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평화기행-파주2004/11/28
파주 – 참여를 통한 개혁, 저항을 통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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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따기와 꺼꾸리
아직도 재밌게 보는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 가운데에 한번은 ‘거꾸로 된 나라’ 얘기가 있었다. 모든게 거꾸로 된 이나라는 걸음도 발로 걸으면 안되고 물구나무서서 손으로 걸어야하고, 놀면 칭찬받고 공부 열심히하면 벌받는다. 이렇게 거꾸로 하지 않으면 경찰이나 군인에게 끌려가 거꾸로 사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교육은 거꾸로 사는데 완전히 적응될 때까지 계속된다. 폴은 얼토당토 않은 현실과 싸운다. 이런 조건에서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이 곧 투쟁이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폴의 투박하지만 정확한 은유법을 좋아한다.
삐따기는 저항적인 사람이고 꺼꾸리는 변혁적인 사람이다. 역사상 가장 큰 삐따기와 꺼꾸리는 부처와 예수였다. 부처는 깨달음을 통해 삐따기가 되는 길을 열어줬고 예수는 타협없는 투쟁을 통해 꺼꾸리가 되는 길을 보여줬다. 또 가장 많은 삐따기와 꺼꾸리를 만들어 낸것도 그들이다. 그렇게 된 것은 원래의 삐따기와 꺼꾸리 정신이 퇴색되어 관성화 될 때였다.
임진강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방촌 황희와 율곡 이이의 반구정과 화석정을 보았을 때 우리는 삐따기와 꺼꾸리가 되어 있었다. 반구정에서는 코앞을 가로막는 철조망에 대한 무력함 때문이었고, 화석정에서는 스스로를 감옥처럼 둘러싼 목책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다.
파주 문산
파주 문산은 바다물이 밀려 들어와 민물과 만나면서 먹을거리가 풍부할 뿐아니라 땅도 비옥하여 분단전까지는 상업과 교역이 융성했던 곳이다. 또한 중국과 통하는 길목으로 중국의 사신들이 여길 거쳐 서울과 중국을 통했다. 통일이 된다면 한강 하구의 델타를 형성하는 중심지의 하나로 통일의 길목이 아니라 동아시아로 통하는 길목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곡창지대는 수탈이 가혹하여 농민항쟁으로 분노가 표출되고, 양주와 같은 산간지방은 고립과 빈곤으로 화적의 형태를 띈 저항이 있어왔다. 그에 비해 파주 문산과 같은 상업지대는 합리주의적 사고와 점진적 개혁의 풍토가 형성되기 좋은 조건인바 방촌 황희 정승의 가문이 이곳에 형성되고, 이조 최대의 학맥인 율곡이이의 기호학파가 이곳으로부터 발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분단은 임진강을 중심으로 하는 파주의 영화를 모두 앗아가버리고 미군기지를 연결하는 도로축을 중심으로 도시의 구조가 바뀌었다. 파주 고령산 보광사는 신라부터의 고찰임에도 현재는 일주문 코앞까지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다. 미군기지 문화의 영향이다.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인 임진강과 이조 지성의 큰 산맥을 이룬 황희의 합리적 보수주의, 이이의 참여를 통한 개혁과, 민중불교스님들의 시범 사찰이된 보광사의 저항을 통한 참여와 변혁이 통일맞이 시대에 들어선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와 만나보자.
방촌영당과 반구정
개성에서 태어난 방촌 황희가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 황군서의 묘소가 임진강 건너 장단면 마근곡인 점과 태종과 세종밑에서 일하다가 귀양온 곳이 두 번 다 이곳이었던 점 때문이다.
