된다. 의식은 진보와 보수로 갈 수 있으나 현실은 진보가 오히려 반동에 이용, 흡수당하는 역사를 우리는 보아왔다. 한국의 민중당이 그랬고 이태리 북부노동당등이 그랬다. 예산에서의 현실적인 진보는 지역패권에 대항하는 저항적 지역주의이다. 이것은 정권교체로 구체화되었고 신한국당에서 지역패권주의의 엄호를 받던 오장섭을 지역등권주의 세력의 편에 서게 했다. 그 덕분에 그는 총선연대로부터 철새 정치인이란 혐의로 공천반대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지역등권세력으로 옮겨 간 것이 아니라 지역등권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실패한데 있다. 예로 그는 자민련내 지역패권주의자인 김용환의 탈당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장섭에게 이것은 분명 정치적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김종필은 이회창과 자민련내 지역패권주의자인 김용환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이에 김종필과 자민련은 공동정부 철수를 주장하며 김대중에게 마지막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 자체 여론조사 결과와 그동안 몇 번에 걸친 보궐선거의 결과는 자민련을 택할것이냐, 젊은 개혁세력을 택할것이냐에서 후자로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새천년 민주당은 2000년 1월에 있었던 인천남동구청장 보궐선거의 결과를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 선거는 18%라는 역사상 최저의 참여율로 유명해졌다. 그만큼 조직표만이 움직였다는 얘기다. 초반에 국민회의측 이호응후보는 자민련후보의 사퇴와 한나라당후보의 인물면에서의 열세를 들어 승세를 자신했다. 그러나 중앙당에서 자민련과의 불화는 충청표의 대거 이탈로 이어졌고 개혁적 인물을 내세우더라도 지역등권 세력간의 공조 없이는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개혁세력도 자민련도 모두 잡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지역등권의 주체를 만들어내는데 김대중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인제를 내세워 충청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시키려는 전략은 현재로서는 실패할 확률이 더 많다. 이인제 전략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충청도에 지역패권에 맞설 수 있는 저항적 지역주의 세력을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없다. 이것은 반드시 정권만을 탓할문제는 아니다. 민중단체와 시민 단체의 몫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김종필을 대신할 지도자를 세웠다가 실패하면 김종필마저 지역패권주의 세력과 연합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민중세력과 시민세력의 자주와 통일을 향한 꿈은 또 한번 지역패권주의 앞에 좌절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지역등권을 실현하게 하고 민중과 시민이 한 발 더 나아가 성공하는 길은 무엇인가? 관념의 승리가 아니라 현실의 승리를 위해 다시 현실로부터 시작해야한다. 지긋지긋한 반봉건성의 현실로부터… 그리하여 예산의 지역주의는 고고한 연꽃으로 이슬 맺기보다, 반봉건성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의 썩은 물에 다시 자신을 담궈야 한다.
4. 예산의 유교주의
다시 92년 예산 보궐 선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선거는 이회창의 고향이 예산임을 내세워 득표하려는 신한국당 후보와 오랜동안 확고부동의 텃 밭을 일궈온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진보적 세력(예산에선 진보적이다)까지 가세한 자민련 후보와의 선거였다. 신한국당 오 후보는 아무리 지역 유지라 해도 인심을 잃은 상태였다. 반면 자민련후보는 김종필 대통령을 꿈꾸는 예산 사람들의 열망에 농민회, 주민단체등 새롭게 형성된 진보세력의 지원을 받는 국민회의가 가세하여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예산 사람들은 김종필을 버리고 이회창을 선택한 것일까?
이 이야기의 가설은 멀리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서야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충청도는 지금도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산골의 농사꾼이라도 한문을 쓰고 읽을 줄 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지방과 축문을 쓰고 읊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활이 고달프고 어렵더라도 제사만은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유교문화의 영향이다. 예산은 1909년 조선충독부 통계년보 자료중 [각도별 가구수에 따른 양반분포도]에 의하면 당시 경북 3.8% 충북4.5% 보다 월등히 많은 10.3%를 기록하고 있다.
