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기의 역사를 응시하던 눈빛.<추모글> 박용길 장로님에 대한 기억 한편
두 세기의 역사를 응시하던 눈빛
<추모글> 박용길 장로님에 대한 기억 한편
2011년 09월 26일 (월) 19:17:24 이시우 전문기자 ckkim@tongilnews.com
이시우 전문기자 (사진가, 평화운동가)
▲2002년 6월 중국 용정 옛집 자리에서 포즈를 취한 박용길 장로(맨 왼쪽)와 문 목사의 동생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내가 1944년에 결혼해서 시집살이 온 집이 바로 이집이지. 58년전 기차에서 내려 용정에서 마차를 타고 이집으로 들어가는데 목사님이 굉장히 좋아하시며 흥분하셨어.”
2002년 6월 박용길 장로님을 모시고 함께한 만주 용정여행 때였다. 박 장로님은 문익환 목사의 옛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서서 마치 가마를 타고 막 골목으로 들어서는 새색시처럼 상기된 얼굴로 함께한 가족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아주 잠시 이어진 침묵의 응시. 나는 골목길에서 보았던 박장로님의 그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장면은 여러 생각과 감상이 쌓이고 쌓여 나에겐 그저 단순히 시집가는 날의 풍경, 그 이상이 되었다.
소녀 박용길은 경기여학교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관동조선신학생회모임에서 청년 문익환을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문익환이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반년만 살아도 좋다. 이 남자와 결혼 못한다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버티며 집안을 설득했다. 박용길은 이 가엾은 청년과 결혼한 뒤 6개월 뒤에 죽으면 나머지는 평생 전도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천재가 사랑의 이름으로 실현됐다는 점에서 이 선택의 주도권은 청년 문익환의 몫이기 보다는 소녀 박용길의 몫이 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 고 문인환 목사의 생가를 찾아 중국 용정과 명동촌을 방문한 2002년 6월 당시의 박용길 장로와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두 사람의 열애는 결실을 맺어 1944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차대전의 전세가 기울고 식민시대가 마지막 정점에서 발악하던 시절, 전쟁 속에서 피어올린 꿈같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반년도 못살 거라던 문익환 목사의 예고된 운명은 결혼 후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났지만 보기좋게 빗나갔고 그 대신 만주에 들려온 소식은 제국주의 일본의 운명이었다. 사랑의 힘은 죽음을 넘어 승리했고, 세기의 폭력은 평화의지 앞에 좌절된 것이다.
해방 후인 46년 만주 피난민 수용소에서 난민을 돌보던 두 사람은 중국의 핍박으로 쫒겨나 가족과 난민을 데리고, 걷고 또 걸어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로,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로 이르는 대장정에 오른다.
따라서 박 장로님이 만주에서 생활한 시간은 채 2년 안팎이다. 박 장로님이 만주를 떠난 뒤 해방은 분단이 되었고, 분단은 전쟁이 되었으며, 전쟁은 독재를 낳았다. 일본제국의 심장에서 피워낸 사랑과 길지 않았던 만주에서의 생활은 단순히 일본에서 만주로의 거리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이후 만주와 일본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전략지대로서의 지정학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라시아극동의 전략지대인 만주로 이주하여 이러한 지정학의 숙명을 몸으로 체득한 ‘문씨네’ 집안과 함께 하게 된 박 장로의 운명 역시 이에 동화되고 일치되었다. 문영환은 만주에 정착했고 문동환은 미국에 정착했다. 문익환.박용길 부부의 장남 문호근, 삼남 문성근은 문익환의 길을 따랐지만 차남은 JP모건의 시카고 부사장이다. 가족들의 복잡해 보이는 이력은 극동유라시아의 지정학이 관통되던 만주라는 무대를 지우고서는 설명되기 힘들어 보인다.
시인 김형수가 “문익환의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었고 그는 늘 광활한 무대를 그리워했으며 좁은 칸막이 안에서 형성된 기득권을 타고 안주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표현은 어느 샌가 박 장로님에게도 발견되는 일치점이었다. 두 세기에 걸친 박 장로님의 인생 여정에는 한순간도 어김없이 작동된 유라시아지정학의 긴장이 겹쳐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우리 역사는 문익환이란 거목을 발견하지만 그 거목이 뿌리내리고 있던 대지와 수분과 바람을 놓칠 때가 많았다. 1989년 문목사가 평양방문을 결정하고도 주저하자 박 장로님은 “내 남편이 이렇게 우유부단한 줄 몰랐다”며 결단을 촉구한 대목은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문 목사님이 서거하고 그의 빈자리를 슬퍼하던 이들 앞에 박 장로님은 문 목사님의 자리가 비어 있지 않음을 홀연히 보여주었다. 1995년 6월 김일성 주석 사망 1주기를 맞아 평양방문을 결행한 것이다. 당시의 표현으로 하면 누구도 생각 못한 ‘적시타’였다. 박용길은 대지였을 뿐만 아니라 거목이기도 했던 것이다.
2011년 9월 25일 박용길 장로님의 부고가 전해졌다. 1944년 마차타고 시집오던 그 골목길에서 두 세기의 역사를 응시하던 박장로님의 눈빛을 떠올린다. 박 장로님의 서거와 함께 그 눈빛에 담겼던 시대도 함께 사라졌다. 누구를 위하여 조종을 울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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