반구정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들르는 곳은 반구정 버드나무 갈비집이다. 널직한 주차장 건너에 아담한 건물 몇 채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때 불탄 것을 황씨 가문에서 67년경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이중 방촌영당은 황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고, 영모재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반구정을 보기전에 방촌영당도 꼭보기를 권한다. 방촌영당의 솟을 삼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담장의 높이가 어른의 가슴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안을 충분히 들여다 볼수 있다. 솟을 삼문의 높이도 머리를 약간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이다. 원래 우리의 집짓기 문화가 문은 작게 건물은 크게 짓는 것이 상례지만 방촌영당의 전반적인 규모와 분위기는 황희의 검약한 청백리의 정신이 느껴질 만큼 작고 아담하다. 웅장한 건물이 보는 이의 주체를 압도하고 흔들어 이끌리게 한다면, 방촌영당의 인간적 규모는 외부로 부터가 아니라 인간 내부로부터 잔잔히 흔들리게 하는 미감을 가지고 있다. 자기를 낮춤으로서 상대와 평등해지려는 자세는 프랑스 혁명이 확인한 살롱문화의 평등정신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누구는 장난감 집 같다고 얘기할지 모르나 배려를 통해 상대의 가능성을 열어주려는 정신이야말로 합리성의 중요한 성취이다. 방촌영당이 원형을 제대로 복원한 것인지 왜곡된 것인지 나로선 확인할 길 없지만 현재의 모습자체로 건축이 인간에게 줄수 있는 소중한 감동을 전해주는 데는 미흡함이 없다. 더구나 다산초당을 다산와당으로 만들어버리고, 전봉준 생가를 드라마 세트장으로 만들어 버린 후손들의 몰지각에 비하면 방촌영당을 복원한 후손들은 세세한 흠을 차치하고라도 칭찬받을 만하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고 냉철하며, 이미 정해진 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청백리 정신은 황희의 시대에는 합리성의 다른 이름이었다. 혁명이 아닌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태종이 정통성을 찾기힘든 반동이라면 태종과 세종을 보좌하며 황희가 걸어간 길은 원칙적이고 현실적 처세에 능했던 점을 들어 합리적이라고 이름해도 될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도 판단키 힘든 민원을 합리적으로 해결했다든지, 명나라 사신의 횡포를 구체적 약점을 잡아 굴복시켰다든지 하는점 등에서 그렇다.
방촌영당의 맞은 편에는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언덕에 반구정이 서있다. 비둘기와 벗하여 논다는 의미에서 한명회의 압구정과 자주 비교되는 바로 그 반구정이다. 반구정 역시 황씨 종친회에서 3공화국 시절 중건한 곳이지만, 방촌영당을 지은 사람들이 지은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실망하게 된다. 서까래를 목재로 쓴 것 말고는 바닥부터 기둥까지 모두 콘크리트에 색을 칠한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중건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콘크리트를 좋아해서 고건축 복원에도 유행되었다는 관계자의 말에 오히려 씁쓸해진다. 황희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국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언뜻 스친다. 콘크리트 건축이 됐건 목건축이 됐건 이 아름다운 임진강 경치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리라.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다시 목건축으로 짓는다니 문제 삼을 필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반구정을 우리나라의 하나밖에 없는 정자로 만드는 것은 황희의 초야정신도 임진강의 절경도 아니다. 반구정 앞을 할퀴듯 지나가는 철조망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반구정이 아무래도 저 흉한 철조망을 걷어낼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황희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일화는 자기집의 두종의 싸움에 대해 두사람의 말이 다 옳다는 양찬론과 중용지도의 일화일 것이다. 그러나 중도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노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앞에 반듯하게 서는 것이며, 사람을 중심으로 진리의 가치를 밝히는 것이다.여자가 담배 배우는 것을 반대한다는 남자와, 남자 피우는걸 여자라고 못피우란 법이 어딨냐고 따지는 여자가 있다면 둘다 옳다고 너그럽게 넘어가면 해결될 문제인가? 남자로서만의 요구가 아닌, 여자로서만의 요구도 아닌, 공통의 이해 요구에 서서 보면 여자는 담배를 배우지 않는게 좋고, 남자는 담배를 빨리 끊는게 좋다. 중도는 관념의 도가 아니라 현실의 도이며, 사람의 드높은 요구를 중심으로 사소하고 대립적인 요구를 통일된 힘으로 이끌어내는 도이다. 양찬론은 양비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해관계를 교묘히 은폐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이다.
삐따기와 꺼꾸리의 눈으로 조심스럽게 보면 황희는 누구보다도 국가권력의 이해관계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가 충성한 국가는 과연 누구의 국가 였는가? 그의 시대까지 국가는 국민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권력투쟁과 권력 굳히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라면 과정이 어땠건 충성한다는 원칙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주의자였다. 삐따기와 꺼구리의 눈엔 과연 어떻게 보일까? 양찬론의 교술을 묵인하고 넘어가는것에 동의할 수 없듯이 반구정과 그 앞에 쳐진 철조망을 태연하게 묵인하고 저 멀리 임진강의 풍경만을 완상하는 것에 분노할 것이다.
화석정
화석정은 자운서원등과 함께 이조의 대학자 율곡 이이가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후학을 길러내며 사색에 몰두 했던 곳이다.