양반의 고장이란 자부심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충청도는 특히 조선 중기 권력의 핵심이었던 노론계열의 지역적 근거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이학파로부터 비롯되는 조선성리학 세력은 인조반정이후 조선 중,후기의 지배 세력이 된다. 율곡학파를 실제로 형성하고, 동방예학의 종장으로 불리워지는 김장생의 활동무대가 충청도 연산(이인제의 고향)이다. 그의 문하로 아들 김집을 비롯 송시열, 송준길, 이시백, 이유태, 신흠, 이경직등 임란이후 노론을 형성한 당쟁과 권력의 핵심 인물들이다. 예산은 서거정,이광림,김정희,이남규등을 낳고 있다. 이로부터 연유하는 유교주의는 왜 김종필을 버리고 이회창을 택하는가?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더 멀리 정도전과 정몽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묘에는 정몽주가 배향되어 있고 정도전은 유학의 역사에서 족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자 조선의 역신이었고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 중에서도 일등 공신인데 말이다. 그뿐인가? 조선 후기 까지의 유학의 기본적인 논리틀은 정도전의 논리를 벗어난 적이 없고, 언로사상이니 과거제도니 하는 국가경영의 기본틀도 그의 저서인 경국대전과 삼봉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상논쟁에 있어서도 불씨잡변(불교논리를 비판)을 능가하는 치열함을 보여준 학자는 조선 후기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간혹 역사는 이성계가 정도전을 이용한 게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이용하여 조선을 개국한 것처럼 묘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의 숙명적 경쟁자였던 정몽주가 어떻게 문묘에 배향되었는가? 여기에는 조선 유학의 뿌리인 의리사상이 깔려 있다. 의리사상은 정몽주와 길재에 의해 정립되었다. 정몽주의 의리사상은 자아인격의 확립으로서의 충실忠實, 인간관계에 대한 의리로서 충신忠信, 국가사회에 대한 의리로서 충성忠誠, 도덕 법칙에 대한 지절로서 충정忠貞이라는 네 단계로 발전했고, 그 마지막 단계는 충절의 완성이자 인류에 대한 헌신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의리정신이란 단순히 왕조에 대한 충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작게는 고려왕실에 대한 충절을, 크게는 현실대응과 유학계승까지 관통하는 실천의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성리학에 있어서 참된 학문은 문장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인격으로 우러나고, 독실한 실천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역사적으로 계승된다는 것이 공통된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뛰어난 이론가요, 정치가인 정도전은 오히려 의리를 배반한 쿠데타세력으로, 정몽주는 성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의리 정신이다. 이러한 의리사상의 관점에서 김종필은 아무리 실력자라 해도 쿠데타 세력이며 권력의 정통성이란 면에서 반동적 보수란 혐의를 벗기 힘들다. 이에 비해 이회창은 전주이씨이자 원칙주의자이고 서울대 엘리트그룹의 지배세력을 상징하는 점에서 정통 보수로서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 병역기피가 이회창에게 그토록 큰 짐이 된 것도 반동보수와 정통보수를 구별하려는 논리와 정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역사상은 오랜 역사를 통해 견고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예산은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윤봉길은 기억하지만 박헌영을 기억하진 않는다. 충청도는 유관순의 만세운동은 기억하지만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중부 빨치산 활동은 기억하지 않는다. 50년이 채 안되는 진보사상의 역사는 600년 보수사상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3 박헌영의 고향 예산군 신양리]
그러나 과연 이회창을 선택하는 것이 의리를 선택하는 것인가?
의(義)란 사람(我) + 양(羊)으로 사람 위에 양이 놓여 있는 구조로 읽혀진다. 여기서 양이란 논어(論語八佾17)에 ‘고삭지희양’(告朔之 羊)이라 하여 매월 초하루날이면 제사때 하늘에 희생으로 바쳤던 양이라는 의미로부터 뜻이 바뀌어 ‘희생(犧牲)’이란 내적 의미를 지니는 말로 해석된다. 아(我)는 본디 날끝이 들쭉날쭉한 창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가차(假借-뜻은 다르나 음이 같은 글자를 빌려서 대신 쓰는 방법)하여 ‘우리’의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의(義)란 [나를 우리이게 하는 희생정신]이라 할 수 있다.
즉 의란 윤리적 덕목이다. 이것이 바로 유학이 아닌 유교적 요소이다. 유교를 유학으로 반전시킨 인물은 주희이다. 주희는 유교 본래의 윤리적 덕목을 불교, 도교등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흡수하여 논리화시키는 과정에서 교조적 학문으로 만들어 갔다. 예를 들면 주희는 당시 자신의 논리를 자주 상의하였던 채침을 찾아가 그전까지 집에서만 지내던 제사를 조상의 묘에서도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동의를 구한다. 그러나 채침은 [왜 이치에 없는 규범을 번잡하게 자꾸 만들려하는가] 하고 동의하지 않는다. 이에 주희는 몇 번을 찾아가 채침의 동의를 구하고 채침은 마지못해 알라서 하라고 억지 시인을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그 복잡한 [주자가례]이다. 이를 둘러싸고 조선에서는 예송논쟁등 치열한 당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법도 있는 가문 운운하는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조상에 대한 의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주8)
[사진4 묘]
그러나 예산의 가장 걸출한 유학자이자 서예가인 김정희조차도 이러한 유학의 번잡한 논리체계에 대해서는 이미 부정하였다. 그는 금석학과 고증학등 고전에 대한 완벽한 연구를 통하여 공자맹자 중심의 구유학에서는 주자등 신유학의 어떠한 번잡한 논리도 발견되지 않음을 증명하고 이를 [천하일등인충효(天下一等人忠孝)]라는 글귀로 남겼다. 이기理氣니하는 번잡한 논리 이전에 충과 효를 성실히 실천하는 것 그것이 유교의 본질임을 말한것이다. 예산군청은 이런 사상을 받아들여 효 실천운동을 군전체의 켐페인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왠지 진부한 감이 있으나 김정희로부터 이어지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계승한것이라 말할정도는 된다.
[사진5 이회창조상묘의 쇠말뚝]
이와 상반되게 유교의 윤리를 왜곡하는 이회창의 지역패권주의 만들기를 보자
이회창의 증조부와 조부의 묘에 누군가 쇠말뚝을 박아 놨다는 보도가 신문을 떠들썩하게 한적이 있었다. 쇠말뚝이 말썽인 것은 당연히 풍수지리설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에 의하면 이러한 도참사상은 경학(논리체계)이 아닌 위학(직관체계)이며 위학은 대부분 위학(僞學-거짓학문)으로 풍수와 같은 논리체계는 부정된다. 조상이 죽으면 그의 사회적 정신이 남는것이지 그의 뼈가루가 어떻게 산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논리이다. 유교주의의 정통성을 자기 이미지로 하는 이회창에게는 자기모순이며 유교적 전통에서도 한갓 삿된 것이다.그와 그의 집안은 어쩌다가 그만 유교와 적대되는 길을 가버린 것이다. 그 어쩌다가란 다름아닌 지역패권주의와 어쩔수 없이 가까워 지다가 이다.주9)
[사진6 이회창집안묘]
예산에서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그의 조상묘는 이회창의 등장과 더불어 번듯하게 되 살아났다. 묘에 쏟는 그와 그의 집안의 정성은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한 희생과 헌신이란 의리義理정신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백성을 섬기면서 개인의 안위도 챙길 수 있는 의사義士란 없다.
5. 예산 지역주의의 과제
김정희로 대표되는 예산의 실학적 유교주의가 예산지역주의의 미래일 순 없다. 이회창의 유교주의로 위장된 지역패권주의를 밝히고자 예산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김정희의 유교적 기준을 언급한 것일 뿐이다. 김정희의 역사적 성취가 아무리 높은 것이라 해도 그의 사상이 정약용에 이르지 못하고 동학에 이르지 못함은 역시 그의 한계이다. 조선후기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유배지에서 소외받은 지역 민중들과의 교류속에 새로운 타자로서의 민중을 발견함으로써 사상의 폭이 일취월장 했다면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동안 민중과의 교류가 완전히 차단된 채 스스로의 내면과 싸우면서 고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민중보다 청나라 연경의 선진서적이 더 가까웠다.주10) 따라서 실학이 개화사상으로 연결되는 노정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추사체에서 보여지듯 그 문화적 역량은 당대에서는 세계적 높이를 자랑하는 것임이 분명했지만 민중속에서 배우고 민중과 함께 개혁을 지향하던 호남유학 등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일제시기 박헌영 같은 사회주의자의 등장은 돌출도 이만저만한 돌출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박헌영 개인의 천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토대와 민중의 힘에 의해서 였다.주11) 유교이데올로기의 상황이 안동과 대동소이 했음에도 예산에서 갑오농민군이 기포할수 있었던 것은 유학이전에 내재되어있던 백제로부터의 미륵사상의 전통과 광대한 농지에 의한 농민세력의 성장, 가혹한 수탈구조가 그 원인이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철원, 나주와 더불어 일제가 식산은행을 짖고 그 부를 이용하여 제사공장을 지으면서 생겨난 대규모 노동계급의 존재와, 중부지방치고는 선진사상에 민감했던 학문적 전통이 박헌영의 역사적 출현 조건이었던 것이다.