화석정은 임진나루가 있었던 강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여섯 살 이후로 고향인 이곳 율곡리에 와서 살았다. 중국의 지성 왕수인이 자기살던 동네인 양명을 호로 하여 양명학이라는 계보를 이루었듯이 이이 또한 자기 고향의 이름을 그대로 호로 썻다. 화석정 역시 불타버린 것을 파주유림들이 복원했고 1973년 정부가 정화했다. 이곳은 임진강이 크게 애돌아 가는 연유로 물살이 세고 건너편에는 넓고 비옥한 모래땅이 펼쳐진다. 반구정의 풍경이 편안하고 유장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화석정 풍경은 역동적이면서도 드넓은 느낌을 주는 모양에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평생 율곡이 자기의 독창적인 사상세계를 키웠을 사색의 공간에 서서 임진강을 바라보노라면 여덟살 때 쓴시 한구절이 생각난다.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구나 (江含萬里江)] 서양 지성에게 있어 근대까지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자문화는 숨막히듯 가깝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도록 해준다 이 거리가 있으므로 해서 사람은 누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제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을 보는법을 배운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제가 알아 서있고, [흘러가며 먼 강물은 하늘과 맞닿아 푸르듯(遠水連天碧)] 서로 연관되며 하나가 된다(理.通氣局)이는 보편적이고 기는 구체적일뿐 하나이다. 이이는 자연인으로서의 사람 또한 제각각 존귀한 주체이며 이들의 여론이 모아져 국론이 되고 그것이 국시가 된다는 사상에 이른다. 이이는 이조사상사에서 최초로 국민을 발견했다. 국가의 이념인 국시가 국론의 총화로서 만들어 질 수 있음을 보았으며 그러기 위해 조광조가 역설했던 언로의 개혁이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 조선은 이이에 이르러 국가 운영 프로그램을 갖게 되었다. 10만대군 양병설은 국가라는 규모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예언이었겠지만 국가를 한눈에 보게된 이이에게 있어서는 주장이었다. 일찍이 물결에서 만리에 머금은 바람을 볼줄알았던 이이를 이어받아 기호학파를 실지로 형성한 김장생이 가장 주력했던 것은 가례(집안예절) 문제였다. 가장 구체적인 문제에서 어떤 원칙과 변용이 가능한가를 해명하고자 했다. 율곡이이가 격몽요결이란 책을 써 어린아이들까지 계몽하려 했던 것은 가장 구체적인데서 가장 보편적인 사상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던 투철한 신념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이이의 개혁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철학은 본격적인 의미의 국가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으며 기호학파는 이후 성균관과 행정부의 요직을 맡아 국가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송시열, 정다산, 성호 이익 등 조선 사상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친다. 흔히 비교되는 이황이 현실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높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서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이고 보수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에 비해 이이는 국민의 현실적인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국가적 프로그램을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 점에서 자유주의적 개혁주의라 할수 있다.
그러나 화석정 마루에 걸터앉아 정자문화를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겐 없다. 지나가는 관광객을 위한 벤치가 있을 뿐이다.
정자마루의 중앙에 앉아 광각으로 펼쳐지는 임진강의 장대함을 받아안는 체험을 막기라도 하듯 목책이 쳐져 있다. 정자는 밖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보는 건축이다. 벤치와 정자의 엄청난 문화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자유주의의 분방한 정신은 후세에 와서 죽어버린 것이다. 화석정은 자유주의의 무덤처럼 정자가 아닌 사당이 되어 버렸다. 혹여 눈치껏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서 먼지 구더기의 마루에 앉아 임진강을 본다면 반구정의 철책보다 더 답답하고 숨막히는 목창살에 갇히고 말 것이다. 남에 의한 구속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한 구속. 자유주의에 한계는 여기에 있다. 처음엔 국민에 의한 국가와, 국론에 의한 국시를 주장했으나, 국민은 과연 누구까지인가? 확실한 것은 임꺽정같은 화적패를 국민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국가를 썪은 세상으로 보고 뒤집어 엎자는 위험한 생각을 국론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개혁은 이들 위험한 계급을 계몽하고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뒤늦게 격몽요결을 지은 것도 어려서부터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의를 형성하고자 한 것이었고 10만양병설도 외적의 침입과 함께 내부를 단속하기 위한 공권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근대국가 초기에 공통적인, 교육과 군대가 이이의 개혁프로그램의 핵심이었다. 김장생의 가례연구도 까다로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혹시 도둑질이나 극단적으로 제사를 안 지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융통성있게 변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만이 국민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남는 문제는 그런 동의를 얼마나 많은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끌어내느냐 였다. 문제가 있으면 언로를 개방할테니 참여해서 개혁하자고 제안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프로그램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갔고, 떨어져 나간 국민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해 갔다. 그리고 현재는 화석정의 목책처럼 정자 내부 말고는 모두 외부인이 되었다. 그 울타리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 갈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가? 그렇게 목책을 만든 사람들 조차도 들어갈 수가 없다. 화석정의 틀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는 주인도 없이 목책만 굳건히 사람의 접근을 막을 뿐이다. 주인없는 구조, 자유주의는 여기에서 자신의 위기를 본다.