[사진7 구 제사공장터]
그러나 박헌영과 이회창 조부가 같이 살았던 예산 신양리에서 이회창 집안의 묘소는 유명하지만 박헌영의 생가터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산은 새천년민주당+자민련정권과 한나라당이 충청권을 놓고 벌이는 일대 격전장이다. 잠시 동안의 진보의 희망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사회심리 앞에 예산의 지역주의는 관념의 진보가 아닌 현실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야한다. ‘모든권력을 소비에트에로’라고 외쳤던 박헌영의 사회주의 구호에 대신할 구호를 찾는다면 나는 예산지역주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모든 권력을 지역등권의 실현에로…
주1)안동에는 김대중이 직접 방문하여 지역개발을 공약으로 삼는 한나라당의 권오을 후보를 제압하기 위해 유교문화권개발 공약을 했다. 권정달 의원에게 힘이 실린 것은 당연하다. 유교문화권 개발 약속은 소외층을 향한 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똑같은 유교문화권 개발이라도 호남과 충청(옛 기호지방)의 상대적으로 발전되었던 유교문화권에 투자하는 공약은 없다.
주2)국민회의에서는 “용인시장선거도 우리의 승리 라기 보다는 한나라당의 패배”라고 말했다. 인지도가 거의 없는 구범희 후보를 공천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독선이 빚어낸 실책이라는 것이다.
주3) 지난봄 국민연금, 한일어업협정 파동 당시 개혁세력은 국민회의에서 이탈, 무당층으로 갔다가 다시 국민회의로 돌아오는 양상을 보였지만, 최근에는 일부가 한나라당으로 응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도 덧 붙였다.
주4 대중은 투쟁의 구호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투쟁을 지나치게 탄압하는 권력에(열사들의 죽음) 반항해서 움직이고, 합리적으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느껴질때(강경대열사 정국을 극 반전시킨 정원식 달결세례사건) 투쟁에서 이탈한다.
주5
한길리서치가 99년 10월2일과3일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에 대해 조사한 결과 국민회의 (27.2%) 한나라당(24.1%) 민주노동당(20.9%) 자민련(6.6%)무당층 (21.2%)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노총이 정권과의 투쟁을 선언하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에 기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노총은 민주당으로 갔다. 무당층의 표가 한나라당으로 가느냐 진보세력의 편으로 가느냐이다. 이에 민주노총의 합법화와 정치활동의 자유가 확보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주6 정운영의 100분 토론에서 최열총장과 박원순처장에게 방청석의 한 학생이 왜 명단에(당시엔 경실련의 명단이긴 했지만)권력핵심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는가 라고 묻자 전혀 엉뚱한 답변을 하다가 얼버무려지고 말았다.
주7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이데올로기 -그것은 대부분 허구적인 것이다-구조가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사회가 봉건성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사회임을 입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반(半)봉건성이란 자본주의적 성격과 봉건주의적 성격이 반반 섞여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봉건성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란 것을 의미한다.
주8 객관 관념론자인 주희의 학문적 업적은 서로 상반된 평가를 낳았는데 심지어 당시 한탁주 일파에 의해 위학 즉 거짓학문으로 규정되기도 했으며 그를 현인은 될지 몰라도 성인은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 유교의 일반적 견해이다. 구한말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인 창강 김택영은 주자가 그의 [주문공문집]의 초본을 버리지 않고 정본과 같이 전함으로서 후대가 혼란을 겪게 한 점을 들어 성인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다고 평한다.
주9 실제로 이씨 가문에서 처음 이사실을 발견한 이회운(60)씨는 불미한 일이라 생각해서 알릴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가 유교의 논리로는 어울리지 않고 부담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결국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며 이 사건은 이회창살리기에 매우 적절하게 활용되었다. 예산 사람들을 분개하게 하고 충청권에서 국민회의나 자민련을 궁지에 몰아세우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 그야말로 정략에 성공한 셈이다.
주10 그의 제자중 이상적은 연경을 오가며 스승을 위해 서적을 친히 구해다 주었고 그 유명한 세한도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고한당 강위 같은 이는 유배지까지 찾아와 김정희를 스승으로 삼고 당대 문인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일합방 당시 일본의 편에 서서 회담을 주선했던 인물이다.
주11 안동의 역사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이 없다. 대규모 농지의 부재에 의한 농민세력의 성장이 갖는 한계와 강력한 보수 유학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가 그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