고령산 보광사
보광사는 신라로부터 이어지는 고찰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보광사 팻말을 보고 올라가면서도 길을 잘못들었다는 생각에 제대로 가고 있는것인지 길을 한번은 물어봐야 할 만큼 유흥가가 코앞에 까지 미쳐 있다. 얼마전엔 러브호텔까지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일단 절입구에 들어서면 울창한 나무숲과 불국사 처럼 석축을 쌓아 웅장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천년고찰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웅보전의 벽화는 여느 절집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선 회칠한 흙벽을쓰지 않고 나무벽을 쓴점과 화려한 채색화가 아닌 수묵기법을 쓴점, 탱화보다는 민화에 가까운 내용과 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절이 민중의 생활과 오래전부터 호흡해온 전통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신라 진성여왕때 도선 국사가 창건하여 무학대사와 영조가 중창했으며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영정을 모신 어실각과 만세루 등이 있다. 현재는 원통전 관음전등 중창불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주도 하는 스님들은 80년대 운동권 스님들로 알려졌던 실천불교승가회 스님들이다. 주지스님은 실천불교승가회 회장이었던 효림스님이 맡고 있으며 불교자주화를 지휘하고 있다. 93년 조계종개혁 싸움의 승리로 불교는 가장 젊은 종교가 되었다. 80년대 수많은 단식과 저항운동의 성과로 조계종이라는 한국내 가장 큰 종교집단의 지도부로 진출하게 되었다. 민불련 활동등을 하다가 참여를 통한 개혁을 주장하며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스님과 재가 신도들이 중심이된 끝임없는 저항정신은 결국 관료화된 제도의 틀을 깨는데 성공했다. 참여냐 저항이냐를 논하던 단계는 지나가고 저항을 통해 주체적으로 확보한 참여의 공간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가 이 스님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이 스님들이 이것을 어떻게 풀어가는지 새로 중창한 원통전과 관음전의 벽화가 잘 얘기해 준다. 한 쪽면에는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만장을 휘날리며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벽화가 이전까지의 평면적인 구도를 파격적으로 깨고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낸것과 비교해보면 내용은 바뀌었지만 형식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려는 점진적 개혁의 자세라 하겠다.
이 절이 한 일중에 중요한 하나는 절에 들어올 때 누적되있던 어마어마한 적자를 투명하게 운영하고 공개 한 결과 수억의 흑자 구조로 돌려 놓은 것이다. 주지스님은 60만원의 박봉을 받을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절앞에 러브호텔을 사들여 교육원으로 쓸 계획이란다. 또한 영조 이래로 중단된 대규모 중창불사를 한다. 파주지역에서도 환경감시쎈타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남북동포 돕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리고 있다. 황희의 청백리정신과 이이의 개혁 프로그램을 법고 창신의 자세로 완벽히 소화하고 있는 밑바탕에는 저항을 통한 주체를 그 중심에 튼튼히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파주에서는 중소기업공단이 조성되고 관광단지개발등이 통일을 앞두고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파주에 불어 닥치고 있는 통일개발붐은 자칫 이이의 그것처럼 통일이 사람을 구속하고 결국에는 스스로도 결박되는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다. 국가나 기업집단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체가 될 때 통일국가는 이전과 다른 법고창신의 민족국가를 이룰 것이다. 기업의 이윤과 개발으로부터 출발하는 통일맞이와 북녘동포돕기를 통한 민족애로부터 출발하는 통일맞이는 현상은 비슷할 지언정 그 결과는 판이하다. 이이와 같은 개혁으로 끝날거라면 통일은 우리 눈앞에 오지 않는 것이 좋다.
진정한 법고창신은 참여를 통한 개혁이 아닌, 저항을 통한 참여의 길에 있음을 천년의 무게와 젊음의 역동성으로 충만한 보광사에서 배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